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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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고슬라비아 전선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군사적 사건들을 의미한다. 배경으로는 추축국과 제국 열강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려는 정부의 노력, 내부적 긴장, 그리고 쿠데타 등이 있었다. 1941년 유고슬라비아는 추축국에 의해 침공당하고 분할되었으며, 이에 파르티잔과 체트니크를 중심으로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다. 주요 군사 작전으로는 추축국의 반파르티잔 공세와 파르티잔의 게릴라전 등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전쟁 범죄와 학살이 발생했다. 연합국의 지원을 받은 파르티잔은 1945년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켰고, 이후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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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전선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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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위치 | 유고슬라비아 |
기간 | 1941년 4월 6일 – 1945년 5월 25일 () |
결과 |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연합군 승리 발칸반도에서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격퇴 크로아티아 독립국, 세르비아 구국 정부, 체트니크 및 기타 추축국 협력자들의 패배 및 전복 공산주의 지도하의 파르티잔이 공식적으로 유고슬라비아 군주제 폐지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통치하에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 공화국 수립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전후 보복성 대량 학살과 탄압 |
교전 세력 | |
1941년 4월 | 독일 |
1941년 ~ 1943년 9월 | 독일 페차냐크 체트니크}}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
1943년 9월 ~ 1945년 | 독일 몬테네그로 }} 슬로베니아 향토방위대 체트니크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
1941년 ~ 1943년 | 체트니크 지원: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 |
1941년 ~ 1943년 |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지원: |
1943년 ~ 1945년 | DF 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 이탈리아 불가리아 LANÇ 유고슬라비아 망명 정부 |
지휘관 및 지도자 | |
추축국 | 막시밀리안 폰 바이크스 알렉산더 뢰어 비토리오 암브로시오 마리오 로아타 보리스 3세 보그단 필로프 호르티 미클로시 안테 파벨리치 슬라브코 크바테르니크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자라이제 오스토지치 도브로슬라프 제프데비치 파블레 두리치체 페타르 바초비치 맘칠로 두지치 밀란 네디치 코스타 페차냐크 레온 루프니크 젬 하사 |
연합군 | 뒤상 시모비치 밀로라드 페트로비치 요시프 티토 밀로반 디야라스 알렉산다르 랑코비치 코스타 나츠 페코 답체비치 코차 포포비치 페타르 드라브친 아소 요바노비치 사바 코바체비치† 이반 코츠냐크 보리스 키드리치 엔베르 호자 학시 르레시 아바즈 쿠피 메흐메트 세후 표도르 톨부힌 블라디미르 스토이체프 |
병력 규모 | |
추축국 | 독일: 300,000명 (1944년) 이탈리아: 321,000명 (1943년) 크로아티아 독립국: 170,000명 (1943년), 130,000명 (1945년) 불가리아: 70,000명 (1943년) 세르비아 구국 정부: 60,000명 (1944년) 슬로베니아 향토방위대: 12,000명 (1944년) |
연합군 | 유고슬라비아 왕국: 700,000명 (1941년) (400,000명은 준비 부족) 체트니크: 93,000명 (1943년) |
파르티잔 및 지원군 | 파르티잔: 100,000명 (1943년), 800,000명 (1945년) 소련 및 불가리아: 580,000명 (1944년) 이탈리아: 40,000명 (1943년) |
사상자 규모 | |
추축국 | 독일: 사망: 19,235-103,693명 실종: 14,805명 이탈리아: 사망: 9,065명 부상: 15,160명 실종: 6,306명 크로아티아 독립국: 사망 99,000명 |
파르티잔 | 파르티잔: 사망: 245,549명 부상: 399,880명 부상으로 인한 사망: 31,200명 실종: 28,925명 |
민간인 피해 | |
민간인 사망자 | 약 514,000명–581,000명 |
총 유고슬라비아 사상자 | 약 850,000명–1,200,000명 |
2. 배경
전쟁 발발 전, 밀란 스토야디노비치 정부(1935–1939)는 이탈리아 왕국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 제3공화국과의 우호 조약을 연장함으로써 추축국과 제국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중립적인 지위를 추구하려 했다. 동시에 크로아티아 지도자들이 더 큰 수준의 자치를 요구하면서 국가는 내부적인 긴장으로 불안정해졌다. 스토야디노비치는 1939년 섭정 파블 공에 의해 해임되었고, 드라기샤 츠베트코비치로 교체되었으며, 그는 1939년 크로아티아 지도자 블라드코 마체크와 타협하여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세웠다.
