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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프랑수아 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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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프랑수아 밀레는 1814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농부의 아들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파리 국립 고등 미술 학교에서 폴 들라로슈에게 배우며 화가로서의 길을 걸었고, 1840년대 중반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교류하며 농민의 삶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849년 바르비종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농민 화가로 활동하며 '씨 뿌리는 사람',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등 대표작을 남겼다. 밀레의 작품은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며, 농민의 삶의 애환과 노동의 가치를 종교적인 숭고함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작품은 빈센트 반 고흐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근현대 미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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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프랑수아 밀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나다르가 찍은 장프랑수아 밀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복사본
나다르가 찍은 초상 사진, 1856-58년경
본명장프랑수아 밀레
출생일1814년 10월 4일
출생지그레빌-아그, 노르망디, 프랑스
사망일1875년 1월 20일
사망지바르비존, Île de France, 프랑스
묘지세느에마른현 샤이이-앙-비에르 묘지
묘지 좌표Coord|48|28|16.76|N|2|36|29.03|E|type:landmark|display=inline
국적프랑스
직업
분야회화
사조사실주의
영향 받은 예술가코로
영향을 준 예술가인상주의
반 고흐
달리
경력
교육에콜 데 보자르
후원자알프레드 상시에
수상레지옹 도뇌르 훈장 (1868년)

2. 생애

장프랑수아 밀레는 노르망디 지방의 그리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으로서 가업을 이을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18세 무렵부터 셰르부르의 화가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유년 시절) 교사의 추천으로 장학금을 받아 1837년부터 파리에콜 데 보자르(국립 미술 학교)에 입학하여 폴 들라로슈에게서 배웠다. 그러나 1839년 로마 대상에 낙선하여 학교를 떠났다.(→파리에서의 초기 활동 (1833-1849))

1840년 초상화로 파리 살롱에 처음 입선하여 셰르부르에서 초상화 주문을 받았다. 1841년 첫 번째 아내 폴린과 결혼하여 파리로 이주했으나, 1844년 폴린을 결핵으로 잃었다.(→파리에서의 초기 활동 (1833-1849)) 1845년 본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트린과 함께 다시 파리로 가서 초상화나 여성 누드화를 제작하며 생활했다. 이 무렵, 바르비종파 동료가 되는 테오도르 루소와 콩스탕 트로앵, 그리고 후원자 알프레드 상시에를 만났다. 1847년 살롱에 신화화를 입선시켰다.(→파리에서의 초기 활동 (1833-1849)) 1848년, 2월 혁명으로 공화파가 집권하면서 미술계의 민주화가 진행되었고, 밀레는 정치적 지원자를 얻었다. 이 해의 살롱에 출품한 농민화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이 호평을 받아 정부 주문을 받게 되었다.(→파리에서의 초기 활동 (1833-1849))

1849년, 파리에서 콜레라가 유행하고 밀레의 정치적 지원자가 실각하자, 바르비종으로 이주하여 루소 등의 일원이 되었다. 1851년 살롱에 '씨 뿌리는 사람'을 제출하여 입선했지만, 농민의 비참한 생활을 호소하는 정치적 메시지로 받아들여져 좌우 양쪽의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바르비종에서의 활동과 전성기 (1849-1870)) 제2 제정 시대인 1850년대에는 농민화를 중심으로 살롱에 응모를 계속했고, 그중에는 높은 평가를 얻는 작품도 있었지만 혹평을 받는 작품도 있었다. 1857년 살롱에 '이삭 줍는 여인들'을 출품했고, 이 또한 정치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바르비종에서의 활동과 전성기 (1849-1870)) 1860년대에도 호평과 악평을 경험했지만, 1864년 살롱에 출품한 '양치기 소녀'가 절찬을 받아 밀레의 평가는 급상승했다. 1865년 이후 수집가로부터 파스텔화 주문을 대량으로 받아, 특히 수많은 풍경화를 밝은 색채의 파스텔로 그리며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한 방을 배정받아 9점의 대표작을 전시하여 거장으로서의 명성을 확립했다.(→바르비종에서의 활동과 전성기 (1849-1870))

1860년대 말부터는 건강 악화에 시달리면서 "사계" 연작 등에 매달렸다. 1870년 보불 전쟁과 1871년 파리 코뮌으로 인해 셰르부르로 피신하면서 "사계" 연작 제작은 중단되었지만, 죽은 친구 루소에 대한 진혼의 의미를 담은 명작 '봄'을 완성했다. 1874년 무렵부터 급속히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1875년 사망했다.(→만년 (1870-1875))

2. 1. 유년 시절

밀레는 1814년 프랑스 노르망디 그레빌 아그의 작은 마을 그뤼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178] 그는 코탕탱 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농부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다.

