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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치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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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얀 치홀트는 독일의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로, 1902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1974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그는 바우하우스 전시회를 통해 모더니즘 디자인에 영향을 받아 신 타이포그래피를 주창하며, 산세리프체를 사용하고 비대칭적인 레이아웃을 추구했다. 그러나 나치 시대에 문화적 볼셰비키로 몰려 스위스로 망명한 후, 고전적 타이포그래피로 회귀하여 사본체를 디자인하는 등 변화를 겪었다. 그는 펭귄 북스의 디자인을 감독하고, 여러 저서를 통해 타이포그래피 발전에 기여했으며, 구텐베르크 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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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치홀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3년 에를링 만델만이 촬영한 얀 치홀트
1963년의 얀 치홀트
본명요하네스 치홀트
다른 이름이반 치홀트
출생1902년 4월 2일
출생지라이프치히,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사망1974년 8월 11일 (72세)
사망지로카르노, 스위스
직업서예가, 타이포그래퍼, 서적 디자이너

2. 생애

독일 라이프치히 출신의 얀 치홀트(1902-1974)는 20세기 타이포그래피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친 디자이너이다.[18][19] 간판 제작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레터링캘리그래피를 익혔으며, 라이프치히 미술·북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전통적인 서체 디자인을 공부했다.[19][18]

1923년 바이마르에서 열린 바우하우스 전시회는 그의 디자인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19] 그는 이 전시회를 통해 모더니즘 디자인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기존의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는 신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de) 운동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신 타이포그래피』(1928) 등의 저서를 통해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전파하며 당대 디자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19][20]

그러나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의 활동은 큰 위기를 맞았다. '문화적 볼셰비키'로 몰려 뮌헨에서의 교직을 박탈당하고 잠시 구금되기도 했던 그는 결국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망명해야 했다.[17] 스위스 망명 이후, 치홀트는 점차 신 타이포그래피의 엄격함에서 벗어나 고전적 타이포그래피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그는 펭귄 북스(Penguin Books) 등 여러 출판사에서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고전적인 서체를 활용한 우아하고 가독성 높은 디자인을 선보였다.[17][18] 또한, 1967년에는 모노타입과 리노타입 조판 시스템 모두에 사용 가능한 고전적 세리프 서체인 사본(Sabon)체를 개발하여 후기 디자인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었다.[18][7]

치홀트는 현대 타이포그래피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그래픽 아트 협회(AIGA) 금메달, 라이프치히 시 구텐베르크 상(1965) 등 다수의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다.[18][20] 그는 1974년 8월 11일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세상을 떠났다.[18][7]

2. 1. 유년기 및 교육

얀 치홀트는 1902년 4월 2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라이프치히는 당시 출판업과 인쇄업이 매우 발달한 도시였으며, 이는 타이포그래피 대가가 성장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18] 그의 아버지는 간판 제작자(sign painter, 현대의 레터링 아티스트)였고, 이러한 환경 덕분에 치홀트는 자연스럽게 레터링을 접하고 배울 수 있었다.[19]

1914년, 12세의 치홀트는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국제 그래픽 아트 전'(International Exhibition of the Graphic Arts)을 관람하고 서적 출판과 활자에 대한 열정을 키우게 되었다.[18] 14세에는 부모의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 근교의 교사 연수 학교에 진학했지만, 그곳에서도 꾸준히 레터링을 공부했다. 그는 오래된 활자 견본집(type specimens)에 실린 고전적 서체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활자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했다.[19]

이후 1919년, 치홀트는 라이프치히 미술·북 디자인 아카데미(Leipziger Akademie der graphischen Künste und des Buchgewerbes)에 입학하여 헤르만 델리치(Hermann Delitsch)의 수업을 들으며 이탤릭체고딕체의 전통을 혼합한 전통 손글씨(캘리그래피)를 주로 배웠다. 이곳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유명한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이자 아카데미 학장이었던 발터 티만(Walter Tiemann, 1876~1951)의 주목을 받았다. 티만은 치홀트를 수석 제자로 삼았고, 자신이 학장으로 있는 라이프치히 아카데미의 야간 강좌를 맡겨 동료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대략 1919년부터 1923년까지 그의 교육과 실무 경험은 주로 전통 캘리그래피에 중점을 두었다.[18]

2. 2. 신 타이포그래피 (모던 타이포그래피) 시기

치홀트는 1923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열린 첫 바우하우스 전시회를 방문한 후 큰 영향을 받아 모던 디자인 원칙으로 전향했다.[5] 그는 이 전시회에서 라슬로 모호이-너지, 엘 리시츠키, 쿠르트 슈비터스와 같은 급진적인 예술가들을 만나 기존 타이포그래피의 틀을 깨는 실험들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그는 표현의 새로운 방법을 찾으면서도 단순하고 실용적인 접근 방식을 모색했다.

이후 치홀트는 '신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de)[6] 운동의 가장 중요한 주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25년에는 ''타이포그래피션 미테일룽겐''(Typographischen Mitteilungende, 타이포그래피 통신) 특별호에 "엘레멘타레 타이포그래피"(elementare typographiede)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새로운 디자인 원칙을 요약하여 발표했다. 이는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시작이었다. 1927년에는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1928년에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신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de)를 출간하여 모던 디자인의 선구자로서 입지를 굳혔다.

얀 치홀트가 디자인한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1935) 표지. 신 타이포그래피 원칙이 반영된 디자인을 보여준다.


『신 타이포그래피』는 사실상 모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의 선언과 같은 책이었다. 이 책에서 치홀트는 기능성과 명료성을 강조하며, 산세리프체(Groteskde) 사용을 강력히 주장하고 다른 글꼴 사용을 비판했다. 또한, 전통적인 가운데 정렬 대신 비대칭적인 레이아웃을 선호하는 등 현대 타이포그래피의 여러 기본 원칙들을 제시했다. 이 책과 뒤이어 나온 실용적인 지침서들은 독일 전역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나치 정권에 의해 '문화 볼셰비스트'로 낙인찍혔다. 치홀트 역시 파울 레너와 함께 뮌헨에서 교직을 맡은 직후 이러한 비난을 받았다. 1933년 3월, 나치가 집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치홀트와 그의 아내는 체포되었다. 그의 집에서 발견된 소련 포스터는 그가 공산주의와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게 했다. 다행히 6주 후 한 경찰관의 도움으로 스위스행 표를 구해, 1933년 8월 가족과 함께 나치 독일을 탈출하여 스위스로 망명했다. 이는 그의 신 타이포그래피 활동이 독일에선 중단되는 계기가 되었다.

