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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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군 위안부는 주한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를 한 한국 여성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한국 전쟁 중에는 한국군 위안부와 함께 운영되었으며, 1990년대 초까지는 미군 위안부와 일본군 위안부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미군정 시기부터 기지촌이 형성되었고, 1960~80년대에는 인신매매를 통해 미성년자들이 유입되어 인권 유린이 심각했다. 1990년대 이후 외국인 여성들이 미군 위안부로 유입되었으며, 2000년대에는 관련 사건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2014년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미군 위안부'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과 이들을 다룬 여러 문화 작품이 존재한다.

미군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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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

1990년대 초까지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라는 단어는 일본군 위안부뿐만 아니라 한국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 모두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90년대 초까지 주한미군과 매춘을 하는 기지촌 여성들에 대해 공식 명칭으로 (군) 위안부라는 말을 사용했다. 당시에는 정부뿐만 아니라 시, 군 공무원들도 한국 남성과 성매매를 하는 윤락 여성과 구분해 그들을 '위안부'라고 불렀다.

민간에서는 '양공주', '양색시', '양갈보', '유엔 마담', '산업의 역군'이라는 말로 불렸다. '양공주'(양공주한국어)는 '서양 공주'로 번역되기도 하며, 기지촌의 매춘부들을 지칭하는 흔한 이름이었다. 또한 혼혈 커플, 특히 백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의 관계를 지칭할 때 경멸적인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들은 '애국자', '민간 외교관',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 '달러벌이 역군'이라고도 불렸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은 미국을 기반으로 한 연합군에 참여했기 때문에 한국에 설치된 위안소 및 위안부(특수 위안대)는 한국군뿐만 아니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도 이용했다. 대한민국 육군 본부가 1956년에 편찬한 공문서 『후방전사(인사편)』에는 "고정식 위안소 - 특수 위안대"라고 적혀 있으며, 한국 전쟁 중에는 "특수 위안대", 또는 "제5종 보급품"이라고도 불렸다.

한국 전쟁 이후에는 "미군 위안부"(미군은 미국군을 의미), "유엔군 상대 위안부"(UN군 상대 위안부)라고 불렸다. 그 외에 "정신대" 혹은 국군 정신대라고도 불렸다.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위안부"라는 말은 주로 미군·유엔군 위안부를 가리켰으며, 일본군 위안부는 거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에 한일 문제가 커지면서 "위안부"라는 말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사용되게 되었고, 반면에 미군·유엔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1966년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문에 따르면, 위안부란 "일반적으로 일상 용어에서, 매춘 행위를 하고 있는 여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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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의 "위안부" 관련 기사 수
연도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사 수미군·유엔군 위안부 관련 기사 수
1951-551건17건
1956-600건36건
1961-650건56건
1966-701건118건
1971-755건39건
1976-800건20건
1981-854건9건
1986-905건8건
1991-95616건3건


오늘날 한국에서 위안부라는 말이 국가에 강제로 동원된 여성을 뜻하는 말로 쓰여 기지촌 여성을 위안부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지 논쟁이 있다. '미군 위안부' 단어 사용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민간에 의한 인신매매와 국가의 관리가 있었을 뿐이라며 기지촌 여성을 미군 위안부로 지칭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3. 역사

1945년부터 미군과 대한민국 정부는 공창 제도를 허용했다. 주한 미군은 "매춘부 고용은 우리 군의 핵심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명시했지만, 실제로는 한국 사회에서 매춘을 "필요악"으로 여겼다. 미군은 매춘을 미군 병사들의 스트레스 해소와 동성애 성향 예방을 위한 군사 문화로 설명했다.

한국 전쟁 이후 극심한 빈곤과 혼란 속에서 많은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성매매에 의존하게 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미군 기지 근처에서 일하는 매춘부 중 상당수는 한국 남성만을 상대하기도 했다.

