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리엔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리엔치》는 1842년 초연된 리하르트 바그너의 세 번째 오페라이다. 에드워드 불워 리턴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그랜드 오페라 스타일로 작곡되었으며, 바그너는 이를 "젊음의 불꽃으로 가득 찬 작품"이라고 묘사했다. 오페라는 콜라 디 리엔치의 이야기를 다루며, 중세 로마를 배경으로 호민관 리엔치가 귀족과의 갈등 속에서 몰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초연 당시 6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바그너에게 명성을 안겨주었으나, 이후 바그너 스스로는 이 작품을 부끄러워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아 정치에 입문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나치당 전당대회에서 서곡이 사용되기도 했다.

2. 역사

1842년 초연된 드레스덴 오페라 하우스의 내부(J. C. A. 리히터의 동시대 스케치)


《리엔치》는 바그너가 완성한 세 번째 오페라이며, 주로 그랜드 오페라 스타일로 작곡되었다. 바그너 자신은 이 작품이 스폰티니, 다니엘 오베르, 자코모 마이어베어, 프로망탈 알레비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1] 작품은 군중 장면, 영웅적 요소, 정치적 갈등 등 그랜드 오페라의 특징을 담고 있으며, 2막에는 긴 발레 장면도 포함된다.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이를 두고 "《리엔치》는 마이어베어의 최고의 오페라"라고 평하기도 했다.

바그너는 1837년 리가에서 에드워드 불워 리턴의 소설을 읽고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하여, 1840년 11월 19일 파리 근교 뫼동에서 악보를 완성했다. 당시 파리에서의 생활은 재정적으로 어려웠다.[3][4]

1824년부터 드레스덴 오페라 하우스의 총감독을 맡았던 폰 뤼티히하우 남작(1786–1863)


초연은 베를린이나 파리에서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마이어베어의 도움으로 드레스덴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 기회를 얻었다.[2]

《리엔치》의 초연은 1842년 10월 20일, 새로 개관한 드레스덴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렸다. 6시간이 넘는 긴 공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초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는 바그너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공연 시간을 줄이기 위해 작품 일부를 축소하기도 했다.

바그너는 이 작품을 große tragische Oper|그로세 트라기셰 오퍼de(대 비극 오페라)라고 불렀으며, 바그너 작품 목록(WWV)에서는 49번째 작품으로 분류된다. 오늘날 오페라 전체의 상연 빈도는 낮고 바이로이트 축제의 주요 상연 목록에도 포함되지 않지만, 서곡은 자주 연주되며 제5막의 아리아 "리엔치의 기도" 역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2. 1. 작곡 배경

1836년 또는 1837년 여름, 당시 쾨니히스베르크 궁정 극장의 지휘자였던 바그너는 에드워드 불워 리턴의 소설 《콜라 디 리엔치, 마지막 호민관》(Rienzi, the Last of the Roman Tribunes, 1835)을 읽고 영감을 받아 오페라 작곡을 결심했다. 다만, 존 데스리지는 바그너가 메리 러셀 미트포드의 1828년 희곡 《리엔치》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바그너는 리가로 이주한 후인 1838년 여름 무렵 대본 초고를 완성했으며, 같은 해 음악 작곡에 착수했다. 1839년 4월 9일까지 제2막을 완성했으나, 막대한 빚 때문에 아내 민나 플라너와 함께 리가를 떠나 런던을 거쳐 파리로 비밀리에 이주하면서 작곡은 일시 중단되었다.

같은 해 불로뉴를 방문했을 때, 바그너는 마이어베어에게 《리엔치》의 일부를 보여주었고, 마이어베어는 그를 격려하며 지지했다.[2] 마이어베어는 또한 바그너를 당시 불로뉴에 머물고 있던 이그나츠 모셸레스에게 소개해주었다. 음악학자 어네스트 뉴먼은 모셸레스를 "바그너가 처음으로 만난 진정한 국제적인 음악 유명 인사"라고 평가했다.

1840년 2월, 파리에서 제3막 이후의 작곡을 재개했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웠으며, 아내 민나가 1840년 10월 28일 친구 아펠에게 보낸 편지[3]에는 바그너가 빚 때문에 채무자 감옥에 있었다는 사실이 언급되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작곡을 계속하여 그 해 10월에 전체 초안과 서곡을 완성했고, 11월 19일에 전곡의 악보를 최종적으로 완성했다.

