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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2세 아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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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1594년 스웨덴에서 태어나 1611년 왕위에 오른 스웨덴의 국왕이다. 그는 역사, 정부, 전쟁, 공학, 언어 등 다방면에 능통했으며, 1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와의 전쟁을 이끌었다. 구스타브 2세는 30년 전쟁에 참전하여 군사적 혁신을 이끌었고, "근대전의 아버지"로 불리며, 나폴레옹 1세 등으로부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스웨덴을 발트해의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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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2세 아돌프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야코프 회프나겔이 그린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초상화
1624년, 야코프 회프나겔이 그린 초상화 (추정)
이름구스타브 2세 아돌프
스웨덴어 표기Gustav II Adolf
라틴어 표기Gustavus Adolphus Magnus
별칭구스타브 아돌프 대왕 (스웨덴어: Gustav Adolf den store)
직책스웨덴 국왕, 핀란드 대공
왕조바사 가문
종교루터교
서명
통치
즉위일1611년 10월 30일
대관일1617년 10월 12일
사망일1632년 11월 6일
선임자칼 9세
후임자크리스티나
가계
아버지칼 9세
어머니크리스티나
배우자마리아 엘레오노라
자녀크리스티나
서자구스타프 아프 바사보리
출생 및 사망
출생일1594년 12월 9일
출생지스웨덴, 스톡홀름, 트레 크로노르 성
사망지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뤼첸 전투 근처
매장일1634년 6월 22일
매장지스톡홀름, 리다르홀름 교회
군사 경력
소속스웨덴군
군종스웨덴 육군
주요 전투칼마르 전쟁
크리스티아노펠 공성전
올란드 재정복
비트셰 전투
잉그리아 전쟁
그도프 공성전
프스코프 공성전 (1615년)
폴란드-스웨덴 전쟁 (1617년-1618년)
폴란드-스웨덴 전쟁 (1621년-1625년)
리가 공성전 (1621년)
리보니아 전역 (1625년-1626년)
폴란드-스웨덴 전쟁 (1626년-1629년)
프로이센 전역 (1626년-1629년)
발호프 전투
그니에프 전투
디르샤우 전투
트슈치아나 전투
바이셀스뮌데 전투
30년 전쟁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 전투
베르벤 전투
브라이텐펠트 전투 (1631년)
라인 전투
뉘른베르크 공성전
퓌르트 전투
알테베스테 전투
뤼첸 전투 (1632년) (전사)
기타
공작 작위쇠데르만란드 공작: 1604년-1607년
에스토니아 공작: 1607년-1618년
베스트만란드 공작: 1610년-1611년
핀란드 공작: 1606년-1632년

2. 어린 시절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1594년 12월 9일 스톡홀름에서 칼 9세와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크리스티나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사촌 시기스문트는 스웨덴과 폴란드의 국왕이었다. 신교도였던 칼 9세는 가톨릭 신자 시기스문트를 강제로 1599년 스웨덴 왕위에서 물러나게 했다.[14] 이는 30년 전쟁 이전의 초기 종교 갈등의 일부였다. 칼 9세는 섭정으로 통치하다가 1604년에 왕위에 올랐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기병 돌격을 이끄는 모습


왕세자 구스타브 아돌프는 1610년부터 달레카를리아의 가그네프-플로다를 공국으로 가지고 있었다. 1611년 10월 아버지가 사망하자 16세의 구스타브는 왕위를 계승하였고, 12월 16일 17세가 되면서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14] 그는 폴란드 사촌 시기스문트 3세와 왕조 분쟁을 계속 이어받았다.[15] 그는 또한 통치 초기에 잠시 러시아 차르의 칭호를 사용하였다.[16][17]

이후 구스타브 2세는 리보니아를 침공하여 폴란드-스웨덴 전쟁 (1626년-1629년)을 시작했다. 발호프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그니에프, 디르샤우에서 싸웠으며, 트르치아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1630년 6월 독일에 상륙하면서 30년 전쟁에 대한 스웨덴의 개입을 알리면서 그의 통치는 유명해졌다.[18]

2. 1. 가문 및 교육

칼 9세와 홀슈타인-고트로프의 크리스티나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칼뱅파 개신교도였지만 구스타브는 루터파 개신교를 신봉하였다. 그는 개신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역사, 정부, 전쟁공학, 언어 등에 능통하였다. 그가 가장 신임한 조언자 악셀 옥센셰르나 백작은 자신의 군주에 관하여 "자신의 청년 시절에 그는 깊고도 광범위한 상식과 여러 외국어의 완벽한 구사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라틴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이탈리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였고, 스페인어, 영어, 스코틀랜드어를 이해하였으며 게다가 폴란드어러시아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8세 때부터 구스타브는 부왕의 요청에 따라 국무회의에 함께 참석하였고, 12세 때에는 외국 대사를 접견하였다. 1609년 15세 때에는 자신의 베스트만란드 공국을 관리하기 시작하였고, 그 해 8월 5일 부왕이 와병으로 불참한 가운데 외레브로에서 의회에 참석하여 부왕 대신 자신의 첫 공적 연설을 하였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마리아 엘레오노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1594년 12월 9일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를 공작(바사 왕가)과 그의 두 번째 부인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크리스티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당시 그의 사촌인 시기스문트는 스웨덴과 폴란드의 국왕이었다. 신교도였던 카를 공작은 가톨릭 신자 시기스문트를 강제로 1599년 스웨덴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이는 30년 전쟁 이전의 초기 종교 갈등의 일부였다. 카를 공작은 섭정으로 통치하다가 1604년 스웨덴의 카를 9세로 즉위하였다. 왕세자 구스타브 아돌프는 1610년부터 달레카를리아의 가그네프-플로다를 공국으로 가지고 있었다. 1611년 10월 아버지가 사망하자 16세의 구스타브는 왕위를 계승하였고, 12월 16일 17세가 되면서 친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14] 그는 또한 스웨덴 왕위를 되찾으려고 계속 노력한 폴란드 사촌 시기스문트 3세와 가끔 적대적인 왕조 분쟁을 계속 이어받았다.[15] 그는 또한 그의 통치 초기에 잠시 러시아 차르의 칭호를 사용하였다.[16][17]

