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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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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힌다는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파한 인물로, 스리랑카의 주요 종교 연대기인 디파밤사, 마하밤사 등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3세기경 데바남피야 띠사 왕을 불교로 개종시켰으며, 아소카 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마힌다는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스투파 건립, 상가미타를 초청하여 여성 불교도들을 위한 법회를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스리랑카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싱할라 문학의 아버지로도 칭송받는다. 미힌탈레는 마힌다가 데바남피야 띠사 왕을 처음 만난 곳이자 그의 장례 탑이 있는 곳으로, 스리랑카의 중요한 순례지이다. 그러나 아소카 왕 비문과의 불일치, 연대 문제 등으로 인해 그의 행적에 대한 역사적 논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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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힌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칭 접두사아라한
아라한 마힌다 존자 (아소카 왕의 아들)
수도원에 있는 아라한 마힌다 상
출생명마힌다 마우리아 왕자 (팔리어)
출생일기원전 285년
출생지마우리아 제국 아반티라슈트라 우자인 현 (현재 인도)
사망일기원전 205년 (약 79 ~ 80세)
사망지아누라다푸라 왕국 (현재 스리랑카)
사망 원인노환
안장지스리랑카
국적인도
알려진 이유스리랑카에 상좌부 불교를 확립
교육불교
종교불교
종파상좌부
부모아버지: 아소카
어머니: 데비
종교 경력
스승모갈리풋타 티사

2. 역사적 자료

스리랑카의 주요 종교 연대기인 디파밤사마하밤사는 마힌다가 스리랑카로 건너가 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불교로 개종시킨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마힌다의 생애와 활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9][15] 비문과 문헌 자료들도 마힌다가 활동했던 기원전 3세기경 스리랑카에 불교가 널리 퍼졌음을 뒷받침한다.[9][15] 특히 라자가라 사원의 비문은 마힌다 장로가 불교 전파를 위해 스리랑카에 왔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확인시켜 준다.[10][16]

마하밤사에는 아소카 대왕의 아들인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왔고, 그의 누이인 상가미타비구니가 되어 보리수를 스리랑카로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4][11][17] 문헌들은 마힌다의 스리랑카행 동기를 종교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묘사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소카 대왕이 왕위 계승 분쟁을 피하고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리랑카로 보냈을 것이라는 정치적 동기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힌다가 스리랑카 왕을 개종시켰다는 전설을 포함한 일부 기록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독일의 인도학자 헤르만 올덴베르크와 영국의 빈센트 아서 스미스 등은 아소카 왕 비문에 마힌다의 파견이나 스리랑카 왕 개종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마하밤사 기록의 역사성에 의문을 제기했다.[12] 또한, 아소카가 불교 승려를 스리랑카에 파견한 연대에 대해서도 마하밤사(기원전 255년)와 아소카 비문(기원전 260년)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

2. 1. 라자갈라 비문

미힌두 세야(Mihindu Seya) 마힌다를 기념하는 비문이 발견된 장소


스리랑카의 주요 연대기인 디파밤사(Dīpavaṃsa)와 마하밤사(Mahāvaṃsa)에는 마힌다가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불교에 귀의시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9] 이 기록들은 마힌다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주요 자료로 활용된다. 또한, 다른 비문들과 문학 작품들도 마힌다가 활동했던 기원전 3세기경에 스리랑카에 불교가 널리 퍼졌음을 보여준다.[9] 특히 라자가라 수도원에 남아있는 비문에는 마힌다가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불교를 전파하고 그곳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10]

'''라자갈라 비문 내용'''[10]

  • '''시기''': 기원전 200년경
  • '''문자''': 초기 브라흐미 문자
  • '''언어''': 엘루어
  • '''원문''': ''Ye ima dipa paṭamaya idiya agatana Iḍika-[tera-Ma] hida-teraha tube''
  • '''번역''': "이것은 이 섬에 가장 큰 행운으로 온 장로 이티야와 장로 마힌다의 이다."


마하밤사에는 아소카의 아들인 마힌다가 스리랑카를 방문했고, 그의 여동생 상가미타가 비구니로서 보리수의 일부를 스리랑카로 가져왔다는 기록도 있다.[11] 하지만 아소카 왕의 비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았으며, 고대 스리랑카 미술에서도 관련된 조각이나 프레스코화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힌다가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국왕을 불교에 귀의시켰다는 전설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독일의 인도학자 헤르만 올덴베르크는 이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아소카와 고대 인도를 연구한 빈센트 아서 스미스(Vincent Arthur Smith)도 같은 견해를 지지했다.[12] 이들은 아소카 왕 비문에 아소카가 아들 마힌다를 출가시키고 스리랑카 국왕을 불교로 귀의시키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한, 아소카가 불교 승려들을 스리랑카에 파견한 연도에 대해서도 기록 간의 모순이 존재한다. 마하밤사에는 불교 승려들이 기원전 255년에 도착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아소카 왕 비문에는 이보다 5년 빠른 기원전 26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2. 2. 마하밤사의 기록