밀레의 생가


밀레는 9남매 중 장남으로, 집안의 농사일을 도우며 낫질, 건초 만들기, 곡식 다루기 등 다양한 농작업을 익혔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한다.[3]

가톨릭 사제였던 삼촌의 영향으로 라틴어문학을 배웠으며,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인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178] 18세 무렵에는 셰르부르의 화가에게서 그림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30]

2. 2. 파리에서의 초기 활동 (1833-1849)

밀레는 1840년 파리 살롱에 출품한 초상화 중 친구를 그린 작품이 입선하면서 셰르부르로 돌아가 초상화가로 활동했다.[6] 1841년에는 양복점 딸 폴린 비르지니 오노와 결혼하여 파리로 이주했다.[39] 그러나 1843년 살롱에서 낙선하고, 1844년 4월 아내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다시 셰르부르로 돌아갔다.[6]

셰르부르에서 밀레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많은 주문을 받았다. 1840년부터 1843년까지 50점 이상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셰르부르 시의회로부터 전 시장의 초상화 주문을 받았으나, 고인을 알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완성작은 평판이 좋지 않았고, 시의회는 보수를 깎았다. 이에 밀레는 낙담하여 초상화를 시의회에 기증했다.[40]

1842년, 밀레는 아내와 파리로 이주했지만, 1842년과 1843년 살롱에 응모한 작품은 낙선했다.[41] 아내는 건강이 좋지 않은 도시 생활과 가난으로 결핵에 걸려 1844년 사망했다.[42] 같은 해 살롱에 두 점이 입선했지만, 아내의 죽음에 낙담한 밀레는 파리를 떠났다.[43]

고향으로 돌아온 밀레는 가정부였던 카트린 르메르와 교제를 시작했으나, 가족의 반대에 부딪혔다. 셰르부르 시립 대학의 미술 교수로 초빙되었지만, 이를 거절하고 다시 파리로 가기로 결심했다. 파리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르아브르에서 개인전을 열고 그림을 팔거나 초상화 주문을 받아 1년 동안 900프랑을 모았다. 이 시기에는 파스텔 톤의 로코코풍 회화를 제작하여 "화려한 수법(마니에르 플뢰리)"의 시대라고 불린다.[45]

1845년 말, 카트린과 파리에 도착한 밀레는 1846년 초 로슈슈아르 거리에 정착했다.[46] 같은 해 7월에는 첫 딸 마리가 태어났다.[46] 이 거리에서 샤를 자크, 나르시스 디아즈 드 라 페냐, 테오도르 루소, 콩스탕 트로용 등 훗날 바르비종파 동료들을 만났고, 후원자이자 전기 작가인 알프레드 상시에도 만났다.[47]

이 시기 밀레는 여성 누드화를 많이 그려 수입을 얻었다. 상시에의 전기에는 밀레가 자신의 '목욕하는 여인들'을 바라보는 두 젊은이의 대화를 듣고, 누드화를 그리지 않고 전원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리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48] 그러나 당시 살롱에서는 여성 누드를 그린 역사화가 많았기 때문에, 누드화에도 긍정적인 의미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49]

1847년 살롱에 '나무에서 내려지는 오이디푸스'를 출품하여 입선했다. 이 작품은 갓난아기 때 버려진 오이디푸스가 양치기 부부에게 발견되는 그리스 신화의 장면을 그린 것이다.[50] 1848년에는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이 정부에 의해 구매되었다.[9]

2. 3. 바르비종에서의 활동과 전성기 (1849-1870)

1849년, 밀레는 국가의 의뢰를 받아 '수확자'를 그렸다. 그해 파리 살롱에서는 이전의 이상화된 전원적 주제에서 벗어나 더욱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접근 방식을 보여주는 매우 작은 유화인 '숲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양치기 소녀'를 전시했다.[10] 그해 6월,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밀레는 가족과 함께 바르비종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농민 화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181]

1850년, 밀레는 그의 열렬한 후원자인 상시에와 계약을 맺었다. 상시에는 밀레에게 드로잉과 그림을 받는 대가로 재료와 돈을 제공했고, 밀레는 동시에 다른 구매자에게 작품을 계속 판매할 수 있었다.[11] 그해 살롱에서 밀레는 '씨 뿌리는 사람'을 출품했는데, 이는 농민의 비참한 생활을 항의하는 정치적 표명으로 여겨져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63] 보수파는 밀레의 그림이 농민의 비참함을 부각시켜 사회 불안을 조장한다고 비판한 반면, 진보 진영은 농민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옹호했다.[63]

1850년 작 〈씨 뿌리는 사람〉. 보스턴 미술관 소장.