2. 3. 나치즘 시기와 망명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후, 모든 디자이너는 문화부에 등록해야 했으며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이들은 교직에서 위협받는 상황에 놓였다. 치홀트는 파울 레너의 요청으로 뮌헨에서 교직을 맡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모두 문화 볼셰비스트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5]

1933년 3월,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치홀트와 그의 아내는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그의 집에서 소련 포스터가 발견되었고, 이로 인해 공산주의자와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의 저서들은 게슈타포에 의해 "독일인 방어"라는 명목으로 모두 압수되었다.

치홀트는 6주간 구금되어 있었으나, 한 경찰관의 도움으로 스위스행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1933년 8월, 가족과 함께 나치 독일을 탈출하여 스위스로 망명했다.[7] 이후 그는 영국에서의 두 차례 체류 기간을 제외하고는 여생을 스위스에서 보냈다.

2. 4. 고전적 타이포그래피로의 회귀

1933년 나치 독일 정권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이주한 이후, 얀 치홀트는 신 타이포그래피의 엄격한 원칙에서 점차 벗어나 고전적 타이포그래피의 가치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1935년 출간된 그의 저서 ''Typographische Gestaltung|타이포그래피셰 게슈탈퉁de''에서도 나타나는데, 책 표지 디자인에 고전주의적 성격의 세리프 서체인 보도니를 사용하는 등[5] 초기 신 타이포그래피 시기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는 가독성과 시각적 조화, 그리고 대칭과 비대칭 사이의 균형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방향으로 그의 관점이 변화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고전주의로의 회귀는 그의 후기 활동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영국의 유명 출판사인 펭귄 북스의 아트 디렉터로 초빙되어 활동하며[7], 영국 타이포그래퍼 루아리 맥클린과 함께 약 500여 권이 넘는 단행본의 표지 디자인과 편집 디자인을 감독했다. 이 시기 펭귄 북스의 출판물들은 치홀트의 세련되고 정돈된 고전적 타이포그래피 원칙이 잘 반영된 사례로 평가받는다.

'''사본'''(Sabon) 서체 견본. 1967년 치홀트가 디자인했다.


치홀트의 후기 디자인 철학을 대표하는 결과물 중 하나는 1967년에 발표된 사본(Sabon) 서체이다. 이 서체는 자크 사봉(Jacques Sabon)의 이름을 딴 세리프 서체로, 모노타입과 리노타입이라는 서로 다른 조판 시스템에서도 동일한 인쇄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계되었다.[7] 사본 서체는 그의 초기 신 타이포그래피에서 강조했던 산세리프 중심의 원칙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가독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 서체는 발표 직후 미국의 디자이너 브래드버리 톰슨이 워시번 대학교 성경을 인쇄하는 데 사용하면서 주목받았다.

2. 5. 말년

현대 타이포그래피 발전에 대한 공헌으로 치홀트는 유럽과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다.[18] 미국인쇄산업협회가 수여하는 최고상인 ‘컨티넨탈 유로피언(Continental European) 상’을 최초로 수상하였고, ‘미국 그래픽 아트 협회’(AIGA)로부터 금메달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는 ’런던 더블 크라운 클럽‘의 명예회원이자 프랑스 타이포그래피 협회 명예회원이었고, 독일예술아카데미의 회원이기도 하였다.[20]

그리고 마침내, 치홀트는 1965년에 라이프치히 시로부터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영예인 ‘구텐베르크 상’을 수상하게 되었다.[18] 그는 모던 타이포그래피에 지대한 영향력을 남기고 1974년 8월 11일 스위스 로카르노의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18][7]

3. 디자인

서예를 배운 경험과 라이프치히 예술 아카데미에서의 수학은 얀 치홀트 디자인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초기에는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했으나, 1923년 바이마르에서 열린 바우하우스 전시회를 방문한 후 모더니즘 디자인으로 급격히 전향하는 계기를 맞았다.[5] 라슬로 모호이-너지, 엘 리시츠키 등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의 교류는 그의 디자인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치홀트는 '신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 운동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1925년 잡지 특별호에 발표한 '타이포그래피의 원리(elementare typographie)'[17]와 1928년 출간한 저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17]는 그의 디자인 사상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이 시기 그는 기능성과 명료성을 최우선으로 삼고, 산세리프 서체의 적극적인 사용과 역동적인 비대칭 레이아웃을 강조하며 기존의 관습적인 타이포그래피를 비판했다.[9][10] 그의 주장은 당시 독일 디자인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17][11]

그러나 1933년 나치 정권에 의해 '문화 볼셰비스트'로 낙인찍혀 체포되었다가 스위스로 망명한 경험은 그의 디자인 철학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7] 그는 자신이 주창했던 신 타이포그래피의 엄격함과 독단성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고, 점차 고전주의 타이포그래피의 가치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12] 그는 1935년 저서 《타이포그래피 구성(Typographische Gestaltung)》에서 이전과 달리 대칭적 타이포그래피의 가치를 일부 인정했으며,[22] 이후에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가 지나치게 과격했다고 비판하고, 모더니즘 디자인 자체에 대해 권위주의적이며 파시스트적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기까지 했다.[12]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영국 펭귄 북스(Penguin Books)에서 일하며 수백 권의 페이퍼백 디자인을 감독한 것은 그의 후기 디자인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13] 그는 표준화된 지침을 통해 출판물의 일관성을 확보하면서도, 각 책의 개성을 살리는 유연한 디자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 이는 신 타이포그래피의 명료성과 고전 타이포그래피의 조화 및 가독성을 결합하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그의 이러한 변화는 전후 스위스에서 발전한 국제 타이포그래피 양식과는 거리를 두는 결과로 이어졌다.[14]

3. 1. 신 타이포그래피 (Modern Typography)



반 데 그래프 규범은 책 디자인에서 페이지를 보기 좋은 비율로 나누는 데 사용되었으며, 얀 치홀트가 그의 저서 《책의 형태》에서 대중화했다.