스리랑카의 주요 종교 연대기인 디파밤사마하밤사는 마힌다가 스리랑카로 건너가 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불교로 개종시킨 이야기를 전하고 있으며,[9][15] 이는 마힌다의 생애와 활동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여러 비문과 문헌 자료 역시 마힌다가 활동했던 기원전 3세기경 스리랑카에 불교가 널리 퍼졌음을 뒷받침한다.[9][15] 특히 라자가라 사원의 비문은 마힌다 장로가 불교 전파를 위해 스리랑카에 왔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10][16]

:'''시기''': 기원전 200년경, '''문자''': 초기 브라흐미 문자, '''언어''': 엘루어 (고대 싱할라어)
''Ye ima dipa paṭamaya idiya agatana Iḍika-[tera-Ma] hida-teraha tube''
"이것은 이 섬에 가장 큰 행운으로 온 장로 이티야와 장로 마힌다의 이다."[3][16]

마하밤사에 따르면, 아소카 대왕의 아들인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왔고, 그의 누이인 상가미타비구니가 되어 보리수를 스리랑카로 가져왔다고 한다.[4][11][17]

문헌들은 마힌다의 스리랑카행 동기를 종교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묘사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정치적 동기가 더 컸을 것으로 본다. 아소카 대왕은 마힌다가 왕위 계승 과정에서 다른 형제처럼 살해될 것을 우려하여, 그를 보호하고 왕위 계승 분쟁을 피하고자 스리랑카로 보냈다는 해석이다. 마힌다 일행은 오늘날 산치로 추정되는 베다사기리 사원에서 출발했다.

마하밤사디파밤사는 마힌다 일행이 제타 달 보름날 스리랑카에 도착했다고 기록한다. 당시 데바남피야 티사 왕은 미힌탈레 언덕에서 사냥 중이었다. 아소카와 데바남피야 티사는 이전부터 교류하며 선물을 주고받는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머리를 깎은 승려들의 낯선 모습에 놀란 왕이 누구인지 묻자, 마힌다는 인사를 나눈 뒤 출라핫티파도파마 수트라(상적유소경)를 설법했고, 왕과 사냥 일행은 불교로 개종했다. 이후 마힌다 일행은 수도 아누라다푸라로 초청받아 왕궁에서 공양을 받고 법회를 열었다. 마힌다는 왕의 허락을 받아 왕궁 홀과 왕립 공원인 난다나 정원에서 두 차례 공개 법회를 열어 스리랑카에 불교가 대중적으로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왕립 공원인 마하메가는 마힌다 일행의 거처가 되었고, 이후 스리랑카 초기 불교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인 마하비하라 승원으로 발전했다. 미힌탈레에는 체티야기리비하라 승원이 세워졌다.

스리랑카 여성들이 출가를 원하자, 마힌다는 마가다에 있던 누이이자 비구니인 상가미타를 스리랑카로 초청하여 여성들을 위한 승단을 조직했다. 또한, 부다가야에 있는 원래 보리수의 묘목을 스리랑카로 가져오도록 주선하여 마하비하라 경내에 심게 했는데, 이 나무는 오늘날까지도 볼 수 있다고 전해진다.

마힌다는 수도의 스리랑카인들에게 한 달간 설법한 후, 우기 동안 바사(안거)를 보내기 위해 미힌탈레로 물러났다. 그곳에는 왕실의 지원으로 두 번째 승원이 세워졌다. 이후 마힌다는 고타마 붓다의 사리 일부를 마우리아 제국에서 스리랑카로 가져와 을 세우도록 했다. 또한, 데바남피야 티사 왕의 조카이자 비구인 아리타에게 비나야(승려 규율)를 가르치게 하여 스리랑카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마힌다는 데바남피야 티사 왕보다 오래 살았으며, 80세의 나이로 스리랑카에서 사망했다. 데바남피야 티사의 뒤를 이은 우티야 왕은 마힌다를 위해 국장을 치르고, 그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한 을 미힌탈레에 세웠다.

'''기록에 대한 비판'''

마힌다가 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개종시켰다는 마하밤사 등의 기록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독일의 인도학자 헤르만 올덴베르크와 영국의 빈센트 아서 스미스 등은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12] 이들은 아소카 왕 비문 어디에도 아들 마힌다를 출가시켜 스리랑카 왕을 개종시키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또한, 마하밤사에는 아소카의 딸 상가미타보리수를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지만[11], 아소카 비문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고대 스리랑카 미술에서도 관련 묘사를 찾기 어렵다.

불교 승려 파견 시기에 대해서도 기록 간의 모순이 존재한다. 마하밤사는 마힌다 일행이 기원전 255년에 도착했다고 기록하지만, 비문에는 이보다 5년 빠른 기원전 26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3. 생애

마힌다는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라자였던 아소카와 그의 아내 데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아소카는 그에게 '위대한 인드라'라는 뜻의 '마헨드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그는 가족의 권유로 20세에 출가하여 '마힌다'로 불리게 되었다. 출가 후 아버지의 스승인 모갈리풋타 티싸 밑에서 삼장을 공부했다.

