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바 이와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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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나바 이와키치는 1876년 니가타현 무라카미시에서 태어나, 도쿄상과대학과 도쿄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했다. 러일 전쟁 통역, 만철조사부, 육군대학교 교관 등을 거쳐 1922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 겸 간사, 1925년부터 수사관으로 활동하며 역사서 《조선사》 편집을 담당했다. 1932년 교토제국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를 역임하다 1940년 신징에서 사망했다. 그는 '만선사관'을 통해 조선 민족 기원을 대륙 이주민으로 규정하고 '만선불가분론'을 주장했으며, 광해군 중립 외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백제 건국과 만리장성에 대한 독자적인 주장을 펼쳤으며, 《조선문화사연구》, 《청조전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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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바 이와키치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나바 이와키치 |
다른 이름 | 고바야시 (小林) 군잔 (君山) |
출생 | 1876년 12월 4일 |
출생지 | 일본, 니가타현 |
사망 | 1940년 5월 23일 |
사망지 | [[파일:Flag of Manchukuo.svg|border|26px]] 만주국, 신징특별시 |
국적 | 일본 |
학력 | |
모교 | 고등상업학교 |
경력 | |
직장 | 건국대학 |
활동 기간 | 불명 |
연구 분야 | |
주요 관심사 | 동양사(조선사・중국사) |
가족 | |
배우자 | 정보 없음 |
자녀 | 정보 없음 |
기타 | |
URL | 정보 없음 |
2. 생애
1876년(메이지 9년), 현재의 니가타현무라카미시에서 태어났다. 1900년, 고등상업학교부속외국어학교 중국어부를 졸업한 후, 중국의 베이징으로 유학했다. 1904년에 발발한 러일 전쟁에 육군의 통역으로 종군했으며, 그 후 오사카 상선에 잠시 근무했다.
이나바 이와키치는 조선 민족이 독자적인 민족이 아니라 대륙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륙에서 권력 다툼에 패한 자들이 조선으로 도망쳐 왔으며, 따라서 조선인 중에는 만주인의 피가 많이 섞여 있다고 보았다.[10]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 단군 신화가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이나바 이와키치는 단군 신화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만선불가분론'을 주장했다. 그는 조선 역대 왕가가 만주나 대륙에서 패배하여 조선으로 도망친 것이며, 조선과 만주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이므로 조선만의 독자적인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11]
1909년에 만철조사부에 들어가 '만주 조선 역사 지리 조사'에 종사했다. 1915년, 육군대학교의 교관으로 부임하여 주로 중국 정세에 대해 강의했다. 1922년, 조선총독부조선사편찬위원회의 위원 겸 간사로 임명되었으며, 1925년부터는 수사관으로서 역사서 『조선사』의 편집을 담당했다. 1932년, 교토제국대학에서 조선사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8년, 개교한 지 얼마 안 된 만주국건국대학에 교수로 부임했다. 1940년, 만주국의 수도 신징에서 사망했다.[9]
3. 역사 연구 및 주장
정시 연간에 위의 관구검은 고구려를 토벌하고 현도대수를 파견하여 부여에 이르렀다. 이후 부여는 중국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6]
부아악, 미추홀 등의 지명을 현재의 지명에 비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한반도를 종단하는 부여의 남하를 나타내는 기록이다.[6]
3. 1. 만선사관
이나바는 조선 민족은 독자적인 민족이 아니라, 대륙으로부터의 이주자이며, 게다가 대륙에서의 패잔병이 조선으로 도망쳐 온 것이라고 주장하며, 조선인 중에는 만주인의 피가 많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2][3][4]
당시 조선인 중에서 단군 신화가 제기된 것에 대해 이나바 이와키치는 단군 신화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한편, "만선 불가분론"을 주장하며, 조선 역대 왕가는 만주 또는 대륙으로부터의 패잔병이 조선으로 도망쳐 온 것이며, 조선과 만주는 정치적·경제적으로 일체 "불가분"하며, 조선만의 독자적인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5]
3. 2. 광해군 중립 외교 재평가
1933년에 《광해군시대의 만선관계》라는 저술을 통하여 광해군이 실용적 중립외교를 펼쳤다고 긍정적 평가를 하였는데,[12] 이후 한국내 사학계에서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만큼은 대체적으로 후하게 평가가 바뀌었다.[13] 기존에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혼군(昏君), 즉 판단이 흐리고 어리석은 임금으로 평가되어 왔었다.[13] 또한 이나바 이와키치는 조선과 후금의 관계를 '부활하는 만주와 조선관계'라고 반기고 광해군의 폐위를 비극이라고 평하였다.
