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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주 첼리비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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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1912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한 지휘자이다. 1945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임시 지휘자를 맡아 1952년까지 활동하며 펠릭스 멘델스존, 조지 거슈윈 등의 작품을 연주했다. 1954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가 된 후, 첼리비다케는 1979년부터 1996년 사망할 때까지 뮌헨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그는 라이브 연주를 중시하여 녹음을 꺼렸지만, 사후 그의 가족들에 의해 많은 실황 녹음이 공개되었다. 그의 음악 철학은 "초월적 경험"을 추구하며, 느린 템포와 긴 호흡으로 특징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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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주 첼리비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6년의 세르주 첼리비다케
1966년의 첼리비다케
이름세르주 첼리비다케
출생일1912년 7월 11일
출생지루마니아 로만
사망일1996년 8월 14일
사망지프랑스 상트르발드루아르 루아레주 피티비에
국적루마니아, 독일
직업
직업지휘자
학자
활동 기간1945년 - 1996년
교육
교육 기관베를린 국립 음악대학교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교수 기관뮌헨 필하모닉
마인츠 음악대학교
커티스 음악원
수상
수상 내역레오니 소닝 음악상
독일 연방 공로 훈장
가족
배우자이오아나 프로코피에두미트레스쿠
자녀세르주 이오안 첼레비다키

2. 생애

세르주 첼리비다케는 1912년 6월 28일, 루마니아 몰다비아 지역의 작은 도시인 로만(로만)에서 태어났다.[5][6] 아버지는 루마니아 군대의 기병 장교 출신으로 당시 정부 관리였으며, 이후 이아시 지역의 현감을 지낸 데모스테네 첼레비다키(Demostene Celebidachi)였고, 어머니는 마리아 첼레비다키(Maria Celebidachi, née Brăteanu)였다.[4][7][5][6] 출생 직후 가족과 함께 이아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다.[7] 그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로 즉흥 연주를 시작했으며,[7] 이아시에서 수학, 철학, 음악에 대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루마니아에서 정치 경력을 쌓기를 기대했지만,[5][7] 첼리비다케는 부쿠레슈티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한 후, 1936년 독일 베를린의 호흐슐레 퓌어 무직(Hochschule für Musik, 음악 아카데미)에 입학했다.[5][6] 이곳에서 그는 하인츠 티센에게 작곡을, 쿠르트 토마스, 발터 그마인들, 프리츠 슈타인에게 지휘를 배웠다. 독일 당국은 그의 성을 첼레비다키(Celebidachi)에서 첼리비다케(Celibidache)로 잘못 변경했는데, 이후 이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5][6]

1946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 첼리비다케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Friedrich-Wilhelms-Universität, 현 훔볼트 베를린 대학교)에서 니콜라이 하르트만과 에두아르트 슈프랑거에게 철학을, 아놀드 셰링과 게오르크 쉬네만에게 음악학을 공부하며 박사 과정을 이어갔다.[5] 1944년, 르네상스 음악 작곡가 조스캥 데 프레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5][6] 베를린 유학 시절, 첼리비다케는 그의 스승 마르틴 슈타인케(Martin Steinke)를 통해 선불교를 접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남은 생애 동안 세계관과 음악 작업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6] 그는 1986년 인터뷰에서 "저는 정교회 그리스도교 신자로 태어났고 철학을 공부했지만 여전히 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슈타인케를 통해 [...] 선의 길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선이 없었다면 시작이 끝에 있고, 끝이 시작에 있다는 이 이상한 원리를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음악은 이 원리의 물질화에 불과합니다."라고 말했다.[8]

1940년대에는 루마니아 출신의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아이리스 바르부라(Iris Barbura)와 교제했다. 또한 그는 여러 언어에 능통한 폴리글롯이었으며, 특히 유대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아시에서 자라 유대인들과 깊이 교류하며 이디시어에도 능숙했다고 전해진다. 첼리비다케는 1996년 8월 14일에 사망했다.

