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크프리트 카르크-엘레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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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크프리트 카르크-엘레르트(Siegfried Karg-Elert, 1877-1933)는 독일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음악 이론가이다. 그는 오르간, 하모늄, 피아노, 실내악, 성악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오르간과 하모늄을 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카르크-엘레르트는 1919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작곡 및 음악 이론 강사로 임명되었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 독일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작품 활동을 했지만, 국제적인 활동에 비해 조국에서는 그의 음악이 덜 주목받았다. 그의 작품은 후기 낭만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바흐, 그리그, 드뷔시, 레거 등 여러 작곡가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오르간을 위한 66개의 코랄 즉흥곡, 플루트를 위한 30개의 카프리치오 등이 있으며, 현재 그의 작품은 재평가되어 널리 연주되고 있다.
지크프리트 카르크-엘레르트는 독일 제국 오버른도르프 암 네카어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활동한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였다. 에드바르드 그리그 등의 격려로 작곡에 전념하게 되었으며, 하모늄과 오르간을 위한 작품을 주로 작곡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악대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카르크-엘레르트는 젊은 시절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했으며[8], 피아노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피아노 업계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쿤스트하모니움(Kunstharmonium) 제조 중단으로 작품 수용이 위태로웠지만, 소수의 열광적인 프로 연주자들이 유튜브를 통해 작품 보급에 힘쓰고 있다.
2. 생애
1919년부터 라이프치히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신의 음악을 알렸다. 그러나 1920년대와 1930년대 독일 내에서는 그의 음악이 크게 인정받지 못했고, 오히려 영국과 미국에서 더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32년 미국 순회공연을 떠났지만, 건강 문제와 연주 기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말년에는 당뇨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33년 55세의 나이로 라이프치히에서 사망했다. 사후 한동안 잊혔던 그의 작품은 1970년대 후반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오르간 연주회에서 자주 연주되고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77-1902)
지크프리트 카르크-엘레르트는 독일 제국 오버른도르프 암 네카어에서 책 판매상인 요한 야콥 카르크와 그의 아내 마리 아우구스테 카르크(결혼 전 성은 엘레르트)의 12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다른 설명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신문 편집자이자 발행인이었다고 한다. 1882년 가족은 라이프치히에 정착했고, 지크프리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음악 훈련과 개인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라이프치히 작곡가 모임에서 그는 작곡가 에밀 폰 레즈니첵에게 자신의 첫 번째 작곡 시도를 선보였고, 레즈니첵은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3년 동안 학비 면제 장학금을 받도록 주선했다. 이를 통해 그는 살로몬 야다손, 칼 라이네케, 알프레드 라이제나우어 및 로베르트 타이히뮐러에게 배울 수 있었다.
1901년 8월부터 1902년 9월까지 그는 마그데부르크에서 피아노 교사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지크프리트 카르크-엘레르트"로 변경했는데,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의 변형을 성에 추가하고, 자신의 이름에 스웨덴식 철자를 채택했다.
2. 2. 작곡가로서의 활동 (1902-1919)
1901년 8월부터 1902년 9월까지 카르크-엘레르트는 마그데부르크에서 피아노 교사로 일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지크프리트 카르크-엘레르트"로 변경했는데, 이는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의 변형을 성에 추가하고, 자신의 이름에 스웨덴식 철자를 채택한 것이다.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후, 그는 에드바르드 그리그의 격려에 힘입어 주로 피아노를 위한 작곡에 전념하기 시작했다.[6] 1904년에는 베를린 출판업자 카를 시몬을 만나 하모늄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하모늄을 위한 중요하고 광범위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오르간 연주자 파울 호메이어의 격려를 받아 1909년에 그의 첫 오리지널 오르간 작품인 ''66 코랄 즉흥곡, 작품 65''를 작곡하기 전에 하모늄 작품 중 일부를 오르간용으로 개작하기도 했다.
