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영국령 소말릴란드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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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영국령 소말릴란드 점령은 1940년 8월 이탈리아 왕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침공하여 점령한 사건이다. 이탈리아는 1936년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를 건설하고 1940년 6월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에 참전했다. 이탈리아는 동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을 위해 영국령 소말릴란드 공격을 결정했고, 8월 3일 침공을 시작했다. 영국군은 소말릴란드 낙타 군단을 중심으로 방어전을 펼쳤지만, 이탈리아군의 우세한 병력과 화력에 밀려 8월 15일 철수했다. 이탈리아는 8월 19일 베르베라를 점령하며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병합하여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편입시켰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의 단기적인 승리로 기록되었지만, 이후 영국군의 반격으로 패배했고, 영국에게는 자국 영토에서의 첫 전략적 패배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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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영국령 소말릴란드 점령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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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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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아프리카 전역의 일부 |
날짜 | 1940년 8월 3일 – 1940년 8월 19일 (16일) |
장소 | 영국령 소말릴란드 |
결과 | 이탈리아 왕국의 승리, 영국령 소말릴란드 항복, 영국령 동아프리카에서 망명 정부 수립. |
영토 |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합병됨 (1940년 8월 18일 – 1941년 4월 8일) |
교전 세력 | |
연합군 | 영국 식민지 제국 영국 영국령 인도 제국 [[File:Flag of British Somaliland (1950–1952).svg|25px|border]] 소말릴란드 북로디지아 [[File:Flag of Kenya (1921–1963).svg|25px|border]] 영국령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제국 |
추축군 | 이탈리아 식민지 제국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
지휘관 | |
연합군 지휘관 | 알프레드 고드윈 아서 체이터 메이틀랜드 윌슨 |
추축군 지휘관 | 굴리엘모 나시 카를로 데 시모네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 |
병력 규모 | |
연합군 | 4,000명 - 5,000명 (75%는 킹스 아프리카 소총 및 소말리아 비정규군) |
추축군 | 24,000명 (이탈리아 및 식민지 군대) |
피해 규모 | |
연합군 | 총 2,275명 영국 제국: 사망: 50명 부상: 105명 실종: 120명 소말리아 (영국군 복무): 약 2,000명 항공기 손실: 7대 파괴, 10대 손상 함선 손실: 1척 침몰, 2척 손상 |
추축군 | 총 3,029명 이탈리아: 161명, 아스카리: 1,868명 사망: 465명 부상: 1,530명 실종: 34명 소말리아 반다: 약 1,000명 |
관련 정보 |
2. 배경
이탈리아 왕국은 1940년 6월 10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베니토 무솔리니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시작된 전쟁이었기에, 이탈리아는 동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에서 장기전을 수행할 충분한 군비를 갖추지 못했다. 특히 이집트, 수단, 케냐 등 영국 식민지에 둘러싸인 동아프리카의 이탈리아 식민지는 제한적인 공격 계획 외에는 수세에 몰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는 독일의 요청에 따라 이집트 원정을 견제하고, 케냐, 수단, 소말릴란드 등 주변 지역을 공격하도록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주둔군에 명령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무솔리니는 아메데오 아오스타 공작의 동의를 얻어 8월에 영국령 소말릴란드 공격을 개시했다. 사보이아 가문 출신이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주둔군 총사령관이었던 아메데오 디 사보이아 장군은 이탈리아 최고사령부(Comando Supremoit)에 공세 계획을 승인받았고, 1940년 8월에 공세 준비를 완료했다.
개전 당시 소말릴란드 주둔 영국군은 아서 레기나더 체터 중령이 지휘하는 소말릴란드 낙타 군단이었다. 이탈리아군의 공세가 예상되자 체터는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니아살랜드와 북로디지아 부대 등을 증원받았다. 영국군은 경무장한 소말리아 낙타 부대와 경포병대로 구성되었으며, 대전차 무기는 전무했다.
영국은 수에즈 운하와 홍해 항로를 통해 극동 및 인도양 지역과 통신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했다. 1939년 중반, 아치볼드 웨이벌 중장이 중동 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이탈리아군에 비해 병력이 부족했다.