3. 경력

1969년 첼리비다케


첼리비다케의 본격적인 지휘 경력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시작되었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활동 금지 처분을 받고 레오 보르하르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는 1945년부터 1952년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로 활동하는 기회를 얻었다.[8] 이 시기 그는 악단의 재건에 기여했으며, 푸르트뱅글러 복귀 후에는 함께 지휘하기도 했다.

1954년 푸르트뱅글러 사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난[8] 후에는 이탈리아, 영국 등지에서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다. 특히 피아니스트 에일린 조이스는 그를 높이 평가했다.[9] 이후 스톡홀름, 슈투트가르트, 파리의 라디오 오케스트라 등 유럽 유수의 악단들과 협력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1970년에는 덴마크의 소닝 상을 수상했다.

1979년부터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뮌헨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을 맡아 악단을 세계 정상급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 시기 여성 트롬본 연주자 애비 코넌트(Abbie Conant)에 대한 차별 논란으로 법적 분쟁을 겪기도 했다.[12][13][14][15][16]

1984년 커티스 음악원에서 학생인 데이비드 버나드(David Bernard)에게 지휘 레슨을 하는 첼리비다케


그는 교육에도 힘써 마인츠 국립음대, 커티스 음악원 등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그의 강좌는 무료로 개방되었다. 주목할 만한 제자로는 엔리케 가르시아 아센시오, 콘라트 폰 아벨 등이 있다.[10][11] 또한 영화 ''음악의 대사들''(1952)에 출연하고,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1992년에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의 주선으로 38년 만에 베를린 필하모닉과 재회하여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지휘하는 역사적인 공연을 가졌다.

첼리비다케는 1996년 8월 14일 프랑스 파리 근교 네무르(Nemours)에서 84세로 사망했으며,[17] 뇌빌쉬르에손(Neuville-sur-Essonne) 묘지에 안장되었다. 생전에는 음반 녹음을 극도로 꺼렸으나, 사후 그의 실황 연주 녹음들이 다수 발매되었다.[24][25]

3. 1.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임시 상임 지휘자였던 레오 보르하르트가 연합군 병사의 오인 사격으로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8] 당시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주최 지휘 콩쿠르에서 막 우승했던 첼리비다케는[28] 친분이 있던 베를린 필 단원의 추천과 악단의 결정으로 보르하르트의 뒤를 이어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8] 이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총지휘자로 임명된 사례였다.[8]

첼리비다케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나치 치하 활동 문제로 연주 금지 처분을 받아 자리를 비운[8] 1945년부터 푸르트벵글러가 공식 복귀한 1952년까지 실질적인 수석 지휘자 역할을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펠릭스 멘델스존, 조지 거슈윈,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에프 등 나치 시대에 금지되었던 유대인 작곡가나 적성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연주하며 그들의 음악을 부활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학생 오케스트라 지휘 경험 외에 전문적인 경력이 거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30] 바로크 시대부터 동시대 현대 음악에 이르는 방대한 레퍼토리를 암보로 지휘하며[30] 지휘자로서 빠르게 성장했다. 그는 푸르트벵글러의 탈나치화 재판 과정을 돕는 등 푸르트벵글러의 복귀를 위해 노력했고,[31] 1947년 푸르트벵글러가 복귀한 후에는 한동안 함께 번갈아 가며 악단을 지휘했다.[8]

그러나 첼리비다케의 타협을 모르는 엄격한 리허설 방식과 단원들을 향한 직설적이고 때로는 멸시적인 발언,[31] 그리고 독재적인 성향[31]은 점차 단원들과의 갈등을 키웠다. 푸르트벵글러와의 관계 역시 점차 악화되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첼리비다케가 영구적인 수석 지휘자가 되기를 바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31] 많은 단원들은 푸르트벵글러야말로 진정한 수석 지휘자이며 첼리비다케는 과도기적 인물이라고 생각했다.[31] 첼리비다케 또한 수석 지휘자로서 충분한 발언권을 갖지 못하는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32] 결국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기 직전, 리허설 도중 단원들과 격렬한 언쟁을 벌였고, 악단은 첼리비다케가 지휘하기로 예정된 모든 공연의 출연을 거부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후임 상임 지휘자 자리를 두고 경쟁했으나 악단 경영진과의 마찰[8] 등으로 인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최종 선정되었다.[8] 이에 크게 분노한 첼리비다케는 베를린을 떠나게 된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난 지 38년 만인 1992년, 당시 독일 대통령이었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적극적인 중재로 첼리비다케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극적인 재회를 가졌다. 이는 루마니아 고아를 돕기 위한 자선 음악회로 기획되었으며, 1992년 3월 31일과 4월 1일, 베를린 샤우슈필하우스에서 열렸다. 첼리비다케는 이 공연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을 지휘했으며, 이 역사적인 화해의 무대는 큰 화제를 모으며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고 이후 레이저디스크와 비디오 카세트로 발매되었다.[41]

