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르 알바시르
1. 개요
오마르 알바시르는 1944년 수단에서 태어난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198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2019년 축출될 때까지 수단의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그는 군 경력을 거쳐 198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 국가원수, 총리, 국방장관 등을 역임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재임 기간 중 남수단의 분리 독립, 다르푸르 분쟁 등 굵직한 사건들을 겪었으며, 다르푸르 분쟁과 관련하여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기소되었다. 2019년 대규모 시위로 인해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부패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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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칭 접두사 | 각하, 원수 |
|---|---|
| 원어 이름 | عمر البشير ('Umar Ḥasan ʾAḥmad al-Bashīr) |
| 로마자 표기 | Omar Hasan Ahmad al-Bashir |
| 출생 이름 | Omar Hassan Ahmad al-Bashir |
| 출생일 | 1944년 1월 1일 |
| 출생지 | 호슈 반나가, 영국-이집트 수단 |
| 사망일 | 알려지지 않음 |
| 사망지 | 알려지지 않음 |
| 정당 | 국민회의 (1992년–2019년) |
| 배우자 | 파티마 칼리드, 위다드 바비케르 오메르 |
| 모교 | 이집트 육군사관학교 |
| 충성 | 수단 |
| 군대 | 수단군 |
| 복무 기간 | 1960년–2019년 |
| 계급 | |
| 참전 | 제1차 수단 내전 욤 키푸르 전쟁 제1차 콩고 전쟁 제2차 수단 내전 다르푸르 전쟁 헤글리그 위기 |
| 대수 | 제4대 |
|---|---|
| 임기 시작 | 1993년 10월 16일 |
| 임기 종료 | 2019년 4월 11일 |
| 이전 | 자신 (구국혁명지휘평의회 의장) |
| 이후 | 아흐메드 아와드 이븐 아우프 (과도 군사평의회 의장으로서) |
| 제1 부통령 | 즈바일 모하메드 살리흐 알리 오스만 타하 존 가랑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알리 오스만 타하 바크리 하산 살레 아흐메드 아와드 이븐 아우프 |
| 제2 부통령 | 조지 콩고르 아롭 모세스 카쿨 마차르 알리 오스만 타하 알-하즈 아담 유세프 하사부 모하메드 압달라흐만 오스만 모하메드 유시프 키비르 |
| 총리 | 바크리 하산 살레 모타즈 무사 모하메드 타히르 아얄라 |
| 임기 시작 | 1989년 6월 30일 |
|---|---|
| 임기 종료 | 1993년 10월 16일 |
| 이전 | 아흐메드 알-미르가니 (대통령으로서) |
| 이후 | 자신 (대통령으로서) |
| 부의장 | 즈바일 모하메드 살리흐 |
| 유죄 판결 | 돈세탁 부패 |
|---|---|
| 피해자 | 해당 사항 없음 |
| 범죄 상태 | ICC에서 주장됨 |
| 형벌 | 징역 2년 |
| 수감 장소 | 코바르 교도소, 하르툼, 수단 |
| 체포 | 2019년 4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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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의 반공주의자 -
가파르 니메이리
가파르 니메이리는 1969년 쿠데타로 수단의 대통령이 되어 초기에는 사회주의 개혁과 내전 종식을 추구했으나, 후반기에는 이슬람주의 강화와 독재로 논란을 겪다 1985년 쿠데타로 축출된 수단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
수단의 무슬림 -
무함마드 아마드
무함마드 아마드는 19세기 수단에서 마흐디를 자처하며 오스만-이집트 지배에 대한 반란을 이끌고 이슬람 국가를 건설했으나 곧 사망했으며, 그의 운동은 수단 역사와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수단의 이슬람주의자 -
가파르 니메이리
가파르 니메이리는 1969년 쿠데타로 수단의 대통령이 되어 초기에는 사회주의 개혁과 내전 종식을 추구했으나, 후반기에는 이슬람주의 강화와 독재로 논란을 겪다 1985년 쿠데타로 축출된 수단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2. 어린 시절과 군 경력
오마르 알바시르는 1944년 1월 1일 수단 북부 호시 반나가에서 아프리카계-아랍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수단 북부의 자알린 부족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소규모 유제품 농장주였고, 12명의 형제자매 중 둘째였다. 어릴 적에는 '오메이라'(작은 오마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바누 베다리아에 속하며, 수단 중북부의 수단 아랍인 부족이다. 어린 시절 알바시르는 축구를 좋아했다. 초등 교육을 수단 군사학교에서 받았고, 가족은 나중에 카르툼 노스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중등 교육을 마치고 알힐랄의 팬이 되었다.