유고슬라비아 저항군은 파르티잔과 체트니크 두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파르티잔은 공산주의 주도 운동으로, 범유고슬라비아적 관용(형제애와 단결)을 옹호하고 공화주의, 좌익, 자유주의 요소를 통합했다. 반면 체트니크는 보수 왕당파 및 민족주의 세력으로, 주로 세르비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초기에는 체트니크가 서방 연합국의 지원을 받았고, 파르티잔은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 합의는 긴장을 완화하기보다는 국가 통치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친파시스트 우스타샤는 추축국과 동맹을 맺은 독립적인 크로아티아를 추구했고, 세르비아 대중과 군부 내에서는 서유럽 제국과의 동맹을 선호했으며, 당시 금지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소련을 자연스러운 동맹으로 여겼다.
1940년 5월 프랑스 멸망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섭정 파블 공과 그의 정부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추축국과의 타협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발칸반도에 또 다른 전선을 만드는 데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유고슬라비아는 전쟁 첫 해 동안 평화를 유지했지만,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1939년 4월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을 감행했고, 1940년 10월에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을 시작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유고슬라비아는 잠재적인 연합국 지원으로부터 지리적으로 고립되었다. 정부는 추축국과의 협상에서 가능한 적은 양보를 하면서 협력하려 했고, 동시에 연합국 및 소련과 비밀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국가를 전쟁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실패했다. 영향력 있는 세르비아계 유대인 대위 데이비드 알바라가 이끄는 미국의 비밀 임무는 예상되는 침공을 위한 무기 구매 자금 확보를 목표로 했지만 성과가 없었고,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와 우호 조약을 체결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유고슬라비아 대사 밀란 가브릴로비치를 추방했다. ( 바르바로사 작전 전인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과 소련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준수했고, 1939년 8월에 당사자들은 조약을 체결했으며, 1940년 가을에는 독일과 소련이 독소 추축국 회담을 통해 삼국 동맹 조약에 소련의 잠재적 가입에 대해 논의했다.)
3.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분할 (1941)
1941년 4월 6일,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그들의 동맹 헝가리에 의해 사방에서 침공을 받았다. 베오그라드는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에 의해 폭격당했다. 유고슬라비아 이후의 국가들에서 '4월 전쟁'으로 알려진 이 전쟁은 10일 남짓 지속되었으며, 4월 17일 유고슬라비아 왕립군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독일군 (''육군 (Wehrmacht)'')에 비해 형편없이 장비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유고슬라비아군은 모든 국경을 방어하려 했고, 부족한 자원을 얇게 분산시켰다. 또한, 많은 수의 인구가 싸우기를 거부하고 대신 독일군을 정부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자로 환영했다. 이는 각 개별 민족 집단이 남슬라브 국가가 장려한 통일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반추축 저항의 두 가지 다른 개념, 즉 왕당파 체트니크와 공산주의 지도부의 파르티잔이 등장했다.[8]
주요 구성 민족 집단 중 슬로베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은 세르비아 군주제가 지속되는 유고슬라비아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9] 침공에 대한 유일한 효과적인 반대는 세르비아 자체에서 온 부대였다. 세르비아 참모부는 유고슬라비아를 세르비아가 여러 방식으로 통치하는 "대세르비아" 문제에 대해 일치된 입장을 보였다. 침공 직전, 유고슬라비아 현역 명단에는 165명의 장군이 있었는데, 이 중 4명을 제외한 모든 장군이 세르비아인이었다.
항복 조건은 매우 가혹했으며, 추축군은 유고슬라비아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북부 슬로베니아를 합병하는 한편, 세르비아 잔여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점령을 유지했다. 독일은 또한 4월 10일에 선포된 크로아티아 독립국 (NDH)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는 오늘날의 크로아티아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현대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체를 포함했지만, 5월 18일 NDH와 이탈리아 사이에 체결된 로마 조약은 NDH가 이탈리아의 실질적인 보호령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슬로베니아의 나머지 지역, 코소보, 크로아티아 연안의 해안 및 내륙 지역, 그리고 달마티아 해안 지역의 상당 부분 (거의 모든 아드리아 해 섬과 코토르 만 포함)을 얻었다. 또한 몬테네그로 이탈리아 총독부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으며,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 왕위를 부여받았지만, 그 안에서 실질적인 권력은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독일과 함께 NDH의 국경 내에서 사실상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헝가리는 헝가리 제3군을 파견하여 세르비아 북부의 보이보디나를 점령했으며, 이후 바라냐, 바치카, 메지무르예, 프레크무르예의 일부를 강제로 합병했다.