한국 매춘부의 수에 대한 추정치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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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출처매춘부 수
1953년대한민국 정부 보고서35만 명
1953년대한민국 정부 통계17,349명
1955년~1966년이영훈 교수 연구26,000명~39,000명
1954년한국 정부(보건사회복지부)10,000~30,000명
1966년약 20,000명
1969년13,000~14,000명
1977년9,935명


미군을 상대하는 한국 매춘부의 평균 연령은 27세였고, 평균 근속 연수는 3년이었다. 하루 평균 성관계 횟수는 1.7회로 한국인 상대(5.51회)보다 적었지만, 월평균 수입은 11,423원으로 한국인 상대(3,455원)의 3배 이상이었다. 당시 제조업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남성이 3,800원, 여성이 약 2,500원이었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은 매춘을 필요악으로 여겼다. 1960년대에는 미군을 위한 엿보기 쇼나 스트립 클럽과 같은 오락 시설이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이승우 내무부 차관은 국회에 정부가 미군을 위한 "매춘부 공급"을 개선했다고 답변했다.

박정희 (왼쪽)가 5.16 군사 정변 이후 가이 S. 멜로이 육군 대장과 악수한다.
박정희 (왼쪽)가 5.16 군사 정변 이후 가이 S. 멜로이 육군 대장과 악수한다.


박정희는 5.16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후, 매춘 방지법(기지촌 제외)과 관광 진흥법(기지촌 특별 관광 지구 지정)을 시행했다. 1960년대 매춘 관련 사업은 대한민국 GNP의 거의 25%를 차지했다. 매춘부들은 정부 지원을 받아 영어와 예절 교육을 받았고, "달러를 버는 애국자"로 칭찬받았다.

1971년, 닉슨 독트린으로 미군 병력이 감소하자, 한국인들은 북한의 위협과 경제적 영향에 대해 우려했다. 나의 자매의 집은 1991년에 미군이 한국 경제에 1를 기여했다고 밝혔다. (한국 GNP의 1%)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명한 기지촌 정화 정책.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명한 기지촌 정화 정책.


1971년 12월 22일, 박정희는 기지촌 정화 운동을 시행했다. 미군 관계자는 한국 정부에 캠프 타운이 성병의 온상이며 인종 차별이 만연한 곳이라고 조언했다.

;정책 연혁
* 1947년 11월 14일: 공창제 폐지
* 1961년 11월 9일: 윤락행위 등 방지법 제정
* 1962년 6월: 미군 기지 인근 104개소를 특정(윤락) 지역으로 지정하고 매춘 단속 제외
* 1971년 12월 22일: 정부 주도로 기지촌 정화 위원회 발족

3.1. 미군정 시기 (1945-1948)

광복 후 38선 이남 구 일본군 주둔지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구 일본군 주둔지 주위 기지촌 또한 지속됐다. 기지 주변에는 주한 미군을 상대로 하는 소매업과 유흥업이 성행했고,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 또한 번창했다. 당시 미군은 일제 강점기에 제정된 접객 여성 등록 검진 규정을 유지했고, 공창 및 사창 폐지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전후 한국과 함께 미군이 주둔한 일본에서는 일본 정부 차원에서 미군 위안부를 모집했다. 이는 애국심이 높은 일본 여성들에게 본인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여 다른 일본인 여성들의 정조를 지키자는 목적으로 시행된 모집이었다. 모집은 도쿄에서만 여성 1,360명이 몰렸다. 이후 사창가는 30여 곳으로 확대됐다. 일본인 미군 위안부 중에는 하룻밤에 미군 47명을 상대한 여성도 있었다. 미군의 상대를 한 일본 여성은 사무직도 포함하면 55,000명에 달했다.

1945년 9월 2일부터 일제강점기에서 연합군 군정기로 전환되었다. 재조선 미국 육군 사령부 군정청은 1946년 2월 14일, 남조선(현 대한민국)에서 공창제를 폐지했다. 1947년 11월에는 공창제가 폐지되었지만, 1948년에 미군은 공창제 폐지로 인해 성병이 만연했다고 주장하며, 창녀의 성병 검사는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

미국 군정은 매춘을 용인하고 규제하는 동안, 여성 단체들은 매춘 폐지를 주장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1947년 공창 폐지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공인 매춘을 폐지했지만, 사창의 확산을 증가시켰다. 매춘부의 재활 및 복지 지원은 새로운 법의 일부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정책 입안자들은 이러한 프로그램에 대한 국가 자금 지원을 거부했다.