1910년, 카르크-엘레르트는 루이제 크레츠슈마르와 결혼했고, 4년 후 딸 카타리나가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연대 오보이스트로 복무했다.
2. 3. 라이프치히 음악원 교수 (1919-1933)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대 오보이스트로 복무한 후, 1919년에 카르크-엘레르트는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음악 이론 및 작곡 강사로 임명되었다. 카르크-엘레르트의 제자 중 한 명으로는 작곡가 곤잘로 브레네스가 있었다.
1924년부터 카르크-엘레르트는 자택에서 라디오를 통해 매주 하모늄 독주회를 열었으며, 1927년 50세 생일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하모늄을 위한 그의 두 번째 소나타를 연주했다.
2. 4. 국제적인 활동과 어려움 (1930-1933)
1920년대와 1930년대 독일의 문화적 분위기는 국제적이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카르크-엘레르트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1] 그의 작품은 독일 외, 특히 영국에서 칭찬을 받았는데, 런던 오르간 음악 협회는 1930년에 그를 기리기 위해 12일간의 축제를 열었으며 그도 참석했다.[1] 미국에서도 그의 작품은 칭찬을 받았다.[1] 하지만, 그의 조국 독일에서는 그의 음악이 거의 완전히 무시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32년 봄에 그가 미국 오르간 콘서트 투어 초대를 수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투어는 음악적으로 재앙적인 실수로 판명되었는데[2], 심한 흡연, 신경통, 심부전 때문이었다.[1][2] 게다가 그는 곧 그를 죽게 할 당뇨병을 앓고 있었고, 그의 오르간 연주자로서의 제한된 능력은 미국 청중이 익숙해진 마르셀 뒤프레 및 루이 비에른과 같은 거장 수준의 오르간 연주와 비교했을 때 좋지 않았다.
수년 동안 카르크-엘레르트가 피츠버그의 카네기 연구소의 오르간 의자 자리를 제안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다.[3]
2. 5. 사망
Sigfrid Karg-Elertde는 1933년 4월 라이프치히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오랫동안 당뇨병을 앓고 있었다.[6] 그의 묘는 라이프치히의 쥐트프리드호프에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한동안 그의 작품은 인기가 하락했지만, 1970년대 후반에 성공적으로 부활했으며, 오늘날 그의 오르간 작품은 종종 독주회에 포함된다.
3. 음악적 특징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총 66곡으로 구성된 『코랄 즉흥곡집』의 "개선 행진곡 《자, 모든 사람이여, 신께 감사하라》"이다. 이 곡은 금관 악기 밴드와 협연이 가능하며, 세레모니 등에서 전 세계적으로 자주 사용된다. 1987년 영국에서 그의 공적을 기리는 "카르크-엘레르트 아카이브"가 설립되었고, 독일 본국에도 "카르크-엘레르트 협회"가 있어 정기적으로 이벤트를 열고 있다. 1990년대부터 부활이 진행되어, 현재는 상당수의 오르간 작품 음원을 쉽게 구할 수 있다.
3. 1. 조성과 화성
카르크-엘레르트는 자신을 외부인으로 여겼다. 그의 작품에 영향을 준 주목할 만한 작곡가로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바흐를 기리는 의미로 종종 바흐 동기를 사용), 에드바르드 그리그, 클로드 드뷔시, 막스 레거,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그리고 초기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그의 음악 스타일은 후기 낭만주의에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경향을 띤다고 특징지을 수 있다. 그는 음악 이론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조화의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통적인 화성의 한계를 확장했다.
처음에는 바그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근대 음악 시대에 들어 조성 음악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주요 음을 남기면서도 조성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방향으로 방향을 전환했다[7]. 이 때문에 독일 본국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을 쓸데없이 받은 절충주의자"라고 비판받아 사망할 무렵에는 거의 지원자가 없었다.