3. 2. 국제적 활동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히틀러 치하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지휘 활동 금지 처분을 받자, 첼리비다케는 1945년부터 1952년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로 활동하는 기회를 얻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미군으로부터 지휘 허가를 받은 레오 보르하르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대체 지휘자를 찾던 베를린 필하모닉은 직전에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주최 경연에서 우승한 첼리비다케를 영입했다. 이로써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 역사상 가장 젊은 총지휘자가 되었다.[8] 1947년 푸르트뱅글러의 비나치화 절차가 마무리된 후, 두 사람은 번갈아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그러나 1954년 푸르트뱅글러가 사망했을 때, 첼리비다케는 이미 일부 단원의 고령화 문제와 음반 녹음에 대한 견해 차이로 경영진과 갈등을 겪고 있었기에 푸르트뱅글러의 공식 후계자로 선정되지 못했다. 대신 베를린 필하모닉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선택했다. 이 일로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관계는 틀어졌고, 1954년 11월 푸르트뱅글러가 위독한 상황에서 『독일 레퀴엠』 리허설 중 큰 충돌을 겪은 후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났다. 이후 38년 만인 1992년 3월 31일, 당시 독일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초청으로 단 한 차례 복귀 공연을 가졌다.[31]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난 첼리비다케는 국제적인 객원 지휘 활동에 주력했다. 처음에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산타 체칠리아 국립 아카데미 오케스트라와 이탈리아 방송 협회(RAI) 소속의 토리노, 로마, 밀라노 오케스트라 등에서 객원 지휘를 했다. 또한 피아니스트 에일린 조이스와 그녀의 파트너의 도움으로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영국에서도 활동했는데, 조이스는 첼리비다케를 "자신이 함께 작업했던 가장 위대한 지휘자"이자 "자신의 영혼 속까지 파고든 유일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9] 이후 유럽 전역과 중남미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1960년부터 1963년까지는 덴마크 왕립 오케스트라와, 1963년부터 1971년까지는 스웨덴 방송 교향악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34] 이 외에도 슈투트가르트, 파리의 라디오 오케스트라와도 협력했다. 1971년 6월, 남독일 방송 교향악단(후의 슈투트가르트 방송 교향악단) 창립 25주년 기념 연주회 지휘가 호평을 받으면서 이듬해인 1972년 정기 객원 지휘자가 되었고, 1977년까지 실질적인 예술 감독 역할을 수행하며 악단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35] 1970년에는 덴마크의 소닝 상을 수상했다.

1979년부터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뮌헨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그는 교육에도 힘써 독일 마인츠 국립음대와 1984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커티스 음악원 등에서 정기적으로 강의했으며, 그의 강좌는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되었다. 그의 제자로는 엔리케 가르시아 아센시오, 콘라트 폰 아벨, 프랑수아 베르니에, 라파엘레 나폴리,[10] 로니 로고프, 베른하르트 지베러, 마르칸드 타카르,[11] 닐스-고란 아레스쿠그 등이 있다.