치홀트는 1923년 바이마르에서 열린 바우하우스의 첫 전시회를 방문한 이후, 기존의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에서 벗어나 모더니즘 디자인 원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5] 그는 라슬로 모호이-너지, 엘 리시츠키, 쿠르트 슈비터스 등 당시 급진적인 실험을 하던 예술가들의 작업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표현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며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접근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1925년, 치홀트는 Typographische Mitteilungen|타이포그라피셰 미타일룽겐de(타이포그래피 통신)이라는 잡지의 특별호에 "elementare typographie"(기본 타이포그래피)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며 자신의 새로운 디자인 철학을 요약했다.[6] 이 글은 '신 타이포그래피' 운동의 중요한 시작점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1928년에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인 《새로운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를 출간하여 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했다.[9] 이 책은 현대 디자인의 선언과 같은 역할을 했으며, 산세리프 서체의 사용, 비대칭적 레이아웃, 기능성과 명료성 강조, 표준화된 용지 사용 등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의 핵심 원칙들을 제시했다.[9][10] 이러한 원칙들은 당시 독일의 인쇄 및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11]

그러나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서면서 치홀트는 '문화 볼셰비스트'로 비난받고 체포되는 등 정치적 탄압을 겪었다. 이 경험 이후 그는 스위스로 망명했으며, 자신이 과거에 주장했던 신 타이포그래피의 엄격한 원칙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으로 선회했다.[12] 그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가 지나치게 과격했다고 평가했으며, 나아가 모더니즘 디자인이 권위주의적이며 본질적으로 파시즘적일 수 있다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이후 그는 인쇄 디자인에서 고전주의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영국 펭귄 북스(Penguin Books)에서 일하며 수백 권의 페이퍼백 디자인을 감독하고, 《펭귄 구성 규칙(Penguin Composition Rules)》이라는 타이포그래피 지침을 만들었다.[13] 이 시기 그의 작업은 신 타이포그래피 시절과는 다른, 고전적인 원칙에 기반하면서도 대중적인 출판물에 맞는 실용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3. 1. 1. 디자인의 원리

치홀트는 1923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열린 바우하우스의 첫 전시회를 방문한 후 모더니즘 디자인 원칙으로 전환했다.[17][9] 그는 바우하우스, 러시아 구성주의, 네덜란드 데스틸 운동 등에서 나타난 새로운 디자인 실험, 특히 모호이너지의 기하학적 레이아웃과 산세리프체를 활용한 혁신적인 타이포그래피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17][18]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치홀트는 '신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의 원칙을 정립하고 이를 알리는 데 앞장섰다. 그의 생각은 1928년 출간된 저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에 집대성되었는데, 이 책은 현대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의 중요한 선언으로 여겨진다.[18][9] 치홀트가 제시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의 핵심 원리는 다음과 같다.

  • 기능성과 명료성: 타이포그래피의 최우선 목적은 내용을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기능성에 있다.[10] 따라서 디자인은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함과 명료함을 추구해야 하며, 텍스트의 기능으로부터 형태가 자연스럽게 도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가장 짧고 간결하며 시각적으로 명확한 형식을 지향했고, 다양한 크기와 굵기의 서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정보 전달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을 제시했다.[10]
  • 비대칭 레이아웃: 전통적인 가운데 정렬 방식의 대칭적 구성을 거부하고, 동적인 비대칭 레이아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9] 이는 기계 시대의 역동성과 새로움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 산세리프 서체 사용: 장식이 배제된 간결하고 명료한 형태의 산세리프(독일어권에서는 '그로테스크(Grotesk)'라고도 불림)를 현대적인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유일한 서체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며, 다른 모든 종류의 서체를 비판적으로 보았다.[9]
  • 표준화: 모든 인쇄물 제작에 있어 표준화된 용지 크기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여 효율성과 일관성을 높이고자 했다.[10]


치홀트가 정립한 이러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 원칙들은 당시 인쇄 및 그래픽 디자인 분야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10] 이후 출간된 여러 실용적인 지침서를 통해 독일의 디자이너와 인쇄 기술자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다.[11]

3. 1. 2. 활자체: 산세리프체

얀 치홀트는 1923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열린 바우하우스의 첫 전시회를 관람한 후 큰 영향을 받았다.[17] 특히 모호이-너지의 홍보물에 사용된 기하학적인 레이아웃과 산세리프체(획에 세리프(serif, 삐침)가 없는 서체)의 혁신적인 타이포그래피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18] 이를 계기로 치홀트는 모더니즘 디자인 원칙을 받아들여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의 선구자가 되었다.[17][9]

1928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Die neue Typographie|디 노이에 튀포그라피de는 현대 디자인의 선언과 같은 책이었다.[18][9] 이 책에서 치홀트는 산세리프체(독일어권에서는 '그로테스크'라고도 불림)를 제외한 모든 서체를 비판하며, 명료하고 기능적인 디자인을 강조했다.[9] 그는 한동안 산세리프체만이 모든 인쇄물에 적합한 유일한 서체라고 주장하며, 가운데 정렬 대신 비대칭적인 레이아웃을 선호하는 등 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의 여러 원칙들을 체계화했다.[18][9] 이러한 생각은 당시 독일 타이포그래피의 혼란스러움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17]

하지만 1933년 나치 정권에 의해 '문화적 볼셰비키'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경험은 그의 생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23][18] 그는 자신이 산세리프체만을 고집하고 비대칭 배열만을 강조했던 것이 나치의 파시즘과 유사한 독선이라고 여기게 되었다.[18] 결국 그는 Die neue Typographie|디 노이에 튀포그라피de에서 주장했던 원칙들이 지나치게 과격했으며, 모더니즘 디자인이 권위주의적이고 본질적으로 파시스트적일 수 있다고 비판하며 고전주의 타이포그래피로 돌아섰다.[12][18]

치홀트는 산세리프체를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다. 1931년에는 트랜짓(Transit)과 제우스(Zeus)를 디자인했으며, 초기 사진 식자 기계를 위해 길 산스(Gill Sans)를 수정한 Uhertype-Standard-Grotesk를 만들었다.[15][16] 또한 1926년부터 1929년 사이에는 독일어 철자를 간소화하기 위해 대문자가 없는 산세리프체 기반의 "만국 공통 알파벳(Universal Alphabet)"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3. 1. 3. 레이아웃: 비대칭 배열

