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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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왕은 고구려와 신라에서 사용된 왕보다 높은 칭호이다. 고구려에서는 5~7세기 고고학 자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명왕 시기에 분명하게 사용되었다. 태왕 칭호는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로 고구려 문명권의 최고 지배자를 의미했다. 신라에서는 4세기 말부터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법흥왕과 진흥왕이 사용했으며, 왕과 대왕을 혼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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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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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 (太王) | |
한국사에서의 태왕 | |
중국사에서의 태왕 | |
기타 | |
2. 고구려의 태왕
고구려에서는 군주를 칭하는 독자적인 용어로 '태왕(太王)'을 사용하였다.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후대의 기록이나 중국 측 사서에서 주로 '왕(王)'이나 '대왕(大王)'으로 기록된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10]
실제로 고구려인들이 직접 남긴 다양한 금석문 자료에서는 '태왕' 칭호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5세기에서 7세기에 걸친 여러 고고학 자료에서 '태왕'이라는 표현이 확인되며,[11][12][13] 이는 '태왕'이 단순한 왕의 칭호가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위상을 지닌 고구려 고유의 군주 칭호였음을 시사한다.[17]
고구려의 '태왕' 칭호는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인식했던 고구려인들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광개토대왕릉비와 같은 기록에서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을 하늘의 자손으로 묘사하는데,[1] '태왕'은 이러한 천손(天孫) 사상을 바탕으로 고구려 문명권의 최고 지배자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태왕 칭호가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하며,[18][19][20][21] 고고학적으로는 고국원왕 때부터 사용 증거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2] 이후 여러 왕의 시대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다.
2. 1. 고구려 태왕 칭호의 사용
한국의 사서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중국의 사서에서는 후대나 타국의 시각에서 기록된 경우가 많아 왕(王)과 대왕(大王)이 혼용되어 기술되는 경향이 있다.[10] 그러나 고구려인들이 직접 남긴 금석문 등의 고고학 자료에서는 '태왕(太王)'이라는 칭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증거는 주로 5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나타나며,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광개토왕릉비 (414년)
- 호우총 출토 광개토왕호우 (415년)[11]
- 모두루 묘지명 (5세기 초)
- 중원고구려비 (5세기)
- 태왕릉 출토 벽돌명[12] 및 청동방울 (5세기)
- 서봉총 출토 은합우 (451년)[13]
- 고을덕 묘지명 (7세기, 영류왕을 '건무태왕'으로 칭함)
특히 모두루 묘지명에서는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이라는 표현과 함께 '성왕(聖王)'이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또한 같은 묘지명에서 발견된 '국강상성태왕(國罡上聖太王)'이라는 글자는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14] 마모가 심해 판독이 어려운 중원고구려비는 일반적으로 '고려태왕(國麗太王)'으로 판독하며,[15] 태왕릉 출토 청동방울에는 '신묘년호대왕(辛卯年好大王)'이라고 새겨져 있다.[16]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태왕'은 일반적인 '왕'보다 높은 위상을 지닌 호칭으로 여겨진다.[17] 태왕 칭호가 처음 사용된 시기에 대해서는 미천왕, 고국원왕,[18] 고국양왕,[19] 광개토왕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 기록의 '대왕(大王)'을 모두 '태왕(太王)'으로 해석하여 고구려 고유의 칭호라고 주장하기도 하며,[20] 광개토왕 시기까지는 존칭이나 미칭으로 쓰이다가 장수왕 대부터 공식 군주 칭호로 정착되었다는 견해도 있다.[21] 더 나아가, 광개토왕의 별칭인 '호태왕(好太王)'의 '호(好)'가 미천왕을 '호양왕(好壤王)'[22]이라 칭한 예처럼 태왕을 수식하는 미칭이며,[23] '호왕'으로 기록된 문자명왕,[24] 양원왕,[25] 평원왕[26] 역시 실제로는 '호태왕'이었으나 기록 과정에서 '태(太)' 자가 탈락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고구려는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광개토대왕릉비, 을지문덕 묘지명 등 다양한 유적, 유물, 금석문에서 확인된다. 이들 자료에서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을 하늘(皇天)의 아들이자 해와 달의 아들, 하백의 외손으로 묘사하고 있다.[1] 고구려에서 사용된 태왕, 신왕(神王), 성상(聖上) 등의 칭호는 모두 '왕 중의 왕'을 의미하며, 중원 문명권의 황제(皇帝), 북방 유목 문명권의 카안(可汗)이나 선우(單于)처럼 고구려 문명권의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용어였다. 이는 후대 고려의 해동천자(海東天子) 의식의 기원으로 볼 수 있으며,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던 신라가 법흥왕 때 독자적인 연호와 함께 태왕 칭호를 사용한 점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태왕 칭호의 사용이 명확한 시기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명왕 때이다. 고고학적으로는 을지문덕 묘지명에 언급된 제16대 군주 고국원왕 때부터 태왕 칭호가 등장한다.[2] 제19대 광개토대왕은 '영락(永樂)'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했으며,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일관되게 군주를 태왕으로 칭했다.
