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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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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리리아 전쟁은 기원전 229년부터 기원전 168년까지 로마 공화정과 일리리아 왕국 사이에서 세 차례에 걸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이다. 제1차 일리리아 전쟁은 일리리아 해적 행위에 대한 로마의 개입으로 시작되었으며, 로마는 코르키라, 아폴로니아 등 아드리아 해안의 도시들을 보호령으로 삼았다. 제2차 일리리아 전쟁은 일리리아 왕 파로스의 데메트리우스가 로마의 군사력 약화를 틈타 해적 행위를 재개하면서 발발했고, 로마는 데메트리우스를 몰아내고 파로스를 점령했다. 제3차 일리리아 전쟁은 일리리아 왕 겐티우스가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항하면서 일어났으며, 로마는 겐티우스를 격파하고 일리리아를 완전히 정복했다. 이 전쟁들을 통해 로마는 아드리아 해를 장악하고 일리리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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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리아 전쟁
지도
전투 정보
명칭일리리아 전쟁
기간기원전 229년 ~ 기원전 168년
장소지중해
교전 세력로마 공화국
아르디아에이 왕국
주요 지휘관로마 공화국: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
아르디아에이 왕국:
테우타
데메트리오스
겐티우스
결과로마의 승리
일리리아의 로마 속주화
전쟁 목록
주요 전쟁제1차 일리리아 전쟁 (기원전 229년 ~ 기원전 228년)
제2차 일리리아 전쟁 (기원전 220년 ~ 기원전 219년)
제3차 일리리아 전쟁 (기원전 168년)

2. 제1차 일리리아 전쟁 (기원전 229년 ~ 기원전 228년)

빨강:로마 공화정, 파랑 : 마케도니아 왕국, 망 : 일리리아 왕국]]

제1차 일리리아 전쟁은 기원전 229년[71]부터 기원전 228년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공화정은 아드리아해를 통한 교역을 활발히 했으나, 테우타 여왕이 다스리는 일리리아 왕국의 해적 행위가 점차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72] 로마는 일리리아에 사절을 보내 해적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지만, 테우타 여왕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로마 사절을 살해했다.[73] 게다가 로마의 보호 아래 있던 이탈리아 상선들이 공격받자[61], 로마는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그나에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두 집정관이 이끄는 군대를 파견하여 전쟁을 시작했다.

로마 군대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그리스계 도시인 에피다우룸, 아폴로니아, 코르키라, 파로스 등에서 일리리아 세력을 몰아내고 이 도시들을 로마의 보호령으로 삼았다. 또한 로마는 파로스의 데메트리우스를 일리리아의 새로운 통치자로 세워 로마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74][63]

2. 1. 배경

빨강:로마 공화정, 파랑 : 마케도니아 왕국, 망 : 일리리아 왕국]]

기원전 3세기 후반, 일리리아 왕국은 아그론 왕의 통치 아래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아그론은 코르키라, 에피담누스, 파로스를 차례로 침략하여 주둔군을 배치했고,[15] 에피루스 침공은 격퇴되었으나, 그의 군대는 이전 어떤 왕보다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었다고 평가받았다.[16] 일리리아인들은 렘부스라는 작고 빠른 전함을 이용해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 해에서 활동했으며, 해상 약탈뿐 아니라 육군을 동원하여 점령지를 확보하는 전략을 사용했다.[16] 일리리아 해안의 그리스 도시들(폴리스)은 아그론 군대에 의해 체계적으로 공격받았다.[17] 당시 이사 섬이 아그론의 위협을 받자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고, 로마는 사절을 파견했으나 일리리아 함선의 공격으로 사절 중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8]

같은 시기 그리스에서는 여러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기원전 234년 에피루스에서는 왕정이 끝나고 연방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남쪽의 아카르나니아 서부는 분리되었다. 이들의 독립은 곧 아이톨리아인들의 위협을 받았는데, 아이톨리아인들은 암브라키아를 점령하려 했다. 한편, 메디온을 포위하고 있던 아카르나니아인들은 마케도니아의 데메트리우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데메트리우스 2세는 아그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기원전 232년 또는 231년, 아그론은 렘부스 100척과 병사 5,000명을 보내 메디온을 구원했다. 일리리아군은 아이톨리아군을 기습하여 격파하고 많은 전리품을 챙겨 돌아갔다.[19] 이 승리는 한 세대 전 갈리아인들의 침입을 막아낸 것으로 유명했던 아이톨리아인들에게 큰 패배를 안겼고, 그리스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20]

아그론이 사망한 후, 그의 미망인 테우타가 왕위를 이어받아 일리리아의 세력을 유지했다. 테우타는 개별 함선들의 자유로운 약탈 행위를 허용했다. 기원전 231년, 일리리아 함대와 군대는 펠로폰네소스엘리스와 메세니아를 공격했다. 돌아오는 길에 테우타는 장군 스케르딜라이다스에게 에피루스의 포이니케를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포이니케는 함락되었고, 이어진 포이니케 전투에서도 일리리아는 승리를 거두었다. 에피루스는 결국 일리리아와 협력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그리스 세계에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21] 포이니케는 에피루스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였고 이탈리아와의 무역 중심지였는데, 일리리아의 이러한 활동은 로마의 무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이후 일리리아는 내부 반란 문제로 포이니케에서 철수해야 했다.[22]