2. 2. 초기 정치 경험

칼 9세와 홀슈타인-고트로프의 크리스티나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칼뱅파 개신교도였지만 구스타브는 루터파 개신교를 신봉하였다. 그는 개신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역사, 정부, 전쟁공학, 언어 등에 능통하였다. 그가 가장 신임한 조언자 악셀 옥센셰르나 백작은 자신의 군주에 관하여 "자신의 청년 시절에 그는 깊고도 광범위한 상식과 여러 외국어의 완벽한 구사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라틴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이탈리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였고, 스페인어, 영어, 스코틀랜드어를 이해하였으며 게다가 폴란드어러시아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8세 때부터 구스타브는 부왕의 요청에 따라 국무회의에 함께 참석하였고, 12세 때에는 외국 대사를 접견하였다. 1609년 15세 때에는 자신의 베스트만란드 공국을 관리하기 시작하였고, 그 해 8월 5일 부왕이 와병으로 불참한 가운데 외레브로에서 의회에 참석하여 부왕 대신 자신의 첫 공적 연설을 하였다.

3. 국왕 즉위

1604년 계승 협정에 따라 왕위를 물려받고, 1611년 12월 뉘셰핑에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왕으로 인정되었다.[48] 의회와 계급에 일정한 권한을 양보해야 했다. 1620년 11월 25일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오노라와 결혼했다.

1617년 헌장은 귀족 사회의 특권을 옹호하여, 중요한 왕실 직책은 귀족에게만 주어졌다. 평민은 중앙 집권 체제에서 판사나 외교관으로 일할 수 없었다. 1629년 귀족 법령으로 귀족 사회 등급이 규정되어, 상류 계급은 국가 관청 근무 명단에 오르는 권리와 의무를 가졌다. 그러나 귀족 사회는 특권 계급이 아니었고, 군인과 행정가로서 능력을 보인 평민에게는 직위와 칭호가 주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용역, 대지, 가족의 귀족 정치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구스타브는 중세 사회 계급에 권력을 주어 상류 계급과 균형을 이루게 했다. 중세 사회 계급 회의는 점차 정돈된 논의로 변형되었고, 세금에 대한 불평은 있었으나 국왕의 성공적인 외교 정책으로 중세 사회 계급은 대체로 충성심을 유지했다.[48]

1617년에 신분제 의회의 출석 신분을 명시한 의회법을 공포하여 귀족, 성직자, 시민, 농민으로 신분을 고정시켰다. 귀족에게는 관직을 부여하거나 군 내부에서 승진시키고, 왕령지를 할양하는 등 권력을 강화하는 대신 충성심을 확보했다. 구리, 철, 타르 등 광물 자원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중상주의를 채택하여 해외로 수출했고, 전시에는 프로이센 선박 관세와 프랑스의 원조금, 독일 점령지로부터 약탈 면제와 교환으로 배상금을 획득하여 전쟁을 수행했다.[48] 1632년 에스토니아 공국 타르투타르투 대학교(아카데미아 구스타비아나)를 설립했다.

3. 1. 즉위 배경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칼마르는 이미 덴마크에 함락되었고, 엘브스보리도 곧 항복하였다. 새로 건설된 예테보리는 불타버렸지만, 스톡홀름은 유지되었고 크리스티안 4세의 군대는 스웨덴 국민들의 예상 밖 저항에 부딪혔다. 1613년 1월, 크네레드 조약이 체결되어 스웨덴은 덴마크에 6년 안에 1백만 릭스달레르를 지불하고, 논쟁 지역이었던 북극 지방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1] 엘브스보리 요새와 주변 지역은 보상 담보로 덴마크가 영유했고, 다른 경계는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1]

러시아와의 분쟁은 "혼란 시대"로 알려진 모스크바의 계승 문제로 인해 유리하게 진행되었다.[1] 1617년 2월 27일, 구스타브는 스톨보보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를 발트해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1]

구스타브는 1604년 계승 협정에 따라 왕위를 상속받았고, 1611년 12월 뉘셰핑에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왕으로 인정되었다.[1] 그러나 의회와 계급에 특정 권력들을 양도해야 했다.[1]