1850년부터 1853년까지 밀레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가장 오랫동안 작업한 그림인 '수확자 휴식 (룻과 보아스)'를 작업했다.[13] 미켈란젤로와 푸생에 필적하도록 구상된 이 그림은 농민 생활의 상징적 이미지를 묘사하는 것에서 현대 사회적 상황을 묘사하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1853년 살롱에서 2등 메달을 받으며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된 첫 번째 작품이었다.[14]

1857년 작 〈이삭 줍는 여인들〉. 오르세 미술관 소장.


1857년에는 '이삭 줍는 여인들'을 발표하여 또다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84] 이 작품은 여인들이 밭에서 허리를 굽히고 추수 이후에 남겨진 이삭을 줍고 있는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린 것이다. 가난과 곤궁에 처한 유럽아메리카노동자 계급에 대한 민중들의 삶을 그린 상징적 작품이었다.[184]

1857-1859년 작 〈만종〉. 오르세 미술관 소장.


1857-1859년에는 '만종'을 제작했다. 이 작품은 부유한 미국인이었던 토머스 G. 애플턴의 청탁으로 그리게 된 작품으로, 1857년 여름교회의 뾰족탑을 배경에 더하면서 완성되었다.[186] 밀레는 처음에 이 작품에 "감자의 수확을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가 "만종"으로 바꾸었다.[186]

1860년대 전반에는 벨기에 출신 화상 아르튀르 스테반스와 그의 사업 파트너 뇌몽 블랑과 장기 계약을 맺어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78] 1864년 살롱에 출품한 '양치기 소녀'가 절찬을 받아 밀레의 평가는 급상승했다.[78]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 미술 전시회에서 밀레는 한 개의 방을 배정받아 9점의 대표작을 출품하여 거장으로서의 명성을 확립했다.[101] 1868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슈발리에)을 수여받았다.[115]

2. 4. 만년 (1870-1875)

1870년, 밀레는 살롱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해 말, 보불 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셰르부르와 그레빌로 이주했고, 1871년 말에야 바르비종으로 돌아왔다. 그의 말년은 재정적인 성공과 공식적인 인정을 받으며 마무리되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정부의 의뢰를 이행할 수 없었다.[18] 1868년부터 의뢰받았던 '사계' 연작은 질병과 전쟁으로 인해 제작이 늦어졌지만, 만년에 '봄', '가을, 건초 더미'를 완성했다. '여름, 메밀 수확'은 아직 서명이 안 된 채로, '겨울, 나무를 나르는 여인'은 거친 밑그림 상태로 끝났다.[123] '봄'은 밀레의 풍경화 중에서도 가장 꼼꼼하게 마무리되었으며,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재생과 부활의 상징이 많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1867년에 사망한 친구 루소에 대한 진혼곡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124]

1874년, 정부로부터 파리의 팡테옹의 벽화 장식을 의뢰받아 습작에 착수했지만, 건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죽음을 앞둔 1875년 1월 3일, 아내 카트린과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1월 20일, 밀레는 바르비종에서 사망했다.[18] 1월 23일, 샤이이-앙-비에르 묘지에 있는 친구 루소 옆에 매장되었다.[115]

3. 주요 작품 및 화풍

밀레는 농민들의 일상과 노동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지만, 풍경화, 초상화, 누드화, 역사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도 남겼다. 1860년대에는 달마다 봉급을 받으며 3년간 25점의 작품을 작업하는 계약을 맺기도 했다. 1865년에는 에밀 가베(Emile Gavet)가 밀레에게 파스텔화 작품을 의뢰하여 90여 점의 작품을 수집하기도 했다.[187]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감자를 심는 사람들' 등이 밀레의 대표작으로 전시되었다. 1868년에는 프레데리크 아르만(Frédéric Hartmann)이 '사계'를 25000프랑에 의뢰했으며, 밀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아 Chevalier de la Légion d'Honneur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187]

1870년 밀레는 파리 살롱의 심사위원으로 채택되었고, 이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Cherbourg와 Gréville로 이사했다가 1871년바르비종으로 돌아왔다. 노년기에는 상업적 성공과 공식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건강 악화로 정부 의뢰 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1875년 1월 3일 카트린(Catherine)과 결혼했으며, 같은 해 1월 20일 결핵으로 61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187]

밀레의 유화는 약 400점, 파스텔화는 약 200점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회화에서 아카데미즘 회화는 역사화나 신화화를 중시하고 풍경화나 풍속화를 낮게 평가했지만, 밀레는 코로바르비종파 화가들과 함께 전원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특히 밀레는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보다 농민의 생활에 대한 관심이 강하여 농민화를 많이 그렸으며, 도시인의 만족을 위한 전원 풍경이 아닌 농민의 진솔한 모습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음은 밀레의 주요 작품(일부) 목록이다.