작품 완성 후 바그너는 베를린 왕립 오페라나 파리 오페라에서의 초연을 희망했으나, 당시 그의 부족한 영향력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2. 2. 초연과 성공

마이어베어의 지원 덕분에 드레스덴에서의 공연이 성사되었다. 마이어베어는 드레스덴 오페라 감독인 폰 뤼티히하우 남작에게 이 오페라가 "상상력이 풍부하고 드라마틱한 효과가 크다"고 추천하는 편지를 보냈다.[2] 바그너는 악보를 뤼티히하우 총감독에게 넘겼고, 1841년 6월 극장 측의 정식 채택을 받았다. 바그너는 초연 준비를 위해 1842년 4월 독일로 돌아왔다. 리허설 기간 동안 출연진들은 매우 열정적이었으며,[4] 바그너 역시 리허설에 직접 참여하여 열정적으로 지도했다고 전해진다.

1842년 10월 20일,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가 설계하여 전년에 개관한 새로운 드레스덴 궁정 가극장(젬퍼오퍼)에서 카를 고틀리프 라이시거의 지휘로 초연되었다.[1] 초연은 휴식 시간을 포함하여 6시간이 넘는 긴 공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고조되던 혁명적 분위기와 맞물려 청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바그너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바그너는 훗날 자서전 《나의 생애》에서 초연 당시를 회상하며 "그 이후 어떤 경험도 《리엔치》 초연 날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준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

초연 후 바그너는 폰 뤼티히하우의 제안에 따라 작품을 축소하고, 한때 이틀에 걸쳐 공연하는 방안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성공에 힘입어 바그너는 1843년 2월, 드레스덴 궁정 가극장의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되어 음악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리엔치》는 바그너의 생애 동안 가장 성공적인 오페라 중 하나로 남았다. 드레스덴에서는 1873년까지 100회, 1908년까지 200회가 상연되는 기록을 세웠다.[19][3] 19세기 내내 유럽 전역의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 꾸준히 공연되었으며, 미국에서는 1878년 뉴욕 음악 아카데미에서, 영국에서는 1879년 런던의 여왕 폐하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젊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1846년 비엔나에서 이 작품을 "지난 12년간 그랜드 오페라에서 이루어진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11]

2. 3. 초연 이후

《리엔치》의 첫 공연은 1842년 10월 20일 드레스덴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렸으며, 휴식 시간을 포함하여 6시간이 넘는 긴 공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11] 전설에 따르면, 바그너는 관객이 떠날까 염려하여 무대 위 시계를 멈추었다고 한다. 이후 바그너는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 극장의 총감독 폰 뤼티히하우 남작의 제안에 따라 오페라를 이틀에 걸쳐 공연하는 방안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저녁 한 번의 공연으로 소화할 수 있도록 여러 부분을 축소한 단축판을 만들었다.

바그너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리엔치》는 20세기 초까지 그의 가장 성공적인 오페라 중 하나로 남았다. 드레스덴에서는 1873년에 100회, 1908년에 200회 공연 기록을 세웠다.[3] 19세기 동안 유럽 전역과 미국(1878년), 영국(1879년) 등 주요 오페라 하우스에서 정기적으로 공연되었다.[3] 파리 초연은 1869년 4월 6일 리릭 극장에서 쥘 파스델루의 지휘로 이루어졌고, 미국 초연은 1878년 3월 4일 뉴욕 음악 아카데미에서, 영국 초연은 1879년 1월 27일 런던의 여왕 폐하 극장에서 열렸다. 오페라의 서곡은 특히 인기가 높아, 1895년 8월 런던 퀸스 홀에서 열린 헨리 우드 프롬나드 콘서트의 첫 공연에서 개막작으로 연주되기도 했다.[5]

그러나 이후 상연 빈도는 점차 줄어들었다. 현대적인 프로덕션은 드물게 이루어졌는데, 1983년 니컬러스 하이트너가 연출한 런던 잉글리시 국립 오페라 공연, 1999년 다비드 폰트니가 연출한 빈 국립 오페라 공연 등이 있었다. 21세기 들어서는 2009년 브레멘 극장, 2010년 도이체 오퍼 베를린 및 라이프치히 오페라, 2013년 바이로이트 축제(바그너 탄생 200주년 기념), 보스턴(오디세이 오페라 콘서트 형식), 멜버른(멜버른 오페라 콘서트 형식) 등에서 공연되었다.[6][7][8][9] 일본에서는 1998년 11월 후지사와 시민 오페라에 의해 전막 초연이 이루어졌다.

