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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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지프 신화》는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로, 부조리 철학을 다룬다. 이 책은 부조리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불가능의 세계로 정의하며, 인간이 세계의 무의미함과 마주하며 겪는 고뇌를 탐구한다. 본서는 '부조리의 추론', '부조리한 인간', '부조리한 창조', '시지프 신화'의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카뮈는 부조리를 자살로 극복하는 것을 거부하고, 끊임없는 반항을 통해 부조리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를 예시로,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투쟁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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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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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제목 (프랑스어) | Le Mythe de Sisyphe |
제목 (한국어) | 시지프 신화 |
원저자 | 알베르 카뮈 |
국가 | 프랑스 |
언어 | 프랑스어 |
장르 | 불조리 수필 평론 철학 |
주제 | 실존주의, 부조리주의 |
출판 정보 | |
출판사 | 갈리마르 출판사 |
최초 출판일 | 1942년 12월 |
페이지 수 | 185쪽 (프랑스어 원본) |
ISBN | 0-679-73373-6 |
번역 정보 | |
영어 번역가 | 저스틴 오브라이언 |
한국어 번역가 | 清水徹 |
한국어 번역 출판사 | 신초오분코 |
한국어 번역 출판일 | 1969년7월 |
2. 부조리 철학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는 "삶이란 의미가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이는 필연적으로 자살 문제와 직결된다. 카뮈는 설령 신을 믿지 않더라도 자살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재앙 속에서도 허무주의를 넘어서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에게 이 작업은 죽음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삶과 창작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부조리'는 단순한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의미와 명확성을 찾으려는 인간의 열망과 침묵하고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 또는 간극을 의미한다.[8] 인간의 이성적인 노력은 종종 세계의 무응답 앞에서 좌절되고, 이는 삶의 가치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카뮈에 따르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 '이 세계',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긴장 관계인 '부조리'뿐이며, 이 부조리를 깨어있는 의식으로 직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알베르 카뮈는 오늘날 부조리 철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지만, 스스로 부조리주의의 창시자라거나 그 틀에 갇히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부조리 자체보다는 다른 주제로 관심을 옮겨갔으며,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등에서 엿볼 수 있다.[9]
카뮈는 삶의 무의미함과 부조리를 깨닫는 것이 반드시 자살로 이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그는 우리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가지만, 그 미래가 결국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는 부조리한 현실을 지적한다. 낭만적 기대를 걷어낸 세계는 낯설고 비인간적이며, 이성이나 과학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 부조리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이해 욕구와 세계의 비합리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카뮈는 부조리를 다룬 일부 철학 사상들이 결국 부조리에서 도피하여 신이나 이성적 관념으로 '도약'함으로써 '철학적 자살'을 저질렀다고 보았다. 카뮈에게 부조리를 진정으로 대면하는 것은 이러한 도피를 거부하고, 인간 이성의 한계와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의 모순을 끌어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리적 자살과 마찬가지로 철학적 자살 역시 거부되어야 하며, 대신 부조리에 대한 끊임없는 '반항'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2. 1. 부조리의 추론
알베르 카뮈가 이 에세이에서 정의하는 '부조리'는 단순히 논리적 모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과 침묵하는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간극 또는 대립을 뜻한다.[8] 명확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은 필연적으로 세계의 침묵 앞에서 좌절되며, 이는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에세이는 바로 이 질문, 즉 삶의 가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카뮈에 따르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 '이 세계', 그리고 이 둘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 상태인 '부조리'뿐이다. 이 부조리야말로 세계와 우리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며, 깨어있는 의식을 통해 우리는 이를 직면하고 인식할 수 있다.카뮈는 부조리 철학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지만, 스스로 부조리주의의 창시자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부조리 자체에서 관심이 멀어졌다고 전해진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중 익명의 독일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인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러한 생각의 변화가 드러난다.[9]
『시지프 신화』의 제1부인 '부조리의 추론'은 다음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이 파트에서는 가장 먼저 "삶을 지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즉 자살의 문제를 철학의 근본 문제로 제기한다. 카뮈는 어떤 사상이 죽음에 이를 만큼 고수할 가치가 있는지 질문하며, 사람들이 자살을 택하는 이유와 반대로 삶을 지속하는 이유를 탐구한다. 그가 보기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주된 이유는 '습관'이지만, 이 습관적인 삶은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이 삶은 가치 있는가? 부조리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명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부조리의 추론'의 핵심이다.