영국은 소말릴란드 전역 (1900–1920)을 통해 소말릴란드 통제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1910년 영국 수비대는 해안으로 후퇴해야 했다. 소말릴란드는 내륙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지형이었으며, 주요 항구인 베르베라는 사막과 관목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의 침공 목표가 베르베라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주요 접근로인 투그 아르간과 셰이크 패스에 병력을 배치했다. 체터는 투그 아르간에 2개 대대와 산악 포병을 주둔시키고, 다른 접근로를 방어하기 위해 1개 대대를 배치했으며, 예비대를 유지했다.
아덴의 영국 공군(RAF)은 브리스톨 블레넘 폭격기,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전투기 등을 보유했다. 8월 초, 영국군은 추가 증원을 받았고, 데 시모네는 투그 아르간 뒤 영국군 진지에 접근하여 공격을 준비했다. 투그 아르간은 평평한 지형에 여러 바위 언덕이 있는 곳으로, 영국군은 이곳에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포병 부족과 넓은 간격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2. 1. 이탈리아의 동아프리카 식민지 확장 야욕
1936년 5월 9일,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Africa Orientale Italianait, AOI)의 건국을 선포했다. 이 지역은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그리고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935년 10월 3일 – 1936년 5월 5일)에서 정복한 에티오피아 제국을 합쳐서 구성되었다.[6] 1940년 6월 10일, 무솔리니는 영국과 프랑스 제3 공화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로 인해 아프리카 주둔 이탈리아군은 지중해, 수에즈 운하, 그리고 홍해를 따라 이어지는 영국의 보급로에 위협이 되었다.[6]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는 명백한 목표였으며, 프랑스령 소말릴란드 (지부티)나 영국령 소말릴란드에 대한 이탈리아의 침공도 가능했다. 무솔리니는 수단과 영국령 동아프리카 (케냐, 탕가니카, 우간다)에서 선전의 승리를 기대했다.[6]이탈리아 참모본부는 1942년까지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여 전략적 계산을 했다.[6] 레지오 에세르치토it (이탈리아 왕립 육군)와 레지아 아에로노티카it (이탈리아 왕립 공군)는 장기간의 전쟁이나 아프리카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6]
무솔리니의 독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쇠약해진 이탈리아 왕국은 다른 전역과 마찬가지로 동아프리카에서 충분한 군비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특히 당면한 주적이라고 여겨진 영국의 식민지에 둘러싸인 동아프리카의 이탈리아 식민지에서는 극히 제한적인 공격 계획을 제외하면 일관되게 수세에 놓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독일 정부의 요청에 의한 이집트 원정 견제를 포함하여 케냐, 수단, 소말릴란드 등 주변 지역에 대한 공격을 동아프리카 주둔군에 명령했다.
사보이아 가문의 구성원이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주둔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제3대 아오스타 공작아메데오 디 사보이아 장군은 코만도 수프레모(왕국군 참모 본부)에 공세 계획을 승인받았다. 이는 사보이아 가문의 가장인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찬성도 배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940년 8월에 공세 준비를 완료했다.[6]
2. 2. 영국군의 방어 태세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전쟁을 선포했을 때, 소말릴란드 주둔 영국군은 아서 레기나더 체터 중령이 지휘하는 소말릴란드 낙타 군단이었다.[36] 8월 초, 준장으로 진급한 체터는 소말릴란드 낙타 군단 4천 명과 니아살랜드 부대 등을 파견했다.[36] 이들은 경무장한 소말리아 낙타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제2 니아실란드 부대, 북로디지아군, 제3/제15 펀잡 연대, 제1 동아프리카 경포병대(3.7인치 곡사포 4문)가 포함되었다. 8월 7일에는 아덴에서 1/제2 펀잡 연대가, 8월 8일에는 블랙 와치가 합류했다.[37][38][39] 체터의 군대는 경전차 부대와 맞설 대전차 무기가 전무했다.수단을 포함한 이집트 왕국은 이집트와 영국의 공동 통치령이었다. 영국은 1882년부터 이집트에 군사력을 주둔시켰지만, 영-이집트 조약에 따라 병력이 크게 감축되어 수에즈 운하 방어 병력만 남았다. 소규모 영국 및 영연방 군대는 수에즈 운하와 홍해 항로에 주둔했는데, 이는 영국이 극동 및 인도양 지역과 통신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1939년 중반, 아치볼드 웨이벌 중장이 지중해와 중동을 담당하는 중동 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 왕립군은 리비아와 이집트에 약 21만 5천 명의 병력을 보유했고, 영국군은 약 3만 6천 명의 병력과 팔레스타인에서 훈련 중인 2만 7천 5백 명의 병력이 있었다. 웨이벌은 리비아, 이라크, 시리아, 이란, 동아프리카에 약 8만 6천 명의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영국은 소말릴란드 전역 (1900–1920)을 통해 이 지역 통제권을 확보하려 했다. 1910년 영국 수비대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해안으로 후퇴해야 했으며, 1920년에 소말리아 저항이 끝났다. 이 식민지는 약 약 176118.32km2 면적에 해안에서 최대 약 96.56km 깊이의 평원이 내륙으로 이어지며 평균 약 1219.20m 높이의 산맥에서 끝났다.
