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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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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파니아는 550년경 비잔틴 제국이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설치한 속주이다. 409년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 서고트족은 세력을 확장하여 이 지역을 지배했으나, 534년 비잔틴 제국이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하면서 서고트 왕국과 접촉하게 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서고트 왕국의 내분과 반란을 틈타 이 지역을 점령하고 스파니아를 건설했다. 스파니아는 말라가와 카르타헤나를 중심으로,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의 세우타와 발레아레스 제도까지 포함하는 영토를 가졌다. 스파니아는 북아프리카의 비잔티니스트 양식의 건축과 예술, 라틴 기독교를 따르는 종교적 특징을 보였다. 그러나 서고트 왕국의 반격으로 624년경 멸망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는 8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사라센의 침입으로 제국에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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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니아
개요
서고트족에 의해 과달키비르 계곡이 되찾아진 후의 560년 로마령 스페인
서고트족에 의해 과달키비르 계곡이 되찾아진 후의 560년 로마령 스페인
통칭스파니아 속주
국가비잔티움 (로마) 제국
시대후기 고대
수도말라카 (말라가)
카르타고 스파르타리아 (카르타헤나)
존속 기간552년 ~ 624년
역사
시작해방자에 의한 비잔티움 정복 (552년)
종말서고트 재정복 (624년)
이전 국가서고트 왕국
계승 국가서고트 왕국
현재 국가

2. 역사적 배경

409년, 라인강에서 로마 국경 방어선을 돌파한 반달족, 수에비족, 알라니족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진입했다. 461년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죽을 때까지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로마 통치는 유지되었다.[2] 로마 제국의 봉신이었던 서고트족은 황제의 초청으로 아키텐에 정착했는데(416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로 이동하면서 생긴 공백을 점차 채워나갔다. 468년 그들은 갈라이키아를 점령하고 확장을 위협하던 수에비족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서고트족은 473년에 스페인에서 로마 행정을 종식시켰고, 476년까지 동부 및 중부 반도의 대부분에 대한 그들의 지배는 확립되었다. 알라리크 2세 치하에서 대규모 서고트족의 이베리아 이주는 494년에 시작되었고, 507년 부예 전투 이후 골 지역의 대부분을 프랑크족에게 잃은 후 그들의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2. 1.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서고트 왕국의 등장

409년, 2년 전 라인강에서 로마 국경 방어선을 돌파한 반달족, 수에비족, 알라니족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진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61년 마요리아누스 황제가 죽을 때까지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로마 통치는 유지되었다.[2] 로마 제국의 봉신이었던 서고트족은 황제의 초청으로 아키텐에 정착했는데(416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로 이동하면서 생긴 공백을 점차 채워나갔다. 468년에 그들은 로마의 갈라이키아를 점령하고 확장을 위협하던 수에비족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서고트족은 473년에 스페인에서 로마 행정을 종식시켰고, 동부 및 중부 반도의 대부분에 대한 그들의 지배는 476년까지 확립되었다. 알라리크 2세 치하에서 대규모 서고트족의 이베리아 이주는 494년에 시작되었고, 507년 부예 전투 이후 골 지역의 대부분을 프랑크족에게 잃은 후 그들의 권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2. 2. 비잔틴 제국의 재건 노력과 스파니아 정복

534년, 로마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하고 비잔틴 제국의 마우레타니아 속주를 재건했다. 반달족의 왕 겔리메르서고트 왕국의 왕 테우디스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테우디스는 반달족의 쇠퇴를 틈타 533년에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의 세우타를 정복했는데, 이는 비잔틴 제국이 이곳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요새는 이듬해 벨리사리우스가 보낸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세우타는 540년에 서고트족에게 잠시 다시 빼앗겼다가[3] 마우레타니아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은 552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기 전 스페인을 정찰하는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550년, 서고트 왕국의 아길라 1세 치세 동안, 스페인에서는 여러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중 두 건은 매우 심각했다. 코르도바 시민들은 고트족과 아리우스파의 통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아길라는 크게 패배하여 아들을 잃고 왕실 보물까지 빼앗겼다. 그는 메리다로 피신했다.[4] 또 다른 주요 반란은 정확한 시기가 불분명한데, 그의 통치 초기(549년) 또는 늦어도 551년에 아타나길드라는 귀족이 바이티카의 수도인 세비야를 점령하고 아길라에 대항하여 왕위에 오르려 했다.