1617년 헌장은 귀족 사회의 모든 편견을 옹호했으며, 모든 중요한 왕실은 귀족에게만 주어졌다.[1] 평민은 중앙 집권에 고용되거나 판사, 외교관으로 일할 수 없었다.[1] 1629년 귀족 법령에 의해 귀족 사회의 등급이 규정되었고, 이는 상류 계급이 국가 관청 근무에 명단을 올리는 권리와 의무가 되었다.[1] 하지만 귀족 사회는 비공개 특권 계급이 아니었고, 항상 하층에서 보강되었다.[1] 군인이나 행정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평민은 직위와 함께 칭호를 받았다.[1] 시간이 흐르면서 용역, 대지, 가족의 귀족 정치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다.[1] 구스타브는 중세 사회 계급에게 상당한 권력을 주었고, 상류 계급에 대항하여 하류 계급의 균형을 맞추었다.[1] 중세 사회 계급 회의는 초기 군주들에 의해 개최된 논쟁적이고 극적인 회의와 달리 점차 정돈된 논의로 변화했다.[1] 세금에 대한 불만이 있었지만, 국왕의 성공적인 외교 정책은 보통 중세 사회 계급의 충성을 유지시켰다.[1]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트레크로노르 성에서 네덜란드 대사를 영접하는 모습


구스타브와 그의 뛰어난 재상 옥센셰르나는 국가의 행정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중앙 기구를 창조하는 일에 매진했다.[1] 이들의 노력은 1634년 헌법에서 결실을 맺었다.[1] 전쟁부와 입법부를 포함한 주요 행정부마다 중앙 관청 또는 단체가 설립되었다.[1] 각 단체는 왕명에 따라 시행되는 회의 대신 스톡홀름에 영구적으로 설치되어 연중 대부분 의석을 가진 공무원이었다.[1] 지방 수준에서 스웨덴은 주의 가장 중요한 도시의 성에 주권 공식 주재와 함께 여러 주로 나뉘었다.[1] 이는 구스타브의 장기 결석과 크리스티나의 소수파 시기 동안 정부가 기능할 수 있게 만든 조직이었다.[1] 스웨덴은 또한 새로운 제도 아래 마련된 직위를 채울 뛰어난 지도자들을 많이 보유하는 행운을 누렸다.[1]

3. 2. 초기 전쟁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즉위 당시 아버지로부터 세 가지 전쟁을 물려받았다. 덴마크-노르웨이와의 칼마르 전쟁, 러시아 차르국과의 잉그리아 전쟁,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이었다.

덴마크-노르웨이와의 칼마르 전쟁에서 구스타브 2세는 소규모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크리스티아노펠 공략에서 승리했지만, 비트쇠 전투에서는 패배했다. 이 전쟁은 1613년 크네레드 조약으로 종결되었는데, 스웨덴은 엘브스보리를 제외한 영토는 잃지 않았지만, 엘프스보르 성을 되찾기 위해 덴마크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28] 이 전쟁 중 구스타브 2세는 병사들이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도록 허용했고, 스코네의 24개 교구가 약탈당하고 황폐화되었다. 이로 인해 스코네에서 그의 기억은 부정적으로 남아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마을은 베였으며, 2년 후 덴마크-노르웨이 국왕 크리스티안 4세는 인근에 크리스티안스테드를 건설했다.[29][30]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 (1631)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금화, 1632


러시아 차르국과의 잉그리아 전쟁에서 구스타브 2세는 그도프 공성전에서 승리했지만, 프스코프 공성전에서는 패배했다. 1617년 스톨보보 조약을 통해 러시아를 발트해에서 몰아내면서 전쟁이 끝났다.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은 1629년 알트마르크 휴전으로 종결되었다. 이 휴전으로 리보니아 지방이 스웨덴에 넘어갔고, 스웨덴군은 30년 전쟁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스웨덴군은 이미 1628년 슈트랄순트에 교두보를 마련했었다.[44]

  • -]

구스타브 2세는 스웨덴 왕위를 요구하던 종형 지기스문트 3세의 폴란드와 전쟁에 집중했다. 초기에는 리가를 함락하고 리보니아(리플란트)를 정복하는 등 우세했지만,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가 이끄는 폴란드군의 반격에 밀려 여러 차례 위기에 처했다. 체후의 전투에서는 목과 오른팔에 총상을 입고 낙마하여 죽을 뻔했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 부상으로 구스타브 2세는 금속 갑옷을 착용할 수 없게 되었고, 오른팔도 불편해졌다.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를 상대한 구주노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구스타브 2세는 폴란드 재침공을 시도했지만, 프츠크의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코니에츠폴스키 군에게 대패했다. 전쟁 후반, 구스타브 2세는 여러 번 부상을 입는 등 폴란드군과의 병력 차이로 열세를 겪었다.

하지만 폴란드는 계속된 전쟁으로 재정적 여유가 없었고, 양국 모두 장기간의 전쟁에 지쳐 있었다. 구스타브 2세는 30년 전쟁 개입을 위해 프랑스의 중재를 받아들여 알트마르크 휴전을 체결했다. 이로써 스웨덴은 폴란드로부터 스웨덴 왕위 요구 보류, 리플란트 획득, 메멜·단치히 평원의 여러 도시에서의 조세권을 얻었다.[45]

