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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라슬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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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울라슬로 2세는 1471년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었고, 1490년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그는 보헤미아에서 후스파와 가톨릭 간의 갈등을 겪었으며, 헝가리 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귀족 세력의 강화를 허용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받았으며, 1516년 사망 후 그의 아들 러요시 2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와 헝가리를 상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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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라슬로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 성 바츨라프 경당 벽에 있는 프레스코 (1508년)
이름울라슬로 2세
헝가리어II. Ulászló
체코어Vladislav
통치
왕위 계승보헤미아 왕
통치 기간1471년–1516년
즉위1471년 8월 22일
이전 통치자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다음 통치자러요시 2세
왕위 계승헝가리 왕 및 크로아티아 왕
통치 기간1490년 7월 15일 – 1516년 3월 13일
즉위1490년 9월 18일
이전 통치자마차시 1세
다음 통치자러요시 2세
가문
왕가야기에우워 왕조
가문 유형왕조
아버지카지미에시 4세
어머니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
결혼 및 자녀
배우자바르바라 폰 브란덴부르크 (1476년 결혼, 1490년 이혼, 1500년 법적으로 해소)
베아트리체 디 나폴리 (1490년 결혼, 1500년 무효화)
안 드 푸아 (1502년 결혼, 1506년 사별)
자녀헝가리 왕비 안나
헝가리 왕 러요시 2세
출생 및 사망
출생일1456년 3월 1일
출생지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사망일1516년 3월 13일
사망지헝가리 왕국 부다
매장지세케슈페헤르바르
종교
종교가톨릭교회

2. 생애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와 합스부르크 가 출신 아내 엘리자베트 사이의 장남으로 1456년 3월 1일 크라쿠프에서 태어났다.[1][2]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독일, 헝가리, 보헤미아의 국왕이었던 알브레히트 2세의 딸이었고, 울라슬로 2세는 어머니를 통해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와 알브레히트 2세의 혈통을 이어받아,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는 훗날 폴란드의 국왕이 되는 얀 1세 올브라흐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지그문트 1세와 형제 관계였다. 아버지 카지미에시 4세는 아들들의 왕위 계승을 준비시키며 역사가 얀 드우고시 등을 가정교사로 두었다.

1471년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의 사망 후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당시 보헤미아는 후스 전쟁의 여파와 헝가리 왕 마차시 1세의 간섭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후 1479년 올로모우츠 조약으로 영토 일부를 마차시 1세에게 양도하고, 1485년 쿠트나호라에서 종교적 화해를 도모하며 프라하 성 재건을 시작했다.

1490년 마차시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헝가리 국왕으로도 선출되었다. 이후 부다에 주로 머물렀으며, 선왕 마차시와 달리 귀족들의 권한을 존중하는 유화적인 통치 방식을 보였고, 이로 인해 '도브제'(체코/폴란드어로 '좋다'는 의미)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토마스 바코치와 스테판 자폴야 등이 주요 조언자 역할을 했으며, 그의 통치기에 헝가리 의회의 역할이 다시 중요해졌다.

하지만 마차시로부터 빈 국고를 물려받아 재정난에 시달렸다. 선왕의 상비 용병군인 헝가리 흑군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급료 미지급으로 인한 반란 끝에 1493년 군대를 해산해야 했다. 남부 국경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침입이 계속되었고, 1493년 크르바바 들판 전투에서 크로아티아 군대가 큰 패배를 겪었다. 1495년 오스만 제국과 3년간의 휴전을 맺었지만, 국경 지역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1494년에는 특별세 징수에 대한 귀족들의 반발이 있었고, 1496년에는 재무관 지그문트 에르누스트가 횡령 혐의로 체포되는 등 내부적인 어려움도 겪었다.

15세기 말 자기에우워 왕조의 유럽


헝가리의 울라슬로 2세 (나다시 묘], 1664)
말을 탄 앙 드 푸아와 그 수행원


울라슬로 2세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브란덴부르크의 바르바라(1476년 결혼)였고, 두 번째 부인은 나폴리의 베아트리체(마차시 1세의 미망인)였다. 세 번째 부인은 푸아-캉달의 앤으로, 1502년 결혼 당시 그녀는 18세, 울라슬로는 46세였다. 앤과의 사이에서 딸 안나와 아들 러요시 2세를 얻었다. 앤은 러요시 2세를 낳은 후 1506년 사망했다.