카뮈는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이 반드시 자살로 귀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그는 우리가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삶을 설계하지만, 그 내일이 우리를 죽음으로 더 가까이 이끌 뿐이라는 부조리한 상황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마치 죽음의 필연성을 잊은 듯 살아가며, 낭만적 환상을 걷어낸 세계는 낯설고 비인간적인 곳으로 드러난다. 이성이나 과학으로는 세계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으며, 결국 무의미한 추상에 그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조리이며, "부조리가 인식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열정이 되고, 모든 열정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된다."
부조리는 세계 자체나 인간의 사고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인간의 "절대적인 것과 통일성에 대한 갈망"과 "이 세상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원리로 축소하는 불가능성"이 만날 때 발생한다.
카뮈는 마르틴 하이데거, 카를 야스퍼스, 레프 셰스토프, 쇠렌 키르케고르, 에드문트 후설 등 여러 철학자들이 부조리의 감정을 다루려 했지만, 결국 원래의 부조리한 입장에서 벗어나 '철학적 자살'을 저질렀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이성을 포기하고 신에게 귀의하거나(키르케고르, 셰스토프), 반대로 이성을 절대화하여 추상적인 플라톤 이데아나 신에 도달함으로써(후설) 부조리로부터 '도피'하거나 '비약'했다는 것이다. 카뮈는 특히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신이나 내세에 대한 믿음, 희망 등 형이상학으로의 도피를 '철학적 자살'로 간주하고 배척했다.
카뮈에게 이러한 '도약'은 부조리를 회피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부조리를 진정으로 대면한다는 것은 인간 이성의 한계와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의 모순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리적 자살 역시 거부되어야 한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부조리도 없기 때문이다. 모순은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며, 이성과 그 한계를 거짓된 희망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부조리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면'과 '끊임없는 반란'을 요구한다.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인간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의 자유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지만, 다른 의미에서 자유를 얻는다. 더 나은 미래나 영원에 대한 희망, 삶의 목적 추구나 의미 부여의 필요성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규칙에 관해 자유를 누린다." 부조리를 수용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세계가 제공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삶에 내재적 의미가 없다면 가치 척도 또한 무의미해진다. 중요한 것은 "가장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많이 사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카뮈는 부조리를 온전히 인정하는 데서 세 가지 귀결, 즉 반란, 자유, 열정을 이끌어낸다. 반란은 부조리에 대한 끊임없는 대결이며, 자유는 미래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음이고, 열정은 주어진 삶의 경험을 최대한으로 누리는 것이다. 자살은 이러한 부조리와의 대결을 포기하는 행위이므로 답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다.
: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다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할 뿐이다.[7]
2. 2. 철학적 자살
알베르 카뮈는 일부 철학자들이 부조리의 감정을 다루면서도 결국에는 모순된 결론에 도달한다고 보았다. 그는 마르틴 하이데거, 카를 야스퍼스, 레프 셰스토프, 쇠렌 키르케고르, 에드문트 후설과 같은 철학자들이 부조리를 설명하려 시도했지만, 결국 부조리한 현실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다고 비판했다.카뮈는 이러한 지적 도피를 '철학적 자살'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부조리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대신, 비합리적인 '도약'을 통해 문제를 회피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키르케고르나 셰스토프처럼 이성을 포기하고 신에게 귀의하거나, 후설처럼 이성을 절대화하여 궁극적으로는 추상적인 관념이나 신에게 도달하려는 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카뮈는 이러한 종교적 믿음이나 형이상학으로의 도피 역시 '철학적 자살'로 간주하여 배척했다.
카뮈에게 이러한 '도약'은 부조리라는 근본적인 모순, 즉 이해하려는 인간의 욕구와 이해 불가능한 세계 사이의 긴장을 외면하는 것이기에 설득력이 없었다. 부조리를 진정으로 마주한다는 것은, 이 모순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리적인 자살이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듯이, 현실을 외면하는 '철학적 자살' 또한 답이 될 수 없다. 카뮈는 부조리를 회피하거나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인식하고 끊임없이 반항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모르는 행위이며, 부조리한 인간은 오직 삶을 남김없이 소진할 뿐이라고 보았다.[7] 부조리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카뮈가 제시하는 삶의 방식이다.