3. 3. 정치 및 행정 개혁

1617년 헌장은 귀족 사회의 특권을 강화하여, 중요한 왕실 직책은 귀족에게만 주어졌다. 평민은 중앙 집권 체제에서 판사나 외교관으로 일할 수 없었다. 1629년 귀족 법령으로 귀족 사회 등급이 규정되어, 상류 계급은 국가 관청 근무 명단에 오르는 권리와 임무를 가졌다. 그러나 귀족 사회는 특권 계급이 아니었고, 군인과 행정가로서 능력을 보인 평민에게는 직위와 칭호가 주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용역, 대지, 가족의 귀족 정치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구스타브는 중세 사회 계급에 권력을 주어 상류 계급과 균형을 이루게 했다. 중세 사회 계급 회의는 점차 정돈된 논의로 변형되었고, 세금에 대한 불평은 있었으나 국왕의 성공적인 외교 정책으로 중세 사회 계급은 대체로 충성심을 유지했다.[1]

구스타브와 재상 옥센셰르나는 중앙 집권적 기구 창조에 힘썼고, 그 노력은 1634년 헌법으로 결실을 보았다. 전쟁부와 입법부를 포함한 주요 행정부를 위한 중앙 관청이 설립되었다. 각 단체는 스톡홀름에서 영구적으로 회의를 개최하는 공무원으로 구성되었다. 지방은 여러 주로 나뉘었고, 각 주는 주권 공식 주재와 함께 가장 중요한 도시 성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조직은 구스타브의 장기 부재와 크리스티나의 소수파 시기 동안 정부 기능을 가능하게 했다. 스웨덴은 새로운 체제 아래 마련된 직위를 채울 뛰어난 지도자를 많이 보유했다.[1]

엘브스보리 배상금 지불, 확장된 정치적 책임, 지속된 전쟁 비용은 스웨덴 재정에 부담을 주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도시에서 예술과 공예에 특화된 중상주의 조직이 세워졌지만, 가장 성공적인 도시는 예테보리였다. 정부 정책은 광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루이스 더 헤르 같은 네덜란드 자본, 교역인, 기업가가 새 철공소를 설립했고, 많은 플란데런왈롱인이 스웨덴에 들어와 칼뱅파는 루터교도와 섞였다. 이들의 영향으로 스웨덴은 수출품 외에도 육군해군을 위한 충분한 법령을 갖게 되었다. 조선소는 해군함과 상선을 건조했고, 신대륙에 스웨덴 식민지가 계획되었으나 실제 시도는 구스타브 사망 6년 후였다.[1]

3. 4. 경제 정책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치세 동안 스웨덴은 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덴마크와의 전쟁으로 엘브스보리 요새와 주변 지역을 잃고, 예테보리가 불타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1613년 크네레드 조약을 통해 6년 안에 1백만 릭스달레르를 지불하고 분쟁 지역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1617년의 헌장은 귀족 사회의 특권을 강화하고, 평민은 중앙 집권, 판사, 외교관 등의 직위에 임명될 수 없도록 제한했다. 1629년 귀족 법령은 귀족 사회의 등급을 규정하고, 상류 계급의 권리와 의무를 명시했다. 그러나 귀족 사회는 폐쇄적인 특권 계급이 아니었고, 군인이나 행정가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평민들은 칭호를 받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용역과 대지, 가족의 귀족 정치 사이에 분열이 발생하기도 했다.[4]

구스타브 2세와 그의 재상 옥센셰르나는 중앙 집권적 행정 기구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했고, 1634년 헌법을 통해 성과를 거두었다. 전쟁부와 입법부를 포함한 주요 행정부들을 위한 중앙 관청이 설립되었고, 각 단체는 스톡홀름에 영구적으로 주재하는 공무원을 두었다. 지방은 여러 주로 나뉘었고, 각 주의 가장 중요한 도시에는 주권 공식이 주재했다.[5]

엘브스보리 배상금 지불, 정치적 책임 증가, 지속적인 전쟁 등으로 인해 스웨덴 재정은 압박을 받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도시에서 예술과 공예에 특화된 중상주의 조직이 세워졌다. 예테보리가 가장 성공적인 도시로 성장했으며, 정부 정책은 광업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루이스 더 헤르와 같은 네덜란드 자본가, 교역인, 기업가들이 철공소를 설립하고, 플란데런왈롱인들이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칼뱅파들이 루터교도들과 섞이면서 저지대의 특성이 스웨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6]

스웨덴은 수출품 외에도 육군과 해군을 위한 충분한 법령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소에서는 해군함과 상선을 건조했고, 신대륙에 스웨덴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이 세워졌으나, 실제 시도는 구스타브 2세 사망 6년 후였다.[7]

4. 30년 전쟁 참전

최고의 무기, 잘 훈련된 장병, 효과적인 포대, 그리고 효율적인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며 유럽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1632년 뤼첸 전투에서 스웨덴군과 개신교 연합군은 승리했지만,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전사하고 말았다.[33]

1630년 5월 19일, 구스타브는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감했다. 6월 24일 폼메른에 상륙한 그는 메클렌부르크에서 황제군을 몰아냈다. 1631년 , 프랑스와의 동맹 강화와 발렌슈타인의 퇴각에 힘입어, 구스타브는 틸리 백작에게 포위된 마그데부르크를 구원하기로 결심했다.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이 통행을 거부하여 마그데부르크가 약탈되는 동안 폼메른에 머물렀다. 틸리 백작이 베르덴에서 구스타브의 방어 진형이 너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작센으로 이동하여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 1세를 굴복시키려 했다. 구스타브는 작센군과 연합하여 1631년 9월 7일 브라이텐펠트 전투에 참전했다. 작센군이 흩어졌음에도 스웨덴군은 승리했고, 이는 황제군이 우세하지 않은 상황에서 거둔 역전승이었다.