만년인 1515년에는 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동생인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와 함께 회의를 열어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빈 이중 결혼을 성사시켰다.

1516년 3월 13일 사망했으며, 왕위는 10세의 아들 러요시 2세가 계승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한 후, 딸 안나와 결혼한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두 왕국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편입되었다.

2. 1. 보헤미아 왕 즉위 (1471년)

어머니 합스부르크 가의 엘리자베트를 통해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와 알브레히트 2세의 혈통을 이어받아, 1471년 보헤미아 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가 사망한 후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당시 보헤미아는 후스파와 가톨릭 세력 간의 오랜 종교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헝가리 왕 마차시 1세가 보헤미아 왕위를 노리고 침공해오는 등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결국 1479년 올로모우츠 조약을 통해 마차시 1세에게 모라바, 실레시아, 루사티아의 영유권과 보헤미아 왕위를 인정하고, 울라슬로 2세는 남은 보헤미아 지역만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내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져 1485년 쿠트나호라에서 후스파와 가톨릭 세력 간의 화해가 성립되어 종교적 공존이 인정되었다. 같은 해 울라슬로 2세는 프라하 성의 재건에 착수했으며, 이 과정에서 건축가 베네딕트 레제(Benedikt Rejt)에 의해 대강당인 블라디슬라프 홀(Vladislav Hall)이 건설되었다.

2. 2. 헝가리 왕 즉위 (1490년)

1490년 마차시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울라슬로 2세는 헝가리 귀족들에 의해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되어 즉위했다. 헝가리 왕위에 오른 후 그는 부다(부더)로 거처를 옮겨 정착했으며, 이후 보헤미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보헤미아 왕국은 실질적으로 귀족들이 통치하는 과두 체제로 운영되었다.

1514년 울라슬로 2세는 귀족 베르베치 이슈트반(Werbőczy István)에게 헝가리 법전 편찬을 명했다. 베르베치는 이에 따라 헝가리 관습법을 집대성한 『삼부법서』(Tripartitum opus iuris consuetudinarii inclyti regni Hungariaela)를 작성했으나, 이 법전은 최종적으로 울라슬로 2세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부법서』는 이후 헝가리에서 중요한 법률 자료로 여겨져 재판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일부 내용은 19세기까지 효력을 유지했다.

2. 3.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관계

울라슬로 2세는 어머니 엘리자베스를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과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알브레히트 2세의 딸이었다.

울라슬로 2세의 딸인 안나는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페르디난트 1세와 결혼했다. 이러한 관계는 1515년 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이 회의에는 울라슬로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그리고 울라슬로 2세의 동생이자 폴란드 왕인 지그문트 1세가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여러 현안 논의와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과 야기에우워 가문 간의 중요한 결혼 동맹, 즉 '빈 이중 결혼'이 결정되었다.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울라슬로 2세의 아들 러요시 2세는 막시밀리안 1세의 손녀인 마리아와 결혼한다.
  • 울라슬로 2세의 딸 안나는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이자 마리아의 오빠인 페르디난트와 결혼한다.


이 결혼 동맹은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부 유럽 지배력 강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울라슬로 2세의 아들 러요시 2세가 후사 없이 전사하자, 그의 매형인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헝가리의 왕위를 계승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두 왕국이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지배하에 놓이는 계기가 되었다.

3. 통치와 갈등

''보헤미아의 왕''. 보헤미아 왕이자 포르투갈 문장집 ''Livro do Armeiro-Mor'' (1509)의 fol. 33r에 "제국의 대사배"로 묘사된 울라슬로 야기에우워의 이상적인 초상화


오스만 제국의 영토 확장 지도. 울라슬로 2세 통치기 헝가리는 오스만 제국의 지속적인 압박에 직면했다.


