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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의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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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든버러의 마리아는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와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딸로,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다. 1875년 켄트주에서 태어났으며, 공식적으로 에든버러의 마리 공주 전하로 불렸다. 1893년 루마니아의 페르디난트 1세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낳았으며, 결혼 생활은 불행했지만, 루마니아의 애국주의자로 활동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적십자사에서 봉사했고, 전후에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루마니아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다. 1922년 대관식을 치렀으며, 1938년 사망 후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작가로도 활동했으며, 만년에는 바하이교로 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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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든버러의 마리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리아 왕비
칭호루마니아 왕비
재위 기간1914년 10월 10일 – 1927년 7월 20일
대관식1922년 10월 15일
전체 이름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출생 이름에든버러의 마리아 공주
출생1875년 10월 29일
출생지이스트웰 파크, 켄트 주, 영국
사망1938년 7월 18일
사망지펠리쇼르 성, 시나이아, 루마니아 왕국
매장일1938년 7월 24일
매장지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대성당
서명
가문
왕가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알프레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결혼과 자녀
배우자페르디난드 1세 (1893년 1월 10일 결혼, 1927년 7월 20일 사별)
자녀카롤 2세
엘리사베타
마리아
니콜라에
일레아나
미르체아
기타 정보
종교성공회 → 루마니아 정교회 → 바하이 신앙

2. 유년기 (1875년–1893년)



1888년 촬영된 마리아 공주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와 그의 아내 러시아 여대공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사이의 장녀이자 둘째 아이로, 켄트에서 태어났다. 정식 이름은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Marie Alexandra Victoria)이다. 오빠 알프레드와 여동생 빅토리아 멜리타, 알렉산드라, 베아트리스가 있다. 해군이던 아버지를 따라 몰타에서 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집안을 자주 방문하던 사촌 웨일즈의 조지로부터 청혼을 받았으나, 양가 아버지와 할머니의 적극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들의 불화로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루마니아의 왕세자와 약혼하게 된다.[5]

마리아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이스트웰에서 보냈다. 에든버러 공작은 영국 해군에서의 직책 때문에 자녀들의 삶에서 대부분 자리를 비웠고, 그들의 삶은 어머니가 주로 이끌었다. 공작은 집에 있을 때 종종 아이들과 놀아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마리아는 1살 어린 여동생 빅토리아 멜리타와 가장 가까웠다. 에든버러 아이들은 모두 성공회 신앙으로 세례를 받고 자랐는데, 이는 러시아 정교회 신자인 어머니를 불편하게 했다.

1886년, 마리아가 11살이었을 때, 에든버러 공작은 지중해 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가족은 몰타의 산 안토니오 궁전에 거주하게 되었다.[7] 마리아는 훗날 몰타에서의 시간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라고 회상했다. 몰타에서 마리아는 처음으로 사랑을 느끼게 되었는데, 상대는 에든버러 공작 배의 선장인 모리스 보크였다.

1889년, 에든버러 공작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에른스트 2세 공작의 후계자가 되면서 가족은 코부르크로 이주했다.[7] 마리아는 이 시기를 "진정으로 행복했던 삶의 끝"으로 여겼다.

마리아는 성장하면서 "반짝이는 푸른 눈과 비단결 같은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젊은 여성으로 주목받았다. 1892년,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웨일스 공 조지 왕자를 포함한 여러 왕족 남성들이 그녀에게 구애했다. 빅토리아 여왕, 웨일스 공, 에든버러 공작은 모두 이 결혼을 지지했지만, 웨일스 공비와 에든버러 공작 부인은 반대했다.

2. 1. 탄생

이스트웰 매너 (1843년~1894년 사이 모습, 남쪽 파사드)


마리는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와 그의 아내 러시아 여대공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의 장녀이자 둘째였다. 알프레드는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이고,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는 알렉산드르 2세 황제의 딸이었다. 1875년 10월 29일 오전 10시 30분에 아버지의 입회 하에, 잉글랜드 켄트주에 있는 부모의 거주지인 이스트웰 매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탄생은 파크 및 타워 포 발사로 축하받았다.[2]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로 명명되었지만, 비공식적으로 "미시"로 알려졌다. 에든버러 공작은 자신의 딸이 "오빠만큼 훌륭한 아이가 될 것이며,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폐활량이 좋을 것이라는 모든 증거를 보여준다"고 썼다. 마리는 남성 계열로 통치하는 영국 군주의 손녀였으므로, 출생 시부터 공식적으로 "에든버러의 마리 공주 전하"라는 칭호를 받았다.

마리의 세례는 1875년 12월 15일 윈저 성의 사설 예배당에서 이루어졌으며, 아서 스탠리와 제럴드 웰즐리, 윈저 대성당의 학장이 집전했다. 세례는 "엄격히 개인적인 성격"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의 아버지인 알베르트 공의 사망 기념일을 기념하는 의식 다음 날에 거행되었다.[3] 마리의 대부는 다음과 같다.[4]

대부모대리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외할머니)빅토리아 여왕
웨일스 공비 (아버지의 고모)해당 없음
작센코부르크고타 여공작 (고모할머니)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공주
러시아 황태자 (외삼촌)표트르 안드레예비치 슈발로프 백작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버지의 삼촌)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공


2. 2. 성장 과정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와 그의 아내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사이의 장녀이자 둘째 아이로, 켄트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Marie Alexandra Victoria)이다. 오빠 알프레드와 여동생 빅토리아 멜리타, 알렉산드라, 베아트리스가 있다. 해군이던 아버지를 따라 몰타에서 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릴때부터 집안을 자주 방문하던 사촌 웨일즈의 조지로부터 청혼을 받았는데 양가 아버지와 할머니의 적극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들의 불화로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서둘러 루마니아의 왕세자와의 약혼이 발표된다.[5]

마리아와 그녀의 형제들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어머니가 공식 거주지인 클래런스 하우스 대신 선호했던 이스트웰 파크에서 보냈다. 마리아는 회고록에서 이스트웰을 다정하게 회상했다. 에든버러 공작은 영국 해군에서의 직책 때문에 자녀들의 삶에서 대부분 부재했고, 그들의 삶은 어머니에 의해 통제되었다. 마리아는 나중에 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의 머리색이 실제보다 훨씬 어두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공작은 집에 있을 때 종종 아이들과 놀아주며 많은 게임을 만들었다. 그녀의 모든 형제들 중에서 마리아는 1살 어린 여동생 빅토리아 멜리타와 가장 가까웠지만, 모두가 체격 때문에 언니라고 믿었고, 이는 공주들을 실망시켰다. 에든버러 아이들은 모두 성공회 신앙으로 세례를 받고 자랐는데, 이는 그들의 러시아 정교회 어머니를 화나게 했다.