불가리아군은 1941년 4월 19일에 진입하여 오늘날의 거의 모든 북마케도니아와 동부 세르비아의 일부 지구를 점령했으며, 이는 그리스 서부 트라키아와 동부 마케도니아 (에게해 주)와 함께 5월 14일에 불가리아에 합병되었다.
망명 정부는 이제 연합국에 의해서만 인정받았다. 추축군은 동맹국의 영토 획득을 인정했다.
4. 저항 운동의 전개
파르티잔은 처음에는 작고 무장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지만,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들의 경험과 민족성을 초월한 공산주의 이념 덕분에 이점을 가졌다. 슬로베니아에서는 TIGR 회원들이 파르티잔 훈련을 도왔다. 또한, 파르티잔은 국가 경계를 넘어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큰 기동성과 잠재적 신병 풀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마케도니아와 슬로베니아 파르티잔은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마케도니아 인민 해방군과 슬로베니아 파르티잔이라는 별도의 하위 군대를 창설했다. 슬로베니아 파르티잔은 슬로베니아 인민 해방 전선이 이끌었다.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소련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게릴라전을 벌일 공산주의자들을 준비시켰다. 전쟁 직전, 수백 명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소련과 스페인에서 특별 "파르티잔 과정"을 수료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코민테른으로부터 지원 명령을 받았다. 같은 날, 크로아티아 공산주의자들은 제1 시사 파르티잔 분견대를 창설하여 저항 활동을 시작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국민 해방 파르티잔 부대의 최고 참모부가 구성되었고, 7월 4일 공식적인 봉기 명령이 내려졌다. 7월 7일, 벨라 크르크바 사건이 발생하여 세르비아 봉기가 시작되었다. 8월 10일에는 "광부 공화국"이 선포되기도 했다.
1941년 9월, 파르티잔은 자그레브 중앙 우체국 파괴 공작을 조직했다. 추축국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저항을 제거하기 위해 7차례의 주요 작전을 포함한 수많은 공세를 펼쳤다.
제1차 반파르티잔 공세는 1941년 가을 파르티잔이 세르비아 서부에 설립한 우지체 공화국을 상대로 수행되었다. 독일군은 이 영토를 재점령했고, 파르티잔은 보스니아로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파르티잔과 체트니크 간의 협력은 무너지고 적대 관계로 바뀌었다.
1941년 12월 22일, 파르티잔은 지역을 벗어나 작전 가능한 제1차 프로레타리아 기습 여단을 창설했다. 이날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날"이 되었다.
한편,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크로아티아 국토 방위군(''Hrvatsko domobranstvo'')을 창설하여 신생 국가 방어 임무를 맡겼다.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 점령 임무에 24개 사단과 3개 해안 여단을 배정했다.