1960년 수단 육군에 입대하여 이집트 군사학교에서 교육받았다. 1966년에는 수단 군사학교를 졸업했고,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에 이집트 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1975년 알바시르는 아랍에미리트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귀국 후 부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81년 기갑 공수 여단 사령관이 되면서 공수부대 경력으로 돌아갔다. 1981년 준장으로 진급했다. 1983년부터 시작된 제2차 수단 내전에서는 남부 반군과 교전했다.
알바시르는 사촌인 칼리드 파티마와 처음 결혼했고, 이후 오마르 바베르케르 와이다드와 재혼했다. 오마르 바베르케르 와이다드는 국가 구원을 위한 혁명 사령부의 일원이었던 첫 남편 이브라힘 샴사딘이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사망한 이후 알바시르와 결혼하였다. 알바시르는 자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1. 가족 관계
알바시르는 사촌인 칼리드 파티마와 처음 결혼했고, 이후 오마르 바베르케르 와이다드와 재혼했다. 오마르 바베르케르 와이다드는 국가 구원을 위한 혁명 사령부의 일원이었던 첫 남편 이브라힘 샴사딘이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사망한 이후 알바시르와 결혼하였다. 알바시르는 자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1989년 쿠데타와 권력 장악
1989년 6월 30일, 알바시르는 수단 육군 장교들과 함께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아메드 알미르가니 대통령과 사디크 알마흐디 총리를 축출했다. 알바시르는 국가구제혁명평의회를 설립하고 의장에 취임하여 입법권과 행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국가원수, 총리, 군 총사령관, 국방장관직을 겸임했다.
알바시르는 1990년대 초반 국가 이슬람 전선과 연합하여 수단을 샤리아에 근거한 이슬람주의 국가로 만들려 했다. 정당 및 정치 단체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을 검열했으며, 반체제 인사들을 투옥하고 처형했다. 1990년 4월에는 군부 쿠데타를 미수에 그치게 했으며, 이때 체포된 28명의 장교들은 오랫동안 행방불명이었다가 2020년 수도 교외에서 매장된 유해가 발견되었다.
1991년, 새로운 형법과 치안 경찰 도입, 무슬림 판사 채용 등으로 기독교와 전통 종교가 널리 퍼져 있는 남부에 샤리아를 강요하고, 남부 마을을 폭격하여 주민을 노예화하는 등 남북 내전을 확대시켰다. 아랍계 부족이 흑인계 부족을 공격하게 하여 종교 간 갈등뿐 아니라 인종 간 갈등도 격화시켰다.
알바시르는 1993년 10월 16일, 자신을 수단 대통령으로 임명하여 권력을 강화했고, 그 후 혁명구국평의회와 다른 모든 경쟁 정당을 해산시켰다.
4. 수단 대통령 재임
1993년 10월 16일, 국가구제혁명평의회가 자진 해체되면서 알바시르는 수단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96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5년 임기의 대통령이 되었다. 1998년, 하산 알투라비 수단 의회 의장과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 새 헌법과 정당 설립 제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1999년 12월 12일,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해산하고 알투라비를 축출하는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다.
2000년 12월 대선에서 알바시르 지지 세력 중심의 국민회의 소속으로 출마,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나 야권은 불참했다. 국민회의는 의회 360석 중 350석을 차지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수단 인민해방군과의 평화 협정에 따른 수단 과도 정부 대통령을 역임했다.
