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언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언적은 1491년에 태어나 1553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그는 영남학파의 창시자로, 주자학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학문 체계를 구축했다. 이언적은 무극태극 논쟁에 참여하여 이기론의 이우위설을 주장했으며, 수신과 덕치를 강조하는 정치 철학을 펼쳤다. 중종과 명종 대에 걸쳐 관료로 활동하며, 을사사화 당시 사림을 옹호하려 노력했으나,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기도 했다. 그는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아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동방오현, 동국18현에 추앙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여강 이씨 - 이한구 (정치인)
    대한민국의 4선 국회의원 출신 정치인 이한구는 재무부, 대우경제연구소, 한나라당, 새누리당에서 활동하며 요직을 거쳤으나,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 이후 제명되었다.
  • 여강 이씨 - 이미경 (1950년)
    여성운동가 출신 정치인 이미경은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와 5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한국국제협력단 이사장을 역임하고 현재 대한민국헌정회 부회장과 더불어민주당 일반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 사림파 - 허적
    조선 중기 문신 허적은 예송논쟁의 남인 주요 논객이자 탁남 영수로,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당쟁과 정치적 음모로 처형 후 복권되었으며, 평안도 관찰사 시절 대동법 확대에 기여했으나 허목과의 갈등과 천막 남용 사건으로 몰락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 사림파 - 김응기
    김응기는 조선 시대 문신으로, 문과 급제 후 예조판서와 좌의정을 역임했으며, 갑자사화로 파직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재등용되어 요직을 거치고 1519년에 사망하여 시호는 문대이다.
  • 1553년 사망 - 페드로 데 발디비아
    페드로 데 발디비아는 스페인 출신으로, 16세기 남아메리카에서 칠레를 정복하고 산티아고를 건설했으며, 칠레 총독으로 식민지를 확장하다가 아라우카니아인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 1553년 사망 - 나가오 하루카게
    나가오 하루카게는 센고쿠 시대 무장으로, 우에스기 사다자네의 양자이자 나가오 다메카게의 아들이며, 가스가 산성 성주를 지냈으나 동생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1553년에 사망했다.
이언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언적
이언적 초상
이름이언적
원어명李彦迪
로마자 표기I Eonjeok
복고(復古)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시호문원공(文元公)
본관여주
출생1491년 11월 25일
출생지조선 경상도 경주부 양좌촌(良佐村) 서백당(書百堂)
사망1553년 11월 23일
사망지조선 평안도 강계
묘소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정치 활동
정당사림파 탈파 잔존 동인 성향 남인 후예
주요 경력문신, 정치인, 성리학자
관직의정부 좌찬성, 증영의정
문묘 배향문묘 18현 종사
학력
생원시1513년 (중종 8년) 입격
문과 급제1514년 (중종 9년)
가족 관계
이번
경주 손씨
배우자정경부인 함양 박씨(훈도 박숭부의 딸)
자녀이응인(아들)
친조부이수회
장인박숭부
외숙부손중돈
외조부손소
기타
거주지조선 경상도 경주군 강동면
조선 경기도 여주
조선 경상도 선산군 구미면
조선 한성부
조선 경상도 경주군 자옥산
조선 평안도 강계군
종교유교(성리학)

2. 생애

1491년(성종 22년) 11월 25일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 양동리(현재의 경주 양동마을) 양좌촌(良佐村)에서 태어났다. 외조부 손소의 서재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여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을 지내고 증 의정부좌찬성이번(李蕃)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손소(孫昭)의 딸이다. 처음 이름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였다. 중종 때 언(彦)자를 더하여 '''언적'''(彦迪)이라 하였다. 주희의 호인 회암(晦菴)의 학문을 따른다는 뜻에서 호를 회재(晦齋)라 지었다.

1500년(연산군 6) 2월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인 손중돈(孫仲敦)에게서 양육되었다. 경주의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항목내용
아버지이번(李蕃, 1463년 ~ 1500년 2월)
어머니경주 손씨(慶州孫氏, 1469년 ~ 1548년 6월)
형제
부인함양 박씨(정경부인 함양 박씨, 1493년 ~ ?); 박숭부(朴崇阜, 1476년-?)의 딸
자녀양자 - 이응인(李膺仁, 1535년 ~ 1593년); 이통(李通)과 이씨(李氏)의 아들
첩과 자녀양주 석씨(楊州石氏, 1495년 ~ ?); 석귀동(石貴同)의 딸



외할아버지 손소


김종직의 문하생인 외삼촌 손중돈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손중돈을 통해 김종직의 학문을 이어받았다.

1508년(중종 3) 박숭부(朴崇阜)의 딸 함양 박씨와 결혼하였다.