작품명제작 연도기법크기 (cm)소장처비고
씨 뿌리는 사람 Le Semeur프랑스어1850년유채, 캔버스101.6 × 82.6보스턴 미술관[67]1850-51년 살롱 입선작[68]
'짚을 묶는 사람들'1850년유채, 캔버스56 × 65루브르 박물관[69]1850-51년 살롱 입선
감자 수확 The Potato Harvest영어1855년
바위에 앉은 양치기 소녀 Shepherdess Seated on a Rock영어1856년
건초 더미: 가을 Haystacks: Autumn영어1874년경


3. 1. 농민화

밀레는 농민들의 일상과 노동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당시 프랑스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농민화의 대표작으로는 〈씨 뿌리는 사람〉,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등이 있다.

1849년에 그린 '추수하는 사람들'은 국가에 기증되었다. 같은 해 파리 살롱에 전시한 '숲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양치기'는 이전의 미화된 목가적 주제에서 벗어나 사실적이고 개성적인 기법을 사용한 작은 유화였다.[181] 같은 해 6월,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바르비종으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농민 화가로서 전원 생활을 그렸다. 가난 속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고 농민의 모습을 종교적인 분위기로 심화시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였다.

1850년 밀레는 후원자 상시에에게서 작품을 그려주는 대가로 지속적인 후원을 약속받았다. 다른 구매 희망자를 위한 작품 활동도 계속할 수 있었다.[178] 이 해에 파리 살롱에서 밀레는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과 함께 걸작으로 평가되는 '씨 뿌리는 사람'을 전시했다.[182]

1850년에서 1853년까지 밀레는 '추수하는 사람들의 휴식시간'을 그렸다. 미켈란젤로나 푸생과 같은 영웅적인 화가들에 필적하기 위해 그려진 이 그림은, 농부들의 일상만을 상징적인 형태로 표현하기보다 사회적인 상황 자체를 상징적인 기법으로 나타내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 작품은 밀레가 날짜를 기록한 유일한 작품이며, 파리 살롱에서 2위에 해당하는 메달을 받으며 공식적인 명예를 쌓았다.[183]

1857년에 그려진 밀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작품은 1854년 세로 캔버스에 그렸던 첫 번째 버전을 다시 각색한 것이다. 1855년에서 1856년까지 사용한 에칭 기법의 영향은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현재의 작품에 대한 예시이기도 했다.[184] 밭에서 허리를 굽히고 추수 이후에 남겨진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린 것으로, 가난과 곤궁에 처한 유럽아메리카노동자 계급에 대한 민중들의 삶을 그린 상징적 작품이었다.

추수 이후 남겨진 것들을 줍는 것은 가장 최하급의 일 중 하나로 여겨졌지만,[185] 밀레는 이 여인들을 영웅과도 같은 구도로 표현하고 있다. 첫 번째 버전에서는 시중드는 종까지 그려 넣어 가난하고 멸시받는 민중들을 귀족이나 과 같은 존귀한 인물들로 표현했다. 본 작품에서는 그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이 열심히 일하는 그녀들의 어깨를 밝게 비춘다. 뒤로 수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진 밭은 드넓고 장대한 하늘 아래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세 명의 여인들의 모습은 밝게 빛을 받은 밭과 달리 그림자가 많이 들어가 배경과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이 작품은 자연주의에 속한다.

이 작품은 미국인 토머스 G. 애플턴의 청탁으로 1857년 여름교회의 뾰족탑을 배경에 더하면서 완성되었다. 밀레는 처음에 "감자 수확을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가 "만종"으로 바꾸었다. 1859년 작품의 구매자가 이 작품을 가져가지 못하게 되자, 1865년부터 공개 전시하며 작품에 나타난 손을 여러 번 바꾸게 된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인 공명을 의심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밀레는 손의 모양을 계속 바꿈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십여 년 뒤 밀레가 사망할 때까지, 미국프랑스 사이에서는 이 작품을 사기 위한 경매 경쟁이 계속되었으며 몇 년 후, 프랑스 측에서 을 제시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그림의 가치는 비싼 가격으로 매겨졌지만 정작 생존하는 밀레의 가족은 가난에 허덕였으며, 이러한 불균형은 'droit de suite'를 고안해 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Droit de suite'란, 화가의 작품을 되팔 경우 그 수익의 일부를 화가나 화가의 가족에게 필수적으로 지급하는 정책이다.)[186]

그림에 엑스레이를 비추면 수정 과정을 알 수 있는데, 그림 속 감자바구니가 원래는 죽은 아이를 넣은 관이었다고 한다. 즉 처음에는 아기가 죽자 기도하는 모습이었다가 밀레가 감자바구니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빵을 굽는 여인〉, 1854년. Kröller-Müller 박물관, 오텔로.


thumb'', 1857. 오르세 미술관, 파리.]]