치홀트는 1923년 바이마르에서 열린 바우하우스의 첫 번째 전시회를 관람한 후 깊은 감명을 받아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17] 특히 러시아 구성주의와 네덜란드의 데스틸 운동 등에서 나타난 새로운 실험들에 주목했으며, 모호이너지의 작업에서 나타난 기하학적인 레이아웃과 산세리프체의 혁신적인 사용에 영향을 받았다.[18][17]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 개념을 빠르게 자신의 작업에 적용하고 발전시켜 나갔으며, 1928년에는 현대 타이포그래피의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de)를 출간했다.[18]

이 책에서 치홀트는 내용과 관계없이 형식적으로 중앙에 맞춰 정렬하는 기존의 대칭적인 조판 방식을 비판했다. 그는 디자인이 정적인 상태에 머무르기보다 역동적인 힘을 보여주어야 하며, 활자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임 속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그는 가운데 정렬을 피하고, 대비되는 요소들을 활용하여 시각적인 긴장감과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비대칭 디자인을 핵심 원칙으로 제시했다.[9] 이는 단순히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정보를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합리적인 접근 방식으로 여겨졌다. 그는 모든 인쇄물에 표준화된 용지 크기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으며, 다양한 크기와 두께의 서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정보의 위계를 명확히 하고 가독성을 높이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10][11] 초기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에서는 산세리프체(독일어 '그로테스크')만을 유일하게 현대적인 서체로 간주하고 다른 모든 서체를 배격하기도 했다.[9]

비록 치홀트 자신은 1930년대 이후 나치즘의 경험 등을 거치며 이러한 엄격한 원칙, 특히 산세리프 서체만을 고집했던 점에 대해 스스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고전주의 타이포그래피로 회귀했지만[12][18], 그가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제시한 비대칭 레이아웃 원칙과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 방식은 이후 현대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 1. 4. 관련 작품

1923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열린 바우하우스의 첫 전시회는 얀 치홀트의 디자인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17] 특히 모호이너지의 홍보물과 같은 바우하우스 인쇄물에서 나타난 기하학적 레이아웃과 산세리프 서체의 혁신적인 사용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18] 이후 그는 모더니즘 디자인 원칙을 받아들여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의 선구자가 되었다.[17][9]

그의 초기 중요 작업으로는 1925년 잡지 부록으로 발표한 「타이포그래피 기초」(elementare typographie)가 있다. 이는 전통 타이포그래피와의 단절을 주장하며 새로운 시대의 디자인 방향을 제시한 글로 평가받는다.[18] 이 글은 이후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꼽히는 『신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 1928)의 모태가 되었다.[18][9]

『신 타이포그래피』는 현대 디자인의 선언과 같은 책으로 여겨진다.[9][10] 이 책에서 치홀트는 산세리프체(독일에서는 '그로테스크'체라고도 불림) 외의 모든 서체를 비판하고, 표제 페이지 등에서 가운데 정렬을 피하는 비대칭 디자인을 선호했으며, 표준화된 용지 크기 사용을 주장하는 등 여러 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 원칙을 체계화했다.[9][10] 또한 다양한 크기와 두께의 서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정보를 빠르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방법을 제시했다.[10] 이 책과 뒤이은 실용 매뉴얼들은 독일 인쇄 및 디자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11]

그러나 치홀트는 1933년 나치에 의해 '문화적 볼셰비키'로 몰려 체포되는 고초를 겪은 후, 스위스로 이주하면서 자신의 초기 신념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23][18] 그는 자신이 주창했던 신 타이포그래피의 엄격함과 획일성이 나치즘파시즘적 독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자책감을 느꼈고, 이를 '지나치게 과격했다'고 비판하며 고전주의적 타이포그래피로 점차 회귀했다.[12][18] 그는 모더니즘 디자인이 권위주의적이며 본질적으로 파시스트적일 수 있다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영국 펭귄 북스(Penguin Books)에서 일하며 500권 이상의 페이퍼백 디자인을 감독했고, 이때 정립한 타이포그래피 규칙은 《펭귄 구성 규칙(Penguin Composition Rules)》으로 정리되었다.[13] 그는 펭귄 북스의 책들, 특히 펠리컨 북스(Pelican Books) 시리즈에 통일성을 부여하면서도 각 책의 개성을 살리는 디자인을 추구했다.