1513년(중종 7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1514년(중종 9년)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가 되었고,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1517년 27세 때 조한보(曺漢輔) 등과 무극(無極)·태극설(太極說)에 대해 논쟁하였는데, 이는 조선 초유(初有)의 대논쟁으로 유명하다.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理)가 기(氣)보다 우선적이라는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우위설(理優位說) 견해는 이황에게로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이 일로 그는 젊은 성리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언적은 학문 연구와 관료 생활을 겸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이 죽자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반려되었다. 의정부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의 한 사람이 되어 국사를 수습하고 정무를 관장했고, 그해 8월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정부서계 10조 政府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후 원상으로 국사를 수습하는 한편 수렴(垂簾)의 의론을 정하였으며, 정국의 안정을 꾀하는 등의 공로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책봉되고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졌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사림파와 달리 명종이 아직 미성년이라는 점과 현명한 신하들이 올바르게 보필하면 된다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그 뒤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1545년(명종 즉위년) 12월 병으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을사사화 추관으로 있었던 일로 불만을 품었다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1546년(명종 1) 7월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547년(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평안북도 강계로 귀양갔다.[1] 유배 중에도 학문 연구와 문하생 양성, 저술에 힘썼다. 이퇴계는 이언적을 학문의 정통이라 평가했는데, 이는 유배 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남긴 저서와 경전에 대한 다양한 주해와 자료들 덕분이었다.[1]

주요 저서로는 회재집(晦齋集),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 속혹문(續或問), 《구인록(求仁錄)》(1550), 《봉선잡의(奉先雜儀)》(1550),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 구경연의(九經衍義) 등이 있다.[1]

1548년(명종 3) 6월 배소에서 모친상을 당하였다.[1]

유배 중에도 이언적은 좌절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매진하였다. 하늘(天道·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을 중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았다.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사림파의 정치적 진출 확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중용구경연의를 집필하던 중 1553년(명종 8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강계군 배소에서 향년 63세로 병사했다. 1554년(명종 9년) 11월 경상북도 흥해군 도음산(禱陰山)으로 운구되어 매장되었다.

2. 1. 생애 초반

1491년(성종 22년) 11월 25일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경주 양동마을 양좌촌(良佐村)에 있는 외조부 손소의 서재 서백당(書百堂)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경기도 여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그는 훈련원 참군 등을 지낸 이수회(李壽會)의 손자로,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의정부좌찬성 이번(李蕃)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처음 이름은 적(迪)이고 자(字)는 복고(復古)이며 호(號)는 회재(晦齋)였다. 훗날 중종 때 언(彦)자를 더하여 '''언적'''(彦迪)이라 하였다. 그는 주자를 일생의 사표로 삼아, 아호를 회재라 하였는데, 이는 주희의 호인 회암(晦菴)의 학문을 따른다는 뜻에서 회재(晦齋)라 지은 것이다.

1500년(연산군 6) 2월 10세 때 아버지 이번을 여의고 흥해군 도음산(興海郡 禱陰山)에 장사 지내고, 외삼촌인 손중돈(孫仲敦)의 손에 양육되었다.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으나, 경주의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는 유복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항목내용
아버지이번(李蕃, 1463년 ~ 1500년 2월)
어머니경주 손씨(慶州孫氏, 1469년 ~ 1548년 6월)
형제
부인함양 박씨(정경부인 함양 박씨, 1493년 ~ ?); 박숭부(朴崇阜, 1476년-?)의 딸
자녀양자 - 이응인(李膺仁, 1535년 ~ 1593년); 이통(李通)과 이씨(李氏)의 아들
첩과 자녀양주 석씨(楊州石氏, 1495년 ~ ?); 석귀동(石貴同)의 딸



이언적은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생인 외삼촌 손중돈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손중돈은 김종직의 제자로, 김종직의 학문은 이색, 정몽주, 길재로 이어지는 학통이었다. 이언적은 외삼촌이자 스승인 손중돈을 통해 김종직의 학문을 이어받았다.

1508년(중종 3) 박숭부(朴崇阜)의 딸 함양 박씨와 결혼하였다.

1513년(중종 7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공부하였다. 1514년(중종 9년)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가 되었고, 이후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1517년 27세 때 선배 학자 조한보(曺漢輔) 등과 무극(無極)·태극설(太極說)에 대해 논쟁하였는데, 이는 조선 초유(初有)의 대논쟁으로 유명하다.

2. 1. 1. 가계와 출생, 유년기

1491년(성종 22년) 11월 25일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경주양동마을 양좌촌(良佐村)에 있는 외조부 손소의 서재 서백당(書百堂)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경기도 여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그는 훈련원 참군 등을 지낸 이수회(李壽會)의 손자로,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의정부좌찬성 이번(李蕃)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경주 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처음 이름은 적(迪)이고 자(字)는 복고(復古)이며 호(號)는 회재(晦齋)였다. 훗날 중종때 언(彦)자를 더하여 '''언적'''(彦迪)이라 하였다. 그는 주자를 일생의 사표로 삼아, 아호를 회재라 하였는데, 이는 주희의 호인 회암(晦菴)의 학문을 따른다는 뜻에서 회재(晦齋)라 지은 것이다.

