대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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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방군은 204년경, 요동의 군벌 공손강이 낙랑군 남부 지역을 분할하여 설치한 군이다. 한반도 남부의 토착 세력을 통제하고 왜와 한을 대방에 속하게 하는 등 한반도 남반의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공손씨의 지배를 받다가 238년 위나라에 병합되었으며, 서진 시기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으로 쇠퇴하여 314년 고구려에 멸망했다. 대방군의 위치는 황해 일대로 추정되지만, 치소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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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위만조선 멸망 후 설치한 한나라의 군현으로, 주변 소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 대방군 | |
|---|---|
| 개요 | |
| 명칭 | 대방군 |
| 한자 표기 | 帶方郡 |
| 로마자 표기 | 문화관광부 2000년식: Daebang-gun 매큔-라이샤워식: Taepang-kun |
| 역사 | |
| 설치 시기 | 3세기 초 |
| 폐지 시기 | 314년 |
| 주요 사건 | 설치: 조위(曹魏)가 공손탁(公孫탁) 세력 약화 후 설치 사마의(司馬懿)의 공손연(公孫淵) 토벌: 238년 멸망: 고구려의 대방 정복 |
| 이전 | 공손탁(公孫탁)의 지배 |
| 이후 | 고구려의 대방 정복 |
| 지리 | |
| 위치 | 한사군의 일부 |
| 수도 | 대방현 |
| 정치 | |
| 정치 체제 | 군 |
| 국가 | 한나라 |
| 태수 | 낙랑태수 |
| 현재 국가 | |
| 현재 위치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 기타 | |
| 시대 | 원삼국시대 |
| 이전 행정 구역 | 낙랑군 |
| 이후 행정 구역 | 고구려 |
2. 역사
대방군은 본래 기원전 108년 설치된 진번군의 현이었으나, 기원전 82년 진번군 폐지 후 낙랑군 남부도위에 속했다.[9] 2세기 말 요동의 군벌 공손탁 세력 하에 들어갔으며, 그의 아들 공손강이 204년에서 220년 사이 한(韓)과 예(穢)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낙랑군 남부를 분할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이후 공손씨 일족이 지배하다가 238년 위나라 사마의에 의해 정복되어 위나라에 편입되었다.
대방군은 서진 왕조에게 계승되었으나, 4세기 초 팔왕의 난 등 서진의 혼란과 고구려, 백제의 압박 속에서 점차 약화되었다. 결국 313년 낙랑군이 고구려에 멸망한 데 이어, 314년 대방군 역시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멸망하였다.[4] 멸망 이후 대방군 지역은 고구려와 백제가 나누어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이후 요동 지역의 선비족 모용씨가 요서 대릉하 부근에 동명의 군을 설치하기도 했으나 430년 북위에 의해 폐지되었다.
2. 1. 설치 이전
대방은 원래 기원전 108년 한(漢)이 설치한 진번군 소속의 현(縣)이었다. 진번군은 15개 현을 관할했으나, 토착민들의 저항으로 인해 기원전 82년 폐지되었다. 이때 진번군 소속 15개 현 가운데 7개 현만 낙랑군에 편입되고 나머지 8개 현은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9] 낙랑군은 편입된 진번군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남부도위(南部都尉)를 설치하여 7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는데, 대방현은 이 남부도위의 중심지였다.2세기 말, 낙랑군 일대는 요동 지역 군벌 공손탁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공손탁의 뒤를 이은 공손강은 건안 연간(196년~220년)에 한(韓)과 예(穢) 세력이 강성해져 변경을 위협하자, 이를 견제할 목적으로 남부도위가 관할하던 7개 현을 낙랑군에서 분리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공손강은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삼한 지역으로 도망치는 중국 유민들을 막으려 했다.
