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블로트는 고대 노르드 종교에서 숭배, 희생을 의미하는 의식으로, 어원은 게르만어에서 유래했다. 고대 노르드어에서 블로트는 신에게 숭배나 희생을 바치는 행위를 의미하며, 종교적 장소, 인간 및 동물 희생, 피의 역할, 연회와 음주 등 다양한 구성 요소로 이루어졌다. 블로트는 신들의 도움을 구하고, 점을 치며, 통치자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블로트는 금지되었지만, 일부는 기독교 문화에 통합되었고, 현대 게르만 이교주의에서 재건되어 현대적 맥락에서 발전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게르만 문화 - 튜턴족의 분노
- 게르만 문화 - 고디
고디는 스칸디나비아와 아이슬란드에서 종교적,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 지도자를 지칭하는 칭호로, 아이슬란드에서는 종교 의례 주관 및 공동 홀 유지 역할을 했으며, 연방 시대에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현대에는 게르만 신이교주의 종파에서 사제 직함으로 사용된다. - 앵글로색슨 이교 - 에오스트레
에오스트레는 게르만 신화의 봄과 새벽의 여신으로, 앵글로색슨족은 4월을 에오스트레의 달이라 부르며 축제를 열었고, 이름은 '빛나다'라는 뜻에서 유래했으며, 현대 영어의 'Easter'와 부활절 토끼, 오스타라 축제 등과 관련된다. - 앵글로색슨 이교 - 모드라니흐트
모드라니흐트는 게르만 겨울 축제와 관련된 행사로, 학자들은 이를 게르만 마트론 숭배, 중세 스칸디나비아의 디사블로트 등과 연관 짓는다. - 노르드 이교 - 사가 (문학)
사가(Saga)는 본래 '이야기'를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에서 유래했으며, 현대에는 여러 세대에 걸친 가족사를 담은 서사시를 지칭하고, 왕의 사가, 주교의 사가, 아이슬란드인의 사가 등 다양한 유형이 있으며, 특히 아이슬란드인의 사가는 문학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 노르드 이교 - 베르세르크
베르세르크는 북유럽 신화와 역사 속 광전사를 지칭하며, 곰 가죽 윗옷을 입은 전사, 갑옷을 입지 않은 전사, 또는 형태가 변하는 존재 등으로 해석되고, 오딘의 신통력을 받아 격렬한 전투 상태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했지만 전투 후 탈진에 시달렸으며, 용감한 전사이자 잔혹한 약탈자로 묘사되다 기독교화 이후 불법화되었고, 현대 대중문화에서 폭력적인 전사 이미지로 나타난다.
블로트 | |
---|---|
어원 | |
고대 노르드어 | blót (희생) |
고대 영어 | geblōt (희생) |
의미 | 피로 강화하다, 피로 숭배하다 |
개요 | |
블로트 | 게르만족의 이교에서 제물을 바치는 의례 |
목적 | 신과 요툰을 기쁘게 하다 풍요와 풍작을 보장받다 |
역사적 증거 | |
문헌 | 헤임스크링글라 등 |
시기 | 11월 (블로트모나스) |
방법 | 가축 희생 |
의례 | |
희생물 | 동물 인간 (드물게) |
장소 | 신전 호프 흐로그스타인 (제단) |
참여자 | 족장 고디 신관 |
과정 | 동물 도살 피 수집 피로 제단, 벽, 참석자 축성 고기 요리 고기와 에일 섭취 |
의례 문구 | til árs ok friðar (풍요와 평화를 위하여) |
현대의 재건 | |
아사트루 | 블로트 의례 재현 신들과 조상 숭배 |
목적 | 공동체 유대 강화 |
같이 보기 | |
관련 항목 | 고르 호프 (건축물) 게르만족의 이교 |
2. 어원 및 의미
블로트(Blót)의 동사 형태는 blóta|"숭배하다; 희생하다"non, blotan|"섬기다 (하느님); 숭배하다"; (희생을 통해) 존경하다"got, blōtan|"희생하다"ang, blōzangoh에서 볼 수 있다. 원시 게르만어 동사 형태는 강동사 또는 으로 재구성할 수 있으며, 이는 "희생하다"를 의미한다.
명사 형태는 blótang, ge-blótang ("희생"), blótnon ("희생; 숭배")에서 볼 수 있다. 명사의 원시 게르만어 형태는 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유사하고 관련된 형태는 bluostargoh ("희생"), blostreisgot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guþ-blostreisgot ("하느님의 숭배자")의 구성 요소이다. Blótnon는 일반적으로 "우상 숭배"를 의미할 수도 있고, "우상"(종종 blœtinon의 형태로) 또는 이교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으로 인해 기독교 시대에 은유적으로 "저주" 또는 "맹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공유된 게르만어 뿌리는 ("불다; 피어나다; 꽃피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제안되었으며, 이는 더 나아가 ("피")과 연결된다. 추가적으로 flamenla ("사제")와의 연결이 제안되었지만, 이에 대한 유효성은 flamenla의 정확한 어원에 달려 있으며, 이를 확실하게 결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2. 1. 어원
동사 형태는 blóta|"숭배하다; 희생하다"non, blotan|"섬기다 (하느님); 숭배하다"; (희생을 통해) 존경하다"got, blōtan|"희생하다"ang, blōzangoh에서 볼 수 있다. 원시 게르만어 동사 형태는 강동사 또는 으로 재구성할 수 있으며, 이는 "희생하다"를 의미한다.명사 형태는 blótang, ge-blótang ("희생"), blótnon ("희생; 숭배")에서 볼 수 있다. 명사의 원시 게르만어 형태는 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유사하고 관련된 형태는 bluostargoh ("희생"), blostreisgot에서 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데, 이는 guþ-blostreisgot ("하느님의 숭배자")의 구성 요소이다. Blótnon는 일반적으로 "우상 숭배"를 의미할 수도 있고, "우상"(종종 blœtinon의 형태로) 또는 이교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으로 인해 기독교 시대에 은유적으로 "저주" 또는 "맹세"를 의미하기도 한다.
