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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유철도 3대 미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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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국유철도 3대 미제 사건은 1949년에 발생한 시모야마 사건, 미타카 사건, 마쓰카와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들은 일본국유철도(국철)의 인원 정리와 관련된 사회적, 정치적 배경 속에서 발생했으며, 현재까지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아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다. 각 사건은 국철 총재의 사망, 무인 열차 폭주 및 탈선, 레일 제거로 인한 열차 탈선 등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노동조합 연루 의혹, GHQ 개입설 등 다양한 의혹과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들은 국철 해체 및 민영화 논의와 맞물려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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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유철도 3대 미제 사건
개요
사건 유형미제 사건
발생 시기1949년 ~ 1975년
발생 장소일본
관련 기관일본국유철도 (국철)
주요 사건
사건 목록시모야마 사건
미타카 사건
마쓰카와 사건
영향
사회적 영향공산주의 운동 탄압
노동 운동 위축
사회 불안 조성
정치적 영향일본국유철도 민영화 논의 촉진
냉전 시대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
관련 정보
수사 상황모든 사건이 미해결 상태로 종결됨
논란정치적 개입 의혹
공안 기관의 조작 의혹
진범 은폐 의혹
기타
관련 문서일본의 미제 사건 목록
공안 사건

2. 3대 사건

일본국유철도 3대 미제 사건은 1949년에 발생한 세 가지 철도 관련 미해결 사건을 말한다.[2]

사건명발생일발생 장소개요
시모야마 사건1949년7월 6일조반선기타센주 - 아야세역 사이국철 총재 시모야마 사다노리가 출근 도중 실종, 다음 날 새벽 사망한 채 발견됨.
미타카 사건1949년7월 15일주오 본선미타카역무인 열차 폭주 및 탈선. 6명 사망, 20명 부상.
마쓰카와 사건1949년8월 17일도호쿠 본선마쓰카와 - 가나야가와역 사이고의적인 레일 제거로 열차 탈선. 3명 사망.



이 외에도 당시 국철에서는 다음과 같은 유사한 열차 탈선 사건들이 발생했으며, 모두 미해결 상태이다.

사건명발생일발생 장소결과
니와사카 사건1948년4월 27일오우선아카이와 - 니와사카 사이사망자 3명
요산선 사건1949년5월 9일요산선아사나미 - 이요호조역 사이사망자 3명
마리모호 탈선 사건1951년5월 17일네무로 본선신토쿠 - 오치아이역 사이경상자 1명


2. 1. 시모야마 사건

1949년 7월 5일 아침, 국철 총재 시모야마 사다노리가 출근 도중 실종되어 다음 날인 7월 6일 미명에 조반선 기타센주 - 아야세역 사이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2]

2. 2. 미타카 사건

1949년 7월 15일, 주오 본선 미타카역에서 무인 열차가 폭주하여 탈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6명이 사망하고 20명이 부상당했다.[2]

2. 3. 마쓰카와 사건

1949년 8월 17일 도호쿠 본선 마쓰카와-가나야가와 역 사이에서 고의로 레일이 제거되어 열차가 탈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3명이 사망했다.[2]

3. 기타 탈선 사건

1948년 4월 27일 오우선 아카이와~니와사카 구간에서 발생한 니와사카 사건으로 3명이 사망했다.[2] 1949년 5월 9일 요산선 아사나미~이요호조 구간에서 발생한 요산 선 사건으로 3명이 사망했다.[2] 1951년 5월 17일 네무로 본선 신토쿠~오치아이 구간에서 발생한 마리모호 탈선 사건으로 경상자 1명이 발생했다.[2]

사건명발생일발생 장소피해
니와사카 사건1948년 4월 27일오우선 아카이와 - 니와사카사망 3명
요산선 사건1949년 5월 9일요산선 아사나미 - 이요호조사망 3명
마리모호 탈선 사건1951년 5월 17일네무로 본선 신토쿠 - 오치아이경상 1명


4. 시대적 배경

1949년 중국 대륙에서는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군의 승리가 확실해졌고, 한반도에서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이승만 정권과 김일성 정권이 대립하며 긴장 상태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전후 일본 점령을 수행하던 미국군과 영국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대일 정책을 민주화에서 반공방파제로 전환했다(역 코스).

