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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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는 1939년 창설된 나치 독일의 무장친위대 소속 기갑사단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다양한 전선에 투입되어 전투를 치렀다.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발칸 전역, 독소전쟁 등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동부전선에서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기도 했다. 이후 노르망디 전투, 벌지 전투 등 서부 전선에서도 싸웠으며, 전쟁 말기에는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 등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미군에 항복했다. 이 사단은 유고슬라비아, 민스크, 튈, 오라두르쉬르글란 등지에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는 등 수많은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으며, 종전 후 사단의 행적을 미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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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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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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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역사 | |
창설 | 1939년 10월 10일 |
해체 | 1945년 5월 8일 |
재편성 | 1943년 (장갑 사단으로 개편) |
규모 및 소속 | |
소속 | [[파일:Flag Schutzstaffel.svg|26px]] 무장친위대 |
규모 | 사단 |
병과 | 장갑척탄병 (기계화보병) (1939~1943) 장갑부대 (1943~1945) |
상급 부대 | [[파일:S SS-Pz Abt 101.jpg|26px]]제1SS장갑군단 제2SS장갑군단 등 |
최종 상급 부대 | [[파일:6th Army Logo.svg|26px]] 제6SS기갑군 (1944년 9월~)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파울 하우서 |
과거 지휘관 | 파울 하우서 하인츠 람머딩 |
참전 |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모스크바 전투) 쿠르스크 전투 노르망디 상륙 작전 벌지 전투 봄의 각성 작전 |
기타 정보 | |
통칭 | "다스 라이히" (국가) |
관련 사항 | 오라두르쉬르글란에서의 주민 학살에 관여 |
2. 창설 및 초기 활동
1939년 폴란드 침공에서 친위대 특무 부대는 여러 육군 부대에 분산되어 첫 전투를 경험했다. 폴란드 전역이 종료된 1939년 10월 10일, 친위대 특무 부대는 하나로 통합되어 SS-VT 사단(SS 특무 사단)이 설립되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SS-VT 사단은 로테르담 공격에 참여했고, 이후 연합군을 네덜란드 젤란트 주변으로 몰아넣는 임무를 수행했다. 다음으로, 육군 부대가 제압한 지역에서 일부 남은 저항 거점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 사단은 프랑스로 이동하여 견고하게 방어된 운하를 돌파하는 지원을 하고, 파리로 진군에 참여했다. 전투가 끝날 무렵에는 에스파냐 국경에 도달해 있었다.
프랑스 전역 후, 부대 명칭은 SS-VT 사단에서 '''SS 사단 라이히'''(''SS-Division "Reich"'')로 변경되었다. 프랑스 항복 후, 사단은 영국 본토 침공을 위해 프랑스에 주둔했으나, 영국 본토 침공 작전은 연기되었다. 1941년 사단은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을 위한 마리타 작전 준비를 위해 루마니아로 이동했다.
1941년 4월 12일 아침, 프리츠 클링엔베르크 SS대위와 그의 모터사이클 중대는 다뉴브강 기슭의 판체보를 거쳐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클링엔베르크는 불어난 강과 직접 공격이 불가능한 다리 때문에 시내 진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중 클링엔베르크의 부하들이 강 북안에서 대형 보트를 발견했고, 클링엔베르크는 소대장 1명, 부사관 2명, 사병 5명과 함께 다뉴브강을 건넜다. 맞은편에 도착한 클링엔베르크는 지원 요청을 위해 2명을 남기고 나머지 부하 6명과 함께 베오그라드 시내로 진입했다. 시내에서 20명의 유고슬라비아 병사들과 마주쳤지만, 총격전 없이 항복을 받아냈다. 얼마 후 군용 차량을 탈취한 클링엔베르크 부대는 유고슬라비아 국방성으로 향했지만, 건물은 이미 비어 있었다.
베오그라드에 남아있는 군 지휘관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클링엔베르크는 독일 대사관을 찾아 하켄크로이츠를 게양했다. 베오그라드는 마침내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두 시간 후 베오그라드 시장이 대사관에 도착해 클링엔베르크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다음날까지 도시를 확보할 후속 독일 부대는 도착하지 않았다. 이 공적으로 클링엔베르크 SS대위는 기사십자장을 수훈했다.