누가, 그리고 언제 비잔틴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주요 자료들의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5] 비잔틴 군대의 장군 이름조차도 논쟁의 대상이다. 요르다네스는 고위 귀족 리베리우스가 사령관이었다고 기록했다.[6] 그러나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의 ''고트족, 반달족, 수에비족의 역사''에서 551년 가을 또는 552년 겨울에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아타나길드였다고 주장한다. 비잔틴 군대는 아마도 552년에 파견되어 6월 또는 7월에 상륙했을 것이다. 로마군은 과달레테 하구나 말라가에 상륙하여 552년 8월 또는 9월에 메리다에서 세비야로 남진하는 아길라를 격파하기 위해 아타나길드와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 전쟁은 2년 더 이어졌다.

555년 3월 말, 아길라의 지지자들은 비잔틴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암살하고 아타나길드를 고트족의 왕으로 추대했다. 새로운 왕은 곧바로 스페인에서 비잔틴을 몰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비잔틴은 바이티카의 많은 해안 도시를 점령했고, 이 지역은 약 70년 후 서고트족에게 다시 정복될 때까지 비잔틴 속주로 남았다.

3. 정벌과 영역 확장

534년, 로마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하고 비잔틴 제국의 마우레타니아 속주를 재건했다. 반달족의 왕 겔리메르서고트 왕국의 왕 테우디스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테우디스는 반달족의 쇠퇴를 틈타 533년에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의 세우타를 정복했는데, 이는 비잔틴 제국이 이곳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세우타는 이듬해 벨리사리우스가 보낸 원정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세우타는 540년에 서고트족에게 잠시 재탈환되었다가[3] 마우레타니아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은 552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군대의 이베리아 반도 침공을 위한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550년, 아길라 1세 치세 동안, 스페인에서는 여러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중 두 건은 매우 심각했다. 코르도바 시민들은 고트족 또는 아리우스파의 통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아길라는 크게 패배하여 아들이 죽고 왕실 보물까지 잃었다. 그는 메리다로 후퇴했다.[4] 또 다른 주요 반란은 정확한 시기가 불분명한데, 그의 통치 초기(549년) 또는 늦어도 551년에 아타나길드라는 귀족이 바이티카의 수도인 세비야를 점령하고 아길라에 대항하여 왕을 칭하려 했다. 비잔틴 제국에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누구이며, 언제 요청했는지는 자료마다 내용이 달라 논란이 있다.[5] 비잔틴 군대의 장군 이름조차도 논쟁의 대상이다. 요르다네스는 고위 귀족 리베리우스가 사령관이었다고 기록했다.[6]

그러나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고트족, 반달족, 수에비족의 역사''에서 551년 가을 또는 552년 겨울에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아타나길드였다고 기록했다. 비잔틴 군대는 아마도 552년에 파견되어 6월 또는 7월에 상륙했을 것이다. 로마군은 과달레테 하구나 말라가에 상륙하여 552년 8월 또는 9월에 메리다에서 세비야로 남진하는 아길라를 격파하기 위해 아타나길드와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 전쟁은 2년 더 지속되었다.

555년 3월 말, 아길라의 지지자들은 비잔틴 군대의 성공에 대한 두려움에 그를 암살하고 아타나길드를 고트족의 왕으로 추대했다. 새로운 왕은 비잔틴 군대를 몰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비잔틴은 바이티카의 많은 해안 도시를 점령했고, 이 지역은 약 70년 후 서고트족에게 재정복될 때까지 비잔틴 속주로 남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에 비잔틴 제국의 최대 영토. 유스티니아누스가 물려받은 제국은 붉은색이고, 스파니아를 포함한 정복지는 주황색이다. 이곳은 최서단 속주이다.

