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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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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미국과 중화민국 간에 체결되어 1955년 발효된 군사 동맹 조약이다. 이 조약은 냉전 시기 중화인민공화국의 대만 침공을 억제하고, 미국의 동아시아 봉쇄 정책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조약은 대만과 펑후 제도 방위에만 적용되었으며, 1970년대 미중 관계 변화와 1979년 미중 수교로 인해 1980년 폐지되었고, 이후 대만 관계법으로 그 일부가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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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
조약 정보
이름미국과 중화민국 간의 상호 방위 조약
원어 이름영어: 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Republic of China
중국어 번체: 中華民國與美利堅合眾國間共同防禦條約
중국어 간체: 中美共同防御条约
일본어: アメリカ合衆国と中華民国との間の相互防衛条約
종류방위 조약, 군사 동맹 조약
서명일1954년 12월 2일
서명 장소워싱턴 D.C.
발효일1955년 3월 3일
종료일1979년 12월 31일 (1980년 1월 1일)
인용6 U.S.T. 433; T.I.A.S. No. 3178
당사국
서명국
시각 자료
1960년 6월 [[타이베이시|타이베이]]를 방문한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아이젠하워]]와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1960년 6월 타이베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는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2. 역사적 배경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1950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대만에 대한 불개입 성명을 발표했지만,[6]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대만 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하여 중화민국에 대한 지원을 재개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냉전 하에서 공산주의 확대를 억제하고 대만을 서방 방위권에 포함시키고자 했다.

1953년 한국 전쟁과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휴전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군사력을 "대만 해방"에 집중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만에서는 도미노 이론의 현실화가 우려되었다. 이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대만의 공산화를 막고자 했다.

대만이 공산화될 경우, 중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을 맺은 소련이 태평양으로 진출하여 알류샨 열도-일본-대한민국-오키나와-필리핀-동남아시아로 이어지는 대소련 봉쇄 전략이 무너질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대만에 거점을 둔 중화민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항하고자 했다.

1971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 연합의 대표권을 획득하고 중화민국이 탈퇴하면서 국제 정치 환경이 변화했다.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같은 해 9월 중일 국교 정상화, 1979년 1월 미중 수교로 인해 이 조약은 무효화되었고, 미국은 대만 방위 사령부(en)와 군사 고문단을 폐지하고 대만에 주둔한 미국군을 철수시켰다. 중화민국과의 국교 단절 후, 1979년 4월에 사실상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대만 관계법이 제정되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핑퐁 외교 등으로 대만을 배신하고, 당시 미국의 적성국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을 전격 방문했다.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인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 조약이 발효되면서 대만과의 상호방위조약은 일방적으로 폐지되었고, 주대만미군 3만 명이 철수하고 주대만 미국 대사관도 폐쇄되었다.

다음은 주요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한 표이다.

사건날짜
닉슨 독트린 발표1969년 7월 25일
제7보병사단 (미국) 한국서 철수, 주한미군 2만 명 일방 철수1971년 4월 2일
제1군단 (미국) 한국서 철수1971년 4월 3일
핑퐁외교1971년 4월 6일
리처드 닉슨 중국 베이징 전격 방문1972년 2월 21일
미중 수교 조약 발효1979년 1월 1일
주대만미군 3만 명 전원 철수1979년


2. 1. 냉전과 미국의 봉쇄 정책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냉전이 심화되었다.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동아시아에서 봉쇄 정책을 추진했다. 중화민국국공 내전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정부를 이전했지만, 미국은 대만을 공산주의에 대한 중요한 방어선으로 간주했다.[1]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1950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대만에 대한 불개입 성명을 발표했지만,[6]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대만 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하여 중화민국에 대한 지원을 재개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냉전 하에서 공산주의 확대를 억제하고 대만을 서방 방위권에 포함시키고자 했다.

1953년 한국 전쟁과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휴전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군사력을 "대만 해방"에 집중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만에서는 도미노 이론의 현실화가 우려되었다. 이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대만의 공산화를 막고자 했다.

대만이 공산화될 경우, 중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을 맺은 소련이 태평양으로 진출하여 알류샨 열도-일본-대한민국-오키나와-필리핀-동남아시아로 이어지는 대소련 봉쇄 전략이 무너질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대만에 거점을 둔 중화민국과 군사 동맹을 맺고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항하고자 했다.