발렌슈타인이 다시 전투에 소환되었고, 구스타브는 그를 만나기 위해 북부 독일 전체를 동원했다. 1632년 발렌슈타인이 뉘른베르크를 위협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스타브는 바이에른 침공을 시작했다. 뉘른베르크를 구원하려는 시도가 격퇴되자, 그는 오스트리아로 회군하여 발렌슈타인을 철수시키려 했다. 이 전투에서 그는 성공적이었다. 빠른 행군으로 기지로 돌아가려 했지만, 발렌슈타인이 작센을 포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해 11월 6일, 양측은 뤼첸 전투에서 만났다. 스웨덴군은 승리했지만, 구스타브는 전사했다. 그는 몸무게 때문에 갑옷 대신 코트를 입고 싸웠는데, 안개 낀 전장에서 근시안이었던 국왕은 고립되어 중상을 입고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스웨덴으로 송환되어 리다홀름 교회에 안치되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1633년 2월, 삼부회로부터 "위대한 구스타프 아돌프"(스웨덴어: ''Gustav Adolf den Store'')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스웨덴 국왕 중 유일한 영예였다.

4. 1. 참전 배경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혁신적인 복합 무기 체계와 획기적인 전술을 사용하여 근대적 전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며, 역사상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전술은 화기(火器)의 파괴력과 신속한 전투를 통해 적에게 후퇴 및 재편성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는 전투에서 항상 적을 제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적군도 그의 새로운 전술을 모방하면서 스웨덴군의 전투력 우위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16세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아버지로부터 러시아, 덴마크, 폴란드와의 세 가지 전쟁을 물려받았다. 이 전쟁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그는 30년 전쟁에 개신교 측을 지원하며 참전하여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판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4. 2. 주요 전투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근대적 전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으며, 혁신적인 복합 무기 체계와 전술을 사용하여 역사상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전술은 화력과 신속한 전투에 중점을 두어 적을 제압했지만, 적군도 그의 전술을 모방하면서 스웨덴군의 우위는 점차 약화되었다.[28]

16세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아버지로부터 세 개의 전쟁을 물려받았다.

이 전쟁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그는 30년 전쟁에 개신교 측으로 참전하여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판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주요 전투
전투날짜상대결과비고
크리스티아노펠 공략1612년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승리칼마르 전쟁
비트쇠 전투1612년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패배칼마르 전쟁
그도프 공성전1614년 ~ 1617년러시아스웨덴 승리잉그리아 전쟁
프스코프 공성전1615년러시아스웨덴 패배잉그리아 전쟁
슈트랄순트 공성전1628년신성 로마 제국스웨덴 승리30년 전쟁의 전초전
오데르강 프랑크푸르트 전투1631년 4월 13일신성 로마 제국스웨덴 승리30년 전쟁
베르벤 전투1631년 7월 22일신성 로마 제국스웨덴 승리30년 전쟁
브라이텐펠트 전투1631년 9월 7일신성 로마 제국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스웨덴 승리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의 결정적 승리
라인 전투1632년 4월 15일신성 로마 제국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스웨덴 승리30년 전쟁, 틸리 백작 사망
뉘른베르크 공성전1632년 여름신성 로마 제국스웨덴 패배30년 전쟁
퓌르트 전투1632년 8월 24일 ~ 9월 4일신성 로마 제국스웨덴 패배30년 전쟁
알테 페스테 전투1632년 8월 ~ 9월신성 로마 제국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불리30년 전쟁
뤼첸 전투1632년 11월 6일신성 로마 제국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스웨덴 승리,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전사30년 전쟁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는 구스타브 2세 아돌프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그의 군대는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이 승리는 30년 전쟁에서 개신교 세력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31]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황제군과 맞서 싸웠으나, 전투 중 전사하였다.[33]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군은 승리했지만, 지도자를 잃은 프로테스탄트 세력은 이후 뇌를링겐 전투에서 패배했다.

5. 군사적 업적 및 평가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뛰어난 군사 지도자이자 전략가였다. 그의 군사적 업적 및 평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근대 전술의 선구자: 혁신적인 복합 무기 체계와 전술을 도입하여 근대 전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화력과 기동성을 결합한 전술을 통해 적을 제압했으며, 이는 당시 유럽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혁신적인 변화였다.
  • 30년 전쟁의 영웅: 16세에 왕위에 오른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30년 전쟁에서는 개신교 진영의 지도자로서 맹활약했다.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의 승리는 그의 군사적 역량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비록 1632년 뤼첸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그의 군사적 업적은 스웨덴을 유럽의 강대국으로 발돋움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군사 혁신의 주역: 군사 조직과 전략 면에서 시대를 앞서 나갔다. 스웨덴 해군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해군력을 강화하여 발트해를 가로지르는 군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또한, 징병제와 용병제를 결합한 효율적인 군사 제도를 구축하고, 핀란드인 기병대인 하카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전력을 강화했다.
  • 행정 개혁과 경제 발전: 군사적 업적 외에도 국내 개혁에도 힘썼다. 1617년 의회법을 공포하여 신분제를 확립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경제 발전을 도모했다. 1632년 타르투 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발전에도 기여했다.
  • 종합 평가: 군사적 역량뿐만 아니라 행정 능력, 경제 개혁, 교육 진흥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나폴레옹 1세는 그를 역사상 7명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칭송했으며, 현대의 역사가들 역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만, 최근에는 그의 군사적 혁신이 기존 기술의 개선 및 활용에 불과하며, 그의 전설적인 지위가 과장되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5. 1. 군사 혁신