아소카는 장남인 마힌다가 왕위를 잇기를 바랐으나, 힌두교 관례상 바이샤 계급의 어머니를 둔 그의 계승에 대한 문제와 마힌다 자신의 의사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후 마힌다는 제3차 결집 이후 불교 전파를 위해 스리랑카로 파견되었다. 스리랑카 연대기는 종교적 사명을 강조하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아소카가 마힌다를 후계자 경쟁에서 보호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스리랑카에 도착한 마힌다는 미힌탈레에서 아누라다푸라 왕국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만나 불교를 전파했으며, 이는 스리랑카 불교 수용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는 아누라다푸라 등지에서 설법하고, 마하비하라와 미힌탈레에 승원을 건립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누이인 상가미타를 초청하여 여성 교단을 세우고 붓다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스리랑카에 전했으며[8], 불사리를 봉안할 을 건립하는 등 스리랑카 불교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힌다는 데바남피야 티사 왕 사후에도 활동을 이어가다 80세의 나이로 스리랑카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우티야 왕은 국장을 치르고 미힌탈레에 그의 유골을 안치한 을 세워 업적을 기렸다.

3. 1. 인도에서의 삶과 출가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라자였던 아소카와 그의 아내 데비의 장남으로 알려져 있다.[1] 아소카는 장남에게 "위대한 인드라(인도의 군신)"라는 의미의 "마헨드라"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그는 가족의 권유로 20세에 출가하여 "마힌다"라고 불리게 되었다.[1] 이후 아버지의 스승인 모갈리풋타 티싸 밑에서 삼장을 배우고, 제3차 결집 때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스리랑카로 파견되었다.[1][2]

처음에 그의 아버지 아소카는 장남인 마힌다가 라자를 계승하기를 바랐다.[3] 그러나 힌두교의 관례상 바이샤 계급의 어머니를 둔 그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인정받기 어려웠고,[4] 또한 그 자신도 원하지 않았기에 왕위 계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

연대기에서는 마힌다가 종교적인 이유로 스리랑카로 갔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역사가들은 오히려 정치적인 이유가 더 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5] 이들은 아소카가 마힌다를 후계자 경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산치로 파견했다고 본다.[5]

3. 2. 스리랑카로의 파견



스리랑카의 주요 종교 연대기인 디파밤사마하밤사에는 마힌다가 스리랑카로 건너가 데바남피야 띠사 왕을 불교로 개종시킨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2] 이 문헌들은 그의 스리랑카 활동에 대한 주요 정보원이다. 또한, 비문과 문헌 자료들은 마힌다가 활동했던 기원전 3세기경 스리랑카에 불교가 널리 퍼졌음을 증명한다.[2] 특히 라자가라 사원의 비문(기원전 200년경 추정, 초기 브라흐미 문자, 엘루어 사용)에는 "이것은 이 섬에 가장 큰 행운으로 온 장로 이티야와 장로 마힌다의 이다."[3] 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마힌다가 불교 전파를 위해 스리랑카에 와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3]

마하밤사아소카의 아들인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왔으며, 아소카의 딸(상가미타)이 비구니가 되어 보리수를 가져왔다고 전한다.[4]

문헌들은 마힌다의 스리랑카행을 종교적 동기로 설명하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정치적 동기가 더 컸을 것으로 추정한다.[17] 아소카는 바이샤 출신 어머니를 둔 마힌다의 왕위 계승에 대한 힌두교 공동체의 반발과 마힌다 자신의 무관심[17], 그리고 다른 아들 수시마처럼 왕위 계승 분쟁 과정에서 살해될 가능성을 우려하여[17], 그를 보호하고 분쟁을 피하고자 스리랑카로 보냈다는 해석이다. 마힌다 일행은 오늘날의 산치로 추정되는 베다사기리 사원에서 출발했다.[17]

마하밤사와 디파밤사에 따르면, 마힌다 일행은 제타 달 보름날[15] 미힌탈레 언덕에 도착했다. 당시 스리랑카의 데바남피야 띠사 왕은 그곳에서 사냥 중이었다.[15] 아소카와 데바남피야 띠사는 이전부터 교류하며 즉위 시 선물을 교환하는 사이였다.[15] 왕은 삭발한 승려들의 모습에 놀라 그들이 누구인지 물었고, 인사를 나눈 후 마힌다는 출라핫티파도파마 수트라를 설법하여 왕과 사냥 일행을 불교로 귀의시켰다.[15]

이후 일행은 수도 아누라다푸라로 초청되어 왕실의 환대 속에 법회를 열었다.[15] 마힌다는 왕의 허락을 받아 왕궁과 왕립 공원(마하메가)에서 두 차례 공개 법회를 열어 스리랑카 불교 대중화의 기틀을 마련했다.[15] 왕립 공원인 마하메가는 마힌다 일행의 거처가 되었고, 이후 스리랑카 불교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인 마하비하라 승원으로 발전했다.[15] 미힌탈레에는 체티야기리비하라 승원이 세워졌다.[15]