2010년 4월 대선에서 68%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나, 부정선거 논란이 있었다. 유럽 연합과 카터 센터는 선거가 국제 기준에 미달한다고 비판했다. 2015년 4월 대선에서는 야권 불참 속에 94.1%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019년 4월 11일,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4.1. 남수단 분리 독립
알바시르 집권 당시 제2차 수단 내전이 9년째 계속되고 있었으며, 이는 수단인민해방군과 알바시르 정부 간의 갈등으로 격화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남부 주민들이 난민이 되거나 기아에 시달렸고, 교육 및 의료 서비스를 박탈당했으며, 약 2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수단은 여러 국제 제재를 받았다. 2001년 국제적 압력이 강화되면서 유엔 지도자들은 알바시르에게 갈등 종식을 위한 노력을 촉구했고, 인도주의 및 국제 구호대가 수단 남부 지역에 구호 물품을 전달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2003년 내내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고, 2005년 1월 9일 양측은 나이로비 포괄 평화 협정에 공식 서명했다. 이 협정으로 남수단 자치 지역이 6년간 부여되었고, 이후 독립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협정은 공동 부통령직을 신설하고 남북이 석유 매장량을 동등하게 분할하도록 했지만, 양측 군대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평화 협정에 따라 남측의 공동 부통령으로 임명된 존 가랑은 2005년 8월 1일 취임 3주 만에 헬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폭동이 발생했지만, 결국 평화가 회복되었고 남부 주민들은 6년 후 독립 국민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2011년 7월 9일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남수단 지역이 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남수단을 건국했다.
4.2. 다르푸르 분쟁
2003년, 다르푸르 지역에서 정의평등운동(JEM)과 수단해방군(SLM)이 수단 정부의 차별과 억압에 반발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수단 정부는 다르푸르를 방치하고 아랍인을 편들어 비아랍인을 억압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다르푸르의 비아랍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잔자위드 민병대의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자료에 따라 다르다. 수단 정부는 최대 1만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한 반면, 유엔은 2010년까지 약 30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고했으며, 다른 보고서에서는 20만~4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수단 정부는 증거를 조작하고 정보를 은폐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언론인들을 체포하고 괴롭힘으로써 다르푸르 상황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제한했다. 미국 정부는 이 분쟁을 집단학살로 규정했지만, 유엔은 이 분쟁을 집단학살로 인정하지 않았다.
2006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 1706을 승인하여 1만 7,300명의 군인과 3,300명의 민간인으로 구성된 유엔-아프리카 연합 다르푸르 임무(UNAMID)를 파견하려 했으나, 수단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며 유엔군을 "외국 침략자"로 간주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8년 7월 국제 형사 재판소는 다르푸르에서 일어난 인종 대량 학살, 전쟁 범죄,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한 혐의로 알바시르에게 체포 영장을 청구했다. 2020년 2월 11일, 수단 과도 정부는 알바시르 전 대통령의 신병을 국제 형사 재판소에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알바시르는 다르푸르 분쟁 종식을 위해 두 차례 평화 협정에 서명했다. 2006년 다르푸르 평화 협정("아부자 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정의평등운동(JEM) 등은 협정을 거부했다. 2011년에는 도하 협정이 체결되어 다르푸르 분쟁 피해자를 위한 보상 기금 설립, 다르푸르 출신 부통령 임명, 다르푸르 지역 당국 설립 등의 내용을 담았다.
4.3. 국제형사재판소(ICC) 기소
2008년 7월 14일,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수석 검사인 루이스 모레노 오캄포는 알바시르가 2003년 이후 다르푸르에서 저질러진 집단학살,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에 대해 지휘책임을 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검사는 알바시르가 세 주요 민족 집단—푸르, 마살리트, 자가와—을 살해, 강간 및 강제이주 캠페인으로 파괴하려는 계획을 "입안하고 실행했다"고 비난했다. 2009년 3월 4일 ICC는 알바시르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는 반인도적 범죄 5건(살인, 몰살, 강제이주, 고문, 강간)과 전쟁범죄 2건(약탈,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인 공격 지시)에 대한 기소였다. 이는 현직 국가원수가 기소된 첫 사례였다. 그러나 법원은 집단학살 혐의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결했다.
수단은 ICC를 설립한 로마 조약의 당사국이 아니므로 영장을 집행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593호(2005)는 수단을 ICC에 회부했으며, 이는 법원에 수단에서 저질러진 국제범죄에 대한 관할권을 부여하고 수단 정부에 ICC와 협력할 의무를 부과한다. 알바시르는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이 혐의를 "그것이 쓰여진 잉크조차 아깝다"고 묘사했다.