2. 1. SS 특무 부대 (1939년)
1939년 폴란드 침공에서 친위대 특무 부대는 여러 육군 부대에 분산되어 첫 전투를 경험했다. 폴란드전이 종료된 1939년 10월 10일, 친위대 특무 부대는 하나로 통합되어 SS-VT 사단(SS 특무 사단)이 설립되었다.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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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연대 도이칠란트(SS-Standarte Deutschland) |
SS 연대 게르마니아(SS-Standarte Germania) |
SS 연대 데어 퓌러(SS-Standarte Der Führer) |
통신 대대 |
정찰 대대 |
프랑스 전역에서는 SS-VT 사단으로서 로테르담 공격에 참여했다. 로테르담 공략 후, 사단은 다른 사단과 함께 연합군을 네덜란드 젤란트 주변으로 몰아넣는 임무를 받았다. 다음으로, 육군 부대가 제압한 지역에서 일부 남은 저항 거점을 파괴하는 임무를 받았다. 사단은 프랑스로 이동하여, 견고하게 방어된 운하를 돌파하는 지원을 하고, 파리로의 진군에 참여했다. 전투의 마지막에는 부대가 스페인과의 국경 근처까지 전진했다.
프랑스 전역 후에, 부대는 명칭을 SS-VT 사단에서 '''SS 사단 라이히'''(''SS-Division "Reich"'')로 변경했다. 프랑스 항복 후, 사단은 영국 본토 침공을 위해 프랑스에 주둔했으나, 영국 본토 침공 작전은 연기되었다. 그 때문에 1941년에 사단은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을 위한 마리타 작전의 준비를 위해 루마니아로 이동했다.
2. 2. 폴란드 침공 (1939년)
1939년 폴란드 침공에서 친위대 특무 부대는 여러 육군 부대에 분산되어 첫 전투를 경험했다. 폴란드전이 종료된 1939년 10월 10일, 친위대 특무 부대는 하나로 통합되어 SS-VT 사단(SS 특무 사단)이 설립되었다. SS-VT 사단은 SS 연대 도이칠란트(''SS-Standarte Deutschland''), SS 연대 게르마니아(''SS-Standarte Germania''), SS 연대 데어 퓌러(''SS-Standarte Der Führer''), 통신 대대, 정찰 대대로 구성되었다.2. 3. 프랑스 침공 (1940년)
1940년 5월, 데어 퓌러 연대는 사단에서 분리되어 네덜란드 국경 근처로 이동했고, SS-VT 사단(SS 전투 사단)의 나머지는 뮌스터 후방에서 네덜란드 침공 명령을 기다렸다. 이 연대와 LSSAH는 5월 10일에 시작된 네덜란드 지상 침공에 참여했다. 데어 퓌러의 제3대대 하사관 루드비히 케플링거는 IJssel의 파괴된 다리를 넘어 베스터보르트 요새를 기습하여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받은 최초의 무장 SS 대원이 되었다.다음 날, SS-VT 사단은 네덜란드로 진입하여 네덜란드 중앙 전선과 로테르담을 향한 진격에 참여했고, 5월 12일에 로테르담에 도착했다. 도시 점령 후, SS-VT 사단은 다른 독일 부대들과 함께 젤란트 지역과 발헤렌 및 사우스 베벌랜드 섬에 남아있는 프랑스-네덜란드군을 "소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5월 17일 도이칠란트 연대는 슬로담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성공적으로 건넜는데, 이는 4년 후 스헬데 전투에서 제2캐나다 사단과 제52(로우랜드) 사단이 시도했던 업적이었다.[1]
네덜란드에서의 전투가 끝난 후, SS-VT 사단은 프랑스로 이동했다. 5월 24일, LSSAH는 SS-VT 사단과 함께 덩케르크 주변 방어선을 유지하고 포위된 영국 원정군과 프랑스군이 포함된 주머니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배치되었다. SS-VT 사단의 정찰대가 생바낭의 운하를 건넜지만 영국 장갑차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후 SS-VT 사단의 더 큰 부대가 운하를 건너 생바낭에 교두보를 형성했다. 덩케르크에서 48km 떨어진 곳이었다. 다음 날, 영국군은 생바낭을 공격하여 SS-VT 사단이 후퇴하고 영토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5월 26일 독일의 진격이 재개되었다. 5월 27일, SS-VT 사단의 도이칠란트 연대는 메르빌의 레이에 강에 있는 연합군 방어선에 도달했다. 그들은 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하고 측면을 방어하기 위해 SS 토텐코프 사단의 도착을 기다렸다. 먼저 도착한 것은 영국 전차 부대였고, 그들은 그들의 위치를 관통했다. SS-VT는 지휘관 펠릭스 슈타이너의 위치에서 4.5m 떨어진 곳까지 접근한 영국 전차 부대에 맞서 간신히 버텼다. 토텐코프 판처예거 소대의 도착만이 도이칠란트 연대가 파괴되고 교두보를 잃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5월 30일까지, 남은 연합군 대부분은 덩케르크로 밀려났고, 그곳에서 배를 통해 영국으로 철수했다. SS-VT 사단은 다음으로 파리를 향한 진격에 참여했다.