이후 위나라가 건국되고, 명제는 238년 사마의를 보내 공손연을 토벌하면서 별도로 유흔(劉昕)과 선우사(鮮于嗣)를 파견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하였다. 서진 시대에 들어서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이 거세져 낙랑군과 대방군은 점차 약화되었다. 오호 십육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서진이 몰락하자 낙랑군과 대방군도 쇠퇴하였다. 결국 313년 낙랑군이 고구려에 정복되었고, 314년 대방군 역시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대방군이 있던 지역은 고구려와 백제가 나누어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요동 지역에 자리 잡았던 선비족 모용씨는 요서 대릉하 부근에 대방군(帶方郡)을 다시 설치하기도 했으나, 430년 북위에 의해 폐지되었다.
2. 2. 공손씨의 지배
2세기 말, 요동 지역의 군벌 공손탁이 세력을 키워 낙랑군 일대를 장악하였다. 그의 아들 공손강은 건안 연간(204년~220년 사이)에 한(韓)과 예(穢) 세력이 강성해져 변경을 위협하자, 이들을 견제하고 중국 본토에서 한반도로 넘어오는 유민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기존 낙랑군 남부 지역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새로 설치하였다.[9] 낙랑군 18개 현 가운데 남쪽 절반인 둔유현(현재의 황해북도 황주) 이남 지역을 나누어 대방군을 만들고, 공손모(公孫模)와 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이를 통해 공손씨는 한반도 남부의 한족과 예족, 그리고 왜까지 영향력 아래 두려는 체제를 구축하였다.[3] 공손강은 이후 조조에게 귀순하였고, 후한의 헌제로부터 좌장군·양평후에 임명되면서 대방군 역시 후한의 행정 구역으로 인정받았다.공손강이 죽은 후 아들 공손연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동생인 공손공이 뒤를 이었다. 공손공은 후한을 계승한 위나라의 문제(조비)로부터 차기장군·양평후에 봉해졌다. 그러나 태화 2년(228년), 성장한 공손연이 숙부 공손공의 자리를 빼앗고 위나라 명제(조예)로부터 양렬장군·요동태수로 임명받았다. 공손연은 조부나 부친보다 자립하려는 성향이 강하여, 위나라와 적대 관계였던 오나라의 손권과 손을 잡으려 하기도 했다. 결국 경초 원년(237년), 그는 위나라로부터 받은 대사마·낙랑공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켜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때 대방군과 낙랑군은 모두 공손연의 연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위나라 명제는 238년 사마의에게 4만 명의 군사를 주어 공손연을 토벌하게 했다. 사마의의 요동 정벌 과정에서 양평성이 오랫동안 포위된 끝에 함락되었고, 공손연과 그의 아들 공손수는 죽음을 맞이하였다.[2] 위나라는 사마의의 군대와 별도로 유흔(劉昕)과 선우사(鮮于嗣)를 낙랑군과 대방군에 파견하여 점령하였다. 이로써 요동, 낙랑, 대방 지역은 모두 위나라에 병합되었다. 공손씨가 대방군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시기에는 한반도 남부의 한(韓)과 왜(倭) 등으로부터 오는 조공을 공손씨가 직접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2. 3. 서진과 멸망
265년 위나라의 중신이었던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훗날 진 무제)이 위의 마지막 황제 조환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晉)을 건국했다. 대방군은 진나라에게 계승되었다. 서진 시대 대방군에 속했던 현은 다음과 같다(『진서』 「지리지」).| 현 이름 |
|---|
| 대방(帶方) |
| 열구(列口) |
| 남신(南新) |
| 장잠(長岑) |
| 제해(提奚) |
| 함자(含資) |
| 해명(海冥) |
그러나 서진 왕조의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300년 내부 분열인 팔왕의 난이 일어나면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로 인해 한반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시기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이 거세지면서 낙랑군과 대방군은 점차 쇠퇴하였다.
311년 서진의 수도 낙양이 흉노에게 함락되는 등 혼란이 극심해지자, 장통(張統)은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에서 서진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이후 314년 장통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요동 지역의 선비족 군벌인 모용외에게 귀부하였다.