4. 1. 체트니크
체트니크는 처음에 서방 연합국의 지원을 받았다(1943년 12월 테헤란 회담까지). 1942년, ''타임지''는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의 "성공"을 칭찬하고 그를 나치 점령하의 유럽의 유일한 자유 수호자로 묘사하는 기사를 실었다.[1]
이 시기 티토의 유격대는 독일군과 더 적극적으로 싸웠다. 티토와 미하일로비치에 대해서는 독일군이 그들의 목에 100000Reichsmark의 현상금을 걸었다. 체트니크는 "공식적으로" 독일군과 우스타셰의 적대 세력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탈리아와 은밀한 거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1] 제2차 적군 공세는 1942년 1월 동부 보스니아에서 유격대를 상대로 감행된 추축국의 합동 공격이었다. 유격대는 다시 한번 포위를 피했고, 사라예보 근처 이그만 산을 넘어 후퇴해야 했다.[1]
군사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서방 연합국의 요원들은 유격대와 체트니크 모두에 잠입했다. 저항 단체와의 연락을 통해 수집된 정보는 보급 임무의 성공에 매우 중요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서의 연합국 전략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정보 수집 노력은 결국 체트니크의 쇠퇴와 티토의 유격대에 의한 몰락으로 이어졌다. 1942년에는 비록 보급품이 제한적이었지만, 각각에 대한 지원이 동등하게 이루어졌다.[1]
4. 2. 파르티잔
유고슬라비아 저항군은 처음부터 두 파벌로 나뉘었다. 하나는 범유고슬라비아적 관용(형제애와 단결)을 옹호하고 유고슬라비아 정치의 공화주의, 좌익, 자유주의 요소를 통합한 공산주의 주도 운동인 파르티잔이었다. 다른 하나는 점령된 유고슬라비아의 세르비아 인구로부터 거의 독점적인 지지를 받는 보수 왕당파 및 민족주의 세력인 체트니크였다. 처음에는 파르티잔 부대가 비교적 작고 무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으며 기반 시설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군사 및 준군사 조직에 비해 두 가지 주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이점은 작지만 가치 있는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의 소규모 인원이었다.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유고슬라비아와 매우 유사한 상황에서 벌어진 현대전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슬로베니아에서는 파르티잔 역시 숙련된 TIGR 회원들을 동원하여 병력을 훈련시켰다.
두 번째 장점은 파르티잔이 민족성이 아닌 공산주의 이념에 기초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 경계를 넘어 지지를 얻었으며, 이는 크로아티아인 또는 세르비아인이 다수인 영토로 제한된 다른 준군사 조직과는 달리 거의 모든 국가에서 최소한 어느 정도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마케도니아와 슬로베니아 파르티잔의 활동은 유고슬라비아 인민 해방 전쟁의 일부였지만, 지역 공산주의자들의 강력한 자율주의 경향으로 인해 마케도니아와 슬로베니아의 특수한 상황은 각각 마케도니아 인민 해방군과 슬로베니아 파르티잔으로 불리는 별도의 하위 군대를 창설하게 되었으며, 슬로베니아 파르티잔은 슬로베니아 인민 해방 전선이 이끌었다.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소련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게릴라전을 벌일 공산주의자들을 준비시켰다. 전쟁 직전, 수백 명의 미래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소련과 스페인에서 소련 군사 정보부가 조직한 특별 "파르티잔 과정"을 수료했다.[9]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공격한 날, 유고슬라비아 공산당(CPY)은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코민테른으로부터 소련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0] 같은 날, 크로아티아 공산주의자들은 제1 시사 파르티잔 분견대를 창설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점령된 유고슬라비아에서 저항 운동에 의해 형성된 최초의 무장 반파시스트 저항 부대였다.[11] 분견대는 창설 다음 날부터 저항 활동을 시작하여 인근 철도 노선에 대한 파괴 공작과 우회 공격을 시작하고, 전신주를 파괴하고, 주변 마을의 시청 건물을 공격하고, 무기와 탄약을 압수하고, 시사 및 인근 마을에 공산주의 선전 네트워크를 구축했다.[10][11] 동시에 CPY의 세르비아 지방 위원회는 세르비아에서 무장 봉기를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의장을 맡을 유고슬라비아 국민 해방 파르티잔 부대의 최고 참모부를 구성했다.[12] 7월 4일, 봉기를 시작하라는 공식 명령이 내려졌다.[12] 7월 7일, 벨라 크르크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나중에 세르비아 봉기의 시작으로 간주되었다. 1941년 8월 10일, 산악 마을인 스탄울로비치에서 파르티잔은 코파오니크 파르티잔 분견대 본부를 창설했다. 인근 마을로 구성된 해방된 지역은 "광부 공화국"이라고 불렸으며, 유고슬라비아 최초였고 42일 동안 지속되었다.
1941년 9월, 파르티잔은 자그레브 중앙 우체국 파괴 공작을 조직했다.
점령에 대한 저항의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추축국은 수많은 소규모 공세를 펼쳤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저항을 전부 또는 대부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7차례의 주요 추축국 작전이 있었다.