에든버러 공작 부인은 세대 분리의 아이디어를 지지했고, 마리아는 어머니가 결코 두 사람이 "마치 동등한 자처럼" 대화를 나누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매우 후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 부인은 독립적이고 교양 있으며 자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마리아와 그녀의 여동생들은 프랑스어를 배웠지만, 그들은 프랑스어를 싫어했고 거의 말하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공작 부인은 딸들의 교육을 소홀히 했고, 그들을 그다지 똑똑하거나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재능을 물려받은 회화와 그림 분야에서 소녀들은 단지 "평범한 교육"을 받았다. 에든버러 공작 부부는 이스트웰 파크에서 자주 왕족을 맞이하여 거의 매일 아침 식사에 초대했으며, 1885년 마리아와 빅토리아 멜리타는 숙모 베아트리체와 바텐베르크의 헨리 왕자의 결혼식에서 신부 들러리 역할을 했다.[6] 마리아의 놀이 친구들 중에는 그녀의 외사촌 니콜라이 대공(별명 "니키"), 게오르기(별명 "조지"), 크세니아 대공녀가 있었고, 그들의 형제들 미하일(별명 "미샤")와 올가는 에든버러 자매들에게는 너무 어렸다. 다른 놀이 친구들로는 마리아의 외삼촌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아이들이 있었다.

1886년, 마리아가 11살이었을 때, 에든버러 공작은 지중해 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가족은 몰타의 산 안토니오 궁전에 거주하게 되었다.[7] 마리아는 나중에 몰타에서의 시간을 "내 존재의 가장 행복한 기억"이라고 회상했다. 마리아는 몰타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발견했는데, 그 사람은 에든버러 공작의 배 선장인 모리스 보크였고, 마리아는 그를 "디어 캡틴"이라고 불렀다. 보크가 그녀보다 그녀의 여동생 중 한 명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 마리아는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공작 부부는 몰타에서 큰 사랑을 받았고, 산 안토니오 궁전은 자주 손님으로 가득 찼다. 마리아와 빅토리아 멜리타는 어머니로부터 흰 말을 받았고, 토요일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지역 경마장에 갔다. 몰타에서의 첫 해 동안, 프랑스인 가정교사가 공주들의 교육을 감독했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다음 해에 훨씬 더 젊은 독일 여성으로 교체되었다. 산 안토니오에서 에든버러 공작 부부는 항상 웨일스 공 조지 왕자를 위한 방을 마련해 놓았는데, 그는 웨일스 공의 둘째 아들이었고, 해군에 있었다. 조지는 세 명의 에든버러 언니들을 "가장 사랑하는 세 명"이라고 불렀지만, 마리아를 가장 좋아했다.

한편, 에든버러 공작은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에른스트 2세 공작의 자녀가 없는 삼촌이 웨일스 공이 공작령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면서 추정 상속자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가족은 1889년 코부르크로 이주했다.[7] 마리아는 나중에 이 순간을 "진정으로 구름 없는 절대적인 행복과 기쁨의 삶, 실망이나 망상이 없고 조화롭지 않은 음이 없는 삶의 끝"으로 보게 되었다. 친독일적인 공작 부인은 딸들을 위해 독일인 가정교사를 고용하고, 수수한 옷을 사주고 심지어 루터교 신앙으로 서품을 받게 했다. 가족은 여름을 로제나우 성에서 보냈다. 에른스트 공작은 마리아에 의해 "특이한 점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었고, 그의 궁정은 당시 다른 독일 궁정보다 덜 엄격했다. 코부르크에서 공주들의 교육이 확대되었다. 안나 메싱과 헬퍼리히 부인이 각각 가르치는 그림과 음악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목요일과 일요일에는 마리아와 그녀의 자매들이 코부르크 극장에 갔는데, 이는 그들이 매우 즐거워하는 경험이었다. 마리아와 빅토리아 멜리타는 종종 오빠의 친구들을 관찰하고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코멘트를 했는데, 마리아는 이것이 오빠가 있는 소녀들의 삶에서 불가피한 측면이라고 믿었다. 소녀들이 코부르크에서 즐겼던 또 다른 활동은 어머니가 주최하는 겨울 파티에 참석하여 스케이트를 타고 아이스하키와 같은 다양한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1893년 결혼 후 페르디난트와 루마니아의 마리 왕세자비


마리는 "사랑스러운 젊은 여성"으로 성장하여 "반짝이는 푸른 눈과 비단결 같은 금발"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1892년에 왕위 계승 서열 2위가 된 웨일스 공 조지 왕자를 포함한 여러 왕족 남성들의 구애를 받았다. 빅토리아 여왕, 웨일스 공, 에든버러 공작은 모두 찬성했지만, 웨일스 공비와 에든버러 공작 부인은 반대했다. 웨일스 공비는 그 가족의 친독일적 정서를 싫어했고, 에든버러 공작 부인은 자신의 딸이 싫어하는 영국에 머무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또한 덴마크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독일의 작은 공자였던 웨일스 공비가 의전 서열에서 자신보다 높다는 사실도 싫어했다. 에든버러 공작 부인은 또한 그녀의 모국인 러시아 정교회에서 허용되지 않는 사촌 간의 결혼에 반대했다. 따라서 조지가 그녀에게 청혼했을 때, 마리는 그에게 결혼은 불가능하며 그는 그녀의 "사랑하는 친구"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알렸다. 빅토리아 여왕은 나중에 "조지는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미시를 잃었다"고 언급할 것이다.

이 즈음에 루마니아 국왕 카롤 1세는 왕위 계승을 확보하고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가문의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조카 페르디난트 왕세자에게 적합한 신부를 찾고 있었다. 베사라비아에 대한 통제 문제에 대한 러시아와 루마니아 간의 긴장을 완화하려는 생각에 동기 부여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에든버러 공작 부인은 마리가 페르디난트를 만나도록 제안했다. 마리와 페르디난트는 사교 행사 만찬에서 처음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은 독일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그를 수줍어하지만 상냥하다고 느꼈고, 두 번째 만남도 마찬가지로 잘 진행되었다. 두 사람이 정식으로 약혼하자 빅토리아 여왕은 또 다른 손녀인 헤센-다름슈타트의 빅토리아 공주에게 "페르디난트는 멋지고 부모님은 매력적이지만 나라는 매우 불안정하고 부쿠레슈티의 사회 부도덕은 끔찍하다. 물론 미시가 10월 말까지 17세가 되지 않으므로 결혼은 얼마 동안 연기될 것이다!"라고 썼다. 마리의 고모인 독일 황후 프리드리히는 딸 그리스의 조피 왕세자비에게 "미시는 지금까지 매우 기뻐하지만 불쌍한 아이는 너무 어리기 때문에 그녀 앞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고 썼다. 1892년 말, 카롤 국왕은 에든버러 공작과 빅토리아 여왕을 만나기 위해 런던을 방문했고, 결국 결혼에 동의하고 그에게 가터 기사를 임명했다.