3. 2. 악기 편성
카르크-엘레르트는 하모늄(`Kunstharmonium`)과 파이프 오르간을 위한 곡을 주로 작곡했다. 소규모 앙상블, 피아노, 성악 음악도 작곡했으며, 특히 그의 플루트 곡은 생전에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색소폰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6]
3. 3. 스톱 지정
오르간 작품과 쿤스트하모니움 작품은 상세하게 스톱이 지정되어 있으며, 당시 유행이던 "네오 고딕" 모델을 기준으로 작곡되었기 때문인지, 작곡상의 효과가 나타나는 모델은 적다. 오르간 곡은 막스 레거에 필적할 정도의 난이도이며, 카르크-엘레르트 자신도 서간에서 레거를 언급하고 있다. 만년에 아이들도 연주할 수 있는 "셈프레 셈플리체"를 작곡했다.
4. 주요 작품
카르크-엘레르트는 오르간, 하모니움, 피아노 등 다양한 악기를 위한 작품을 작곡했으며, 바그너의 오페라를 편곡한 작품도 다수 남겼다.
다음은 바그너의 오페라를 편곡한 작품 목록이다.
원작 | 작품명 및 설명 |
---|---|
로엔그린 | 제1막 로엔그린의 도착[1] |
트리스탄과 이졸데 | 전주곡[1] |
신들의 황혼 | 제3막 지크프리트의 장송 행진곡[1] |
지크프리트 | 제2막 숲의 속삭임[1] |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 제3막 발터의 노래 「아침은 장밋빛으로 빛나고」[1] |
리엔치 | 제5막 리엔치의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지켜보소서」[1] |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 제1막 젠타의 발라드 「바다에서 배를 보았습니까?」[1] |
탄호이저 | 제3막 저녁별의 노래 「죽음의 예감처럼 저녁 어둠이 땅을 덮네」[1] |
파르지팔 | 주의 만찬 장면[1] |
탄호이저 | 2막 발트부르크 성으로의 손님 입장 |
로엔그린 | 전주곡 |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 2막 빙빙, 빙빙, 너는 쓸모 있는 실잣는 기계 |
파르지팔 | 2막 꽃 파는 아가씨들 |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 3막 태양처럼 밝게 |
발퀴레 | 1막 겨울 폭풍은 지나가고 쾌적한 달이 되었네 |
로엔그린 | 3막 진심을 담아 인도합니다 (결혼 행진곡) |
신들의 황혼 | 해당 작품에서 편곡 |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 3막 명가수의 행진곡 |
트리스탄과 이졸데 | 해당 작품에서 편곡 |
4. 1. 오르간 작품
- 66 오르간을 위한 코랄 즉흥곡(59번 "이제 하나님께 감사하라" 포함) 작품 65[1]
- 하모늄 또는 오르간을 위한 내림 마단조 파사칼리아[1]
- 오르간을 위한 ''성당의 창문''[1]
- 오르간을 위한 ''올림 바단조 교향곡 작품 143'' (프랭클린 슈퇴버의 오케스트라 버전)[1]
- 하모늄을 위한 ''33개의 양식 연구''[1]
- 오르간을 위한 ''20개의 코랄 전주곡과 후주곡''[1]
- 66개의 코랄 즉흥곡, 작품번호 65[1]
- 3개의 인상, 작품번호 72[1]
- 샤콘과 푸가 삼부작과 코랄, 작품번호 73[1]
- 소나티네 a단조, 작품번호 74. 뫼젤러, 볼펜뷔텔, 1977[1]
- 20개의 전주곡과 후주곡, 작품번호 78[1]
- 3개의 교향적 칸초네, 작품번호 85[1]
- 10개의 특징적인 소품, 작품번호 86[1]
- 교향적 코랄 "오, 그대의 은총으로 함께하소서", 작품번호 87, 1[1]
- 교향적 코랄 "예수, 나의 기쁨", 작품번호 87, 2[1]
- 교향적 코랄 "이제 모든 숲이 평화롭게 잠든다", 작품번호 87, 3[1]
- 3개의 파스텔, 작품번호 92[1]
- 콘스탄스 호반의 7개의 파스텔, 작품번호 96[1]
- 대성당의 창, 작품번호 106[1]
- 3개의 인상, 작품번호 108[1]