제1차 반파르티잔 공세는 1941년 가을 파르티잔이 세르비아 서부에 설립한 해방된 영토인 "우지체 공화국"을 상대로 추축국이 수행한 공격이었다. 1941년 11월, 독일군은 이 영토를 공격하여 재점령했고, 파르티잔 부대의 대다수는 보스니아로 탈출했다. 이 공세 동안 파르티잔과 왕당파 체트니크 운동 간의 미약한 협력이 무너지고 공개적인 적대 행위로 바뀌었다.
1941년 12월 22일, 파르티잔은 제1차 프로레타리아 기습 여단을 창설했는데, 이는 지역을 벗어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최초의 정규 파르티잔 군대였다. 12월 22일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날"이 되었다.
5. 주요 군사 작전
1943년 초, 추축군은 파르티잔을 거의 격파할 뻔한 두 차례의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독일 암호명으로 Fall Weiss(네레트바 전투)와 Fall Schwarz(수체스카 전투)로 알려진 이 작전들은 각각 제4차, 제5차 적군 공세라고도 불린다. 1943년 1월부터 4월까지 이어진 네레트바 전투에서 추축군은 파르티잔 부대를 서부 보스니아에서 북부 헤르체고비나로 밀어붙였고, 파르티잔은 네레트바 강을 건너 후퇴했다. 수체스카 전투는 1943년 5월과 6월에 보스니아 남동부와 몬테네그로 북부에서 벌어졌으며, 파르티잔 부대는 포위되었다.
1943년 3월, 독일군과 파르티잔 간의 협상이 보스니아 고르니 바쿠프에서 시작되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핵심 장교들은 포로 교환, 포로 처우에 관한 국제법 시행, 정치적 문제 등을 제안했다.
1945년 3월 20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군은 모스타르-비셰그라드-드리나 지역에서 총공세를 시작했다. 티토 원수는 4개의 군으로 편성된 약 80만 명의 파르티잔군을 지휘했다.
군 | 지휘관 |
---|---|
제1군 | 페코 다프체비치 |
제2군 | 코차 포포비치 |
제3군 | 코스타 나지 |
제4군 | 페타르 드라프신 |
이에 맞서 독일 E 집단군(''Heeresgruppe E'')의 알렉산더 뢰어 장군은 7개의 군단을 지휘했다.
군단 |
---|
제15산악군단 |
제15 코사크 군단 |
제21산악군단 |
제34 보병군단 |
제69 보병군단 |
제97 보병군단 |
비하치는 총공세 당일 파르티잔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페타르 드라프신의 제4군은 제15 SS 코사크 기병군단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리카와 크로아티아 해안 지역, 섬들을 해방시켰다. 5월 1일, 제4군은 트리에스테에 서방 연합군보다 먼저 도착했다. 코차 포포비치의 제2군은 보스나강을 건너 도보이를 점령하고 우나강에 도달했다. 4월 6일, 파르티잔군은 독일 제21군단으로부터 사라예보를 탈환했다. 4월 12일, 코스타 나지의 제3군은 드라바강을 건너 포드라비나를 통과하여 자그레브 북쪽에 도달했고, 드라보그라드 지역에서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의 옛 국경을 넘어갔다. 페코 다프체비치의 제1군은 시르미아에서 독일 제34군단의 요새화된 전선을 돌파하고 자그레브를 향해 진격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은 무조건 항복했지만,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5월 14일부터 15일까지 폴라야 전투가 벌어졌고, 오자크 전투는 1945년 4월 19일부터 5월 25일까지 지속되어 유럽에서의 마지막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가 되었다.[1]
6. 전쟁범죄와 학살
민간인에 대한 전쟁 범죄와 잔혹 행위는 만연했다. 전투와 무관한 희생자에는 유대인 인구의 대다수가 포함되었으며, 그들 중 다수는 강제 수용소 및 절멸 수용소(예: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 스타라 그리슈카 강제 수용소, 반지차 강제 수용소, 사이미슈테 강제 수용소 등)에서 사망했는데, 이는 괴뢰 정권이나 점령군이 직접 운영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우스타샤 정권(주로 크로아티아인, 그 외 무슬림 등)은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 및 반파시즘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집단 학살을 저질렀다. 체트니크(주로 세르비아인, 그 외 몬테네그로인 등)는 무슬림, 크로아티아인, 친파르티잔 세르비아인에 대해 집단 학살[29][30]을 자행했고, 이탈리아 점령 당국은 슬로베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민족 청소 (이탈리아화)를 선동했다. 국방군은 저항 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민간인 대량 처형을 실시했다(예: 크라구예바츠 학살과 크랄레보 학살). SS 사단 "프린츠 오이겐"은 많은 수의 민간인과 전쟁 포로를 학살했다. 헝가리 점령군은 저항 활동 진압을 구실로 바치카 남부에서 대규모 습격을 감행하여 민간인(주로 세르비아인과 유대인)을 학살했다.