프랑스 전투 이후, SS-VT는 1940년 7월 공식적으로 무장친위대로 개명되었다. 1940년 12월 게르마니아 연대는 ''베르퓌궁 사단''에서 제거되어 새로운 사단, SS 사단 게르마니아의 핵심을 형성하는 데 사용되었다. 1941년 초까지 사단은 "라이히"(1942년 "다스 라이히")로, "게르마니아"는 SS 사단 비킹으로 개명되었다.
2. 4. 바다사자 작전 준비 및 발칸 전역 (1940년 ~ 1941년)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친위대 특무 부대는 SS-VT 사단(SS 특무 사단)으로 통합되었다. 이 사단은 프랑스 전역에서 로테르담 공격에 참여했고, 연합군을 젤란트로 몰아넣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프랑스로 이동하여 운하 돌파를 지원하고 파리 진군에 참여했으며, 스페인 국경 근처까지 전진했다.[1]프랑스 전역 후, 부대 명칭은 '''SS 사단 라이히'''(''SS-Division "Reich"'')로 변경되었다. 영국 본토 침공을 위해 프랑스에 주둔했으나, 영국 본토 침공 작전은 연기되었다. 1941년 사단은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을 위한 마리타 작전 준비를 위해 루마니아로 이동했다.[1]
1941년 4월 12일, 프리츠 클링엔베르크 SS대위와 휘하 모터사이클 중대는 다뉴브강 기슭의 판체보를 거쳐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클링엔베르크는 불어오른 강과 다리 때문에 시내 진입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강 북안에서 보트를 발견하여 소수의 부하들과 함께 다뉴브강을 건넜다. 베오그라드 시내에 진입한 클링엔베르크는 유고슬라비아 병사들을 항복시키고, 군용 차량을 탈취하여 유고슬라비아 국방성으로 향했으나, 건물은 비어 있었다. 클링엔베르크는 독일 대사관을 찾아 하켄크로이츠를 게양했고, 베오그라드 시장은 항복했다. 이 공적으로 클링엔베르크는 기사십자장을 수훈했다.[2]
1941년 4월, 제2SS기갑사단 소속 병력은 알리부나르(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지역에서 민간인과 유고슬라비아 전쟁 포로를 상대로 범죄를 저질러 약 200명을 살해했다. 알리부나르 세르비아 정교회 뜰에서 51구, 인근 Selište에서 54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범죄는 이 지역 전투 중 무장한 민간인의 개입과 연대 부관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저질러졌다.
3. 유고슬라비아 점령
1940년 프랑스 침공 작전이 끝날 무렵, SS-V 사단은 에스파냐 국경에 도달해 있었다. 프랑스 함락 후, 사단은 영국 침공 작전인 바다사자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프랑스에 주둔했다. 그러나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이 패배하면서 바다사자 작전은 취소되었고, '라이히' 사단은 1941년 3월 유고슬라비아 및 그리스 침공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루마니아로 이동했다.
1941년 4월, 독일군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이 시작되자, SS사단 "다스 라이히"는 헝가리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진군했다. 이 과정에서 프리츠 클링엔베르크 SS대위와 그의 부하들이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 1. 베오그라드 점령 (1941년)
1941년 3월 26일,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유고슬라비아에서 친독 정권에 반대하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에 1941년 4월 6일,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였다. SS사단 "다스 라이히"는 헝가리에서 출발하여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진격, 베오그라드를 점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941년 4월 12일 아침, SS 대위 프리츠 클링겐베르크가 이끄는 오토바이 부대는 판체보에서 도나우강 강변을 따라 베오그라드로 접근했다. 클링겐베르크는 베오그라드 진입을 시도했지만, 불어난 강물과 다리 부재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클링겐베르크는 강 북쪽에서 모터보트를 발견, 부하들과 함께 도나우강을 건넜다. 강 건너편에 도착한 후, 지원군을 위해 두 명을 돌려보내고, 남은 6명과 함께 베오그라드 시내로 진입했다.
시내에서 클링겐베르크 부대는 20명의 유고슬라비아 군인과 마주쳤는데, 유고슬라비아 군인들은 저항 없이 항복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군용 차량을 탈취, 이를 이용해 유고슬라비아 군무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군무성은 이미 비어 있었고, 군 지휘부는 독일 공군의 공습으로 인해 수도에서 철수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베오그라드에는 항복 협상을 할 군 지휘부가 없었기 때문에, 클링겐베르크는 독일 대사관으로 가서 대형 갈고리 십자 깃발을 게양하여 도시 점령을 선언했다. 두 시간 후, 베오그라드 시장이 대사관에 도착하여 클링겐베르크에게 항복 의사를 밝혔다. 독일군 주력 부대는 다음 날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이러한 공로로 클링겐베르크는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1]
베오그라드 점령 후, 다스 라이히 사단은 소련 침공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폴란드로 이동했다.