공유된 게르만어 뿌리는 ("불다; 피어나다; 꽃피다")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제안되었으며, 이는 더 나아가 ("피")과 연결된다. 추가적으로 flamenla ("사제")와의 연결이 제안되었지만, 이에 대한 유효성은 flamenla의 정확한 뿌리에 달려 있으며, 이를 확실하게 결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2. 2. 용법
"숭배하다" 또는 "희생을 바쳐 숭배하다"라는 맥락에서, 고대 노르드어 동사 blótanon는 일반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대격으로 사용되며, 여격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다. 여격은 희생되는 대상에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이 동사 뒤에는 종종 blótnon의 목적이 뒤따르는데, 예를 들어 til friðar, sigrs, langlífis, árs, byrjarnon ("평화를 위해, 승리를 위해, 장수를 위해, 좋은 계절을 위해, 순풍을 위해") 등이 있다.[1]2. 3. 합성어
블로트non는 숭배나 희생과 관련된 많은 합성어에서 발견된다. 여기에는 blót-auðigrnon("희생에 부유한")와 같은 형용사와 blót-biskupnon, blót-kennimaðrnon, 또는 blót-goðinon("이교도 사제"), blót-hofðinginon("이교도 지도자")와 같은 개인을 지칭하는 용어가 포함된다. 다른 합성어로는 blót-guðnon("이교도 신") 및 blót-kálfrnon("희생으로 숭배되는 송아지")와 같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있다. 종교적 기능을 가진 항목은 blót-bollinon("제사용 그릇") 및 blót-klæðinon("희생 때 입는 의복")와 같이 접두사로 포함될 수 있으며, blót-dómrnon 또는 blót-skaprnon("우상 숭배") 및 "이교도 신에게 희생"과 "우상 숭배"의 의미로 사용되는 blótnaðrnon과 같은 종교적 개념을 지칭할 수 있다.[1]3. 의례의 구성 요소
블로트(blótnon)는 단순한 희생 의식을 넘어, 노르드 신성 구조물에서 이루어진 모든 의례 활동의 중심이었다.
3. 1. 장소

민족 이동 시대에는 종교 조직이 급격히 변화하여, 통치자들이 이전처럼 늪이나 호수와 같은 야외 공간 대신 자신의 집에서 제물과 의식을 중앙 집중화할 만큼 충분한 권력을 얻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실내 종교 건물은 고대 노르드어 자료에서 호프|Heathen hofnon, hǫrgar|non, goðahús|non, blóthús|non 등으로 다양하게 언급된다.[1]
자료에는 바이킹 시대의 blót|non이 다양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숲, 호프, 폭포가 신, 엘프, 이교도 베티르와 함께 blót|non을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2] 장소를 나타내는 일부 명사에는 blót|non이 접두사로 포함되어 있어 blót-haugr|non(제물 언덕 또는 돌무더기)와 blót-hof|non(이교도 예배당)과 같이 이러한 의식이 열린 장소임을 시사한다.[3] Kjalnesinga 사가는 큰 호프 근처에 Blótkelda|non(희생 늪/늪/우물/샘 또는 이교 사원 근처의 늪)라고 불리는 장소가 있었고, 희생 축제 동안 희생물이 이곳에 던져졌다고 묘사한다. 이 아이디어는 Möðrudalur의 Blótkelda|non와 Mývatn의 Goðakelda|non(신의 늪/샘)와 같은 아이슬란드 지명에도 반영되어 있다.[4]
3. 2. 인간 및 기타 동물 희생
고대 노르드 종교 의식에서 동물, 특히 돼지와 말의 희생은 블로트non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선물과 더 유사한 개념으로, 보통 의례적인 방식으로 동물을 죽이는 것을 포함하며, 때로는 인간을 죽이기도 했다.[1]브레멘의 아담은 웁살라의 신전에 관한 기록에서 머리만 바쳐졌다고 언급한다.[2] 이러한 관행은 고고학적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아이슬란드 북부의 호프스타디르 신전 홀에서는 수년간 황소를 계절별 의식에 따라 참수하여 홀에 전시했다. 골학적 분석 결과, 이 동물들은 도끼나 칼로 목을 가격하여 죽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방법은 아마도 동맥혈이 쏟아지는 광경을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3] 바이킹 시대 프뢰쇤("프레이르의 섬")의 교회 아래에서 발견된 자작나무 그루터기, 외스테르예틀란드의 보르크에서 발견된 가능한 숭배 가옥 부지와 같은 다른 장소에서도 유사한 관찰이 이루어졌다. 이 두 곳 모두 다른 뼈에 비해 두개골이 현저하게 많았다. 머리를 신에게 바치는 한편, 뒤이어 열리는 잔치를 위해 고기를 요리하는 광범위한 관행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또한 홀에 전시된 두개골의 수가 그 안에서 열릴 수 있는 잔치의 규모를 나타내는 지위 신호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도 추정된다.[4]
문헌 기록은 전쟁 포로를 희생했다고 말한다. 로마의 게르만 부족이 패배한 적을 마르스 또는 머큐리에게 희생했다는 묘사는 고대 노르드 종교에서 오딘 숭배와 관련된 관습과 유사하다. 아이슬란드 시인 헬기 트라우스티는 적을 죽여 오딘에게 희생했다고 언급한다. ''에길스 사가 에인헨다 오크 아스문다르 베르세르크야바나''와 ''오르케위잉가 사가''는 포로로 잡힌 적을 오딘에게 희생시키는 것을 묘사한다. 우플란드 인근에서 발견된 유해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의 시신은 치유된 뼈 외상을 가진 젊은 남성으로, 문헌에서 언급된 희생된 전쟁 포로와 일치할 가능성이 있다. 거의 모든 경우, 고대 노르드 텍스트의 맥락에서 발생하는 인신 제사는 오딘과 관련이 있다.[5] 범죄자와 노예는 현대의 사형과 비교되는 대다수의 경우 희생되는 인간이다. 학자들은 인신 제사에 대한 일부 주장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브레멘의 아담의 웁살라에서의 희생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는 게르만 종교를 악마화하기 위해 인간의 희생에 대해 과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걀네싱가 사가에 나오는 인신 제사에 대한 설명의 정확성은 일부 학자들에 의해 의심받고 있다.