테우타 여왕이 로마 사절의 살해를 명령하는 모습 – 아우구스틴 미리스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241년) 이후 로마는 아드리아해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해상 위협에 대비해 기원전 246년 브룬디시움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이오니아 해를 감시하고 있었다.[23] 포이니케 점령 기간 동안 일리리아 해적들은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약탈을 자행했고, 피해가 커지자 로마 원로원은 개입을 결정했다. 폴리비오스 (2.8)는 테우타에게 보낸 로마 사절단에 대한 의심스러울 정도로 생생한 묘사를 제공하는데, 이는 로마의 일리리아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의도적인 버전일 수 있다. 사절단은 L. 코룬카니우스와 C. 코룬카니우스 형제가 이끌었다.[24] 사절단이 도착했을 때 테우타는 이사를 포위 공격 중이었다. 로마 사절단이 일리리아의 해적 행위에 대해 항의하자, 테우타는 왕실 군대가 로마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개인적인 해적 행위는 막을 수 없다고 답했다. 사절단 중 한 명이 이에 격분하여 무례하게 발언하자, 테우타는 그 사절이 귀국하는 길에 살해되도록 지시했다. 이 소식은 로마 내에서 큰 분노를 일으켰고, 로마는 군대를 소집하고 함대를 준비하며 전쟁을 결심하게 되었다.[25] 이는 제1차 일리리아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 2. 경과

빨강: 로마 공화정, 파랑: 마케도니아 왕국, 빨강 점선: 일리리아 왕국]]

기원전 3세기 후반, 일리리아의 아르디아이 왕국은 아그론 왕의 통치 아래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아그론은 코르키라, 에피담누스, 파로스를 차례로 침략하여 주둔군을 배치했으며,[15] 에피루스를 향한 침공은 격퇴되었다. 역사가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당시 일리리아는 "이전의 어떤 왕보다도 강력한" 육군과 해군을 보유했으며,[16] 단일 노 열을 가진 빠르고 작은 전함인 렘부스를 운용했다. 일리리아 해군은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 해에서 해상 습격을 벌였고, 육군은 해군의 승리를 바탕으로 점령 활동을 벌였다.[16] 일리리아 해안의 그리스 도시들(''폴리스'')은 아그론 군대에 의해 체계적으로 공격받았다.[17] 로마는 아그론의 위협을 받던 이사 섬의 요청에 따라 사절을 파견했으나, 일리리아 함선의 공격으로 사절 중 한 명이 사망하여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18]

한편, 주변 그리스 국가들에서는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기원전 234년 에피루스에서는 왕정이 끝나고 연방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남쪽의 아카르나니아 서부는 독립했다. 그러나 아카르나니아는 곧 아이톨리아인들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메디온을 포위당하자 마케도니아의 데메트리우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데메트리우스 2세는 아그론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아그론은 기원전 232년 또는 231년에 렘부스 100척과 병사 5,000명을 보내 메디온을 구원했다. 일리리아군은 아이톨리아군을 격파하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한 뒤 귀환했다.[19] 이 승리는 당시 갈리아 침입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했던 아이톨리아 동맹의 패배였기에 그리스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20]

아그론이 사망한 후, 그의 미망인인 테우타 여왕이 통치권을 이어받았다.[59] 테우타는 개별 함선에 무차별적인 약탈을 허가하여 일리리아의 해적 행위는 더욱 심해졌다.[72] 기원전 231년, 일리리아 함대와 군대는 펠로폰네소스엘리스와 메세니아를 공격했으며, 귀환하는 길에 장군 스케르딜라이다스를 보내 에피루스의 부유한 도시 포이니케를 점령했다. 포이니케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일리리아는 몸값을 받고 도시와 포로들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휴전했다. 이 사건은 다시 한번 그리스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21] 에피로스는 일리리아와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포이니케는 이탈리아와의 무역 중심지였는데, 일리리아의 이러한 해상 활동과 이탈리아 상선에 대한 약탈 행위는 로마의 개입을 촉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22] 로마는 이미 기원전 246년에 브룬디시움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이오니아 해를 감시하고 있었다.[23]

이탈리아 상인들에 대한 약탈과 살해, 납치가 빈번해지자 로마 원로원은 마침내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24] 로마는 루키우스와 가이우스 코룬카니우스 형제를 사절로 파견하여 테우타에게 해적 행위 중단을 요구했다. 당시 테우타는 일리리아 내부 반란을 진압하고 이사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테우타는 로마 사절에게 왕실 군대는 해를 끼치지 않겠지만 사적인 약탈 행위는 막을 수 없다고 답했다. 이에 사절 중 한 명이 항의하자, 테우타는 그가 무례하다는 이유로 귀국길에 암살하도록 명령했다.[73][25] 이 소식과 더불어 로마 보호 하의 이탈리아 상선이 공격받은 사건[61]은 로마가 전쟁을 준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25]

'''제1차 일리리아 전쟁'''은 기원전 229년[58][71]부터 기원전 228년 사이에 벌어졌다. 기원전 229년, 테우타는 대규모 함대를 남쪽으로 보내 코르키라를 공격했다. 일부 함선은 에피담누스를 기습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코르키라 포위 함대에 합류했다.[26] 코르키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아카이아 동맹과 아카르나니아 연합 함대가 팍소스 인근에서 일리리아 함대와 교전했으나, 일리리아의 우세한 전술로 패배했다. 결국 코르키라는 항복했고, 파로스의 데메트리우스가 이끄는 일리리아 수비대가 주둔하게 되었다.[27] 일리리아는 코르키라를 거점으로 삼아 코린토스 만 북쪽 해안선과 시칠리아, 이탈리아로 향하는 해상 교역로를 장악하려 했다.[27]

로마는 집정관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가 이끄는 200척의 함대를 파견했다. 풀비우스는 코르키라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테우타의 신임을 잃은 파로스의 데메트리우스와 비밀리에 접촉했다. 데메트리우스의 도움으로 로마군은 코르키라를 점령했고, 코르키라는 로마의 '친구 도시'가 되어 보호를 받게 되었다. 데메트리우스는 이후 전쟁 기간 동안 로마군의 고문 역할을 수행했다.[28] 다른 집정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는 브룬디시움에서 보병 2만 명과 기병 2천 명을 이끌고 아폴로니아로 상륙했고, 아폴로니아 역시 로마의 동맹이 되었다.[28]