스리랑카 여성들이 출가를 원하자, 마힌다는 마가다에 있던 누이이자 비구니인 상가미타를 초청하여 여성 교단(비구니 상가)을 설립했다.[15] 또한, 부다가야보리수 원목에서 얻은 묘목을 스리랑카로 가져오도록 하여 마하비하라 경내에 심었는데, 이 나무는 오늘날까지 전해진다.[4][15] 마힌다는 불교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데바남피야 띠사의 조카이자 비구인 아리타에게 비나야(승가 규율)를 설명하게 하여 교단의 기틀을 다졌다.[15]

수도에서 한 달간 설법한 후, 마힌다는 우기 안거(바사)를 위해 미힌탈레로 물러났고, 그곳에 왕실의 지원으로 두 번째 승원이 건립되었다.[15] 이후 마힌다는 (스투파) 건립을 추진하여 고타마 붓다의 사리 일부를 마우리아 제국에서 스리랑카로 봉안했다.[15]

마힌다는 데바남피야 띠사 왕보다 오래 살았으며, 80세의 나이로 스리랑카에서 사망했다.[15] 데바남피야 띠사의 뒤를 이은 우티야 왕은 마힌다를 위해 국장을 치르고, 그의 사리를 모신 을 미힌탈레에 세웠다.[15]

3. 3. 스리랑카에서의 불교 전파

스리랑카의 주요 종교 연대기인 디파밤사마하밤사아소카 대왕의 아들 마힌다가 스리랑카로 건너가 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비롯한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파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15][2] 이러한 문헌 기록과 더불어 라자갈라 사원 비문 등 고고학적 증거들은 기원전 3세기경 마힌다의 활동으로 스리랑카에 불교가 널리 퍼졌음을 보여준다.[15][16][3]

문헌들은 마힌다의 스리랑카행을 영적인 동기로 설명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소카 대왕이 왕위 계승 갈등을 피하고 아들을 보호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17] 마힌다 일행은 오늘날 산치로 추정되는 베다사기리 사원에서 출발하여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스리랑카에 도착한 마힌다는 미힌탈레에서 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만나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고, 이는 왕과 백성들이 불교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마힌다는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마하비하라와 체티야기리비하라 등 주요 승원을 건립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누이인 상가미타 비구니를 초청하여 여성 교단을 세우고, 붓다가야의 보리수를 스리랑카에 전했으며[8], 불사리를 봉안할 을 건립하고 비나야(승려 규율)를 전수하는 등 스리랑카 불교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마힌다는 데바남피야 티사 왕보다 오래 살았으며, 80세의 나이로 스리랑카에서 입적했다. 그의 사후 우티야 왕은 국장을 치르고 미힌탈레에 그의 유골을 안치한 을 세워 업적을 기렸다. 마힌다의 활동은 스리랑카가 상좌부 불교의 중요한 중심지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3. 3. 1. 데바남피야 티사 왕과의 만남

스리랑카의 주요 역사 기록인 디파밤사마하밤사는 마힌다가 스리랑카로 건너가 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불교로 이끈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2] 이러한 문헌 기록과 함께, 라자갈라 사원에서 발견된 비문 등 고고학적 증거들은 마힌다가 활동했던 기원전 3세기경 스리랑카에 불교가 널리 퍼졌음을 입증한다.[2][3] 특히 라자갈라 비문에는 기원전 200년경의 초기 브라흐미 문자와 엘루어로 "이것은 이 섬에 가장 큰 행운으로 온 장로 이티야와 장로 마힌다의 이다."라고 새겨져 있어[3],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파하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마하밤사아소카 대왕의 아들인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왔으며, 그의 누이인 상가미타비구니가 되어 보리수를 가져왔다고 전한다.[4]

문헌들은 마힌다의 스리랑카행을 영적인 사명감 때문으로 묘사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아소카 대왕의 정치적 고려가 더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아소카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다른 아들 수시마처럼 마힌다가 희생될 것을 우려하여, 그를 보호하고 왕위 다툼을 피하고자 스리랑카로 보냈다는 것이다. 마힌다 일행은 오늘날 산치로 추정되는 베다사기리 사원에서 출발했다.

마하밤사디파밤사에 따르면, 마힌다 일행은 제타 달 보름날, 축제가 열리던 날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당시 데바남피야 티사 왕은 미힌탈레 언덕에서 사냥 중이었다.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아소카와 데바남피야 티사는 서로 왕위에 오를 때 선물을 교환할 정도로 좋은 관계였으나, 왕은 삭발한 승려들의 낯선 모습에 놀라 그들이 누구인지 물었다. 인사를 나눈 마힌다는 출라핫티파도파마 수트라(Cūḷahatthipadopama Sutta, 작은 코끼리 발자국 비유 경)를 설법했고, 왕과 사냥 일행은 그 자리에서 불교에 귀의했다.