2. 2.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양자주의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 간의 전 세계적인 냉전 대립 속에서, 미국은 NATO와 함께 유럽에서 했던 것처럼 동아시아에서 동맹과 조약에 대한 다자주의적 접근 방식을 취하는 대신, 아시아 동맹국(필리핀, 중화민국, 일본, 대한민국)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체제 (허브 앤 스포크 시스템)로 알려진 양자적 접근 방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아시아의 정치 상황은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까지 다양했기 때문에, 공유된 가치에서 비롯된 다자간 관계의 기반을 찾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아시아 국가들은 서유럽이 소련으로부터 직면했던 것과는 달리 단일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고 인식되지 않았다. 따라서 양자주의적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더 이로운 것으로 여겨졌다.[1]

2. 3. 조약 체결과 발효

냉전 시기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립 속에서, 미국중화민국 간의 상호 방위 조약은 중국 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본토에서 타이완 섬을 침략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NATO를 통해 유럽에서 동맹 및 조약에 대한 다자주의적 접근 방식을 취했던 것과는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체제 또는 허브 앤 스포크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양자적 접근 방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필리핀, 중화민국, 일본, 대한민국과의 관계에 적용되었다. 당시 아시아 국가들은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까지 다양한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어, 공유된 가치를 기반으로 한 다자간 관계를 구축하기 어려웠다. 또한, 서유럽이 소련이라는 단일한 위협에 직면했던 것과 달리, 아시아 국가들은 단일한 위협을 인식하지 못했다. 따라서 양자주의적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되었다.[1]

조약은 1954년 12월 2일 워싱턴 D.C.에서 서명되었고,[2] 1955년 3월 3일에 발효되었다.[3]

이 조약은 1970년대 초까지 중화민국이 중국 본토 전체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주장을 뒷받침했다. 냉전 기간 동안, 이 조약은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이 공산주의 확산에 맞서 대한민국일본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봉쇄 정책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3. 조약의 내용 및 의무

미국 대만 방위 사령부(USTDC, 1955–1979)의 휘장


MAAG, 대만(1951–1979)의 휘장


조약은 10개의 주요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한 국가가 공격받을 경우 다른 국가가 지원하고 군사적 지원을 제공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이 조약은 타이완 섬과 펑후 제도 방위에만 적용되었고, 진먼과 마쭈 열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3. 1. 주요 내용

조약은 10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조약 내용은 한 국가가 공격받을 경우 다른 국가가 지원하고 군사적 지원을 제공한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조약은 타이완 섬과 펑후 제도 방위에만 적용되었다. 진먼과 마쭈 열도는 조약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미국은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 동안 관망했다. 또한, 조약은 중화민국이 중국 본토에 대한 군사 행동을 시작하는 것을 막았다. 타이완과 펑후 제도만 포함되었고, 일방적인 군사 행동은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상원 외교 위원회는 1955년 2월 8일에 발행된 보고서에서 "현 조약의 발효는 포모사(Formosa)와 펑후 제도의 기존 법적 지위를 변경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위원는 조약의 이 측면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보고서에 다음 진술을 포함했다.

''조약의 어떤 내용도 그것이 적용되는 영토의 법적 지위나 주권에 영향을 미치거나 수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3. 2. 적용 범위

조약은 타이완 섬과 펑후 제도 방위에만 적용되도록 제한되었다. 진먼과 마쭈 열도는 이 조약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미국은 제2차 타이완 해협 위기 동안 관망했다. 또한, 조약은 중화민국이 중국 본토에 대한 군사 행동을 시작하는 것을 막았는데, 타이완과 펑후 제도만 포함되었고 일방적인 군사 행동은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상원의 관점에서, 1955년 2월 8일에 미국 상원 외교 위원회에서 발행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현 조약의 발효는 포모사(Formosa)와 펑후 제도의 기존 법적 지위를 변경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위원회의 견해입니다."

조약의 이 측면에 대한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해, 위원회는 보고서에 다음 진술을 포함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결정했다.

''조약의 어떤 내용도 그것이 적용되는 영토의 법적 지위나 주권에 영향을 미치거나 수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상원의 이해입니다.''