최대 도시이자 항구인 베르베라는 사막과 관목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항구는 원정군에는 적합하지 않았지만, 식민지의 주요 중계 무역항이었다.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의 침공 목표가 베르베라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내륙 산악 지대는 하르게이사 및 부라오 도로에서만 차량 통행이 가능했고, 하르게이사는 투그 아르간 틈새를 통과하는 더 직접적인 경로였으며, 부라오 도로는 셰이크 패스로 알려진 협곡을 통과했다.
체터는 투그 아르간에 2개 대대와 산악 포병을 주둔시키고, 다른 두 접근로를 방어하기 위해 1개 대대를 배치했으며, 1개 대대를 예비대로 유지했다. 블랙 워치가 도착하자 예비대로 투입되었고, 3/15 펀자브 연대가 투그 아르간을 증원했다. 낙타 군단은 주 방어선 앞에서 정찰대를 형성하여 소말리 경찰(Illalo|소말리어 발음so)의 순찰을 통해 침략자를 감시하고 지연시켰다.

아덴의 RAF는 제8 비행대대(브리스톨 블레넘 폭격기 및 자유 프랑스군 마틴 메릴랜드 2기), 제11 비행대대, 제39 비행대대, 제45 비행대대 (블레넘), 제203 비행대대 (블레넘 IVF 장거리 전투기), 제94 비행대대(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전투기), 제223 비행대대(비커스 웰즐리)를 보유했다.

8월 7일부터 8일까지 수비군은 1/2 펀자브 연대와 제2 블랙 워치 대대의 증원을 받았다. 8월 10일, 데 시모네는 투그 아르간 뒤 영국군 진지에 접근하여 이탈리아군의 공격을 준비했다. 하르게이사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도로는 케림 고개를 지나 투그 아르간으로 향하고, 이후 남쪽 아사 언덕과 북쪽 언덕, 마른 강바닥(투그) 사이 동쪽으로 이어진다. 이 고개는 평평한 돌로 된 광활한 지형으로, 가끔 가시덤불과 투그, 약 약 1828.80m에서 약 2286.00m 간격으로 떨어진 몇 개 바위 언덕이 있으며, 수비군은 이를 블랙 언덕, 노블리 언덕, 밀 언덕, 관측 언덕이라 불렀고, 밀 언덕에서 동쪽으로 약 3.22km 떨어진 곳에 캐슬 언덕이 있었다.
진지에는 기관총 진지와 약간의 철조망이 설치되었다. 방어선은 우회하기 어려웠고 관측이 용이했지만, 포병 부족으로 이점은 불확실했다. 수비군은 간극을 막기에는 수가 적었고, 언덕 간 거리가 멀어 공격자가 그 사이를 통과할 수 있었다. 블랙 언덕에서 약 12.87km 떨어진 미르고 고개와 아사 언덕 제라토 고개에는 여러 낙타 길이 있어 이탈리아군이 수적 우위를 활용할 수 있었다.