그는 근대적 전술의 선구자로 유명하며, 혁신적인 복합 무기 체계와 획기적인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전술은 화기(火器)의 파괴력과 적에게 후퇴 및 재편성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 신속한 전투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러한 요소가 종합되어 싸움터에서는 항상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20][21] 그러나 그가 개발한 새로운 전술을 적군도 모방하게 되면서부터 스웨덴군의 전투력 우위는 차츰 약화되기 시작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해군 없이는 불가능한 발트해를 가로지른 군사 작전 이래 해군의 우월성을 확보했다. 그의 군대의 주력은 각 주에서 징병된 스웨덴인과 핀란드인 연대였으며, 다수의 독일인스코틀랜드인들도 그의 아래 복무하였다. 그의 군대는 보통 수적으로는 열세였으나, 규모 대신 기동성을 택했다. 그의 고도로 기동적인 군대는 첨단 장비와 함께 공급품 창고를 갖추고 있었다. 그의 포병은 속사 실력이 뛰어났고, 그의 부대들은 다양한 무기들을 고급의 타격력을 지닌 기관으로 통합하였다. 구스타브는 직접 자신의 사관들을 지휘하였다. 따라서 그는 스웨덴인, 독일인과 스코틀랜드인들을 포함한 장군들을 양성하였다.

폼메른에 상륙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보병, 기병, 군수품의 통합, 특히 포병의 사용으로 그는 "근대전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20]

'북방의 사자': 브라이텐펠트 전투(1631년)의 전환점에서 틸리 백작의 군대에 맞서 묘사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장군으로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전장에서 이동식 포병을 사용했고, 방어보다 공격을 강조하고 기동성과 기병의 주도권을 강조하는 매우 공격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다른 혁신들 중에서 그는 그의 부대에 초기 형태의 병과 연합 작전을 도입했는데, 기병은 대포로 강화된 보병 전열의 안전에서 공격하고 다시 재편성하기 위해 돌아올 수 있었다. 모리스의 개혁에서 영감을 받아 그는 당시 파이크 앤드 샷 군대에서 일반적이었던 것보다 훨씬 얕은 보병 전열을 채택했으며, 전열은 일반적으로 5열 또는 6열로 싸웠고, 때때로 약간의 거리를 두고 또 다른 전열의 지원을 받았다. 그 간격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포병과 기병의 영역이었다.[22][23]

그의 포병 또한 달랐다. 일반적인 중포 외에도 그는 르네상스 시대 전장에 처음으로 가벼운 이동식 대포를 도입했다. 이들은 그의 더 선형적으로 배치된 전열을 지원하는 포대에 배치되어, 당시 다른 파이크 앤드 샷 군대에서 사용된 번거롭고 기동성이 없는 전통적인 깊은 사각형(예: 최대 50열까지 이르는 스페인의 테르시오)을 대체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군대는 매우 빠르게 재배치하고 재구성할 수 있었고, 적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22][23] 그는 대륙 전선으로 병력과 보급품을 수송하는 현대적인 스웨덴 해군을 창설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군대에서는 부대들이 광범위하게 교차 훈련을 받았다. 기병과 보병 모두 포병을 지원할 수 있었는데, 그의 중기병이 제1차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적의 가톨릭 테르시오를 향해 포획한 포병을 돌릴 때 그랬다. 창병들은 지정된 머스키터만큼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사격을 할 수 있었으므로, 귀중한 화기를 사격 전열에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보병과 포병은 필요하다면 승마를 배웠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실시한 개혁 중 특히 획기적이었던 것은 용병 정책이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즉위했을 당시 국고의 파탄과 잇따른 전쟁으로 국민의 불만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징병제에 의한 군대 편성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기 때문에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징병제에 더해 용병 제도를 도입했다. 용병군은 영국인, 스위스인, 스코틀랜드인, 독일인,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구스타프 2세 아돌프의 용병군은 인기를 얻었고,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사후에도 스웨덴군에 고용되었다(용병 정책은 스웨덴이 팽창의 극한에 달한 북방 전쟁기에 이르기까지 행해졌다).[49]

5. 2. 군사적 유산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혁신적인 복합 무기 체계와 전술을 사용하여 근대적 전술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역사상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전술은 화기(火器)의 파괴력과 신속한 전투를 통해 적에게 후퇴 및 재편성의 여유를 주지 않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그가 개발한 새로운 전술은 적군도 모방하게 되면서 스웨덴군의 전투력 우위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20]

16세에 즉위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아버지로부터 러시아, 덴마크, 폴란드와의 세 전쟁을 물려받았다. 그는 이 전쟁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30년 전쟁에 개신교 측으로 참전하여 유럽의 종교적, 정치적 판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거둔 혁혁한 승리는 그를 유럽의 주요 지도자로 부상시켰으나, 1632년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군사적 업적 외에도 행정 개혁과 경제 육성은 스웨덴을 발트해 연안의 지역 세력에서 유럽 강국으로 발돋움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역사가 크리스터 요르겐센은 경제와 상업 개혁, 근대적 관료제에 바탕을 둔 전제 정치 도입이 전장에서의 승리보다 더 중요했다고 평가한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군사 공학과 지도 작성에 능숙했으며, 전쟁의 과학적 측면을 연구했다. 그는 오라녜의 마우리츠의 전술을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전투의 정통적 유럽 제도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해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군력을 강화하여 발트해를 가로지르는 군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의 군대는 스웨덴인과 핀란드인 연대를 주축으로 독일인스코틀랜드인 용병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군대의 규모보다 기동성을 중시했으며, 첨단 장비와 충분한 보급품을 제공했다. 특히, 그의 포병은 속사 실력이 뛰어났고, 다양한 무기를 통합하여 강력한 타격력을 발휘했다.