3. 3. 미 상원의 견해

미국 상원은 조약 비준과 함께, 1955년 2월 8일 미국 상원 외교 위원회에서 발행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현 조약의 발효는 포모사(타이완 섬)와 펑후 제도의 기존 법적 지위를 변경하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조약의 이 측면에 대한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해, 위원회는 이 보고서에 다음 진술을 포함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결정했다.

''조약의 어떤 내용도 그것이 적용되는 영토의 법적 지위나 주권에 영향을 미치거나 수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상원의 이해입니다.''

4. 조약의 영향

1945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국공 내전에서 패배하여 중국 대륙에서 쫓겨났지만, 대만으로 정부 기능을 이전하여 "대륙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대립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937년 중일 전쟁에서 국민당 정부를 지원했던 미국은 국공 내전 재개 후 지원을 중단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도 트루먼 정권은 대만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6],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제7함대를 파견하여 중화민국에 대한 지원을 사실상 재개했다.

1953년 한국 전쟁,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휴전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만 해방"에 군사력을 집중할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도미노 이론의 현실화가 우려되었다. 이에 아이젠하워 정권은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대만이 공산화될 경우, 소련태평양 진출이 가능해져 미국의 봉쇄 전략이 무력화될 우려가 있었다. 미국은 중화민국과 군사 동맹을 구축하고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1971년 알바니아 결의로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 연합 대표권을 획득하고 중화민국이 탈퇴하면서 조약은 점차 무력화되었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1979년 중일 국교 정상화 및 미중 수교로 조약은 무효화되었고, 미국은 대만 방위 사령부(영어)와 군사 고문단을 폐지하고 대만에 주둔한 미국군을 철수시켰다. 중화민국과의 국교 단절 후에는 대만 관계법을 제정하여 사실상의 동맹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4. 1. 중화민국의 본토 반격 좌절

미국과 소련 간의 관계가 완화되었고, 미국은 "타이완 반공대륙"을 지지하지 않았다. 중화민국 국군은 소규모 반격을 계속했지만, 패배가 더 많고 승리가 더 적었다. 그 결과, 국군은 세 번의 주요 기회(1958년 대약진 운동, 1962년 중국-인도 국경 분쟁, 1966년 문화 대혁명)를 놓쳤고, 이는 중화민국 정부의 본토 반격 희망을 완전히 꺾어버렸다.[1]

4. 2. 대만 해협 분단 고착화

이 조약은 중국 공산당의 대만 공격을 억제하고, 대만 해협 양안의 장기적인 분단 상황을 확립했다. 미국군은 대만에 주둔하여 군사적 안보를 구축함으로써 대만의 발전을 보장하고 대만의 위기를 평화로 전환시켰다.[1]

4. 3.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 체제 구축

냉전 시기 미국중화민국 간의 상호 방위 조약은 중국 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잠재적 침략으로부터 타이완 섬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1]

미국은 유럽에서 NATO를 통한 다자주의적 접근 대신, 아시아에서는 샌프란시스코 체제(허브 앤 스포크 시스템)로 알려진 양자적 접근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아시아 국가들이 민주주의에서 권위주의까지 다양한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어 공유된 가치에 기반한 다자 관계 형성이 어려웠고, 서유럽과 달리 단일한 위협에 직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

이 조약은 서태평양 전체의 안보에 기여했다. 미국은 대만을 거점으로 하여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막고, 알류샨 열도-일본-대한민국-오키나와-필리핀-동남아시아로 이어지는 봉쇄 정책을 구축했다.

5. 조약의 종료

1979년 1월 1일, 미국중화인민공화국이 미중 수교 조약을 통해 수교하면서,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은 1년 후인 1980년 1월 1일에 종료되었다. 조약 제10조에 따라 어느 한쪽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통보한 후 1년이 지나면 조약을 종료할 수 있었다.[2] 지미 카터 대통령의 조약 일방적 무효화는 '골드워터 대 카터' 사건의 주제가 되었으나, 법원은 관할권 문제를 이유로 이 조치의 적법성에 대한 판결을 거부했다.[2]