이 작품은 밀레의 가장 잘 알려진 그림 중 하나인 ''이삭 줍는 여인들''(1857)이다. 밀레가 바르비종 주변의 들판을 거닐면서 7년 동안 그의 펜과 붓으로 한 가지 주제가 되돌아왔는데, 그것은 바로 이삭줍기였다. 수 세기 동안 가난한 여성과 아이들이 수확 후 들판에 남겨진 곡식 낱알을 줍는 권리였다. 그는 이 주제가 구약성서의 이야기와 연결된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1857년, 그는 이 그림 ''이삭 줍는 여인들''을 살롱에 출품했지만, 대중은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초기 버전에는 1854년에 그려진 세로 구성, 그리고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의 가로 형식을 직접적으로 예고하는 1855–56년의 에칭이 포함된다.[16])

따뜻한 황금빛 빛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 벌어지는 이 일상적인 장면에 신성하고 영원한 무언가를 암시한다. 밀레는 수년간의 준비 연구를 통해 농부들의 일상생활에서 반복과 피로의 감각을 가장 잘 전달하는 방법을 고심했다. 각 여성의 등을 따라 그어진 선은 땅으로 이어지고, 끊임없이 고된 노동과 똑같은 반복적인 동작으로 다시 위로 이어진다. 지평선 너머에는 해가 지면서 곡식이 풍성하게 쌓인 농장을 실루엣으로 비추고, 이는 전경의 크고 어두운 인물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삭 줍는 여인들의 어두운 수수한 드레스는 황금 들판과 대조를 이루며 튼튼한 형태를 이루고, 각 여성에게 고귀하고 기념비적인 힘을 부여한다.

밀레의 농민화는 단순한 풍경 묘사를 넘어, 농민들의 삶의 애환과 노동의 가치를 종교적인 숭고함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 2. 풍경화

밀레는 농민화 외에도 풍경화를 그렸으며, 특히 만년에 풍경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854년 그뤼시로의 귀향도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삭 줍기』 이후의 농민화에서도 농촌 풍경이 점차 세밀하게 묘사되면서 풍경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163]

1866년 살롱에 처음으로 풍경화 대작으로 고향을 그린 『그뤼시의 마을 변두리』를 출품했다. 평판은 좋지 않았지만, 이 해부터 1870년까지 밀레가 살롱에 출품한 작품의 절반이 풍경화였다. 비시, 독일, 스위스를 방문하거나, 보불전쟁 때 셰르부르로 피난한 것도 풍경화의 소재가 되었다.

만년에 풍경화를 많이 그린 것 때문에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인상주의가 대상에 햇빛이 비치는 효과를 포착하기 위해 야외 제작을 열심히 한 것과 달리, 밀레는 아틀리에에서 제작을 했다.

3. 3. 기타 작품

밀레는 초상화, 누드화, 역사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품명제작 연도기법크기 (cm)소장처비고
씨 뿌리는 사람 Le Semeur프랑스어1850년유채, 캔버스101.6 × 82.6보스턴 미술관[67]1850-51년 살롱 입선작[68]
'짚을 묶는 사람들'1850년유채, 캔버스56 × 65루브르 박물관[69]1850-51년 살롱 입선
감자 수확 The Potato Harvest|더 포테이토 하비스트영어1855년
바위에 앉은 양치기 소녀 Shepherdess Seated on a Rock|셰퍼디스 시티드 온 어 락영어1856년
건초 더미: 가을 Haystacks: Autumn|헤이스택스: 오텀영어1874년경


4. 논란과 사회적 반향

밀레의 작품, 특히 농민을 주제로 한 그림들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857년 살롱에 출품된 이삭 줍기는 추수 이후 남겨진 이삭을 줍는 가난한 여인들의 모습을 묘사했는데, 이는 사회 최하층의 빈곤을 드러낸다는 이유로 보수적인 비평가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185] 그러나 밀레는 이 여인들을 영웅처럼 묘사하여, 가난 속에서도 존엄성을 잃지 않는 민중들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1857년부터 1859년 사이에 그려진 만종은 토머스 골드 애플턴(Thomas G. Appleton영어)의 의뢰로 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감자 수확을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이었으나 "만종"으로 변경되었다.[81] 이 작품은 공개된 후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밀레 사후에는 미국과 프랑스 간의 경매 경쟁이 벌어져 결국 프랑스 측에서 800000FRF에 낙찰받았다.[186]

그림의 높은 가치와는 대조적으로, 정작 밀레의 가족은 가난에 시달렸다. 이러한 불균형은 예술 작품 재판매 시 원작자나 그 가족에게 수익의 일부를 지급하는 'droit de suite'(추급권) 제도가 고안되는 계기가 되었다.[186]