삼국사기 기록상 문자명왕(명치호왕), 안원왕(안강상호왕), 안장왕(양강상호왕), 평원왕(평강상호왕) 등의 호칭에 포함된 '호(好)'가 '호태왕'의 약칭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즉, 이들 왕 역시 실제로는 태왕을 칭했으며, '호'는 미칭이었으나 후대 기록 과정에서 '태(太)' 자가 생략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나라의 침입을 격퇴하며 국력을 과시했던 영양왕 시기에도 태왕 칭호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영류왕, 보장왕 대까지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현재까지 고고학 및 문헌 사료를 통해 증명 가능한 고구려 태왕 칭호의 사용 범위는 대체로 제16대 고국원왕부터 제26대 영양왕까지로 볼 수 있다.
태왕 명칭이 확인되는 주요 고구려 금석문은 다음과 같다.
유물/유적 | 제작 연대 | 주요 명문 내용 |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 414년[3] |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등 다수의 태왕 표기 |
호우총 출토 호우 | 415년[4] | 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
모두루 묘지명 | 5세기 초[5] | 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 國罡上聖太王 (국강상성태왕) |
중원 고구려비 비문 | 5세기[6] | (마모 심하나) 國麗太王 (고려태왕) 등으로 판독 |
태왕릉 출토 벽돌 및 청동방울 | 4-5세기[7] | 벽돌: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 청동방울: 辛卯年好大王 (신묘년호대왕) |
서봉총 출토 은합우 (연수원년명 은합) | 451년[8] | 延壽元年 (연수원년) 명문 (장수왕 연호로 추정) |
2. 2. '태왕'과 '대왕'
한국의 삼국사기, 삼국유사나 중국의 사서에서는 후대나 타국의 입장에서 기록된 경우가 많아 왕과 대왕이 혼용되어 기술되는 경향이 있다.[10] 그러나 고구려인들이 남긴 고고학 자료, 특히 5세기에서 7세기에 걸친 자료들에서는 '태왕'이라는 칭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 415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호우총 출토 광개토왕호우,[11] 5세기 초의 모두루 묘지명, 5세기의 중원고구려비, 5세기 태왕릉 출토 벽돌명[12]과 청동방울, 451년 제작으로 추정되는 서봉총 출토 은합우[13] 등이 있다.모두루 묘지명에는 '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이라는 표현이 나타나 '성왕(聖王)'이라는 용어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같은 묘지명에서 '國罡上聖太王(국강상성태왕)'이라는 글자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14] 중원고구려비는 마모가 심해 판독에 여러 의견이 있지만, 대체로 '國麗太王(고려태왕)'으로 읽는다.[15] 태왕릉에서 출토된 청동방울에는 '辛卯年好大王(신묘년호대왕)'이라고 새겨져 있다.[16] 7세기 고구려 유민인 고을덕의 묘지명에서도 영류왕을 '건무태왕'이라고 칭한 사례가 발견된다.