울라슬로 2세의 통치 기간(보헤미아 1471-1516, 헝가리 1490-1516) 동안 왕권은 점차 약화되고 귀족들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특히 헝가리에서는 마그나트(고위 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농민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 귀족 중심의 체제가 공고해졌다. 그의 통치는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나, 외부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지속적인 국경 압박에 시달렸고, 내부적으로는 1514년 죄르지 도자가 이끄는 대규모 농민 반란을 겪는 등 여러 갈등에 직면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울라슬로 2세는 외교적,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1497년 말에는 오스만 방어의 최전선인 슬라보니아 영지에 독자적인 문장을 수여했고, 1498년에는 오스만 제국과의 휴전이 만료되었다. 같은 해 헝가리 의회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1플로린의 보통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했지만, 토지 소유주가 세금의 절반을 자신의 종자를 무장시키는 데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또한 가장 부유한 남작과 성직자들에게는 자비로 군대를 조직할 의무를 부과했다. 국제적으로는 1498년 7월, 폴란드얀 알베르트몰다비아스테판 3세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크라쿠프에서 체결했다. 그는 또한 이전의 경쟁자였던 야노시 코르비누스와 화해하고 그를 크로아티아 반으로 임명하여 남부 방어를 맡겼다.

헝가리에서 귀족들의 권력은 의회를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1498년 의회는 왕립 평의회의 결정에 최소 8명의 선출된 귀족 배심원의 참석을 의무화하고, 귀족의 경제적 이익을 증대시키고 도시와 시민의 경제적 특권을 제한하는 법률들을 통과시켰다. 1514년에는 베르베치 이슈트반에게 법전 편찬을 명하여 헝가리 관습법을 집대성한 『삼부법서』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귀족 중심의 법질서를 반영했다. 비록 왕의 최종 승인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 법전은 이후 재판에서 사용되었다.

보헤미아에서는 울라슬로 2세가 헝가리로 거처를 옮긴 후 귀족 과두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1500년 3월 보헤미아 의회는 왕권을 제약하는 새로운 토지 헌법을 채택했고, 울라슬로 2세는 1502년에 이를 승인했다(울라슬로 토지 명령). 한편, 그는 프라하 성의 블라디슬라프 홀 건설(1493-1502년)을 지원하는 등 문화적인 업적도 남겼다.

통치 말년인 1515년, 울라슬로 2세는 에서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 동생인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와 회동하여 빈 이중 결혼을 결정했다. 이는 그의 아들 러요시와 막시밀리안 1세의 손녀 마리아, 그리고 러요시의 누나 안나와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페르디난트의 결혼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이 장차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울라슬로 2세는 이듬해 1516년에 사망했고, 아들 러요시 2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두 왕국을 차지하게 되었다.

3. 1. 보헤미아 통치 (1471-1490)

15세의 울라슬로 2세는 영지 신분(Estates of the realm)의 자유를 존중하겠다고 약속한 후, 1471년 5월 27일 쿠트나 호라에서 보헤미아 의회에 의해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바젤 협약에 따라 가톨릭과 후스파 신도의 공존을 인정해야 했으나, 성좌는 이미 1462년에 이 협약을 비난한 상태였다. 성좌는 울라슬로의 선출을 무효로 간주했고, 교황 사절 로렌초 로베렐라는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보헤미아 왕위 주장을 확인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는 마차시 코르비누스를 보헤미아의 합법적인 국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울라슬로는 1471년 8월 22일 프라하에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별도의 군대 없이 보헤미아로 왔기 때문에, 귀족들의 지지를 통해서만 자신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보헤미아 의회는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 행정 기구로 발전했으며, 입법부로서 활동하며 법령을 제정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울라슬로의 아버지인 폴란드의 카지미르 4세도 그를 지지했다. 1471년 말,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 일부가 카지미르 4세에게 헝가리 왕위를 제안하자, 그는 둘째 아들이자 울라슬로의 형제인 카지미르 왕자가 폴란드에서 상 헝가리(현재의 슬로바키아)를 침공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마차시 코르비누스는 카지미르 왕자를 격파하고 그해 말 이전에 헝가리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 1472년 3월 1일, 교황 식스토 4세는 사절 마르코 바르보 추기경에게 마차시 코르비누스를 상대로 계속 전쟁을 벌일 경우 울라슬로와 그의 아버지를 파문할 권한을 부여했다. 울라슬로와 마차시 코르비누스 간의 첫 번째 휴전은 5월 31일에 체결되었다. 양측 대표들은 몇 달 동안 협상을 계속했지만, 교황 사절은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주장을 지지했다. 1473년 베네쇼프에서 열린 의회는 평화가 회복될 때까지 보헤미아를 다스릴 귀족 4명을 섭정으로 선출했다.