영국군 측에서는 아서 체이터 중령이 이끄는 소말릴란드 기병대가 개전 시에 전개했다.[8] 이탈리아군 공세가 예상되자 체이터 중령은 준장으로 승진했으며,[8] 니아살랜드의 킹스 아프리칸 라이플 대대, 북로디지아 대대, 제1 동아프리카 포병 대대, 제15 펀자브 연대 일부를 증파했다. 이후 제2 펀자브 연대, 스코틀랜드 고지 연대도 제2파 증원군으로 보내졌다.[9][10][11]
3. 이탈리아군의 침공
1940년 8월 3일 이른 아침, 이탈리아군은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와 영국령 소말릴란드의 경계를 넘었다.[40]
해안에서부터 약 1371.60m 이상 높이의 평평한 언덕 때문에, 내륙에서부터 베르베라까지 약 80.47km를 가는 방법은 3가지가 있었고, 차량 통행을 지원하는 것은 영국령 소말릴란드의 수도와 항구뿐이었다.[37] 가장 직접적이고 빠른 경로는 하르게이사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군은 3개 통로로 모두 진군하여 3개 군으로 분리되었다. 서부군은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와 제일라를 통해 가고, 중앙군은 하르게이사와 알다데크를 통해, 동부군은 오데위나와 부라오를 통해 진격했다.[41]
이탈리아군의 계획은 프랑스령 소말릴란드를 차단하고, 경무장군은 동부에서 이동하는 것이었다. 중앙군은 하르게이사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고 미르고 고개를 통해 주력 공격을 담당했다. 동부군은 중앙군을 엄호하고 필요할 때 오데위나에서 합류하기로 했다.[34]
8월 5일, 제일라 항구는 브레톨리 대위 지휘하의 이탈리아군에 점령되었다.[34] 영국군이 프랑스령 소말릴란드를 통해 진격하는 도로는 차단되었다. 계획대로 작은 군사 기지와 마을들을 점령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부헤리어 마을을 점령했다.
카를로 드 시몬이 지휘하는 이탈리아 중앙군은 산악 지형의 어려움으로 고전했다. 북로디지아 연대와 낙타 군단이 하르게이사를 방어했지만, 드 시몬은 경전차를 이용하여 8월 5일 상대편 군대가 후퇴하게 했다. 드 시몬은 하르게이사에서 이틀간 재편성한 후, 카림 고개를 통해 투그 아르간과 아사 언덕의 마른 강으로 진격했다.[34]
베르텔로 준장이 지휘하는 동부군은 주로 불규칙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8월 6일 오데위나를 점령하고 아달데를 향해 투그 아르간 북서쪽으로 진격했다.[34]
체터 연대는 소규모 병력으로 낙타 군단을 이용했다.[37] 영국과 영연방 군대는 이탈리아군에 밀려 투그 아르겐으로 후퇴했다.
4. 투그 아르간 전투와 영국군의 철수
8월 10일, 데 시몬은 투그 아르간에서 영국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공격을 준비했다.
8월 7일과 8일에 영국령 소말릴란드에서는 영국군과 영연방 군대가 1/2 펀잡 연대, 제2 블랙 와치 대대의 지원을 받았다.[37][39] 웨이벌 장군은 베르베라에 보병과 포병의 추가 지원을 요청했지만,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43] 그는 8월 11일에 육군 소장을 임명하여 지휘하게 하고, 새로운 사령관인 알프레드 리드 고드윈-아우스탠이 베르베라에 도착했다.[43]
영국군의 주요 방어 지점은 베르베라로 향하는 유일한 도로의 언덕 6개를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8월 11일, 데 시몬의 6개 사단은 제3 15 펀잡 전투 연대를 공격하여 언덕을 점령하고,[44]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영국군은 두 번의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다른 두 언덕도 이탈리아군에게 점령되었다. 다음 날에는 모든 방면에서 영국군이 공격받았다. 저녁에 북로디지아 연대는 밀 힐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더 심각하게는, 동아프리카 경포병은 이탈리아군이 아사 힐을 점령하면서 2문의 곡사포를 잃고, 베르베라로 가는 길의 남부를 이탈리아군에게 점령당했다.[44]
8월 13일과 14일, 더 이상의 전투에도 점령한 지역은 없었지만, 이탈리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전투는 계속되었다. 8월 14일, 수비군이 중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이탈리아군은 간격을 거의 만들고 수비군의 보급선을 끊을 뻔했다. 결국, 알프레드 리드 고드윈-아우스탠은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투그 아르간에서 후퇴하여 중동으로 이동하여 추가 저항을 검토하였다. 그는 철수 시 병력의 70% 정도가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했다.[44] 8월 15일, 그는 영국령 소말릴란드에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45]