4. 1. 정치적 논쟁

밀레의 작품은 당시 사회적,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1851년 살롱에 출품된 '씨 뿌리는 사람'은 농민의 비참한 현실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보수 진영으로부터 "농민이라고 불리는 악당과 같은 부류"라는 비난을 받았다. 반면, 진보 진영에서는 이 작품을 "현대 민중(데모스)의 의인상"이라 칭송하며 옹호했다.[63]

1857년 살롱에 출품된 '이삭 줍기' 역시 비슷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보수 진영은 이 작품이 사회 최하층의 빈곤을 부각하여 사회 불안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진보 진영은 밀레가 농민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들의 존엄성을 강조했다고 주장했다. 이전에는 밀레를 지지했던 평론가 폴 드 생-빅토르조차 '이삭 줍기'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80]

이러한 논쟁은 당시 프랑스 사회가 겪고 있던 계급 갈등과 농촌 문제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4. 2. '만종'의 재해석

〈만종〉은 장프랑수아 밀레가 1857년부터 1859년 사이에 그린 그림으로,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89] 이 그림은 원래 미국인 미술 수집가 토머스 골드 애플턴이 의뢰한 것이었다. 밀레는 1857년 여름에 그림을 완성했지만, 1859년에 구매자가 그림을 가져가지 않자 첨탑을 추가하고 제목을 '감자 수확을 위한 기도'에서 '만종'으로 변경했다.[17]

〈만종〉은 저녁 종소리에 맞춰 기도하는 농부 부부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밀레는 이 그림이 자신의 할머니의 추억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라고 밝혔다. 샤이 평원에 울려 퍼지는 만종을 신호로 농부 부부가 손을 멈추고 "주님의 천사"로 시작하는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다.[82]

〈만종〉은 종교적인 그림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살바도르 달리는 이 그림에 숨겨진 성적 억압과 죽음의 이미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엑스레이 촬영 결과, 그림 속 감자 바구니 자리에 관 모양이 그려졌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는 밀레가 처음에 죽은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그렸다가 감자 바구니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만종〉은 1865년에 처음 공개된 이후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으며, 밀레가 사망한 후에는 미국프랑스 간의 입찰 경쟁이 벌어져 80만 금 프랑에 낙찰되었다.[17]

5. 영향

밀레는 빈센트 반 고흐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밀레와 그의 작품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클로드 모네의 노르망디 풍경화는 밀레의 영향을 받았으며, 쇠라의 작품에서도 밀레의 구도와 상징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밀레의 작품 "L'homme a la houe"는 에드윈 마컴에게 영감을 주어 "The Man With the Hoe" (1898년)라는 시를 탄생시켰다. ''만종''은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여러 화가들에 의해 재해석되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밀레의 만종에 숨겨진 비극적인 신화"''라는 글을 통해 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달리는 ''만종''을 정신적 평화를 표현한 그림이 아니라, 억압된 성적 호전성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림 속 두 인물이 땅에 묻힌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달리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엑스레이 분석을 실시한 결과, 그림에는 덧칠 전에 관과 비슷한 형태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188] 그러나 이 형태가 실제로 관을 의미하는지, 밀레가 그림의 주제를 바꾼 것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밀레의 작품은 한국 근현대 미술, 특히 민중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은 밀레의 농민화와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5. 1.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는 화가로서 첫 발을 내딛기 시작했을 때부터 밀레의 소묘를 모사했다. 이후에도 생애에 걸쳐 '씨 뿌리는 사람', '괭이질하는 사람' 등 여러 작품을 모사했다.[175]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 (1865년경)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 (1888년 6월)
가운데


5. 2. 한국 미술

밀레의 작품은 한국 근현대 미술, 특히 민중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과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민중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은 밀레의 농민화와 유사한 점이 많다는 평가를 받는다.

1876년(메이지 9년) 고용 외국인으로 일본에 온 안토니오 폰타네지에 의해 밀레에 관한 정보가 일본에 처음 전해졌다. 폰타네지는 바르비종파의 흐름을 잇는 이탈리아 화가로, 1855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밀레의 『접목하는 농부』를 보고 밀레의 복제화를 가져왔다. 그의 제자였던 다카하시 유이치는 밀레의 복제화를 베꼈으며, 같은 제자인 아사이 주는 밀레의 작품을 번안한 『수확』(1890년)을 제작했다.[148]

메이지 20년대부터 메이지 30년대에 걸쳐 파리에 유학했던 일본인 화가들이 잇따라 바르비종을 방문했다.[149] 1887년(메이지 20년) 5월, 구로다 세이키가 퐁텐블로를 방문했고, 1888년(메이지 21년) 11월에 바르비종을 방문했다. 아사이 주도 1900년(메이지 33년) 이후 유학 중 바르비종을 방문했다. 하라다 나오지로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이삭 줍는 여인들』을 모사했다.[150] 1890년(메이지 23년) 메이지 미술회 제2회 전람회에는 파리에 거주하는 화상 하야시 다다마사가 찬조 회원으로 밀레를 포함한 바르비종파의 작품을 출품했다.[151]