로마의 육해군은 에피담누스로 진격하여 일리리아의 포위를 풀고 도시를 로마의 보호 아래 두었다.[28] 이후 로마군은 일리리아 내륙으로 진격하여 아틴타니와 파르티니를 포함한 여러 부족의 항복을 받아냈다.[28][29] 해상에서는 이사의 봉쇄를 풀고 로마의 보호령으로 삼았다.[28][29] 로마군이 북진하며 누트리아 등 해안 도시들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일부 손실을 입기도 했으나, 결국 테우타는 수도 리존으로 후퇴했다.[30]

로마는 전쟁 목표를 달성했다고 판단하고 적대 행위를 중단했다. 로마군은 에피다르뭄, 아폴로니아, 코르키라, 파로스 섬 등 점령한 그리스 도시들을 로마의 보호령으로 삼았다.[63][74] 로마는 파로스의 데메트리우스를 일리리아의 새로운 통치자로 세웠고,[63][74] 풀비우스는 주력 함대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철수했다. 포스투미우스는 함선 40척과 일부 군대를 이끌고 남아 일리리아 지역을 감시했다.[30]

2. 3. 결과

제1차 일리리아 전쟁은 로마 공화정의 승리로 끝났다. 겨울이 끝나기 전인 기원전 228년, 테우타 여왕의 사절이 로마에 도착하여 조약이 체결되었다.[31]

조약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 테우타 여왕은 로마에 조공(혹은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 일리리아는 일부 지역을 제외한 영토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 일리리아 선박은 드린 강(Drin) 하구의 리수스(Lissus) 남쪽으로는 두 척 이상 항해할 수 없었으며, 두 척 이하라도 무장해서는 안 되었다.[31]


이 조약으로 일리리아는 드린 강 남쪽에서 최근에 정복한 영토를 모두 포기해야 했다. 로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항구인 에피담누스, 아폴로니아, 코르키라를 확보하였다.[32] 또한 내륙에서는 겐수스(슈쿰빈) 강 유역의 파르티니족과 더 남쪽의 아틴타니족 등 여러 일리리아 부족이 로마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32] 이로 인해 아르디아이족은 육지와 바다를 통해 에피루스나 그리스 서부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들의 동맹인 마케도니아로 가는 내륙 경로도 차단되었다.[32][33][34] 로마는 파로스의 데메트리우스를 새로운 일리리아 왕국의 왕으로 세워 로마의 영향력 하에 두었다.[63][74]

3. 제2차 일리리아 전쟁 (기원전 220년 ~ 기원전 219년)

빨강: 로마 공화정, 파랑: 마케도니아 왕국]]

제2차 일리리아 전쟁은 기원전 220년부터 기원전 219년까지 로마 공화국일리리아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시기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갈리아 키살피나에서의 켈트족과의 전쟁으로 인해 아드리아해에 대한 군사적 통제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이 틈을 타 일리리아의 통치자 데메트리오스는 90척의 군선을 건조하고 로마와의 조약을 깨며 영향력을 확대하려 시도했다.[75][64]

데메트리오스의 함대는 펠로폰네소스반도키클라데스 제도 등지에서 활동하며 로마의 동맹 세력들을 위협했다. 이에 로마는 집정관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여 대응했다.[76][65] 로마군은 일리리아의 주요 요새 도시인 디말룸[66][67]과 파로스[68]를 신속하게 함락시켰다. 결국 데메트리오스는 패배하여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5세에게 망명했으며[77][69], 로마는 아드리아해에서의 영향력을 다시 확보하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3. 1. 배경

기원전 229년 제1차 일리리아 전쟁 이후 10년 동안, 데메트리우스는 테우타 여왕의 뒤를 이어 일리리아의 세력을 다시 키워나갔다. 그는 기원전 222년경 아그론 왕의 첫 부인이자 핀네스 왕자의 어머니인 트리테우타와 결혼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이 결혼으로 데메트리우스는 공식적으로 아르디아이 왕국의 섭정이 되었으며, 어린 왕 핀네스를 대신해 실권을 장악했다. 이는 기원전 229년 이후 아르디아이 왕국이 겪었던 유능한 섭정 부재라는 근본적인 약점을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데메트리우스는 전통적인 일리리아마케도니아 왕국 간의 유대를 다시 강화하기 시작했다.[35] 기원전 222년, 데메트리우스가 이끄는 1,600명의 일리리아 군대는 셀라시아 전투에 참전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스파르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36] 셀라시아 전투 이후, 데메트리우스는 로마 공화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일리리아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37]

로마가 기원전 225년부터 기원전 222년까지 북부 이탈리아 포 계곡켈트족과의 전쟁에 집중하고 있을 때, 데메트리우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리리아의 아틴타니 부족을 설득하여 로마와의 동맹에서 이탈시켰다. 또한 그는 리수스(오늘날 알바니아레제) 남쪽으로 항해하며 해적 행위를 재개했는데, 이는 기원전 228년 로마와의 합의를 명백히 위반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221년, 데메트리우스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히스트리 부족과 동맹을 맺었다. 히스트리 부족은 로마의 보급선을 위협하고 있었고, 이에 로마 함대는 즉시 히스트리를 공격했다.[38] 같은 해 초여름, 마케도니아 왕국아카이아 동맹과 손잡고 아이톨리아 동맹에 맞서면서 그리스 내의 긴장이 고조되자, 일리리아인들은 전통적인 방식대로 군사 행동에 나섰다.