3. 3. 피와 스탈라르(stallar)의 역할
하콘의 사가에서 스노리 스투를루손은 hlautteinarnon ("희생 제물 잔가지")를 스프링클러처럼 사용하여 피를 stallarnon ("제단" 또는 "플랫폼"), 호프의 벽 (내부 및 외부 모두) 및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뿌렸다고 묘사한다. 이 설명은 성수를 회중에게 뿌렸던 중세 교회의 교회 의식이나 구약 성서에서 모세가 자신의 백성들에게 피를 뿌린 내용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스노리는 hlautteinarnon와 stǫklarnon ("아스페르질룸")의 유사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이를 바탕으로 "희생의 피", "희생 잔가지" 및 "희생 그릇"을 각각 의미하는 hlautnon, hlautollinon 및 hlautteinnnon과 같은 용어의 사용이 기독교 이전 시대의 사용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스칼드 시와 에다 시에서 이 용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한다. 올로프 순드크비스트는 hlautnon가 이전에 점의 맥락에서 "제비"의 의미를 가졌다는 생각을 지지한다.[1]클라우스 뒤벨은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리는 행위가 이교 게르만 문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으며 구약 성서와 같은 다른 출처에서 완전히 파생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다. stallarnon (스노리의 설명에서 피가 뿌려진 장소 중 하나)는 기독교 이전 스칸디나비아 맥락에서 희생과 관련된 의미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2] "신성한 받침대"를 의미하는 véstallrnon이라는 구절이 스칼드 시에서 발견되며 서부 스칸디나비아의 다른 곳에서도 신성한 물체에 피를 바른 사례가 있다.[2] 힌들루요드에서 프레이야는 숭배자가 그녀를 위해 만든 hǫrgrnon ("제단")이 돌로 만들어졌고 유리가 되었으며 소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말한다.[2] 헤르바라르 사가의 U 버전은 blóttrenon라고 불리는 신성한 나무가 희생 말의 피로 붉게 물드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이것이 문자 그대로 나무인지, 아니면 플랫폼 또는 제단(véstallrnon, stallrnon 또는 véstallinon)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다.[2] 잉글링가 사가에서 왕 도말디는 농작물을 자라게 하기 위해 희생되었고 그의 피로 stallarnon를 붉게 물들인다.[2] 잉글링가탈은 이 이야기가 기반이 된 시인데 stallarnon를 언급하지 않지만 땅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것을 강조한다.[2] stallarnon 아래 땅에 피를 쏟는 행위는 아이슬란드 정착 동안 노르웨이 출신 토롤프르가 stallrnon 아래에서 흙을 가져간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제안이 있었는데, 이는 에이르비갸 사가에 설명되어 있다.[2] 란나마보크의 호우크스보크 버전에 따르면 종교적 물체는 blótnon 동안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맹세 반지가 그렇다.[2] 희생 제물의 피를 모아 제단에 붓는 관행은 고대 그리스 종교, 고대 로마 종교 및 유대교 번제와 같은 다른 문화에서도 잘 증명되었다.[2]
점의 역할과 함께, blótnon에서 피의 중요성에 대한 다른 제안들이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3] 호프스타디르에서 발견된 동물을 죽이는 데 사용된 폭력은 공동체의 긴장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3] 올로프 순드크비스트는 피가 공연적인 설정에서 사용되어 장관의 느낌을 조성하고 그 사건이 평소의 일상 생활과 뚜렷하게 구분되도록 했다고 제안한다.[3] 만약 사실이라면,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의례적 드라마에 감정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며, 브루스 링컨의 아이디어와 일치하게, blótnon 동안의 살육과 길파기닝에 언급된 창조 이야기 동안의 이미르의 살육 사이에 인지된 연결이 있었을 수 있으며, 이는 신화적 대응물로 작용했다고 제안한다.[3] 이러한 맥락에서 유혈 사태는 blótnon를 수행한 사람들의 조건이 개선될 세계의 갱신을 알렸을 수 있다.[3]
3. 4. 연회와 음주
희생 제사(blótveizlur|블로트베이즐루르non 또는 blótdrykkjur|블로트드리크주르non)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의 고대 종교 의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계절 축제의 일부였다. 노르웨이 시인 시그바트 토르다르손이 11세기 초 시에서 언급한 서부 스웨덴의 ''알파블로트''와 같은 가족 의례는 보통 농가에서 행해졌다.[1] blót|블로트non에서 열리는 잔치와 의례적 음주는 Hákonarmál의 발할라 묘사에서도 신화적 맥락으로 반영된다.[1]말은 종종 blótveizlur|블로트베이즐루르non에서 먹는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말고기 섭취는 기독교 채택 이후 제정된 여러 중세 스칸디나비아 법률, 예를 들어 Borgarthings-Lov, Den ældre Gulathings-Lov 및 Frostathings-Lov에 의해 벌금 및 추방으로 처벌받는 범죄가 되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기독교 확립 후 잠시 동안 개인적으로 말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예외가 있었지만 나중에 폐지되었다.[1]
동물을 의례적으로 죽인 후에는 에다와 스칼드 시, 아이슬란드 사가, 룬 비문에 묘사된 것처럼 고기를 먹는 잔치가 이어졌다.[1] 고기는 실내 또는 실외에서 뜨거운 돌로 큰 요리 구덩이에서 삶았으며, 의식에서는 에일이나 미드를 마셨다.[1]
종교적 잔치를 시사하는 유적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발견되었는데, 예를 들어 멜후스에서는 900년부터 1300년 사이의 요리 구덩이가 많이 발견되었으며, 여기에는 가축의 뼈가 들어 있었다. 로포텐의 보르에 있는 홀-룸 C의 난로도 희생된 동물의 고기를 의례적으로 요리하는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 6m x 3m 크기의 큰 구덩이 하나는 seyðir|세이디르non (고기를 의례적으로 준비하기 위한 요리 구덩이)로 해석된다. 고트어 관련 용어는 구타 사가에서 접두사로 발견되며, 여기에는 blót|블로트non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을 희생된 동물로 만든 음식을 함께 요리하는 suþnautar|수드나우타르non ("끓이는 동료")라고 묘사한다. Seyðir|세이디르non와 suþ-|수드-non는 둘 다 sauþs|사우드스got ("희생")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1]

3. 5. 기능
블로트(blótnon)는 단순한 희생 의식을 넘어, 노르드 신성 구조물에서 이루어진 모든 의례 활동의 중심이었다.3. 5. 1. 신들의 도움