3. 부조리한 인간
『시지프 신화』의 제2부 '부조리한 인간'은 부조리를 인식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카뮈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전통적인 윤리 규칙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상황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삶의 태도를 탐구한다. 부조리한 세계에서는 모든 규칙의 기반이 되는 상위 권력이나 정당성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카뮈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구원의 외침이나 기쁨의 외침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에 대한 쓰라린 인정"이라고 표현하며, 진실성에는 별도의 규칙이 필요 없음을 강조한다.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을 제시한다: 돈 후안, 배우, 그리고 정복자.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의 유한성과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대한의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하위 항목에서 다룬다.
3. 1. 돈 후아니즘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제2부 '부조리한 인간'에서 부조리를 인식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돈 후안, 배우, 정복자라는 세 가지 삶의 방식을 부조리한 삶의 구체적인 예시로 제시한다.부조리한 세계관에서는 전통적인 윤리 규칙이 그 기반을 잃게 된다. 모든 도덕 규칙은 신이나 절대적 가치와 같은 상위의 권위나 정당성에 의존하는데, 부조리의 발견은 바로 이러한 초월적 기반의 부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카뮈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구원의 외침이나 기쁨의 외침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에 대한 쓰라린 인정"이라고 설명하며,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직면하는 냉혹한 현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부조리한 인간의 첫 번째 전형으로 카뮈가 주목하는 인물이 바로 돈 후안이다. 돈 후안은 영원한 사랑이나 내세의 구원과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대신, 덧없는 현재의 삶과 순간적인 정열을 최대한으로 만끽하며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며 삶의 양적인 경험을 극대화한다. 카뮈에게 돈 후안은 단순한 신화 속 호색한이 아니라, 삶의 유한성과 부조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반항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한 모습이다. 카뮈는 "자신이 단명하고 예외적임을 인정하는 사랑 외에는 고귀한 사랑이 없다"는 말로 돈 후안적 삶의 태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영원성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현재의 삶을 양적으로 풍부하게 채워나감으로써 부조리에 맞서는 하나의 방식을 의미한다.
3. 2. 연극 (배우)
카뮈는 시지프 신화 제2부 '부조리한 인간'에서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한 유형으로 배우를 제시한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덧없는 명성을 얻기 위해 수많은 덧없는 삶을 연기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카뮈는 배우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얼마나 실존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고 설명하며, 짧은 공연 시간 동안 "관객이 평생을 걸쳐서 덮는 막다른 길의 모든 과정을 거친다"고 말한다. 이는 배우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과 경험을 압축적으로 살아내며, 영원이나 절대적 가치보다는 순간의 경험에 충실한 부조리적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예시임을 의미한다. 이는 돈 후안이나 정복자와 마찬가지로, 주어진 현실 속에서 양적으로 충만한 삶을 추구하는 부조리한 인간의 태도를 나타낸다.3. 3. 정복
카뮈가 제시하는 부조리한 인간의 세 번째 예시는 정복자이다. 정복자는 인간의 역사에 완전히 영향을 미치고 참여하기 위해 영원에 대한 모든 약속을 포기하는 전사이다. 그는 성찰보다 행동을 선택하며,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고 어떤 승리도 최종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4. 부조리한 창조
《시지프 신화》의 제3부인 '부조리한 창조'는 철학과 소설, 키릴로프, 내일 없는 창조의 세 개 장으로 구성되며, 부조리 예술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카뮈는 예술이 부조리의 피난처가 아니며, 예술 작품 자체가 부조리의 한 현상이라고 본다. 그는 부조리 작품이 명철한 사고를 바탕으로 하며, 예술과 철학이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카뮈는 이 부에서 부조리한 창조자, 즉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탐구한다. 세상은 설명이 불가능하기에, 부조리한 예술은 세상의 다양한 경험을 묘사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만약 세상이 명확하다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부조리한 창조는 어떤 판단도 유보하고 아주 작은 희망의 암시조차 배제해야 한다고 본다.
