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노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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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티고노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장군들이 세운 헬레니즘 왕국 중 하나로, 기원전 306년 안티고노스 1세가 왕위를 칭하며 시작되었다. 안티고노스 왕조는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장악하며 전성기를 맞았으나, 입소스 전투에서 패배하며 분열되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 1세, 안티고노스 2세 등을 거치며 마케도니아의 왕조로 부활했지만, 로마의 팽창에 직면하여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패배, 기원전 168년 멸망했다. 이 왕조는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함께 헬레니즘 시대의 주요 왕국으로 꼽히며, 페르세우스를 마지막 왕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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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노스 왕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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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안티고노스 왕조 |
기타 명칭 | 안티고노스 제국 |
로마자 표기 | Antigonidai |
통치 | |
정치 체제 | 헬레니즘 군주제 |
수도 | 안티고니아 (안티고노스 1세) 데메트리아스 (데메트리오스 1세) 펠라 (안티고노스 2세 이후) |
공용어 | 그리스어 |
종교 | 고대 그리스 종교 / 헬레니즘 종교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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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성립 | 기원전 306년 |
멸망 | 로마에 의한 패배 (기원전 168년) |
주요 사건 | 건국 (기원전 276년) 멸망 (기원전 168년) |
이전 국가 | 마케도니아 제국 |
이후 국가 | 로마령 마케도니아 |
인물 | |
주요 인물 |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페르세우스 |
칭호 | 바실레우스 |
통계 | |
기원전 301년 면적 | 사회과학사 저널에 따르면 확인 필요 |
상징 | |
상징물 | 제우스의 독수리와 (페르세우스 왕) 비문이 있는 테트라드라크마 |
기타 | |
관련 링크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안티고노스 왕조 |
2. 역사
헬레니즘 시대 초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후계자들(디아도코이) 간의 치열한 권력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무스와 그의 아들 데메트리우스 1세가 이끄는 안티고노스 세력은 안티파테르의 아들 카산더가 이끄는 안티파트리드 왕조와 마케도니아 및 그리스의 패권을 두고 경쟁했다. 카산더는 아르게아드 왕조의 마지막 후계자들을 제거하고 마케도니아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으나,[5] 안티고노스 세력 또한 기원전 306년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승리 이후 안티고노스 1세가 왕(바실레우스)을 칭하며 독자적인 왕조를 선포했다.[4]
그러나 안티고노스 1세의 강력한 세력 확장은 다른 디아도코이들의 연합을 초래했고, 결국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1세는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전사했다.[6] 이 전투로 안티고노스 왕조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데메트리우스 1세는 살아남아 재기를 도모했다. 그는 기원전 294년 마케도니아의 내분을 틈타 왕위에 올랐으나, 에피로스의 피로스와 리시마코스 등 경쟁자들의 공격으로 기원전 288년 다시 왕위를 잃고 결국 포로로 생을 마감했다.[7][8]
마케도니아가 다시 혼란에 빠진 사이, 데메트리우스 1세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끈질기게 세력을 유지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는 오랜 혼란과 경쟁자들의 몰락 속에서 점차 힘을 키워 기원전 276년경 마침내 마케도니아 왕국의 통치권을 확립하고,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며 안티고노스 왕조를 성공적으로 부활시켰다.[9] 이후 안티고노스 왕조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지역의 주요 강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2. 1. 초창기 및 왕국 성립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생전에는 마케도니아 본토의 군주가 아니라 소아시아 중서부의 프리게아 지역을 다스리는 태수였다.