소는 법적인 문제에서 신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자주 희생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 블로트(Blótnon)는 좋은 수확을 얻기 위해서도 행해졌으며, 일부 문헌에는 til árs ok friðarnon("좋은 수확과 평화를 위해") 블로트를 거행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Fagrskinna와 같은 일부 자료에서는 Hákon Sigurðarson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훼손된 성지를 복원하고 이전보다 더 많은 블로트를 거행하자 풍요의 시대가 도래하여 곡물 수확량이 증가하고 청어가 풍부해졌다고 기록하며, 이러한 의식들이 효과가 있다고 제시한다. 이는 정당한 통치자는 성지를 보호하고 블로트를 유지하여 신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이는 결국 백성의 행운으로 이어진다는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장되어 왔다.[2]3. 5. 2. 점술
점술은 어떤 블로트non에서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잉글링가 사가에는 소나르블로트non(돼지 희생)와 관련하여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듀웰은 이 연관성이 스노리의 작품에서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블로트스판non("점술에 사용되는 칩")과 같은 복합어에서 그 연관성이 보인다는 주장도 있다.[4]에이르비갸 사가에 따르면, 토르올프 모스트라스케기는 노르웨이를 떠나기 전에 블로트non를 행함으로써 아이슬란드 정착을 준비했다. 그는 큰 희생을 준비하고, 그의 사랑하는 친구 토르에게 왕과 화해할지 아니면 다른 운명을 찾기 위해 나라를 떠날지 물었다. 그리고 그 응답은 토르올프를 아이슬란드로 향하게 했다.Þórólfr Mostrarskegg fekk at blóti miklu ok gekk til fréttar við Þór, ástvin sinn, hvárt hann skyldi sættast við konung eða fara af landi brott ok leita sér annarra forlaga, en fréttin vísaði Þórólfi til Íslandi.non
란드나마보크의 스투르루보크와 호우크스보크 버전에 따르면, 잉골프라는 남자는 토르올프와 비슷한 방식으로 블로트non를 행하여 형제 횔레이프와 함께 아이슬란드에 정착할 준비를 했다. 그 겨울 잉골프는 큰 희생을 준비하고 그의 운명을 위해 징조를 찾았지만, 횔레이프는 절대 희생을 바치려 하지 않았다. 그 응답은 잉골프를 아이슬란드로 향하게 했다.Þenna vetr fekk Ingólfr at blóti miklu ok leitaði sér heilla um forlög sín, en Hjörleifr vildi aldri blóta. Fréttin vísaði Ingólfi til Íslands.non
횔레이프는 나중에 그의 노예들에게 살해되었고, 잉골프는 이를 이교도 관습을 지키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
4. 종교 및 제례 지도자
학자들은 후기 철기 시대 스칸디나비아의 종교 지도자 개념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다. Folke Ström과 같은 일부 학자들은 전문적인 사제직이 없었으며 통치자들이 이 역할을 맡았다고 주장한다. 종교적 역할에 대한 공식적인 훈련에 대한 강력한 증거는 없지만, 엘리트들에 의한 신성한 장소 조직과 blót|블로트non는 고대 노르드 텍스트에서 잘 입증되어 있다.[1]
inn mesti blótmaðr|inn mesti blótmaðr|가장 열렬한 이교도 숭배자non라고 불린 시구르르 흘라다야를과 같이 blót|블로트non에 참여한 특정 엘리트들이 강조되었는데, 그는 왕을 대신하여 트뢰넬라그에서 모든 제물을 바치는 잔치를 유지했다고 묘사된다. 이 개념은 지역 통치자일 가능성이 있는 하두울르프르라는 사람이 좋은 수확을 위해 blót|블로트non를 거행했다고 기록된 스텐토프텐 석비에서도 입증된다. 아이슬란드에서는 고다르(고디)가 종종 blót|블로트non를 포함한 공공 종교 활동을 이끄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
자료는 노르웨이와 스베트유드에서 통치자가 신하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공공 blót|블로트non에 참여해야 하는 방식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한다. Hákonar saga góða|호콘의 사가non는 기독교 왕 호콘이 트뢰넬라그에 와서 blót|블로트non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아 지역 농부와 족장들을 화나게 한 과정을 설명한다. 프로스타팅에서 그는 아버지처럼 블로트에 참여하라는 요청을 받았고, 나중에 메레에서 열린 blótveizla|블로트베이즐라non("제물 잔치")에서 말 간을 먹도록 강하게 압박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이교도 왕 블로트스베인은 Hervarar saga ok Heiðreks|헤르바라르 사가 오크 헤이드레크스non에 따르면 스베아르의 왕이 되면서 말 희생에 참여하고 말 고기를 먹었다. 이 사가의 U 버전은 또한 블로트스베인이 그의 매형인 잉기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옛 관습을 지키기를 거부하여 스베아르에 의해 베스테르예틀란드로 쫓겨난 후 왕이 된 과정을 설명한다. 이는 또한 blót|블로트non의 수행을 거부하여 쫓겨난 브레멘의 아담의 아눈드 야콥 왕에 대한 묘사와 매우 유사하다.[3]
볼사 사트르의 húsfreyja|후스프레이야non("주부")와 아우스트파라르비수르에서 알파블로트를 개최하는 것으로 언급된 húsfreyja|후스프레이야non와 같이 여성들이 blót|블로트non를 이끌었다는 증거가 있다.[4] Hákonar saga góða|호콘의 사가non와 같은 상세한 기록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는 일부 여성들이 의식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축제를 열고, 농장을 운영하는 더 넓은 게르만 맥락과 일치한다. 이는 베오울프, 에길의 사가 및 하스미라 룬석과 같은 문헌에서 입증되었으며, 고위 신분 여성의 매장을 통해 고고학적 기록에서도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5]
5. 정기적인 블로트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서는 겨울의 시작(vetrnætr|겨울 밤non)을 기념하는 블로트(Blótnon)가 열렸다. 기슬라 사가 수르소나르에 따르면, 고디 토르그림르 토르스테인손이 축제 기간 동안 프레이르에게 제물을 바쳤다.[1] 이 시기는 새해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디시르를 위해 열린 디사블로트와 동일할 수 있다. 잉글링가 사가에서는 웁살라에서 디사블로트가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2][3]
플라테이아르보크에 보존된 볼사 사트르에는 11세기 초 북부 노르웨이의 한 가족이 가을에 이전에 죽였던 말의 보존된 음경에 매일 밤 블로트를 수행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알파블로트는 1020년경에 쓰여진 아우스트파라비수르의 스베트유드에서 가을에 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5]
앵글로색슨 문맥에서, blótang는 올드 잉글리시 달력의 한 달인 블로트모나스에서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대략 그레고리력의 11월에 해당한다.