결국 313년 고구려의 미천왕이 낙랑군을 정복하였고, 이듬해인 314년에는 대방군마저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였다.[4] 이로써 한나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사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한 이후, 이 지역의 한족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고구려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4] 이후 대방군이 있던 지역은 고구려와 백제가 나누어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이후 요동 지역에 자리 잡았던 선비족 모용씨가 요서 대릉하 부근에 대방군(帶方郡)을 다시 설치하기도 했으나, 이 역시 430년 북위에 의해 폐지되었다.
2. 4. 이후
314년 고구려에 의해 대방군이 멸망한 이후, 해당 지역은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다.한편, 요동 지역에 자리 잡았던 선비족 모용씨(慕容氏)는 요서 대릉하 부근에 대방군(帶方郡)을 다시 설치하기도 했으나, 이 군은 430년 북위(北魏)에 의해 폐지되었다.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한 이후, 한반도 정사(正史)에서는 한인(漢人)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일부 기록에서는 이 시기 한인들이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4] 또한, 고구려 정복 이후 요동과 옛 낙랑군, 대방군 지역에서는 한족(漢族)의 문화적 흔적, 특히 한족식 묘제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4] 이후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넘어 현재의 베이징과 톈진에 해당하는 유주 지역까지 진출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4]
3. 위치
2세기 말 요동의 군벌 공손탁 세력 하에 있었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대방군의 초기 치소는 요동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후 한반도로 옮겨와 황해 연안 일대에 자리 잡았으며, 중심지는 대방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방현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특히 치소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남부 설과 황해도 설 등이 대표적이며, 이는 ''위지왜인전''에 언급된 야마타이국으로 가는 경로 문제와도 연관되어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5]. 중국 기록인 ''진서''에 따르면 대방군은 총 7개의 현을 관할하였다.
3. 1. 치소의 위치
2세기 말 요동 일대의 군벌 공손탁 세력에 속했던 것으로 보아, 대방군의 초기 치소는 요동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황해 연안 지역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며, 수도는 대방현이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며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중국의 공식 역사서인 ''진서''에 따르면 대방군은 다음 7개의 현(縣)을 관할했다.- 대방(帶方)
- 열구(列口)
- 남신(南新)
- 장잠(長岑)
- 제해(提奚)
- 함자(含資)
- 해명(海冥)
낙랑군 치소는 현재의 평양직할시 외곽, 대동강 건너편 낙랑토성(평양시 낙랑구역 토성동)에 있었다는 점이 고고학적 발굴(관인 '낙랑태수장' 봉니 등)을 통해 확인되었다. 반면, 대방군 치소의 위치는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하여 현대의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여러 설이 나뉜다[5]. 특히 ''위지왜인전''에서 야마타이국으로 가는 출발점으로 기록되어 있어, 야마타이국 위치 논쟁과 맞물려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 남방설 ===
현재의 경기도 남부 지역에 치소가 있었다는 설이다.
; 서울특별시 설
: 현재의 서울특별시 일대에 대방군 치소가 있었다는 설이다(세키노 타다시, 오다 쇼고, 시라사키 쇼이치로, 사카타 타카시, 에가미 나미오 등). ''한서'' 지리지에는 전한 시대 낙랑군 25현 중 하나로 대방현이 기록되어 있으며,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흘러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책에 대동강을 가리키는 '열수(列水)'가 명확히 존재하므로, '대수'를 대동강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한반도 중부를 서류하는 큰 강인 한강을 '대수'로 보고, 그 하구 지역인 서울을 대방군 치소로 비정하는 것이 이 설의 주요 논거이다. 문헌 해석에 기반한 가장 고전적인 설이다.
