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자르오르미
1. 개요
바자르오르미는 원나라 말기 윈난 지역을 다스린 양왕으로, 쿠빌라이 칸의 후손이다. 그는 윈난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명나라에 저항했으나, 1381년 명나라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1382년, 패배 소식을 접한 바자르오르미는 자결했고, 그의 가문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명사》는 바자르오르미를 원나라에 충성한 인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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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난성 출신 -
베네딕트 앤더슨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주의 연구에 큰 영향을 준 아일랜드계 영국인 학자이자 저술가로, 그의 저서 『상상된 공동체』에서 제시한 '상상된 공동체' 개념은 민족주의를 인쇄 자본주의와 연결하여 분석하며 널리 인용되고, 동남아시아 정치와 문화를 연구하며 반제국주의적 시각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바탕으로 저술 활동을 했다. -
윈난성 출신 -
녜얼
중국 윈난성 쿤밍 출신 작곡가 녜얼은 짧은 생애 동안 항일 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을 반영한 가곡과 영화 음악을 작곡했으며,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작곡하여 중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
쿤밍시 출신 -
베네딕트 앤더슨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주의 연구에 큰 영향을 준 아일랜드계 영국인 학자이자 저술가로, 그의 저서 『상상된 공동체』에서 제시한 '상상된 공동체' 개념은 민족주의를 인쇄 자본주의와 연결하여 분석하며 널리 인용되고, 동남아시아 정치와 문화를 연구하며 반제국주의적 시각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바탕으로 저술 활동을 했다. -
쿤밍시 출신 -
녜얼
중국 윈난성 쿤밍 출신 작곡가 녜얼은 짧은 생애 동안 항일 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을 반영한 가곡과 영화 음악을 작곡했으며,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인 "의용군행진곡"을 작곡하여 중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
1382년 사망 -
염제신
염제신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원나라 관료 생활 후 고려로 돌아와 기철 일파 숙청과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워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공민왕의 후궁 신비 염씨의 아버지로서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
1382년 사망 -
효자고황후 (명나라)
효자고황후는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의 황후로서, 홍건적의 난에서 주원장과 혼인하여 명나라 건국에 기여했으며, 검소하고 현명하게 내조하며 정치에도 관여하다 1382년에 사망한 후 효자황후로 추존되었다.
2. 생애
바자르오르미는 쿠빌라이 칸의 아들이자 그의 고조부인 후게치(忽哥赤) 이래로 대대로 윈난과 구이저우 일부 지역을 다스리며 세습 작위인 양왕(梁王)의 칭호를 물려받았다. 그는 원 말기의 혼란한 시기에도 자신이 다스리던 윈난 지역을 잘 안정시켜 민심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원 순제 지정 23년(1363년), 군벌 명옥진(明玉珍)이 쓰촨(蜀)에서 군대를 일으켜 윈난을 공격해오자, 바자르오르미는 금마산(金馬山)으로 피신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듬해인 지정 24년(1364년), 그는 다리(大理)의 군사를 동원하여 명옥진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1368년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고 원나라가 대도(大都)를 잃고 북쪽으로 밀려나자, 바자르오르미는 쿤밍(昆明)을 거점으로 삼아 명나라에 저항하는 원나라의 주요 잔존 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해마다 먼 변방에서 황제(원 순제) 계신 곳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신하로써의 절개 지키기를 순제께서 북쪽으로 가시기 전과 같이 할 것이다"라고 맹세하며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이어갔다. 비록 북원과의 직접적인 연결은 제한적이었으나, 아이유시리다라 칸이 사신을 보내 그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등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다.
한편, 바자르오르미는 대리국 왕 돤궁(段功)에게 자신의 딸인 보르지긴 공주 아가이(阿蓋)를 시집보내 혼인 관계를 맺었다. 이들 사이에서는 아들 돤센그누(段僧奴)와 딸(돤창나 또는 돤바오)이 태어났다. 그러나 이후 바자르오르미가 돤궁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돤센그누는 동생 돤바오를 길러 아버지의 복수를 하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명나라 홍무제는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바자르오르미는 이를 거부하고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결국 홍무 14년(1381년), 홍무제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윈난 정벌에 나섰고, 바자르오르미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1382년 1월 6일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 남은 가족들은 고려로 보내져 제주도(탐라)에 유배되었다. 훗날 《명사》(明史)에서는 바자르오르미를 코코 테무르 등과 함께 열전에 올려, 기울어가는 원나라에 충성을 다한 인물로 평가했다.