기원전 220년, 데메트리우스와 일리리아의 또 다른 지도자 스케르딜라이다스는 90척의 렘부스(일리리아식 군선)를 이끌고 리수스 남쪽으로 항해했다. 그들은 서부 펠로폰네소스반도필로스를 공격했으나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결국 50척의 배를 나포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일리리아 함대는 둘로 나뉘었다. 데메트리우스는 자신의 함대를 이끌고 키클라데스 제도를 약탈하러 떠났고, 스케르딜라이다스는 남은 함대를 이끌고 일리리아 북부로 돌아갔다. 나우팍투스에 40척의 배를 이끌고 도착한 스케르딜라이다스는 그의 매형인 아타마니아의 아미난데르 왕의 부추김을 받아 아카이아 동맹 침공을 계획하던 아이톨리아 동맹에 합류했다. 그들은 키나에타 내부 배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북부 아르카디아의 도시 키나에타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불태웠다. 이후 클레이토르를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데메트리우스는 50척의 배를 이끌고 에게해로 나아가 키클라데스 제도의 여러 섬에서 공물을 징수하거나 약탈을 감행했다.[39] 로도스 함대의 추격을 받게 되자[40], 데메트리우스는 코린토스에게해 쪽 항구인 켄크레아이에 정박했다. 당시 코린토스에 주둔하던 마케도니아 지휘관 타우리온은 스케르딜라이다스와 아이톨리아인들의 침공 소식을 듣고, 데메트리우스에게 아이톨리아에 맞서는 데 협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데메트리우스는 이에 동의하여 아이톨리아 해안을 몇 차례 약탈했지만, 아이톨리아 군대가 아카이아에서 돌아오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41]

아르디아이 왕국으로 돌아온 데메트리우스는 그해 겨울에도 군사 활동을 멈추지 않고, 남부 일리리아에 있는 로마의 동맹 도시와 공동체들을 공격하여 점령했다.[42] 이전까지 동맹국이었던 데메트리우스의 이러한 적대 행위를 무시해왔던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또 다른 전쟁(제2차 포에니 전쟁)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아드리아해 연안의 항구들을 안전하게 확보할 필요성을 절감했다.[43]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 제2차 일리리아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3. 2. 경과

빨강:로마 공화정, 파랑: 마케도니아 왕국]]

기원전 218년 지중해


기원전 229년 제1차 일리리아 전쟁 이후 10년 동안, 데메트리오스는 테우타 여왕의 뒤를 이어 일리리아의 세력을 다시 키웠다. 그는 기원전 222년경 아그론 왕의 첫 부인이자 핀네스 왕자의 어머니인 트리테우타와 결혼하여 자신의 지위를 굳히고, 아르디아이 왕국의 공식 섭정이 되었다.[35] 데메트리오스는 전통적인 일리리아와 마케도니아의 유대를 강화했다. 기원전 222년, 데메트리오스가 이끄는 1,600명의 일리리아 군대는 셀라시아에서 마케도니아가 스파르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36] 이후 데메트리오스는 로마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일리리아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확장하려 시도했다.[37]

로마가 기원전 225년부터 기원전 222년까지 북부 이탈리아 포 계곡에서 켈트족과의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데메트리오스는 일리리아의 아틴타니 부족을 로마와의 동맹에서 이탈시켰다. 또한 그는 기원전 228년 로마와의 합의를 어기고 리수스(오늘날 알바니아레제) 남쪽으로 항해하며 해적 행위를 재개했다. 기원전 221년, 데메트리오스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히스트리 부족과 동맹을 맺어 로마의 보급선을 방해하려 했으나, 로마 함대가 즉시 히스트리를 공격했다.[38] 같은 해 여름, 그리스에서는 마케도니아가 아카이아 동맹과 손잡고 아이톨리아 동맹에 맞서면서 긴장이 고조되었고, 일리리아인들은 이 틈을 타 전통적인 방식대로 공세를 시작했다.

기원전 220년, 로마 공화정이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와,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켈트족과 싸우느라 아드리아 해 장악력이 약해진 틈을 타, 데메트리오스와 일리리아 지휘관 스케르딜라이다스는 90척의 렘부스를 건조하여 로마에 도전했다.[75][64] 일리리아 함대는 먼저 서부 펠로폰네소스반도필로스를 공격하여 50척의 배를 나포했다. 이후 함대를 둘로 나누어, 데메트리오스는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아드리아해를 건너 키클라데스 제도를 약탈했고, 스케르딜라이다스는 일리리아 북부로 돌아갔다. 스케르딜라이다스는 나우팍투스에서 40척의 배를 이끌고 매형인 아타마니아의 왕 아미나스의 격려를 받아, 아카이아 침공을 계획하던 아이톨리아인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키나에타 내부 배신자들의 도움으로 도시를 점령하고 불태웠으며, 클레이토르를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한편, 데메트리오스는 50척의 배로 에게해로 나아가 키클라데스 제도의 섬들에서 공물을 징수하거나 약탈했다.[39] 로도스 함대의 추격을 피해[40] 코린토스의 항구 켄크레아이에 도착한 데메트리오스는 코린토스의 마케도니아 지휘관 타우리온과 협력하기로 했다. 타우리온은 스케르딜라이다스와 아이톨리아인들의 침략 소식을 듣고, 데메트리오스의 함대를 이용해 아이톨리아 해안을 약탈하는 데 동의했다.[41]