아랍연맹과 아프리카연합은 영장을 비난했다. 무아마르 카다피 전 아프리카연합 의장은 이 기소를 테러의 한 형태로 규정했다. 그는 또한 이 영장이 "(서구)가 과거 식민지를 재식민화하려는 시도"라고 믿었다. 이슬람 협력 기구는 이 영장을 부당하고 전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기소 이후 알바시르는 중국, 지부티, 이집트, 에티오피아, 인도, 리비아, 나이지리아,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및 여러 다른 국가들을 방문했으며, 이들 국가는 모두 그를 체포하는 것을 거부했다.
2010년 7월 12일, ICC는 알바시르에게 집단학살 혐의를 추가하여 두 번째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새로운 영장에는 알바시르가 다르푸르 지역에서 푸르족, 마살리트족, 자가와족을 부분적으로 파괴하려는 특정한 의도로 행동했다고 의심할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는 법원의 결론이 포함되었다.
4.4. 대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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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 오마르 알바시르(Omar al-Bashir)가 집권한 이후 수단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지원했으며 이슬람 테러 단체를 은닉하고 보호하며 지원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테러 지도자"로 규정한 카를로스, 오사마 빈 라덴, 아부 니달 등이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 거주했다. 하산 알 투라비가 주도했던 인민 아랍 이슬람 회의(PAIC)에서 수단이 수행한 역할은 하르툼에 있는 미국 관리 및 가족들의 안보에 큰 우려를 불러일으켰고, 1990년대 초중반 여러 차례 미국 인력의 감축 및 철수로 이어졌다.
수단의 국제 테러 조직과의 이슬람주의 연계는 미국 정부에 특별한 우려 사항이었고, 1993년 수단을 테러 지원 국가로 지정하고 1996년 하르툼 주재 미국 대사관 운영을 중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94년 말, 테러를 은닉하는 국가로서 세계적으로 악화되는 자국 이미지를 바꾸려는 초기 시도로 바시르는 프랑스 특수부대와 비밀리에 협력하여 수단 영토에서 카를로스를 체포했다.
1996년 초, 알바시르는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엘 파티흐 에르와(El Fatih Erwa)에게 미국으로 비밀리에 여러 차례 방문하여 CIA와 미국 국무부 관리들과 수단에 대한 미국의 제재 정책 및 바시르 정권이 제재를 해제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에 대해 논의하도록 허가했다. 에르와는 미국으로부터 오사마 빈 라덴 및 기타 급진적 이슬람 단체에 대한 정보 요구를 포함한 일련의 요구를 받았다. 미국 측 요구 목록에는 인민 아랍 이슬람 회의 개최와 같은 활동으로부터 바시르 정권이 벗어나 서방과의 화해 노력에 박차를 가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수단의 무카바라트(중앙정보기관)는 PAIC 회의를 위한 정기적인 연례 방문을 통해 빈 라덴과 다양한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정보를 5년 동안 수집했다. 1996년 5월, 미국 영토에서 일련의 에르와 비밀 회담이 이루어진 후, 클린턴 행정부는 수단이 빈 라덴을 추방할 것을 요구했고 바시르는 이에 응했다.
수단이 수단의 남부 지역 유전 개발 계획을 방해하는 미국의 제재 철회 대가로 빈 라덴의 인도를 제안했는지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미국 관리들은 비밀 회담이 일련의 테러 방지 문제에 대한 수단의 준수를 압박하기 위해서만 합의되었다고 주장했다. 수단 측은 페어팩스의 한 호텔에서 에르와와 당시 CIA 아프리카 국장 간의 비밀 일대일 회담에서 워싱턴이 바시르 정권에 대한 제재를 종식한다는 조건으로 빈 라덴의 제3국 인도를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티모시 M. 카니 대사는 페어팩스 호텔 회담 중 하나에 참석했다. 2003년 워싱턴 포스트 아웃룩 섹션의 공동 칼럼에서 카니와 이자즈(Ijaz)는 수단이 실제로 제재 완화 대가로 빈 라덴을 제3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1996년 8월, 미국의 헤지펀드 매니저인 만수르 이자즈는 수단을 방문하여 알 투라비와 알바시르를 포함한 고위 관리들과 만났다. 이자즈는 수단 관리들에게 지난 5년 동안 수단을 오가던 빈 라덴과 다른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정보를 미국 관리들과 공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자즈는 클린턴의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샌디 버거를 포함한 미국 관리들에게 귀국 후 자신의 발견 내용을 전달했고, 미국이 수단과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건설적으로 교류할 것을 주장했다. 1997년 4월, 이자즈는 알바시르를 설득하여 이자즈가 직접 의회의원 리 H. 해밀턴에게 전달한 서명된 대통령 서한 형태로 테러 대응 지원을 무조건 제안하게 했다.