두 번째 장 '키릴로프'에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작가의 일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악령》 등을 분석한다. 카뮈는 이 작품들이 부조리함을 잘 그려냈지만, 결국 등장인물들이 자살을 택하거나(철학적 자살) 희망으로 비약함으로써 진정한 부조리 작품이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카뮈는 제3부의 결론으로, 앞서 '부조리한 인간'에서 제시된 삶의 태도인 반항, 자유, 다양성(열정)이 부조리한 창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개인의 삶 전체의 근본적인 무용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정신들은 보다 용이하게 작품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그들이 삶의 부조리를 깨달음으로써 지나칠 만큼 열광하며 삶 속에 뛰어들게 되는 것과 같다.[7]
4. 1. 철학과 소설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제3부 '부조리한 창조'에서 부조리 예술을 다룬다. 이 부분은 철학과 소설, 키릴로프, 내일 없는 창조의 3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뮈는 예술이 부조리의 피난처가 아니며, 예술 작품 자체가 부조리의 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부조리 작품이 명철한 사고를 기반으로 하며, 예술과 철학이 분리될 수 없음을 밝힌다.[7]두 번째 장 '키릴로프'에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특히 《작가의 일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악령》을 분석한다. 카뮈는 이 작품들이 부조리함을 그려내지만, 결국 등장인물들이 자살을 선택하거나(철학적 자살) 희망으로 비약함으로써 진정한 부조리 작품이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부조리한 창조 역시 부조리를 살아내는 태도인 반항, 자유, 다양성(열정)을 반영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카뮈는 부조리한 감정을 다루려 했던 다른 철학자들, 예를 들어 마르틴 하이데거, 카를 야스퍼스, 레프 셰스토프, 쇠렌 키르케고르, 에드문트 후설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는 이들이 결국 이성을 포기하고 신에게 귀의하거나(키르케고르, 셰스토프), 이성을 고양시켜 추상적인 플라톤적 이데아나 신에 도달함으로써(후설), 부조리라는 원래의 출발점과 모순되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지적한다. 카뮈는 이러한 '도약'을 '철학적 자살'이라고 부르며 거부한다.
카뮈에게 부조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이해하려는 욕구와 세상의 비합리성 사이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계속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조리한 창조, 즉 예술은 설명을 포기하고 세상의 다양한 경험을 묘사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카뮈는 "만약 세상이 명확하다면, 예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부조리한 예술은 어떤 판단도 유보하고 희미한 희망조차 내비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 부조리에서 출발했지만, 궁극적으로 희망과 믿음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진정한 부조리 창조물로서는 실패했다고 다시 한번 평가한다.
:그리하여 개인의 삶 전체의 근본적인 무용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정신들은 보다 용이하게 작품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그들이 삶의 부조리를 깨달음으로써 지나칠 만큼 열광하며 삶 속에 뛰어들게 되는 것과 같다.[7]
4. 2. 키릴로프
'키릴로프'는 『시지프 신화』의 제3부 '부조리한 창조'에 속한 장의 제목이다. 이 장에서 알베르 카뮈는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여러 작품, 특히 <작가일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악령> 등을 분석하며 부조리의 문제를 탐구한다.카뮈는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작품 속에서 부조리의 감각과 그 결과를 예리하게 포착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카뮈의 분석에 따르면,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이나 서사는 결국 부조리를 끝까지 감당하지 못하고 철학적 자살(실존주의적 도피나 종교적 희망에 기대는 것)로 나아가거나, 혹은 희망으로 비약하는 결말을 맞이한다고 본다. 즉, 부조리를 발견하지만 그것을 부조리로서 받아들이고 반항하기보다는 다른 형태의 해답이나 구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카뮈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이 부조리의 문제를 제기하고 깊이 있게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조리 앞에서 자살이나 도피가 아닌 '반항', '자유', '열정'을 견지해야 한다는 『시지프 신화』의 핵심 주장과는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고 평가한다. 카뮈에게 진정한 '부조리한 창조'란 부조리를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인식하면서도 삶을 긍정하고 창조를 이어나가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한계를 지닌다고 보았다.