일리리아로 돌아온 데메트리오스는 겨울 동안에도 남부 일리리아에 있는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공격하고 점령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다.[42] 그동안 동맹국의 활동을 묵인해왔던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제2차 포에니 전쟁 위협이 커지자, 아드리아 해 연안의 항구를 확보할 필요성을 느꼈다.[43]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제2차 일리리아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기원전 229년 테우타 여왕 때와는 달리 로마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아폴로니아 인근의 요새 도시 디말룸에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는 일리리아인들, 즉 반대 세력들을 제거하고 최정예 6,000명의 병력을 자신의 고향 섬 파로스에 주둔시켰다. 로마에서는 두 명의 집정관이 원정에 나섰으나, 주 지휘는 칸나이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는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가 맡았다.[65] 로마는 포에니 전쟁 준비 과정에서 아드리아 해의 안정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일리리아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로 결정했다.[44][45]

기원전 219년, 로마 집정관 파울루스는 데메트리오스 세력의 핵심 거점인 디말룸을 포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켰다.[76][46][66][67] 이 승리로 주변의 일리리아 도시들은 로마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다음으로 로마군은 강력한 요새이자 데메트리오스가 직접 방어하고 있던 파로스 섬을 공격했다.[68] 파울루스는 장기 포위전 대신 기습 공격을 선택했다. 로마 주력 부대가 섬의 다른 방향으로 은밀히 이동하는 동안, 소규모 함대가 항구로 접근하여 데메트리오스를 유인했다. 데메트리오스가 로마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항구로 병력을 이동시킨 순간, 숨어있던 로마 주력 부대가 나타나 일리리아 군대를 도시로부터 차단하고 공격했다. 양쪽에서 공격받고 도시 성벽의 보호를 받지 못한 일리리아 군대는 패배했다.[47] 기원전 218년, 일리리아군은 항복했고 데메트리오스는 섬을 버리고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도망쳐, 당시 왕이었던 필리포스 5세의 궁정으로 망명했다.[77][48][69][49]

로마군은 파로스의 요새를 파괴했고, 여름이 끝나기 전에 파울루스는 로마로 개선하여 승전을 축하받았다. 이로써 일리리아 지역에서 로마에 대한 위협은 제거되었고, 제1차 일리리아 전쟁의 결과로 얻은 성과가 확보되었으며, 일리리아 왕들에게 부과되었던 이동 제한 조치도 다시 확인되었다.[50] 데메트리오스는 망명했지만, 로마는 핀네스 왕의 정권은 그대로 유지시켰다. 로마는 핀네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하는 약화된 아르디아이 왕국을 지원했다. 로마 공화국은 필리포스 5세에게 데메트리오스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51] 핀네스는 전쟁 후 부과된 배상금과 미납된 공물을 지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약화된 아르디아이 왕국은 점차 마케도니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이 지역에서는 파르티니, 빌리네스, 아만티니 등의 도시 연합체(코이나)가 등장하게 되었다.[52]

3. 3. 결과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219년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 집정관의 지휘 아래 일리리아를 침공했다. 로마군은 먼저 데메트리오스의 중요 거점이었던 디말룸을 단 7일 만에 함락시켰다.[46] 이 승리로 주변의 일리리아 도시들은 로마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다음으로 로마군은 데메트리오스가 강력한 수비 병력과 물자를 비축해 둔 파로스 섬을 공격했다. 로마군은 유인 작전을 통해 일리리아군을 요새 밖으로 끌어낸 뒤, 양쪽에서 공격하여 승리했다. 기원전 218년 일리리아군은 항복했고, 데메트리오스는 섬을 버리고 마케도니아 왕국필리포스 5세에게 망명했다.[48][49][77] 로마는 데메트리오스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필리포스 5세는 이를 거부했다.[51]

전쟁 결과 로마는 파로스의 요새를 파괴하고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일리리아의 위협을 제거했다. 제1차 일리리아 전쟁 이후 확보했던 로마의 영향력이 공고해졌으며, 일리리아 왕들에게 부과되었던 이동 제한 조치도 다시 확인되었다.[50]

데메트리오스가 망명한 후, 로마는 핀네스가 이끄는 아르디아이 왕국을 그대로 존속시켰다. 다만, 핀네스에게는 전쟁 배상금과 미납된 공물을 지불하도록 명령했다. 이 전쟁으로 약화된 아르디아이 왕국은 이후 마케도니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일리리아 내부에서는 파르티니, 빌리네스, 아만티니 등 독자적인 세력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52]

4. 제3차 일리리아 전쟁 (기원전 168년)

기원전 168년에 발발한 전쟁이다. 일리리아의 왕 겐티우스는 기원전 171년에 시작된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처음에는 로마 측에 가담했었다. 그러나 기원전 169년, 그는 입장을 바꿔 마케도니아 왕국의 페르세우스와 동맹을 맺었다.

기원전 168년, 겐티우스는 로마 공화정의 영향력 아래 있던 아폴로니아와 디라키움 도시를 공격하고 로마 사절 두 명을 투옥하면서 로마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에 로마는 사령관(프로프라이토르)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를 파견했고, 갈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겐티우스의 군대를 단기간에 격파했다. 겐티우스는 패배하여 사로잡혔으며[70], 전쟁은 약 30일 만에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기원전 167년, 겐티우스는 로마에서 열린 아니키우스 갈루스의 개선식에 포로로 끌려가 대중 앞에 전시되는 신세가 되었다.