1997년 9월 말, 수단의 제안(해밀턴에게 보낸 알바시르의 편지에 의해 이루어짐) 몇 달 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국무부는 처음으로 무카바라트가 소지하고 있는 테러 대응 정보를 얻기 위해 미국 외교관을 하르툼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발표했다. 며칠 만에 미국은 그 결정을 번복하고 1997년 10월 발효된 수단에 대한 더욱 엄격하고 포괄적인 경제, 무역 및 금융 제재를 부과했다. 1998년 8월, 동아프리카 대사관 폭탄 테러 여파로 미국은 순항 미사일 공격을 하르툼에 가했다. 수단 주재 미국 대사 팀 카니는 1996년 2월 부임지를 떠났고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새로운 수단 정부와 대사 교환에 합의할 때까지 2019년 12월까지 새로운 대사는 지명되지 않았다.
알바시르는 2015년 8월 유엔에서 연설하기 위해 9월 뉴욕을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전 제재 때문에 알바시르가 여행을 허가받았을지는 불분명했다.
2015년, 수단은 사우디 아라비아 주도 예멘 개입에 참여하여 시아파 후티 반군과 전 대통령 알리 압둘라 살레에게 충성하는 세력에 맞섰다. 살레는 2011년-2012년 예멘 혁명 동안 축출되었다. 로이터는 "예멘 전쟁은 25년 동안 수단을 통치해 온 노련한 정치가 오마르 하산 알바시르(Omar Hassan al-Bashir)에게 이란의 영향력에 맞서 부유한 수니파 국가들에게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를 제공했다. 물론, 대가가 있다면 말이다."라고 보도했다.
중국은 자파르 니메이리 정권 시대부터 수단과 우호 관계를 맺어왔으며, 수단 대통령궁, 메로에 댐을 상징하는 대규모 수력발전소 및 댐, 노후화된 포트수단에서 하르툼 간의 현대적인 철도 건설 등을 지원했다. 국영 중국석유천연가스(CNPC)는 수단의 석유회사인 그레이터 나일 페트롤리엄 오퍼레이팅 컴퍼니와 페트로다르의 최대 주주이며, 수단은 중국과의 원유 거래 수입의 대부분을 무기 구매에 사용했다. 수단 정부군과 민병 조직은 중국제 무기를 사용했고, 바시르의 이름을 딴 수단의 주력 전차인 “알-바시르”는 85-IIM식 전차의 라이선스 생산 버전이며, 96식 전차도 구매했다. 중국은 미국과 영국이 유엔에서 수단에 대한 경제 제재를 검토했을 때도 거부권으로 이를 막았다. 다르푸르 분쟁 문제에서 중국이 수단의 범죄 행위에 손을 대지 않은 것에 대한 항의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예술 고문직을 사퇴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수단에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부대를 파병한 중국은 다르푸르에 주둔하는 유엔-아프리카연합 다르푸르 지원단에도 적극적으로 파병하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체포 영장을 발부했지만, 중국은 “중국 정부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만약 바시르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왜 야당은 정치적 화해를 위해 그를 신뢰할 수 있는 협상 상대로 인식했는가?”라고 지적했다. 수단의 타하 부통령은 “양국의 우호 협력을 발전시키는 것은 양국 국민의 공통된 이익에 부합한다. 수단은 다르푸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도 유엔과 아프리카 연합과 적극적으로 협력해 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5년에는 중국이 개최한 중국인민항일전쟁·세계반파시즘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전에 참석했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바시르를 “중국 인민의 오랜 친구다”라며 환영했고, 함께 참석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바시르의 체포를 유엔 회원국에 촉구했던 인물이었기에 비난을 받았다.
2017년 12월,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수단을 방문하여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던 홍해 연안의 수아킨 섬을 튀르키예가 개발하는 계획을 발표했고, 이에 튀르키예와 대립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가 반발했다.