30년 전쟁에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이동식 포병을 사용하고, 공격을 강조하며, 기동성과 기병의 주도권을 활용하는 공격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그는 보병, 기병, 군수품을 통합하고, 특히 포병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근대전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21] 그는 모리스의 개혁에서 영감을 받아 얕은 보병 전열을 채택하고, 포병과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22][23] 그의 군대는 빠른 재배치와 재구성이 가능하여 적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22][23]

나폴레옹 1세와 클라우제비츠는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했으며, 조지 S. 패튼도 이에 동의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군대의 평등으로도 유명했는데, 모든 부대가 동등하게 대우받았고, 광범위한 교차 훈련을 받았다.

최근 역사가들은 그의 명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바실리드 헨리 리델 하트는 그가 기존 기술을 개선하고 훌륭하게 사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리처드 브제진스키는 그의 전설적인 지위가 부정확한 신화에 기반한다고 말한다.[21]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덴마크-노르웨이와의 칼마르 전쟁, 러시아와의 잉그리아 전쟁,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 등 여러 전쟁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1629년 알트마르크 휴전으로 리보니아 지방을 획득하고, 독일의 30년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1630년 독일 북부에 상륙한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베어발데 조약을 통해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통합했다.[31] 1631년 제1차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틸리 백작의 가톨릭 군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독일 전역을 행군하며 신성 로마 제국 침략 계획을 세웠다. 1632년 라인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같은 해 뤼첸 전투에서 전사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갑옷을 입지 않고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패딩 처리된 흉갑을 착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1627년 폴란드 병사에게 총상을 입은 후 철갑옷을 입을 수 없었고, 오른손 두 손가락이 마비되었다.[32]

그는 또한 국내적으로도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1617년 의회법을 공포하여 신분제를 확립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켰다.[48] 1632년에는 타르투 대학교를 설립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용병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그의 용병군은 영국, 스위스, 스코틀랜드,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등 다양한 국적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49]

그의 사후, 옥센셸나가 섭정을 맡아 3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스웨덴은 발트 제국을 건설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군사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근세 유럽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나폴레옹 1세는 그를 역사상 7명의 영웅 중 한 명으로 칭했다.[50]

6. 정치 철학 및 유산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30년 전쟁 당시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주요 수호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여러 교회, 재단 등이 유럽에 존재한다. 그는 스웨덴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스톡홀름, 예테보리(Gustaf Adolfs torg), 헬싱보리 등 스웨덴 주요 도시 광장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탈린 구스타프 아돌프 문법학교, 2007


스웨덴과 핀란드에서는 매년 11월 6일, 뤼첸 전투에서 그가 사망한 날을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날로 기념하며,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페이스트리를 먹는 전통이 있다. 핀란드에서는 이 날을 "스웨덴 유산의 날"로도 기념한다. 미네소타주 세인트 피터에 있는 루터교 대학인 구스타프 아돌프스 칼리지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헝가리 쇼프론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있는 GAW 깃발


1832년 뤼첸 전투 200주년 기념일에 설립된 독일복음교회의 구스타프-아돌프-베르크(GAW)는 다른 교회들을 돕고 그의 유산을 기념하는 단체이다. GAW는 독일복음교회(EKD)의 디아스포라 활동을 담당하며 국제적으로 별도 지부를 두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조직은 구스타프-아돌프-파라인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단체 결성 계획은 1832년 11월 6일 뤼첸 전투 200주년 기념 행사와 관련하여 처음 논의되었다.[35]

6. 1. 정치 철학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정치는 진보적인 경향을 보였다.[24] 예를 들어 1631년 에스토니아 정복지에서 그는 현지 귀족들에게 평민들에게 더 많은 개인적 권리를 부여하도록 강요했다.[24] 그는 또한 교육을 장려하여 1631년 탈린에 학교를 설립했는데, 오늘날 구스타프 아돌프 문법학교(Gustav Adolfi Gümnaasiumet)로 알려져 있다.[24] 1632년 6월 30일,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오늘날 타르투 대학교로 알려진 에스토니아 아카데미아 도르파텐시스(Academia Dorpatensis) 설립에 관한 법령에 서명했다.[25]

평민들에게 상당한 고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스토니아에 대한 스웨덴 통치 시대는 지역 전설에서 "좋았던 옛 스웨덴 시대"로 이상화되어 왔는데, 이는 러시아 통치하에서 따른 더욱 어려운 시대와의 비교 때문이다.[26]

1617년 8월 27일, 그의 즉위식 연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 나는 통치에 대한 경험을 통해 운명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공통된 통치에 종속되는지 주의 깊게 이해하도록 배웠습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하나님의 명령과 본성에 의해 그러한 통치를 할 의무를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그러한 통치를 원할 이유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과 같은 왕자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선과 멸망은 공공의 선과 하나로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유로, 이제 나의 약속은 그들의 행복과 선정, 그리고 관리에 대해 큰 노력을 기울이고, 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27]

6. 2. 고트주의

Göticismsv 또는 고트주의는 스웨덴에서 일어난 일종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스웨덴인들이 고대 고트족의 후예라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운동은 스웨덴을 강대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열망과도 관련이 있었다.