; 경기도 광주시 설
: 서울 동남쪽 약 40km 지점의 광주를 대방군 치소로 보는 설이다(오카다 히데히코 등). 서울설과 마찬가지로 ''한서'' 지리지의 '대수' 기록에 근거한다. 한강 본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나뉘는데, '대수'를 남한강으로 해석하면 광주를 치소로 볼 수 있다. 광주는 백제의 첫 도읍지인 위례성의 유력한 후보지 중 하나이며, 고대 읍성이 해안에서 약간 내륙으로 들어간 구릉지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서울보다 적합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남방설(서울설, 광주설)은 초기에는 광주에 있던 대방군 치소가 서울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 백제가 성장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어 반드시 대립하는 설은 아니다. 그러나 서울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 관련 유적 발굴에도 불구하고, 대방군 치소임을 입증할 만한 명확한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 북방설 ===
현재의 황해도 지역에 치소가 있었다는 설이다. 고고학적 발견에 무게를 둔다.
; 황해북도 봉산군 설
: 평양 남쪽 약 50km 지점인 황해북도 봉산군의 당토성(일명 사리원토성)을 대방군 치소로 비정하는 설이다(나카 미치요, 시라토리 구라키치, 에노키 가즈오, 이마니시 류, 이노우에 미쓰사다, 이노우에 히데오, 토리고에 겐자부로 등). 이곳에서는 낙랑 유적과 동시대의 기와, 벽돌 등이 출토되었으며, 1912년 부근 고분군에서 '대방태수 장무이' 명문이 새겨진 전곽묘가 발견되는 등 고고학적 근거가 비교적 풍부하다.
; 황해남도 안악군 설
: 평양 남서쪽 약 60km 지점인 황해남도 안악군 일대를 치소로 보는 설이다. 대동강 하구에 위치하여 중국 요동반도나 산둥반도와의 해상 교역에 유리한 지리적 이점을 가진다.
북방설 역시 봉산군과 안악군 중 어느 한 곳이거나, 혹은 치소가 이동했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 반드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방설은 낙랑군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군을 분리한 의미가 퇴색된다는 비판과,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 방사천리(方四千里)쯤 된다"는 기록과 지리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지적된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 중국, 일본 학계에서는 여전히 남방설을 지지하는 견해도 많다.
3. 2. 영역
대방군은 황해 일대에 위치했으며, 수도는 대방현이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며 아직 명확히 해결되지 않았다. 중국의 공식 역사서인 ''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대방군은 다음 7개의 현(縣)을 관할했다.
| 현 이름 | 한자 |
|---|---|
| 대방 | 帶方 |
| 열구 | 列口 |
| 남신 | 南新 |
| 장잠 | 長岑 |
| 제해 | 提奚 |
| 함자 | 含資 |
| 해명 | 海冥 |
대방군 치소의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황해북도 봉산군 설과 황해남도 안악군 설이 있으며, 두 설 모두 고고학적 발견에 근거하고 있다. 이 두 설은 군 치소가 시대에 따라 이동했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반드시 서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 황해북도 봉산군 설: 평양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황해북도 봉산군 사리원 근처의 당토성을 대방군 치소로 보는 견해이다. 나카 미치요, 시라토리 구라키치, 이마니시 류, 이노우에 히데오 등 여러 학자가 지지했다. 이곳에서는 낙랑군 유적과 같은 시기의 기와, 벽돌 등이 출토되었고, 1912년에는 인근 고분군에서 "대방태수 장무이" 명문이 새겨진 전곽묘가 발견되는 등 고고학적 증거가 많다.