또한, 튀르키예가 지원하는 무슬림 형제단을 보호한 것도 이집트와의 대립 원인이었다. 쿠데타로 바시르를 축출한 과도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아랍에미리트의 군사·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다.
러시아는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 일극 체제에 반발하며 중국과 같은 반미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했고, 중국과 마찬가지로 다르푸르 분쟁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신냉전이 시작되었다. 그 영향으로 러시아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수단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실시했으며, 위장 도색된 러시아제 밀 Mi-24 헬기와 안토노프 An-26 수송기가 확인되었다. 2018년부터는 러시아계 민간군사기업 와그너 그룹의 용병들도 수도 하르툼의 시위 진압 등에 투입되었다.
북한과 이란은 전통적으로 수단의 우방국이었으나, 2017년 11월 미국 외교단의 수단 방문 및 협의 이후 북한과의 무역 및 군사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기로 결정했다. 예멘 내전에서는 수니파 아랍 국가측에 참전하여 시아파 세력을 지원하는 이란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2017년 9월 북한과 이란의 미국 입국 금지를 규정한 대통령령 13769호가 대통령령 13780호로 개정되었을 때 수단은 제외되었고, 2017년 10월에는 20년 동안 지속된 수단에 대한 경제 제재를 미국이 해제하는 등, 북한과 이란에 적대적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 개선이 보였다.
4.4.1. 미국과의 관계
1990년대 초 오마르 알바시르(Omar al-Bashir)가 집권한 이후 수단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지원했으며 이슬람 테러 단체를 은닉하고 보호하며 지원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카를로스, 오사마 빈 라덴, 아부 니달 등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테러 지도자"로 규정한 인물들이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 거주했다. 하산 알 투라비가 주도했던 인민 아랍 이슬람 회의(PAIC)에서 수단이 수행한 역할은 하르툼에 있는 미국 관리 및 가족들의 안보에 큰 우려를 불러일으켰고, 1990년대 초중반 여러 차례 미국 인력의 감축 및 철수로 이어졌다.
수단의 국제 테러 조직과의 이슬람주의 연계는 미국 정부에 특별한 우려 사항이었고, 1993년 수단을 테러 지원 국가로 지정하고 1996년 하르툼 주재 미국 대사관 운영을 중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94년 말, 테러를 은닉하는 국가로서 세계적으로 악화되는 자국 이미지를 바꾸려는 초기 시도로 바시르는 프랑스 특수부대와 비밀리에 협력하여 수단 영토에서 카를로스를 체포했다.
1996년 초, 알바시르는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엘 파티흐 에르와(El Fatih Erwa)에게 미국으로 비밀리에 여러 차례 방문하여 CIA와 미국 국무부 관리들과 수단에 대한 미국의 제재 정책 및 바시르 정권이 제재를 해제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에 대해 논의하도록 허가했다. 에르와는 미국으로부터 오사마 빈 라덴 및 기타 급진적 이슬람 단체에 대한 정보 요구를 포함한 일련의 요구를 받았다. 미국 측 요구 목록에는 인민 아랍 이슬람 회의 개최와 같은 활동으로부터 바시르 정권이 벗어나 서방과의 화해 노력에 박차를 가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수단의 무카바라트(중앙정보기관)는 PAIC 회의를 위한 정기적인 연례 방문을 통해 빈 라덴과 다양한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정보를 5년 동안 수집했다. 1996년 5월, 미국 영토에서 일련의 에르와 비밀 회담이 이루어진 후, 클린턴 행정부는 수단이 빈 라덴을 추방할 것을 요구했고 바시르는 이에 응했다.