하이퍼 인플레이션으로 어려움을 겪던 일본 경제 재건을 위해, 이른바 도지 라인에 기초한 긴축 재정 정책을 실시했다. 같은 해 6월 1일에는 행정 기관 직원 정원법을 시행하여 전체 공무원 약 28만 명, 같은 날 발족한 일본국유철도(국철) 약 10만 명 등 대규모 인원 정리가 단행되었다.

같은 해 1월 23일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요시다 시게루의 민주자유당이 단독 과반수 264석을 획득했지만, 일본 공산당도 4석에서 35석으로 약진했다. 공산당 계열의 전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산별회의)나 국철노동조합도 인원 정리에 완강히 저항하며 요시다 내각 타도와 인민 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모야마 국철 총재는 노조와의 교섭 전면에 나섰고, 사건 전날인 7월 4일에는 3만 명의 종업원에게 1차 정리 통고(해고 통고)가 이루어졌다.

5. 수사와 재판

국철이 인원 정리를 추진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국철 노조의 범행이라는 관점에서 수사가 진행되었다.[1]

시모야마 사건에서는 시모야마 사다노리 총재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가 쟁점이 되었다. 시체가 생전에 절단되었는지(자살의 근거), 사후에 절단되었는지(타살의 근거)에 따라 큰 논쟁이 벌어졌다. 경시청 수사 1과는 자살설을, 수사 2과는 타살설을 주장했으나, 결국 타살 및 자살 여부에 대한 공식 수사 결과는 발표되지 않고 수사가 종결되었다.[1]

미타카 사건에서는 국철 노동조합원 11명이 기소되었다.[1] 재판 결과, 공산당원 10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비공산당원 1명은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다.[1] 그러나 이 유일한 사형수에게는 알리바이가 존재하고 진술이 번복되는 등 억울한 누명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옥사한 전 사형수의 가족이 재심을 신청하고 있다.[1]

마쓰카와 사건에서는 국철 노동조합원 10명과 도시바 마쓰카와 공장(현 기타시바 전기) 노동조합원 10명, 총 20명이 기소되었다.[1] 재판에서는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전원 무죄 판결이 확정되었다.[1]

이 세 사건에는 GHQ가 사건을 일으켜 국철 노조나 공산당에 죄를 뒤집어씌워 인원 정리를 쉽게 하려 했다는 음모론이 존재한다.[1]

6. 의혹과 논란

시모야마 사건, 미타카 사건, 마쓰카와 사건에서는 "GHQ가 사건을 일으켜 국철 노조나 공산당에 죄를 뒤집어씌워 인원 정리를 쉽게 했다"는 음모론이 존재한다.

시모야마 총재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여부는 큰 쟁점이 되었다. 시체가 생체 절단 (자살의 근거)인지 사후 절단 (타살의 근거)인지에 따라 쟁점이 되었다. 수사 1과는 자살설을 주장했고, 경시청 수사 2과는 타살설을 주장했다. 최종적으로 타살설 및 자살설에 대해 공식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수사를 종결했다.

미타카 사건에서는 국철 노동조합원 11명이 기소되었다. 재판에서는 공산당원 10명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고, 비공산당원 1명에게는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알리바이 존재, 진술 번복 등으로 인해 억울한 누명 의혹이 제기되었고, 옥사한 전 사형수의 가족에 의해 재심 신청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쓰카와 사건에서는 국철 노동조합원 10명과 도시바 마쓰카와 공장(현 기타시바 전기) 노동조합원 10명, 총 20명이 기소되었다. 재판에서는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전원 무죄 판결이 확정되었다.

참조

[1] 뉴스 「下山」「松川」は未解決=国鉄三大ミステリー事件 https://web.archive.[...] 時事通信
[2] 서적 あなたは3つ言えますか? 日本の三大雑学236 幻冬舎〈幻冬舎文庫〉 2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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