이러한 용례들을 통해 '태왕'은 일반적인 '왕'보다 높은 위상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보인다.[17] 태왕 칭호가 처음 사용된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른데, 미천왕, 고국원왕,[18] 고국양왕,[19] 광개토왕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고구려 금석문에 나타나는 '大王(대왕)' 표기를 모두 '太王(태왕)'으로 해석하여, 태왕이 고구려 고유의 독자적인 군주 칭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20] 광개토왕 시기까지는 존칭이나 미칭으로 사용되다가 장수왕 대에 이르러 공식적인 군주 칭호로 정착되었다는 견해도 있다.[21] 더 나아가, 광개토왕의 다른 칭호인 '好太王(호태왕)'에서 '好'는 미천왕을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불렀던 사례[22]에 비추어 '美'와 같이 태왕을 수식하는 미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23] 이러한 관점에서 문자명왕,[24] 양원왕,[25] 평원왕[26] 등 '호왕'으로 기록된 왕들도 실제로는 '호태왕'을 칭했으나 기록 과정에서 '太'자가 누락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자부심은 다양한 유적, 유물, 금석문 자료에서 확인된다. 광개토대왕릉비나 을지문덕 묘지명 등에서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을 하늘(황천)의 아들이자 해와 달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으로 묘사하고 있다.[1] 고구려에서 사용된 '태왕', '신왕', '성상' 등의 칭호는 모두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이는 중원 문명권의 황제나 유목 문명권의 카안, 선우 등과 같이 고구려 문명권 내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용어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은 이후 고려 시대의 해동천자(海東天子) 세계관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던 신라가 법흥왕 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태왕 칭호를 사용한 것도 고구려 중심의 질서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고구려에서 태왕 칭호가 명확하게 사용된 시기는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명왕 때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태왕 칭호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을지문덕 묘지명에 언급된 고구려 제16대 군주인 고국원왕 때부터이다.[2] 제19대 군주인 광개토대왕은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으며,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군주를 일관되게 '태왕'으로 칭하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문자명왕은 명치호왕(明治好王), 안장왕은 안강상호왕(安崗上好王), 양원왕은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평원왕은 평강상호왕(平崗上好王) 등으로 불렸는데, 이 '호왕(好王)'이라는 표현 역시 실제로는 '태왕'에 미칭인 '호(好)'를 붙인 '호태왕'을 칭했으나 후대의 기록 과정에서 '태(太)'자가 생략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평원왕의 아들인 영양왕 시기는 수나라의 1차 침입을 격퇴하며 국력을 과시했던 전성기였으므로 태왕 칭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학자들은 그 이후의 영류왕, 보장왕 대에도 태왕 칭호가 계속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고학적, 문헌사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고구려 태왕 칭호의 사용은 제16대 고국원왕부터 제26대 영양왕까지로 볼 수 있다.
태왕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주요 고구려 금석문은 다음과 같다.