할아버지 이수회는 훈련원참군을 역임하였으며 경주 이씨와 혼인하였는데, 이는 경주 이씨가 토성 재지사족 성씨였기에 혼인한 경우였다. 아버지 이번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성균관 생원으로 수학하였으나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요절했다.[7] 외할아버지 손소(孫昭, 1433-1484)는 경상북도 청송 출신으로 처가를 따라 양동마을로 들어왔으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해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공조참의, 진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이시애의 난 때 형조정랑으로 평정하러 갔던 손소의 형 손욱(孫旭)은 함흥에서 순절했다. 시체가 진펄처럼 쌓인 곳에서 어렵게 찾아서 손소가 고향으로 모셨다. 둘째 외삼촌인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敦)과 망재 손숙돈(忘齋 孫叔暾)은 경주 지역의 저명한 성리학자였다. 특히 손중돈은 정2품 우참찬과 이조판서를 지낸 재상이기도 했다.[8]

1500년(연산군 6) 2월 10세 때 아버지 이번을 여의고 흥해군 도음산(興海郡 禱陰山)에 장사 지내고, 외삼촌인 손중돈(孫仲敦)의 손에 양육되었다.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경주의 명문 양반가에서 태어났으므로 경제적으로는 유복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항목내용
아버지이번(李蕃, 1463년 ~ 1500년 2월)
어머니경주 손씨(慶州孫氏, 1469년 ~ 1548년 6월)
형제
부인함양 박씨(정경부인 함양 박씨, 1493년 ~ ?); 박숭부(朴崇阜, 1476년-?)의 딸
자녀양자 - 이응인(李膺仁, 1535년 ~ 1593년); 이통(李通)과 이씨(李氏)의 아들
첩과 자녀양주 석씨(楊州石氏, 1495년 ~ ?); 석귀동(石貴同)의 딸


2. 1. 2. 수학과 청년기



이언적은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생인 외삼촌 손중돈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손중돈은 김종직의 제자로, 김종직의 학문은 이색, 정몽주, 길재로 이어지는 학통이었다. 이언적은 외삼촌이자 스승인 손중돈을 통해 김종직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나,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에는 반대하며 조광조 일파의 정책에 참여하지 않고 관망하였다.

1508년(중종 3) 박숭부(朴崇阜)의 딸 함양 박씨와 결혼하였으나,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 사촌 동생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을 양자로 삼았다. 이응인에게 학문, 양동마을의 무첨당 종가와 사당을 물려주었다.

1513년(중종 7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공부하였다. 1514년(중종 9년)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가 되었고, 이후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1517년 27세 때 선배 학자 조한보(曺漢輔) 등과 무극(無極)·태극설(太極說)에 대해 논쟁하였는데, 이는 조선 초유(初有)의 대논쟁으로 유명하다.

2. 1. 3. 무극 태극 논쟁

1517년(중종 12년) 영남 지방의 선배 학자인 손숙돈[9]과 조한보 사이에서 성리학의 기본 쟁점인 무극태극(無極太極)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언적은 약관의 나이에 이 논쟁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理)가 기(氣)보다 우선적이라는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기 논쟁에서 이의 우위를 주장한 이우위설(理優位說) 견해는 이황에게로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이 일로 그는 일약 젊은 성리학자로서 명성을 쌓게 되었다.

'무극태극논변(無極太極論辯)'에 관한 논쟁은 조선 성리학 철학사에 첫머리를 장식하는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이 논쟁은 훗날 이황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 이이성혼의 '사단칠정논쟁', '인심도심논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2. 2. 학문 연구, 관료 생활

이언적은 학문 연구와 관료 생활을 겸하였다.

2. 2. 1. 혼란 수습과 공신 책록

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이 죽자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반려되었다. 정국 수습에 필요하다는 신왕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의정부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의 한 사람이 되어 국사를 수습하고 정무를 관장했고, 그해 8월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정부서계 10조 政府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후 원상으로 국사를 수습하는 한편 수렴(垂簾)의 의론을 정하였으며, 정국의 안정을 꾀하는 등의 공로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녹공되고 여성군(驪城君)에 봉작되었다.