전쟁의 마지막 단계와 그 이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당국과 파르티잔군은 추축국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보복했다.
우스타샤는 1929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한 크로아티아의 극단적 민족주의 및 파시스트 운동으로, 안테 파벨리치가 이끌었으며,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독일이 세운 새로운 크로아티아 독립국(NDH)을 장악했다.[31] 우스타샤는 영토 내에서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을 몰살시켜 인종적으로 순수한 크로아티아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32] 주요 표적은 약 200만 명에 달하는 세르비아인이었다.[33]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은 세르비아인의 3분의 1을 죽이고, 3분의 1을 추방하며, 나머지 3분의 1을 강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34] 세르비아인 학살은 1941년 4월 28일 구도바츠 마을에서 처음 발생했으며, 거의 200명의 세르비아인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그 후 몇 주와 몇 달 동안 NDH 전역의 마을에서 대량 학살이 발생하면서 세르비아인을 겨냥한 우스타샤의 폭력 사태를 촉발했다.[35] 특히 바니야, 코르둔, 리카, 보스니아 북서부 및 헤르체고비나 동부 지역에서 학살이 발생했다. 시골 마을의 세르비아인들은 다양한 도구로 참살당하거나, 산 채로 구덩이와 협곡에 던져지거나, 교회에 갇힌 후 불태워졌다.[36] 우스타샤 민병대는 마을 전체를 파괴하고, 종종 남성을 고문하고 여성을 강간했다.[37] NDH에 살고 있던 세르비아인의 약 6명 중 1명이 학살의 희생자였으며, 이는 이 지역의 거의 모든 세르비아인이 전쟁에서 가족을 잃었고, 대부분 우스타샤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의미한다.[38]
우스타샤는 NDH 전역에 수용소를 설치했다. 일부는 정치적 반대자 및 국가의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을 구금하는 데 사용되었고, 일부는 인구의 추방 및 이송을 위한 경유지 및 재정착 수용소였으며, 다른 수용소는 대량 학살을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가장 큰 수용소는 자그레브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5개의 하위 수용소로 구성된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였다.[37] 이 수용소는 증언에 묘사된 야만적이고 잔혹한 살인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39] 1941년 말까지 NDH 당국은 세르비아인과 로마인과 함께 야도브노 강제 수용소, 크루슈치차 강제 수용소, 로보르 강제 수용소, 자코보 억류 수용소, 테냐 강제 수용소 및 야세노바츠를 포함한 수용소에 해당 국가 유대인의 대부분을 수감했다. NDH의 거의 모든 로마인도 우스타샤에 의해 살해되었다.[37]
체트니크는 처음에는 추축국에 저항했지만[40] 점차 이탈리아, 독일, 그리고 일부 우스타샤 군대와 협력한 세르비아 왕당파이자 민족주의 운동으로, 비세르비아인, 주로 무슬림과 크로아티아인을 전후 국가에 통합될 영토에서 제거하여 대 세르비아를 건설하려 했다. 체트니크는 점령한 마을에서 무슬림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41] 이러한 학살은 주로 보스니아 동부, 고라ž데, 포차, 스레브레니차, 비셰그라드와 같은 마을과 지방 자치 단체에서 발생했다.[41] 이후, 무슬림에 대한 "정화 작전"은 산자크의 여러 군에서 일어났다.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작전은 규모는 작았지만 행동은 유사했다. 크로아티아인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부 달마티아, 그리고 리카에서 살해당했다.
세르비아에서 저항을 진압하고, 반대 세력에 보복하며,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 독일군은 독일군 1명이 사망할 때마다 인질 100명을 사살하고, 독일군 1명이 부상당할 때마다 인질 50명을 사살하는 공식을 고안했다. 주로 처형 대상이 된 것은 유대인과 세르비아 공산주의자들이었다.[42] 가장 두드러진 예는 1941년 10월 크랄레보와 크라구예바츠 마을에서 발생한 학살이었다. 독일군은 또한 강제 수용소를 설치했으며, 밀란 네디치의 괴뢰 정부와 기타 협력 세력의 도움을 받아 유대인 박해를 자행했다.