4. 3.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속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
이 에세이에는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속 희망과 부조리"라는 제목의 부록이 포함되어 있다.[6] 이 부록에서는 카프카의 <심판>, <성>, <변신>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부조리 상태에 대한 묘사를 다룬다. 카뮈는 카프카가 일상적인 것을 통해서 비극을 표현하고 논리적인 것을 통해 부조리를 표현한다고 분석한다.카뮈는 카프카의 작품이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훌륭한 묘사라고 인정하면서도,[6] 카프카가 부조리를 논리적으로 잘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에는 희망을 부여하여 결국 부조리의 상태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에는 실패했다고 주장한다.[6][7] 카뮈는 "전 우주에 대하여 제기하는 카프카의 맹렬한 소송의 끝에 이르러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기만, 술책이다."[7]라고 언급하며 카프카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 부록은 본래 <시지프 신화> 초판에서는 '도스토옙스키와 자살'에 대한 장으로 대체되어 있었으며, 1943년 아르발레트(L’Arbalete) 지에 미리 발표된 바 있다.
5. 시지프 신화
카뮈는 이 마지막 장에서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 이야기를 통해 부조리한 영웅의 끊임없는 투쟁을 그려내고 있다.
시지프스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 영원히 크고 무거운 돌을 산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인물이다.[4] 산 정상에 돌을 올리면 돌은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시지프스는 이 무의미한 노동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 카뮈는 시지프스의 이러한 모습을 끝없는 노동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은유로 제시한다.[4]
카뮈에게 시지프스의 운명이 비극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7] 그러나 바로 이 의식을 통해 시지프스는 자신의 운명에 멸시로 반항하며, 카뮈는 이러한 통찰이 고통인 동시에 승리를 완성시킨다고 본다.[7] 카뮈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인용하며 비극적 운명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는 인간의 투쟁을 강조하고, 시지프스 역시 굴러떨어진 바위를 향해 다시 내려가는 투쟁 그 자체를 통해 자신의 운명보다 강인해진다고 설명한다.
카뮈는 시지프스를 삶을 최대한 살고, 죽음을 미워하며, 무의미한 노동에 갇힌 부조리한 영웅으로 본다.[4] 그는 시지프스가 자신의 임무가 헛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밀어 올리는 행위 자체에서 의미를 찾으며, 이러한 부조리의 인식을 통해 만족과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카뮈는 "시지프스를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5]
5. 1. 시지프의 반항
카뮈는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 이야기를 통해 부조리한 영웅의 끊임없는 투쟁을 그린다. 시지프스는 신들에게 반항하거나[4] 제우스와 아이기나의 불륜 사실을 폭로하는 등[4] 신들을 기만한 죄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 형벌은 바로 거대한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것이었으나, 정상에 다다르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이 과정을 무한히 반복해야만 했다.[4] 신들은 끝없는 무용 노동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형벌이라고 생각했다.카뮈는 시지프스를 삶을 최대한으로 살아가고, 죽음을 증오하며, 무의미해 보이는 노동에 갇힌 부조리 영웅으로 해석한다.[4] 시지프스의 고통이 비극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의 처지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매 순간 성공의 희망이 그를 지탱한다면 고통스럽지 않겠지만, 그는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명확히 알고 있다.[7] 카뮈는 특히 시지프스가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기 위해 산을 내려오는 순간에 주목한다. 이 휴식과도 같은 하강의 시간 동안 시지프스는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며 사색한다. 카뮈는 바로 이 통찰의 순간이 시지프스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킨다고 보았다. 그는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없다"고 말하며[7], 운명에 대한 시지프스의 저항 정신을 강조한다.
카뮈는 시지프스의 끝없는 노동을 현대 사회에서 반복적인 업무에 얽매인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은유로 제시한다. 이러한 삶 역시 부조리하지만, 그 부조리를 의식하는 드문 순간에만 비극이 된다고 본다.
시지프스는 자신의 형벌이 헛되다는 사실과 운명의 확실성을 인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일종의 만족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카뮈는 비극적 운명에도 불구하고 결국 "만사가 다 잘되었도다"라고 말한 오이디푸스의 예를 들며, 시지프스 역시 자신의 운명 위에서 강인함을 찾는다고 설명한다.[5] 시지프스는 굴러떨어진 바위를 향해 다시 내려가는 투쟁 그 자체를 통해 신들의 의지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된다.