5. 1. 국제 정세 변화

1971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 연합의 대표권을 획득하고 중화민국이 국제 연합을 탈퇴하면서 국제 정치 환경이 변화하였고, 이는 조약의 무력화로 이어졌다.[6]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같은 해 9월 중일 국교 정상화 역시 조약 종료에 영향을 미쳤다.[6]

5. 2. 미중 수교와 조약 폐지

1979년 1월 1일, 미국중화인민공화국이 미중 수교 조약을 통해 수교하면서,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은 1년 후인 1980년 1월 1일에 종료되었다. 조약 제10조에 따라 어느 한쪽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통보한 후 1년이 지나면 조약을 종료할 수 있었다.[2] 지미 카터 대통령의 조약 일방적 무효화는 '골드워터 대 카터' 사건의 주제가 되었으나, 법원은 관할권 문제를 이유로 이 조치의 적법성에 대한 판결을 거부했다.[2]

1972년 미국 공화당 소속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핑퐁 외교 등을 통해 당시 미국의 적성국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을 전격 방문했다.[1]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 조약이 발효되면서, 대만과의 상호방위조약은 일방적으로 폐지되었으며, 주대만미군 3만 명이 철수하고, 주대만 미국 대사관도 폐쇄되었다.[1] 현재는 그 내용의 일부를 대만관계법에 넣어 시행 중이다.[1]

6. 대만 관계법

1979년 미중 수교 조약이 발효되면서 미국은 대만과의 상호방위조약을 폐지했다. 그러나 그 내용의 일부는 대만관계법에 포함되어 시행되고 있다.[5]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 직후, 미국 의회는 대만관계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조약 내용의 일부를 유지했지만, 침략 시 대만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지원을 약속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5] 1979년 4월, 미국은 중화민국과의 국교 단절 후 사실상 동맹 관계를 지속하는 대만관계법을 제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7. 한국의 관점과 닉슨 독트린

1969년 7월 25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발표한 닉슨 독트린[1]은 미국의 대외 정책 변화를 예고했다. 이는 1971년 4월 2일 제7보병사단 (미국)의 한국 철수와 주한미군 2만 명 감축[1], 4월 3일 제1군단 (미국)의 한국 철수[1]로 이어졌다.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 노력과 맞물려 1971년 4월 6일 핑퐁 외교[1], 1972년 2월 21일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1]으로 나타났다. 결국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 조약이 발효[1]되면서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은 폐지되었고, 주 대만 미군이 철수했다.[1]

7. 1. 핑퐁 외교와 미중 수교

1972년, 미국 공화당 소속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핑퐁 외교 등을 통해 당시 미국의 적성국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을 전격 방문했다.[1]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이던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 조약이 발효되었다.[1] 이에 따라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은 일방적으로 폐지되었으며, 주 대만 미군 3만 명이 철수하고, 주 대만 미국 대사관도 폐쇄되었다.[1]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날짜사건
1969년 7월 25일닉슨 독트린 발표[1]
1971년 4월 2일제7보병사단 (미국) 한국서 철수, 주한미군 6만 3천명 중에서 2만 명 일방 철수[1]
1971년 4월 3일제1군단 (미국) 한국서 철수[1]
1971년 4월 6일핑퐁 외교[1]
1972년 2월 21일리처드 닉슨 중국 베이징 전격 방문[1]
1979년 1월 1일미중 수교 조약 발효[1]
1979년주 대만 미군 3만 명 전원 철수[1]


참조

[1] 논문 Powerplay: Origins of the U.S. Alliance in Asia 2010
[2] 간행물 American foreign policy. 1950–1955 basic documents. http://hdl.handle.ne[...] U.S. Govt. Print. Off.
[3] 웹사이트 Avalon Project - 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Republic of China; December 2, 1954 http://avalon.law.ya[...] 2017-07-14
[4] 뉴스 Appendix 17—Report on Mutual Defense Treaty with the Republic of China, U.S. Senate, Committee on Foreign Relations (1955) https://api.parliame[...]
[5] 웹사이트 American Institute in Taiwan – Taiwan Relations Act http://www.ait.org.t[...] 2012-08-10
[6] 웹사이트 First and Second Taiwan Strait Crisis, Quemoy and Matsu Islands of Taiwan http://www.coldwar.o[...] The Cold War Museum 201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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