3. 1. 서고트 왕국의 내분과 비잔틴 제국의 개입

534년, 로마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하고 비잔틴 제국의 마우레타니아 속주를 재건했다. 반달족의 왕 겔리메르서고트 왕국의 왕 테우디스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테우디스는 반달족의 쇠퇴를 틈타 533년에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의 세우타를 정복했는데, 이는 비잔틴 제국이 이곳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세우타는 이듬해 벨리사리우스가 보낸 원정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세우타는 540년에 서고트족에게 잠시 재탈환되었다가[3] 마우레타니아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은 552년 유스티니아누스 군대의 이베리아 반도 침공을 위한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550년, 아길라 1세 치세 동안, 스페인에서는 여러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중 두 건은 매우 심각했다. 코르도바 시민들은 고트족 또는 아리우스파의 통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아길라는 크게 패배하여 아들이 죽고 왕실 보물까지 잃었다. 그는 메리다로 후퇴했다.[4] 또 다른 주요 반란은 정확한 시기가 불분명한데, 그의 통치 초기(549년) 또는 늦어도 551년에 아타나길드라는 귀족이 바이티카의 수도인 세비야를 점령하고 아길라에 대항하여 왕을 칭하려 했다. 비잔틴 제국에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누구이며, 언제 요청했는지는 자료마다 내용이 달라 논란이 있다.[5] 비잔틴 군대의 장군 이름조차도 논쟁의 대상이다. 요르다네스는 고위 귀족 리베리우스가 사령관이었다고 기록했다.



그 [테우디스]의 뒤를 이어 아길라가 왕국을 현재까지 통치하고 있다. 아타나길드는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심지어 지금도 로마 제국의 힘을 자극하고 있다. 그래서 고위 귀족 리베리우스는 그를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가는 중이다.[6]



그러나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의 ''고트족, 반달족, 수에비족의 역사''에서 551년 가을 또는 552년 겨울에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아타나길드였다고 기록했다. 비잔틴 군대는 아마도 552년에 파견되어 6월 또는 7월에 상륙했을 것이다. 로마군은 과달레테 하구나 말라가에 상륙하여 552년 8월 또는 9월에 메리다에서 세비야로 남진하는 아길라를 격파하기 위해 아타나길드와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 전쟁은 2년 더 지속되었다.

555년 3월 말, 아길라의 지지자들은 비잔틴 군대의 성공에 대한 두려움에 그를 암살하고 아타나길드를 고트족의 왕으로 추대했다. 새로운 왕은 비잔틴 군대를 몰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비잔틴은 바이티카의 많은 해안 도시를 점령했고, 이 지역은 약 70년 후 서고트족에게 재정복될 때까지 비잔틴 속주로 남았다.

3. 2. 비잔틴 제국의 스파니아 정복과 통치

534년, 로마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하고 비잔틴 제국의 마우레타니아 속주를 다시 세웠다. 반달 왕 겔리메르는 고트족 왕 테우디스와 동맹을 맺는 데 실패했지만, 테우디스는 반달 왕국의 약화를 틈타 533년에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의 세우타를 점령했다. 이는 비잔틴 제국이 세우타를 스페인 공격의 전초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요새는 이듬해 벨리사리우스가 보낸 원정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세우타는 (540년에 서고트족에게 잠시 다시 빼앗겼지만[3]) 마우레타니아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은 552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기 전 스페인을 정찰하는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550년, 아길라 1세 치세 동안, 스페인에서는 여러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중 두 건은 매우 심각했다. 코르도바 시민들은 고트족과 아리우스파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고, 아길라는 크게 패배하여 아들을 잃고 왕실 보물까지 빼앗겼다. 그는 메리다로 후퇴했다.[4] 또 다른 주요 반란의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다. 그의 통치 초기(549년)나 늦어도 551년에 아타나길드라는 귀족이 바이티카의 수도인 세비야를 점령하고 아길라에 대항하여 왕이 되려 했다. 누가, 그리고 언제 비잔틴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는지는 논란이 있는데, 주요 사료들의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5] 심지어 비잔틴 군대의 장군 이름조차도 논쟁의 대상이다. 요르다네스는 고위 귀족 리베리우스가 사령관이었다고 기록했다.