수단이 수단의 남부 지역 유전 개발 계획을 방해하는 미국의 제재 철회 대가로 빈 라덴의 인도를 제안했는지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미국 관리들은 비밀 회담이 일련의 테러 방지 문제에 대한 수단의 준수를 압박하기 위해서만 합의되었다고 주장했다. 수단 측은 페어팩스의 한 호텔에서 에르와와 당시 CIA 아프리카 국장 간의 비밀 일대일 회담에서 워싱턴이 바시르 정권에 대한 제재를 종식한다는 조건으로 빈 라덴의 제3국 인도를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티모시 M. 카니 대사는 페어팩스 호텔 회담 중 하나에 참석했다. 2003년 워싱턴 포스트 아웃룩 섹션의 공동 칼럼에서 카니와 이자즈(Ijaz)는 수단이 실제로 제재 완화 대가로 빈 라덴을 제3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1996년 8월, 미국의 헤지펀드 매니저인 만수르 이자즈는 수단을 방문하여 알 투라비와 알바시르를 포함한 고위 관리들과 만났다. 이자즈는 수단 관리들에게 지난 5년 동안 수단을 오가던 빈 라덴과 다른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정보를 미국 관리들과 공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자즈는 클린턴의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샌디 버거를 포함한 미국 관리들에게 귀국 후 자신의 발견 내용을 전달했고, 미국이 수단과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건설적으로 교류할 것을 주장했다. 1997년 4월, 이자즈는 알바시르를 설득하여 이자즈가 직접 의회의원 리 H. 해밀턴에게 전달한 서명된 대통령 서한 형태로 테러 대응 지원을 무조건 제안하게 했다.
1997년 9월 말, 수단의 제안(해밀턴에게 보낸 알바시르의 편지에 의해 이루어짐) 몇 달 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미국 국무부는 처음으로 무카바라트가 소지하고 있는 테러 대응 정보를 얻기 위해 미국 외교관을 하르툼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발표했다. 며칠 만에 미국은 그 결정을 번복하고 1997년 10월 발효된 수단에 대한 더욱 엄격하고 포괄적인 경제, 무역 및 금융 제재를 부과했다. 1998년 8월, 동아프리카 대사관 폭탄 테러 여파로 미국은 순항 미사일 공격을 하르툼에 가했다. 수단 주재 미국 대사 팀 카니는 1996년 2월 부임지를 떠났고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새로운 수단 정부와 대사 교환에 합의할 때까지 2019년 12월까지 새로운 대사는 지명되지 않았다.
알바시르는 2015년 8월 유엔에서 연설하기 위해 9월 뉴욕을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전 제재 때문에 알바시르가 여행을 허가받았을지는 불분명했다.
4.4.2. 중국과의 관계
중국은 자파르 니메이리 정권 시대부터 수단과 우호 관계를 맺어왔으며, 수단 대통령궁, 메로에 댐을 상징하는 대규모 수력발전소 및 댐, 노후화된 포트수단에서 하르툼 간의 현대적인 철도 건설 등을 지원했다. 국영 중국석유천연가스(CNPC)는 수단의 석유회사인 그레이터 나일 페트롤리엄 오퍼레이팅 컴퍼니와 페트로다르의 최대 주주이며, 수단은 중국과의 원유 거래 수입의 대부분을 무기 구매에 사용했다. 수단 정부군과 민병 조직은 중국제 무기를 사용했고, 바시르의 이름을 딴 수단의 주력 전차인 “알-바시르”는 85-IIM식 전차의 라이선스 생산 버전이며, 96식 전차도 구매했다. 중국은 미국과 영국이 유엔에서 수단에 대한 경제 제재를 검토했을 때도 거부권으로 이를 막았다. 다르푸르 분쟁 문제에서 중국이 수단의 범죄 행위에 손을 대지 않은 것에 대한 항의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예술 고문직을 사퇴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수단에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부대를 파병한 중국은 다르푸르에 주둔하는 유엔-아프리카연합 다르푸르 지원단에도 적극적으로 파병하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체포 영장을 발부했지만, 중국은 “중국 정부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만약 바시르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왜 야당은 정치적 화해를 위해 그를 신뢰할 수 있는 협상 상대로 인식했는가?”라고 지적했다. 수단의 타하 부통령은 “양국의 우호 협력을 발전시키는 것은 양국 국민의 공통된 이익에 부합한다. 수단은 다르푸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도 유엔과 아프리카 연합과 적극적으로 협력해 나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5년에는 중국이 개최한 중국인민항일전쟁·세계반파시즘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전에 참석했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바시르를 “중국 인민의 오랜 친구다”라며 환영했고, 함께 참석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바시르의 체포를 유엔 회원국에 촉구했던 인물이었기에 비난을 받았다.
4.4.3. 기타 국가와의 관계
2017년 12월,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수단을 방문하여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던 홍해 연안의 수아킨 섬을 튀르키예가 개발하는 계획을 발표했고, 이에 튀르키예와 대립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가 반발했다.