초기에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에두아르트 한슬리크1846년 에서 이 작품을 위그노 교도 이후 가장 중요한 드라마적 창작물이라고 극찬했다.[11] 반면, 한스 폰 뷜로는 "《리엔치》는 마이어베어의 최고의 오페라"라고 비꼬기도 했다. 프란츠 리스트1859년 이 오페라의 주제를 바탕으로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S. 439)을 작곡했다.[12] 그러나 바그너 자신은 후일 《리엔치》를 부끄러운 작품으로 여겼다. 1852년 그는 이 작품을 화려한 피날레와 행렬 등으로 가득 찬 '그랜드 오페라' 습작 정도로 평가했으며,[13] 1871년에는 아내 코지마 바그너에게 "《리엔치》는 나에게 매우 혐오스럽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14]

이러한 이유로 《리엔치》는 오늘날 바그너의 주요 작품 목록에서 벗어나 있으며, 바이로이트 축제에서도 2013년 단 한 차례 기념 공연으로만 상연되었다. 상연 빈도가 낮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이후의 작품들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서곡만큼은 연주회에서 자주 연주되고 있다. 제5막의 '리엔치의 기도' 아리아도 비교적 알려져 있다.

3. 등장인물

등장인물음역역할
콜라 디 리엔치테너로마의 호민관
이레네소프라노리엔치의 여동생
스테파노 콜론나베이스콜론나 가문의 당주
아드리아노소프라노 / 메조소프라노콜론나의 아들
파올로 오르시니베이스오르시니 가문의 당주
라이몬도베이스교황 사절
바론첼리테너로마 시민
체코 델 베키오베이스로마 시민
평화의 사자소프라노
에롤도테너강화 사절



기타: 전령관, 로마 귀족과 가신들, 로마 시민들, 원로원 의원들, 교단의 승려와 수도사들, 콜론나 가문과 오르시니 가문의 사람들, 밀라노와 롬바르디아 사람들, 대사들, 평화의 사자들

4. 줄거리

오페라의 배경은 14세기 중반의 로마이며, 콜라 디 리엔치의 이야기를 다룬다. 호민관이 된 리엔치가 귀족과의 갈등 속에서 개혁을 시도하지만, 각종 알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내용이다.

오페라는 상당한 길이의 서곡으로 시작한다. 서곡은 트럼펫 호출(3막에서 콜로나 가문의 전쟁 신호로 밝혀짐)로 시작하며, 5막 시작 부분에 나오는 리엔치의 기도 멜로디를 특징으로 한다. 이 기도는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가 되었다. 서곡은 군대 행진곡으로 마무리된다.

바그너는 완성된 《리엔치》를 파리에서 상연하기를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드레스덴에서 상연하기로 결정했다. 1841년 6월 드레스덴 궁정 가극장 총감독 뤼티히하우에게 총보를 넘겼고, 이듬해 극장 측으로부터 정식 채택되었다. 초연은 1842년 10월 20일, 드레스덴의 작센 궁정 가극장에서 카를 고틀리프 라이시거의 지휘로 이루어졌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높아지던 혁명의 기운에 영향을 받아 청중으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은 것이 성공 요인이었다. 이 작품은 바그너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화려하게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그너는 초연 직전 리허설에 참여하여 열정적으로 지도했다고 전해진다.

《리엔치》는 초연의 열광적인 성공 덕분에 드레스덴에서 1873년까지 100회, 1908년까지 200회 상연되었다[19]. 이는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중 가장 성공한 작품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4. 1. 1막

''Una via, nel fondo la chiesa del Laterano''. 오른쪽에는 리엔치의 집이 있는 리엔치 1막 세트 디자인(1842)


배경은 중세 로마의 리엔치 집 앞이다.

귀족 오르시니와 그의 무리들이 리엔치의 여동생 이레네를 납치하려고 시도한다. 이때 리엔치를 지지하는 또 다른 귀족 스테파노 콜론나가 나타나 그들을 막아선다. 소란이 커지자 교황의 사절인 라이몬도가 나타나 교회의 이름으로 싸움을 멈추라고 호소한다.