>그 [테우디스]의 뒤를 이어 아길라가 왕국을 현재까지 다스리고 있다. 아타나길드는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심지어 지금도 로마 제국의 힘을 자극하고 있다. 그래서 고위 귀족 리베리우스는 그를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가는 중이다.[6]

그러나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고트족, 반달족, 수에비족의 역사''에서 551년 가을 또는 552년 겨울에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아타나길드였다고 기록했다. 비잔틴 군대는 아마도 552년에 파견되어 6월 또는 7월에 상륙했을 것이다. 로마군은 과달레테 하구나 말라가에 상륙하여 552년 8월 또는 9월에 메리다에서 세비야로 남진하는 아길라를 격파하기 위해 아타나길드와 합류했을 것으로 보인다.[8] 전쟁은 2년 더 지속되었다. 리베리우스는 553년 5월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고, 고트 전쟁 이후 최근에 평정된 이탈리아에서 파견된 비잔틴 군대가 555년 3월 초에 카르타헤나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군하여 바자 (바스티)에서 세비야 인근의 동료들과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카르타헤나 상륙은 폭력적이었다. 세비야의 레안데르의 가족을 포함한 토착민들은 서고트족에게 호의적이었고, 도시의 비잔틴 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억압해야 했으며, 이러한 억압은 그들이 점령한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555년 3월 말, 아길라의 지지자들은 최근 비잔틴의 성공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그를 암살하고 아타나길드를 고트족의 왕으로 추대했다. 새로운 왕은 재빨리 스페인에서 비잔틴을 몰아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비잔틴은 바이티카의 많은 해안 도시를 점령했고, 이 지역은 약 70년 후에 서고트족에게 다시 정복될 때까지 비잔틴 속주로 남게 되었다.

4. 스파니아의 지리와 행정

비잔틴 제국의 스파니아는 내륙 깊숙이 세력이 뻗쳐 있어 동로마 제국의 관리들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스파니아 자체가 방어 요새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여 고트족의 침공을 막으려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위협이 동쪽에서 널리 일어났기 때문에 그 관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20]

가장 넓었을 때의 스파니아


스파니아의 최고 행정 관리는 "스페인 군대의 지휘관"을 의미하는 ''magister militum Spaniae''였다. ''magister militum''은 속주의 민정과 군정을 통치했으며, 황제에게만 종속되었다. 일반적으로 ''magister''는 최상위 귀족 계급 출신이었으며, 귀족의 지위를 지녔다. 이 관직은 589년에 처음 기록에 등장하지만, 주화 주조소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창설로 보인다. 주화 주조소는 속주가 멸망할 때까지(약 625년) 속주 통화를 발행했다.

속주 역사상 5명의 ''magistri''가 알려져 있지만, 이는 전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최초의 알려진 총독인 코멘치올루스(Comenciolus, 아마도 Comentiolus)는 카르타헤나의 성문을 수리했으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도시의 비문(589년 9월 1일자)을 남겼다.[13] 이 비문은 라틴어로 작성되었으며, 속주의 행정 언어로 라틴어가 계속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600년경에는 황제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지위인 ''gloriosus''의 지위를 지닌 코미티올루스라는 총독이 있었다. 귀족이자 ''magister''인 카이사리우스는 614년에 Sisebut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메소포타미아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던 황제 헤라클리우스와 협의했다.

스파니아와 서고트 왕국 사이의 국경은 닫히지 않았다. 개인적 및 상업적 이유로 국경 간 이동이 허용되었으며, 두 지역은 오랫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겪었다. 국경은 아타나길드와 유스티니아누스 1세 간의 조약(''pacta'')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조약의 날짜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이 조약은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죽음 전에 확실히 체결되었다. ''pacta''의 정당성은 7세기까지 인정되었으며, 이는 여행과 무역의 용이성을 설명한다.

4. 1. 스파니아의 지리적 범위

비잔틴 제국의 스파니아는 내륙으로 크게 확장되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이는 동쪽의 페르시아 제국이 더 큰 위협이었기 때문에, 스파니아가 고트족의 침략을 막는 방어 요새로서의 기능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20][9]

스파니아의 주요 도시로는 말라가카르타헤나가 있었으며, 비잔틴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도시 중 어느 곳이 지방 수도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도시들은 비잔틴 세력의 중심지였으며, 고트족의 공격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9] 고트족은 스파니아 외곽 지역을 약탈했지만, 요새화된 도시는 로마 행정의 중심지로 기능했다.[20]