- 트리프티히, 작품번호 141[1]
- 3개의 새로운 인상, 작품번호 142[1]
- 오르간 교향곡 f#단조, 작품번호 143[1]
- 만화경, 작품번호 144[1]
- 오르간을 위한 음악, 작품번호 145[1]
- 서주, 파사칼리아와 푸가 B-A-C-H 주제에 의한, 작품번호 150 (원곡은 분실됨). 볼프강 슈톡마이어의 새로운 버전. 뫼젤러, 볼펜뷔텔, 2000[1]
- 8개의 짧은 소품, 작품번호 154[1]
- 론도 알라 캄파넬라, 작품번호 156. 뫼젤러, 볼펜뷔텔, 1986[1]
- 바그너 - 오페라 「로엔그린」 - 제1막 로엔그린의 도착[1]
- 바그너 -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 전주곡[1]
- 바그너 - 악극 「신들의 황혼」 - 제3막 지크프리트의 장송 행진곡[1]
- 바그너 - 악극 「지크프리트」 - 제2막 숲의 속삭임[1]
- 바그너 - 악극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 제3막 발터의 노래 「아침은 장밋빛으로 빛나고」[1]
- 바그너 - 오페라 「리엔치」 - 제5막 리엔치의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지켜보소서」[1]
- 바그너 -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 제1막 젠타의 발라드 「바다에서 배를 보았습니까?」[1]
- 바그너 - 오페라 「탄호이저」 - 제3막 저녁별의 노래 「죽음의 예감처럼 저녁 어둠이 땅을 덮네」[1]
- 바그너 - 무대 신성 축전극 「파르지팔」 - 주의 만찬 장면[1]
4. 2. 하모늄 작품
카르크-엘레르트는 쿤스트하모니움을 위한 작품을 즐겨 작곡했으며, 프랑스제 무스텔(Mustel)과 독일제 티츠(Titz) 악기를 애용했다. 그는 쿤스트하모니움을 위한 유일한 교칙본을 남기기도 했다.[6]카르크-엘레르트의 하모늄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품 번호 | 제목 | 작곡 연도 | 비고 |
---|---|---|---|
작품 10 | 6개의 스케치 | 1904년 | |
작품 33 | 5개의 모놀로그 | 1905년 | 4번 오르간 편곡 |
작품 37 | 파르티타, D장조 | 1905년 | 1, 3, 4악장 오르간 편곡 (1906–11) |
작품 39 | 환상곡과 푸가, D장조 | 1905년 | 오르간 편곡 |
작품 27 | 5개의 수채화 | 1905년 | 오르간 편곡 |
작품 26 | 8개의 콘체르트슈튀케 | 1905–6년 | 1, 4, 6, 7번 하모니움, 피아노 편곡 |
작품 36 | 소나타 1번, b단조 | 1905년 | 2악장 오르간 편곡 |
작품 14 | 3개의 소나티네 (G, e, a) | 1906년 | |
작품 31 | Scènes Pittoresques | 1906년 | 1, 6번 하모니움/피아노 편곡 |
작품 29 | 실루엣 | 1906년 | 하모니움/피아노 |
Woo 7 | Leichte Duos (T. v. Obendorff), c단조 | 1906년 | 하모니움/피아노 |
작품 35 | 시 | 1907년 | 하모니움/피아노 |
작품 57 | 르네상스 | 1907년 | |
작품 9 | 5개의 미니어처 | 1908년 | |
작품 46 | 소나타 2번, b단조 | 1909–12년 | 2악장 오르간 편곡 (1911) |
작품 70 | 2개의 음시 | 1910년 | |
작품 76 | 인타르시엔 | 1911년 | |
작품 99 | 하모니움 학교 | ||
작품 101 | "팔레스트리나에서 쇤베르크까지"의 초상 | 1913–23년 | |
작품 94 | 레가토 연주의 고등 학교 | 1912년 | 하모니움/피아노 |
작품 93 | 첫 번째 기초 연구 | 1913년 | |
작품 95 | 파르나소스 입문 | 1913–14년 | |
작품 102 | 12개의 인상 | 1914년 | |
작품 103 | 낭만적인 소품 (자이언트 산맥에서 받은 인상) | 1914년 | |
작품 104 | 7개의 목가 | 1914년 | |