4. 독소전쟁 (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와 함께, 다스 라이히 사단은 중부 집단군 소속으로 독소전쟁에 참전했다.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이 지휘하는 제2기갑집단 예하 제46군단(자동차화)에 배속되어, 비알리스토크 및 민스크 포위전, 스몰렌스크 포위전, 옐냐 전투, 그리고 키예프 포위전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6]
이후 제2기갑집단(후에 제2기갑군으로 승격) 소속으로 동쪽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진흙탕 길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룔을 거쳐 브랸스크-뱌지마 복합 포위전에 참가했다. 또한, 레닌그라드 공격이 중단되고 철도로 수송된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의 제4기갑군 제40군단에 소속되어 태풍 작전에 참여, 모스크바 공략에 나섰다.[6] 다스 라이히 사단은 클린 남쪽에서 이스트라를 지나 1941년 11월, 독일군 최고 진출 지점인 소련 수도 모스크바 인근까지 접근했으나, 악천후와 큰 피해, 소련군의 동계 반격으로 후퇴했다.[6]
4. 1. 초기 공세 (1941년)
1941년 사단은 소련 침공을 위해 폴란드로 이동했다. 당시 사단은 중부 집단군 소속으로 스몰렌스크, 옐냐, 키예프 등에서 전투에 참가했으며, 모스크바 진공 당시에는 선봉을 맡았다.[2] 1941년 11월 사단은 소련의 수도 약 수킬로미터 내까지 진격하여 소련 침공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소련의 수도를 눈앞에 두고 있던 사단은 혹독한 기후, 심각한 손실, 그리고 소련군의 대규모 역공세로 인해 후퇴해야 했다.[2]4. 2. 모스크바 공방전 (1941년)
1941년 11월, 다스 라이히 사단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불과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여, 소련 침공의 절정기를 맞이했다.[5] 그러나 소련의 수도를 눈앞에 두고, 혹독한 추위와 심각한 병력 손실, 그리고 소련군의 대규모 반격으로 인해 후퇴해야만 했다.[5] 이후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사단은 전선에서 물러나 기갑척탄병 사단으로 재편성되기 위해 프랑스로 이동했다.[5] 오스텐도르프 전투단이라 명명된 사단 병력 일부는 동부 전선에 남았으며, 1942년 6월에 사단 본대와 합류했다.[5]4. 3. 동부 전선 재투입 및 하르코프 전투 (1943년)
1943년 초, 다스 라이히는 동부 전선으로 복귀했다. 하르코프 정면의 붕괴 위기에 놓인 전선을 보강하기 위한 배치였다. 하르코프 재점령 후, 다스 라이히는 다른 사단들과 함께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했다. 다스 라이히는 돌출부의 남쪽 공격을 담당하여 약 64.37km를 전진했지만, 작전이 중단되어 벨고로드로 후퇴했다.[5] 그 후 미우스 강, 하르코프, 키예프를 전전했다. 10월에 '''제2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로 개칭했다.[6]
계속된 전투로 연대 규모까지 소모되었기 때문에 캄프그루페 다스 라이히(Kampfgruppe SS-Panzerdivision Das Reich) 또는 캄프그루페 라머딩(KG Lammerding)으로 불렸다. 1944년 2월, 사단은 일부 부대를 동부 전선에 남겨두고 전선에서 철수하여 프랑스 남부의 마을 몽토방에서 장비와 인원을 보충받고 재편성되었다. 남은 부대는 캄프그루페 다스 라이히 또는 캄프그루페 바이딩거(KG Weidinger)로 불렸다.
3월, 소련군의 춘계 공세로 카메네츠-포돌스키에서 포위되었고, 하우서 SS대장의 제2 SS 기갑 군단이 이를 구출했다. 구출된 바이딩거 전투단은 이미 프랑스에 있는 사단의 나머지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프랑스로 보내졌다.
5. 노르망디 전투 및 아르덴 공세
1943년 초, 다스 라이히 사단은 하리코프 근방에서 붕괴 중인 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동부 전선으로 복귀했다.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되어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에서 64km를 돌파했지만, 큰 손실을 입었다. 시칠리아 섬에 연합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에 만슈타인 원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공세를 중단시켰고, 다스 라이히는 다른 SS 사단들과 함께 후퇴해야 했다. 이후 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로 재편되었다. 다스 라이히 전투단은 동부 전선에 남았고, 본대는 재편성을 위해 서부 유럽으로 이동하여 프랑스에서 파르티잔 토벌 임무를 수행했다.