6. 3. 유산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진보적인 정치를 펼쳤다. 예를 들어 1631년 에스토니아 정복지에서 귀족들에게 평민의 권리 신장을 강요했다. 또한 교육을 장려하여 1631년 탈린에 학교를 설립했는데, 오늘날 구스타프 아돌프 문법학교(Gustav Adolfi Gümnaasiumet)로 알려져 있다.[24] 1632년에는 타르투 대학교 설립 법령에 서명했다.[25] 에스토니아에 대한 스웨덴 통치 시대는 지역 전설에서 "좋았던 옛 스웨덴 시대"로 이상화되기도 한다.[26]

30년 전쟁 당시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주요 수호자였던 그는 유럽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 널리 기념되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여러 교회, 재단 등이 존재하며, 스웨덴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진다. 스웨덴 주요 도시 광장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스웨덴과 핀란드에서는 매년 11월 6일, 그가 뤼첸 전투에서 사망한 날을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날로 기념하며,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페이스트리를 먹는 전통이 있다. 핀란드에서는 이 날을 "스웨덴 유산의 날"로도 기념한다. 미네소타주 세인트 피터에 있는 구스타프 아돌프스 칼리지도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832년 뤼첸 전투 200주년 기념일에 설립된 독일복음교회의 구스타프-아돌프-베르크(GAW)는 다른 교회들을 돕고 그의 유산을 기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GAW는 독일복음교회(EKD)의 디아스포라 활동을 담당하며 국제적으로 별도의 지부를 두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조직은 구스타프-아돌프-파라인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단체 결성 계획은 1832년 11월 6일 뤼첸 전투 200주년 기념 행사와 관련하여 처음 논의되었다.[35] 스웨덴 왕실은 1994년 구스타브 2세 아돌프 탄생 400주년을 맞아 라이프치히에 있는 GAW 본부를 방문했다.[35]

참조

[1] 서적 Debrett's Kings and Queens of Europe Webb & Bower
[2] 서적 Gustav Adolf the Great American-Scandinavian Foundation
[3] 서적 Gustaf II Adolf Norstedts
[4] 서적 Riddarholmskyrkan, de svenska konungarnas gravkyrka Riksmarskalk
[5] 문서 On War
[6] 서적 Commanders: History's Greatest Military Leaders https://archive.org/[...] DK Publishing
[7] 서적 Aspects of European History 1494–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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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백과사전 Svensk Uppslagsbok
[10] 서적 Gustavus Adolphus: A History of the Art of War from Its Revival After the Middle Ages to the End of the Spanish Succession War, with a Detailed Account ... of Turenne, Conde, Eugene and Marlborough https://books.google[...] Da Capo Press Inc 2015-12-13
[11] 서적 History of Scandinavia: Norway, Sweden, Denmark, Finland, and Ice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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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웹사이트 Gustavus Adolphus https://www.britanni[...]
[14] 서적 Gustaf II Adolf: Ett 300-årsminne berättadt för ung och gammal : Med öfver 100 illustr. och flera kartor Alb. Bonnier
[15] 서적 Rome and the Counter Reformation in Scandinavia: The Age of Adolphus Gustavus and Queen Christina of Sweden, 1622–1656 https://books.google[...] Brill 1992
[16] 서적 Accounts of an Occupied City – Series 1 https://www.diva-por[...] National Archives of Sweden
[17] 서적 The Lion from the North: The Swedish army during the Thirty Years War Helion & Company 2020
[18] 웹사이트 Swedish Intervention and Conduct in the Thirty Years' War https://scholarworks[...] 2015-09-30
[19] 웹사이트 Gustavus Adolphus: Lion of the North https://warfarehisto[...] 2015-10-15
[20] 간행물 "All the King's Horsemen': The Equestrian Army of Henri IV, 1585–1598
[21] 서적 Encyclopædia Britannica Encyclopaedia Britannica
[22] 서적 The Field Artillery: History and Sourcebook
[23] 서적 The Military Revolution Debate
[24] 웹사이트 Gustav Adolfi Gümnaasium – Ajalugu http://www.gag.ee/in[...] Gustav Adolf Grammar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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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문서 武田、P38 - P42。
[45] 문서 武田、P42 - P43、ウェッジウッド、P202 - P209、P252、P287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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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문서 菊池、P161 - P163、ウェッジウッド、P331 - P355、武田、P43 - P45。
[48] 문서 武田、P48 - P53、ウェッジウッド、P291、入江、P17 - P24、P48 - P52。
[49] 문서 菊池、P158 - P160。
[50] 문서 ブレジンスキー、P39。
[51] 문서 伊藤、P93 - P96。
[52] 문서 菊池、P158 - P167。
[53] 문서 入江、P11 - P13。
[54] 문서 武田、P41、菊池、P132。
[55] 문서 入江、P136 - P139。
[56] 문서 入江、P127 - P134。
[57] 문서 ポミアン、P170 - P192。
[58] 문서 菊池、P191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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