작품 47 | 위안 (8개의 종교적 분위기 그림) | 1918년 | |
작품 58 | 내면의 목소리 | 1918–19년 |
또한, 카르크-엘레르트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하모니움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 바그너 - 오페라 《탄호이저》 - 2막 발트부르크 성으로의 손님 입장
- 바그너 - 오페라 《로엔그린》 - 전주곡
- 바그너 -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 2막 빙빙, 빙빙, 너는 쓸모 있는 실잣는 기계
- 바그너 - 무대 신성 축전극 《파르지팔》 - 2막 꽃 파는 아가씨들
- 바그너 - 악극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 3막 태양처럼 밝게
- 바그너 - 악극 발퀴레 - 1막 겨울 폭풍은 지나가고 쾌적한 달이 되었네
- 바그너 - 오페라 《로엔그린》 - 3막 진심을 담아 인도합니다 (결혼 행진곡)
- 바그너 - 악극 《신들의 황혼》에서
- 바그너 - 악극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 3막 명가수의 행진곡
- 바그너 -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4. 3. 피아노 작품
- 여행 그림. 8개의 피아노 소품 모음곡 작품번호 7
- 왈츠 카프리스. 피아노 4 hands 작품번호 16
- 북쪽에서. 6개의 서정적인 소품 작품번호 18
- 스칸디나비아 선율. 7개의 연주용 소품 작품번호 28
- 왈츠 장면 작품번호 45
- 소나타 1번 올림 바단조 작품번호 50
- 파티나. 18세기 스타일의 10개의 소품 작품번호 64 [I]
- 3개의 소나티네 작품번호 67
- 데카메론. 10개의 쉽고, 교육적인 성격 묘사로 구성된 모음곡(가단조) 작품번호 69
- 시적 소품 작품번호 77
- 소나타 2번 작품번호 80 (현재는 분실된 것으로 여겨짐)
- 소나타 (비창) 3번 다단조 작품번호 105
- 파르티타 (사단조) 작품번호 113
- 이국적인 랩소디 (정글 인상) 작품번호 118
- 황무지 그림. 10개의 작은 인상 작품번호 128
- 모자이크. 29개의 쉽고, 교육적인 소품 작품번호 146
4. 4. 실내악 작품
-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교향적 칸초네 작품번호 11
- 클라리넷, 플루트, 호른, 피아노를 위한 ''청춘''
- 바이올린과 오르간을 위한 2개의 소품 작품번호 48b
- 오보에, 클라리넷, 잉글리시 호른을 위한 트리오 작품번호 49/1
-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A장조 작품번호 71
-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10개의 성격 연습곡 작품번호 90
-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B플랫 장조 작품번호 121
- 클라리넷 독주를 위한 소나타 작품번호 110
- 클라리넷(비올라)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B장조 작품번호 139b
- 색소폰 독주를 위한 25개의 카프리치오와 소나타 작품번호 153
플루트를 위한 30개의 카프리치오는 카르크-엘레르트의 친구이자 전쟁에 참전할 플루티스트를 위해 특별히 작곡되었다.[1] 이 짧은 연습곡들은 선형적인 단선율 사고에 도전하도록 설계되었으며, 간단히 말해 친구가 지루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 현재 이 곡들은 전 세계 어린 플루트 학생들을 위한 기술, 다이내믹, 구절 연습의 표준 세트가 되었다.[1]
4. 5. 성악 작품
- 그리스도의 매장 op. 84
- 오르간 반주가 있는 2개의 가곡 op. 98
- 레퀴엠 op. 109
5. 저술
카르크-엘레르트는 다음을 포함하여 여러 권의 책과 논문을 출판했다.