한편 그는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사림파와 달리 명종이 아직 미성년이라는 점과 현명한 신하들이 올바르게 보필하면 된다는 관점을 갖고 있었으므로, 수렴청정을 비난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그 뒤 명종 집권 초반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일파가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2. 3. 생애 후반

1545년(명종 즉위년) 12월 병으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을사사화 추관으로 있었던 일로 불만을 품었다는 루머가 확산되었다. 1546년(명종 1) 7월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1547년(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평안북도 강계로 귀양갔다.[1] 유배 중에도 학문 연구와 문하생 양성, 저술에 힘썼다. 이퇴계는 이언적을 학문의 정통이라 평가했는데, 이는 유배 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남긴 저서와 경전에 대한 다양한 주해와 자료들 덕분이었다.[1]

주요 저서로는 회재집(晦齋集),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 속혹문(續或問), 《구인록(求仁錄)》(1550), 《봉선잡의(奉先雜儀)》(1550),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 구경연의(九經衍義) 등이 있다.[1]

1548년(명종 3) 6월 배소에서 모친상을 당하였다.[1]

유배 중에도 이언적은 좌절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매진하였다. 하늘(天道·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을 중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았다.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사림파의 정치적 진출 확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중용구경연의를 집필하던 중 1553년(명종 8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강계군 배소에서 향년 63세로 병사했다. 1554년(명종 9년) 11월 경상북도 흥해군 도음산(禱陰山)으로 운구되어 매장되었다.

2. 3. 1. 을사사화 전후

그해 을사사화가 일어나 윤원형 등이 사림파를 축출하려 하자 추관(推官)이 되어 사림파 및 윤임 일파를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재판 당시 사림파들에 대한 관대한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윤원형이기 등이 이를 문제삼아 그도 관직에서 곧 물러났다.

한때 그는 이기를 구원하였는데, 김종직의 문인이자 생육신 성담수의 외조카인 이기는 장인이 탐관오리라 하여 청요직에 앉지 못했으나, 그가 적극 추천하여 요직에 발탁되었다. 당시 이기는 윤임, 유관, 유인숙 일파를 적극 공격하였으나 그를 비난하고 죄주는 것만큼은 회피하거나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가 판의금부사로 있으면서 을사사화 관련자들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다 하여 후대의 사림파 중 그를 비난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후에 이이는 그가 을사사화 당시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를 비판하던 이이이기의 재종손이었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1545년(명종 즉위년) 12월 병으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을사사화의 추관으로 있었던 것에 반발하고 속으로 불만을 품었다는 루머가 확산되었다. 1546년(명종 1) 7월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2. 3. 2. 유배와 저술 활동

을사사화 당시 사림파 인사들의 처벌, 공초에 소극적이었던 일로 윤원형 일파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또한 윤임 일파의 처벌에 소극적이고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윤원형, 이기 일파의 의심을 받기도 했다.[1]

그 뒤 1547년(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돼서 평안북도 강계로 귀양갔다.[1] 유배 때에도 학문 연구에 전심했고 문하생들을 길러냈으며, 많은 저서를 저술했다.[1] 그는 유배 생활 동안 좌절하지 않고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들을 여럿 남겼다.[1] 후일 이퇴계가 이언적을 학문의 정통이라고 한 데에는 그의 저서들과 경전에 대한 다양한 주해와 자료들을 남겼기 때문이다.[1]

저서로는 회재집(晦齋集),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 속혹문(續或問), 《구인록(求仁錄)》(1550), 《봉선잡의(奉先雜儀)》(1550),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 구경연의(九經衍義) 등이 있다.[1]

후에 이황은 그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와 함께 동방 4현으로 추모하였다.[1] 이황은 그를 도통의 정통으로 평가하였고 생애 후반과 만년에는 자신의 저서와 학문 연구 외에도 이언적의 저서와 저술들을 정리, 간행하는 일을 주관하기도 했다.[1] 이황은 그를 추모하는 글 중에서 그를 가까이에서 봤는데도 더 많이 묻지 못했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1]

이언적의 철학사상은 정통 주자학의 이론을 받아들였는데 태극론에서 알 수 있듯이 정통 주자학자였다.[1] 그러나 대학장구 등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과 개정으로, 후대에 상당히 논란이 되었다.[1] 이언적의 문인들은 후일 이황, 조식, 서경덕의 문인들과 함께 동인을 형성하였고, 동인남인북인으로 분당될 때, 그의 제자들과 계승자들은 남인의 당원이 되었으며, 일부는 북인으로도 건너갔다.[1]

1548년(명종 3) 6월 배소에서 모친상을 당하였다.[1]

2. 3. 3. 최후

유배 중에도 이언적은 좌절하지 않고 많은 저술을 남기고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는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앞장섰으며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사림파의 정치적 진출 확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중용구경연의를 집필하던 중 1553년(명종 8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강계군 배소에서 병으로 죽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63세였다. 일설에는 처음에 시신을 근처에 매장했다는 설도 있다. 1554년(명종 9년) 11월 경상북도 흥해군(興海郡) 도음산(禱陰山)으로 운구되어 매장되었다.