1943년과 1944년 겨울, 한스 발렌틴 후베 상급대장의 제1 기갑군이 소련군의 공세로 포위되었고, 다스 라이히 전투단 역시 포위망에 갇혔다. 파울 하우서 SS대장의 제2 SS 기갑 군단 소속 제9 SS 기갑 사단 호헨슈타우펜과 제10 SS 기갑 사단 프룬츠베르크의 활약으로 전투단은 포위망에서 탈출하여 프랑스에 주둔 중인 사단 본대와 합류했다. (바이딩어 전투단은 동부 전선에 잔류)
1944년 2월, 재편성을 위해 프랑스 남부 툴루즈 몽토방으로 이동한 사단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다. 제12 SS 기갑 사단 히틀러유겐트, 기갑 교도 사단과 함께 캉 북부 전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캉과 생로 근방에서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역공세를 펼쳤으나, 8월 초 모르텡 탈환은 큰 성과가 없었다. 8월 중순, B 집단군 대부분이 팔레즈 포위망에 갇혔으나, 호헨슈타우펜과 다스 라이히의 노력으로 많은 독일군이 탈출에 성공했다.
센강을 넘어 서부 방벽 후방으로 퇴각한 사단은 재편성과 휴식을 취했다. 1944년 말, 독일 국방군은 전선을 독일 본토로 축소했지만, 히틀러는 마켓가든 작전의 성공에 고무되어 제2차 아르덴느 공세를 준비했다. 다스 라이히는 미군 전선에 균열을 내려 했으나, 공세는 실패했고, 뫼즈강 앞에서 연합군의 반격에 무너졌다.
큰 피해를 입고 독일 본토로 이동한 사단은 재편성 후, 부다페스트 구원을 위한 플라텐지 공세에 참가했다. 이 공세 역시 실패했고, 다스 라이히는 드레스덴에서 휴식 후 비엔나와 프라하에서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다. 종전 후, 사단 잔존병들은 서쪽으로 탈출하여 미군에게 항복했다.
5. 1. 프랑스 주둔 및 노르망디 상륙 작전 (1944년)
1944년 2월, 동부 전선에서 장기간 전투 후 재편성을 위해 후방으로 물러난 사단 본대는 장비와 병력을 보충받기 위해 프랑스 남부 툴루즈 몽토방에 주둔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사단은 다시 활동에 들어갔고, 캉 북부 전선에 제12 SS 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기갑 교도 사단과 함께 수비선을 구축했다.[1]사단은 캉과 생로 근방에서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수차례 역공세를 펼쳤다. 8월 초, 다스 라이히를 포함한 독일 기갑 부대가 모르텡을 탈환했지만, 이는 큰 의미가 없었다. 8월 중순, 사단을 포함한 B 집단군 대부분이 팔레즈 포위망에 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호헨슈타우펜과 다스 라이히의 노력으로 많은 독일군이 포위망에서 탈출했다.[1]
5. 2. 팔레즈 포위망 및 독일-프랑스 국경 후퇴 (1944년)
1943년과 1944년 겨울, 한스 발렌틴 후베 상급대장의 제1 기갑군이 소련군의 대규모 역공세로 포위되었다. 다스 라이히 전투단 또한 이 소련군의 공세로 인해 포위망에 빠졌다. 다스 라이히 전투단은 파울 하우서 SS대장의 제2 SS 기갑 군단 소속 제9 SS 기갑 사단 호헨슈타우펜과 제10 SS 기갑 사단 프룬츠베르크의 분전으로 포위망에서 탈출했다. 포위망에서 벗어난 전투단은 사단과 합류하기 위해 본대가 주둔 중인 프랑스로 이동했다. 단, 바이딩어 전투단이라 명명된 소규모 전투단이 동부 전선에 남겨졌다.1944년 2월, 장기간에 걸친 동부 전선에서의 전투 후 재편성을 위해 후방으로 물러난 사단 본대는 장비와 병력을 보충받기 위해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툴루즈(Toulouse) 몽토방(Montauban) 마을에 주둔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사단은 다시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고, 캉 북부 전선에 제12 SS 기갑 사단 히틀러유겐트, 기갑 교도 사단과 함께 수비선을 구축했다.
사단은 캉(Caen)과 생로(St. Lo) 근방에서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수차례 역공세를 펼쳤다. 8월 초 다스 라이히를 포함한 독일 기갑 부대가 모르텡(Mortain)을 탈환했지만 무의미했다. 8월 중순, 사단을 포함한 B 집단군 대부분이 팔레즈 포위망에서 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호헨슈타우펜과 다스 라이히의 노력 덕에 수많은 독일군이 포위망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센강을 넘어 요새화된 서부 방벽 후방으로 퇴각한 사단은 재편성과 휴식을 취했다.
5. 3. 벌지 전투 (1944년)
1944년 말, 연합군의 하계 공세로 큰 피해를 입은 독일 국방군은 독일 본토로 전선을 축소했다. 그러나 마켓가든 작전을 통해 연합군의 공세를 저지한 히틀러는 새로운 공세인 제2차 아르덴느 공세를 준비했다. 이 공세에서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는 미군 전선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를 했지만, 결국 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다스 라이히는 뫼즈강을 눈앞에 두고 연합군의 강력한 반격에 부딪혀 서서히 무너졌다.다스 라이히는 마네이(Manhay)까지 진격했으나, 미국 제2기갑사단과 미국 제75보병사단에 의해 저지당했다. 바스토뉴 점령 또한 실패했다.