또한, 튀르키예가 지원하는 무슬림 형제단을 보호한 것도 이집트와의 대립 원인이었다. 쿠데타로 바시르를 축출한 과도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아랍에미리트의 군사·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다.
러시아는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 일극 체제에 반발하며 중국과 같은 반미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했고, 중국과 마찬가지로 다르푸르 분쟁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신냉전이 시작되었다. 그 영향으로 러시아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수단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실시했으며, 위장 도색된 러시아제 밀 Mi-24 헬기와 안토노프 An-26 수송기가 확인되었다. 2018년부터는 러시아계 민간군사기업 와그너 그룹의 용병들도 수도 하르툼의 시위 진압 등에 투입되었다.
북한과 이란은 전통적으로 수단의 우방국이었으나, 2017년 11월 미국 외교단의 수단 방문 및 협의 이후 북한과의 무역 및 군사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기로 결정했다. 예멘 내전에서는 수니파 아랍 국가측에 참전하여 시아파 세력을 지원하는 이란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2017년 9월 북한과 이란의 미국 입국 금지를 규정한 대통령령 13769호가 대통령령 13780호로 개정되었을 때 수단은 제외되었고, 2017년 10월에는 20년 동안 지속된 수단에 대한 경제 제재를 미국이 해제하는 등, 북한과 이란에 적대적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 개선이 보였다.
5. 2019년 쿠데타와 축출
2018년부터 수단에서는 경제난과 알바시르의 장기 집권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2019년 4월 11일, 수단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알바시르를 축출하고, 과도 군사평의회를 구성했다. 국민의회는 해산되었고, 알바시르 내각의 모든 장관들은 체포되었다. 알바시르는 가택 연금되었다가 4월 16일, 코바르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우간다는 바시르의 망명 요청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다.
4월 21일, 과도 정부는 알바시르의 자택에서 1억 1,300만 달러 상당의 유로와 미국 달러 현금을 발견했다고 발표했으며, 외국 통화 불법 소지 혐의로 수사가 진행되었다. 5월 13일, 과도 정부 사법 당국은 시위 참가자 살해에 대한 가담 및 선동 혐의로 바시르를 기소했으나, 국제형사재판소(ICC) 송환은 거부했다. 12월 14일, 바시르는 부패 및 외화 불법 축재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고령을 이유로 교도소가 아닌 다른 시설에 구금되었다.
6. 축출 이후
2019년 4월 11일, 2018년부터 계속된 수단의 대규모 시위를 계기로 수단군과 치안기관의 사퇴 권고를 수락하고 국방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군 주도의 과도 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가 시작되었고, 바시르 정권은 30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2019년 수단 쿠데타). 4월 16일, 바시르는 수도 하르툼에 있는 코벨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2019년 4월 17일, 알바시르는 가택 연금에서 코바르 교도소(Kobar Prison)로 이감되었다.
위키리크스에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알바시르는 수단의 대통령을 역임하던 동안에 약 90억 달러를 빼돌렸다고 하는데 이는 전쟁을 통해 병사들이 약탈한 자금으로 충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수석 검사인 루이스 모레노 오캄포는 그 자금 중 일부가 부분적으로 국유화된 로이드 뱅킹 그룹(Lloyds Banking Group)에 보관되고 있다고 밝혔다.
2019년 4월 21일, 과도 정부는 바시르의 자택에서 1억 1,300만 달러 상당의 유로와 미국 달러(United States dollar) 현금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외국 통화를 불법으로 소지한 혐의로 수사가 진행되게 되었다. 2019년 5월 13일, 검찰은 알바시르를 시위대 살해에 대한 "선동 및 가담" 혐의로 기소했다. 2019년 12월 14일, 수도 하르툼의 법원은 바시르에게 부패 및 외화 불법 축재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고령인 점을 고려하여 교도소가 아닌 다른 시설에서 구금될 것이라고 한다.
2020년 2월 11일, 수단의 집권 군사 평의회는 다르푸르에서의 반인도 범죄 혐의로 기소된 알바시르를 헤이그(The Hague)의 ICC로 넘기는 데 동의했다. 2020년 7월 21일, 그를 권력에 올린 쿠데타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 약 20명이 기소되었다. 유죄 판결을 받으면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2023년 4월 26일, 2023년 수단 내전 발발 이후 알바시르는 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