2. 4. 사후

1556년(명종 12) 8월 이전인(李全仁)이 진수팔규를 올리고, 이어 이언적은 복작(復爵)되었다. 그의 학문과 덕행을 인정하던 훈구파 세력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강계군까지 찾아가서 문상하였고, 이전인이 진수팔규와 함께 이언적이 배소에서 쓴 책을 바치자 이를 탐독하였다. 사후 그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가 계속되었고, 1556년에는 명종이 그의 복직과 작위를 복작시킬 때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556년(명종 21) 10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이언적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퇴계 이황은 말년에 자신의 저서와 학문 연구 외에도 이언적의 자료와 저술을 정리, 재간행하였다. 경전에 대한 원전 외에도 주해와 다양한 해석, 자신의 견해 등을 적은 책들을 읽고 퇴계 이황이 감동하였다 한다. 1567년 11월 왕이 유문을 수습하도록 명했고, 내탕금이 하사되어 국비로 그의 문집과 저서들이 간행되었다.

손자 이의활이의잠 등이 그의 문집 간행에 적극 힘을 쏟았고, 묘지(墓誌)를 이항복에게 받기 위해 노력하여 이루어냈다. 광해군 시대 이언적의 출처관이 의심을 받자 류성룡을 움직여 적극 해명하도록 도왔다.

3. 사상과 신념, 치적

이언적은 조선 성리학 정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확고히 하여 이황에게 전했다. 그는 이(理)와 기(氣) 중 이가 기보다 우위에 있으며, 이를 통해 기를 통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영향을 주었으며, 남인 붕당의 이념으로 이어졌다.

그는 사서육경 중에서도 《대학》과 《중용》의 정신을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에 우선적으로 두었다. 또한, 하늘(天道 · 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 · 敬心)을 경세의 근본으로 여겼다. 1537년 중종에게 올린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에서는 임금이 먼저 모범을 보이고 덕으로 통치해야 함을 강조했다.

이언적은 주희의 학문을 존중하면서도 독창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에서는 주희의 《대학장구》 체계를 개편하고 순서를 재배치하는 등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제시했다.

사후 1568년(선조 1)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종묘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문원(文元)의 시호를 받았다. 1573년 경주 옥산서원 등에 주향되고, 1610년(광해군 2)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대한민국 시대에 그의 주요 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고, 독락당옥산서원에 보존되었다.

3. 1. 이우위설

이언적은 이(理)와 기(氣)에서 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이우위설(理優位說)을 주장했다. 이는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사물의 이와 기 중 이가 기를 다스려야 한다고 보았다. 이가 기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이우위설은 이황에게 계승되어 이기이원론, 즉 이가 기를 다스려야 한다는 이론으로 확립되었다. 여기서 이는 인간의 도덕과 덕성을, 기는 평범하고 세속적인 행동과 욕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언적의 계승자와 이황 학파를 비롯한 일부 사림은 기를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는 동인과 그 후신인 남인 붕당의 이념이 되었다.

이언적은 27세 때 영남 지방의 선배 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벌어진 성리학의 기본 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었다. 그는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이가 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손숙돈과 조한보의 견해를 모두 비판했다. 이 논쟁에서 이언적은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를 통해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은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성리설로 이어졌다.

3. 2. 수신, 덕치론

그는 하늘(天道 · 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 · 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이라 지적하였다. 1517년에 지은 〈오잠(五箴)〉에서 그는 사람의 도리로 '하늘을 두려워 함'(畏天), '마음을 배양함'(養心), '공경하고 신뢰하는 마음'(敬心), '허물과 잘못을 고침'(改過), '신념과 믿음을 독실하게 하는 것'(篤志)을 지적하였다.[1]

그는 벼슬길에 오른 후에도 중종과 인종 때에 경연과 상소를 통해 임금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된다는 점과 덕으로써 통치해야 됨을 역설, 강조하였다. 1537년 중종에게 올렸던 상소문인 〈일강십목소〉와 〈진수팔규(進修八規)〉와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올린 〈서계 10조 書啓十條〉를 통해 정치와 민생, 국가의 통치 원리를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경세의 근본으로 임금과 관료들이 먼저 솔선수범해야 된다고 지적하였다. 임금이 우선적으로 자기 수양을 게을리하지 말고 덕을 쌓아야 된다 하였으며, 하늘의 도리, 곧 천도에 순응하고 백성의 마음, 곧 인심을 바로잡으며 나라의 근본을 배양하여야 함을 역설, 왕도 정치의 기본 이념을 추구하였다. 또한 임금이 솔선수범하여 사치와 탐욕을 경계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도학적 경세론을 제시하고 있다.[1]