카지미르 4세와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대표자들은 1474년 2월 21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틀 후 울라슬로도 마차시 코르비누스와 3년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울라슬로는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프리드리히 3세를 만나 마차시 코르비누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도록 설득했다. 카지미르 4세도 이 연합에 참여했다. 폴란드군과 보헤미아군은 실레시아를 침략하여 10월에 브로츠와프에서 마차시 코르비누스를 포위했다. 그러나 헝가리군이 침략자들의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울라슬로와 카지미르는 12월 8일에 1년 이상 지속되는 새로운 휴전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쿠트나 호라는 중세 시대의 은광 중심지였으며, 보헤미아 왕국에서 두 번째로 부유한 도시였다.


1476년, 젊은 브란덴부르크의 바르바라는 남편 글로구프의 헨리 11세로부터 실레시아의 글로구프 공작령을 상속받았다. 당시 대부분의 실레시아 공작들은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종주권을 인정했지만, 울라슬로는 이 지역에서 자신의 권위를 확장하고자 했다. 그는 바르바라와 대리 결혼을 통해 그녀의 공작령을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지원을 받은 헨리 11세의 조카인 얀 2세 자간 공작이 공작령으로 쳐들어가 점령했다. 바르바라가 지참금을 잃게 되자, 보헤미아 왕실 의회는 그녀가 보헤미아로 오는 것을 금지했다.

울라슬로의 글로구프 점령 시도는 새로운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울라슬로와 프리드리히 3세는 1476년 12월 5일에 마차시 코르비누스에 대한 동맹을 재확인했다. 교황 사절 발다사레 데 피시아는 울라슬로가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영토를 침략할 경우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1477년 6월 10일에 울라슬로를 보헤미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로 임명했다. 이틀 후, 마차시 코르비누스는 황제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오스트리아를 침략했다. 울라슬로는 동맹인 황제에게 증원군을 보냈지만, 7월 말 이전에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철수했다. 결국 프리드리히 3세는 12월 1일에 마차시 코르비누스를 보헤미아의 합법적인 국왕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발다사레 데 피시아는 1478년 1월 15일에 울라슬로와 그의 지지자들을 파문했다. 울라슬로와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대표들은 새로운 협상을 시작했고, 양측 군주가 받아들인 타협안에 도달했다. 울라슬로와 마차시 코르비누스 모두 보헤미아 국왕 칭호를 사용할 권리가 확인되었지만, 마차시 코르비누스만이 서신에서 울라슬로를 국왕으로 지칭해야 했다. 보헤미아 왕관령은 분할되어 울라슬로는 보헤미아 본토를, 마차시 코르비누스는 모라비아, 실레시아, 상·하 루사티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 타협안은 또한 마차시 코르비누스 사후 울라슬로가 40만 금 플로린으로 세 지역을 되찾을 수 있도록 규정했다. 마차시 코르비누스와 울라슬로는 1479년 7월 21일 올로모우츠에서 열린 회의에서 성대한 의식을 통해 올로모우츠 평화 조약을 비준했다.

한편, 보헤미아 내부적으로는 후스파와 가톨릭의 대립이 계속되었으나, 1485년 쿠트나 호라에서 양측의 화해가 성립되어 종교적 공존이 인정되었다(쿠트나호라 평화). 같은 해에 울라슬로는 프라하 성의 재건에 착수했으며, 이때 대강당인 블라디슬라프 홀이 베네딕트 리트(Benedikt Rejt)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했다.

3. 2. 헝가리 왕위 계승 전쟁 (1490-1491)

마차시 1세 코르비누스 사후 헝가리에서의 왕위 계승 전쟁 (울라슬로 2세는 진한 빨간색으로 표시됨)


마차시 1세 코르비누스는 1490년 4월 6일 에서 예기치 않게 사망했다. 헝가리 귀족들이 5월에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해 모였을 때, 네 명의 후보가 왕위를 주장했다. 마차시 1세의 사생아인 야노시 코르비누스는 주로 남부 국경 지역에 영지를 소유한 남작과 고위 성직자(러렌츠 우이러키와 페테르 바러디, 칼로차 대주교 포함)의 지지를 받았다.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은 1463년의 비너 노이슈타트 평화 조약을 근거로 왕위를 주장했는데, 이 조약은 마차시가 적법한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 또는 그의 상속인이 헝가리를 상속하도록 규정했다. 울라슬로 2세는 마차시의 전임자인 라슬로 5세의 누이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각 아들에게 별도의 왕국을 확보해주고 싶어 울라슬로 2세의 동생인 얀 1세 알베르트를 지지했다.