최대 영토의 스파니아, 도시 표시 및 잃어버린 영토


이 시대에 비잔틴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도시는 많지 않다. 메디나 시도니아는 572년 레오비길드에게 재정복될 때까지 유지되었고, 기스곤자는 비테릭 (603–610)의 통치 때까지 유지되었다.[10] 이는 바이티카 지방의 남부가 말라가에서 과달레테 입구까지 비잔틴 통치하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카르타기넨시스 지방의 수도인 카르타헤나는 비잔틴의 도시였으며, 570년에 레오비길드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589년에는 서고트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비잔틴 소유 여부에 논란이 있는 도시 중 가장 큰 도시는 코르도바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코르도바를 스파니아 지방의 첫 번째 수도로 보기도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코르도바는 566년부터 567년까지 반란 상태에 있었으며, 572년에 레오비길드에게 진압되었다. 이 기간 동안 자체적인 지방 정부를 가지고 있었거나, 비잔틴의 종주권을 인정했을 수도 있다.[11]

바이티카와 카르타기넨시스 지방의 남부 지역 외에도, 비잔틴은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의 세우타발레아레스 제도를 소유했다. 세우타는 서고트족의 영토였지만, 마우레타니아 세쿤다 지방에 속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스파니아 지방을 형성했다. 600년까지 스파니아는 말라가와 카르타헤나 및 발레아레스 제도 정도로 줄어들었다. 키프로스의 조지는 지방에서 단 하나의 "시비타스"를 기록했는데,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인"이었지만, 그 의미는 불확실하다. 호세 소토 치카와 아나 마리아 베렌제뇨는 이 도시를 현대의 알헤시라스와 동일시한다.[12]

4. 2. 스파니아의 행정 조직

비잔틴 제국의 스파니아는 내륙 깊숙이 세력이 뻗쳐 있어 동로마 제국의 관리들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스파니아 자체가 방어 요새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여 고트족의 침공을 막으려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위협이 동쪽에서 널리 일어났기 때문에 그 관심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20]

카르타헤나에서 코멘치올루스의 귀족을 기록한 비문인 코멘치올루스 비문


스파니아의 최고 행정 관리는 "스페인 군대의 지휘관"을 의미하는 ''magister militum Spaniae''였다. ''magister militum''은 속주의 민정과 군정을 통치했으며, 황제에게만 종속되었다. 일반적으로 ''magister''는 최상위 귀족 계급 출신이었으며, 귀족의 지위를 지녔다. 이 관직은 589년에 처음 기록에 등장하지만, 주화 주조소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창설로 보인다. 주화 주조소는 속주가 멸망할 때까지(약 625년) 속주 통화를 발행했다.

속주 역사상 5명의 ''magistri''가 알려져 있지만, 이는 전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최초의 알려진 총독인 코멘치올루스(Comenciolus, 아마도 Comentiolus)는 카르타헤나의 성문을 수리했으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도시의 비문(589년 9월 1일자)을 남겼다.[13] 이 비문은 라틴어로 작성되었으며, 속주의 행정 언어로 라틴어가 계속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600년경에는 황제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지위인 ''gloriosus''의 지위를 지닌 코미티올루스라는 총독이 있었다. 귀족이자 ''magister''인 카이사리우스는 614년에 Sisebut와 평화 조약을 맺었고, 메소포타미아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던 황제 헤라클리우스와 협의했다.

스파니아와 서고트 왕국 사이의 국경은 닫히지 않았다. 개인적 및 상업적 이유로 국경 간 이동이 허용되었으며, 두 지역은 오랫동안 평화로운 시기를 겪었다. 국경은 아타나길드와 유스티니아누스 1세 간의 조약(''pacta'')에 의해 결정되었지만, 조약의 날짜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이 조약은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죽음 전에 확실히 체결되었다. ''pacta''의 정당성은 7세기까지 인정되었으며, 이는 여행과 무역의 용이성을 설명한다.