메르제부르크의 티에트마르는 11세기 초에 작성한 연대기에서 데인족이 셸란 섬의 레이레에 주요 숭배 중심지를 두고 9년마다 그곳에 모여 대규모 희생 의식을 거행했다고 기록했다.[1]
라틴어 원문[2] | 번역[3] |
---|---|
Sed quia ego de hostiis eorundem antiquis mira audivi , haec indiscussa praeterire nolo. Eit unus in his partibus locus, caput istius regni, Lederun nomine, in pago qui Selon dicitur, ubi post VIIII, annos mense Ianuario post hoc tempus, quo nos theophaniam domini celebramus, omnes convenerunt et ibi diis suismet LXXXX et VIIII. homines et totidem equos, cum canibus et gallis pro accipitribus oblatis immolant, pro certo, ut praedixi, putantes, hos eisdem apud inseros fervituros et commissa crimina apud eosdem placaturos. Quam bene Rex noster fecit, qui eos a tam execrando ritu prolhibuit!lt | 나는 그들의 고대 제물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것들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다. 그 지역에서 왕국의 중심지는 셀란드 지역의 레이레라는 곳이다. 9년마다 1월, 즉 우리가 주님의 현현을 기념하는 날(1월 6일) 이후에 그들은 모두 이곳에 모여 그들의 신들에게 99명의 인간과 같은 수의 말, 개와 수탉(수탉은 매 대신 사용됨)을 번제물로 바쳤다. 내가 말했듯이 그들은 이것들이 지하에 사는 자들과 함께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 왕은 그들이 그렇게 혐오스러운 의식을 행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잘했다. |
티에트마르가 글을 쓸 당시 덴마크는 명목상 기독교 국가가 된 지 거의 50년이 되었고, 10세기 말에 레이레에서 대규모의 블로트가 여전히 행해졌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티에트마르는 이교도 덴마크인들을 가능한 한 사납고 뒤떨어진 존재로 묘사하기 위해 많은 숫자를 사용하여 그들의 야만성을 보여주려 했다. 그는 또한 그에게 이용 가능한 기존 문헌을 바탕으로 그의 묘사를 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이교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인간을 희생했다는 오랜 전통의 일부를 형성했다. 이러한 자료들은 그가 덴마크 이교도 인구를 더욱 비인간화하고 그들을 악으로 묘사할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4]
연대기 작가 브레멘의 아담은 11세기 중반에 쓰여진 함마부르크 교회 연대기에서 스웨덴의 웁살라 신전에서 9년마다 블로트가 행해졌다고 묘사했다.[1]
라틴어 원문[2] | 번역[3] |
---|---|
Omnibus itaque diis suis attributos habent sacerdotes, qui sacrificia populi offerant. Si pestis et famis imminet, Tbor ydolo lybatur, si bellum, Wodani, si nuptiae celebrandae sunt, Fricconi. Solet quoque post novem annos communis omnium Sueoniae provintiarum sollempnitas in Ubsola celebrari. Ad quam videlicet sollempnitatem nulli praestatur immunitas. Reges et populi, omnes et singuli sua dona tramsmittunt ad Ubsolam, et quod omni poena crudelius est, illi qui iam induerunt christianitatem, ab illis se redimunt cerimoniis. Sacriticium itaque tale est. Ex omni animante, quod masculinum est, novem capita offeruntur, quorum sanguine deos placari mos est. Corpora autem suspenduntur in lucum, oui proximus est templo. Is enim lucus tam sacer est gentilibus, ut singulae arbores eius ex morte vel tabo immolatorum divinae credantur. Ibi etiam canes et equi pendent cum hominibus... Ceterum neniae, quae in eiusmodi ritu libationis fieri solent, multiplices et inhonestae ideoque melius reticendae.la | 그들의 모든 신들을 위해 백성들을 위한 희생을 바치는 사제들이 임명되어 있다. 역병과 기근이 위협하면, 토르 우상에게 술을 붓고, 전쟁일 때는 오딘에게, 결혼을 축하해야 할 때는 프릭코에게 술을 부었다. 또한 스웨덴의 모든 지방의 일반 축제를 웁살라에서 9년마다 기념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축제에 참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면제되지 않는다. 왕과 백성은 모두 각자 웁살라에 선물을 보내고, 어떤 종류의 처벌보다 더 괴로운 것은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이러한 의식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희생은 이런 성격을 띤다. 수컷인 모든 생물체 중에서 아홉 머리를 바치며, 그 피로 이러한 종류의 신들을 달래는 것이 관례이다. 그들은 시체를 신전에 인접한 신성한 숲에 매달아 놓는다. 이제 이 숲은 이교도들에게 매우 신성해서 희생자들의 죽음이나 부패로 인해 그 안에 있는 모든 나무가 신성하다고 믿어진다. 개와 말도 사람들과 함께 거기에 매달려 있다. 게다가, 이러한 종류의 희생 의식에서 관례적으로 불려지는 주문은 다양하고 부적절하므로, 그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이 더 낫다. |
루돌프 시멕은 브레멘의 아담이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기독교 선교가 성공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교도들이 피의 희생을 우상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사악한 행위를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고 인식하여, 그 긴급성을 강조하려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티트마르 폰 메르제부르크의 연대기와 같은 기록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이 9년마다 반복된다는 것과 같은 세부 사항의 출처일 수 있다고 제안하지만, 두 종교적 장소 모두에서 유사한 희생이 행해졌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기록이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 의해 뒷받침되며, 희생된 사람들을 나무에 매다는 것과 같은 주목할 만한 세부 사항은 그가 접근할 수 있었던 출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4]
5. 1. 연간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서는 겨울의 시작(vetrnætr|겨울 밤non)을 기념하는 블로트(Blótnon)가 열렸다. 기슬라 사가 수르소나르에 따르면, 고디 토르그림르 토르스테인손이 축제 기간 동안 프레이르에게 제물을 바쳤다.[1] 이 시기는 새해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디시르를 위해 열린 디사블로트와 동일할 수 있다. 잉글링가 사가에서는 웁살라에서 디사블로트가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2][3]플라테이아르보크에 보존된 볼사 사트르에는 11세기 초 북부 노르웨이의 한 가족이 가을에 이전에 죽였던 말의 보존된 음경에 매일 밤 블로트를 수행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알파블로트는 1020년경에 쓰여진 아우스트파라비수르의 스베트유드에서 가을에 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5]
앵글로색슨 문맥에서, blótang는 올드 잉글리시 달력의 한 달인 블로트모나스에서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대략 그레고리력의 11월에 해당한다.