대부분의 헝가리 남작과 고위 성직자들은 울라슬로 2세를 선호했는데, 그가 보헤미아에서 통치하면서 귀족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울라슬로 2세는 또한 대관식 후에 마차시의 부유한 미망인인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지지자인 스테판 V 바토리와 파울 키니지는 1490년 7월 4일 야노시 코르비누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헝가리 의회는 7월 15일 울라슬로 2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6월 말 프라하를 떠나 헝가리로 간 울라슬로 2세는 특별세 부과나 다른 "해로운 혁신" 도입을 삼가고 왕립 평의회와 긴밀히 협력하겠다는 칙서를 발표하며 귀족들의 환심을 샀다. 그는 8월 9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에 도착했다. 그는 다뉴브강 건너편 페슈트까지 진군한 동생 얀 1세 알베르트와 만났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울라슬로 2세는 9월 18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선출 후 약속대로 부다에 정착했다. 그가 부재한 동안 보헤미아는 프라하의 성주와 재상 등 고위 관료들이 관리했다. 모라비아, 슐레지엔, 루사티아는 마차시 코르비누스 사망 직후 울라슬로 2세의 통치를 인정했다. 울라슬로 2세는 올로모우츠 조약에 명시된 40만 금 플로린이 헝가리 재무부에 지불될 때까지 이 세 지역이 헝가리 왕관령에 속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이 돈은 지불되지 않았고 세 지역은 사실상 보헤미아 왕국의 일부로 남게 되었다.

얀 1세 알베르트는 울라슬로 2세의 대관식 이후에도 헝가리 왕위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490년 9월 에게르를 점령하고 카샤(현재 코시체)를 포위했다. 한편, 울라슬로 2세는 10월 4일 에스테르곰에서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했지만, 그녀가 헝가리 원정을 위해 상당한 자금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비밀로 유지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도 헝가리를 침공하여 11월 말까지 솜버트헤이, 베스프렘,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점령했다. 그러나 울라슬로 2세의 지지자들은 12월 초 카샤를 구원했고, 막시밀리안은 원정을 지원할 자금이 부족하여 연말 전에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얀 1세 알베르트는 1491년 2월 20일, 글로구프 공국과 슐레지엔 절반에 대한 종주권을 받는 대가로 헝가리 왕위 주장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가을에 다시 헝가리를 침입했지만, 스테판 자폴리야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동안 울라슬로 2세의 군대는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군대를 몰아냈다. 1491년 11월 7일에 체결된 프레스부르크 평화 조약에서 울라슬로 2세는 마차시 1세가 오스트리아에서 정복한 모든 영토를 포기했고, 자신이 아들 없이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상속받을 권리를 인정했다. 스테판 자폴리야는 1491년 12월 24일 에페르예스(현재 프레쇼프)에서 얀 알베르트를 최종적으로 격파하여 그가 헝가리 왕위 주장을 완전히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이로써 울라슬로 2세는 헝가리 왕위를 확고히 했다.

3. 3. 헝가리 통치 (1490-1516)

머처시 1세가 1490년 4월 6일 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헝가리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졌다.[1][2] 헝가리 귀족들은 5월에 모여 후계자를 선출하고자 했으며, 당시 왕위 후보는 네 명이었다.[2] 야노시 코르비누스는 주로 남부 국경 지역에 영지를 소유한 남작과 고위 성직자(러렌츠 우이러키와 페테르 바러디, 칼로차 대주교 포함)의 지지를 받았다.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은 1463년의 비너 노이슈타트 평화 조약을 언급했는데, 이 조약은 머처시가 적통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 황제 프리드리히 또는 그의 상속인이 헝가리를 상속받도록 규정했다. 울라슬로 2세는 머처시의 전임자 라슬로 5세의 누이의 맏아들로서 헝가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각 아들에게 별도의 왕국을 확보해주고 싶어 울라슬로 2세의 동생인 얀 올브라흐트를 제안했다.