[5]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광대한 제국을 계승하려는 부하 장군들(디아도코이) 사이에 디아도코이 전쟁(후계자 전쟁)이 발발했다.초기에는 섭정 페르디카스에 의해 태수 지위를 유지했으나, 페르디카스가 올림피아스의 제안으로 필리포스 2세의 딸 클레오파트라와 약혼하면서 안티파트로스와의 기존 혼인 약속이 깨지자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안티고노스는 안티파트로스, 크라테로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손을 잡고 제1차 디아도코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 안티고노스는 제국 총사령관의 지위를 얻어 소아시아 전역과 북역사적 시리아에서 이란 고원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자신에게 적대적이던 카파도키아 태수 에우메네스와 그의 동맹 세력을 파라에타케네 전투와 가비에네 전투에서 연이어 격파하며 디아도코이 중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헬레니즘 시대 초기는 안티파트리드 왕조와 안티고노스 왕조 사이의 치열한 경쟁으로 특징지어진다. 안티파트리드 왕조는 안티파테르의 아들 카산더(기원전 305년 ~ 297년 재위)가 이끌었고, 안티고노스 왕조는 안티고노스 1세(기원전 306년 ~ 301년 재위)와 그의 아들 데메트리우스 1세(기원전 294년 ~ 288년 재위)가 이끌었다. 카산더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3세와 에우리디케 2세가 살해된 혼란을 틈타 올림피아스에게서 마케도니아의 통제권을 빼앗고 자신의 권력을 확립해 나갔다. 그는 기원전 316년 필리포스 3세 부부를 아이가이에 매장하고, 필리포스 2세의 딸 테살로니카와 결혼하여 아르게아드 왕조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었다.[5] 하지만 기원전 310/309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린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와 그의 어머니 록사네를 비밀리에 암살하도록 지시하여, 마케도니아 아르게아드 왕조의 혈통을 끊어버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티고노스 세력은 더욱 확장되었다. 기원전 307년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우스 1세는 아테네에서 카산더가 임명한 총독 팔레룸의 데메트리우스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어 기원전 306년에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함대를 격파하고 키프로스 섬을 정복했다. 이 결정적인 승리 이후, 안티고노스 1세는 자신의 군대로부터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정식 계승자를 의미하는 '바실레우스'(왕) 칭호를 받았고, 에게 해, 동부 지중해, 그리고 중동 대부분 지역을 아우르는 안티고노스 왕조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4] 이는 명목상으로만 남아있던 마케도니아 왕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의미했으며, 그의 왕위 등극을 기점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세, 셀레우코스 1세, 리시마코스 등 다른 주요 디아도코이들도 각자 왕을 칭하며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게 되었다.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우스는 필리포스 2세의 헬레니즘 동맹을 부활시켜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이는 다른 디아도코이들의 강력한 견제를 받게 된다.[6]
2. 2. 안티고노스 1세의 패망
안티고노스 왕조의 쇠퇴는 기원전 311년 시작된 바빌로니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에게 패배하면서 비롯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 셀레우코스는 세력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국가를 강국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한편, 안티고노스 1세는 기원전 306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격파하고 키프로스 섬을 정복하는 등 세력을 확장한 뒤, 마침내 스스로 왕(바실레우스)을 칭하며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재통일을 목표로 삼았다.[4]그러나 안티고노스 1세의 광대한 영토와 강력한 힘은 다른 디아도코이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셀레우코스, 카산드로스,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는 연합하여 안티고노스에 대항했다. 이 과정에서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가 그리스 본토에서 카산드로스의 영토 일부를 빼앗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5] 이어진 로도스 공성전의 실패는 안티고노스 왕조의 국고를 고갈시키는 등 큰 타격을 주었다.