1941년 4월,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의 광대한 지역을 병합하거나 점령하는 한편, 류블랴나 주, 고르스키 코타르, 달마티아 총독부와 대부분의 크로아티아 섬을 이탈리아에 직접 병합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파르티잔이 주도하는 격렬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이탈리아는 "즉결 처형, 인질 억류, 보복, 억류, 가옥 및 마을 방화" 전술을 채택했다.[43] 이는 특히 이탈리아 당국이 슬로베니아 민간인을 공포에 떨게 하고 이 지역을 이탈리아화하려는 목적으로 강제 수용소로 추방했던 류블랴나 주에서 그러했다.[44]
1941년부터 헝가리가 점령하여 병합한 지역인 바치카에서 수천 명의 세르비아인과 유대인이 헝가리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여러 고위 군사 관계자들도 이 잔학 행위에 연루되었다.[45]
파르티잔은 전쟁 중과 전쟁 후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다.[46] 다수의 파르티잔 부대와 일부 지역의 현지 주민들은 전쟁 직후 포로와 기타 추정되는 추축국 동조자, 협력자, 파시스트 및 그 친척들을 상대로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블라이부르크 송환(Bleiburg repatriations) 과정에서, 파르티잔의 진격을 피해 도망치던 수만 명의 포로와 민간인(주로 NDH와 관련된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등)에 대한 강제 행군과 처형이 있었다. 만행에는 코체브스키 로그 학살(Kočevski Rog massacre), 이스트라의 이탈리아인 학살(포이베 학살)과 1944–45년 세르비아 공산주의 숙청(Communist purges in Serbia in 1944–45) 기간 동안 추축군과 연관된 세르비아인, 헝가리인, 독일인에 대한 숙청이 포함되었다. 또한 전쟁 후 발생한 독일인 추방도 있었다.[47]
7. 연합국의 지원과 유고슬라비아 해방
1944년 1월, 티토의 부대는 바냐루카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티토는 철수해야 했지만, 미하일로비치와 그의 부대는 서방 언론으로부터 활동 부족으로 지적받았다.[15]
일곱 번째 적군 공세는 1944년 봄 서부 보스니아에서 있었던 마지막 추축국의 공격으로,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암살하고 파르티잔 운동 지도부를 제거하려는 실패한 시도인 ''뢰셀스프룽 작전(기사의 도약)''을 포함했다. 동시에 연합군의 공중 지원과 붉은 군대의 지원을 받아 파르티잔은 중앙 세르비아로 눈을 돌렸다. 주요 목표는 바르다르 강과 모라바 강 계곡의 철도 통신을 방해하고, 독일군이 그리스에서 3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철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연합 공군은 1,973대의 항공기(대부분 미 제15 공군)를 유고슬라비아 상공에 투입하여 3,000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1944년 8월 17일, 티토는 모든 협력자들에게 사면령을 제안했다. 9월 12일, 페타르 2세는 런던에서 메시지를 방송하여 모든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에게 "마르샬 티토의 지도 아래 국민 해방군에 합류하라"고 촉구했다. 이 메시지는 체트니크의 사기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쳐 많은 체트니크가 나중에 파르티잔으로 전향했다. 그 뒤를 이어 상당수의 전직 크로아티아 국토 방위군과 슬로베니아 국토 방위군 병력이 합류했다.
9월, 친소련 불가리아 정부의 지도 아래 총 45만 5천 명의 4개 불가리아군이 동원되었다. 9월 말까지 붉은 군대(제3 우크라이나 전선) 병력이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국경에 집결했다. 1944년 10월 초, 약 34만 명으로 구성된 3개의 불가리아군[19]이 붉은 군대와 함께 점령된 유고슬라비아로 재진입하여 소피아에서 니시, 스코페, 프리슈티나로 이동하여 그리스에서 철수하는 독일군을 차단했다.[20][21] 붉은 군대는 베오그라드 공세를 조직하여 10월 20일에 도시를 점령했다.