마침내 리엔치가 등장하자(극적인 조바꿈, D에서 E플랫으로) 소란은 잠잠해진다. 리엔치는 귀족들의 폭정을 강하게 비난하고, 그의 연설은 로마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한편, 이레네와 콜론나의 아들 아드리아노는 혼란 속에서 서로에게 끌림을 느낀다 (듀엣 Ja, eine Welt voll Leiden|네,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de).

리엔치의 연설에 감동한 평민들은 그에게 왕관을 바치며 지도자가 되어주기를 청하지만, 리엔치는 왕이 아닌 로마 시민의 호민관이 되기를 원한다며 이를 사양한다. 그는 귀족들의 폭정으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키는 구원자로 환영받으며, 민중의 지지를 얻어 호민관의 자리에 오른다.

4. 2. 2막

카피톨 언덕의 홀을 배경으로 한다. 귀족들은 호민관이 된 리엔치의 권력에 불만을 품고 그의 암살을 모의한다. 귀족 콜론나의 아들인 아드리아노는 리엔치의 여동생 이레네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이 음모를 알고 경악하며 가담하지 않는다.

리엔치는 대사들을 맞이하여 연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긴 발레 공연이 펼쳐진다. 이 발레는 단순한 여흥거리가 아니라, 오페라의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된 '루크레티아의 강간' 이야기를 다룬다. 로마의 마지막 왕 타르퀴니우스가 정숙한 여인 루크레티아를 탐하는 내용은, 오르시니가 이레네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시도했던 오페라의 사건 및 귀족과 민중 사이의 갈등 구도를 반영한다. 초연 당시 이 발레는 30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공연되었으나, 오늘날에는 대폭 축소되어 상연되는 경우가 많다.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귀족 중 한 명인 오르시니가 리엔치를 칼로 찌르려 한다. 하지만 리엔치는 미리 사슬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진다.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오르시니를 비롯한 음모에 가담한 귀족들은 즉시 체포된다. 분노한 민중은 그들에게 사형을 요구하지만, 아드리아노가 리엔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 리엔치는 아드리아노의 청을 받아들여 반역을 꾀한 귀족들을 용서하기로 결정한다.

4. 3. 3막

''로마 포룸''

귀족들은 로마로 진군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고, 이 소식에 백성들은 불안에 떨었다. 아드리아노는 피비린내 나는 사태를 막고자 자신의 목숨까지 걸며 리엔치에게 전쟁을 멈추라고 간청했지만, 리엔치는 이를 무시했다.

리엔치는 백성들을 이끌어 귀족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아드리아노의 아버지인 스테파노 콜론나가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아드리아노는 리엔치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그를 비난했다. 그러나 리엔치는 아드리아노를 쫓아냈다.

4. 4. 4막

라테라노 대성전 앞체코와 다른 시민들은 교황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귀족들의 협상에 대해 논의한다. 아드리아노는 리엔치를 죽이려던 마음이 리엔치와 아이린이 함께 등장하면서 흔들린다. 라이몬도는 이제 교황이 리엔치에게 교황 금지령을 내렸고 그의 동료들은 파문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발표한다. 아드리아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아이린은 리엔치와 함께 남기로 결심한다.

신성 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는 교황과 결탁하여 리엔치(Rienzi)를 탄압하고, 민중도 리엔치에 대해 차츰 반감을 품게 된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아드리아노(Adriano)는 이러한 기분을 부추긴다. 민중은 마침내 반항의 불길을 들고 카피톨(Capitole)을 불태운다. 그리고 폭동으로 발전한다.

제4막 종반이 상연되었을 때의 스케치

4. 5. 5막

카피톨리노 언덕의 국회의사당 방에서 리엔치는 기도를 통해 Allmächt'ger Vater!|알메히트거 파터!de(전능하신 아버지!) 로마 시민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역설한다. 그는 여동생 이레네에게 아드리아노와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고 권하지만, 이레네는 이를 거절한다. 이때 아드리아노가 나타나 국회의사당에 불이 붙었으며 모두 위험에 처했다고 알린다.