한편, 베를린 필하모닉 시절 청중과 평론가들로부터는 열광적인 지지를 받아 1953년 베를린 시의 "음악 예술상", 1954년 공로 십자 대훈장, 1955년 독일 비평가 협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33] 그는 영화 ''음악의 대사들''(1952)에 출연하여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며 루트비히 판 베토벤에그몬트 서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남겼으며, 이후 얀 슈미트-가레의 "첼리비다케, 자연스럽게"와 그의 아들 세르주 이오안 첼리비다치의 "첼리비다케의 정원"이라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3. 3.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9년 2월 뮌헨 필하모니 관현악단에서 첫 지휘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을 계기로, 같은 해 6월 루돌프 켐페의 후임으로 수석 지휘자에 취임했다.[36] 켐페 사망 후 거의 3년 만이었다. 당시 오케스트라는 음악 수준이나 인지도 면에서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첼리비다케가 세계적인 앙상블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을 때 초기에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그는 신규 단원 대거 채용, 단원 급여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수준으로 인상, 프로그램 및 초청 지휘자/독주자 선정에 대한 강력한 권한 등 엄격한 조건을 내걸었으며, 뮌헨 시는 이를 거의 모두 수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6]

1980년대 중반 이후, 뮌헨 필하모닉은 첼리비다케의 지휘 아래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잦은 투어와 함께 그의 음악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었지만,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그의 업적에 대한 만장일치의 호응을 얻었다.[42][43] 말년에는 뮌헨시 예술 감독직도 맡았다.

첼리비다케는 뮌헨 필하모닉과 함께 여러 차례 일본 투어를 가졌다 (1986년, 1990년, 1992년, 1993년). 특히 1986년 공연에서 안톤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5번을 연주한 이후 브루크너는 일본 공연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다. 1990년 10월 투어에서는 브루크너 교향곡 제4번, 제7번, 제8번을 지휘했으며, 이 중 7번과 8번은 하이비전 방식으로 녹화되기도 했다.

뮌헨 필하모닉 재직 시절, 트롬본 연주자 애비 코넌트(Abbie Conant)와 관련된 차별 논란 및 12년간의 법적 분쟁이 있었다.[12] 1980년, 첼리비다케는 블라인드 오디션을 통해 코넌트의 연주를 극찬했으나, 그녀가 여성임을 알게 된 후 태도를 바꿔[38] 코넌트가 트롬본 파트를 이끌기에 필요한 "힘"과 "감정적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하며[13] 수석 연주자에서 2번 연주자로 강등시키는 등[14]의 괴롭힘을 가했다는 비판을 받았다.[38] 이 사건은 소송으로 이어졌고, 법원은 최종적으로 코넌트의 손을 들어주어[16] 남성 동료들과 동일한 급여를 받게 되었다.[14] 첼리비다케는 이 재판 과정에서 증언 요청을 받지 않았다.[15]

3. 4. 한국과의 인연

1980년 4월 28일과 2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런던 교향악단의 아시아 순회 공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 관객을 만났다. 당시 병으로 일정을 취소한 카를 뵘을 대신하여 지휘봉을 잡았다. 1996년에는 뮌헨 필하모니 관현악단과 두 번째 내한 공연을 계획했으나, 공연 직전에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나면서 무산되었다. 이듬해 공연은 주빈 메타가 대신 지휘했다.

4. 음악 철학 및 해석

첼리비다케는 음악 작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음악이든 아니든 해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물리 법칙을 임의로 해석할 수 없듯이 음악 연주법 또한 독단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지식이 있다면 해석은 사라진다고 보았다.[44] 그의 음악론은 "음악은 ‘무(無)’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다만 ‘체험’일 뿐이다."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으며, "시작 속에 끝이 있다"는 선종 불교적 사상이 그의 음악 현상학 강의를 관통했다.

특히 브루크너의 교향곡들에 강한 정신적 친밀감을 느꼈고, 이를 자신의 핵심 레퍼토리로 삼았다. 그는 브루크너 해석에 대해 확고한 견해를 가졌으며, 다른 지휘자들을 브루크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낙타 몰이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45] 1970년대 그의 브루크너 공연 실황 중 일부(교향곡 7번)는 템포 변화가 잦고 구조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교향곡 8번 연주는 그의 명성을 뒷받침하는 위대한 녹음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46]

첼리비다케는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특히 템포 설정에 있어 홀의 음향 조건을 중시해야 한다는 푸르트뱅글러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는 메트로놈 수치에만 의존하는 기계적인 템포 설정을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그 역시 많은 거장 지휘자들처럼 나이가 들면서 템포가 느려지는 경향을 보였는데, 말년 리스본에서 연주된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은 일반적인 연주 시간(약 80분)보다 훨씬 긴 105분이 소요되기도 했다.