5. 1. 1. 겨울의 시작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서 겨울의 시작에 열리는 블로트(Blótnon)는 vetrnætrnon ("겨울 밤")을 기념하며, 여러 자료에서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기슬라 사가 수르소나르에서는 고디 토르그림르 토르스테인손이 축제 기간 동안 프레이르에게 제물을 바친다.[1] 이 시기는 새해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안되었으며, 디시르를 위해 명명된 디사블로트와 동일할 수 있다. 잉글링가 사가에서는 웁살라에서 디사블로트가 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3]5. 1. 2. 겨울 후반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서 겨울의 시작에 열리는 블로트는 vetrnætr|겨울 밤non을 기념하며, 여러 자료에서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기슬라 사가 수르소나르에서는 고디 토르그림르 토르스테인손이 축제 기간 동안 프레이르에게 제물을 바친다.[1] 이 시기는 새해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안되었으며, 디시르를 위해 명명된 디사블로트와 동일할 수 있다. 디사블로트는 잉글링가 사가에서 웁살라에서 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3]5. 1. 3. 여름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서는 겨울의 시작, 즉 vetrnætrnon ("겨울 밤")을 기념하는 블로트가 열렸다. 기슬라 사가 수르소나르에 따르면, 고디 토르그림르 토르스테인손이 축제 기간 동안 프레이르에게 제물을 바쳤다고 한다. 이 시기는 새해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디시르를 위해 열린 디사블로트와 동일할 수 있다. 잉글링가 사가에서는 웁살라에서 디사블로트가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1][2][3]
5. 1. 4. 기타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서 겨울의 시작에 열리는 블로트(Blótnon)는 vetrnætrnon ("겨울 밤")을 기념하며, 여러 자료에서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기슬라 사가 수르소나르에서는 고디 토르그림르 토르스테인손이 축제 기간 동안 프레이르에게 제물을 바쳤다고 한다.[1] 이 시기는 새해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제안되었으며, 디시르를 위해 명명된 디사블로트와 동일할 수 있다. 디사블로트는 잉글링가 사가에서 웁살라에서 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3]스칸디나비아에서 열린 것으로 증명된 또 다른 두 개의 blótnon가 각각 단일 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플라테이아르보크에 보존된 볼사 사트르는 11세기 초 북부 노르웨이의 한 가족을 묘사하는데, 이 가족은 가을에 이전에 죽였던 말의 보존된 음경에 매일 밤 blótnon를 수행한다. 알파블로트는 1020년경에 쓰여진 아우스트파라비수르의 스베트유드에서 가을에 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4][5]
앵글로색슨 문맥에서, blótang는 올드 잉글리시 달력의 한 달인 블로트모나스에서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대략 그레고리력의 11월에 해당한다.
5. 2. 9년마다
메르제부르크의 티에트마르는 11세기 초에 작성한 연대기에서 데인족이 셸란 섬의 레이레에 주요 숭배 중심지를 두고 9년마다 그곳에 모여 대규모 희생 의식을 거행했다고 기록했다.[1]라틴어 원문[2] | 번역[3] |
---|---|
Sed quia ego de hostiis eorundem antiquis mira audivi , haec indiscussa praeterire nolo. Eit unus in his partibus locus, caput istius regni, Lederun nomine, in pago qui Selon dicitur, ubi post VIIII, annos mense Ianuario post hoc tempus, quo nos theophaniam domini celebramus, omnes convenerunt et ibi diis suismet LXXXX et VIIII. homines et totidem equos, cum canibus et gallis pro accipitribus oblatis immolant, pro certo, ut praedixi, putantes, hos eisdem apud inseros fervituros et commissa crimina apud eosdem placaturos. Quam bene Rex noster fecit, qui eos a tam execrando ritu prolhibuit!lt | 나는 그들의 고대 제물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것들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다. 그 지역에서 왕국의 중심지는 셀란드 지역의 레이레라는 곳이다. 9년마다 1월, 즉 우리가 주님의 현현을 기념하는 날(1월 6일) 이후에 그들은 모두 이곳에 모여 그들의 신들에게 99명의 인간과 같은 수의 말, 개와 수탉(수탉은 매 대신 사용됨)을 번제물로 바쳤다. 내가 말했듯이 그들은 이것들이 지하에 사는 자들과 함께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 왕은 그들이 그렇게 혐오스러운 의식을 행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잘했다. |
티에트마르가 글을 쓸 당시 덴마크는 명목상 기독교 국가가 된 지 거의 50년이 되었고, 10세기 말에 레이레에서 대규모의 블로트non가 여전히 행해졌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티에트마르는 이교도 덴마크인들을 가능한 한 사납고 뒤떨어진 존재로 묘사하기 위해 많은 숫자를 사용하여 그들의 야만성을 보여주려 했다. 그는 또한 그에게 이용 가능한 기존 문헌을 바탕으로 그의 묘사를 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이교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인간을 희생했다는 오랜 전통의 일부를 형성했다. 이러한 자료들은 그가 덴마크 이교도 인구를 더욱 비인간화하고 그들을 악으로 묘사할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4]
5. 2. 1. 레이레
연대기 작가 브레멘의 아담은 11세기 중반에 쓰여진 함마부르크 교회 연대기에서 스웨덴의 웁살라 신전에서 9년마다 블로트가 행해졌다고 묘사했다.[1]라틴어 원문[2] | 번역[3] |
---|---|
Omnibus itaque diis suis attributos habent sacerdotes, qui sacrificia populi offerant. Si pestis et famis imminet, Tbor ydolo lybatur, si bellum, Wodani, si nuptiae celebrandae sunt, Fricconi. Solet quoque post novem annos communis omnium Sueoniae provintiarum sollempnitas in Ubsola celebrari. Ad quam videlicet sollempnitatem nulli praestatur immunitas. Reges et populi, omnes et singuli sua dona tramsmittunt ad Ubsolam, et quod omni poena crudelius est, illi qui iam induerunt christianitatem, ab illis se redimunt cerimoniis. Sacriticium itaque tale est. Ex omni animante, quod masculinum est, novem capita offeruntur, quorum sanguine deos placari mos est. Corpora autem suspenduntur in lucum, oui proximus est templo. Is enim lucus tam sacer est gentilibus, ut singulae arbores eius ex morte vel tabo immolatorum divinae credantur. Ibi etiam canes et equi pendent cum hominibus... Ceterum neniae, quae in eiusmodi ritu libationis fieri solent, multiplices et inhonestae ideoque melius reticendae.la | 그들의 모든 신들을 위해 백성들을 위한 희생을 바치는 사제들이 임명되어 있다. 역병과 기근이 위협하면 토르 우상에게 술을 붓고, 전쟁일 때는 오딘에게, 결혼을 축하해야 할 때는 프릭코에게 술을 부었다. 또한 스웨덴의 모든 지방의 일반 축제를 웁살라에서 9년마다 기념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축제에 참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면제되지 않는다. 왕과 백성은 모두 각자 웁살라에 선물을 보내고, 어떤 종류의 처벌보다 더 괴로운 것은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이러한 의식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희생은 이런 성격을 띤다. 수컷인 모든 생물체 중에서 아홉 머리를 바치며, 그 피로 이러한 종류의 신들을 달래는 것이 관례이다. 그들은 시체를 신전에 인접한 신성한 숲에 매달아 놓는다. 이제 이 숲은 이교도들에게 매우 신성해서 희생자들의 죽음이나 부패로 인해 그 안에 있는 모든 나무가 신성하다고 믿어진다. 개와 말도 사람들과 함께 거기에 매달려 있다. 게다가, 이러한 종류의 희생 의식에서 관례적으로 불려지는 주문은 다양하고 부적절하므로, 그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이 더 낫다. |
루돌프 시멕은 브레멘의 아담이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기독교 선교가 성공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교도들이 피의 희생을 우상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사악한 행위를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고 인식하여 그 긴급성을 강조하려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티트마르 폰 메르제부르크의 연대기와 같은 기록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이 9년마다 반복된다는 것과 같은 세부 사항의 출처일 수 있다고 제안하지만, 두 종교적 장소 모두에서 유사한 희생이 행해졌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기록이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 의해 뒷받침되며, 희생된 사람들을 나무에 매다는 것과 같은 주목할 만한 세부 사항은 그가 접근할 수 있었던 출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4]
5. 2. 2. 웁살라
브레멘의 아담은 11세기 중반에 쓰여진 함마부르크 교회 연대기에서 스웨덴의 웁살라 신전에서 9년마다 블로트가 행해졌다고 묘사했다.[1]라틴어 원문과 번역은 다음과 같다.