6. 최후 공세 및 항복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전선에서 물러난 다스 라이히 사단은 재편성을 위해 독일 본토로 이동했고, 소련군에게 포위된 부다페스트를 구원하기 위해 헝가리에서 벌어진 독일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인 플라텐지 공세에 참가했다. 이 공세 역시 실패했고, 다스 라이히는 드레스덴에서 휴식을 취한 뒤 비엔나와 프라하에서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사단 잔존병들은 서쪽으로 탈출해 미군에게 항복했다.
6. 1. 헝가리 반격 작전 (1945년)
다스 라이히 사단은 재편성을 위해 독일 본토로 이동한 뒤, 소련군에게 포위된 부다페스트를 구원하기 위해 헝가리에서 벌어진 독일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인 플라텐지 공세에 참가했다. 그러나 이 공세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다스 라이히는 드레스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비엔나와 프라하에서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다.6. 2. 드레스덴, 프라하, 빈 전투 및 종전 (1945년)
1945년 초,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전선에서 물러난 다스 라이히 사단은 재편성을 위해 독일 본토로 이동했다. 이후 소련군에게 포위된 부다페스트를 구원하기 위해 헝가리에서 벌어진 독일의 마지막 공세인 플라텐지 공세에 참가했지만, 이 공세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다스 라이히는 드레스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비엔나와 프라하에서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사단 잔존병들은 서쪽으로 탈출해 미군에게 항복했다.7. 전쟁 범죄
1944년 6월 10일,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는 프랑스 리무쟁 지방의 오라두르쉬르글란에서 프랑스 민간인 642명을 학살하여 악명이 높다. 이 사건은 Adolf Diekmannde SS 소령의 주도로 일어났으며, 그는 이 학살이 지역 레지스탕스 마키의 게릴라 활동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친위대 당국은 디크만을 기소하려 했으나, 그는 1944년 6월 29일 노르망디 전선에서 전사하여 재판을 받지 못했다. 1953년 프랑스 당국이 전후 재판을 열었지만, 극소수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7. 1. 유고슬라비아 민간인 학살 (1941년)
1941년 3월 26일, 유고슬라비아에서 반독 쿠데타가 일어나 친독 정권이 무너졌다. 4월 6일,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에 진입했다. SS사단 다스 라이히는 헝가리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진군하여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1941년 4월 12일 아침, SS 대위 프리츠 클링겐베르크가 지휘하는 오토바이 병력 중대는 판체보에서 도나우강 제방을 따라 베오그라드에 접근했다. 클링겐베르크는 강물이 불어나 도하할 다리가 없고, 가교 장비나 부교도 갖추지 못해 도시에 돌입하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강의 북쪽 제방에서 모터보트를 발견, 부하들과 함께 도나우강을 건넜다. 강 반대편에 도착한 후, 두 명을 증원 병력으로 돌려보내고 6명이 베오그라드 시내로 진격했다. 시내에 진입한 후, 클링겐베르크는 20명의 유고슬라비아 병과 마주쳤고, 그들은 단 한 발도 쏘지 않고 항복했다. 그 후, 짧은 전투 끝에 유고슬라비아군의 차량을 노획, 유고슬라비아 군무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군무성은 독일 공군의 공습으로 인해 비어있었다. 베오그라드에는 항복 협상할 군의 지휘 기능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클링겐베르크는 베오그라드의 독일 대사관으로 향했다. 도시 점령을 선언하기 위해 큰 갈고리 십자를 펼쳐 대사관 위에 게양했다. 2시간 후, 베오그라드 시장이 대사관을 방문하여 클링겐베르크에게 항복했다. 독일군의 주력 부대가 입성할 때까지 하루를 기다려야 했다. 베오그라드 점령의 공적으로 클링겐베르크는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베오그라드 점령 후, 사단은 소련 침공 작전을 위해 폴란드로 이동했다.
