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우
1. 개요
이문우는 19세기 초 조선의 천주교 신자로,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경기도 이천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양자로 입양된 후,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나 사별 후 독신으로 자선 사업과 선교사 지원에 헌신했다. 모방 베드로 신부의 선교 활동을 도왔으며, 앵베르 주교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배우며 신앙을 키웠다. 기해박해 당시 체포되어 신앙을 지키며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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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문우 요한 |
|---|---|
| 출생일 | 1810년 |
| 사망일 | 1840년 2월 1일 |
| 축일 | 9월 20일 |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 출생지 | 경기도 이천 |
| 사망지 | 서울 당고개 |
| 직업 | 순교자 |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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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시 출신 -
차지철
차지철은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여 정계에 입문한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국회의원을 지내다 박정희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재직하며 권력 남용으로 비판받았고 10·26 사건 때 김재규에게 살해당했다. -
이천시 출신 -
이경재 (1941년)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 정치인인 이경재는 동아일보 기자,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공보처 차관을 거쳐 4선 국회의원과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환경 및 방송통신 분야에서 활동했고 한나라당 주요 당직을 맡았다. -
19세기 기독교 성인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9세기 기독교 성인 -
다미앵 신부
벨기에 출신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예수 성심 성모 수도회 소속 선교사인 다미앵 신부는 하와이 몰로카이섬에서 한센인들을 16년간 헌신적으로 돌보며 사목 활동을 펼치다 자신도 한센병에 감염되었으나 봉사를 이어갔고, 사후 시성되어 소외된 이들을 위한 봉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김대건
김대건 안드레아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로,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의 길을 걸으며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26세에 순교하였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2. 생애
이문우는 경기도 이천의 양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다섯 살 때 부모를 여의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한 여성에게 양자로 입양되어 한양으로 오게 되었다. 그는 결혼을 원치 않았지만, 양어머니의 뜻에 따라 결혼하여 두 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몇 년 후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주위의 재혼 권유를 마다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자선 사업과 선교사들과 교우들을 돕는 일에 매진했다. 그는 모방 신부의 선교 여행에 동참했고, 정하상 등과 함께 앵베르 주교에게서 라틴어와 신학을 배웠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이문우는 기부금을 모아 투옥된 교우들을 옥바라지하고, 선교사들을 산 속 은신처로 피신시키는 등 회장으로서 소임을 다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에는, 그들의 장례를 치렀다.
1839년 11월 10일 친구의 집에서 체포된 그는 "주님께서 그분의 특별한 은총으로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순교를 받아들였다. 포도청에서 포장은 이문우에게 어째서 양반 신분을 버리고 천주교 신자로서 죽으려 하느냐고 물었다. 이문우는 창조주이며 왕 중의 왕인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다고 대답하며 신앙을 고백했다. 포장은 좋은 음식과 술을 대접하며 배교를 설득했지만, 이문우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증언했다.
순교하기 엿새 전, 이문우는 신앙의 벗들에게 편지를 써서 신앙을 격려하고 죽음을 두려워 말 것을 당부했다.
포도청과 형조에서 온갖 가혹한 고문과 형벌을 이겨낸 이문우는 1840년 2월 1일 31세의 나이로 한양 근교의 당고개에서 두 명의 교우와 함께 순교하였다.
2.1. 초기 생애와 입교
이문우는 경기도 이천의 한 양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부모를 여의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한 여성이 그를 양자로 들여 한양으로 데려왔다. 이문우는 결혼을 원치 않았지만, 양어머니는 그가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양어머니에 대한 효심으로 결혼하여 두 명의 자식을 두었으나, 몇 년 후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그는 주위의 재혼 권유를 마다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자선 사업과 선교사들과 교우들을 돕는 일에 매진했다. 그는 모방 신부의 선교 여행, 즉 공소를 돌아다니면서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는 여행에 동참했고, 정하상 등과 함께 앵베르 주교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배웠다. 앵베르 주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신학생이 마카오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임을 헤아리고는, 열심과 실력이 있는 평신도들을 선발하여 신학을 가르쳤다. 신학생들은 성직자가 되어 교회를 위해 일한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공부하는 태도와 성적이 좋았다.
2.2. 신앙 활동과 기해박해
경기도 이천의 한 양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이문우는 다섯 살 때 부모를 여의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여성에게 양자로 입양되어 한양에서 자랐다. 결혼을 원치 않았으나 양어머니의 뜻에 따라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지만, 몇 년 후 아내와 자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재혼 권유를 뿌리치고 독신으로 살면서 자선 사업과 선교사 및 교우들을 돕는 데 헌신했다.
그는 모방 신부의 선교 여행, 즉 공소를 순회하며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는 여정에 동참했고, 정하상 등과 함께 앵베르 주교에게서 라틴어와 신학을 배웠다. 앵베르 주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신학생이 마카오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을 예상하고, 열정과 실력을 갖춘 평신도들을 선발하여 신학을 가르쳤다. 신학생들은 성직자가 되어 교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학습 태도와 성적이 우수했다.
1839년 기해년의 박해 때, 이문우는 기부금을 모아 투옥된 교우들을 옥바라지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들을 여러 산 속 은신처로 피신시키며 바깥 소식을 전하는 등 회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에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장례를 치렀다. 그 후, 그는 외딴 곳으로 피신할 준비를 했다.
2.3. 체포와 순교
1839년 11월 10일, 이문우는 친구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주님께서 그분의 특별한 은총으로 저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순교를 받아들였다. 포도청에서 포장은 이문우에게 어째서 양반 신분을 버리고 천주교 신자로서 죽으려 하느냐고 물었다. 이문우는 창조주이며 왕 중의 왕인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다고 대답하며 신앙을 고백했다. 포장은 이문우에게 좋은 음식과 술을 대접하며 배교를 설득했지만, 이문우는 고문을 받고 도둑과 배교자들이 있는 감방에 수감되면서도 용감히 그의 신앙을 증언했다.
이문우는 순교하기 엿새 전에 신앙의 벗들에게 편지를 써서 신앙을 격려하고 죽음을 두려워 말 것을 당부했다.
포도청과 형조에서 온갖 가혹한 고문과 형벌을 이겨낸 이문우는 1840년 2월 1일 31세의 나이로 오늘날 서울특별시에 있는 한양 근교의 당고개에서 두 명의 교우와 함께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