현대음악에 대해서는 토스카니니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며 대체로 지휘를 거부했다. 이탈리아 작곡가 실바노 부소티가 자신의 악보를 보여주며 음악의 혼돈을 설명했을 때, 그러한 유치한 생각의 음악은 지휘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한 일화가 있다. 그러나 현대 작품에 완전히 무지했던 것은 아니어서, 신비엔나 악파 이후의 무조 작품이나 조르조 페데리코 게디니, 쇤베르크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op.31), 루이지 달라피콜라, 카를로스 차베스, 보리스 블라허 등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을 소수 연주하기도 했다.

4. 1. 초월적 경험

세르주 첼리비다케의 흉상 (루마니아 로만)


첼리비다케의 음악 제작 방식은 그가 무엇을 했는가보다는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첼리비다케가 녹음을 "거부"했다는 점이 많이 언급되었지만, 실제로 그의 거의 모든 연주는 라이브 라디오 방송으로 녹음되었으며, 그의 가족의 동의를 얻어 EMI와 도이치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과 같은 주요 레이블을 통해 사후에 많이 발매되었다.[18] 그의 견해로는 음악은 수천 번의 "아니오"와 결국 모든 조건이 콘서트 중에 모였을 때 나오는 마지막 "예"의 집합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라이브 경험, 즉 "현재에 머무르는"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첼리비다케는 각 콘서트에서 그가 "초월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최적의 조건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선종 불교의 ''일고일예''와 같은 측면이 그의 음악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녹음된 음악을 들을 때 초월적 경험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믿었기 때문에 녹음을 피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일부 콘서트는 청중에게 예외적이고 때로는 삶을 바꿀 수 있는 경험을 제공했는데, 예를 들어 1984년 커티스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카네기홀(Carnegie Hall) 공연은 뉴욕 타임스 평론가 존 록웰(John Rockwell)이 25년간의 콘서트 관람 중 최고라고 묘사한 바 있다.[19]

첼리비다케는 오케스트라와의 광범위한 리허설 시간 요구로 잘 알려져 있었다.[20] 그의 후기 콘서트의 많은 부분에서, 라이브 녹음에서 포착된 것처럼,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것보다 느린 템포가 특징인 반면, 빠른 악장(특히 초기 공연)에서는 그의 템포가 메트로놈 표시를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많았다.[21] 그러나 첼리비다케 자신의 견해에 따르면, 녹음의 템포에 대한 비판은 무관하다. 그것은 공연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순간의 분위기가 없는 공연의 전사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순간의 분위기는 모든 음악 공연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첼리비다케가 설명했듯이, 콘서트를 직접 듣는 음향 공간은 그가 추구하는 초월적 경험이 나타날 가능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반면에 그의 공연 녹음을 듣는 음향 공간은 공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 공간의 음향적 특징이 음악가들이 더 느리게 또는 더 빠르게 연주하도록 자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녹음된 공연이 다른 대부분의 녹음과 매우 다르다는 점은 일부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류 발매가 아닌 수집가용 아이템으로, 참고 녹음이 아닌 '일회성'으로 보이게 했다.[22]

주목할 만한 발매작으로는 뮌헨에서의 베토벤, 요하네스 브람스, 안톤 브루크너, 로베르트 슈만, 요한 세바스찬 바흐, 가브리엘 포레 연주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및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과의 일련의 실황 공연이 있다.[24][25]