1893년 1월 10일, 마리와 페르디난드는 지그마링겐 성에서 세 번의 결혼식을 올렸다. 하나는 시민 결혼식, 하나는 가톨릭(페르디난드의 종교), 다른 하나는 성공회였다. 시민 결혼식은 성의 붉은 홀에서 독일 황제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결혼 증명서에 서명하는 첫 번째 증인으로 참석하여 카를 폰 벤델이 거행했다. 4시에 가톨릭 결혼식이 타운 교회에서 열렸고, 마리는 아버지의 인도를 받아 제단으로 갔다. 성공회 결혼식은 더 소박했으며 성의 한 방에서 거행되었다.[8] 카롤 국왕이 부부에게 ''"호니그타크"''(하루의 신혼여행)를 허락했지만, 마리와 페르디난트는 바이에른의 크라우헨비에스 성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시골로 떠났고, 에서 잠시 멈추면서 여정을 방해받았고, 그곳에서 황제 프란츠 요제프를 방문했다. 오스트리아와 루마니아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방문은 트란실바니아 각서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이루어졌다), 부부의 방문은 짧았고, 그들은 밤에 기차로 트란실바니아를 횡단한 후 프레디알 국경 마을에 도착했다. 마리는 더 개인적인 군주제를 갈망하던 루마니아 국민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3. 결혼 (1893년)

1893년, 아버지 알프레드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되기 몇 달 전, 마리는 루마니아 왕세자 페르디난드(페르디난드, 카롤 1세의 조카)와 결혼했다. 마리와 페르디난드 사이에는 3남 3녀가 태어났지만,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마리의 오랜 펜팔 친구이자 미국인 무용가 로이 풀러는 마리가 남편에 대해 "싫어하는 남자. 혐오감이 더해"라고 언급했다고 나중에 폭로했다.

장남 카롤과 장녀 엘리자베타의 아버지는 페르디난드였지만, 마리아 공주와 니콜라에 왕자의 아버지는 불분명하며, 러시아 대공 보리스 블라디미로비치[75]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셋째 딸 일레아나와 셋째 아들 미르체아는 마리가 오랜 연인이었던 슈티르베이 공[76]과 만난 후 태어났다. 사학자들은 일레아나의 친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고, 미르체아는 슈티르베이 공의 아들이라고 거의 확신한다(부모 모두 푸른 눈이었지만, 미르체아는 갈색 눈이었다).

1914년 카롤 1세가 사망하면서 페르디난드와 마리아는 왕과 왕비가 되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대관식은 1922년까지 연기되었다.

3. 1. 루마니아 왕세자비 시절 (1893년-1914년)

페르디난드 왕세자와 마리아의 결혼 생활은 처음에는 순탄치 않았다. 마리아는 훗날 남편에게 "우리가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데 우리의 젊음을 너무나 낭비해야 했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에요!"라고 말하곤 했다.[7] 점차 부부의 관계는 정중한 우정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마리아는 남편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왕으로서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을 표했으며, 페르디난드는 그녀가 자신보다 세상을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를 존경했다.[8] 결국 마리아는 자신과 페르디난트가 "최고의 동료이자 가장 충실한 동반자이지만, 우리의 삶은 특정한 문제에서만 얽혀 있다"고 믿게 되었다.[9] 페르디난트는 군사 행진 때 마리아의 존재를 즐겼고, 그 결과 그녀는 이와 같은 행사에 자주 초대되었다.[10]

마리아는 결혼 9개월 만인 1893년 10월 15일에 첫 아이 카롤 왕자를 낳았다. 마리아는 출산의 고통을 덜기 위해 클로로포름 사용을 요청했지만, 의사들은 "여자는 이브의 죄에 대한 고통을 치러야 한다"고 믿으며 주저했다. 마리아의 어머니와 빅토리아 여왕이 주장한 후, 카롤 왕은 결국 조카며느리에게 약물 사용을 허락했다.[11] 마리아는 첫 아들의 출산에서 큰 기쁨을 얻지 못했고, 나중에 "벽을 향해 [그녀의] 머리를 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고 적었다.[12] 마찬가지로, 마리아는 엘리자베스로부터 출산이 "[마리아의] 삶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지만, 1894년 둘째 아이 엘리자베스 공주를 낳을 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만을 느낄 수 있었다.[13] 루마니아 생활에 익숙해진 후, 마리아는 마리아 공주(1900–61, 가족 내 별명 "미뇽"), 니콜라에 왕자 (1903–78, 별명 "니키"),[14] 일레아나 공주 (1909–91)와 미르체아 왕자 (1913–16)와 같이 자녀의 출생을 기뻐하기 시작했다.[15]

루마니아에서 찍은 첫 번째 사진 속의 루마니아의 마리아 왕세자빈


카롤 왕과 엘리자베스 여왕은 즉시 카롤 왕자와 엘리자베스 공주를 마리아의 보살핌에서 빼앗아 젊은 부모에게서 양육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다.[16] 마리아는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때로는 아이들을 꾸짖는 것조차 어려워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다.[17] 그 결과 왕실 아이들은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지만, 학교에 다니지는 않았다. 왕실은 교실 교육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이가 들면서 심각한 성격 결함을 갖게 되었다.[18] 총리 이온 G. 두카는 훗날 "카롤 왕이 루마니아에 자신을 계승할 준비가 전혀 안 된 상속자들을 남겨두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고 썼다.[19]

마리아와 오랫동안 서신을 주고받았던 측근이자 미국인 무용가 로이 풀러는 "정말 싫어하는 남자. 혐오감이 커진다"라고 마리아가 남편에 대해 언급했었다고 훗날 폭로했다.

장남 카롤과 장녀 엘리자베타의 아버지는 확실히 페르디난드였지만, 마리아 공주와 니콜라 왕자의 아버지는 불분명하며, 러시아 대공 보리스 블라디미로비치[20]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셋째 딸 일레아나와 셋째 아들 미르체아는 마리아가 오랜 연인이었던 슈티르베이 공[21]과 만난 후 태어났다. 역사가들은 일레아나 공주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미르체아 왕자는 연인의 아들이라고 한다(부모 모두 파란 눈을 가졌지만, 미르체아는 갈색 눈이었다).

4. 루마니아 왕비 (1914년–1927년)

1893년, 마리는 루마니아 왕세자 페르디난드(카롤 1세의 조카)와 결혼했다. 결혼 생활은 불행했지만,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카롤과 장녀 엘리자베타는 페르디난드의 자녀로 여겨지지만, 다른 자녀들의 친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특히 셋째 딸 일레아나와 막내 미르체아는 마리의 오랜 연인 슈티르베이 공의 자녀로 추정된다.[76]

1914년 카롤 1세가 사망하면서 페르디난드와 마리는 루마니아의 왕과 왕비가 되었다. 마리는 루마니아에 대한 강한 애정을 품게 되었고, 남편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적십자사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며 부상병 간호에 힘썼다. 1917년 국토의 절반이 독일군에 점령당했을 때, 마리는 루마니아군이 독자적으로 독일, 러시아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미국의 지원을 얻는 데 기여했다.