라틴어 텍스트[2] | 번역[3] |
---|---|
Omnibus itaque diis suis attributos habent sacerdotes, qui sacrificia populi offerant. Si pestis et famis imminet, Tbor ydolo lybatur, si bellum, Wodani, si nuptiae celebrandae sunt, Fricconi. Solet quoque post novem annos communis omnium Sueoniae provintiarum sollempnitas in Ubsola celebrari. Ad quam videlicet sollempnitatem nulli praestatur immunitas. Reges et populi, omnes et singuli sua dona tramsmittunt ad Ubsolam, et quod omni poena crudelius est, illi qui iam induerunt christianitatem, ab illis se redimunt cerimoniis. Sacriticium itaque tale est. Ex omni animante, quod masculinum est, novem capita offeruntur, quorum sanguine deos placari mos est. Corpora autem suspenduntur in lucum, oui proximus est templo. Is enim lucus tam sacer est gentilibus, ut singulae arbores eius ex morte vel tabo immolatorum divinae credantur. Ibi etiam canes et equi pendent cum hominibus... Ceterum neniae, quae in eiusmodi ritu libationis fieri solent, multiplices et inhonestae ideoque melius reticendae.la | 그들의 모든 신들을 위해 백성들을 위한 희생을 바치는 사제들이 임명되어 있다. 역병과 기근이 위협하면, 토르 우상에게 술을 붓고, 전쟁일 때는 오딘에게, 결혼을 축하해야 할 때는 프릭코에게 술을 부었다. 또한 스웨덴의 모든 지방의 일반 축제를 웁살라에서 9년마다 기념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축제에 참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면제되지 않는다. 왕과 백성은 모두 각자 웁살라에 선물을 보내고, 어떤 종류의 처벌보다 더 괴로운 것은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이러한 의식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것이다. 희생은 이런 성격을 띤다. 수컷인 모든 생물체 중에서 아홉 머리를 바치며, 그 피로 이러한 종류의 신들을 달래는 것이 관례이다. 그들은 시체를 신전에 인접한 신성한 숲에 매달아 놓는다. 이제 이 숲은 이교도들에게 매우 신성해서 희생자들의 죽음이나 부패로 인해 그 안에 있는 모든 나무가 신성하다고 믿어진다. 개와 말도 사람들과 함께 거기에 매달려 있다. 게다가, 이러한 종류의 희생 의식에서 관례적으로 불려지는 주문은 다양하고 부적절하므로, 그것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이 더 낫다. |
루돌프 시멕은 브레멘의 아담이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기독교 선교가 성공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교도들이 피의 희생을 우상에게 바치는 것과 같은 사악한 행위를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고 인식하여, 그 긴급성을 강조하려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티트마르 폰 메르제부르크의 연대기와 같은 기록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이 9년마다 반복된다는 것과 같은 세부 사항의 출처일 수 있다고 제안하지만, 두 종교적 장소 모두에서 유사한 희생이 행해졌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기록이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 의해 뒷받침되며, 희생된 사람들을 나무에 매다는 것과 같은 주목할 만한 세부 사항은 그가 접근할 수 있었던 출처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4]
6. 중세 기독교인들의 수용
중세 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블로트는 점차 금지되거나 기독교 문화에 흡수되는 과정을 겪었다.
몇몇 개종 이야기들은 블로트를 이교도들이 믿는 존재로 가장하는 악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해로운 행위로 묘사했다. 예를 들어, 올라프 스아드 아우스 게이르스타다알프스 이야기는 블로트가 죽은 자를 트롤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외그문다르 다트 듀츠에서는 프레이르를 악마와 동일시하며, 프레이르 조각상에 대한 제물이 악마가 그것을 통해 말하게 한다고 설명한다.[1]
앵글로색슨의 테오도르의 참회록은 "악마에게 희생을 바치는 자"에게 참회를 부과했고, 켄트의 위트레드 왕의 법률은 제물을 받는 자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을 금지했다.[1] Norðhymbra preosta lagu에서는 블로트가 명시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이를 어기면 벌금을 내야 했다.[2]
초기 노르웨이 법전은 블로트 행위를 처벌 가능한 범죄로 규정했다. 구(舊)굴라팅 법은 이교 신, 언덕, hǫrgarnon에 블로트를 행하는 것을 금지하고, 벌금, 참회, 국외 추방을 처벌로 명시했다. 스베르 시구르드손의 교회법은 이교도 vættir에게 블로트를 행하는 것을 더욱 금지했다.[3][4] 아이슬란드에서는 블로트가 사적으로 허용되다가 곧 완전히 금지되었다.[5]
구탈라겐은 블로트를 행하는 자뿐만 아니라 이교도 관습을 따르는 자에게도 벌금을 부과했다. 스웨덴의 우플란트 법은 숲과 돌 숭배, affguþumnon ("우상")에게 희생을 바치는 것을 금지했다.