이후 마힌다 일행은 수도 아누라다푸라로 초청되어 왕궁에서 환대받으며 달마를 설했다. 데바남피야 티사 왕의 허락을 얻은 마힌다는 왕궁 홀과 왕립 공원인 난다나 정원에서 두 차례 공개 강연을 열어 스리랑카 사회에 불교를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왕립 공원인 마하메가 정원은 마힌다 일행의 거처로 제공되었고, 이곳은 훗날 스리랑카 초기 불교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가 된 마하비하라 승원으로 발전했다. 미힌탈레에도 체티야기리비하라 승원이 세워졌다.

스리랑카 여성들이 출가 의사를 밝히자, 마힌다는 마가다에 있던 누이이자 비구니인 상가미타를 스리랑카로 초청하여 여성들을 위한 교단을 세웠다. 또한, 부다가야에 있는 보리수 원목에서 얻은 묘목을 스리랑카로 가져오도록 주선하여 마하비하라 경내에 심게 했는데, 이 나무는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8]

마힌다는 수도에 머물며 한 달간 설법한 뒤, 우기 안거를 보내기 위해 미힌탈레로 물러났다. 왕실의 지원으로 미힌탈레에는 두 번째 승원이 건립되었다. 이후 마힌다는 건립을 추진하여 고타마 붓다의 사리 일부를 마우리아 제국에서 스리랑카로 가져와 봉안했다. 또한 불교의 발전을 위해 데바남피야 티사 왕의 조카이자 비구인 아리타에게 비나야(승려 규율)를 가르치도록 했다.

마힌다는 데바남피야 티사 왕보다 오래 살았으며, 80세의 나이로 스리랑카에서 입적했다. 데바남피야 티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티야 왕은 마힌다를 위해 국장을 치르고, 그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한 을 미힌탈레에 세웠다.

3. 3. 2. 아누라다푸라에서의 활동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종교 연대기인 디파밤사마하밤사에는 마힌다가 스리랑카로 건너가 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불교로 개종시킨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2] 이 기록들은 그의 생애와 활동을 알 수 있는 주요 자료이다. 여러 비문과 문헌 자료 역시 마힌다가 활동했던 기원전 3세기경 스리랑카에 불교가 널리 퍼졌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2] 특히 라자가라 사원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기원전 200년경 초기 브라흐미 문자와 엘루어로 "이것은 이 섬에 가장 큰 행운으로 온 장로 이티야와 장로 마힌다의 이다"라고 새겨져 있어, 마힌다가 불교 전파를 위해 스리랑카에 와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머물렀음을 확인시켜 준다.[3]

마하밤사아소카 대왕의 아들인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왔으며, 아소카의 딸인 상가미타비구니가 되어 보리수를 가져왔다고 전한다.[4] 문헌들은 마힌다가 스리랑카로 떠난 이유를 영적인 동기에서 찾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정치적인 이유가 더 컸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소카 대왕이 왕위 계승 과정에서 아들 마힌다가 정적인 수시마처럼 살해될 것을 우려하여 그를 보호하고 내부 갈등을 피하기 위해 스리랑카로 보냈다는 것이다.[17] 마힌다 일행은 오늘날 산치로 추정되는 베다사기리 사원에서 출발했다.

스리랑카의 연대기들은 마힌다 일행이 제타 달의 보름날, 즉 축제가 열리는 날 스리랑카에 도착했다고 기록한다. 당시 데바남피야 티사 왕은 미힌탈레 언덕에서 사냥 중이었다. 아소카와 데바남피야 티사는 이전부터 교류하며 왕위에 오른 후 서로 선물을 주고받을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머리를 깎은 승려들을 만난 데바남피야 티사 왕은 그 모습에 놀라 누구인지를 물었다. 인사를 나눈 마힌다는 왕과 사냥 일행에게 출라핫티파도파마 수트라를 설법했고, 그들은 불교로 개종했다.

이후 마힌다 일행은 수도 아누라다푸라로 초청되어 왕궁에서 환영 연회를 받고 추가적인 달마 설법을 펼쳤다. 마힌다는 데바남피야 티사 왕의 허락을 받아 왕궁 홀과 왕립 공원인 난다나 정원에서 두 차례 공개 강연을 열었고, 이를 계기로 스리랑카에서 불교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왕립 공원인 마하메가 정원은 마힌다 일행의 거처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은 후에 스리랑카 초기 불교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인 마하비하라 승원이 되었다. 또한 미힌탈레에는 체티야기리비하라 승원이 세워졌다.

마힌다는 스리랑카 현지 여성들이 승가에 귀의하기를 원하자, 마가다에 있던 자신의 누이이자 비구니인 상가미타를 스리랑카로 초청하여 여성들을 위한 교단을 설립했다. 또한 마힌다는 붓다가야에 있는 보리수 원목의 묘목을 스리랑카로 가져오도록 주선했으며, 이 묘목은 마하비하라 부지에 심겨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8]

수도 아누라다푸라의 주민들에게 한 달간 설법을 전한 후, 마힌다는 우기 동안 바사(안거)를 보내기 위해 미힌탈레로 물러났다. 그곳에는 왕실의 지원을 받는 두 번째 승원이 세워졌다. 이후 마힌다는 스투파 건립을 추진하여 고타마 붓다의 불사리 일부를 마우리아 제국에서 스리랑카로 옮겨와 봉안했다. 그는 스리랑카 불교의 발전을 위해 데바남피야 티사 왕의 조카이자 비쿠(승려)인 아리타에게 비나야(승려 규율)를 설명하도록 지도했다.