7. 2. 민스크 유대인 학살 (1941년)
1941년,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는 독소전의 일환으로 폴란드로 이동했다.7. 3. 튈 학살 (1944년)
1944년 6월 9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3일 후,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는 튀르에서 99명 이상의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1] 이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공세 이후, 툴-리모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포위된" 독일군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독일군에 대한 보복으로, SS는 마을에서 99명의 남자를 교수형에 처하고, 다른 149명을 독일로 강제 이송했다.[1]7. 4.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1944년)
1944년 6월 10일, 프랑스 중남부 리무쟁 지방의 오라두르쉬르글란에서 제4SS기갑척탄병연대 "데어 퓌러" 제1대대 지휘관 Adolf Diekmannde SS 소령의 주도로 프랑스 민간인 642명이 학살되었다. 디크만은 이 학살이 그 지역 레지스탕스 마키의 게릴라 활동(약 40명의 병사 사상)에 대한 정당한 처치였다고 주장했다.친위대 당국은 디크만을 기소하려 했으나, 그는 1944년 6월 29일 노르망디 전선에서 전사하여 재판을 받지 못했다. 1953년 프랑스 당국이 전후 재판을 열었지만, 극소수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의 유적지는 전후 폐허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8. 사후 미화 시도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는 무장친위대 내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부대 중 하나로, 수많은 전쟁범죄에 연루되었다. 그러나 종전 후, 이 부대의 참전자들은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은폐하고 미화하려는 시도를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이들은 주로 참전자 협회인 HIAG를 통해 활동하며, 자신들을 평범한 군인이자 애국자로 묘사하고 전쟁범죄 혐의를 부인하거나 축소했다. 특히,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과 튈 학살과 같은 명백한 전쟁범죄조차도 정당한 군사 작전이었다고 주장하거나, 연합군의 책동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배치된다. 다스 라이히 사단은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 양쪽에서 민간인 학살, 포로 학살, 약탈 등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며, 이는 연합군 측의 전범 재판 기록과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명백히 드러났다.
따라서 다스 라이히 사단의 참전자들과 HIAG의 미화 시도는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전쟁범죄 피해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행위로 비판받아야 한다.
9. 작전 지역
연도 | 작전 지역 |
---|---|
1939년 9월 - 1940년 5월 |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
1940년 5월 - 1941년 4월 |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
1941년 4월 - 1941년 6월 |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
1941년 6월 - 1942년 6월 | 소련, 중부 전선 |
1942년 6월 - 1942년 7월 | 독일 |
1942년 7월 - 1943년 1월 | 프랑스 |
1943년 1월 - 1944년 2월 | 소련, 중부 전선 |
1944년 2월 - 1944년 12월 | 프랑스, 벨기에, 독일 서부 |
1944년 12월 - 1945년 1월 | 벨기에 아르덴 |
1945년 1월 - 1945년 5월 | 헝가리, 오스트리아 |
10. 지휘관
이름 | 계급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파울 하우서 | SS-Oberst-Gruppenführer|SS상급대장de | 1939년 10월 19일 | 1941년 10월 14일 |
빌헬름 비트리히 | SS-Obergruppenführer|SS대장de | 1941년 10월 14일 | 1941년 12월 31일 |
마티아스 클라인하이스터캄프 | SS-Obergruppenführer|SS대장de | 1941년 12월 31일 | 1942년 4월 19일 |
게오르그 케플러 | SS-Gruppenführer|SS중장de | 1942년 4월 19일 | 1943년 2월 10일 |
헤베르트 에른스트 발 | SS-Brigadeführer|SS소장de | 1943년 2월 10일 | 1943년 3월 18일 |
쿠르트 브라작 | SS-Oberführer|SS상급대령de | 1943년 3월 18일 | 1943년 3월 29일 |
발터 크뤼거 | SS-Obergruppenführer|SS대장de | 1943년 3월 29일 | 1943년 10월 23일 |
하인츠 람머딩 | SS-Gruppenführer|SS중장de | 1943년 10월 23일 | 1944년 7월 24일 |
크리스티안 티히젠 | SS-Standartenführer|SS대령de | 1944년 7월 24일 | 1944년 7월 28일 |
오토 바움 | SS-Brigadeführer|SS소장de | 1944년 7월 28일 | 1944년 10월 23일 |
하인츠 람머딩 | SS-Gruppenführer|SS중장de | 1944년 10월 23일 | 1945년 1월 20일 |
카를 크로이츠 | SS-Standartenführer|SS대령de | 1945년 1월 20일 | 1945년 1월 29일 |
베르너 오스텐도르프 | SS-Gruppenführer|SS중장de | 1945년 1월 29일 | 1945년 3월 9일 |