- 황해남도 안악군 설: 평양 남서쪽 60km 지점인 황해남도 안악군에 치소가 있었다는 설이다. 이곳은 대동강 하구의 만을 통제하는 위치이며, 중국 요동반도 및 산둥반도와 가까워 해상 교통의 요지라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들 북방설(봉산군 설, 안악군 설)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된다. 첫째, 황해도 지역은 낙랑군과 너무 가까워 두 개의 군으로 나눌 실익이 적다는 비판이 있다. 둘째, 『위지 동이전』에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으며…사방 사천 리쯤 된다"는 기록이 있는데, 북방설을 따를 경우 한반도 남부의 영역이 사방 4,000리의 정사각형이 아니라 남북으로 길쭉한 직사각형이 되어 기록과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방군 치소를 더 남쪽으로 보는 남방설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한국, 중국, 일본에 다수 존재한다.
한편, 북방설의 고고학적 근거가 반드시 치소의 위치를 확정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대방군의 영역이 최소한 안악군이나 봉산군까지 미쳤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봉산군, 안악군, 신천군 등 재령강 유역 일대에 타지에서 유입된 이주민이나 망명자를 포함한 중국계 주민 사회가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는 해당 지역에 전곽묘와 같은 중국계 유적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주목받고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오카다 히데히코는 만약 군 치소가 남방설처럼 서울이나 광주에 있었다면 대방군의 영역이 지나치게 길쭉해지는 점을 지적하며, 대방군이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경기도에 이르는 교역로를 따라 회랑(corridor) 형태로 7개 현이 늘어서 있었다고 추정했다. 이는 과거 한나라 시대의 현도군이 '현도 회랑'이라 불리며 길게 형성되었던 것과 유사한 형태이다. 오카다 히데히코는 이 '대방 회랑'의 북쪽 끝을 안악군으로 보았으며, 봉산군은 대방군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위지 동이전』에는 "공손강이 둔유현 이남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둔유현이 처음에는 대방군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진서』 지리지의 대방군 7현 목록에는 둔유현이 없고 낙랑군 소속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둔유현이 낙랑군과 대방군의 경계 지역에 위치했으며, 처음에는 대방군에 속했다가 나중에 낙랑군으로 이관되었음을 보여준다.
4. 북대방·남대방
『삼국유사』에 따르면 대방군에는 남쪽과 북쪽, 두 개의 군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기록된 위치는 북대방이 남쪽(전라남도 나주시), 남대방이 북쪽(전라북도 남원시)에 위치하여 서로 반대이다. 남대방은 원래의 대방군 기준으로 남쪽에 위치한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북대방은 어느 기준에서 '북쪽'이라고 불렸는지 명확하지 않다. 『삼국유사』 기록 과정에서 남북이 뒤바뀌어 잘못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6]
- '''북대방'''
: 전한이 낙랑군과 함께 기원전 108년에 설치한 군으로, 그 중심지(군치)는 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시 지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한사군(낙랑·현도·임둔·진번)은 실제로는 다섯 개의 군, 즉 '한오군'이었을 수 있다. 이후 기원전 82년경 독립하여 '대방국'을 자칭했으나, 37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는 설이 있다.[7]
- '''남대방'''
: 위나라(220년 - 265년) 시대에 현재의 전라북도 남원시 지역에 군치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 주장이 맞다면, 위나라가 요동의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키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지한 238년 이후 어느 시점에, 일시적으로 대방군을 한반도 남쪽으로 크게 이동시켰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한 조치는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매우 짧은 기간 동안의 현상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246년경 위나라가 마한의 반란을 진압했던 사건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8]
참조
[1]
서적
中国史
山川出版社
1998-06-01
[1]
서적
世界の歴史〈7〉大唐帝国
河出書房新社
1989-09-01
[2]
문서
晋書』地理志上
[3]
문서
三国志』魏書東夷伝韓条
[4]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Yonsei University Press
1972
[5]
서적
古代朝鮮との交易と文物交流
中央公論社
1986-04-01
[6]
문서
実際には北帯方にせよ南帯方にせよ前後漢魏晋の時代に存在したことはない。
[7]
서적
三国遺事考証〈上〉
塙書房
1975-01-01
[8]
서적
三国遺事考証〈上〉
塙書房
1975-01-01
[9]
웹사이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http://10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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