공창 폐지법을 통해, 미 군정은 공창 시설을 군 기지 인근의 기지촌으로 대체했다. 이는 매춘부와 미군에게 공공의 공간을 제공했다.

3.2. 한국 전쟁과 특수 위안대 (1950-1953)

1948년 공창 폐지령 시행으로 한국에서는 공창제가 폐지됐고 성매매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1951년 한국 정부는 한국 전쟁 와중에 한국군 위안부를 운영했다. 이 한국군 위안부는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과 유엔군 장병들이 이용했다. 이 여성들은 특수 위안대, 제5종 보급품 등으로도 불렸다. 차규헌 육군 대장채명신 육군 중장은 이때의 위안부 운영 사실을 증언했으며, 1956년대한민국 육군본부가 작성한 책 '후방 전사'에도 한국군 위안부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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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은 1951년부터 1954년까지 "특수 위안대"라는 이름으로 고정식 또는 이동식 위안부 제도를 도입하여 운영했다. 이는 대한민국 육군 본부가 1956년에 편찬한 공식 기록인 『후방전사(後方戰史)』의 인사편과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뒷받침된다.

한국군은 위안부를 "특수 위안대"라고 명명하고, 위안소를 설치하여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위안부 제도를 만들었다. 특수 위안대 설치 이유는 병사의 사기 앙양, 성범죄 예방이었으며, 이는 일본군 위안부와 동일했다. 이 계획은 육군 본부 휼병감실에서 진행했으며, 1950년 7월에는 한국 정부가 군 작전 지휘권을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에 양도하여 최종 승인은 연합군이 했다고 한다.

위안부는 한국군과 함께 미군도 이용했다.

대한민국 육군본부가 1956년에 편찬한 공문서 『후방전사(인사편)』에 따르면, 1952년 4개 소대에 한정된 사례에서만 89명의 위안부가 204,560회의 행위를 강요당했다.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 휴전과 함께 각 위안소는 1954년 3월에 폐쇄되었다.

3.3. 기지촌 여성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군 위안부의 상당수는 인신매매를 통해 끌려온 미성년자들이었다. 이들에게 행해진 인권유린은 매우 참혹했다. 인신매매 피해자 중 한 명이 기지촌을 탈출해 경찰에 도움을 청했지만, 경찰이 해당 여성을 다시 포주에게 데려간 사건도 있었다.

1992년 윤금이 피살 사건을 비롯하여 미군 병사에 의한 성범죄 및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1999년 1월에도 미군 위안부 여성이 살해된 사건이 있었는데, 대한민국 법원은 경찰의 용의자 신체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했고, 이후 용의자로 추정된 미국 병사들이 출국함으로써 수사는 미궁에 빠졌다.

1961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락행위 등 방지법을 제정했지만, 모순적으로 성매매를 허용하는 특수 지구를 설치했고, 이 중 상당수는 미군 기지 인근이었다. 1960년대 기지촌 성매매 수입은 한국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미군 위안부는 한국 경제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71년 제3공화국은 기지촌 정화위원회를 구성하여 기지촌 활성화 정책을 폈다.

1971년 안정리 사건: 흑인 미군들이 클럽 내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난동을 부린 사건. 미군 헌병과 한국 경찰은 이를 진압했고, 캠프 험프리스에 안정리 주민 수천 명이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한국 전쟁 이후 극심한 빈곤과 혼란으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성매매에 의존하게 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 매춘부의 60%가 미군 기지 근처에서 일했지만, 이들 중 다수는 한국 남성만을 상대했다.

다음은 한국 매춘부의 수에 대한 추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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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출처매춘부 수
1953년대한민국 정부 보고서35만 명
1953년대한민국 정부 통계17,349명
1955년~1966년이영훈 교수 연구26,000명~39,000명
1954년한국 정부(보건사회복지부)10,000~30,000명
1966년약 20,000명
1969년13,000~14,000명
1977년9,935명


대한민국 제2공화국은 매춘을 필요악으로 여겼다. 1960년대부터는 미군에게 엿보기 쇼나 스트립 클럽과 같은 오락을 제공하기 위한 공식적인 조직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이승우 내무부 차관은 국회에 정부가 미군을 위한 "매춘부 공급"을 개선했다고 답변했다.