루돌프 레만 | SS-Standartenführer|SS대령de | 1945년 3월 9일 | 1945년 4월 13일 |
카를 크로이츠 | SS-Standartenführer|SS대령de | 1945년 4월 13일 | 1945년 5월 8일 |
11. 부대 편성
시기 | 명칭 |
---|---|
1939년 10월 - 1940년 4월 | SS-VT 사단 또는 SS 특무 사단 (SS-Division "Verfügungstruppe"de 또는 SS-Verfügungsdivisionde) |
1940년 4월 - 1940년 12월 | SS 사단 도이칠란트 (SS-Division "Deutschland"de) |
1940년 12월 - 1942년 5월 | SS 사단 라이히 (SS-Division "Reich"de) |
1942년 5월 - 1942년 11월 | SS 사단 다스 라이히 (SS-Division "Das Reich"de) |
1942년 11월 - 1943년 10월 | SS 장갑척탄병사단 다스 라이히 (SS-Panzergrenadier-Division "Das Reich"de) |
1943년 10월 - 1945년 5월 | 제2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2.SS-Panzer-Division "Das Reich"de) |
- 1941년 (자동차화) 사단 "라이히"
- * SS 연대 "데어 퓌러"(Der Führerde)
- * SS 연대 "도이칠란트"(Deutschlandde)
- * 제11SS보병연대
- * SS사단 라이히 대공 기관총 대대 (Flak-MG-Bataillon SS-Division Reichde)
- * SS사단 라이히 오토바이병 대대 (Kradschützen-Abteilung SS-Division Reichde)
- * SS사단 라이히 포병 연대 (Artillerie-Regiment SS-Division Reichde)
- * SS사단 라이히 장갑 정찰 대대 (Aufklärung-Abteilung SS-Division Reichde)
- * SS사단 라이히 대전차 엽병 대대 (Panzerjäger-Bataillon SS-Division Reichde)
- * SS사단 라이히 공병 대대 (Pionier-Bataillon SS-Division Reichde)
- * SS사단 라이히 돌격포 중대 (Sturmgeschütz-Batterie SS-Division Reichde)
- * SS사단 라이히 통신 대대 (Nachrichten-Abteilung SS-Division Reichde)
- * SS사단 라이히 보급 부대 (Nachschubtruppen SS-Division Reichde)
- 1943년 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 * 제2SS전차연대 "다스 라이히"(SS-Panzer-Regiment 2 "Das Reich"de)
- * 제3SS 장갑척탄병연대 "도이칠란트"(SS-Panzergrenadier Regiment 3 "Deutschland"de)
- * 제4SS 장갑척탄병연대 "데어 퓌러"(SS-Panzergrenadier-Regiment 4 "Der Führer"de)
- * SS (자동차화) 보병연대 "
- * 제2SS 장갑포병연대 (SS-Panzer-Artillerie Regiment 2de)
- * 제2SS 대공포병대대 (SS-Flak-Artillerie-Abteilung 2de)
- * 제2SS 돌격포 대대 (SS-Sturmgeschütz-Abteilung 2de)
- * 제2SS 연막 대대 (SS-Nebelwerfer-Abteilung 2de) - 다연장 로켓포 장비
- * 제2SS 장갑 정찰 대대 (SS-Panzer-Aufklärungs-Abteilung 2de)
- * 제2SS 대전차 엽병 대대 (SS-Panzerjäger-Abteilung 2de)
- * 제2SS 장갑 공병 대대 (SS-Panzer-Pionier-Bataillon 2de)
- * 제2SS 장갑 통신 대대 (SS-Panzer-Nachrichten-Abteilung 2de)
- * 제2SS 보급 부대 (SS-Versorgungs-Einheiten 2de)
1939년 폴란드 침공에서 친위대 특무 부대는 여러 육군 부대에 분산되어 첫 전투를 경험했다. 폴란드전이 종료된 1939년 10월 10일, 친위대 특무 부대는 하나로 통합되어 SS-VT 사단(SS 특무 사단)이 되었으며, SS 연대 도이칠란트(SS-Standarte Deutschlandde), SS 연대 게르마니아(SS-Standarte Germaniade), SS 연대 데어 퓌러(SS-Standarte Der Führerde), 통신 대대, 정찰 대대로 구성되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SS-VT 사단은 로테르담 공격에 참여했다. 이후, 사단은 연합군을 네덜란드 젤란트 주변으로 몰아넣고, 저항 거점을 파괴하는 임무를 받았다. 프랑스로 이동한 후에는 운하를 돌파하고, 파리 진군에 참여했으며, 전투 마지막에는 스페인과의 국경 근처까지 전진했다.
프랑스 전역 후, 부대는 '''SS 사단 라이히'''(SS-Division "Reich"de)로 명칭을 변경했다. 영국 본토 침공 작전이 연기되자, 1941년에 사단은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을 위한 마리타 작전 준비를 위해 루마니아로 이동했다.
참조
[1]
서적
Slagveld Sloedam
Drukkerij Bareman
2002
[2]
웹사이트
'I played dead as SS beasts wiped out my entire village': Last witness of Nazi massacre tells his story
https://www.mirror.c[...]
2013-02-02
[3]
웹사이트
Ex-SS soldiers face massacre charges
https://www.independ[...]
2011-12-06
[4]
서적
Oradour : arrêt sur mémoire
Calmann-Lévy
1994
[5]
웹사이트
SS-Division Reich (motorisiert), Waffen-SS, 22.06.1941
http://niehorster.or[...]
2019-01-22
[6]
서적
German Order of Battle, Panzer, Panzer Grenadier, and Waffen SS Division in WW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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