- Die Grundlagen der Musiktheorie|음악 이론의 기초de (번역). 라이프치히 (1920/1921).
- Orgel und Harmonium. Eine Skizze|오르간과 하모니움. 스케치de. Musik-Taschenbuch für den täglichen Gebrauch|음악-실용서de (Steingräberde판 Nr. 60), 라이프치히, (ca. 1920/1925), 275–301쪽.
- Wie ich zum Harmonium kam|내가 어떻게 하모니움을 접하게 되었는가de. Der Harmoniumfreund|하모니움 친구de I/1 (1927), 4쪽.
- Konservatorium und Musikerziehung|음악원과 음악 교육de. Deutsche Tonkünstler-Zeitung|독일 음악가 신문de 27/5 (1929), 433–436쪽.
- Akustische Ton-, Klang- und Funktionsbestimmung|음향 음색, 음향 및 기능 결정de (번역). 라이프치히 (1930).
- Polaristische Klang- und Tonalitätslehre (Harmonologik)|극성 음향 및 음조 이론 (하모니 로직)de (번역). 라이프치히: 로이카르트, 1930.
- Edvard Grieg|에드바르 그리그de. 전기적-비평적 스케치, Die Musik-Woche|음악 주간de 24 (1903), 226-229쪽.
- Gustav Mahler|구스타프 말러de. 비평적-전기적 스케치, Die Musik-Wochede 31 (1903), 299쪽.
- Gottfried Grunewald|고트프리트 그루네발트de. 비평적 및 전기적 스케치, Die Musik-Wochede 32 (1903), 306쪽.
- Christian Sinding|크리스티안 신딩de. 그의 작품의 전기 및 설명, Die Musik-Wochede 36 및 37 (1903), 346-348쪽 및 359-361쪽.
- Theodor Kirchner|테오도어 키르히너de. 추도사, Die Musik-Wochede 38 (1903), 367-369쪽.
- Sophie Menter|소피 멘터de. 전기적 스케치, Die Musik-Wochede 3 (1904), 18쪽.
- Dr. Eduard Lassen|에두아르트 라센 박사de †. 추도사, Die Musik-Wochede 4 (1904), 26-28쪽.
- Hermann Kretzschmar|헤르만 크레치마르de. 전기적 스케치, Die Musik-Wochede 19 (1904), 146쪽.
- Felix von Weingartner|펠릭스 폰 바인가르트너de 지휘자 및 작곡가로서. 스케치, Die Musik-Wochede 22 (1904), 170쪽.
- Freiherr E. N. von Rezniček|프라이어 E. N. 폰 레즈니첵de, Die Musik-Wochede 27 및 28 (1904), 210쪽 및 218쪽.
- 하모니움과 가정 음악, Zeitschrift für Instrumentenbau|악기 제조 저널de (1906-07), Bd. 27, 929-931쪽.
- 현대식 압력풍 하모니움의 개혁. 배치 제안. 첨부된 배치 표, Zeitschrift für Instrumentenbaude (1907-08), Bd. 28, Hefte 24-27, 800-802, 834-837, 873-874, 905-906쪽.
- Bror Beckmann|브로어 벡만de 하모니움 작곡가로서, Das Harmonium|다스 하모니움de 7 (1909), 105-108쪽.
- 솔로 및 결합된 타악기, Das Harmoniumde 9/1-2 (1911), 5-7쪽 및 22쪽.
- 움직이는 마우스와 Paul Harms|파울 하름스de, Zeitschrift für Instrumentenbaude (1910/11), Band 31, Heft 29, 1107쪽
- R. Siegelde의 새로운 소형 월드 피아노, Zeitschrift für Instrumentenbaude (1910-11), Bd. 31, Heft 26, 964쪽.