8월 15일 오후, 이탈리아군이 정찰하지 않는 어둠을 틈타 영국군은 투그 아르간에서 후퇴했다. 블랙 와치와 1/2 펀잡 연대는 투그 아르간 뒤, 베르베라 도로 16km 후방 일부에서 방어했다.[45]
영국군은 베르베라로 퇴각로를 만들었지만, 영국 해군은 이미 모든 부두를 건설하고 민간 및 행정 관계자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8월 16일, 영국군은 대기 중인 함선에 군대를 철수시키기 시작했다.[46]
8월 17일, 이탈리아군은 베르베라 서쪽 64km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HMS 케레스 해안 순찰선은 진행 중인 일을 중단했다.[47] 투그 아르간에서 출발한 데 시몬의 군대는 신중하여 8월 17일 늦은 아침까지 바크아센을 공격하지 않았고,[47] 맹렬한 공격을 시작했을 때 블랙 와치는 총검으로만 무장하고 있었다.[35] 어두워진 후, 그들은 후방으로 후퇴했다. 영국군과 영연방군 전부는 최소한의 손실로 HMAS 호바트 (D63) 본부선과 함께 8월 18일 이른 아침 베르베라에서 철수했고, 8월 19일 아침까지 낙오자와 차량을 철수시킴과 동시에 연료 및 장비 파괴는 계속되었고,[47] 아덴으로 철수에 성공했다.[45] 민간인을 포함하여 7천 명이 대피했다.[48] 소말릴란드 낙타병은 소말리아 현지에서 피난 또는 해산했지만, 대부분 유지를 선택하고 무기를 보존했다.[47]
영국 수비군은 점령 기간 동안 약간의 간섭이 있었다. 8월 15일, 아메데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 공작은 장군의 서열을 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영국 나시는 너무 전투 없이 피난 간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향후 평화 협정에서 이탈리아와 영국 사이에서 교황령이 중재를 추진했다.[49]
8월 19일, 이탈리아군은 베르베라를 점령하고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점령했다. 영국 식민지는 합병되었고 이탈리아 제국의 일환으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가 새롭게 생성되었다.[50]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이탈리아 측의 피해 보고는 전사자 205명으로만 기록되어 있지만,[23] 영국 측은 2,052명의 부상자를 추가로 집계하고 있다.[24] 단기 공세를 시도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군(AOI군)이 더 많은 전상자를 낸 것은 분명하나, 영국군의 증파를 막아 승리 요인이 되었다.
당시 소말릴란드는 영국의 완전한 지배 통제 하에 있지 않았고, 영국군과 이탈리아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반란 부족이 각지에 산재해 있었다.[5][25] 이들은 때에 따라 이탈리아군, 영국군에 협력하거나 상호 간에 싸우는 등 불안정한 대외 행동을 보여, 양군 모두 어느 쪽의 병사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소말릴란드 전역은 다음과 같은 결과와 교훈을 가져왔다.
- 이탈리아 왕국군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자적으로 획득한 유일한 전략적 승리였다.
- 영국에게는 최초의 자국 영토에서의 전략적 패배였다.
- 이탈리아 왕국군은 우수한 지대 운용 능력을 보였다. (3개 루트의 부대가 상호 연락 없이 공동 공격을 성공시켰다.)
- 영국군은 (덩케르크에서도 보여준) 우수한 병력 철수와 높은 숙련도를 보였다.
- 공군의 중요성을 재확인[29]
-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확대와 무솔리니의 정치적 위신이 증가했다.
소말릴란드 패배는 영국에게 큰 타격이었으며,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웨이벌 장군을 심하게 질책했다. 원군 파견 지연과 아라간 사막 패주 허용은 주둔군과 사령부의 태만이라고 비판하며 군법 회의를 주장했다. 웨이벌은 표면적인 상황만으로 아라간 사막 유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반론하며, "정육점의 도살이 병사에게 강요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라며 처칠의 정신론을 비판했다. 이 갈등은 웨이벌 해임으로 이어진다.[26][27]
타임지는 "소말릴란드 패배로 인한 최대 피해는 식민지(특히 아랍)에서의 영국의 위신을 잃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28]
이탈리아에게 소말릴란드 승리는 단독으로 얻은 유일한 전략적 승리였다. 이는 프랑스 전에서의 독일 압승을 제외하고, 이후 추축군의 전략적 승리(일본군의 태평양 작전, 독일의 독소전)와 동일한 흐름(승리로 시작해서 패배로 끝나는 결말)을 보였다. 영국 동아프리카군은 점차 AOI군을 압박했고, AOI군은 해로와 육로 봉쇄로 곤궁해져 갔다. 1941년 중반 에티오피아 탈환으로 동아프리카 전선은 종결된다.