명칭 | 제작 연대 | 관련 내용 (명문 등) |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 414년[3] | 광개토대왕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등으로 칭하며 태왕 사용 |
호우총 출토 호우 | 415년[4] |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壺杅十) 명문 |
을지문덕 묘지명 | 5세기 초[5] | 고국원왕을 국강상성태왕(國罡上聖太王)으로 칭함 (묘지명 내용 기반 추정) |
중원 고구려비 비문 | 5세기[6] | 고려태왕(高麗太王) 등으로 판독됨 |
태왕릉 출토 벽돌명 및 청동령 | 4~5세기[7] | 벽돌: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청동령: 신묘년호대왕(辛卯年好大王) 명문 |
서봉총 출토 은합우 (연수원년명 은합) | 451년[8] | 연수원년태왕경조(延壽元年太王敬造) 명문 (연수=장수왕 연호 추정) |
2. 3. '호태왕' 칭호
한국의 사서인 《삼국사기》, 《삼국유사》나 중국의 사서에서는 후대 또는 타국의 입장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왕과 대왕이 혼용되어 기술되는 경향이 있다.[10] 그러나 고구려인들이 직접 남긴 5세기에서 7세기 사이의 금석문 자료에서는 '태왕(太王)'이라는 칭호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광개토왕릉비(414년), 호우총에서 출토된 광개토왕호우(415년),[11] 모두루 묘지명(5세기 초), 중원고구려비(5세기), 태왕릉에서 출토된 벽돌명[12]과 청동방울(5세기), 서봉총에서 출토된 은합우(451년)[13] 등이 있다. 7세기 고구려 유민인 고을덕의 묘지명에서도 영류왕을 건무태왕(建武太王)이라 칭한 용례가 발견된다.'태왕'은 일반적인 왕보다 높은 위상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보인다.[17] 이는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인식했던 독자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 광개토대왕릉비, 을지문덕 묘지명 등에서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을 하늘(황천)의 아들이자 해와 달의 아들이며, 하백의 외손이라고 표현하여 신성성을 부여했다.[1] 고구려에서 사용된 태왕, 신왕, 성상 등의 칭호는 모두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이는 중원 문명권의 황제나 유목 문명권의 카안, 선우 등과 같이 고구려 문명권 내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용어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독자적 천하관은 후일 고려 시대의 해동천자(海東天子) 세계관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신라가 법흥왕 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태왕 칭호를 사용한 것도 고구려 중심의 질서 속에서의 움직임으로 해석될 수 있다.
모두루 묘지명에서는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여 '성왕(聖王)'이라는 용어도 함께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묘지명에서 발견된 '국강상성태왕(國罡上聖太王)'이라는 글자는 미천왕 또는 고국원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14]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분분한 중원고구려비는 대체로 '고려태왕(高麗太王)'으로 읽힌다.[15] 태왕릉에서 출토된 청동방울에는 '신묘년호대왕(辛卯年好大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16]
태왕 칭호가 처음 사용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미천왕, 고국원왕,[18] 고국양왕[19], 광개토왕 등이 그 시작으로 거론된다. 일부에서는 고구려 기록에 나타나는 '대왕(大王)'을 모두 '태왕(太王)'으로 해석하여 고구려 고유의 칭호로 보기도 한다.[20] 광개토왕 시기까지는 미칭(美稱)이나 존칭으로 사용되다가 장수왕 대에 이르러 군주의 공식 칭호로 정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21]
'호태왕(好太王)'의 '호(好)' 자에 대한 해석도 있다. 미천왕을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불렀던 점[22]을 근거로, '호'가 '미(美)'와 같이 태왕을 수식하는 미칭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3] 또한 《삼국사기》에서 '호왕(好王)'으로 기록된 문자명왕(명지상호왕),[24] 양원왕(양강상호왕),[25] 평원왕(평강상호왕)[26] 등도 실제로는 '호태왕'으로 칭했으나, 기록 과정에서 '태(太)' 자가 생략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고고학적, 문헌사학적으로 태왕 칭호의 사용이 분명하게 확인되는 시기는 고국원왕부터이다. 을지문덕 묘지명에서 고구려 16대 군주인 고국원왕을 태왕으로 칭한 기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2] 19대 군주인 광개토대왕은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으며,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군주를 '태왕'으로 명확히 칭하고 있다. 장수왕, 문자명왕 시기에도 태왕 칭호는 계속 사용되었다. 평원왕의 아들인 영양왕은 수나라의 1차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전성기를 이끌었으므로 태왕 칭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 영류왕, 보장왕 대에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현재까지 증명 가능한 고구려 태왕 칭호의 사용 범위는 대체로 16대 고국원왕부터 26대 영양왕까지로 여겨진다.
태왕이라는 명칭이 확인되는 주요 고구려 금석문은 다음과 같다.