박정희는 5.16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후, 매춘 방지법(기지촌 제외)과 관광 진흥법(기지촌 특별 관광 지구 지정)을 시행했다. 1960년대 매춘 관련 사업은 대한민국 GNP의 거의 25%를 차지했다. 매춘부들은 영어와 예절 교육을 정부 지원을 받으며 수강했고, "달러를 버는 애국자"로 칭찬받았다.

1971년, 닉슨 독트린으로 미군 병력이 감소하자, 한국인들은 북한의 위협과 경제적 영향에 대해 더 두려워했다. 나의 자매의 집이라는 옹호 단체는 1991년에 미군이 한국 경제에 1를 기여했다고 썼다. (한국 GNP의 1%)

1971년 12월 22일, 박정희는 기지촌 정화 운동(BCCUC)을 시행했다. 미군 관계자는 한국 정부에 캠프 타운이 성병의 온상이며 인종 차별이 만연한 곳이라고 조언했다. BCCUC의 목표는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주한 미군에 대한 호의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미군과 한국인 매춘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종종 버려졌다. 1970년대까지 수만 명의 아이들이 한국 여성과 미국 군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아이들은 "양공주 새끼", "깜둥이" 등으로 불리며 차별받았다.

1960년대 한국에서는 기지촌 관련 산업이 국민총생산의 25%를 차지했으며, 그중 절반이 성 산업에 관련된 것이었다고 한다 1962년 한국의 시세는 기지촌 관련 풍속 영업의 쇼트 타임이 2USD, 롱 타임이 5USD였다고 한다

1971년 8월, 오치성 내무부 장관이 각 경찰서에 보건 당국과 협력하여 위안부의 성병 예방책을 강구하고 교양을 강화하도록 명령했다.
전두환 정권(1980년 - 1988년) 시대에는 전두환 대통령에 의한 기지촌 정화 캠페인이 실시되면서 매춘부와 미군과의 관계 발전을 목표로 에티켓 강의가 이루어졌고 빈번하게 약물 치료가 시행되었다.

3.3.1. 몽키 하우스

1972년 주한미군 1,000명당 성병 발생 건수는 692건이었다. 대한민국은 성병에 걸린 미군이 자신의 상대방으로 지목한 여성을 찾는 접촉자 추적조사를 하였고, 지목된 여성들을 '몽키 하우스'라고 불리는 낙검자 수용소에 보냈다. 미군과 한국 정부는 수용소에서 여성들의 성병 검사를 했는데, 이때 성병에 걸린 여성들은 성병이 완치될 때까지 일반 의료 행위보다 과도한 페니실린을 투입받았다. 이로 인해 생긴 페니실린 쇼크로 사망하는 여성들도 상당했다. 하지만 의료 사고를 낸 의사들을 불기소 처분하겠다는 공문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실제 처벌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13년 11월 6일, 대한민국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장 유승희 민주당 의원의 국정감사에서 국가가 여성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작성한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위안부는 성병 의심을 받으면 한국 경찰에 의해 몽키 하우스(멍키 하우스)라고 불리는 창문에 쇠창살이 쳐진 시설에 지프나 트럭에 실려 구금되어 강제로 약을 완치될 때까지 복용해야 했다. 또한, 성병에 걸린 여성들은 완치될 때까지 강제로 구치소에 격리되었다고 주한 미군의 성병 보고에 기록되어 있다.

3.4. 외국 여성

1990년대 이후, 한국 여성 대신 인신매매필리핀, 러시아 등의 외국 여성이 주한 미군을 상대하게 되었다. 1990년대 중순까지 외국 여성은 기지 주위 클럽 여성의 80%에서 85%를 차지했다. 2005년에는 기지촌 매춘부의 90%가 러시아 여성과 필리핀 여성이었다. 2000년대에는 오산공군기지 근처 위안소, 술집에 감금되어 있던 외국 여성들이 화재로 사망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현재 매춘부의 90%는 동남아시아 출신이다.

이들은 '주스걸'이라고도 불리며, '주스바'에서 일하면서 매춘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스를 많이 팔지 못하면 주스바 주인에게 매춘을 강요당했다. 매춘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군 병사와 결혼하는 것뿐이었다.