하지만 영국군은 1943년까지 AOI군 잔당의 테러 행위에 시달리게 된다.[29]
5. 1. 이탈리아의 단기적 승리와 전략적 한계
이탈리아의 소말릴란드 점령은 이탈리아에게 단기적인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전략적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베르베라 항구는 1940년 짧은 기간 동안 이탈리아 홍해 소함대의 잠수함 기지로 사용되었다.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영국령 소말릴란드를 잃은 것에 대해 웨이벌 장군을 비판했다. 사상자가 적다는 이유로 식민지 방어가 충분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특별 조사 위원회 소집을 요구했다.[54][55] 웨이벌은 우세한 적군에 맞서 교과서적인 철수를 했다고 주장하며, "피 묻은 사상자가 좋은 전술 표적이 아닙니다"라고 처칠에게 말했다.[54][55] 처칠의 참모에 의하면, 웨이벌의 이 발언은 처칠을 분노하게 했고, 웨이벌의 지위 하락으로 이어졌다.[54][55]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몇 달 동안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속해 있었다. 1941년 3월, 1/2 펀잡 연대와 3/15 펀잡 연대가 아덴에서 돌아와 동아프리카 전역에 다시 참여했다.[55]
타임지는 이 전쟁의 주요 결과로 "대 브리튼 제국은 특히 아랍에서 큰 명성의 손실을 입었다"고 평가했다.[56] 이는 이탈리아가 독일의 지원 없이 승리한 유일한 전역이었지만, 이후 영국의 반격으로 패배로 이어졌다. 특히 에티오피아에서의 이탈리아 게릴라전에서는 완전히 패배했다.[57]
이탈리아군은 사막에서 부대를 조정하는 능력을 보여주었고, 영국군은 후퇴 중에도 규율을 유지하며 병력을 보존했다.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최초의 전투이자, 점령된 최초의 영국 식민지였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가 잉글랜드 크기의 영토를 점령했다고 자랑했다. 1940년 8월의 영국령 소말릴란드 전투는 영국 공군의 위상을 높이고, 연합군에서 제공권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57]
영국군은 350대의 차량과 대부분의 물자를 포기해야 했다. 8월 5일부터 19일까지 아덴의 영국 공군은 약 60962.82kg의 폭탄을 투하했다. 영국군은 제대로 방어되지 않은 비행장은 빠르게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칠은 웨이벌을 비난했지만, 국방부 장관이자 총리로서 패배한 장군들에게 결과를 지시할 수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식민지 철수를 "가혹한 타격"이라고 불렀다.
식민지 점령은 동아프리카 작전에서 이탈리아군의 가장 큰 성공이었지만, 그들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영국군은 즉석에서 이루어진 승선에도 불구하고 도망갈 수 있었다.
영국령 소말릴란드 포기가 결정되자 영국 홍해 함대는 즉시 수송 준비를 시작하고, 소말릴란드 주민에게 피난 권고를 발령했다. 1940년 8월 16일부터 철수 작업이 시작되어 민간인과 관리가 수송선에 실려 다른 식민지로 탈출했다.[18] 8월 17일부터 영국 해군의 경순양함 케레스가 발베라 근해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19]
이탈리아군은 영국군의 복병 공격을 우려하여 신중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19] 스코틀랜드 고지 연대는 격렬한 저항을 보였고, 마지막에는 총검 돌격까지 감행했다.[7] 영국군은 8월 18일까지 수송 임무를 계속했고, 많은 퇴각 병사와 민간인이 구조되었다. 8월 19일 마지막 함선이었던 경순양함 호바트가 출항하면서 철수 임무는 종료되었다.[19][17] 영국군·식민자 7,000명이 아덴으로 탈출했지만, 현지에서 소집된 아스카리는 대부분 현지 해산되었다.[19][20]
아오스타 공작아메데오 디 사보이아는 영국 국민과 병사에 대한 부당한 탄압을 하지 않도록 엄명을 내렸다. 친영파였던 아오스타 공작은 영국과의 조기 평화를 원했다.[21]
1940년 8월 19일, 소말릴란드 식민지 정부는 이탈리아 왕국에 항복을 선언하고,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통합되었다.[22]
소말릴란드 전역의 결과와 교훈은 다음과 같다.