마힌다는 데바남피야 티사 왕보다 오래 살았으며, 80세의 나이로 스리랑카에서 사망했다. 데바남피야 티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생 우티야 왕은 마힌다를 위해 국장을 치르고, 그의 유물을 봉안하기 위한 스투파를 미힌탈레에 건립했다.

3. 3. 3. 상가미타의 초청과 보리수 전래

마힌다가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전파하면서 현지 여성들 사이에서도 불교의 상가에 귀의하여 비구니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에 마힌다는 마가다에 있던 자신의 누이이자 비구니인 상가미타를 스리랑카로 초청하여 여성들을 위한 교단을 조직하도록 하였다.

상가미타는 스리랑카로 오면서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 붓다가야의 보리수 원목에서 가져온 묘목(또는 가지)을 함께 들여왔다.[8] 이 신성한 보리수 묘목은 아누라다푸라의 마하비하라 사원 경내에 심어졌고, 스리랑카 불교의 중요한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 보리수는 오늘날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전해진다.[4]

3. 3. 4. 미힌탈레 승원 건립

스리랑카의 주요 연대기인 마하밤사디파밤사에 따르면, 마힌다는 제타 달의 보름날, 축제가 열리던 날 스리랑카에 도착했다.[2] 당시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데바남피야 띠사 왕은 미힌탈레 언덕에서 사냥 중이었는데, 그곳에서 마힌다 일행과 마주쳤다. 데바남피야 띠사 왕은 이전에 아소카 대왕과 선물을 교환할 정도로 관계가 있었지만, 머리를 깎은 승려의 모습을 한 마힌다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고 놀랐다고 한다.[4] 인사를 나눈 후 마힌다는 Cūḷahatthipadōpama Sutta|출라핫티파도파마 수트라pi를 설법했고, 왕과 사냥에 동행했던 이들은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2]

이후 마힌다 일행은 수도 아누라다푸라로 초청받아 왕궁과 왕립 공원인 마하메가 정원에서 을 설했다. 이 설법은 스리랑카에서 불교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되었다. 마힌다 일행은 왕립 공원 마하메가에 머물렀는데, 이곳은 나중에 스리랑카 초기 불교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인 마하비하라 승원으로 발전했다.[2][4]

수도에서 한 달간 설법을 마친 마힌다는 우기 동안 안거(vassa|바사pi)를 보내기 위해 미힌탈레로 돌아갔다.[3] 데바남피야 띠사 왕은 마힌다를 위해 미힌탈레에 왕실의 지원을 받는 두 번째 승원인 Cetiyagirivihāra|체티야기리비하라pi를 건립하도록 했다.[2] 또한 마힌다는 미힌탈레에 (스투파)을 세우도록 하였고, 고타마 붓다의 사리 일부를 마우리아 제국에서 가져와 봉안했다.[3]

마힌다는 데바남피야 띠사 왕보다 오래 살았으며, 80세의 나이로 스리랑카에서 사망했다. 데바남피야 띠사의 뒤를 이은 우티야 왕은 마힌다를 위해 국장을 치르고, 그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한 을 미힌탈레에 세웠다.[3]

3. 3. 5. 비나야 전수

고타마 붓다의 신체 사리 일부를 마우리아 제국에서 스리랑카로 옮기고 건설을 조직한 후, 마힌다는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데바남피야 띠사 왕의 조카이자 비구(승려)인 아리타에게 비나야(승려 규율)를 설명하도록 했다.

3. 4. 죽음과 장례



마힌다는 데바남피야 띠사 왕보다 오래 살았으며, 80세의 나이로 스리랑카에서 사망했다. 라자가라 사원의 비문은 마힌다가 불교 전파를 위해 스리랑카에 와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음을 확인시켜 준다.[3] 데바남피야 띠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티야 왕은 마힌다를 위해 국장을 치렀고, 그의 유물을 안치하기 위해 미힌탈레에 을 세웠다.

4. 역사적 논란

마힌다의 스리랑카 방문과 불교 전파에 대한 전통적인 기록은 주로 스리랑카의 고대 연대기인 디파밤사마하밤사에 의존한다.[9] 이 기록들에 따르면 마힌다는 아누라다푸라 왕국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불교에 귀의시켰다고 전해진다. 또한 라자가라 등지에서 발견된 비문 역시 기원전 3세기경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파되었음을 시사하며, 일부 비문은 마힌다의 활동과 연관 짓기도 한다.[9][10]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설명에는 여러 역사적 논란이 제기된다. 마하밤사에 기록된 아소카 왕의 아들 마힌다와 딸 상가미타의 스리랑카 파견 이야기는 정작 아소카 왕 비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이를 뒷받침할 고고학적, 미술사적 증거도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11]

또한 마힌다가 스리랑카 왕을 개종시켰다는 전승의 역사적 신빙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독일의 인도학자 헤르만 올덴베르크나 영국의 빈센트 아서 스미스와 같은 학자들은 아소카 왕 비문에 마힌다 파견이나 스리랑카 왕 개종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이 전승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12] 더불어, 불교 승려가 스리랑카에 파견된 시기에 대해서도 마하밤사와 아소카 왕 비문의 기록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여 연대상의 문제도 지적된다.