4. 1. 배경

기원전 181년, 일리리아의 왕 플레우라투스 3세(Pleuratus III)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겐티우스(Gentius)가 왕위를 계승했다. 플레우라투스 3세는 로마에 충실했으나, 겐티우스의 통치 아래 아르디아이아(Ardiaean) 왕국과 로마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드린강(Drin) 남쪽 해안과 내륙 지방은 제1차 일리리아 전쟁 이후 로마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겐티우스는 북쪽과 서쪽의 동족들에 대한 일리리아의 지배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섬 중에서는 그리스 도시였던 이사섬(Issa)이 로마의 보호 아래 어느 정도 독립을 유지했지만, 파로스섬(Pharos)은 일리리아 영토로 남았다. 본토의 델마타이(Delmatae)와 다오르시(Daorsi)는 한때 일리리아의 속국이었으나, 델마타이는 겐티우스 즉위 직후 이탈했다. 일리리아의 힘은 해군에 기반했으며, 이들의 아드리아해 해상 활동은 다시 로마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180년, 해안 방어를 담당하던 로마 장관은 겐티우스의 배 일부가 해적 행위를 했다고 보고하며 브린디시에 도착했다. 일리리아에 파견된 로마 사절단은 왕을 만나지 못했고, 로마 시민들이 코르키라 니그라(Corcyra Nigra)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이 사건의 구체적인 결과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로마 원로원이 겐티우스 사절들의 해명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10년 후, 로마가 마케도니아 왕국의 페르세우스(Perseus of Macedon)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이사섬은 겐티우스가 페르세우스와 공모하고 있다고 로마에 고발했다. 이로 인해 일리리아 사절들은 로마 원로원에서 발언 기회를 얻지 못했고, 로마는 에피담누스(Epidamnus) 항구에 정박 중이던 일리리아의 렘비(lembi) 54척을 압수했다. 전쟁 직전, 로마는 원로원 의원을 일리리아에 보내 겐티우스에게 로마와의 공식적인 우호 관계를 상기시켰다.

기원전 169년, 겐티우스는 자신의 동생 플라토르(Plator)를 살해하도록 지시했다. 플라토르가 다르다니아 왕 모누니우스 2세의 딸 에우타(Etuta)와 결혼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겐티우스는 이후 플라토르의 약혼녀였던 에우타와 직접 결혼하여 강력한 다르다니아 왕국과의 동맹을 확보했다.

일리리아의 겐티우스 왕


한편,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는 로마가 점령했던 일리리아 내 여러 전초 기지를 탈환하며 아르디아이아 왕국으로 향하는 서쪽 길을 확보했다. 페르세우스는 일리리아어를 구사하는 망명자 플레우라투스와 마케도니아인 아다에우스, 베로이아로 구성된 사절단을 겐티우스에게 보냈다. 이들은 리수스(Lissus)에서 겐티우스를 만나 페르세우스가 로마와 다르다니아를 상대로 거둔 군사적 성공과 페네스타이족에 대한 최근 승리를 알렸다. 겐티우스는 로마와 싸울 의사는 있으나 자금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페르세우스는 처음에는 자금 지원 없이 겐티우스를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으나, 기원전 168년 로마의 마케도니아 침공이 임박하자 겐티우스에게 자금 지원을 약속해야 했다. 겐티우스의 함대를 로마 공격에 활용하기 위해 300 탈란트가 언급되었고, 페르세우스는 판타우쿠스를 보내 협정을 마무리 지었다. 메테온(Meteon) 시에서 인질 교환이 합의되었고, 겐티우스는 페르세우스의 맹세를 받아들였다. 겐티우스는 올림피오와 사절단을 페르세우스에게 보내 돈을 수령했고, 테르마이크 만의 디움(Dium)에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케도니아 기병대의 행진이 있었는데, 이는 일리리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00 탈란트는 펠라(Pella)의 왕실 금고에서 준비되었고, 일리리아인들은 그 위에 자신들의 인장을 찍었다. 이 돈의 일부가 겐티우스에게 전달되자, 판타우쿠스는 겐티우스에게 로마에 대한 적대 행위를 시작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겐티우스가 뤼크니두스(Lychnidus)에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Appius Claudius)가 보낸 로마 사절 두 명을 투옥하자, 페르세우스는 겐티우스가 이제 확실히 자신의 동맹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나머지 지원금 지급을 보류했다.[53]

겐티우스는 반로마 정책을 강화하며 아르디아이아 왕국의 국력을 키우기 위한 조치들을 시행했다. 모든 백성에게 단일 세금을 부과하고, 자신이 거주하던 리수스와 스코트라(Scodra)의 조폐소를 왕실 통제하에 두어 재정을 중앙 집중화했다. 이 시기 겐티우스는 청동 주화를 발행했는데, 일부 주화에는 마케도니아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다른 주화에는 겐티우스 자신의 초상으로 추정되는 모습과 페타소스(petasos)와 유사한 모자, 토르크(torc)가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번개와 일리리아의 대표적인 전함인 렘부스(lembus)가 묘사되어 있다. 로마인들이 작성한 기록에 따르면, 전쟁 직전 겐티우스의 국고에는 다음과 같은 자산이 있었다.

자산 종류수량
약 12.25kg
약 8.62kg
일리리아 드라크마120,000 개
로마 데나리우스13,000 개



겐티우스와 페르세우스는 로도스에도 사절을 보내 로마와의 전쟁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겐티우스는 또한 270척의 렘부스 함대를 건조했는데, 이는 그가 아드리아해를 건너올 적을 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만 5천 명 규모의 군대까지 동원하며 겐티우스는 로마와의 전쟁 준비를 마쳤다.[54]

4. 2. 경과

기원전 181년, 플레우라투스 3세(Pleuratus III)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겐티우스가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 아래 일리리아의 아르디아이아(Ardiaean) 왕국과 로마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드린강 남쪽 해안과 내륙 지역은 제1차 일리리아 전쟁 이후 로마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겐티우스는 북쪽과 서쪽으로 일리리아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이사섬(Issa, 현재 비스)은 로마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파로스섬(Pharos, 현재 흐바르)은 여전히 일리리아 영토였다. 본토의 델마타이(Delmatae)와 다오르시(Daorsi)는 한때 일리리아에 속했지만, 델마타이는 겐티우스 즉위 직후 이탈했다. 일리리아는 해군력을 바탕으로 아드리아해 해상 활동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다시 로마의 개입을 불렀다.