- 이탈리아 왕국군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자적으로 획득한 유일한 전략적 승리였다.
- 영국 왕국에게 있어서 최초의 자국 영토에서의 전략적 패배였다.
- 이탈리아 왕국군이 우수한 지대 운용의 지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 영국 왕국군은 (덩케르크에서도 보여준) 우수한 병력 철수와 높은 숙련도에서 패주 중에도 높은 규율을 유지했다.
- 공군의 중요성을 재확인[29]
-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확대와 무솔리니의 정치적 위신의 증가
처칠은 웨이벌 장군을 심하게 질책했다. 소말릴란드의 상실은 원군 파견 판단이 늦었던 영국 중동군 사령부와 웨이벌 장군에게 책임이 있었다. 처칠은 전선 도주의 혐의로 군법 회의를 해야 한다고까지 발언했다. 웨이벌은 "정육점의 도살이 병사에게 강요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라며 처칠의 정신론을 비판했다. 처칠과 웨이벌의 갈등은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웨이벌 해임에 이르게 된다.[26][27]
타임지는 소말릴란드 함락을 다룬 기사에서 "소말릴란드 패배로 인한 최대 피해는 식민지(특히 아랍)에서의 영국의 위신을 잃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28]
이탈리아에게 소말릴란드에서의 승리는 단독으로 얻은 유일한 전략적 승리였다. 소말릴란드에서의 승리는 추축군의 전략적 승리(일본군의 태평양에서의 작전, 독일의 독소전)와 완전히 동일한 흐름을 보였다. 즉, 승리로 시작해서 패배로 끝나는 결말이다. 영국 동아프리카군은 점차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군(AOI군)을 압박했고, AOI군은 해로와 육로가 봉쇄된 상태에서 더욱 곤궁해져 갔다. 1941년 중반 에티오피아 탈환을 기점으로 동아프리카 전선은 종결된다.
하지만 영국군은 그 후에도 이탈리아 왕국 본국이 전쟁에서 탈락하는 1943년까지 AOI군 잔당에 의한 테러 행위에 시달리게 된다.[29]
5. 2. 처칠과 웨이벌의 갈등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영국령 소말릴란드의 함락에 대해 웨이벌 장군을 심하게 질책했다. 영국군의 피해가 적다는 이유로, 처칠은 식민지를 충분히 방어하지 않고 포기했다고 비판하며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4][55]이에 웨이벌은 "피를 많이 흘리는 것이 좋은 전술의 표적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며, 압도적인 적군에 맞서 교과서적인 철수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처칠의 참모에 따르면, 웨이벌의 이러한 발언은 처칠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웨이벌은 해임되고 클로드 오친렉으로 교체되는 결과를 낳았다.[26][27]
5. 3. 전후 처리
영국군은 철수 과정에서 대부분의 장비를 유기해야 했다. 영국군은 소말릴란드 낙타 군단의 현지 병력을 해산했다.[19] 1941년 3월 16일, 영국군은 어피어런스 작전을 실행하여 베르베라를 탈환했다.[55]인도 육군의 시크교도 대대 2개와 소말리아 코만도 부대가 글래스고 및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며 베르베라 양쪽에 상륙했다. 이탈리아 제70 식민 여단은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항구 수리가 시작되었고, 제11 아프리카 사단에 대한 보급품이 일주일 안에 통과하면서 도로 수송 거리가 약 804.67km 줄었다. 영국군은 영국령 소말릴란드의 나머지 지역을 탈환했으며, 4월 8일 채터가 군정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영국령 소말릴란드 포기가 결정되자 영국 홍해 함대는 즉시 발베라에서 수송 준비를 시작하고, 소말릴란드의 영국 정착민에게 피난 권고를 발령했다. 16일부터 철수 작업이 시작되어 민간인과 관리가 수송선에 실려 다른 식민지로 탈출했다.[18]
알간 사막을 넘어 발베라 근교로 접근해 온 시모네 사령관은 영국군의 복병 공격을 우려하여 신중한 정찰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19] 영국군은 패주해 온 병사들을 잇따라 수송선에 태워 탈출시키고, 이탈리아 왕국군이 발베라 시내로 돌입한 8월 18일까지 간신히 수송 임무가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퇴각 병사와 민간인이 구조되었고, 8월 19일 마지막 함선이었던 경순양함 호바트가 출항하면서 철수 임무는 종료되었다.[19][17] 영국군·식민자 7,000명이 아덴으로 탈출했지만,[20] 현지에서 소집된 아스카리는 대부분 현지 해산되었다.[19]