5. 스파니아의 쇠퇴와 멸망

아타나길트와 레오비길드 치세에 비잔틴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서고트족이 공세를 강화했다. 570년경 레오비길드는 바스테타니아를 황폐화시키고 메디나시도니아를 점령했다. 레카르드 통치 기간 비잔틴 제국은 다시 공세를 취해 영토를 확장했지만, 레카르드는 비잔틴 국경의 정당성을 인정해야 했다. 이후 비잔틴 스파니아 속주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후대 왕들 중 비테릭은 스파니아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펼쳤고, 군데마르는 610년 카르타기넨시스 주교좌를 비잔틴 카르타헤나에서 서고트 톨레도로 옮겼다. 시세부트는 비잔틴 제국에 큰 타격을 주어 619년 이전에 말라가를 정복하고 지중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시세부트는 카르타헤나를 파괴했을 가능성이 있다.

621년 비잔틴 제국은 여전히 몇 개의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지만, 수인틸라는 곧 그들을 되찾았고, 624년 발레아레스 제도를 제외한 스파니아 전체가 서고트족의 손에 들어갔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8세기부터 10세기에 걸친 사라센 침입으로 제국에서 분리되었다. 에기카와 비티차의 공동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함대가 스페인 남부 해안을 습격했지만 테우디머에 의해 격퇴되었다.[18]

5. 1. 서고트 왕국의 반격과 스파니아의 쇠퇴

586년의 스파니아


아타나길트와 레오비길드의 통치 시기 비잔틴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방어력이 취약해지자, 서고트족은 다시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570년경, 레오비길드는 바스테타니아를 황폐화시키고 메디나시도니아를 점령했다.[16] 그는 과달키비르 강 계곡에서 많은 도시와 요새를 점령했고, ''바가우데''라고 불리는 강도 군대를 격파했다.[16]

레카레드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은 다시 공세를 취해 영토를 확장했다. 레카레드는 비잔틴 국경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마우리키우스 황제로부터 사본을 보내달라고 그레고리오 교황에게 요청했다. 그레고리오는 조약의 내용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 동안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비잔틴 제국에 더 많은 영토를 부여했을 것이기 때문에 조약의 발견을 원치 않는다고 경고했다(599년 8월). 레오비길드의 정복은 레카레드 통치 기간 동안 로마의 재정복보다 더 컸다. 비잔틴 스파니아 속주는 쇠퇴하고 있었다.

후대 왕들 중 비테릭은 스파니아를 상대로 자주 군사 작전을 펼쳤지만, 그의 장군들이 더 성공적이었다. 군데마르는 610년에 카르타기넨시스 주교좌를 비잔틴 카르타헤나에서 서고트 톨레도로 옮겼고, 611년에 스파니아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펼쳤지만 효과가 없었다. 시세부트는 그 이전의 어떤 왕보다도 스페인의 비잔틴 제국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614년과 615년에 그는 그들을 상대로 두 차례의 대규모 원정을 수행했고, 619년 이전에 말라가를 정복했다. 그는 지중해 해안까지 정복했고 많은 도시를 파괴했다.[17]

시세부트는 카르타헤나 또한 파괴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카르타헤나는 너무나 철저하게 황폐화되어 서고트 스페인에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고트족은 제대로 된 포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점령한 모든 요새의 방어 시설을 약화시켰다. 카르타헤나는 파괴되었지만 말라가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전자가 먼저 함락되었고 비잔틴 제국의 존재는 여전히 위협적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말라가는 비잔틴 제국이 더 이상 위협하지 않을 정도로 약해진 후에 함락되었다.

621년에 비잔틴 제국은 여전히 몇 개의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지만, 수인틸라는 곧 그들을 되찾았고, 624년까지 스파니아 전체는 발레아레스 제도를 제외하고 서고트족의 손에 들어갔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8세기부터 10세기에 걸친 사라센 침입으로 마침내 제국에서 분리되었다.