기원전 180년, 로마의 한 장관은 겐티우스 소속 선박의 해적 행위를 보고했다. 로마 사절단이 파견되었으나 겐티우스를 만나지 못했고, 코르키라 니그라(Corcyra Nigra)에 로마 시민이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이 사건의 구체적인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로마 상원은 겐티우스 측의 해명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10년 후, 로마가 마케도니아 왕국의 페르세우스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이사섬은 겐티우스가 페르세우스와 공모하고 있다고 로마에 고발했다. 이로 인해 일리리아 사절들은 로마 상원에서 발언 기회를 얻지 못했고, 로마는 에피담누스(Epidamnus, 현재 두라초) 항구에 정박 중이던 일리리아의 렘부스(lembus) 54척을 압수했다. 전쟁 직전, 로마는 상원의원을 파견하여 겐티우스에게 로마와의 공식적인 우호 관계를 상기시켰다.

기원전 171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겐티우스는 처음에 로마 측에 합류했다. 그러나 기원전 169년, 그는 돌연 로마에 반기를 들고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 편에 섰다. 같은 해, 겐티우스는 자신의 동생 플라토르(Plator)를 살해했는데, 이는 플라토르가 다르다니아 왕 모누니우스 2세의 딸 에우타(Etuta)와 결혼하여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겐티우스는 이후 에우타와 직접 결혼하여 강력한 다르다니아 왕국과의 동맹을 확보했다.

페르세우스는 로마가 점령했던 일리리아 내 전초 기지들을 일부 탈환하며 서쪽으로의 길을 확보했다. 그는 일리리아 망명자 플레우라투스와 마케도니아인 아다에우스, 베로이아를 겐티우스에게 사절로 보냈다. 겐티우스는 리수스(Lissus)에서 이들을 만나 페르세우스의 군사적 성공 소식을 들었지만, 자금 부족을 이유로 로마와의 전쟁 참여를 망설였다. 페르세우스는 겐티우스를 참전시키려 노력했지만, 비용을 들이는 것은 꺼렸다. 일리리아 망명자 플레우라투스는 페네스타이족으로부터 보병 1,000명과 기병 200명을 모아 페르세우스를 지원했다.

기원전 168년, 로마의 마케도니아 침공이 임박하자 페르세우스는 겐티우스의 함대를 이용하기 위해 300 탈란트의 보조금을 약속했다. 페르세우스의 동료 판타우쿠스(Pantauchus)가 메테온(Meteon) 시에서 겐티우스와 만나 인질 교환 및 조약을 체결했다. 겐티우스는 사절단을 페르세우스에게 보내 돈을 수령했고, 테르마이크 만의 디움(Dium)에서 조약이 공식화되었다. 300 탈란트가 펠라의 왕실 금고에서 준비되었고, 일리리아인들은 그 위에 자신들의 도장을 찍었다. 판타우쿠스가 이 돈의 일부를 전달하자, 겐티우스는 로마에 대한 적대 행위를 시작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겐티우스는 뤼크니두스(Lychnidus)에서 로마 사절 두 명을 투옥했고, 이를 확인한 페르세우스는 겐티우스가 돌이킬 수 없는 동맹이 되었다고 판단하고 나머지 보조금을 회수했다.[53]

겐티우스는 반로마 정책을 펴며 왕국 강화를 위한 조치들을 시행했다. 그는 모든 백성에게 단일 세금을 부과하고 리수스와 슈코드라(Shkodra)의 조폐소를 왕실 통제 하에 두어 재정을 중앙집권화했다. 이 시기 겐티우스는 청동 주화를 발행했는데, 일부 주화에는 마케도니아 문장이 새겨져 있기도 했다. 다른 주화에는 겐티우스의 초상과 함께 페타소스(petasos)나 토르크(torc) 같은 장식이 묘사되었고, 뒷면에는 번개와 일리리아의 전형적인 전함인 렘부스가 새겨졌다. 로마 기록에 따르면, 전쟁 직전 일리리아 국고에는 금 약 12.25kg, 은 약 8.62kg, 일리리아 드라크마 12만 개, 로마 데나리우스 1만 3천 개가 있었다. 겐티우스와 페르세우스는 로도스에 사절을 보내 로마와의 전쟁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겐티우스는 또한 270척의 렘부스 함대를 건조하고 1만 5천 명의 군대를 조직하며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했다.[54]

기원전 168년 1월 또는 2월, 겐티우스는 1만 5천 명의 군대와 함대를 리수스에 집결시킨 후 로마 영토로 진격하여 로마의 동맹 도시였던 바사니아(Bassania)를 포위했다. 그의 이복형제 카라반티우스(Caravantius)는 보병 1,000명과 기병 50명으로 카비(Cavii)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렘부스 함대 8척은 에피담누스와 아폴로니아 해안을 공격했다. 겐티우스가 페르세우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 사절을 체포했다는 소식을 들은 로마 사령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Appius Claudius)는 군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게네수스(Genesus) 강가에 진영을 쳤다. 곧이어 새로운 로마 사령관인 집정관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Lucius Anicius Gallus)가 이탈리아에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다. 그의 군대는 로마군 2개 군단(보병 10,400명, 기병 600명)과 이탈리아 동맹군(보병 10,000명, 기병 800명), 그리고 5,000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함대였다. 여기에 로마와 동맹을 맺은 파르티니(Parthini)족의 보병 2,000명과 기병 200명이 합류하여, 로마 연합군은 겐티우스 군대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가 되었다.