한편, 파르티잔은 독일 E집단군이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그리스와 알바니아를 포기하고 북쪽 방어선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독일군의 철수를 막으려 했다. 1944년 9월, 연합군은 작전 랫위크를 시작하여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를 통한 독일군의 이동을 좌절시키려 했다. 영국은 파르티잔이 부족했던 포병과 공병으로 구성된 작전 플록소('플로이드포스'로 알려짐)를 시작하는 강력한 전투 부대도 파견했다. 영국 포병과 함께 파르티잔은 독일군을 막아 10월과 12월 사이에 리산과 포드고리차를 해방시켰다. 이 무렵 파르티잔은 유고슬라비아 동부 절반(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뿐만 아니라 달마티아 해안 대부분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베르마흐트와 우스타셰가 통제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군대는 1944~45년 겨울까지 시르미아 전선에서 E집단군의 발칸 반도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요새를 구축했다.
파르티잔 병력 수를 늘리기 위해 티토는 1944년 11월 21일에 다시 사면령을 제안했다. 1944년 11월, 우스타셰 민병대와 크로아티아 국토 방위군의 부대가 재편성되어 크로아티아 독립국 군대를 형성했다.
8. 전후 유고슬라비아
1945년 3월 8일,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총리로, 이반 슈바시치를 외무 장관으로 하는 연립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베오그라드에서 구성되었다.[15] 5월 5일, 트리에스테에서 북서쪽으로 50km 떨어진 팔마노바 마을에서 세르비아 자원군단 병력 2,400명에서 2,800명 사이가 영국군에 항복했다.[15] 5월 12일, 드라바 강변의 운터베르겐에서 약 2,500명의 세르비아 자원군단 병력이 추가로 영국군에 항복했다.[15] 5월 11일과 12일,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에 도착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부대가 영국군을 괴롭혔다. 베오그라드에서 유고슬라비아 연합 정부 주재 영국 대사는 티토에게 유고슬라비아군이 오스트리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1945년 5월 15일, 크로아티아 국방군, 우스타샤, 제15SS 코사크 기병군단, 세르비아 국가 경비대 잔당, 세르비아 자원군단 등 대규모 병력이 오스트리아 남부 국경의 블라이부르크 마을 근처에 도착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 대표들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영국에 항복을 협상하려 했지만 무시당했다.[15] 이 병력의 대부분은 킬홀 작전의 일환으로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넘겨졌고, 송환 이후 파르티잔은 전쟁 포로를 잔혹하게 대했다.[15] 파르티잔의 행동은 복수와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무장 투쟁의 지속 가능성을 억제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행해졌다.[15]
같은 날, 티토는 파르티잔군을 오스트리아에서 연합군 통제 하에 두었다. 며칠 후 그는 철수에 동의했다. 5월 20일까지 오스트리아에 주둔한 유고슬라비아군은 철수를 시작했다. 6월 8일, 미국, 영국, 유고슬라비아는 트리에스테의 통제에 합의했다. 11월 11일, 유고슬라비아에서 의회 선거가 치러졌다.[23] 이 선거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경찰, 사법부, 언론을 장악했기 때문에 중요한 이점을 가졌다. 그러한 이유로 야당은 선거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았다.[15] 11월 29일, 선거 결과에 따라 페타르 2세는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유고슬라비아의 제헌 의회에 의해 폐위되었다.[24] 같은 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유고슬라비아 의회 첫 회의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수립되었다. 티토는 총리로 임명되었다. 마케도니아 공산당의 자치주의 분파는 1945년에 밀려났다.
1946년 3월 13일, 미하일로비치는 유고슬라비아 국가 안보부 요원(OZNA)에 체포되었다.[25] 6월 10일부터 7월 15일까지 그는 반역죄와 전쟁 범죄로 재판을 받았다. 7월 15일,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다.[26] 7월 16일, 사면 요청은 국민 의회 의장단에 의해 거부되었다. 7월 18일 이른 시간에 미하일로비치는 다른 9명의 체트니크와 네디치의 장교들과 함께 리시치 포토크에서 처형되었다.[27] 이 처형으로 공산주의 파르티잔과 왕당파 체트니크 간의 제2차 세계 대전 시대의 내전이 사실상 종식되었다.[28]
9. 한국과의 역사적 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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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같이 보기
- 제2차 세계 대전
-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 발칸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 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
- 프라하 공세
-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
- 제8군 (영국)
- 제4군 (불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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