4. 1. 아소카 왕 비문과의 불일치

마하밤사에는 아소카의 아들 마힌다가 스리랑카를 방문했고, 그의 여동생 상가미타비구니로서 보리수의 일부를 스리랑카로 가져왔다는 기록[11]이 있다.

하지만 아소카 왕은 자신의 비문에서 이러한 내용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고대 스리랑카의 미술에서도 마힌다나 상가미타의 활동을 묘사한 조각이나 프레스코화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마힌다가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국왕 데바남피야 티사를 불교로 귀의시켰다는 전설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 독일의 인도학자 헤르만 올덴베르크는 이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아소카 왕과 고대 인도를 연구한 Vincent Arthur Smith|빈센트 아서 스미스영어도 같은 견해를 보였다.[12] 이들 학자는 아소카 왕 비문에 아소카가 아들 마힌다를 출가시키고 스리랑카 국왕을 불교로 개종시키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또한, 아소카 왕이 불교 승려를 스리랑카에 파견한 연도에도 차이가 있다. 마하밤사는 불승이 기원전 255년에 도착했다고 기록했지만, 아소카 왕 비문에는 이보다 5년 빠른 기원전 26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4. 2. 연대 문제



스리랑카의 고대 연대기인 디파밤사마하밤사는 마힌다가 스리랑카를 방문하여 당시 국왕이었던 데바남피야 티사를 불교에 귀의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문헌들은 마힌다의 생애와 활동을 파악하는 주요 자료로 활용된다.[9] 또한, 여러 비문과 문헌 기록들은 마힌다가 활동했던 기원전 3세기경 스리랑카에 불교가 널리 퍼졌음을 보여준다.[9] 특히 라자가라 사원에 남아 있는 비문은 마힌다 테라(장로)가 불교 전파를 위해 스리랑카에 와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10]

> ''시기'': 기원전 200년경, ''문자'': 초기 브라흐미 문자, ''언어'': 엘루어


> ''필사본'': ''Ye ima dipa paṭamaya idiya agatana Iḍika-[tera-Ma] hida-teraha tube''


> ''번역'': "이것은 이 섬에 가장 큰 행운으로 온 장로 이티야와 장로 마힌다의 이다."[3]

마하밤사에는 아소카의 아들 마힌다가 스리랑카를 방문했고, 그의 여동생 상가미타비구니가 되어 보리수 일부를 스리랑카로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11] 하지만 아소카 왕 자신은 이러한 사실들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으며, 고대 스리랑카 미술에서도 관련된 조각이나 프레스코화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마힌다가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왕을 귀의시켰다는 전설 자체에 대해서도 논란이 존재한다. 독일의 인도학자 헤르만 올덴베르크는 이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아소카와 고대 인도를 연구한 빈센트 아서 스미스 역시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12] 이들은 아소카 왕 비문에 아소카가 아들 마힌다를 출가시키거나 스리랑카 왕을 불교로 귀의시키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주요 근거로 제시했다.

또한, 아소카가 불교 승려를 스리랑카에 파견한 연도에 대해서도 기록 간에 차이가 있다. 마하밤사는 승려들이 기원전 255년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아소카 비문에는 이보다 5년 빠른 기원전 260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연대상의 불일치를 보인다.

5. 의의와 유산

마힌다는 스리랑카 역사와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20세기 스리랑카의 승려 왈폴라 라훌라는 마힌다가 삼장경을 싱할라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싱할라어를 문학 언어로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싱할라 문학의 아버지"라고 칭했다.[5][13][18] 또한 그는 건축을 포함한 마우리아 제국의 문화를 스리랑카에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5][13][18] 최근 캐나다 학자 수완다 H. J. 수구나시리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의례(기원전 247년)의 편집자로 보기도 한다.[5]

마힌다가 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처음 만났다고 전해지며 그의 (스투파)이 세워진 미힌탈레는 스리랑카의 중요한 불교 순례지가 되었다.[5][13][18] 특히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도착했다고 여겨지는 6월(포손) 보름날에는 많은 순례자가 이곳을 찾는데, 이날은 상좌부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우포사타 의례를 행하는 날이기도 하다.[5][18]