치홀트의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연도원제한국어 번역 / 비고
1925(elementare typographie)잡지 부록. 「타이포그래피 기초」.
1928Die neue Typographie. Ein Handbuch für zeitgemäß Schaffende새로운 타이포그래피. 베를린 Bildungsverbandes der Deutschen Buchdrucker 출판. 현대 디자인의 선언문으로 평가받음. (영어 번역: The New Typography)
1930Eine Stunde Druckgestaltung: Grundbegriffe der Typographie...한 시간의 인쇄 디자인: 타이포그래피의 기본 개념... 슈투트가르트 Akademischer Verlag Dr. Fritz Wedekind & Co. 출판.
1931Schriftschreiben für Setzer조판사를 위한 서체 쓰기. 프랑크푸르트 Klimsch & Co. 출판.
1932Typographische Entwurfstechnik타이포그래피 디자인 기술. 슈투트가르트 Akademischer Verlag Dr Fritz Wedekind & Co. 출판.
1935Typographische Gestaltung타이포그래피 디자인. 바젤 Benno Schwabe & Co. 출판.
1941/42Gute Schriftformen좋은 서체. 바젤 Lehrmittelverlag des Erziehungsdepartements 출판. (여러 판본 존재)
1941/46Geschichte der Schrift in Bildern그림으로 보는 서체의 역사. 바젤 Holbein-Verlag 출판. (영어 번역: A Treasury of Alphabets and Lettering)
1947Chinesische Gedichte vom zehn Bambushallenbilderdruck십죽재 화보의 중국 시. 바젤 Holbein-Verlag 출판.
1949Was jedermann vom Buchdruck wissen sollte누가 인쇄술에 대해 알아야 하는가. 바젤 Birkhäuser-Verlag 출판.
1949Schatzkammer der Schreibkunst서예의 보물창고. 제2판. 바젤 Birkhäuser Verlag 출판.
1951Im Dienste des Buches책의 봉사로. SGM-Bücherei, St. Gallen 출판.
1941/51Der chinesische Farbendruck der Gegenwart선자원 교과서의 중국 채색 인쇄. Holbein-Verlag, 바젤 출판.
1942/51Schriftkunde, Schreibübungen und Skizzieren für Setzer서체학, 필기 연습 및 조판사를 위한 스케치. Holbein-Verlag, 바젤 출판. (확장 재인쇄)
1943/52Der Holzschneider und Bilddrucker Hu Chêng-yen목판 조각가이자 그림 인쇄가 후 청옌. 바젤 Holbein-Verlag 출판.
1944/53Chinesischer Farbendruck von Heute오늘날의 중국 채색 인쇄. 바젤 Holbein-Verlag 출판. (영어 번역: Chinese Colour-Prints of Today)
1953Formenwandlungen der &-ZeichenEt-기호의 형태 변화. 프랑크푸르트 Stempel 출판. (영어 번역: The Ampersand: Its Origin and Development)
1960Erfreuliche Drucksachen durch gute Typographie좋은 타이포그래피로 즐거운 인쇄물. 라벤스부르크 Otto Maier-Verlag 출판. (재인쇄)
1965Meisterbuch der Schrift: Ein Lehrbuch mit vorbildlichen Schriften...서체의 마스터북: ...모범적인 서체를 담은 교과서. 제3차 개정판. 라벤스부르크 Otto Maier-Verlag 출판. (영어 번역: Treasury of Alphabets and Lettering)
1970Die Bildersammlung der Zehnbambushalle십죽재 화보의 그림 모음. 취리히/슈투트가르트 Eugen-Rentsch-Verlag 출판.
1929/73Foto-Auge사진-눈 프란츠 로(Franz Roh)와 공저. 슈투트가르트 Akademischer Verlag Dr. Fritz Wedekind & Co. 출판. (재인쇄)
1975/87Ausgewählte Aufsätze über Fragen der Gestalt des Buches und der Typographie책의 형태와 타이포그래피 문제에 관한 선별된 에세이. 바젤 Birkhäuser-Verlag 출판.
1955/91Die Proportionen des Buches책의 비율. 암스테르담 Amst., Intergrafia 출판.
1992Schriften: 1925–1974 1/2 Bde.저술: 1925–1974 1/2권. 베를린 출판.
1995The Form of the Book: Essays on the Morality of Good Design책의 형태: 좋은 디자인의 도덕성에 대한 에세이. Roberts, WA: Hartley and Marks 출판. (영어 저작)
2007Jan Tschichold, posters of the avantgarde얀 치홀트, 아방가르드 포스터. Laren, 네덜란드: VK-projects 출판. (영어 저작)
2008Jan Tschichold—Master Typographer: His Life, Work & Legacy얀 치홀트 — 마스터 타이포그래퍼: 그의 삶, 작품 및 유산. 런던: Thames & Hudson 출판. (영어 저작)
2019Jan Tschichold and the New Typography얀 치홀트와 새로운 타이포그래피. 예일 출판. (영어 저작)


3. 2. 고전적 타이포그래피로의 회귀

얀 치홀트는 1923년 바이마르바우하우스 전시회를 접한 후 모더니즘 디자인, 즉 '신 타이포그래피'의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다.[5] 그는 기능성과 명료성을 강조하며 산세리프 서체와 비대칭 레이아웃을 핵심 원리로 내세웠다.[9][10]

그러나 나치즘의 부상은 그의 디자인 철학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왔다. 1933년 히틀러 집권 후, '문화적 볼셰비스트'로 비난받으며 체포되었던 경험[7]과 망명 생활은 그에게 모더니즘 운동의 경직성과 독단성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과거 열정적으로 옹호했던 신 타이포그래피의 엄격함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후 치홀트는 점차 고전주의 타이포그래피의 가치를 재발견하며 자신의 입장을 수정했다.[12] 그는 나중에 자신의 초기 저작인 《새로운 타이포그래피》가 지나치게 과격했으며, 모더니즘 디자인이 권위주의적이고 본질적으로 파시스트적 경향마저 띤다고 강하게 비판하기까지 했다.[12] 이러한 변화는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영국 펭귄 북스(Penguin Books)에서의 작업[13][18]과 1952년 출간한 『알파벳과 레터링 보감(Treasury of Alphabets and Lettering)』[19] 등 후기 활동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고전 서체와 대칭적 구성을 다시 활용하며, 신 타이포그래피의 명료성과 고전 타이포그래피의 조화 및 가독성을 결합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후기 입장은 전후 스위스에서 발전한 국제 타이포그래피 양식과는 뚜렷한 거리를 두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14]

3. 2. 1. 디자인 원리



얀 치홀트는 초기에 신 타이포그래피의 핵심 원칙으로 명료성을 강조했다. 그는 과거의 활자들이 아름답지만 명료하지 못하며, 이는 타이포그래피의 본질에 어긋난다고 보았다.[18] 따라서 그는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고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압축된 산세리프체(독일 '그로테스크', 미국 '고딕')가 현대적인 활자라고 주장했다.[17][18] 산세리프체는 다양한 굵기(가는, 중간, 굵은, 아주 굵은, 이탤릭)와 비례(장체, 정체, 평체)를 갖추어 꾸밈없이 기본형을 표현할 수 있으며, 신 타이포그래피의 기본 글꼴로 여겨졌다.[17][19][22]