4. 2. 느린 템포와 긴 호흡

첼리비다케의 음악 제작 방식은 그가 무엇을 했는지보다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첼리비다케가 녹음을 "거부"했다는 점이 많이 언급되었지만, 실제로는 그의 거의 모든 연주가 라이브 라디오 방송으로 녹음되었으며, 그의 가족의 동의를 얻어 EMI와 도이치 그라모폰과 같은 주요 레이블을 통해 사후에 많이 발매되었다.[18] 그의 견해로는 음악은 수천 번의 "아니오"와 결국 모든 조건이 콘서트 중에 모였을 때 나오는 마지막 "예"의 집합으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라이브 경험, 즉 "현재에 머무르는"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첼리비다케는 각 콘서트에서 그가 "초월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최적의 조건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선종 불교의 ''일고일예''와 같은 측면이 그의 음악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녹음된 음악을 들을 때 초월적 경험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믿었기 때문에 녹음을 피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일부 콘서트는 청중에게 예외적이고 때로는 삶을 바꿀 수 있는 경험을 제공했는데, 예를 들어 1984년 커티스 음악원 오케스트라의 카네기홀 공연은 뉴욕 타임스 평론가 존 록웰이 25년간의 콘서트 관람 중 최고라고 묘사한 바 있다.[19]

첼리비다케는 오케스트라와의 광범위한 리허설 시간 요구로 잘 알려져 있었다.[20] 그의 후기 콘서트의 많은 부분에서, 라이브 녹음에서 포착된 것처럼,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것보다 느린 템포가 특징인 반면, 빠른 악장(특히 초기 공연)에서는 그의 템포가 메트로놈 표시를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많았다.[21] 그러나 첼리비다케 자신의 견해에 따르면, 녹음의 템포에 대한 비판은 무관하다. 그것은 공연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순간의 분위기가 없는 공연의 전사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순간의 분위기는 모든 음악 공연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첼리비다케가 설명했듯이, 콘서트를 직접 듣는 음향 공간은 그가 추구하는 초월적 경험이 나타날 가능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반면에 그의 공연 녹음을 듣는 음향 공간은 공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 공간의 음향적 특징이 음악가들이 더 느리게 또는 더 빠르게 연주하도록 자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녹음된 공연이 다른 대부분의 녹음과 매우 다르다는 점은 일부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류 발매가 아닌 수집가용 아이템으로, 참고 녹음이 아닌 '일회성'으로 보이게 했다.[22]

5. 녹음



첼리비다케는 공연 현장에서 직접 듣는 음악만이 진정한 음악적 경험을 전달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으며, 이러한 신념 때문에 녹음을 극도로 꺼렸다. 그에게 음악은 단순히 소리의 기록이 아니라, 연주자와 청중이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초월적 경험'이었다. 그는 녹음된 매체로는 이러한 현장성과 순간의 분위기를 결코 담아낼 수 없다고 보았으며, 녹음된 음악을 듣는 것은 실제 연주의 본질적인 경험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력 동안 몇몇 예외적인 스튜디오 녹음과 영상물이 존재한다. 특히 그의 초기 경력인 1947년부터 1948년경,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의 영국 연주 여행을 전후하여 몇몇 공식 레코딩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녹음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했는데, 녹음된 소리를 듣고 "엔지니어가 템포를 조작했다!"라고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EMI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 등과의 관계에서 레코드 업계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된 것도 그가 이후 녹음을 기피하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 스튜디오 녹음 ===

첼리비다케가 남긴 몇 안 되는 스튜디오 녹음은 다음과 같다.

작곡가작품협연/오케스트라레이블
모차르트교향곡 제 25번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데카
차이콥스키교향곡 제 5번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데카
차이콥스키발레 모음곡 '호두까기 인형'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데카
프로코피예프교향곡 제 1번 고전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HMV/EMI
멘델스존바이올린 협주곡지크프리트 보리스(Vn),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HMV/EMI
브람스바이올린 협주곡이다 헨델(Vn),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HMV/EMI
첼리비다케주머니속 정원 (Der Taschengartende)슈투트가르트 남서독일 방송 교향악단유니세프 자선 레코드 (이후 도이체 그라모폰 재발매)



=== 영상물 ===

말년에는 소니 클래시컬에서 그의 동의를 얻어 제작한 연주회 영상물이 발매되었다.