전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마리는 "대 루마니아" 실현을 위한 루마니아의 대표로 활약했다. 국제 언론은 "전사 여왕" 마리의 등장을 열렬히 환영했고,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 베사라비아, 부코비나 등을 포함하여 국토를 크게 확장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4. 1.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1918년)

1914년 10월 11일, 마리와 페르디난트는 대의원 의회에서 왕과 여왕으로 추대되었다.[12] 마리의 절친한 친구였던 안네 마리 칼리마치 공주는 "마리는 왕세자빈으로서 인기가 있었지만, 여왕이 되면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라고 썼다.[13] 마리는 남편과 궁정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역사가 A. L. 이스터먼은 "루마니아를 통치한 것은 페르디난트가 아니라 마리였다"라고 썼다.[14] 페르디난트 즉위 당시 정부는 자유당 총리 이온 I. C. 브러티아누가 이끌고 있었다. 페르디난트와 마리는 궁정에 많은 변화를 주지 않고 사람들이 강요 없이 한 정권에서 다른 정권으로의 전환을 받아들이도록 공동으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카롤과 엘리자베스의 하인들 중 특히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도 자리를 지켰다.[15] 브러티아누의 도움으로 마리는 페르디난트에게 전쟁 참전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유럽의 여러 군주 친척들에게 연락하여 루마니아가 전쟁에 참여할 경우를 대비해 최상의 조건을 협상했다.[7] 마리는 영국 혈통 때문에 삼국 협상 (러시아, 프랑스, 영국)과의 동맹을 선호했다. 중립은 위험이 따랐고, 협상국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루마니아가 러시아에 대한 잠재적 공격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16]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 병원을 방문한 마리, 1917


결국 마리는 페르디난트에게 분명한 어조로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고, 루마니아 주재 프랑스 장관 오귀스트 펠릭스 드 보포일, 생토렐 백작은 마리가 프랑스에 두 번 동맹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한 번은 출생으로, 한 번은 마음으로.[17] 페르디난트는 마리의 간청에 굴복했고, 1916년 8월 17일 협상국과 조약을 체결했다. 8월 27일 루마니아는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를 했다.[18] 생토렐은 마리가 "다른 사람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전쟁을 받아들였다"라고 썼다.[19] 자녀들에게 자국이 전쟁에 참전했음을 알린 후, 페르디난트와 마리는 독일인 하인들을 해고했는데, 그들은 일종의 "전쟁 포로"로만 남아 있을 수 있었다.[12] 전쟁 초기에 마리는 루마니아 적십자사를 지원하는 데 참여했고 매일 병원을 방문했다.[20] 적대 행위 첫 달 동안 루마니아는 투르투카이아 전투와 같이 자국 영토에서 일어난 전투를 포함하여 최소 9번의 전투를 벌였다.[21]

1916년 11월 2일, 마리의 막내아들 미르체아 왕자가 장티푸스를 앓다가 부프테아에서 사망했다. 마리는 비통해하며 일기에 "무엇이 같을 수 있을까?"라고 썼다.[13] 부쿠레슈티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함락된 후, 1916년 12월 왕실은 서부 몰다비아 지역의 수도인 이아시로 옮겨졌다.[7] 그곳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군 병원에서 간호사 역할을 했다. 마리는 매일 간호사 복장을 하고 이아시 기차역으로 가서 부상병들을 맞이한 다음 병원으로 수송했다.[22]

알바율리아 대국민 회의, 1918


1917년 11월 초 러시아 혁명이 종결되고 볼셰비키가 승리한 후, 루마니아는 외교관 프랭크 래티건의 말처럼 "모든 면에서 적에게 둘러싸여 동맹국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섬"이 되었다.[23] 그 직후 페르디난트는 1917년 12월 9일 포크샤니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24] 마리는 이 조약을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브러티아누와 슈테르베이는 더 많은 시간을 얻기 위한 필요한 조치라고 믿었다. 그 후의 사건들은 마리가 옳았음을 증명할 것이다.[25] 1918년, 마리는 부쿠레슈티 조약 체결에 격렬하게 반대하여 "진정한 루마니아의 유일한 남자"라는 묘사를 낳았다.[26] 독일과의 휴전 (1918년 11월 11일)은 유럽의 전투를 종식시키고 전쟁을 종식시켰다.

4. 2. 파리 강화 회의 (1919년)

1919년 파리에서 두 딸과 함께 있는 마리 여왕


페르디난트가 부쿠레슈티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고, 루마니아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추축국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파리 강화 회의에서 승전국 중 하나로 자리를 보장받았다. 공식 대표단은 브러티아누가 이끌었다.[15] 마리는 전쟁 중 보여준 대담함으로 프랑스 국민들에게 즉시 인기를 얻었다.[16] 마리를 만난 조르주 클레망소는 "나는 당신의 총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그녀는 "그렇다면 저를 더 마음에 들어하실지도 모르죠"라고 대답했다. 클레망소는 마리의 말대로 그녀를 더 마음에 들어했으며,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은 마리의 도착 후 클레망소의 루마니아에 대한 태도가 변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파리에서 일주일을 머무른 후, 마리는 조지 5세 국왕과 메리 왕비의 초대를 받아 영국 해협을 건너 버킹엄 궁전에 머물렀다. 루마니아에 최대한의 호의를 얻고자 했던 마리는 커존 경, 윈스턴 처칠, 애스터 자작 2세 월도프와 애스터 자작 부인 낸시를 포함한 많은 중요한 정치 인물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녀는 또한 당시 이튼 칼리지에 다니던 아들 니키를 자주 방문했다. 마리는 오랜만에 영국으로 돌아온 것에 기뻐하며 "런던에 도착하여 조지와 메이에게 역에서 인사를 받았을 때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고 썼다.

영국 방문을 마친 후, 마리는 파리로 돌아왔고, 그곳 사람들은 몇 주 전처럼 그녀의 도착에 열광했다. 군중들은 종종 그녀 주변에 모여 "이국적인" 루마니아 여왕을 보려고 기다렸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마리에게 감명을 받지 못했고, 부적절하다고 여겨진 성 관계에 관한 러시아 법률에 대한 그녀의 언급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리는 모든 장관들을 물리고 스스로 협상을 주도하여 많은 관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에 대해 그녀는 나중에 "걱정 마세요, 여러분 모두는 나의 미덕의 결점까지도 나를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마리는 루마니아의 구호를 위해 많은 물품을 가지고 파리를 떠났고, 그해 말 회의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대 루마니아의 국제적 인정을 가져왔다. 이로써 페르디난트와 마리의 왕국 영토는 두 배로 늘어나고 인구는 천만 명이 증가했다. 잠시 부쿠레슈티에 살았던 러시아의 마리아 파블로브나 대공녀는 "그녀의 매력, 아름다움, 재치로 [마리]는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4. 3. 대관식 (1922년)

1914년 10월 11일, 페르디난드와 마리는 대의원 의회에서 왕과 여왕으로 추대되었다.[7] 마리의 절친한 친구였던 안네 마리 칼리마치 공주는 "마리는 왕세자빈으로서 인기가 있었지만, 여왕이 되면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라고 썼다.[7] 마리는 남편과 궁정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역사가 A. L. 이스터먼은 "루마니아를 통치한 것은 [페르디난트]가 아니라 마리였다"라고 썼다.[7]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이들의 대관식은 1922년까지 연기되었다. 대관식 장소는 알바율리아였는데, 이곳은 중세 시대의 중요한 요새였으며 1599년 미하이 용감공이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로 선포되어 왈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를 개인 연합으로 묶었던 곳이다.[18] 1921년부터 1922년까지 대관 대성당으로 정교회 대성당이 건립되었다.[18] 대관식을 위해 특별히 정교한 보석과 의상이 제작되었다. 마리아의 왕관은 화가 코스틴 페트레스쿠가 디자인했으며, 파리 보석상 팔리즈가 아르 누보 스타일로 제작했다. 왕관은 16세기 왈라키아 통치자 네아고에 바사라브의 아내인 밀리카 데스피나의 왕관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트란실바니아 금으로 완전히 만들어졌다. 왕관 측면에는 두 개의 펜던트가 있었는데, 하나는 루마니아 왕실 문장을, 다른 하나는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자신의 문장으로 사용했던 에든버러 공작의 문장을 담고 있었다. 왕관은 약 65,000 프랑스 프랑의 비용이 들었으며, 특별법을 통해 국가가 지불했다.[19]