엘리트 계층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블로트 의식은 때때로 기독교 전통과 혼합되었다. ''Ágrip''에는 올라프 트리그바손 왕이 이교 축제 대신 기독교 축제 음주를 제정했다는 기록이 있다.[1]
기존 이교 전통을 기독교 전통에 통합하는 과정은 til árs ok friðarnon ("풍작과 평화를 위하여") 의식에서도 나타났다. 이 표현은 뇨르드와 프레이르의 건배에 사용되기도 했지만, 그리스도와 마리아에게 감사하는 기독교적 맥락에서도 사용되었다.[2]
6. 1. 악령을 강화하는 블로트
몇몇 개종 þættir는 기독교 교리와 이교도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단편 소설들로, blót|블로트non를 수행하는 공동체가 이점을 얻지만, 이는 이교도들이 믿는, 도움을 주는 존재로 가장하는 악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해로운 행위로 묘사된다.[1]올라프 스아드 아우스 게이르스타다알프스는 개종 þáttr의 하나로, 왕 올라프 디그르베인이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죽은 후 자신에게 blót|블로트non를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죽은 자를 트롤로 만든다고 주장하며, 이 악마들이 풍년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해롭기도 하다고 설명한다. 그가 죽은 후 흉작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그의 요청을 무시하고 그를 숭배하며 "게이르스타다알프르"(게이르스타드의 엘프)라고 부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확량이 개선되지만, 그들이 blót|블로트non를 중단하자 선물을 받던 악령들이 분노한다. 이 이야기는 작가가 기독교 악마론과 죽은 후에도 위엄을 유지해야 하는 "고귀한 이교도"의 생각을 불완전하게 결합하려 한 결과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
또 다른 개종 þáttr인 외그문다르 다트 듀츠에서 작가는 프레이르와 악마를 동일시하며, 프레이르의 조각상에 대한 끊임없는 제물이 악마가 그것을 통해 말하여 프레이르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야기 후반부에서 올라프 트리그바손은 군나르라는 노르웨이인이 악마를 물리치도록 정신적으로 도왔고, 악마를 나무 조각상에서 몰아냈다. 그러자 군나르는 프레이르인 척하며 신상의 옷을 입고 신에게 숭배자들로부터 귀중한 선물을 받았으며, 그들은 그때부터 동물을 희생하는 것을 멈추었다.[1]
6. 2. 금지와 억압
앵글로색슨 테오도르의 참회록은 "악마에게 희생을 바치는 자"에게 1년에서 10년의 참회를 부과했는데, 여기서 "악마"는 이교 신들과 숭배와 관련된 존재들을 지칭했을 것이다. 참회록은 또한 제물을 받는 자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을 금지했다. 이와 유사한 금지는 켄트의 위트레드 왕의 법률과 같은 잉글랜드의 후기 법전 전반에서 나타난다.[1] Norðhymbra preosta lagu에서는 블로트가 우상 숭배와 같은 이교도적 관행과 함께 명시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이를 행하다 적발된 사람은 교회와 왕에게 각각 5마르크를 지불해야 했다.[2]초기 노르웨이 법전은 명시적으로 blótnon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처벌 가능한 범죄로 만들었다. 11세기 중반경의 구(舊)굴라팅 법은 이교 신, 언덕 또는 hǫrgarnon에게 blótnon을 행하는 것을 금지하고, 벌금, 참회,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국외 추방을 처벌로 명시했다. 이는 스베르 시구르드손의 교회법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이교도 vættir에게 blótnon을 행하는 것을 더욱 금지했고, blótnon을 금지하는 프로스타팅 법과 일치한다.[3][4] 아이슬란드가 기독교를 주요 종교로 채택했을 때, blótnon은 사적으로 수행되는 한 잠시 동안 허용되었으며, 공개적으로 관찰될 경우 덜한 불법화 처벌을 받았다. 이 예외는 곧 폐지되었고, 그 관행은 완전히 금지되었다.[5]
구탈라겐의 Af blotannon 조항은 blótnon을 행하는 자뿐만 아니라 더 광범위하게 이교도 관습을 따르는 자에게도 벌금을 부과한다. 또한 기독교 관습을 따르지 않을 경우 음식이나 음료로 기도를 하는 것도 금지한다. 스웨덴에서 우플란트 법은 숲과 돌 숭배를 금지하고 affguþumnon ("우상")에게 희생을 바치는 것을 금지했다.
6. 3. 기독교 문화로의 통합
엘리트 계층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블로트non(blót) 의식 음주는 때때로 새로 유입된 전통과 혼합되었다. 12세기 말 노르웨이 왕들의 역사인 ''Ágrip''에는 올라프 트리그바손 왕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1]: "...이교 축제와 희생을 폐지하고, 백성을 위해 율(Yule)과 부활절, 성 요한 축일의 에일, 미카엘 축일의 가을 에일과 같은 축제 음주를 제정했다."[1]
기존의 이교 전통을 기독교 전통에 통합하는 이러한 과정은 til árs ok friðarnon ("풍작과 평화를 위하여") 의식적 공식에서도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다. 호콘 선왕의 사가에서는 뇨르드와 프레이르의 건배의 일부로 사용되었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기독교적 맥락에서 사용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덴 외드레 굴라팅-로브(Den ældre Gulathings-Lov)는 만성절과 크리스마스 동안 마시는 맥주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에게 감사하기 위해 til árs. oc til friðarnon ("풍년과 평화를 위하여")라고 축성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2]
7. 현대
교회 관계자들에 의해 blótnon이 금지된 후에도, 경관에 산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에게 음식과 음료를 바치는 행위는 지역 민속 관습의 일부로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톰테르와 같은 집의 정령에게 바치는 행위가 포함되는데, 이는 heliga Birgitta와 Olaus Magnus와 같은 개인들의 중세 비판과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민담에서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다.[1] 율에서의 blótnon은 샌드윅의 각 가구가 돼지를 기르는 경우 12월 17일에 암퇘지 한 마리를 도살하는 관습의 기원일 수 있으며, 이는 '소우 데이'로 알려져 있다.[2] 비슷한 관습이 19세기에 기록되었는데, 노스 로날드세이의 각 가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율 양'으로 알려진 양을 도살했다.[3]
재건주의 추종자들은 현대 게르만 이교주의의 블로트 의식을 1970년대부터 현대적 맥락에서 발전시켜 왔다.[4] 이 관행에서 동물 희생은 일반적으로 음식이나 음료를 바치는 것으로 대체되지만, 음식 공유와 관계 강화에 큰 비중을 둔다.[5]
참조
[1]
서적
Das Heilige Fest: Rituale des traditionellen germanischen Heidentums in heutiger Zeit
https://books.google[...]
Edition Roter Drache
[2]
문서
blœt; blét, blétum; blótinn, with acc. of that which is worshipped, with dat. of the object sacrificed; Zoëga, ''A Concise Dictionary of Old Icelandic''
[3]
문서
Steinsland & Meulengracht 1998:74
[4]
서적
Heimskringla
University of Texas Press
[5]
웹인용
Archived copy
http://www.fornsidr.[...]
2012-08-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