에기카와 비티차의 공동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해군이 스페인 남부 해안을 습격했고, 테우디머라는 지역 백작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 사건의 연대는 논쟁의 대상이다.[18]

5. 2. 서고트 왕국의 스파니아 재정복

아타나길트와 레오비길드 치세에 비잔틴 제국은 공세를 강화하지 못했고, 서고트족은 반격을 가했다. 570년경, 레오비길드는 바스테타니아(바자 지역)를 약탈하고, 프라미다네우스(고트족일 가능성이 있음)라는 내부자의 배신을 통해 메디나 시도니아를 점령했다.[16] 그는 바자를 점령했거나, 말라가 인근 지역을 습격하여 구원군을 격파했을 수 있다. 그는 과달키비르 계곡에서 많은 도시와 요새를 점령했고, 존 오브 비클라럼에 따르면, 서고트족과 로마의 분쟁 완충 지대에서 자리를 잡았던 ''바가우데''라고 불리는 강도 군대를 가리키는 ''rustici''(시골 사람들)의 대규모 군대를 격파했다.[16] 577년, 비잔틴 통치하에 있던 ''오로스페다''에서, 레오비길드는 더 많은 ''rustici rebellantes''(아마도 ''바가우데'')를 격파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을 상대로 두 계절 동안 군사 작전을 수행한 후, 레오비길드는 다른 지역에 군사적 노력을 집중했다.

레카레드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은 다시 공세를 취해 영토를 되찾거나 넓혔을 것이다. 레카레드는 비잔틴 국경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황제 마우리키우스로부터 사본을 보내달라고 교황 그레고리오에게 요청했다. 그레고리오는 조약의 내용이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 동안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비잔틴 제국에 실제로 당시보다 더 많은 영토를 부여했을 것이기 때문에 조약의 발견을 원치 않는다고 레카레드에게 경고했다(599년 8월). 레오비길드의 정복은 레카레드 통치 기간 동안 로마의 재정복보다 더 컸다. 비잔틴 스파니아 속주는 쇠퇴하고 있었다.

후대 왕들 중 비테릭은 스파니아를 상대로 자주 군사 작전을 펼쳤지만, 그의 장군들이 더 성공적이었다. 그의 장군들은 기스곤자라는 작은 마을을 점령했다. 군데마르는 610년에 카르타기넨시스 주교좌를 비잔틴 카르타헤나에서 서고트 톨레도로 옮겼고, 611년에 스파니아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펼쳤지만 효과가 없었다. 시세부트는 이전의 어떤 왕보다도 스페인의 비잔틴 제국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614년과 615년에 그는 두 차례의 대규모 원정을 수행했고, 세비야 공의회에서 주교가 나타난 619년 이전에 말라가를 정복했다. 그는 지중해 해안까지 정복했고 많은 도시를 파괴하여 프랑크족 연대기 작가 프레데가르의 관심을 끌었다.

> ''. . . et plures civitates ab imperio Romano Sisebodus litore maris abstulit et usque fundamentum destruxit.''

> . . . 시스보두스 왕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안을 따라 많은 도시를 빼앗아 파괴하고 폐허로 만들었다.[17]

시세부트는 카르타헤나 또한 파괴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카르타헤나는 너무나 철저하게 황폐화되어 서고트 스페인에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고트족은 제대로 된 포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점령한 모든 요새의 방어 시설을 줄여 적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카르타헤나는 파괴되었지만 말라가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전자가 먼저 함락되었고 비잔틴 제국의 존재는 여전히 위협적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말라가는 비잔틴 제국이 반도 전체에 대한 서고트족의 패권을 더 이상 위협하지 않을 정도로 약해진 후에 함락되었다.

621년에 비잔틴 제국은 여전히 몇 개의 도시를 점령하고 있었지만, 수인틸라는 곧 그들을 되찾았고, 624년까지 스파니아 전체는 7세기 경제적으로 낙후된 발레아레스 제도를 제외하고 서고트족의 손에 들어갔다. 사르데냐의 ''지우디카티''와 코르시카처럼 발레아레스 제도는 명목상 비잔틴 제국이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8세기부터 10세기에 걸친 사라센 침입으로 마침내 제국에서 분리되었다.

에기카와 비티차의 공동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함대가 스페인 남부 해안을 습격했고, 테우디머라는 지역 백작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 사건의 연대는 논쟁의 대상이다. 이는 아랍인의 공격을 받은 카르타고를 구원하기 위한 레온티우스의 원정의 일환으로 697년에 발생했거나, 702년경, 또는 비티차 통치 말기에 발생했을 수 있다.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것이 잃어버린 스파니아 속주를 재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다른 군사 활동(아마도 아랍인이나 베르베르인)과 관련된 고립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토마스 교수는 "우리는 이 이상한 사건의 배경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말한다.[18]

6. 스파니아의 문화

스파니아에서 유행했던 건축 및 예술 양식은 비잔티움 본토의 양식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비잔티니스트 양식이었다. 무르시아 남쪽의 알헤사레스에 있는 교회와 말라가 근처의 산 페드로 데 알칸타라 교회가 발굴되어 고고학적으로 연구되었다. 그리스와 트라키아의 양식은 발레아레스 제도에서만 자리를 잡았다. 비잔틴 양식의 표식이 스페인 전역에 존재하지만, 고딕 지역에서는 스파니아에서 유행했던 아프리카 양식과의 연관성을 공유하지 않는다.