왕실 부부의 대관식에는 마리아의 여동생 "베이비 비", 요크 공작, 프랑스 군사 루마니아 파견단을 이끌었던 프랑스 장군 막심 웨이강과 앙리 마티아스 베르텔로가 참석했다. 이 의식은 전 루마니아 대주교 미론 크리스테아가 집전했지만, 로마 가톨릭 신자인 페르디난드가 동방 정교회 성직자에게서 대관을 받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성당 내부에서 거행되지는 않았다. 페르디난드는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쓴 후,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은 마리아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곧 대 루마니아의 첫 번째 왕과 여왕이 즉위했음을 알리는 신호로 대포가 발사되었다. 1918년에 연합이 선포된 같은 방에서 축제가 열렸고, 2만 명 이상의 농민들에게 구운 스테이크가 제공되었다. 다음 날, 페르디난드와 마리아는 승리의 기세로 부쿠레슈티에 입성했다.[20] 이 대관식의 화려함은 이후 마리아의 연극적 성격의 증거로 인용되었다.[20]

4. 4. 외교 활동

페르디난드가 부쿠레슈티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루마니아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추축국에 적대적이었고, 파리 강화 회의에서 승전국들 중 하나로 자리를 보장받았다.[15] 공식 대표단은 총리 임기를 세 번째 시작한 브러티아누가 이끌었다. 브러티아누의 완고함은 페르디난드의 부쿠레슈티 조약 수락을 간과하기 꺼렸던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와 결합하여 공개적인 갈등을 초래했고, 루마니아 대표단은 "빅 포"의 실망 속에서 파리를 떠났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생토렐은 마리를 대신 회의에 보내는 것을 제안했고, 여왕은 그 제안에 기뻐했다.

마리는 1919년 3월 6일 파리에 도착했다.[15] 그녀는 전쟁 중 그녀의 대담함 때문에 즉시 프랑스 국민들에게 인기를 얻었다.[16] 마리를 만난 클레망소는 그녀에게 "나는 당신의 총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그녀는 "그렇다면 저를 더 마음에 들어하실지도 모르죠"라고 대답했다. 클레망소는 그랬고, 레이몽 푸앵카레 대통령은 마리의 도착 후 클레망소의 루마니아에 대한 태도가 변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파리에서 일주일을 머무른 후, 마리는 조지 5세 국왕과 메리 왕비의 초대를 받아 영국 해협을 건너 버킹엄 궁전에 머물렀다. 루마니아에 최대한의 호의를 얻고자 했던 마리는 당시 커존 경, 윈스턴 처칠, 애스터 자작 2세 월도프와 애스터 자작 부인 낸시를 포함한 많은 중요한 정치 인물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녀는 또한 당시 이튼 칼리지에서 학교에 다니던 아들 니키를 자주 방문했다. 마리는 오랜 시간 후에 영국으로 돌아온 것에 기뻐하며 "런던에 도착하여 조지와 메이에게 역에서 인사를 받았을 때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고 썼다.

영국 방문을 마친 후, 마리는 파리로 돌아왔고, 그곳 사람들은 몇 주 전처럼 그녀의 도착에 열광했다. 군중들은 종종 그녀 주변에 모여, "이국적인" 루마니아 여왕을 보려고 기다렸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마리에게 감명을 받지 못했고, 부적절하다고 여겨진 성 관계에 관한 러시아 법률에 대한 그녀의 언급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리는 모든 장관들을 물리고 스스로 협상을 주도하여 많은 관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에 대해 그녀는 나중에 "걱정 마세요, 여러분 모두는 나의 미덕의 결점까지도 나를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마리는 루마니아의 구호를 위해 많은 물품을 가지고 파리를 떠났고, 그해 말 회의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대 루마니아의 국제적 인정을 가져왔고, 페르디난트와 마리의 왕국 영토를 295000km2로 두 배로 늘리고 인구를 천만 명 증가시켰다. 이것은 잠시 부쿠레슈티에 살았던 러시아의 마리아 파블로브나 대공녀가 "그녀의 매력, 아름다움, 재치로 [마리]는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었다"고 결론짓게 했다.

5. 미망인 시절 (1927년–1938년)

콘스탄틴 파스칼리가 그린 마리 여왕의 초상, 1920년대 초


1927년 남편 페르디난트 1세가 사망한 후, 마리아는 루마니아에 남아 저술 활동과 회고록 집필에 힘썼다. 엘리사베타가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2세와, 미뇽이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와 결혼하는 등 자녀들의 혼사를 통해 왕가의 입지를 다졌다.

1924년,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영국을 순방하며 외교 활동을 펼쳤다. 영국에서 조지 5세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여왕으로서 내 조국으로 돌아와… 열정적으로 환영받는 날"이라며 감격했다.[17]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루마니아의 국제적 명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순방이었으며, 국제 연맹 본부에 들어간 최초의 왕족이 되었다.[17]

하지만 장남 카롤 2세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마그다 루페스쿠와의 관계로 인해 어머니의 충고를 무시했고, 이는 결국 두 사람 사이의 단절로 이어졌다.

만년에 마리아는 바하이 신앙으로 개종했다. 바하이교의 인류 통합 사상에 공감하여 쇼기 에펜디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신앙심을 표현했고, 바하올라예수무함마드와 같은 예언자로 칭송했다.[27][28]

1938년,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수도원에 남편 옆에 묻혔다. 심장은 유언에 따라 발치크 궁전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가, 1940년 남도브루자가 불가리아에 반환되면서 브란 성으로 옮겨졌다.[33]

5. 1. 섭정 시기 (1927년-1930년)

마리아와 헬레네, 미하이, 1927–1930


카롤 2세는 1926년 1월 5일 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의 왕위 계승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아들 미하이 왕자에 대한 모든 부모의 권리를 포기하면서 왕위 계승 위기를 촉발시켰다. 임시 섭정 법안이 통과되어 니콜라에 왕자, 정교회 총대주교 미론 크리스테아, 대법원장 게오르게 부즈두간으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가 구성되었다.[23] 그러나 마리아와 페르디난트 1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획득한 영토가 주변 국가에 의해 되찾아지고 정치적 혼란이 내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섭정을 받더라도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나라를 맡기는 것을 꺼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페르디난트 1세의 죽음이 임박해 보였다. 그는 장암을 앓고 있었고, 1927년 4월에는 죽음에 가까워져 가톨릭 교회의 종부성사를 받았다. 페르디난드 1세는 1927년 7월 20일 마리아의 품에서 사망했다. 마리아는 나중에 "'나는 너무 피곤하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었고, 한 시간 뒤 그는 내 품에서 조용히 누워 있었고, 나는 적어도 '그'를 위해 신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진정한 휴식이었다."라고 썼다.