결론적으로 카뮈는 "시지프스를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5] 시지프스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 자체에서 더 높은 차원의 충실함을 발견하며 행복을 찾는다. 카뮈에게 있어 "높이 오르려는 투쟁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즉, 부조리한 운명에 대한 반항과 그 과정 자체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6. 집필 과정과 번역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대한 구상은 그의 <작가수첩>에 1936년 처음 등장한다. 여기에는 '부조리', '명철한 의식', '무상의 유희', '힘과 선', '허영을 경계할 것', '인내력을 기를 것', '성자: 침묵할 것, 행동할 것, 사회주의. 수련과 실현. 근본적으로는 영웅적 가치' 등의 핵심 개념과 함께 <시지프 신화> 구상의 실천 계획이 나타나 있다. 그는 철학적 작품으로 '부조리'를, 문학적 작품으로는 '정복이라는 표상 아래 힘, 사랑, 그리고 죽음'을 다루고자 했으며, 두 작품에서 각 장르의 특성을 존중하면서 혼합하려 했다. 또한 "죽음과 철학의 에세이- 말로, 인도"라는 기록을 통해 부조리를 죽음과 관련지어 구체화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1938년 카뮈는 사르트르의 <구토>에 대한 서평을 썼는데, 이 글은 부조리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을 담고 있어 사실상 <시지프 신화>의 초안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시지프 신화> 본문에서도 사르트르의 작품이 직접 언급되기도 한다.
카뮈는 1939년 9월 <시지프 신화>의 집필을 시작했고, 1940년 초에는 소설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동시에 작업했다. 1940년 5월 1일 <이방인>을 완성했으며, 같은 해 9월 <시지프 신화>의 제1부를 마쳤다. 책 전체는 1941년 2월에 완성되었다. 처음 제목은 <부조리>였으나 <시지프 신화>로 변경되었다. 이 책은 1942년 10월 16일, 갈리마르 출판사의 에세이 총서 제12권으로 초판 2,750부가 출간되었다.[7]
카뮈는 1940년 프랑스 침공으로 수백만 명의 난민이 진격하는 독일군을 피해 달아나던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 책의 집필을 시작했다. 에세이 자체는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많이 다루지 않지만, 로버트 자레츠키(Robert Zaretsky)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카뮈의 부조리 개념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그는 평범한 일상뿐 아니라 독일의 침공과 같은 극적인 사건 모두 인간에게 존재의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왜?")을 던지게 만든다고 보았다.[2]
<시지프 신화>의 영어 번역본은 저스틴 오브라이언(Justin O'Brien)에 의해 1955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이 번역본에는 1955년 파리에서 카뮈가 직접 쓴 서문이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는 "신을 믿지 않더라도 자살은 정당하지 않다"고 밝혔다.[3]
일본에서는 신초 문고판으로 출간되었으며, 여기에는 표제작인 "시지프 신화" 외에도 "부조리한 논증", "부조리한 인간", "부조리한 창조",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 등의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주요 일본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번역자 | 제목 | 시리즈/판본 | 출판사 | 출판 연도 |
---|---|---|---|---|
시미즈 토오루 | 『신초 세계 문학 49』 | 신초샤 | 1969년 | |
시미즈 토오루 | 『이방인·시지프 신화』 | 카뮈 전집 2 | 신초샤 | 1972년 |
시미즈 토오루 | 『시지프 신화』 | 신초 문고 | 신초샤 | 1982년 1월 |
시미즈 토오루 | 『시지프 신화』 | 신초 문고 (60쇄 개정판) | 신초샤 | 2006년 9월 |
7. 한국 사회와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는 에세이의 마지막 장에서 시시포스의 전설을 다룬다. 시시포스는 신들에게 반항하고 죽음을 속박하여 인간이 죽지 않도록 만들었다. 죽음이 풀려나고 시시포스가 죽게 되었을 때, 그는 속임수로 저승을 탈출했다. 결국 신들에게 붙잡힌 시시포스는 영원히 산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 정상에 다다르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져 형벌은 영원히 반복된다. 카뮈는 시시포스를 삶을 최대한 살아가고, 죽음을 증오하며, 의미 없는 노동에 갇힌 부조리한 영웅으로 해석한다.[4]
카뮈는 시시포스의 끝없고 무의미한 노동을 현대인이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반복적인 일에 얽매여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은유로 제시한다. 그는 "오늘날의 노동자는 매일 똑같은 일에 평생을 바치며, 이 운명은 결코 부조리함이 덜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드물게 의식하게 되는 순간에만 비극적이다."라고 말한다.