대부분의 헝가리 남작과 고위 성직자들은 울라슬로 2세를 선호했는데, 그가 보헤미아에서 통치하면서 귀족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중앙 집권화를 추구했던 머처시 1세와 달리, 귀족들의 권한 확대를 용인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울라슬로 2세는 또한 대관식 후에 머처시의 부유한 미망인인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두 지지자인 스테판 바토리와 파울 키니지는 1490년 7월 4일 야노시 코르비누스를 격파했다. 헝가리 의회는 7월 15일 울라슬로 2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6월 말 프라하를 떠나 헝가리로 간 울라슬로 2세는 특별세 부과나 다른 "해로운 혁신" 도입을 삼가고 왕립 평의회와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약속하는 칙서를 발표하며 귀족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는 8월 9일 부다 (헝가리의 수도)에 도착했다. 그는 다뉴브강 맞은편 페슈트까지 진군한 그의 동생과 만났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울라슬로 2세는 9월 18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왕으로 대관했다. 그는 선출 후에 한 약속에 따라 부다에 정착했다. 그가 부재한 동안 보헤미아는 고위 관료들, 특히 프라하의 성주와 재상이 관리하는 귀족 과두 체제로 운영되었다. 모라비아, 슐레지엔, 루사티아는 머처시 코르비누스의 사망 직후 그의 통치를 인정했다. 울라슬로 2세는 올로모우츠 조약에 명시된 40만 금 플로린이 헝가리 재무부에 지불될 때까지 세 개의 주는 헝가리 왕관에 속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보헤미아 왕관령의 신분들은 그의 통치 하의 동군연합이 그 조항을 무효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결국 40만 금 플로린은 지불되지 않았다.

얀 올브라흐트는 울라슬로 2세의 대관 후에도 헝가리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9월에 에게르를 점령하고 카샤 (코시체)를 포위했다. 울라슬로 2세는 10월 4일 에스테르곰에서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했지만, 그녀가 헝가리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상당한 자금을 그에게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비밀로 유지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도 헝가리를 침공하여 11월 말까지 솜버트헤이, 베스프렘,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점령했다. 울라슬로 2세의 지지자들은 12월 초에 카샤를 구원했고, 막시밀리안은 그의 원정을 지원할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연말 전에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얀 올브라흐트는 1491년 2월 20일에 글로구프 공국과 슐레지엔의 절반에 대한 종주권을 대가로 헝가리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 그러나 얀 올브라흐트는 가을에 다시 헝가리를 침입했지만, 스테판 자폴리야가 그를 격퇴시켰다.

그 동안 울라슬로 2세의 군대는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의 군대를 몰아냈다. 1491년 11월 7일에 서명된 프레스부르크 평화 조약에서 울라슬로 2세는 머처시 코르비누스가 오스트리아에서 정복한 모든 영토를 포기했고, 아들이 없이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가가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상속받을 권리를 인정했다. 서포여이 이슈트반은 12월 24일 에페르예스 (프레쇼프)에서 얀 올브라흐트를 격파하여 그가 헝가리에 대한 주장을 최종적으로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울라슬로 2세는 헝가리에서 중앙 집권 정책을 추구하지 않고 귀족들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의 통치 기간(1490-1516년) 동안 헝가리 왕권은 귀족(마그나트)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었고, 귀족들은 이 권력을 이용하여 농민의 자유를 제한했다. 헝가리 의회는 다시 중요성을 되찾았으며, 왕권을 제한하는 여러 법률을 통과시켰다. 예를 들어, 1498년 의회는 왕립 평의회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최소 8명의 선출된 귀족 배심원이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교회 수입을 희생하여 귀족의 수입을 늘리고, 도시와 시민의 경제적 특권을 제한하는 법률도 통과시켰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은 계속되었다. 울라슬로 2세는 1497년 말, 오스만 제국에 대한 "헝가리의 방패" 역할을 하던 슬라보니아 영지에 별도의 문장을 수여하며 방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휴전은 1498년에 만료되었다. 1498년 헝가리 의회는 1플로린의 보통세 도입을 승인했지만, 토지 소유주가 세금의 절반을 보유하여 자신의 종자를 무장시키는 데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또한 가장 부유한 남작과 성직자들에게 자체 군대를 조직하도록 의무화하는 법령도 통과되었다. 울라슬로 2세는 1498년 7월 20일 크라쿠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얀 올브라흐트 및 몰다비아의 스테판 3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또한 야노시 코르비누스와 화해하고 그를 크로아티아 반으로 임명하여 크로아티아 방어를 맡겼다.