밖에서는 국회의사당이 불타고 있었고, 리엔치가 군중에게 연설하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돌과 모욕뿐이었다. 군중은 리엔치에게 돌과 불을 던지며 폭동은 점차 격렬해진다. 아드리아노는 리엔치와 이레네를 구하려 하지만, 결국 세 사람 모두 무너지는 건물 잔해에 깔려 불길 속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초연 당시 리엔치의 마지막 대사는 "이 도시는 저주받아 파괴될지어다! 로마여, 붕괴하고 시들지어다! 너의 타락한 백성들이 그것을 원하느니라."라는 비관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1847년 베를린 공연을 위해 바그너는 "로마의 일곱 언덕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도시가 존재하는 한, 너는 리엔치의 귀환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보다 희망적인 내용으로 수정했다.[10]

5. 구성



바그너는 이 작품을 '''대 비극 오페라'''(große tragische Operdeu)라고 불렀다.

오페라는 상당한 길이의 서곡으로 시작한다. 서곡은 트럼펫 호출로 시작하는데, 이는 3막에서 콜로나 가문의 전쟁 신호로 사용되는 선율이다. 또한 서곡에는 5막 시작 부분에 나오는 리엔치의 기도 멜로디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기도는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가 되었다. 서곡은 군대 행진곡으로 마무리된다.

6. 악기 편성

이 형태는 당시 자코모 마이에르베어가 파리에서 자신의 5막 오페라에 사용한 악기 편성법과 거의 같다. 규모가 거대하지는 않지만 클라이맥스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트럼펫이 4관으로 사용되었다.

7. 연주 시간

1842년 10월 20일 초연 당시, 바그너의 자서전 《나의 생애》에 따르면 막간을 포함하여 6시간 이상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작품이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트로이 사람들》처럼 너무 길었기 때문에, 바그너는 초기에 이틀 밤으로 나누어 상연하는 방안을 고려했으나, 관객들이 2회분의 티켓 요금을 부담스러워할 것을 우려하여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바그너는 단축판을 준비하여 하룻밤에 상연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오이렌부르크 등에서 출판된 현행 악보를 기준으로 한 연주 시간은 약 3시간 40분이다. 각 막의 연주 시간은 다음과 같다.

현행판 기준 막별 연주 시간
연주 시간
제1막약 35분
제2막약 55분
제3막약 40분
제4막약 20분
제5막약 25분



그러나 실제 독일 오페라 극장에서는 이 단축판을 더욱 줄여서 상연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때 연주 시간은 1회의 휴식 시간을 포함하여 약 2시간 30분 정도이다.

한편, 작품의 초고(원전판)는 훨씬 길어서, 근래 에드워드 다운스가 BBC 노던 심포니아를 지휘하여 연주했을 때는 약 4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8. 리엔치와 아돌프 히틀러

《리엔치》는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에게 큰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여겨진다.[21] 히틀러의 소년 시절 친구였던 아우구스트 쿠비체크는, 1906년 또는 1907년에 젊은 히틀러가 《리엔치》를 관람하고 큰 감명을 받아 정치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15][23] 쿠비체크에 따르면, 1939년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히틀러를 다시 만났을 때 이 오페라에 대한 당시의 열광적인 반응을 기억하냐고 묻자 히틀러는 "그때 모든 것이 시작되었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23][24]

하지만 쿠비체크가 전하는 이야기의 진실성에 대해서는 오늘날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25] 그럼에도 히틀러가 《리엔치》의 자필 악보 원본을 소유했던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 악보는 1939년 히틀러의 50세 생일에 그가 직접 원해서 받은 선물이었다.[26] 이 자필 악보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총통 벙커에 히틀러와 함께 있었으나, 히틀러 사후 벙커 내용물이 파괴되는 과정에서 도난당했거나 분실, 혹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그너의 다른 초기 오페라인 《요정》과 《연애 금지》의 자필 악보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27]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당 전당대회에서는 개회식 음악으로 《리엔치》 서곡이 사용되었다.[28] 나치 정권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관련된 일화를 전한다. 어느 날 독일 노동전선의 지도자 로베르트 레이가 전당대회 개막 음악으로 현대 작품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히틀러는 이를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29]

> "레이, 내가 당대회를 《리엔치》 서곡으로 시작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네. 이건 단순히 음악적인 문제가 아니야. 스물네 살의 젊은 나이에 여관 주인의 아들이었던 리엔치가 로마 제국의 위대한 과거를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며 부패한 원로원을 몰아내도록 설득했지. 젊은 시절 린츠의 극장에서 이 성스러운 음악을 들었을 때, 나 역시 언젠가 독일 제국을 통일하고 이 나라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겠다는 비전을 갖게 되었어."[29]