미하이 1세는 페르디난트 1세가 죽자 자동으로 왕위를 계승했고, 섭정 위원회는 군주의 역할을 맡았다. 1928년 5월, 마그다 루페스쿠와 해외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던 카롤 2세는 제1대 로더미어 자작의 도움을 받아 루마니아로 돌아오려 했다. 그는 영국 당국에 의해 저지당했고, 영국에서 추방되었다. 격분한 마리아는 이미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던 아들을 대신하여 조지 5세에게 공식 사과를 보냈다. 카롤 2세는 1928년 6월 21일, 성격의 불일치를 이유로 헬레네 공주와 이혼했다.[24]

미하이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마리아의 인기는 심각하게 영향을 받았고, 1929년 섭정 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 후 그녀는 언론과 헬레네 공주에게조차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시기에 일레아나 공주의 결혼에 대한 수많은 소문이 있었다. 불가리아 차르나 아스투리아스 공과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후, 그녀는 결국 1930년 초 마이너 독일 귀족인 호흐베르크 백작 알렉산더와 약혼했다.[25] 그러나 이 약혼은 오래가지 못했고, 마리아는 막내딸을 위한 정치적인 결혼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1931년 오스트리아 대공 안톤과 결혼시켰다.

5. 2. 카롤 2세의 통치 (1930년-1938년)

1930년 6월 6일, 카롤은 부쿠레슈티에 도착하여 의회로 향했고, 1927년의 왕위 계승법은 무효가 되었다. 그리하여 카롤은 아들 미하이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카롤 2세가 되었다. 해외에 있던 마리아는 카롤의 귀환 소식을 듣고 안도했다. 그녀는 나라의 방향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고, 카롤의 귀환을 탕자의 귀환으로 여겼다. 그러나 부쿠레슈티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23] 카롤은 헬레네를 다시 데려오라는 어머니의 조언을 거부했고, 통치 기간 동안 마리아의 조언을 구하지 않아 이미 존재하던 모자간의 갈등이 완전히 심화되었다.

절망감에 빠지고 믿음을 거의 잃어버린 마리아는 바하이교의 종교적 가르침에 의지했다. 그녀는 종교적으로 분열된 자신의 가족을 고려하여, 특히 하나의 신앙 아래 인류의 통일이라는 사상에 매료되었다. 마사 루트를 통해 교리를 접한 마리아는[26]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쇼기 에펜디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바하이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또한, 그녀는 바하올라예수무함마드와 유사한 예언자로 묘사하며 그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여러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서신 교환을 통해 바하이교 신자들은 그녀를 종교 개종을 한 최초의 왕족으로 여긴다.[27][28] 전기 작가 한나 파쿨라는 마리아가 "바하올라의 책과 가르침과 함께 집에서 더 나은 기도를 드린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고 언급했다. 1976년, 윌리엄 맥엘위 밀러는 종교에 반대하는 논쟁적인 책을 출판했고,[29] 이 책에는 1970년 마리아의 딸 일레아나 공주가 그러한 개종을 부인하는 내용의 편지를 발췌하여 수록했다.[30]

1931년, 니콜라스 왕자는 이혼녀인 요아나 돌레티와 도피 결혼을 했다. 마리아는 아들의 행동을 강력히 반대했고 돌레티가 아들이 어머니와 연락하지 못하도록 반복적으로 시도하는 것에 상처받았다. 한동안 아들의 삶에 나타난 여자들을 탓했지만, 아들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카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마그다 루페스쿠를 만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고 지속적으로 거절했다. 말년까지 마리아는 루페스쿠의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카롤의 정부가 전국적으로 미움을 받으면서, 국왕에 대한 반대가 나타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러한 반대는 베니토 무솔리니아돌프 히틀러의 지원을 받는 철위대의 형태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카롤이 이온 두카에게 도움을 요청한 후, 철위대는 1933년 12월 두카를 암살했다. 두카가 사망한 후, 카롤의 인기는 급락했고 연례 독립 기념 퍼레이드에서 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를 피하기 위해 그는 대신 마리아가 퍼레이드에 참석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공식 석상 등장이 되었다.

퍼레이드 이후, 카롤은 어머니가 루마니아인들 사이에서 누리는 인기를 훼손하고 그녀를 나라 밖으로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에 따르지 않고, 대신 두 곳 중 한 곳으로 물러났다. 첫 번째는 브란 성이었다. 남부 트란실바니아의 브라쇼브 근처에 위치하며, 1920년 고마워하는 지역 관리들이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고, 그녀는 이후 7년 동안 성을 복원했다.[31] 다른 곳은 발치크였는데, 그녀는 그곳에 발치크 궁전과 "스텔라 마리스"라는 작은 예배당을 짓고 정원을 가꾸었다. 그녀는 또한 오스트리아에서 일레아나와 그녀의 아이들을 방문했다. 일레아나는 카롤로부터 루마니아를 방문하라는 허가를 거의 받지 못했고, 이것은 마리아를 매우 짜증나게 했다. 그녀는 또한 딸 미뇽과 사위인 알렉산더 국왕과 함께 베오그라드에서 시간을 보냈다. 1934년, 마리아는 다시 영국을 방문했다.

5. 3. 바하이 신앙

절망감에 빠지고 믿음을 거의 잃어버린 마리아는 "매우 매력적"이라고 여긴 바하이교의 종교적 가르침에 의지했다.[26] 그녀는 종교적으로 분열된 자신의 가족을 고려하여, 특히 하나의 신앙 아래 인류의 통일이라는 사상에 매료되었다. 마사 루트를 통해 교리를 접한 마리아는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쇼기 에펜디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바하이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또한, 그녀는 바하올라를 예수나 무함마드와 유사한 예언자로 묘사하며 그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여러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서신 교환을 통해 바하이교 신자들은 그녀를 종교 개종을 한 최초의 왕족으로 여긴다.[27][28] 전기 작가 한나 파쿨라는 마리아가 "바하올라의 책과 가르침과 함께 집에서 더 나은 기도를 드린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고 언급했다. 1976년, 윌리엄 맥엘위 밀러는 종교에 반대하는 논쟁적인 책을 출판했고,[29] 이 책에는 1970년 마리아의 딸 일레아나 공주가 그러한 개종을 부인하는 내용의 편지를 발췌하여 수록했다.[30]

5. 4. 질병과 죽음

마리아는 남편 페르디난트 1세가 사망한 후 루마니아에 남아 저술 활동과 회고록 집필에 전념했다. 1938년에 사망하여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수도원에 남편 옆에 묻혔다. 마리아의 유언에 따라 그녀의 심장은 발치크 궁전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가, 1940년 남부 도브루자불가리아에 반환되면서 브란 성으로 옮겨졌다.[33]

말년에 마리아는 바하이교로 개종했다.[26] 종교 지도자 쇼기 에펜디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신앙심을 표현했고, 바하올라예수무함마드와 같은 예언자로 칭송하며 그의 가르침을 널리 알렸다.[27][28]

마리아, 1936년 필립 드 라즐로의 그림


마리아의 무덤,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수도원


1937년 여름, 마리아는 병에 걸렸다.[7] 공식적인 진단은 간경변이었지만, 주치의는 췌장암으로 진단했다.[7] 마리아는 술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비알코올성 간경변일 것이라고 말했다. 1938년 2월, 이탈리아의 요양소에서 니콜라스 왕자와 그의 아내를 만나 그들을 용서했다. 이후 드레스덴의 요양소로 옮겨졌고, 루마니아에서 죽기를 원해 카롤 2세가 기차로 루마니아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여 펠리쇼르 성으로 옮겨졌다.