2005년 5월 20일, 클럽을 상대로 한 재판에서 승소한 필리핀 여성은 필리핀에서 한국 기업의 가수로 고용되었지만, 한국에 오자마자 감금되어 미군 상대 매춘을 강요당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법원은 클럽 주인에게 집행유예와 사회봉사를 부과했다.

2010년 미국 국무부는 미군 기지 부근에서 가혹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을 인신매매 사례로 보고했다. 필리핀 대사관은 필리핀 여성에게 매춘을 강요하는 를 감시하는 '워치리스트'를 작성했다. 필리핀 정부는 여성들이 주한미군 기지 근처 주스바에서 일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주한미군은 주스바에서 비싼 음료를 주문하는 것은 현대 노예제인신매매 산업에 가담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4. 성매매 피해 진상규명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김광진 의원이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진상규명 및 지원을 위한 '성매매 피해 진상규명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했다. 이는 2014년 6월 25일, 미군 위안부 122명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성폭행, 감금, 매춘 강요, 인신매매, 마약 투여, 강제 낙태, 공무원 유착 부정 등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데 따른 것이다.

2014년 7월 22일, 박근혜 정부의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은 이 문제에 대해 사실관계가 명확히 밝혀진 후에 입장을 표명하겠다고 밝혔다.

5. 미군 위안부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

1990년대 초까지 한국 사회에서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뿐만 아니라 한국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 모두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대한민국 정부도 90년대 초까지 주한미군과 성매매를 하는 미군 기지촌 여성들을 공식적으로 (군) 위안부라고 불렀다. 당시 정부, 시, 군 공무원들은 한국 남성과 성매매를 하는 윤락 여성과 구분하여 기지촌 여성들을 '위안부'라고 칭했다. 이들은 '애국자', '민간 외교관',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 '달러벌이 역군'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민간에서는 '양공주', '양색시', '양갈보', '유엔 마담', '산업의 역군'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위안부'라는 단어는 국가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여성을 의미하는 일본군 위안부를 주로 지칭하게 되면서, 기지촌 여성을 '미군 위안부'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다. '미군 위안부'라는 용어 사용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민간에 의한 인신매매와 국가의 관리가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주둔 미군을 상대하는 매춘부들은 "술집 여자", "특별 연예인", "한국 군 위안부", "위안부", "호스티스", "사업가" 등 다양한 용어로 불렸다. 양공주(양공주한국어)는 "서양 공주"로 번역되기도 하며, 기지촌의 매춘부들을 지칭하는 흔한 이름이었다. 양갈보(양갈보한국어), 서양 갈보, 유엔군 마담(유엔마담한국어)도 흔히 사용된 명칭이다.

1990년대 초까지 "위안부"(위안부한국어)라는 용어는 한국 언론과 관계자들이 미군을 상대로 하는 매춘부들을 지칭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으나, 2013년 이후 일부 한국 언론에서는 "미군 위안부"(미군 위안부한국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1990년대 초, 일본군 위안부를 대표하는 운동과 기지촌 여성을 대표하는 운동으로 여성 인권 운동이 분리되었다. 양쪽 모두 강제 노동 피해자였지만, 일본군 위안부 지지자들은 기지촌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매춘에 참여했다고 믿었다.

동아일보의 "위안부" 관련 기사 수를 보면, 1990년대 이전에는 미군·유엔군 위안부 관련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1991년 이후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사가 급증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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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의 "위안부" 관련 기사 수
연도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사 수미군·유엔군 위안부 관련 기사 수
1951-551건17건
1956-600건36건
1961-650건56건
1966-701건118건
1971-755건39건
1976-800건20건
1981-854건9건
1986-905건8건
1991-95616건3건

6. 문화 속의 여성들

*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 (1958)는 한국 여성 매춘부를 묘사한 영화이다.
* 이범선의 《오발탄》 (1959)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매춘부가 된 여성을 묘사한다.
*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1979)
* 《맨하탄 1번지》 (1997)
* 권정생의 《몽실언니》 (2001)
* 노라 옥자 켈러의 《여우소녀》 (2008)
* 《일곱집매》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