2.1. 원나라 멸망 이후
1368년 원나라가 대도를 잃고 북쪽으로 밀려나자, 윈난과 구이저우 일대를 다스리던 양왕(梁王) 바자르오르미는 곤명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저항하는 주요 세력 중 하나로 남았다. 그는 원나라가 멸망하기 전부터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양왕 작위를 가지고 해당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원 말기의 혼란 속에서도 그는 통치 지역을 잘 다스려 민심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원 순제가 북쪽으로 쫓겨간 후, 바자르오르미는 "해마다 먼 변방에서 황제(원 순제) 계신 곳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신하로써의 절개 지키기를 순제께서 북쪽으로 가시기 전과 같이 할 것이다"라고 맹세하며 명 조정에 대한 저항 의지를 분명히 했다. 비록 북원과의 연결은 제한적이었으나, 아이유시리다라 칸이 사신을 보내 바자르오르미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등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다.
명나라 홍무제는 처음에는 원격지 정복의 어려움을 고려하여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다. 홍무 5년(1372년) 명 조정은 한림원 대제 왕위(王禕)를 사신으로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바자르오르미는 그를 참수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에도 명나라는 홍무 7년(1374년)과 8년(1375년)에 사신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지만, 바자르오르미는 이를 모두 거부했다.
결국 홍무 14년(1381년) 8월, 홍무제는 윈난이 역사적으로 중국 영토임을 내세우며 정남장군(征南將軍) 부우덕(傅友德)과 장수 남옥(藍玉), 목영(沐英) 등에게 30만 대군을 이끌고 윈난 정벌을 명했다. 바자르오르미는 사도평장(司徒平章) 타리마(達里麻)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취징(曲靖)에서 맞서게 했으나, 수적으로 열세였던 양왕의 군대는 명나라 군대에 패배했다.
홍무 14년 12월 22일(1382년 1월 6일), 타리마가 전사하고 군대가 완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바자르오르미는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입던 옷(용의)을 불태우고, 처자식을 뎬츠호(滇池)에 빠뜨린 뒤, 좌승(左丞) 타르치(達的), 우승(右丞) 루가야(驢兒夜, 롤) 등과 함께 보녕주(普寧州) 홀납채(忽納寨)의 초가집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 그의 부인도 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며, 그를 따르던 문무백관 다수도 함께 순절하였다.
바자르오르미 사후, 그의 남은 가족들은 명나라에 의해 난징으로 압송되었다가(1382년 5월 4일), 같은 해 7월 고려로 보내져 제주도(탐라)에 유배되었다. 이는 《고려사》와 《명실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는 공양왕 4년(1392년)에도 그의 자손인 아얀테무르(愛顔帖木兒) 등 4명을 추가로 제주도에 안치시켰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이들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쌀, 콩, 옷감 등을 지급받는 등 일정한 대우를 받았다. 후에 《명사》에서는 바자르오르미를 코코 테무르 등과 함께 열전에 올려, 기울어가는 원나라에 충성을 다한 인물로 평가했다.
2.2. 명나라의 윈난 정벌과 최후
원 조정이 1368년 명에 의해 대도를 잃고 북쪽으로 쫓겨가자, 바자르오르미는 쿤밍(昆明)을 중심으로 명 조정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다. 그는 "해마다 먼 변방에서 황제(원 순제) 계신 곳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신하로써의 절개 지키기를 순제께서 북쪽으로 가시기 전과 같이 할 것이다"라고 맹세하며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홍무 5년(1372년) 명 조정은 사신 왕위(王偉)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바자르오르미는 이를 거부하고 1374년 왕위를 참수했다. 이후 명나라는 홍무 7년(1374년)과 홍무 8년(1375년)에도 사신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지만, 바자르오르미는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이에 홍무제는 홍무 14년(1381년) 정남장군(征南將軍) 부우덕(傅友德)과 남옥(藍玉), 목영(沐英) 등에게 총 30만 대군을 이끌고 윈난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명군은 마화(馬華)가 이끄는 부대가 구이양(貴陽)에서, 부우덕, 남옥, 목영이 이끄는 주력 부대가 백석강(白石江) 방면에서 양쪽으로 진격했다.
바자르오르미는 장군 타리마(達里麻)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취징(曲靖)을 중심으로 방어에 나섰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명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취징 전투에서 타리마가 이끄는 군대는 크게 패배했다.