1923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전시회 방문 이후, 치홀트는 모더니즘 디자인 원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28년 출간된 그의 저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는 현대 디자인의 선언문과 같았다.[9][10] 이 책에서 그는 산세리프 외의 모든 서체를 비판하고, 표제 페이지 등에서 가운데 정렬을 배제한 비대칭 디자인을 선호했다. 또한 모든 인쇄물에 표준화된 용지 크기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으며, 정보를 빠르고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크기와 굵기의 서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11] 이러한 원칙들은 독일 인쇄 및 그래픽 디자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32년경부터 치홀트는 자신의 엄격했던 신념에서 점차 벗어나 고전주의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12] 그는 본문 서체에 고전적인 로만체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가 지나치게 과격했다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모더니즘 디자인 자체를 권위주의적이고 본질적으로 파시스트적이라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이는 신 타이포그래피의 명료성 원칙은 유지하되, 가독성과 조화, 그리고 대칭과 비대칭의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향으로 그의 디자인 철학이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영국 펭귄 북스(Penguin Books)에서 일하며 500권 이상의 페이퍼백 디자인을 감독할 때 이러한 변화가 반영되었다. 그는 《펭귄 구성 규칙(Penguin Composition Rules)》을 통해 타이포그래피 규칙을 표준화하여 책에 통일된 외양을 부여하면서도,[13] 각 책의 표지와 표제 페이지 디자인에는 다양성을 허용하여 개성을 살렸다. 이는 대중적인 페이퍼백 디자인에서도 엄격한 규칙보다는 유연성과 조화를 추구한 그의 후기 디자인 원리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과적으로 치홀트는 과거의 완전한 회귀가 아니라, 고전 타이포그래피와 현대 타이포그래피의 장점을 조화시켜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는 대칭 배열과 비대칭 배열이 공존할 수 있으며, 이 둘은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서로 다른 방법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모더니즘 원칙의 포기는 그가 전후 스위스에 거주했음에도 국제 타이포그래피 스타일의 중심에 서지 않게 된 배경이 되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네오 그로테스크 서체들을 부실하게 디자인된 과거 모델의 부활로 보고 탐탁지 않게 여겼다.[14]

3. 2. 2. 활자체: 사봉(Sabon)

'''사본'''(Sabon)은 얀 치홀트가 디자인하여 1967년에 출시되었다. 초기 사용 예로는 브래드버리 톰슨이 《워시번 대학교 성경》에 사용했다.


사본(Sabon)은 얀 치홀트가 디자인하여 1966년에서 1967년 사이에 개발하고 1967년에 발표한 세리프 활자체이다. 이 서체는 16세기 프랑스의 활자 디자이너 자크 사본(Jacques Sabon)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사본 서체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모노타입 기계와 리노타입 기계 모두에서 동일한 조판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두 시스템 간의 호환성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으며, 활자 주조용 매트릭스도 제작되어 생산된 모든 활자가 상호 교환 가능했다.

사본 서체는 발표 직후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브래드버리 톰슨(Bradbury Thompson)이 워시번 대학교에서 출판한 성경에 사용하면서 주목받았다. 이후 라이노타입(Linotype)사에서는 얀 치홀트의 원본 사본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사본 넥스트'(Sabon Next)를 출시하기도 했다.

3. 2. 3. 레이아웃: 대칭과 비대칭의 공존

치홀트는 1923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전시회 방문 이후 모더니즘 디자인 원칙을 받아들여 '새로운 타이포그래피'를 주창했다. 그는 1925년 영향력 있는 잡지 부록, 1927년 개인 전시회, 그리고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인 《새로운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를 통해 모더니즘 디자인의 선구자가 되었다.[9] 이 시기 그는 명료성을 타이포그래피의 핵심으로 보았으며, 전통적인 가운데 정렬 레이아웃보다는 비대칭적인 구성을 선호했다.[10] 이러한 비대칭적 접근은 당시 새로운 시대를 표현하는 조형 언어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모든 인쇄물에 표준화된 용지 크기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고, 정보를 빠르고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크기와 굵기의 산세리프 서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다.[11]

그러나 1932년경부터 치홀트는 초기의 엄격했던 신념에서 점차 벗어나 인쇄 디자인에서 고전주의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12] 예를 들어, 그는 1932년에 디자인한 사스키아(Saskia) 서체에서 고전적인 로만체의 특징을 수용했으며, 본문 조판에 있어 고전 서체의 가치를 다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초기 저작인 《새로운 타이포그래피》가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경직되었다고 스스로 비판했으며, 더 나아가 모더니즘 디자인 일반에 대해 권위주의적이며 본질적으로 파시스트적 경향이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그가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영국 펭귄 북스(Penguin Books)에서 일하며 500권이 넘는 페이퍼백의 디자인을 감독했을 때 잘 드러난다. 그는 '펭귄 구성 규칙(Penguin Composition Rules)'이라는 표준화된 타이포그래피 지침을 만들어 펭귄 출판물, 특히 펠리컨 북스(Pelican Books) 시리즈에 일관된 외양을 부여했다.[13] 하지만 동시에 각 책의 고유한 성격을 존중하여 표지나 표제지 디자인에서는 다양성을 허용함으로써, 엄격한 규칙 적용보다는 내용 전달이라는 커뮤니케이션 목적에 더 집중하는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치홀트에게 있어 대칭과 비대칭은 서로 배척해야 할 상반된 원리가 아니었다. 비대칭 타이포그래피가 새로운 시대를 표현하는 중요한 형식이라면, 오랜 인류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해 온 대칭적 구성 또한 그 자체의 가치와 효용성을 지닌다. 그는 디자인의 궁극적인 목표인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이 두 가지 접근 방식을 상황과 목적에 맞게 선택하고 조화롭게 활용할 수 있음을 자신의 작업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가 모더니즘 원칙에서 벗어난 것은 전후 스위스로 이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 타이포그래피 양식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14]

3. 2. 4. 관련 작품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영국에 거주하며 펭귄 북스(Penguin Books)에서 출판한 500권 이상의 페이퍼백 디자인 개편 작업을 감독했다. 이 시기 그는 표준화된 타이포그래피 규칙인 《펭귄 구성 규칙(Penguin Composition Rules)》을 만들었다.[13] 치홀트는 펭귄 북스, 특히 펠리컨 북스(Pelican Books) 시리즈에 일관된 디자인을 적용하면서도, 각 책의 표지와 표제 페이지 디자인에는 다양성을 허용하여 개성을 살렸다. 그의 후임으로는 한스 슈몰러(Hans Schmoller)가 왔다.