마리아는 1938년 7월 18일 오후 5시 38분에 사망했다. 그녀의 시신은 부쿠레슈티 코트로체니 궁전에 안치되었고, 3일간의 안치 기간 후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6. 유산

마리아는 남편 페르디난드 1세가 사망한 후 루마니아에 남아 저술 및 회고록 집필에 전념했다. 1938년에 사망하여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수도원에 남편과 함께 묻혔다. 마리아의 유언에 따라 심장은 바르치크 궁전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가, 1940년 남도브루자가 불가리아에 반환되면서 브란 성으로 옮겨졌다.[34]

마리아는 생전에 34권의 책과 단편 소설을 출판했으며,[34] 엘리자베스 여왕의 권유와 카롤 1세의 회고록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표작으로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자서전 ''나의 삶의 이야기''(1934-1935)가 있다.

1924년 8월 4일 ''타임'' 표지의 마리 여왕


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공주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졌으며,[36] 승마, 글쓰기, 그림, 조각, 춤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다.[37] 그러나 그녀의 인기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중앙 동맹국과[38] 1947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 이후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비방 캠페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마리아를 묘사한 메달


루마니아 혁명 직전 몇 년 동안에는 마리아의 공로가 재조명되기도 했다.[44] 루마니아에서 "부상자들의 어머니"로 불리는 마리아는[40] "Soldier Queen", "Mamma Regina" 등으로도 기억된다.[41] 콘스탄틴 아르게토이아누는 그녀를 "루마니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했으며,[42] 루마니아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1917년에 마리아 여왕 십자 훈장을 제정했다.[43]

켄트주 애쉬포드 이스트웰 공원에서 마리아 여왕의 탄생을 기념하는 동상

6. 1. 저술 활동

마리아는 남편 페르디난드 1세가 사망한 후 루마니아에 남아 저술 활동과 회고록 집필에 전념했다. 1938년에 사망하여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수도원에 남편과 함께 묻혔다. 마리아의 유언에 따라 심장은 바르치크 궁전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가, 1940년 남도브루자가 불가리아에 반환되면서 브란 성으로 옮겨졌다.[34]

마리아는 생전에 34권의 책과 단편 소설을 출판했다.[34] 엘리자베스 여왕의 권유와 카롤 1세의 회고록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12년 부쿠레슈티에서 첫 작품인 ''생명의 백합''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은 영어로 쓰였지만 곧 루마니아어로 번역되었으며, 상징적인 등장인물이 나오는 동화이다. 1916년에는 ''나의 조국''을 런던과 파리에서 출판하여 루마니아에 대한 연합국의 지원을 호소했다.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자서전 ''나의 삶의 이야기''는 1934-1935년에 런던에서 세 권으로 출판되었다.[34]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서평을 받았는데, 울프는 왕족을 너무 친근하게 묘사한 점을 지적하면서도 "금빛 우리"에서 탈출하는 "왕족 동물"의 묘사를 높이 평가했다. 비평가 옥타브 슐루치우는 이 작품의 역사적 가치와 심리학적 통찰력을 강조했다.

마리아는 1916년 8월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전쟁 중과 이후 거의 매일 기록을 남겼다. 첫 번째 일기장은 1996년에 출판되었고,[35] 2006년부터 2014년 사이에 10권의 추가 일기장이 출판되었다.

마리아의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생명의 백합''(The Lily of Life) (1912)
  • ''꿈의 몽상가''(The Dreamer of Dreams) (1913)
  • ''일데림''(Ilderim) (1915)
  • ''사계. 한 남자의 삶에서''(Four Seasons. Out of a Man’s Life) (1915)
  • ''장난기 많은 여왕''(The Naughty Queen) (1916)
  • ''빛을 훔치는 자들. 전설''(The Stealers of Light. A legend) (1916)
  • ''나의 조국''(My Country) (1916); ''내가 사랑하는 나라: 망명자의 기억'' (The Country That I Love: An Exile's Memories)로 확대 (1925)
  • ''루마니아 어제와 오늘'', 위니프레드 고든(Winifred Gordon) (1918) [제1장 마리아 여왕 저술]
  • ''장난기 많은 킬딘의 이야기''(The Story of Naughty Kildeen) (1922)
  • ''루마니아에 대한 송가''(Ode to Roumania) (1923)
  • ''왜?: 갈망의 이야기''(Why?: A Story of Great Longing) (1923)
  • ''루마니아 여왕의 동화책''(The Queen of Roumania's Fairy Book) (1925)
  • ''산을 넘는 목소리: 이해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The Voice on the Mountain: A Story for Those Who Understand) (1926)
  • ''잃어버린 공주: 동화''(The Lost Princess: A Fairy Tale) (1927)
  • ''루마니아의 마법 인형''(The Magic Doll of Roumania) (1929)
  • ''나의 삶의 이야기''(The Story of My Life) (3권, 1934-1935)
  • ''가면''(Masks) (1937)
  • ''나의 삶의 후반부: 루마니아의 마리아 여왕의 잃어버린 일기''(Later Chapters of My Life: The Lost Journal of Queen Marie of Romania) (2004)
  • "뱀의 섬", ''더 레이디스 럼'', 1897년 3월
  • "비딘 포위전", ''더 레이디스 럼'', 1898년 7월
  • "룰라루", ''굿 하우스키핑'', 1925년 3월
  • "붉은 가슴 붉은배의 캐럴", ''레이디스 렐름'', 1903년 1월
  • "비잔틴 공주 노래" (1933)
  • "강이 말하는 것", ''레이디스 렐름'', 1899년 11월
  • "로맨틱 루마니아", ''토요일 이브닝 포스트'', 1918년 12월 7일
  • "여왕이 바라본 삶", 북아메리카 신문 연합, 1925년 6월
  •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왕", ''코스모폴리탄'', 1925년 9월
  • "50세를 앞둔 여왕의 은밀한 생각", ''코스모폴리탄'', 1925년 10월
  • "머리말", ''예술과 고고학'', 1926년 1월
  • "할머니의 궁정에서", ''맥콜스'', 1926년 3월
  • "미국에 대한 나의 인상", 북아메리카 신문 연합, 1926년 10월 21일 – 12월 4일 [14부 공동 기사]
  • "내 삶의 이야기", ''토요일 이브닝 포스트'', 1933년 12월 16일 - 1934년 2월 3일 [8부]
  • "황태자비로서의 나의 삶", ''토요일 이브닝 포스트'', 1934년 4월 14일 – 6월 16일 [8부; 5월 12일 6월 9일 제외]
  • "나의 임무: 1부. 파리에서", ''콘힐 매거진'', 1939년 10월
  • "나의 임무: 2부. 버킹엄 궁전에서", ''콘힐 매거진'', 1939년 11월
  • "나의 임무: 3부. 다시 파리에서", ''콘힐 매거진'', 1939년 12월
  • 헥터 볼리토 저, ''전기 작가의 노트''(1950) [마리아 여왕이 "미국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포함]
  • ''루마니아의 마리 여왕: 국왕에게 보낸 편지''(2015)
  • ''루마니아의 마리 여왕: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2권, 2016)


1917년에 마리아가 쓴 이야기 ''Povestea neastâmpăratei Kildeenro'' (The Story of Naughty Kildeen영어, 영문판은 1922년에 발행)이 간행되었다.