간행물로는 1893년(메이지 26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 개최 보고서에서 구보타 베이센이 목판화로 그린 『괭이에 기대는 사람』과 『이삭 줍기, 여름』 도판이 목판화로 게재되었다.[152] 이와무라 토오루가 1902년(메이지 35년)부터 이듬해까지 『미술 신보』에 「화걸 미레 전」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것이 본격적인 소개의 시작이다. 이 연재는 뉴욕에서 간행된 『만종의 화가 장-프랑수아 밀레』를 바탕으로 밀레 신화를 전한 것으로, 반향이 커서 연재 중에 두 개의 출판사에서 밀레의 화집이 출판되었다.[153] 나쓰메 소세키도 런던 유학 중에 읽은 미술 잡지 Studio의 1902년 겨울호에 게재된 흑백 도판을 본보기로 모사하거나, 1907년 『문학론』에서 밀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오기하라 로쿠잔은 로맹 롤랑의 전기에 감동하여 밀레의 작품에서 종교성을 발견했다.[154]

1902년(메이지 35년) 다카야마 초큐가 『문예계』에서 『만종』과 『이삭 줍는 여인들』 도판과 함께 밀레를 소개했다. 1906년(메이지 39년) 이와무라 토오루가 밀레 전을 포함한 『예원 잡고』를 간행했다.[153] 1914년 이후 로맹 롤랑의 영문판 전기의 일본어 번역본이 여러 권 출판되었다.[155] 이처럼 일본에서의 밀레에 대한 이해는 영어 번역에 의한 것으로, 프랑스어 원전은 무시되어 왔다.[156] 후기 인상파 화가를 열정적으로 소개한 잡지 『백화』에서는 밀레에 대한 취급이 냉담하여, 1917년(다이쇼 6년) 5월호에 『바르비종의 밀레의 집』이 표지를 장식한 것과 1920년(다이쇼 9년) 카트라이트의 밀레전을 후쿠다 히사미치가 요약 번역하여 게재한 정도이다. 다만 아리시마 다케오는 1917년 『신소설』에 「밀레 예찬」이라는 열렬한 평론을 썼다.[157] 메이지 말기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밀레는 열정적으로 일본에 소개되었지만, 실제 그림이 수입되지 않아 화가로서보다는 도덕적인 위인으로 여겨졌다.[158]

1923년(쇼와 8년) 이와나미 서점 창업자 이와나미 시게오는 문화의 씨앗을 뿌린다는 의미로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회사 마크로 채용했다.[159]

1978년 야마나시현립 미술관이 구입한 『씨 뿌리는 사람』이 공개되면서 다시 붐이 일어났다.[153]

6. 평가

장프랑수아 밀레는 생전부터 점차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사후에는 로맹 롤랑의 위인전을 바탕으로 청빈한 농민 화가라는 "밀레 신화"가 퍼졌으며, 빈센트 반 고흐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139] 특히 밀레 작품에서 프로테스탄티즘과 통하는 점을 발견한 미국인이나 위인전에 영향을 받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프랑스 이상으로 밀레 열풍이 불었다.

밀레의 유화는 약 400점, 파스텔화는 약 200점 정도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회화에서 풍속화풍경화는 아카데미즘 회화에서 낮게 평가되었지만, 밀레는 코로바르비종파 화가들과 함께 도시를 떠나 전원에서 소재를 찾았다. 밀레는 풍경화보다 일하는 농민의 생활에 더 관심이 많아 농민화를 주로 그렸는데, 도시인들이 좋아할 만한 전원 풍경이 아니라 농민의 삶을 진지하게 관찰한 것이 그의 독창성이다.

미국에서는 밀레 생전부터 그를 높이 평가하여 방대한 작품을 수집했다.[143] 1876년 보스턴 화가 에드워드 휠라이트가 "장프랑수아 밀레의 추억"을 출간하여 밀레 붐을 일으켰고,[144] 1889년에는 《만종》이 뉴욕으로 오면서 미국 미술 협회가 앨프리드 트럼블의 《만종의 화가 장프랑수아 밀레》를 출판했다. 이 책은 《만종》이 55만 3000프랑에 팔리기까지의 과정과 밀레의 성공담을 담고 있었다.[145] 밀레가 미국에서 호평받은 이유는 그의 언행과 작품에 나타난 근면과 신앙이라는 주제가 미국인들의 프로테스탄티즘(청교도주의) 정서에 맞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146]