카르타헤나 인근에서는 스파니아와 모리타니 세쿤다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독특한 아프리카 ''암포라''가 새겨진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카르타헤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상당히 철저하게 발굴되었으며, 도시를 점령한 비잔틴 군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주택 단지가 발견되었다.[15] 카르타헤나 고고학 박물관에서 비잔틴 존재의 많은 유물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스페인 대부분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는 비잔틴 정부 하에서 인구와 면적이 크게 감소했다.

6. 1. 스파니아의 종교

스파니아 지방은 주로 라틴 기독교를 따랐고, 비잔틴 총독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많은 수는 동방 기독교 신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민과 통치자 사이,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는 아리우스파 서고트 스페인 시절보다 더 나아 보이지 않았다. 스파니아 교회는 또한 히스파노-로마인들로 구성된 고트 교회보다 교황청으로부터 덜 독립적이었다. 두 교회는 분리되어 있었다. 한쪽의 성직자는 다른 쪽의 공의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실제로, 스파니아에서는 지방 공의회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각 교회의 신학적 논쟁은 공유되었다. 사라고사의 빈센트의 아리우스파 개종으로 촉발된 논쟁에 말라가 주교가 응답했다.

카르타헤나 출토 비잔틴 시대의 기름 램프


그레고리오 1세는 서고트 왕국에서 어떤 교황보다도 이 지방의 여러 주교구에 성공적으로 간섭했다. 그는 두 명의 폐위된 주교의 재산을 옹호했고, 교회의 일에 간섭했다고 비난한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 코미티올루스에게 군림했다. 그는 암묵적으로 카르타헤나의 리치니아누스가 무지한 자들을 사제로 서품했다고 비난했지만, 리치니아누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방의 교구가 비어 있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는 스파니아의 성직자 교육 상태에 대한 슬픈 평가였다.[14]

6. 2. 스파니아의 건축과 예술

스파니아에서 유행했던 건축 및 예술 양식은 비잔티움 본토의 양식이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비잔티니스트 양식이었다. 무르시아 남쪽의 알헤사레스에 있는 교회와 말라가 근처의 산 페드로 데 알칸타라 교회가 발굴되어 고고학적으로 연구되었다. 그리스와 트라키아의 양식은 발레아레스 제도에서만 자리를 잡았다. 비잔틴 양식의 표식이 스페인 전역에 존재하지만, 고딕 지역에서는 스파니아에서 유행했던 아프리카 양식과의 연관성을 공유하지 않는다.

카르타헤나 인근에서는 스파니아와 모리타니아 세쿤다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독특한 아프리카 ''암포라''가 새겨진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카르타헤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상당히 철저하게 발굴되었으며, 도시를 점령한 비잔틴 군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주택 단지가 발견되었다.[15] 카르타헤나 고고학 박물관에서 비잔틴 존재의 많은 유물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스페인 대부분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는 비잔틴 정부 하에서 인구와 면적이 크게 감소했다.

참조

[1] 문서
[2] 서적 Late Roman Spain and its Cities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4
[3] 문서
[4] 서적 Isidore of Seville's History of the Goths, Vandals, and Suevi E.J. Brill 1970
[5] 문서
[6] 서적 The Gothic History of Jordanes Speculum Historiale 1915
[7] 간행물 Liberius the Patrician https://www.jstor.or[...] 1981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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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La última posesión bizantina en la península ibérica: Mesopotamenoi-Mesopotaminoi. Nuevas aportaciones para su identificación. 2014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문서
[19] 서적 Isidore of Seville's History of the Goths, Vandals, and Suevi E.J. Brill 1970
[2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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