- Th. Mannborgde의 새로운 "독일 하모니움 텅 공장", 중요한 독일 기업, Zeitschrift für Instrumentenbaude (1911-12), Bd. 32, Heft 22, 822쪽.
6. 평가 및 영향
카르크-엘레르트는 에드바르 그리그에게 인정받아 작곡에 매진했으며, 클로드 드뷔시,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6] 그는 조성을 확장하고 독자적인 반음계적 서법을 발전시켰으며, 오르간 스톱 지정을 통해 색채감을 강조했다. 그의 부가 6의 화음 종지는 올리비에 메시앙에게 영향을 주었다. 쿤스트하모니움을 위한 작품과 교칙본을 남겼고, 코랄, 실내악, 피아노곡, 오르간곡 등을 작곡했다. 특히 플루트 업계에서는 그의 '소나타 아파쇼나타'가 교육용으로 자주 사용된다.[6] 그의 오르간 작품은 막스 레거에 필적하는 난이도를 보이며, 만년에는 아이들도 연주할 수 있는 "셈프레 셈플리체"를 작곡했다.[6] 총 66곡으로 구성된 『코랄 즉흥곡집』의 "개선 행진곡 《자, 모든 사람이여, 신께 감사하라》"는 금관 악기 밴드와의 협연이 가능하며, 여러 행사에서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6]
6. 1. 당대의 평가
카르크-엘레르트는 작곡가와 연주가 양면으로 활동했지만, 그의 작품, 특히 오르간 곡은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인기가 있었다.[6] 그러나 독일 본국에서는 작곡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1920년대 독일에서는 신고전주의와 무조가 주류였고 반음계주의는 이미 과거의 유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6]독일을 떠난 그는 영국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평가에 대한 고민으로 1930년대 초 미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6] 하지만, 이미 마르셀 뒤프레와 같은 비르투오소들이 알려진 지역이었기 때문에 기술적인 문제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사후에도 미국에서 출판되는 등 미국 오르간 업계에 영향을 미쳤다.[6]
바그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그는 근대 음악 시대에 조성 음악의 붕괴를 경험하면서, 주요 음은 유지하면서도 조성의 경계가 불분명한 방향으로 전환했다.[7]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을 쓸데없이 받은 절충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며, 사망할 무렵에는 거의 지지자가 없었다.[7]
피아니스트로서도 활동했던 그는 피아노곡에도 심혈을 기울였지만,[8] 피아노 업계에서는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쿤스트하모니움 제조 중단으로 작품 수용이 위태로웠지만, 소수의 열정적인 프로 연주자들이 유튜브를 통해 작품 보급에 힘쓰고 있다.[8]
사후에는 잊혀졌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재평가가 시작되어 녹음 수가 증가하고 있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87년 영국에서 "카르크-엘레르트 아카이브"가 설립되었고, 독일 본국에도 "카르크-엘레르트 협회"가 정기적으로 이벤트를 개최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는 부활이 진행되어, 상당수의 오르간 작품 음원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6]
6. 2. 재평가
1970년대 후반부터 카르크-엘레르트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어, 녹음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는 후기에 한 플루티스트와 마음이 맞아, 플루트를 위한 작품을 연속으로 남겼으며, 이것들은 현재에도 플루트 교육에 필수적인 교재가 되고 있다.[6]처음에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근대 음악 시대에 들어 조성 음악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주요 음을 남기면서도 조성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환했다.[7] 이 때문에 독일 본국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을 쓸데없이 받은 절충주의자"라고 비판받아 사망할 무렵에는 거의 지원자가 없었다.