3. 3. 백제 관련 주장
공손도는 부여왕 위구태에게 딸을 시집보내 선비, 고구려 등을 견제하려 했다[6]. 훗날 백제의 온조 왕조는 부여를 성씨로 삼았으며, 그 왕도 또한 부여라고 칭했다. 과거 중국의 동북 지역에 있던 부여가 남하하여 한반도의 남서부에 왕조를 세운 것은 대략 짐작할 수 있지만, 의거하는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어 일률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6]。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아버지는 추모 혹은 주몽이다[6]。 북부여에서 도망쳐 온 그는 그 땅의 부여 왕에게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아 그 왕의 딸과 결혼하여 즉위하고, 비류, 온조라는 두 왕자가 태어났지만, 과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전처가 낳은 태자가 나타났기 때문에 두 왕자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나라를 탈출하여 열 명의 신하를 데리고 남쪽으로 향했다. 위례성이 대한민국 서울한강의 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으며, 서울올림픽주경기장 등이 있는 강남에 초기 백제의 토성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6]。
이와 관련하여 이나바 이와키치는 "태강 6년(285년) 선비의 모용씨에게 습격당한 부여의 잔당은 장백산의 동옥저로 도망쳤다고 하니, 그것이 전출하여 대방에 들어간 것이 곧 백제일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7][6]。
3. 4. 만리장성 관련 주장
사기색은중국어, 통전중국어 등 다양한 중국 사서에 "낙랑군 수성현 갈석산에서 진나라의 장성이 시작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러한 사서 기록을 바탕으로 1910년 이나바 이와키치는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뻗어 있었다고 주장했다.[8] 이나바 이와키치의 주장은 1982년 발간된 『중국 역사 지도집』, 동북공정, 2012년 공개된 미국 의회조사국 보고서에도 반영되어 있다.[8]
4. 평가
1950년대 중반 일본 동양사학 발달사를 총괄한 마쓰모토 젠카이(도쿄 대학)는, 1920년 전후 시기에 페이지 수만 쓸데없이 많은 교과서적·참고서적 개설서가 범람하는 가운데, 일정한 사관을 가지고 쓰인 개설서로 이나바 이와키치의 저서 『지나 정치사 강령』을 꼽았다.[1] 토나미 마모루에 따르면, 시대 구분법을 수립한 이러한 새로운 견해가 학계에서 유력해졌음에도 일본 동양사학이 쉽게 개설서 스타일을 바꾸지 못한 것은, 그것이 중국사에 한정되어 있었고, 같은 형태로 동양 전반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그 정도까지의 전개에는 미야자키 시테이의 저서 『동양적 근세』의 출현을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1]
5. 저서
조선사·만주사·중국사에 관한 저작이 많고, 《조선문화사연구》, 《청조전사》, 《만주발달사》 등이다.
참조
[1]
서적
東洋における素朴主義の民族と文明主義の社会
平凡社
1989-09-01
[2]
간행물
渤海史研究と近代日本 (特集 日本・中国・朝鮮関係史の研究)
https://hdl.handle.n[...]
明治大学史学地理学会
[3]
서적
「満鮮史」の虚像―日本の東洋史家の朝鮮観―
鈴木俊教授還暦記念会
1964-10
[4]
간행물
"「満鮮史観」の再検討 : 「満鮮歴史地理調査部」と稲葉岩吉を中心として"
https://hdl.handle.n[...]
新潟大学大学院現代社会文化研究科
2007
[5]
서적
朝鮮史研究の課題
太平出版社
1966-11
[6]
뉴스
魏志「東夷伝」における原初の北東アジア諸民族に関する論攷
http://id.nii.ac.jp/[...]
島根県立大学
2001-03-30
[7]
서적
朝鮮史・満洲史
平凡社
1941
[8]
뉴스
"「史料作成時期の読み違い」 ハンバッ大学教授が「万里の長城は平壌まで」説を否定"
https://www.donga.co[...]
null
2015-12-14
[9]
웹사이트
이나바 이와키치 [Inaba Iwakichi, 稲葉岩吉(도엽암길)]
두산백과 두피디아
[10]
간행물
"「満鮮史観」の再検討 : 「満鮮歴史地理調査部」と稲葉岩吉を中心として"
新潟大学大学院現代社会文化研究科
[11]
서적
朝鮮史研究の課題
太平出版社
1966-11
[12]
서적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2012
[13]
서적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
너머북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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