《구인록》 4권에서 그는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으로서 인(仁)에 대한 그의 집중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에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하였다.[1]

〈일강십목소〉에서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임금의 마음 씀씀이(人主之心術)'를 지적하였으며, 그 밖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

  • 언로를 넓히고 다양한 말을 들을 것[1]
  • 사치 욕심을 경계하고 검소할 것[1]
  • 국가 근본을 배양할 것[1]
  • 가정 법도를 엄숙하게 할 것[1]
  • 조정 기강과 매사를 공명정대하게 할 것[1]
  • 인재를 취사선택할 때 신중할 것[1]
  • 하늘의 도리에 순응할 것[1]
  • 먼저 군자의 길을 닦고 수양할 것[1]
  • 일을 추진하기 전에 항상 살필 것[1]


그는 군주와 국가, 선비가 나아갈 길로서 먼저 모범을 보이고 실천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저서 중 하나이며 29권으로 된 《중용구경연의》에서도 천하 국가를 통치하는 9가지 덕목을 요약하여 9경(九經)이라 하여 '''수신(修身), 존현(尊賢), 친친(親親), 경대신(敬大臣), 체군신(體群臣), 자서민(子庶民), 내백공(來百工), 유원인(柔遠人), 회제후(懷諸候)'''로 요약하였다.[1]

이로써 그는 사후 조선 성리학 도통의 정통이자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모범이 되는 우뚝한 봉우리로 추모되었다.[1]

3. 3. 예론

그는 하늘의 뜻인 천도(天道), 천심(天心)과 백성(人心)에 순응하며,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욕심과 사(私)를 제거하기 위해서 양심(養心)과 경심(敬心) 등의 수양에 힘쓸 것을 말하며, 도학적 수양론을 만사와 경세의 근본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의 유학자들 중 예에 대한 견해를 독자적으로 밝힌 초기의 학자들 중 한 사람이며, 예학의 선구자 내지는 예학의 시조의 한 사람 혹은 영남 예학의 시조의 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그는 도학과 덕의 근본으로 가정에서, 개인들이 예를 지키는 것으로 보았다. 저서인 《봉선잡의》 2권에서는 도학의 보편화와 이의 실천을 주장했고, 도학의 실천적 규범인 예서를 제시한 것으로서 조선 후기 예학 형성의 참고 자료가 되기도 했다.

3. 4. 학문의 독창성

그는 주희와 그의 가르침을 정통으로 보면서도 기존의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았다. 원시유학과 사서육경부터 시작해서 주희 등의 학문을 독창적이고 독자적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훨씬 자율적인 학문 연구와 자유로운 해석의 시발점이 된다. 《대학장구보유》와 《속대학혹문》에서 그는 새로운 해석을 하여 주희의 《대학장구》나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려는 그의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곧이어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 순서를 재배치하기도 하였다.

그의 저술들은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가 대학체계를 통치원리의 구체적 실현방법에 응용하였던 것에 상응한 저술로 평가된다. 또한 후대에 그의 학통을 간접적으로 계승한 윤휴의 중용장구와 사서육경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홍범연의(洪範衍義)》 저술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또한 주희가 중요하게 여기고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그는 인정하지 않고, 그 대신 《대학장구》의 경 1장에 들어있는 두 구절을 격물치지장으로 옮겨서 해석하는 계획을 하였으며, 이런 개편에 대해서 주희가 다시 나오더라도 이것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는 후기의 학문태도에 비하여 매우 창의적인 학문정신을 보여준다.

《중용구경연의》 29권에서도 그는 주희의 《중용장구》나 《중용혹문》의 체계를 훨씬 벗어나서 천하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을 9가지로 나눠서 9경(九經)이라 하고 그 방법을 독자적으로 나눠서 수신(修身), 존현(尊賢), 친친(親親), 경대신(敬大臣), 체군신(體群臣), 자서민(子庶民), 내백공(來百工), 유원인(柔遠人), 회제후(懷諸候)로 요약하고 이를 통해 중용정신을 밝히려 하기도 했다.

3. 5. 자유로운 학문관

그는 사서육경과 주자의 견해 등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이 자신의 견해와 주석을 첨가하거나, 비슷한 내용을 한데 묶어서 새로 개편하는 등의 작업을 하였다. 또한 모든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그의 태도는 주희의 한 글자 한 구절을 금과옥조로 삼아 존숭하거나, 경전의 내용을 모두 무오류로 보고 교조적으로 해석하던 후기 도학자들의 학문 태도에 비해 훨씬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학문 정신으로 계승되었다.