1962년 연구자 로버트 허버트는 《벌링턴 매거진》에 "밀레 재방문"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상시에로부터 시작된 밀레 신화를 해체하고자 했다. 그는 헌신적인 아들, 훌륭한 아버지, 농민 출신 화가, 독실한 신앙인, 극심한 가난과 싸운 의지의 인물이라는 밀레 이미지가 상시에의 전기와 일부 작품에만 근거한 전형적인 모습임을 지적하고, 새로운 밀레상을 제시했다.[147]

6. 1. 시장에서의 평가

밀레의 작품은 생전부터 점차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860년에 1000 프랑에 팔았던 《만종》은 1889년 55만 3000 프랑에 낙찰되어 큰 화제를 모았다. 프랑스 정부가 이 가격에 낙찰받았지만,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의회에서 지불을 거부하여 미국의 미술 협회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하지만 1890년 파리의 루브르 백화점 사장이 80만 프랑에 구매하여 1909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131] 19세기 말에는 밀레의 작품 한 점이 수십만 프랑에서 100만 프랑 이상으로 거래되기도 했다.[132]

1887년에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 밀레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고,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프랑스 회화의 거장으로 소개되어 대표작들이 전시되었다.[133]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인기가 집중되며 밀레의 작품 가격은 상대적으로 주춤했다. 1945년 경매에서 《씨 뿌리는 사람》이 26000USD 수준으로 낮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다시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하여, 1976년 뉴욕 소더비에서 《접목하는 농부》가 360000USD, 1977년 뉴욕 소더비에서 《씨 뿌리는 사람》이 300000USD에 낙찰되었다. 1978년 뉴욕 소더비에서는 《키질하는 사람》이 600000USD에 낙찰되었다. 1986년에는 뉴욕 소더비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파스텔, 초크 작품이 725000USD에 낙찰되었다. 하지만 인상파 화가들에 비하면 여전히 낮은 가격에 머물렀으며, 미술 시장에서는 밀레의 명작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134]

6. 2. 밀레 신화

밀레의 후원자였던 알프레드 상시에(Alfred Sensier)는 밀레의 전기를 집필했는데[135], 1881년에 출간된 이 전기는 도덕적이고 신앙심 깊으며 청빈한 농민 화가로서의 밀레를 묘사하여 '밀레 신화'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137] 그러나 실제 밀레는 농민으로 생활하지 않았고 가난했다는 것도 과장되는 등, 전기 내용은 객관적 사실을 반영하지 않았다.[138]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상시에의 전기에 감격한 사람 중 하나였다. 반 고흐는 1882년 3월 동생 테오 반 고흐에게 "밀레는 정말 대단한 남자였어"라는 감상을 보냈고, 이후에도 전기 내용을 자주 인용했다.[139]

상시에의 전기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영국의 미술사학자 줄리아 카트라이트(Julia Cartwright)였다. 1896년 출간된 책에서, 바르비종의 밀레의 집은 상시에가 집주인에게서 사들여 밀레에게 집세를 받고 빌려준 것이며, 밀레 사후 상시에가 집세를 올려 유족을 내쫓으려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한 밀레 부인이 상시에의 전기에서 남편이 너무 음울하게 그려져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불만을 가졌다는 것도 밝혔다.[140]

로맹 롤랑은 상시에의 전기를 바탕으로 1902년에 위인전 형식의 『밀레』를 간행했지만, 지나치게 칭송하는 내용이었다.[141]

1921년, 에티엔 모로-넬라통은 3권의 전기를 간행하여 상시에 전기의 오류를 바로잡고, 밀레의 서간과 기록을 풍부하게 수록하여 객관적으로 기술했다.[142]

6. 3. 한국에서의 평가

밀레는 만종, '이삭 줍는 여인들' 등의 작품으로 한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 나타난 농민에 대한 애정과 인간 존중의 정신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과 같은 진보 진영에서는 밀레의 사회 비판 의식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작품을 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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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문서 安井
[116] 문서 サンスィエ
[117] 문서 サンスィエ
[118] 문서 サンスィエ
[119] 문서 安井, サンスィエ
[120] 문서 井出, 安井
[121] 문서 サンスィエ
[122] 문서 サンスィ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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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백과사전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 마로니에북스 2009-08-20
[178] 서적 Murphy, p.xix
[179] 서적 Ibid., p.21
[180] 서적 Champa, p.183
[181] 서적 Murphy, op. cit., p.23
[182] 서적 Ibid., p.31
[183] 서적 Ibid., p. 60
[184] 서적 Ibid., p. 103
[185] 서적 Ibid., p. 77
[186] 서적 Stokes, p. 77
[187] 서적 Murphy, op. cit., p. xx
[188] 서적 Néret,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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