치홀트는 타이포그래피와 북 디자인에 관한 여러 중요한 저서를 남겼다.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는 모더니즘 디자인 원칙을 집대성한 《새로운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 1928)가 있다. 이후 고전주의로 회귀하면서 다양한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원제한국어 제목 (번역 또는 통용)비고
1928Die neue Typographie. Ein Handbuch für zeitgemäß Schaffende새로운 타이포그래피.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을 위한 핸드북모더니즘 타이포그래피 선언
1935Typografische Gestaltung타이포그래피 디자인
1941/1946Geschichte der Schrift in Bildern그림으로 보는 서체의 역사
1949Schatzkammer der Schreibkunst서예의 보물창고
1952Meisterbuch der Schrift. Ein Lehrbuch mit vorbildlichen Schriften aus Vergangenheit und Gegenwart für Schriftmaler, Graphiker, Bildhauer, Graveure, Lithographen, Verlagshersteller, Drucker, Architekten und Kunstschulen서체의 마스터북 (알파벳과 레터링 보감)영어판 제목: Treasury of Alphabets and Lettering
1953Formenwandlungen der &-ZeichenEt-기호(&)의 형태 변화앰퍼샌드(&) 기호 역사
1960Erfreuliche Drucksachen durch gute Typographie좋은 타이포그래피로 즐거운 인쇄물
1975Ausgewählte Aufsätze über Fragen der Gestalt des Buches und der Typographie책의 형태와 타이포그래피 문제에 관한 선별된 에세이사후 출판된 에세이 모음



이 외에도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통해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이론과 실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관련 인물 및 단체

얀 치홀트는 그의 경력 동안 여러 중요한 인물 및 단체와 교류했다. 그는 라이프치히 예술 아카데미에서 헤르만 델리치에게 배웠으며, 이후 게브르.-클링스포르 주조소의 서체 디자이너이자 총장이었던 발터 티에만의 수석 제자가 되었다. 초기에는 라이프치히 무역 박람회 관련 디자인 작업을 수행하기도 했다.

1923년 바이마르에서 열린 바우하우스 전시회 방문은 그의 디자인 철학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5] 이 시기 그는 라슬로 모호이-너지, 엘 리시츠키, 쿠르트 슈비터스와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신 타이포그래피' 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이들과의 관계는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나치 정권 하에서는 파울 레너와 함께 뮌헨에서 교직을 맡았으나, "문화 볼셰비스트"로 비난받고 체포되는 등 정치적 탄압을 겪었다. 1933년 스위스로 망명한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갔으며, 특히 영국 타이포그래퍼 루아리 맥클린의 초청으로 펭귄 북스의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며 영국 디자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4. 1. 바우하우스(Bauhaus)

바우하우스는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미술학교와 공예학교를 병합하여 설립한 조형학교이다. 건축을 주축으로 삼아 예술과 기술을 종합하려는 이념을 추구했다. 바이마르에서 시작된 바우하우스에서는 요하네스 이텐, 라이오넬 파이닝거, 폴 클레, 오스카 슐레머, 바실리 칸딘스키 등이 교육을 담당하였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97681&cid=40942&categoryId=34673] 바우하우스는 학생들이 창의적인 생각을 하고 새로운 기술에 접근하도록 장려하는 진보적인 발상의 중심지였으며,[22] 건축을 우선으로 한 디자인의 모든 분야에서 모던 디자인 양식을 창조했다.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도 '신 타이포그래피'를 표방하며 의미 있는 다양한 실험과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으나, 이러한 시도들이 당시 인쇄계 전반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이는 타이포그래피 담당 교수들 중 실제 인쇄 기술과 공정에 대한 전문 지식과 경험을 가진 타이포그래퍼가 부족했던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19]

1923년, 국립 바우하우스의 첫 번째 전람회가 열렸다. 당시 라이프치히의 한 인쇄 회사에서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실무를 접하고 있던 치홀트는 이 전람회를 방문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바우하우스 전람회는 건축을 중심으로 회화, 조각, 공예, 제품 디자인, 그래픽과 타이포그래피 등을 ‘총체 예술’ 차원에서 통합하려 했으며,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건축가 그로피우스, 오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로에, 화가 오스카 슐레머와 바실리 칸딘스키 등의 작품을 접했다. 이 바우하우스 전시는 치홀트의 디자인 인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22]

치홀트에게 특히 놀라웠던 것은 바우하우스의 인쇄 출판물들이었다. 당시 바우하우스 기초 교육을 담당했던 교수 요하네스 이텐의 자유분방한 표현주의를 비롯해, 러시아의 절대주의와 구성주의, 네덜란드의 데 스틸 운동 등 새로운 실험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특히 라슬로 모호이-너지의 바우하우스 홍보물은 기하학적인 레이아웃과 산세리프체(고딕체)를 활용한 혁신적인 타이포그래피로 기계 시대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었다. 바우하우스 전람회의 영향으로 치홀트는 이전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모더니스트로 전향하게 된다.[18] 그는 곧 바우하우스와 러시아 출신 구성주의 미술가들의 기능주의 디자인 개념, 그리고 데 스틸 운동의 시각적·이론적 개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얀 치홀트의 '뉴 타이포그래피'는 바우하우스의 라슬로 모호이-너지와 발터 그로피우스 등에게도 호응을 얻게 되었다.[22]

4. 2. 엘 리시츠키(El Lissitzky)

엘 리시츠키(1890~1941)는 러시아의 화가이자 디자이너이다. 그는 공간 구성 실험을 통해 판화, 포토몽타주, 건축 등에서 새로운 기법을 선보이며 서유럽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에서 받은 건축 교육을 바탕으로, 말레비치(Kashmir Malevich)의 절대주의 회화 양식의 형태 및 공간 개념을 사회를 위한 예술인 실용적 디자인에 적용하고자 했다. 그의 이성적이고 절제된 작업의 배후에는 현대 과학의 무한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믿는 기계 미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리시츠키와 구성주의자들은 새로운 공산 사회 건설에 예술이 건설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신념은 당시 유럽 디자이너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얀 치홀트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19]