5. 1. 싱할라 문학의 아버지

20세기 스리랑카의 승려 왈폴라 라훌라는 마힌다를 '싱할라 문학의 아버지'라고 묘사했다. 마힌다가 삼장경에 대한 주석을 싱할라어로 번역하고 집필하여 싱할라어를 문학적 언어로 만드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건축물을 포함하여 마우리아 제국의 문화를 스리랑카 섬에 도입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최근 캐나다 학자인 수완다 H. J. 수구나시리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의례(기원전 247년)의 편집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마힌다가 데바남피야티사 왕을 처음 만났다고 전해지는 산이자 그의 장례 이 있는 미힌탈레는 스리랑카의 중요한 순례지이다.[5][13][18] 순례는 전통적으로 6월(포손)에 이루어지는데, 이는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도착했다고 여겨지는 달의 보름날 밤과 관련이 깊다. 이 시기는 상좌부 불교에서 우포사타와 같은 종교적 의례를 행하는 전통적인 시간이기도 하다.[5][18]

5. 2. 문화 전파

20세기 스리랑카의 승려 왈폴라 라훌라는 마힌다가 삼장경에 대한 주석을 싱할라어로 번역하고 집필하여 싱할라어를 문학적 언어로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해 그를 "싱할라 문학의 아버지"로 평가했다. 또한 마힌다는 건축물을 포함한 마우리아 제국의 문화를 스리랑카 섬에 소개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최근 캐나다 학자 수완다 H. J. 수구나시리는 마힌다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의례(기원전 247년)의 편집자로 보기도 한다.

마힌다가 데바남피야티사 왕을 처음 만났다고 전해지는 산이자 그의 장례 (스투파)이 있는 미힌탈레는 스리랑카의 중요한 불교 순례지이다.[18][5][13] 순례는 전통적으로 6월(포손 옛 싱할라 달력)에 이루어지는데, 이는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도착했다고 여겨지는 달의 보름달 밤이며, 상좌부 불교에서는 우포사타와 같은 종교적 의례를 행하는 전통적인 시간이기도 하다.[18][5]

5. 3. 순례지 미힌탈레

미힌탈레는 마힌다가 데바남피야 티사 왕을 처음 만났다고 전해지는 산이자 그의 스투파()가 있는 곳으로, 스리랑카의 중요한 불교 순례지이다.[5][13][18] 순례는 전통적으로 6월(옛 싱할라 달력인 포손)에 이루어진다. 이는 마힌다가 이 달의 보름날 밤에 스리랑카에 도착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며, 이 시기는 상좌부 불교에서 우포사타와 같은 종교적 의례를 행하는 전통적인 시간이기도 하다.[5][18]

5. 4. 불교 의례 편집

20세기 스리랑카 승려인 왈폴라 라훌라는 마힌다를 '싱할라 문학의 아버지'라고 묘사했는데, 그가 삼장경을 싱할라어로 번역하고 해설을 덧붙여 문학 언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건축물을 포함하여 마우리아 제국의 문화를 스리랑카 섬에 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캐나다 학자인 수완다 H. J. 수구나시리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의례(기원전 247년)의 편집자로 지목했다.

마힌다가 데바남피야티사 왕을 처음 만났다고 전해지는 산이자 그의 (스투파)이 있는 미힌탈레는 스리랑카의 중요한 순례지이다.[18][5] 순례는 전통적으로 6월(포손)에 이루어지는데, 이때 마힌다가 그 달의 보름달 밤에 스리랑카에 도착한 것으로 여겨지며, 전통적인 시간으로 상좌부 불교의 종교적 의례가 행해진다.[18][5]

참조

[1] 뉴스 Ashoka's son took Buddhism outside India http://timesofindia.[...] Nirmukta 2015-03-16
[2] 간행물 Encyclopedia of Buddhism Macmillan Reference USA
[3] 서적 An inscription of circa 200 B.C. at Rajagala commemorating saint Mahinda University of Ceylon review by Ceylon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Asoka's Missions http://www.ancient-b[...]
[5] 간행물 Macmillan Encyclopedia of Buddhism Macmillan Reference USA
[6] 웹사이트 Ashoka's son took Buddhism outside India http://timesofindia.[...] Nirmukta 2015-03-16
[7] 웹사이트 聖地アヌラーダプラ(2011年10月20日放送分)|世界遺産アカデミー https://wha.or.jp/?r[...] 2011-11-20
[8] 웹사이트 仏教へのいざない 第10回 スリランカ仏教史1 http://todaibussei.o[...] 2019-09-14
[9] 간행물 Encyclopedia of Buddhism Macmillan Reference USA
[10] 서적 An inscription of circa 200 B.C. at Rajagala commemorating saint Mahinda University of Ceylon review by Ceylon University Press
[11] 웹사이트 Asoka and the Missions http://www.ancient-b[...] 2019-09-14
[12] 서적 History of India, Vol 2 https://archive.org/[...] The Grollier Society
[13] 간행물 Macmillan Encyclopedia of Buddhism Macmillan Reference USA
[14] 뉴스 Ashoka's son took Buddhism outside India http://timesofindia.[...] Nirmukta 2015-03-16
[15] 인용 Macmillan Reference USA
[16] 서적 An inscription of circa 200 B.C. at Rajagala commemorating saint Mahinda University of Ceylon review by Ceylon University Press
[17] 웹인용 Asoka's Missions http://www.ancient-b[...]
[18] 인용 Macmillan Reference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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