전투의 자세한 기록은 일부 소실되었으나, 아니키우스의 함대가 겐티우스의 렘부스 함대를 격파한 것으로 보인다. 육지에서도 일리리아 군대는 패배했고, 로마군은 관대한 정책을 펴며 도시들을 점령해 나갔다. 겐티우스는 수도인 슈코드라로 후퇴하여 방어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아니키우스의 군대가 접근하자 겐티우스는 공황 상태에 빠져 3일간의 휴전을 요청했다. 그는 카라반티우스의 구원군을 기대했지만 오지 않았다. 결국 휴전 마지막 날, 겐티우스는 로마군에 항복했다. 로마군은 그를 정중히 대우한 후 체포했다.[55] 슈코드라가 항복하면서 투옥되었던 로마 사절들도 풀려났다. 로마군은 슈코더르호(Scutari Lake) 북쪽으로 진군하여 메테온에서 겐티우스의 왕비 에투타, 형제 카라반티우스, 아들 스케르딜라이데스와 플레우라투스, 그리고 다른 일리리아 지도자들을 사로잡았다.

이 전쟁은 불과 30일 만에 끝났고, 아르디아이아 왕국은 멸망했다.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는 아니키우스의 개선식을 묘사하며 "그는 며칠 만에 육지와 바다에서 자신의 영토와 요새에 대한 지식에 의존했던 용감한 일리리아 부족을 패배시켰습니다."라고 기록했다. 아니키우스는 이사, 리존(Rhizon), 올시니움(Olcinium) 등 주요 도시와 다오르시족, 피루스타이(Pirustae)족 지역에 주둔군을 배치했다. 일부 지역은 자발적으로 로마에 귀속되었으나, 파로스와 같은 곳은 무력으로 정복당하고 약탈되었다.[56] 기원전 167년, 로마에서 거행된 아니키우스 갈루스의 개선식에서 겐티우스는 포로로서 대중 앞에 전시되는 신세가 되었다.[70]

4. 3. 결과

일리리아의 왕 겐티우스는 로마 공화정의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가 이끄는 군단에게 패배하여 항복했으며[70], 전쟁은 30일 만에 종결되었다.[55] 기원전 167년 로마에서 열린 아니키우스 갈루스의 개선식에서 겐티우스는 포로로 전시되었다.[70] 겐티우스와 그의 가족(왕비 에투타, 형제 카라반티우스, 아들 스케르딜라이데스, 플레우라투스) 및 다른 일리리아 지도자들은 메테온에서 포로로 잡혔다.

로마는 이 전쟁을 통해 많은 왕실 깃발, 겐티우스 왕이 사용하던 가구, 보물 등 상당한 전리품을 획득했으며, 여기서 얻은 금과 은은 로마 국고로 들어갔다. 또한, 나포된 220척의 일리리아 배는 로마 상원의 결정에 따라 코르키라, 아폴로니아, 에피다므누스 주민들에게 분배되었다.[57]

상원의 결정에 따라, 겐티우스와 그의 가족은 처음 스폴레툼으로 보내져 감시받을 예정이었으나, 스폴레툼 주민들이 왕족 감시를 거부하면서 이구비움으로 이송되었다. 다른 포로들은 로마에 투옥되었다.[57] 겐티우스의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57]

로마는 일리리아에 대한 처벌을 집행하면서, 전쟁 중 로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왕국들은 제외했다. 반면 로마에 적대했던 도시, 건물, 공공 기관은 철저히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로마 편에 섰던 왕국들은 이전의 행정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고, 겐티우스에게 납부하던 세금의 절반만 로마에 납부하도록 세금이 감면되었다. 기존의 일리리아 연합 왕국들은 해체되었고, 각 단위는 별개의 왕국으로 인정받아 지역 자치권을 누렸으며, 종종 자체적으로 주화를 주조할 권리도 부여받았다.

이 전쟁의 결과로 남부 일리리아 지역은 완전히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로마 군단은 북부와 동부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이후 약 100년 동안 군사 활동을 계속해야 했다.

5. 평가 및 영향

로마는 일리리아 전쟁에서 승리하며 많은 왕실 깃발, 겐티우스 왕이 사용하던 가구, 막대한 보물 등 다양한 전리품을 확보했다. 전리품 판매로 수백만 세스테르티우스가 마련되었고, 금과 은은 로마 국고로 들어갔다.

로마 원로원의 결정에 따라, 겐티우스 왕과 그의 가족은 처음에는 스폴레툼(Spoletum)으로 보내져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스폴레툼 주민들이 왕족 감시를 거부하자, 그들은 이구비움(Iguvium)으로 이송되었다. 다른 포로들은 로마에 투옥되었다. 겐티우스 왕의 사망 연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남아있다.[57]

일리리아에서 압수한 220척의 배는 원로원의 결정에 따라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코르키라(Corcyra), 아폴로니아, 에피다므누스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는 전쟁 중 로마를 도왔던 이들에 대한 보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로마는 일리리아(Illyria) 지역에 대해 차별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전쟁에서 로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왕국들은 처벌에서 제외되었지만, 로마에 적대했던 세력들의 도시, 건물, 공공 기관은 철저히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처벌에서 제외된 왕국들은 기존의 행정 체제를 유지하고 매년 관리를 선출할 수 있었으며, 로마에 납부하는 세금도 이전에 겐티우스 왕에게 내던 금액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기존의 연합 왕국들은 해체되었고, 각 지역 단위는 별개의 왕국으로 인정받아 지역 자치권을 누렸으며, 일부는 자체적으로 주화를 주조할 권리까지 얻었다. 이는 로마가 분할 통치 전략을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비록 남부 일리리아 지역은 완전히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로마 군단은 이후 약 100년 동안 북부와 동부 지역을 추가로 정복하기 위한 군사 활동을 계속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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