음악학자 토마스 그레이는 리엔치의 생애에서 나타나는 여러 단계들 - 민중의 지도자로서 환호를 받고, 군사적 투쟁을 벌이며, 반대 파벌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결국 배신당해 몰락하는 과정 - 에서 히틀러가 자신의 정치적 환상을 투영하고 이를 위한 자양분을 찾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22]

9. 현대의 평가 및 해석

바그너 자신은 훗날 ''리엔치''를 부끄러운 작품으로 여겼다. 그는 1852년 자전적 에세이 "나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작품을 단지 5개의 화려한 '피날레', 찬송가, 행렬, 그리고 무기의 음악적 충돌만 보았다고 썼다.[13] 코지마 바그너는 1871년 6월 20일 자신의 일기에 바그너가 ''리엔치''를 "매우 혐오스럽지만, 적어도 그 안의 열정은 인정해야 한다"고 언급한 기록을 남겼다.[14] 그는 자신이 음악 감독으로서 그랜드 오페라를 썼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14]

이 작품은 초연 당시 드레스덴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바그너에게 첫 명성을 안겨주었지만,[4] 후대의 평가는 엇갈렸다. 훗날 바그너의 주요 비평적 반대자가 된 젊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1846년 비엔나에서 이 작품을 마이어베어의 ''위그노 교도'' 이후 가장 중요한 드라마적 창작물이며, 그 시대에 획기적인 작품이라고 극찬했다.[11] 반면, 한스 폰 뷜로는 "''리엔치''는 마이어베어의 최고의 오페라"라고 비꼬았으며, 찰스 로젠은 '마이어베어의 최악의 오페라', 어니스트 뉴먼은 '음악 홍역 발병'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스타프 말러는 '역대 가장 위대한 음악극'이라며 높이 평가하는 등,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했다.

작곡가 자신의 부정과 긴 상연 시간 등의 이유로, ''리엔치''는 오늘날 바그너의 주요 작품 목록(바그너 정경)에서는 벗어나 있으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이후 작품들에 비해 상연 빈도나 인지도가 낮다. 바이로이트 축제에서는 2013년 마티아스 폰 슈테그만의 연출로 단 한 차례 공연되었을 뿐이다. 작곡가가 이 작품을 부인했지만, ''리엔치''는 바그너가 후기에 종종 되돌아갔던 주제(형제/자매 관계, 사회 질서와 혁명)를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작품 전체의 상연은 드물지만, 서곡은 연주회 등에서 자주 연주되며, 제5막의 아리아 "리엔치의 기도" 역시 유명하다.

참조

[1] 서적 Sämtliche schriften und dichtungen (v.7) https://babel.hathit[...] Breitkopf & Härtel 1911
[2] 간행물 Giacomo Meyerbeer: The Jew and His Relationship with Richard Wagner American Society for Jewish Music
[3] 문서
[4] 문서
[5] 웹사이트 10 August 1895: The first ever 'First Night of the Proms http://www.royalalbe[...] Royal Albert Hall 2015-08-10
[6] 웹인용 Wagnerjahr-2013 http://www.wagnerjah[...] 2013-07-10
[7] 웹인용 Guerrilla Opera: Reflections on Bicentennial ''Rienzi'' at Bayreuth's Oberfrankenhalle http://michaelteager[...] 2013-12-31
[8] 웹사이트 Reviews for Rienzi https://odysseyopera[...] Odyssey Opera 2021-05-24
[9] 뉴스 Melbourne Opera's performs ''Rienzi'', a lumpish curiosity piece not one of Wagner's best https://www.smh.com.[...] The Sydney Morning Herald 2013-12-10
[10] 문서
[11] 문서 cited in
[12] 문서 Phantasiestück über Motive aus ''Rienzi'', S. 439
[13] 문서 cited in
[14] 문서 cited in
[15] 문서
[16] 뉴스 「楽しさ」こそ我らが個性 藤沢市民オペラが25周年 1998-11-16
[17] 뉴스 [回顧98]クラシック 不況下、問われる文化育成 1998-12-01
[18] 웹인용 昭和音楽大学オペラ研究所 オペラ情報センター http://opera.tosei-s[...]
[19] 문서 『新グローブ オペラ事典』p.746
[20] 문서 近年には[[カールハインツ・シュトックハウゼン|シュトックハウゼン]]のオペラ『日曜日』がやはり非常に長いため2日間に分けられて初演されている。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28] 문서
[29]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