치홀트는 모호이-너지를 통해 엘 리시츠키를 소개받았다. 신 타이포그래피로 전환하며 작품 스타일을 완전히 바꾼 치홀트는 1923년 초, 러시아 혁명의 영향과 문화 발전에 대한 낙관주의를 표현하고자 러시아식 이름인 '''이반(Iwan, 혹은 Ivan) 치홀트'''로 개명하기도 했다.[22] 이는 러시아 구성주의자 엘 리시츠키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표현으로 여겨지며, 치홀트가 이념적으로 신 타이포그래피 노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준다.[18] 리시츠키는 동료 예술가들의 작업에 관심을 보였는데, 얀 치홀트가 1925년 Elementare Typographie|엘레멘타레 티포그라피de를 발표했을 때 ‘브라보’라는 말로 시작하는 따뜻한 격려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리시츠키의 작업은 신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 탁월했으며, 얀 치홀트는 잡지 《Gegenstand|게겐슈탄트de》(영어: object) 디자인과 시집 『크게 읽기 위해서』 디자인을 그 모범으로 꼽았다.[19]

4. 3. 광고 디자이너들의 링 (Ring neuer Werbegestalter)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 1887~1948)가 1928년에 설립한 신 광고디자이너 그룹이다. 얀 치홀트를 비롯하여 빌리 바우마이스터, 막스 부르샤르츠, 발터 덱셀, 라이스티코브, 로버트 미셸, 게오르그 트룸프, 프리드리히-길데바르트, 케사르 도멜라, 피트 츠바르트, 파울 슈이테마 등 25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이 단체의 주요 목적은 회원들의 작업을 홍보하는 것이었다.[22]

이들이 공유한 관점으로는 산세리프체의 사용, 굵은 선, 원색, 기계 이용을 바탕으로 한 생산 등이 있다. 치홀트와 같이 그들은 타이포그래피에서 과감한 대조와 강한 색의 사용, 소통에 명료성을 강조했다. 치홀트의 많은 개념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을 유지했고, 뉴 타이포그래피의 원칙들을 선별적으로 흡수해나갔다. 이 그룹을 통한 국제적인 친분 덕에 치홀트는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미술 분야에 대한 국제적인 동향을 잘 알 수 있었으며, 치홀트의 생각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는 데는 이 단체의 역할이 매우 컸다.[22]

5. 주요 저서

얀 치홀트는 타이포그래피 분야에서 중요한 여러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술 활동은 초기 모던 디자인 시기와 이후 고전주의로 회귀한 시기로 나눌 수 있으며, 각 시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책들이 있다.

thumb'''은 북 디자인의 페이지 분할에 대한 이상적인 비율이다. 얀 치홀트가 저서 『책의 형태』(The Form of the Bookeng)에서 소개하고 보급했다.]]

초기 대표작으로는 1928년에 출간된 『신 타이포그래피』(Die neue Typographiedeu)가 있다. 이 책은 바우하우스 전시의 영향을 받아 모던 디자인의 원칙을 집대성한 선언문과 같은 저서로 평가받는다. 치홀트는 이 책에서 산세리프체(독일어로는 그로테스크) 사용을 강조하고, 전통적인 가운데 정렬 대신 비대칭적인 레이아웃을 선호하는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타이포그래피 규칙들을 제시했다. 이 책은 독일 전역의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출간된 『타이포그래피 디자인』(Typographische Gestaltungdeu, 1935) 등은 『신 타이포그래피』의 원칙을 실제 작업에 적용하기 위한 실용적인 지침서 성격을 띤다.

그러나 치홀트는 1932년경부터 점차 초기 모더니즘의 엄격한 원칙에서 벗어나 고전주의적인 타이포그래피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훗날 『신 타이포그래피』가 지나치게 극단적이었다고 스스로 비판했으며, 모던 디자인이 가진 권위주의적인 측면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 변화는 후기 저작들에 반영되었다. 특히 1975년에 출간된 에세이 모음집 『책의 형태와 타이포그래피 문제에 관한 선별된 에세이』(Ausgewählte Aufsätze über Fragen der Gestalt des Buches und der Typographiedeu, 영어판 제목: The Form of the Bookeng)는 고전주의적 시각에서 책의 형태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그의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저서이다. 이 책에서 그는 반 데 그라프 규칙과 같은 고전적인 페이지 비례 원칙을 소개하며 균형 잡힌 책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외에도 치홀트는 서체와 레터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여러 관련 서적을 저술했다.

연도원제한국어 제목 (번역)비고
1928Die neue Typographiedeu신 타이포그래피모던 타이포그래피 원칙을 제시한 초기 대표작. 산세리프체 사용과 비대칭 구성을 강조.
1935Typographische Gestaltungdeu타이포그래피 디자인 (또는 타이포그래피 구성)『신 타이포그래피』 원칙 기반의 실용 지침서.
1941/1946Geschichte der Schrift in Bilderndeu그림으로 보는 서체의 역사서체 역사에 대한 도해 중심 저술.
1949/1965Schatzkammer der Schreibkunstdeu / Meisterbuch der Schriftdeu서예의 보물창고 / 서체의 마스터북역사적 서체 및 레터링 견본 집대성. 영어판 제목은 Treasury of Alphabets and Letteringeng.
1975Ausgewählte Aufsätze über Fragen der Gestalt des Buches und der Typographiedeu책의 형태와 타이포그래피 문제에 관한 선별된 에세이 (또는 책의 형태)고전주의적 관점의 책 디자인/타이포그래피 에세이 모음. 후기 대표작. 영어판은 The Form of the Bookeng으로 출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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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간행물 Jan Tschichold—Posters of the AvantGarde
[8] 간행물 Jan Tschichold—Posters of the AvantGar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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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논문 Jan Tschichold and the concept of the new: a picture of the world and an artistic program https://www.research[...] 2022
[11] 서적 Jan Tschichold and the New Typography: graphic design between the World Wars Yal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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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필로디자인 그린비
[19] 서적 신 타이포그래피 혁명가 얀 치홀트 디자인하우스
[20] 서적 얀 치홀트의 타이포그라픽 디자인 (주)안그라픽스
[21] 서적 능동적 도서: 얀 치홀트와 새로운 타이포그래피 Workroom
[22] 서적 얀 치홀트: 타이포그래피의 거장 그의 삶과 작품 그리고 유산 비즈앤비즈
[23] 서적 능동적 도서: 얀치홀트와 새로운 타이포그래피 워크룸프레스
[24] 서적 타이포그래피 사전 안그라픽스
[25] 문서 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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