3. 6. 현실 참여론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가 숙청되거나 패하는 현실을 보고 불의가 승리하는 현실로 보았다. 초기에는 조광조 등의 참여 요청을 사양, 거절하였지만 나중에 그는 참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된다는 생각으로 서서히 생각을 선회하였다.

중종 말기와 명종 초기 훈구파가 주도하는 정국에 참여한 것과 을사사화 당시 위관과 추관의 한사람으로 참여한 것을 두고 두 세대 뒤의 성리학이이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하였지만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려 하였다.[1]

을사사화 당시에는 그 자신이 좌찬성의금부 판사의 중요한 직책으로서 위관을 맡으면서 윤원형, 이기 일파에 의해 무고나 연좌로 끌려온 선비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그는 사림과 훈구파 권력층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 인사들의 희생을 막으려고 최대한 변호, 노력하다가 연이어 터진 정미사화와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그 자신이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1]

4. 연보

5. 저서 및 작품

이언적은 여러 저서와 작품을 남겼다. 주요 저작으로는 《회재집》, 《구인록》, 《봉선잡의》, 《대학장구보유》, 《속대학혹문》, 《중용구경연의》, 《관서문답록》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손중돈 묘비문[1]이 있다.

5. 1. 저작


  • 《회재집》
  • 《구인록》 4권(1550)
  • 《봉선잡의》(1553)
  • 《대학장구보유》(1549)
  • 《속대학혹문》
  • 《중용구경연의》(1553)
  • 《관서문답록》

5. 2. 작품


  • 손중돈 묘비문[1]

6.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11대조(遠祖)이직재(李直才)고려 여주 호장
10대조(시조)이세정(李世禎)고려 향공진사, 개성 이주
증조부이숭례(李崇禮)진의부위, 증 병조참판
증조모청주 양씨
조부이수회(李壽會)무과, 훈련원참군, 증 이조판서
조모경주 이씨이지대(李之帶)의 손녀, 생원 이점(李點)의 차녀
아버지이번(李蕃)(1463년-1500년 2월), 생원, 증 의정부 좌찬성
어머니경주 손씨(? - 1548년 6월), 계천군 손소의 딸
배우자정경부인 함양 박씨훈도 박숭부(朴崇阜)의 딸, 박성양(朴成陽)의 증손녀
양자이응인(李膺仁)사촌동생 이통(李通)의 삼남, 사옹원 판관, 증 승정원 좌승지
며느리함양 박씨박숭부의 조카손녀
며느리인동 장씨세마 장응기의 딸
손자이의윤(李宜潤)호는 무첨당, 여강 이씨 무첨당파 회재 이언적 종가
손자이의징(李宜澄)양동마을 양졸당, 여강 이씨 양졸당파
손자이의활(李宜活)양동마을 설천정, 성균전적, 함경도사, 인조반정 후 순천부사, 흥해군수, 여강 이씨 설천정파
손자이의잠(李宜潛)양동마을 수졸당, 사마, 하양현감, 여강 이씨 수졸당파
서손자이의온(李宜溫)포항 우각마을 오의정, 여강 이씨 오의정파
양주 석씨김포군 만호 석귀동(石貴同)의 얼녀
서자이전인(李全仁)성리학자 (독락당)
서손자이준(李浚)호는 구암, 성리학자, 여강 이씨 구암공파
서손자이순(李淳)호는 치암, 여강 이씨 치암공파
동생이언괄(李彦适)호는 농재(聾齋), 양동마을 향단파
숙부이필(李苾)?-?, 별시위
숙모오천 정씨정흔(鄭昕)의 딸, 정몽주
숙모경주 손씨대사성 손번의 딸
사촌동생이통(李通)식과, 금산군수, 경력
외증조부계성군 병조참의 손사성(孫士晟, 1396-1477)경북 청송
외증조모안동 권씨권명리(權明利)의 딸
외조부손소(孫昭, 1433년 - 1484년)시호 양민, 양동마을 입향조
외조모풍덕 류씨(豊德柳氏)? - 1510년 8월 4일
외삼촌손백돈[14]
이모월성손씨
이모부금원형(琴元亨)
외삼촌손중돈(孫仲敦)우재(愚齋), 1464년 - 1529년)
외삼촌손숙돈(孫叔暾)망재(忘齋), ? - ?
외삼촌손계돈(孫季暾)
외삼촌손윤돈(孫閏暾)
이모월성손씨
이모부강중묵(姜仲默)


7. 평가

이황은 이언적을 현인이라 불렀으며,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고 그의 학통을 계승했다. 이황 이후의 영남 사림들은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김종직-손중돈-이언적-이황으로 연결하여 김종직과 이언적을 자신들의 학문적, 사상적인 뿌리이자 연원으로 삼았다. 이로써 이언적은 영남학파의 창시자가 되었다.[1]