울라슬로 2세의 헝가리 통치는 대체로 안정적이었지만,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끊임없는 국경 압박을 받았고 죄르지 도자가 이끄는 농민 반란(1514년)을 겪기도 했다. 1500년 3월 11일, 보헤미아 의회는 왕권을 제한하는 새로운 토지 헌법을 채택했으며, 울라슬로 2세는 1502년에 이에 서명했다(이는 '울라슬로 토지 명령'으로 알려짐). 그는 또한 프라하 성 궁전 위에 거대한 블라디슬라프 홀 건설(1493-1502년)을 감독했다.

1514년 울라슬로 2세는 귀족 베르뵈치 이슈트반에게 법전 편찬을 명했다. 베르뵈치가 작성한 『삼부법서』는 최종적으로 왕의 승인을 얻지는 못했지만, 헝가리 관습법의 중요한 집대성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재판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일부 내용은 19세기까지 효력을 유지했다.

만년인 1515년 울라슬로 2세는 에서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동생인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와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분쟁 해결을 목적으로 했지만, 동시에 울라슬로 2세의 아들 러요시 2세가 막시밀리안 1세의 손녀 마리아와 결혼하고, 마리아의 오빠 페르디난트가 러요시 2세의 누나 안나와 결혼하는 이중 결혼 동맹(빈 이중 결혼)을 결정했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장차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할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듬해 1516년 울라슬로 2세는 60세로 사망했고, 아들 러요시 2세가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하자, 매형인 페르디난트가 양국의 왕위를 계승하여 합스부르크 군주국 시대를 열게 되었다.

4. 결혼과 자녀

울라슬로 2세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의 딸이자 글로구프 공작 헨리크 11세의 미망인인 바르바라 폰 호엔촐레른(1464년–1515년)이다. 1476년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에서 결혼했다.

두 번째 부인은 나폴리의 왕 페르디난도 1세의 딸이자 헝가리 왕 마차시 1세의 미망인인 나폴리의 베아트리체(1457년–1508년)이다.

세 번째 부인은 푸아-캉달의 안나(안나, 1484년–1506년)로, 푸아의 캉달 백작 가스통 2세의 딸이다. 1502년 9월 29일 대관식을 올렸으며, 이때 안나는 약 18세, 울라슬로는 46세였다. 안나는 1506년 아들 러요시 2세를 낳은 후 사망했다.

세 번째 부인 안나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안나''' (안나, 1503년–154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와 결혼했다. 남동생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후사 없이 사망하자, 안나와 페르디난트 1세 부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헝가리 왕위와 보헤미아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게 된다.
  • '''러요시 2세''' (1506년–1526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헤미아 왕 및 헝가리 왕이 되었다.

5. 죽음과 유산

울라슬로 2세는 60번째 생일 2주 후인 1516년 3월 13일 부더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6일 뒤 세케슈페헤르바르의 주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는데, 이곳은 전통적으로 헝가리 국왕들이 매장되는 장소였다. 그의 아들 러요시 2세는 이미 1508년 헝가리 왕, 1509년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왕위 계승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울라슬로 2세는 죽기 전 타마스 바코치, 요하네스 보르네미사, 게오르크 호엔촐레른을 어린 러요시 2세의 후견인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그는 40.3만헝가리 포린트에 달하는 막대한 부채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왕국을 남겼다.

1515년 울라슬로 2세는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 동생인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와 회의를 열어 빈 이중 결혼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아들 러요시 2세는 막시밀리안 1세의 손녀 마리아와, 딸 안나는 마리아의 오빠인 페르디난트와 결혼하게 되었다.

울라슬로 2세 사후 왕위를 계승한 러요시 2세는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와 싸우다 전사했다. 러요시 2세에게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매형이자 안나의 남편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헝가리의 왕위를 모두 계승했다. 이는 이후 수백 년간 중부 유럽을 지배하게 될 합스부르크 군주국 성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1000ev.hu http://www.1000ev.hu[...]
[2]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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