카뮈는 시시포스가 바위를 다시 밀어 올리기 위해 산을 내려오는 순간의 그의 생각에 주목한다. 바위가 굴러떨어진 후, "바로 그 귀환, 그 휴식 동안 시시포스는 나를 매료시킨다. 돌과 너무 가까이 고생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다! 나는 그 남자가 결코 끝나지 않을 고통을 향해 무겁지만 절제된 발걸음으로 내려가는 것을 본다." 이 순간이야말로 영웅이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의식하게 되는 진정한 비극의 순간이다. 그는 희망이 없지만, 카뮈는 "경멸로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은 없다"고 말하며,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운명을 정복하는 길이라고 본다. 시시포스는 부조리한 인간처럼 계속해서 바위를 밀어 올린다. 카뮈는 시시포스가 자신의 과업이 헛되다는 것과 운명의 확실성을 인정할 때, 역설적으로 자신의 상황의 부조리함을 깨닫고 만족스러운 수용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저주받은 또 다른 그리스 영웅 오이디푸스의 운명과 연결 지으며, 카뮈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라고 결론 내리고, "시시포스를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말한다.[5]
그리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카뮈는 부조리에 순응하며 영원히 다시 시작하는 삶과 시지프스를 연결한다. 시지프스가 벌을 받은 이유에 대해 카뮈는 여러 신화 버전을 언급하는데, 대부분 신들을 모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 버전에 따르면, 시지프스는 죽음을 앞두고 아내에게 자신의 시신을 광장에 버리라고 부탁하며 아내의 사랑을 시험하려 했다. 다른 버전에 따르면, 그는 제우스와 아이기나의 불륜 사실을 알고 이를 아이기나의 아버지인 강 아소포스에게 알려주고 대가로 자신의 요새에 샘을 얻었다. 이러한 비밀 폭로가 신들의 분노를 사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카뮈는 신화 속 비극적인 시지프스와 달리 "시지프스를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지프스는 그가 수행하는 과업의 의미가 아니라, 그 과업 자체의 완수 과정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이다.
시지프스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 올리는 더 높은 충실함을 가르친다. 그 역시 모든 것이 괜찮다고 결론짓는다. 이제 주인이 없는 이 우주는 그에게 불모하지도 비옥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 돌의 각 원자, 밤으로 가득 찬 이 산의 각 광물 조각이 홀로 세계를 이룬다. 높이 오르려는 투쟁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시시포스를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그는 수많은 철학 논문과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와 프란츠 카프카와 같은 소설가들의 작품을 기반으로 자신의 추론을 펼쳤지만,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그가 "인용한 작가들을 읽지 않았다"고 암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식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존재를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행복은 그 부조리를 인식하면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운명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바뤼흐 스피노자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Myth of Sisyphus
https://www.britanni[...]
2019-11-29
[2]
서적
Why Albert Camus Remains Controversial
https://www.thedaily[...]
The Daily Beast
2013-10-20
[3]
서적
The Myth of Sisyphus and Other Essays
Alfred A. Knopf
1955
[4]
웹사이트
The Myth of Sisyphus
https://www.sparknot[...]
2019-12-09
[5]
웹사이트
The Myth of Sisyphus
https://www.britanni[...]
2019-12-09
[6]
서적
Albert Camus and the Metaphor of Absurdity
Salem Press
2011
[7]
서적
시지프 신화 -부조리에 관한 시론
책세상
2013
[8]
위키백과
Absurdism
https://en.wikipedia[...]
2013-12-16
[9]
위키백과
알베르 카뮈
https://ko.wikipedia[...]
201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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