이언적은 조선시대의 가장 위대한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성리학의 큰 줄기인 영남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그는 기존의 <소학> 중심의 실천철학에서 <대학> 중심의 본격적인 성리학 저술을 남긴 최초의 학자였다. 그의 주리(主理)론학설은 이황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무극태극 논쟁에 크게 기여했다. 1538년(중종 33)에는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었으며, 사후 동방오현 및 동국18현으로 추앙되고 있다.[1]

그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재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관료생활 중 기묘사화로 타격을 입은 사림파들의 등용을 통해 사림의 부활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퇴계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1]

이황은 그에게 직접 수학하지는 않았으나 그를 통해 자신의 학문적 정통성을 주장하였다. 후에 퇴계 이황은 그를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와 함께 동방사현 또는 여기에 포은 정몽주, 점필재 김종직을 포함해 동방육현으로 추모하였다. 그러나 대학장구본이 중국에서는 양명학적 경향과 연결되어 있는데 반하여, 이언적의 대학장구 개정본은 주자학적인 사유체계의 완결성을 표시한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대학장구와 경전에 대한 독자적인 재해석과 개정으로 조선 후기 상당한 논란과 비판을 받기도 했다.[1]

8. 기타

1577년(선조 10년) 기대승이 지은 글을 이산해가 글씨를 써서 신도비를 세웠으나 소실되었다. 1586년(선조 10년) 손엽이 다시 신도비를 썼는데 현재까지 전한다. 이언적의 신도비는 2006년 1월 2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2호로 지정되었다.[14]

1567년(선조 즉위년) 증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려져 1568년(선조 1) 2월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종묘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선조 즉위 초 '''도덕박문왈문 주의행덕왈원'''(道德博聞曰文 主義行德曰元)이라 하여 문원(文元)의 시호를 받았다. 1573년 경주 자옥산에 건립된 경주 옥산서원 등에 주향되고, 1610년(광해군 2)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14]

퇴계 이황은 그를 현인이라 불렀다. 이황은 이언적을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고 그의 학통을 계승했다. 이황 이후의 영남 사림들도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김종직-손중돈-이언적-이황으로 연결하여 김종직과 이언적으로 자신들의 학문적, 사상적인 뿌리, 연원으로 삼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이언적은 영남학파의 창시자가 되었다.[14]

대한민국시대에 와서 이언적의 주요저술 원본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고, 경주의 독락당옥산서원에 보존되었다. 사당 달전재사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2호로 지정되었고, 신도비는 훗날 달전재사 근처로 옮겨졌다.[14]

이이는 그가 '을사사화 당시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며 비판했다. 그런데 그를 비판하던 이이이기의 재종손이었다.[14]

한편 유배소에서 명종에게 올릴 책을 특별히 한 권 편집하였으나 서문을 써주기로 한 홍섬(洪暹)이 내용을 보고 시의(時議)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만류했으므로 끝내 올리지 못했다.[14]

포항시 남구 안일읍 달전리의 사당 달전재사 뒤편으로 그의 일가족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이언적 내외의 묘소, 뒤편에는 양자 이응인의 묘, 그 위로는 동생 이언괄의 양자인 이응기의 처의 묘, 이언적의 부모 이번과 경주 손씨 내외의 쌍분, 맨 위로는 동생 이언괄의 묘소가 있다.[14]

그는 족도세계를 작성했는데, 이는 족보와 선조에 대한 것을 종이로 간략하게 표시한 것이다. 자신의 본가 부계쪽 족도세계, 자신의 조부의 처가 족도세계와 어머니 경주손씨의 족도세계, 그리고 소실 양주석씨 부인의 족도세계 등도 작성하였고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14]

묘소는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포항공원묘원과 달전터널 근처에 있으며, 달전재사 옆에 세워진 신도비 옆에 있는 길이 묘소 입구이다. 맨 아래에는 이언적과 그 부인 함양 박씨의 묘소가 있고, 그 위에는 이언적의 양자인 이응인 부부의 묘소, 동생 이언괄의 아들의 묘소, 맨 위에는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과 어머니 경주손씨 내외의 묘소가 소재해 있다.[14]

참조

[1] 웹사이트 이언적 李彦迪 (Yi Eonjeok) http://100.nate.com/[...]
[2] 문서 여강 이씨
[3] 웹사이트 Yi Eonjeok http://www.doopedia.[...]
[4] 서적 옥천집
[5] 서적 회재집
[6] 서적 회재집
[6] 서적 회재집
[7] 문서 직책
[8] 문서 여강 이씨 가계
[9] 문서 외삼촌 관계
[10] 서적 철학사전 중원문화 2009
[11] 문서 학맥
[12] 웹사이트 이지대 왕지 https://www.heritage[...]
[13] 문서 계유정난 이후
[14] 문서 자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