오르간 작품과 쿤스트하모니움 작품은 상세하게 스톱이 지정되어 있으며, 당시 유행이던 "네오 고딕" 모델을 기준으로 작곡되었기 때문인지, 작곡상의 효과가 나타나는 모델은 적다. 오르간 곡은 막스 레거에 필적할 정도의 난이도이며, 카르크-엘레르트 자신도 서간에서 레거를 언급하고 있다. 만년에는 아이들도 연주할 수 있는 "셈프레 셈플리체"를 작곡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도 젊은 시절에 활약[8]하기도 했으며, 피아노곡에도 심혈을 기울였지만, 피아노 업계에서는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쿤스트하모니움도 제조가 중단되면서, 그 작품의 수용이 위태로웠지만, 소수의 열광적인 프로 연주자가 유튜브를 통해 작품의 보급에 힘쓰고 있다.
결국, 총 66곡으로 구성된 『코랄 즉흥곡집』의 "개선 행진곡 《자, 모든 사람이여, 신께 감사하라》"가 가장 유명하다. 금관 악기 밴드와의 협연이 가능하며, 세레모니 등에도 빈번하게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1987년에는 그의 공적을 기려 영국에서 "카르크-엘레르트 아카이브"가 설립되었다. 독일 본국에도 "카르크-엘레르트 협회"가 있으며, 정기적으로 이벤트를 열고 있다. 현재는 1990년대부터 부활이 진행되어, 상당한 수의 오르간 작품 음원을 쉽게 구할 수 있다.
6. 3. 영향
에드바르 그리그에게 인정받아 작곡 활동에 매진하는 한편, 클로드 드뷔시나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심취했다.[6] 그의 영향은 조성을 확장하고, 독자적인 반음계적 서법을 발전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오르간의 스톱 상세 지정을 통해 그만의 색채감을 강조했다. 부가 6의 화음 종지는 올리비에 메시앙에게 영향을 미쳤다. 쿤스트하모니움을 위해 즐겨 작곡했으며, 처음에는 프랑스제 정교한 악기 (Mustel)를 입수했고, 나중에는 독일제 악기 (Titz)를 애용했다. 그 결과 쿤스트하모니움을 위한 유일한 교칙본을 남겼다.바그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근대 음악 시대에 조성 음악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주요 음을 남기면서도 조성의 경계를 명확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환했다.[7]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영향을 쓸데없이 받은 절충주의자"라고 비판받았다.
그리그는 작곡과 연주 양면에서 활약하던 카르크-엘레르트[6]에게 "작곡으로 활약하라"고 조언했다. 카르크-엘레르트 작품, 특히 오르간 곡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카르크-엘레르트는 연주가로서는 그다지 평가받지 못했고, 독일에서는 작곡가로서도 평가가 높지 않았다. 신고전주의와 무조가 주류가 된 1920년대 독일에서는 반음계주의가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후 곧 잊혀졌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재평가가 시작되어 녹음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는 후기에 한 플루티스트와 마음이 맞아 플루트를 위한 작품을 연속으로 남겼으며, 이것들은 현재 플루트 교육에 필수적인 교재가 되고 있다.
1987년 영국에서 그의 공적을 기려 "카르크-엘레르트 아카이브"가 설립되었다. 독일에도 "카르크-엘레르트 협회"가 있으며, 정기적으로 이벤트를 열고 있다. 1990년대부터 부활이 진행되어, 현재는 상당수의 오르간 작품 음원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참조
[1]
논문
The Karg-Elert Festival: A Talk with the Composer
1930
[2]
논문
Biography
2002
[3]
서적
Everyone is Amazed: Sigfrid and Katharina Karg-Elert's letters from North America
Lulu.com
[4]
웹사이트
Sigfrid Karg-Elert: Die theoretischen Werke
https://vpe-web.de/p[...]
2021-05-13
[5]
웹사이트
Sigfrid Karg-Elert's 'Precepts on the Polarity of Sound and Tonality'
http://users.adam.co[...]
2021-05-13
[6]
문서
カルク=エラートという表示も見られる。
[7]
문서
無調ではない。
[8]
문서
彼がオルガン音楽に目覚めたのは30歳を超えてからである。
[9]
논문
The Karg-Elert Festival: A Talk with the Composer
https://archive.org/[...]
1930
[10]
논문
Biography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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