작곡가작품오케스트라녹화 장소
브루크너교향곡 제 6번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뮌헨 가스타이크 필하모니
브루크너교향곡 제 7번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쿄 산토리홀
브루크너교향곡 제 8번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쿄 산토리홀



=== 사후 발매 ===

첼리비다케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가족들은 바이에른 방송국, 남서독일 방송국 등 여러 방송국에 보관되어 있던 방대한 양의 실황 녹음 테이프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아들 세르게 요안 첼리비다케는 이러한 결정이 오히려 시중에 유통되는 해적판으로 인해 아버지가 왜곡되는 것을 막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47] 이 결정에 따라 EMI와 도이체 그라모폰과 같은 주요 레이블에서 그의 라이브 연주 녹음들이 공식적으로 발매되기 시작했다.[18]

주요 사후 발매 음반은 다음과 같다.



=== 녹음에 대한 철학적 배경 ===

첼리비다케의 녹음 기피는 그의 독특한 음악 철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는 각 콘서트가 단 한 번뿐인 사건이며, 그 순간의 음향적 조건과 연주자와 청중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진정한 음악적 경험, 즉 그가 "초월적 경험"이라 부른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는 선종 불교의 ''일기일회''(一期一会) 개념과도 맞닿아 있는 생각이다. 녹음된 소리는 이러한 현장성과 상호작용을 담아낼 수 없으며, 특히 공연장의 고유한 음향 특성이 연주 템포나 다이내믹에 미치는 영향을 재현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녹음된 연주에 대한 비평, 특히 템포에 대한 지적은 실제 연주가 아닌, '분위기'가 제거된 기록물에 대한 비평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이러한 철학 때문에 그의 라이브 녹음들은 때때로 매우 느린 템포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는 특정 공연장의 음향 조건에 맞춰 최적의 울림을 찾으려 했던 그의 노력의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6. 교육 활동

첼리비다케는 평생 동안 교육에 큰 비중을 두었으며, 그의 강좌는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되었다. 그는 독일의 마인츠 국립음대에서 정기적으로 강의를 했으며, 1984년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커티스 음악원에서도 강의했다.

그는 슈투트가르트, 뮌헨, 마인츠,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도쿄, 이탈리아 등 여러 지역에서 지휘자 강습회, 세미나, 강의, 콩쿠르를 개최했다. 또한, 거의 모든 연주회 직전 리허설은 일반 시민과 학생들에게 공개되었다. 다만,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복귀했을 때의 연주회 리허설은 공식적으로 관계자 외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실제로는 슈투트가르트 시절처럼 베를린 지휘과 학생들이 자유롭게 출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3,000명의 제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의 주목할 만한 제자들은 다음과 같다.


  • 엔리케 가르시아 아센시오
  • 콘라트 폰 아벨 (Konrad von Abel)
  • 프랑수아 베르니에 (François Berneir)
  • 라파엘레 나폴리 (Raffaele Napoli)[10]
  • 로니 로고프 (Rony Rogoff)
  • 베른하르트 지베러 (Bernhard Sieberer)
  • 마르칸드 타카르 (Markand Thakar)[11]
  • 닐스-고란 아레스쿠그 (Nils-Göran Areskoug)

7. 사후

첼리비다케가 세상을 떠난 후, 유족들은 특히 일본을 중심으로 음질이 좋지 않은 해적판 음반이 퍼지는 것을 우려하여, 생전에 발표되지 않았던 연주회 녹음을 독일 그라모폰과 EMI 레이블을 통해 CD로 발매했다. 하지만 워낙 방대한 양의 녹음 중에서 일부만 골라 발매했기 때문에, 이것이 과연 첼리비다케의 가장 뛰어난 연주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특히 EMI에서 발매된 녹음들은 시기별로 연주 속도(템포) 설정이 조금씩 달라, 첼리비다케 연주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조