결정적으로 기원전 301년, 안티고노스 1세는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가 이끄는 연합군과의 이프소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6] 이 전투의 패배로 안티고노스 1세가 건설했던 광대한 왕국은 붕괴되었고, 그의 영토는 승리한 디아도코이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2. 3. 마케도니아 본토와 왕조의 부활
입소스 전투(기원전 301년)에서 아버지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무스가 전사하고 세력을 크게 잃었으나, 데메트리오스 1세는 재기를 노렸다. 그는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에게 자신의 딸 스트라토니케를 시집보내며 정략 결혼을 통해 강화 조약을 맺었다.[4] 이후 데메트리오스는 폭군 라카레스의 지배 아래 있던 아테네를 점령하였다.기원전 294년,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에서 카산드로스의 아들들인 알렉산드로스 5세와 안티파테르 1세 사이에 벌어진 권력 투쟁을 기회로 삼았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5세를 제거하고 마케도니아 본토의 왕위에 올랐다.[7] 그러나 그의 통치는 순탄치 않았으며, 특히 에페이로스의 피로스로부터 지속적인 견제를 받았다. 데메트리오스의 큰 야심은 대규모 전쟁 준비로 이어졌고, 이는 주변의 경쟁자들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연합하여 데메트리오스를 공격했고, 그는 기원전 288년에 마케도니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7][8] 이후 데메트리오스는 소아시아에서 리시마코스와 전투를 벌였고, 한때 셀레우코스 1세의 지지를 받는 듯했으나 시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오히려 셀레우코스 1세와 대립하게 되었다. 계속된 전쟁과 기근, 질병으로 지친 병사들은 결국 데메트리오스를 버렸고, 그는 셀레우코스 1세에게 사로잡혀 포로 생활 끝에 사망했다.[7]
하지만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아버지의 몰락 속에서도 그리스 본토에 남아 세력을 유지했다. 데메트리오스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경쟁자들의 연합은 자연스럽게 약화되었고, 안티고노스 2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점차 힘을 키울 수 있었다. 그는 결국 기원전 276년경 옛 마케도니아 왕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대한 안티고노스 왕조의 통제권을 다시 확립하며 왕조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다.[9]
2. 4. 안티고노스 2세와 안티고노스 왕조의 강세
데메트리오스 사후 마케도니아는 리시마코스와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가 서로 차지하려 다투는 땅이 되었다.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리시마코스가 사망하고, 기원전 279년에는 켈트족이 침공하면서 마케도니아는 큰 혼란에 빠졌다. 켈트족의 헬라 본토 침공은 아이톨리아 연합과 페르가몬의 원조, 그리고 안티고노스 2세의 활약으로 격퇴되었으며, 켈트족 대부분은 아나톨리아로 이주하여 갈라티아 지역을 형성하게 되었다.안티고노스 2세의 승리는 마케도니아의 헬라인들에게 호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기원전 276년에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 초반에는 어려움을 겪었는데, 피로스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난 피로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수도 펠라를 빼앗기기도 했다. 하지만 피로스는 안티고노스가 장악한 해안 도시들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또한 피로스가 아이가이의 왕족 무덤을 지키게 한 켈트족 용병들이 무덤을 훼손하자, 이는 마케도니아 헬라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피로스와 안티고노스는 남부 헬라 본토에서 대립했으며, 결국 아르고스에서 피로스가 패배하면서 경쟁은 마무리되었다.
이 승리로 안티고노스 2세는 헬라 도시들의 지지를 얻어 아티카 지역과 펠로폰네소스의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아테네나 스파르타 같은 도시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자치를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크레모니데스가 등장하여 로도스, 스파르타, 아테네가 동맹을 맺고 안티고노스에 맞섰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 동맹은 결국 안티고노스에게 패배했고, 안티고노스는 헬라 본토의 강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이후 이 지위는 아카이아 연합과 나누게 되었는데, 안티고노스는 아티카 지역을 유지하며 아카이아 연합과 대립했다. 스파르타의 부흥으로 위협을 느낀 아카이아 연합은 결국 안티고노스의 손자인 안티고노스 3세에게 복속되었다.
마케도니아의 주권을 회복한 안티고노스 왕조의 왕들은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피로스와의 전쟁, 크레모니데스 전쟁, 클레오메네스 전쟁, 나비스 전쟁 등 여러 차례 전쟁을 치러야 했다.
2. 5. 멸망
안티고노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계승자들(디아도코이)이 세운 네 개의 주요 왕조 중 하나였으며, 셀레우코스 제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함께 헬레니즘 시대의 주요 3대 강국 중 하나였다.[9] 그러나 왕국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로마 공화정의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지막 왕인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재위 기원전 179년 – 168년)는 로마의 팽창에 맞서 싸웠으나,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중 벌어진 피드나 전투(기원전 168년)에서 로마 군단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는 안티고노스 왕조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 되었으며, 마케도니아 왕국은 해체되어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인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이로써 안티고노스 왕조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3. 역대 군주
(서아시아 안티고노스 왕국)
"모노프탈모스"는 그리스어로 "외눈"을 뜻하며, 전쟁으로 얻은 상처를 가리킨다.
(마케도니아, 키클라데스)
프톨레마이스
데이데이메이아 1세
라나사
?에우리디케
?이름 없는 일리리아 여성
(마케도니아)
(키레네)
베레니케 2세
(마케도니아)
프티아
니카이아
크리세이스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5세
(마케도니아)

페르세우스
(마케도니아)
(16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