일본에서는 『와시히메 이야기』오오츠키 켄지 번역(고단샤)으로 아동 출판되었지만 절판되었다. 2008년에는 『나와 장난꾸러기 킬딘』, 2012년에는 『와시히메 이야기』로 재간행되었다.[77][78]

6. 2. 대중적 이미지

마리아는 여왕이 되기 전부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유한 공주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졌다.[36] 승마, 글쓰기, 그림, 조각, 춤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고, 빼어난 미모로도 유명했다.[37]

하지만 그녀의 인기는 두 번의 비방 캠페인으로 인해 훼손되기도 했다. 첫 번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중앙 동맹국이 주도한 것이었고,[38] 두 번째는 1947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 이후 공산주의 정권이 주도한 것이었다.

1926년, 마리아는 로이 풀러의 요청으로 새뮤얼 힐이 설립한 메리힐 미술관 헌정식 참석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그녀는 이 기회를 통해 "나라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루마니아를 세상에 알릴" 기회로 여겼다.[39] 뉴욕에 도착한 마리아는 "증기선의 뱃고동 소리, 회색 안개 속 하얀 연기로 뿜어져 나오는 총성, 찌르는 듯한 빗속에서 환호하는 목소리"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40] 지미 워커 뉴욕 시장은 그녀에게 공식적인 환영 인사를 전했다.[41]

오, 삶은 영광스러운 노래의 순환,
도로시 파커, 1927[22]



''마리 여왕과 함께한 여행''의 저자 콘스턴스 릴리 모리스는 마리의 인기를 그녀의 신화적인 매력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마리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에게도 "자신의 재치로 많은 쿠데타를 고안했고, 자신의 국민을 위해 많은 어려운 문제를 생각했으며, 그녀에게 주어진 재능을 사용하여 모든 좋은 목적을 진전시킨 여성"으로 존경받았다.[42]

필라델피아 등 여러 도시를 방문한 마리는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백악관에서 열린 공식 만찬은 캘빈 쿨리지 대통령 부부의 침울한 분위기로 인해 어색하게 진행되었지만, 마리는 윌리스-나이트로부터 방탄 장갑차를 선물받는 등 미국 방문에 만족감을 표했다. 그녀는 일기에 "나와 내 아이들은 단 하나의 꿈을 꿉니다. 돌아가는 것입니다!"라고 적으며 미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43]

루마니아가 공산주의 통치 하에 있던 42년 동안, 마리아는 "영국 자본주의의 첩자" 또는 조국에 헌신한 애국자로 번갈아 묘사되었다. 그녀의 사생활은 문란함의 증거로 왜곡되기도 했지만,[39] 루마니아 혁명 직전 몇 년 동안에는 그녀의 공로가 재조명되기도 했다.[44]

루마니아에서 "부상자들의 어머니"로 불리는 마리아는[40] 다른 나라에서는 "Soldier Queen", "Mamma Regina" 등으로 기억된다.[41] 그녀는 콘스탄틴 아르게토이아누에 의해 "루마니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42] 루마니아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1917년에 마리아 여왕 십자 훈장을 제정했다.[43]

2018년, 영국 켄트주 애쉬포드에는 마리아 여왕의 탄생과 어린 시절을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졌다.[45] 메리힐 미술관은 "루마니아의 마리아 여왕"이라는 제목의 영구 전시를 통해 그녀의 삶과 유산을 기리고 있다.[51][52]

7. 자녀

Maria영어페르디난드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다음과 같다.

사진이름생일사망기타
카롤 2세1893년 10월 15일1953년 4월 8일 (59세)1남[1]
루마니아의 엘리사베트1894년 10월 12일1956년 11월 14일 (62세)요르요스 2세 왕비, 자녀 없음[1]
유고슬라비아의 마리야1900년 1월 6일1961년 6월 22일 (62세)알렉산다르 1세 왕비, 3남[1]
루마니아 왕자 니콜라에1903년 8월 5일1978년 6월 9일 (74세)[1]
루마니아 공주 일레아나1909년 1월 5일1991년 1월 21일 (82세)2남 4녀[1]
루마니아 왕자 미르체아1913년 1월 3일1916년 11월 2일 (3세)요절[1]



장남 카롤은 평생 Maria영어를 힘들게 한 아들이었다. 카롤은 왕족 신분에 맞지 않는 평민 여성과 멋대로 결혼했다가 그 결혼을 무효화하고 정식으로 결혼했으나, 또다시 새로운 여성 마그다 루페스쿠와 사랑의 도피를 했고, 이로 인해 부모와 관계가 더욱 나빠졌으며 왕위 계승권마저 박탈당하게 된다.[1]

8. 문장

영국 군주의 남자 쪽 손녀로서, 마리아는 작센을 나타내는 방패를 포함한 왕국의 문장을 사용했는데, 이는 은색의 다섯 갈래 표지로 구분되었으며, 바깥쪽 두 쌍은 푸른색 닻을, 안쪽은 붉은색 장미를, 중앙에는 붉은색 십자가를 지니고 있었다. 1917년, 조지 5세의 왕실 칙령에 의해 방패가 삭제되었다.[6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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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간행물 London Gazette 1875-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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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간행물 London Gazette 187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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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문서 ロシア大公[[ウラジーミル・アレクサンドロヴィチ]]と[[マリア・パヴロヴナ (ロシア大公妃)|マリア・パヴロヴナ]]の三男で母方の従弟。プレイボーイで有名だった。
[76] 문서 19世紀中頃に[[ワラキア]]公となった{{仮リンク|バルブ・ディミトリエ・シュティルベイ|en|Barbu Dimitrie Ştirbei|label=バルブ・ディミトリエ・シュティルベイ}}の孫で、ワラキア王子の称号を保有していた。1927年に[[ルーマニアの首相]]を務め、また1944年、ルーマ니아と[[連合国 (第二次世界大戦)|連合国]]との[[休戦協定]]の際、[[特命全権大使]]としてモスクワに赴き、条約に署名した一人である。
[77] 뉴스 「わし姫物語」新訳に/皇后さまも「よいご本」 https://www.shikoku-[...] 四国新聞社 2008-12-16
[78] 웹사이트 わし姫物語 | 集英社みらい文庫 https://miraibunko.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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