아오스타 공작아메데오 디 사보이아 AOI군 총사령관은 영국 국민과 그 병사에 대한 부당한 탄압 등을 하지 않도록 엄명을 내렸다. 친영파였던 아오스타 공작은 영국과의 조기 평화를 통한 추축 동맹으로부터의 이탈을 원하여, 바티칸을 통해 영국 정부와 교섭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1]
19일, 발베라의 완전 점령으로 소말릴란드 식민지 정부는 이탈리아 왕국에 항복을 선언하고,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 통합되었다.[22]
5. 4. 이탈리아군의 인명 피해 규모
이탈리아군과 영국군의 공식 기록을 보면 이탈리아군의 인명 피해 규모에 대해 큰 차이를 보인다. 이탈리아 역사학자는 이탈리아군의 사상자를 205명으로 기록했지만,[51] 영국의 공식 기록에서는 2,502명으로 추산했다.[52]비공식적으로, 이탈리아군의 진격 동안 소말리아 비정규군(밴드)의 사망자가 1,000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33]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사령관 루이지 프리시도 회고록에서 소말리아에서 이탈리아군이 무장 밴드로 인해 2,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언급했다.[53]
영국에 대항하여 싸운 소말리아 정규군은 모하메드 압둘라 하산이 이끌던 데르비시 전사들이었다. 이들은 19세기부터 영국령 소말릴란드 점령에 저항해왔다.
여러 역사가들의 기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역사가 | 이탈리아군 사상자 | 영국군 사상자 | 비고 |
---|---|---|---|
이안 플레이페어 (1954년) | 2,052명 | 260명 | 영국 항공기 7대 격추, 10대 심각하게 손상 |
알베르토 로비기 (1988년) | 2,029명 (이탈리아인 161명, 아스카리 1,868명) | - | 소말리아 불규칙군 사상자: 영국 측 약 2,000명, 이탈리아 측 약 1,000명 |
해럴드 로 (1993년) | - | 38명 사망, 222명 부상 | |
크리스토퍼 쇼어스 (1996년) | 로비기와 동일 | - | 영국 공군 항공기 7대 손실, 10대 손상 |
안드레아 몰리나리 (2007년) | 1,995명 | - | 항공기 4대 파괴 |
이탈리아 측은 205명의 전사자만 기록했지만,[23] 영국 측은 2,052명의 부상자를 추가로 집계하고 있다.[24]
정확한 사상자 수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는 당시 소말릴란드가 영국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지 않았고, 영국군과 이탈리아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반란 부족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5][25]
5. 5. 소말리아 부족들의 역할
당시 소말릴란드는 영국의 완전한 지배 통제 하에 있지 않았고, 영국군과 이탈리아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반란 부족이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5][25] 이들은 때에 따라 이탈리아군에 협력하거나, 영국군에 협력하거나, 서로 싸우는 등 불안정한 대외 행동을 보여, 양측 군대 모두 어느 쪽의 병사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영국에 맞서 싸운 소말리아 정규군은 모하메드 압둘라 하산이 이끄는 데르비시 전사들이었다. 이들은 19세기 영국령 소말릴란드 점령에 저항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1920년 초, 영국은 데르비시 전사들을 육지와 해상에서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모하메드의 요새는 파괴되었고 많은 병력을 잃은 그들은 오가덴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모하메드는 다시 군대를 재건하고 소말릴란드를 점령하려 했으나, 1921년에 사망하면서 영국은 소말릴란드에서의 폭동 진압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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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hoto of this tribal chief can be seen by following this link. His picture is in the third row from the bottom next to the photo of General Frusci.
http://www.iniloss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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