홍무 14년 12월 22일(양력 1382년 1월 6일), 타리마가 전사하고 군대가 완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바자르오르미는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이 입던 용포를 불태우고, 부인은 연못(뎬츠)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바자르오르미 자신은 좌승(左丞) 타르치(達的), 우승(右丞) 루가야(驢兒夜) 등 남은 신하들과 함께 인근의 초가집으로 피신하여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그를 따르던 다른 문무백관들 역시 자결을 택했다.
바자르오르미 사후, 그의 남은 가족과 원 위순왕(威順王)의 가속 등 300여 명은 명나라 군대에 의해 난징으로 압송되었다. 《고려사》(高麗史) 및 《명실록》(明實錄)에 따르면, 우왕 8년(1382년) 7월(음력 4월 5일), 명 조정은 이들을 고려로 보내 탐라(오늘날의 제주도)에 안치(유배)시켰다. 공양왕 4년(1392년)에는 바자르오르미의 자손인 아얀테무르(愛顔帖木兒) 등 4명도 추가로 제주도에 보내졌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제주에 거주하던 양왕의 후손들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정기적으로 식량과 옷감을 지급받는 등 일정한 대우를 받았다. 훗날 《명사》(明史)에서는 바자르오르미를 코코 테무르 등과 함께 열전에 올려, 기울어가는 원나라에 충성을 다한 인물로 평가했다.
2.3. 제주도와의 관계
《고려사》(高麗史) 및 《명실록》(明實錄)에 따르면, 명나라가 운남을 평정한 해인 고려 우왕(禑王) 8년(1382년) 7월, 명은 바자르오르미가 사망한 후 남은 가족과 원 위순왕(威順王)의 태자 바이바이(佰伯)의 가족을 수도 난징으로 압송했다가 다시 고려로 보내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당시 제주도는 탐라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고려 공양왕 4년(1392년)에는 명나라가 양왕 바자르오르미의 자손인 아얀테무르(愛顔帖木兒) 등 4명을 추가로 제주도에 안치시켰다. 조선 왕조가 개국한 뒤에도 제주에 거주하던 양왕의 가족들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쌀과 콩 1백 곡, 저포와 마포 열 필 등을 지급받는 등 우대를 받았다.
3. 이름의 어원
바자르오르미의 이름에서 '바자르'는 범어 Vajrasan(금강저, 천둥벼락, 전지전능한 힘)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오르미' 또한 범어 vaarman/varmansan(~에게 보호받는 자)일 것으로 보인다.
4. 가계
바자르오르미의 출신에 관해서는 사서에 "후게치의 자손이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후게치에서 바자르오르미에 이르는 정확한 계보는 불명확하다. 그는 쿠빌라이 칸의 아들인 후게치로부터 물려받은 세습 작위인 량왕(Prince of Liang) 작위를 지녔다. 추정되는 계보는 다음과 같다.
* 세첸 칸(세조 쿠빌라이)
운남왕 후게치 (Hügeči)
* 영왕 에센 테무르 (Esen Temür)
토곤 부카 태자 (Toγan Buqa몽골어)
투글루크 태자 (Bolot Buqa)
볼로트 (Bolot)
* 양왕 바자르오르미 (Vaǰravarmi)
대리국 왕인 돤궁(段功)은 량왕 바자르오르미의 딸인 보르지긴 씨 아가이(阿盖) 공주와 결혼했다. 그들은 아들 돤센그누(段僧奴)와 딸을 두었다. 이들의 자녀는 돤창나(段羌奴)와 돤바오(段寶)라고도 불렸다. 전승에 따르면, 바자르오르미가 사위인 돤궁을 살해하자, 아들 돤센그누는 여동생 돤바오를 길러 아버지의 복수를 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들을 바탕으로 연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편, 돤씨 가문은 원래 한족 출신으로, 간쑤성 우웨이군 출신이라는 기록이 원나라 문서에 남아 있다. 다른 돤씨 가문들도 우웨이 출신이었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김용의 소설 《녹정기》(鹿鼎記)에 바자르오르미가 등장한다. 이 소설은 바자르오르미의 패배 원인을 독특하게 묘사하는데, 그가 버마(현 미얀마)에서 얻은 수백 마리의 전투 코끼리 부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명나라 장군 마화는 코끼리가 쥐를 무서워한다는 널리 퍼진 신화를 이용하여 수천 마리의 쥐를 풀어놓았고, 이로 인해 코끼리 부대가 공포에 질려 무력화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소설 속 바자르오르미는 역사 기록 속 충성스럽고 절개 있는 모습과 달리, 무능하고 술을 좋아하며 뚱뚱하고 겁 많은 인물로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