[1] 웹사이트 Sergiu Celibidache (Conductor) - Short Biography https://www.bach-can[...] 2022-09-29
[2] 웹사이트 Sergiu Celibidache – das Wesen der Musik https://www.focus.de[...] 2013-10-10
[3] 웹사이트 Der Stachel im Fleisch des Musikbetriebs https://www.sueddeut[...] 2013-10-10
[4] 문서 Celibidache's Birthdate
[5] 웹사이트 Sergiu Celibidache http://www.naxos.com[...] Naxos 2012-08-31
[6] 웹사이트 Sergiu Celibidache (1912–1996) https://archive.toda[...] EMI Classics 2012-08-31
[7] 웹사이트 Biography http://www.fundatia-[...]
[8] 서적 Celibidache şi Furtwängler : marele conflict postbelic de la Filarmonica din Berlin Humanitas 2015
[9] 서적 Eileen Joyce: A Portrait
[10] 웹사이트 https://raffaelenapo[...]
[11] 웹사이트 Konrad von Abel http://www.musikmph.[...] Musikproduktion Höflich 2013-11-14
[12] 간행물 We Need a Man for Solo Trombone: Abbie Conant's Story http://www.iawm.org/[...] IAWM Journal 2012-10-20
[13] 법률문서 Brief, Conant vs. LH München, AGM Aktz: 2 Ca 7022/82 1983-02-03
[14] 웹사이트 Abbie Conant in the Munich Philharmonic http://www.osborne-c[...] 2020-09-30
[15] 법률문서 Final judgment, Conant vs. LH München, AGM Aktz: 2 Ca. 7022/82 1984-04-12
[16] 법률문서 Final judgement, Conant vs. LH München Aktz. Ca 2 7022/82 1984-04-12
[17] 웹사이트 matchID - Moteur de recherche des décès https://deces.matchi[...] 2023-09-21
[18] 뉴스 The Reticent High Priest of Munich https://query.nytime[...] 2007-08-31
[19] 뉴스 Debut of Sergiu Celibidache https://query.nytime[...] 2007-10-07
[20] 뉴스 Sergiu Celibidache Conducts An Unhurried Bruckner 4th https://query.nytime[...] 2007-08-31
[21] 뉴스 When Mystic Meets Mystic https://query.nytime[...] 2007-08-31
[22] 웹사이트 Conductor Sergiu Celibidache Biography http://www.iclassics[...] iClassics 2007-08-17
[23] 웹사이트 Why was Celibidache's conducting career so controversial? https://interlude.hk[...] 2022-09-29
[24] 웹사이트 https://www.gerhard-[...]
[25] 웹사이트 http://www.classical[...]
[26] 웹사이트 Ehrenbürgerrecht der Landeshauptstadt München http://www.muenchen.[...] Landeshauptstadt München Direktorium 2012-09-01
[27] 서적 評伝 チェリビダッケ
[28] 서적 評伝 チェリビダッケ
[29] 웹사이트 Interim chief conductor Sergiu Celibidache http://www.berliner-[...] 2015-08-12
[30] 서적 評伝 チェリビダッケ
[31] 웹사이트 KNIGHT IN SHINING ARMOUR http://www.berliner-[...] 2016-03-05
[32] 서적 評伝 チェリビダッケ
[33] 서적 評伝 チェリビダッケ
[34] 서적 評伝 チェリビダッケ
[35] 서적 評伝 チェリビダッケ
[36] 서적 評伝 チェリビダッケ
[37] 뉴스 MUSIC: DEBUT OF SERGIU CELIBIDACHE http://www.nytimes.c[...] 뉴욕・타임즈 1984-02-28
[38] 웹사이트 The Trombonist Who Locked Horns https://www.washingt[...] The Washington Post 1994-03-14
[39] 문서 당시 루마니아의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면 6월 28일이다.
[40] 뉴스 Sergiu Celibidache Conducts An Unhurried Bruckner 4th http://query.nytimes[...] New York Times 1989-04-27
[41] 웹사이트 https://www.digitalc[...]
[42] 웹사이트 https://web.archive.[...]
[43] 웹사이트 http://www.celibidac[...]
[44] 웹사이트 http://www.celibidac[...]
[45]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ww.classics[...] 2018-10-11
[46]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ww.allmusic[...] 2016-06-21
[47] 문서 첼리비다케 EMI 공식 전집 각 CD의 속지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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