금석문 자료 | 제작 연대 | 관련 내용 (태왕 칭호) |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 414년 | 태왕 칭호 사용[3] |
호우총 출토 호우 | 415년 | 호태왕 칭호 사용[4] |
모두루 묘지명 | 5세기 초 | 호태성왕, 성태왕 칭호 사용[5] |
중원 고구려비 비문 | 5세기 | 태왕 칭호 사용 (일반적 판독)[6] |
태왕릉 출토 벽돌명 및 청동령 | 4-5세기 | 태왕, 호대왕 칭호 사용[7] |
서봉총 출토 은합우 (연수원년명 은합) | 451년 | 태왕 칭호 사용[8] |
신라에서는 6세기 법흥왕[27]과 진흥왕[28] 시기의 금석문에서 '태왕' 칭호가 사용된 사례가 확인된다. 다만 이 시기에도 왕이나 대왕 칭호와 함께 사용되었다.[29]
3. 신라의 태왕
3. 1. 신라 태왕 칭호의 사용 배경
신라에서 태왕 칭호는 6세기 법흥왕[27]과 진흥왕[28] 시기의 금석문에서만 사용된 기록이 있다. 이 시기에도 왕이나 대왕 칭호와 함께 사용되었다.[29]
4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위상을 세우고자 했던 법흥왕이 스스로를 태왕이라 칭한 것으로 보인다.[9] 진흥왕 역시 태왕 칭호를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 왕들도 태왕 칭호를 계속 사용했는지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던 시기(법흥왕 23년, 536년 ~ 진덕여왕 3년, 649년)를 통해 태왕 칭호 사용과의 연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3. 2. 법흥왕과 진흥왕 이후
6세기 신라의 법흥왕[27]과 진흥왕[28] 시기 금석문에서 '태왕' 칭호가 사용된 용례가 확인된다. 다만 이때에도 왕이나 대왕 칭호와 혼용되었다.[29]
4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신라는, 법흥왕 대에 이르러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위상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법흥왕은 스스로를 태왕이라 칭한 것으로 보인다.[9] 진흥왕 역시 금석문 등을 통해 태왕 칭호를 사용했음이 확인되지만, 그 이후 신라 왕들이 태왕 칭호를 계속 사용했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던 법흥왕 23년(536년)부터 진덕여왕 3년(649년)까지의 기간과 태왕 칭호 사용의 연관성을 통해 이후의 사용 여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참조
[1]
서적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2]
서적
한국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3]
서적,
廣開土王碑原石初期拓本集成,
http://www.palhae.or[...]
[4]
문서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5]
서적
한국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6]
문서
고려태왕, 태왕국토
[7]
문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 신묘년호태왕(무조령구십육)
[8]
전시자료
한국 고대의 Global Pride, 고구려
고려대학교 박물관
[9]
비석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10]
서적
삼국사기
[11]
웹사이트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http://gsm.nricp.go.[...]
[12]
웹사이트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
http://gsm.nricp.go.[...]
[13]
웹사이트
태왕교조합우용삼근육량
http://gsm.nricp.go.[...]
[14]
웹사이트
모두루 묘지명
http://gsm.nricp.go.[...]
[15]
웹사이트
중원고구려비
http://gsm.nricp.go.[...]
[16]
논문
중국 집안박물관 호태왕명문 방울
한국고대사학회
[17]
논문
天皇なる稱號の由來について, 조선고대의 『太王』과 『大王』
[18]
문서
모두루 묘지명에서 보이지 않는 다른 글자를 國罡上聖太王(국강상성태왕)으로 판독한 경우
[19]
문서
고국원왕의 성태왕을 추존호로 본 경우
[20]
논문
고구려태왕호의 제정과 국강형 왕릉입지의 성립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1]
논문
고구려의 태왕호와 태왕가인식의 확립
한국사연구회
[22]
서적
삼국사기
[23]
논문
‘광개토호태왕’ 왕호와 세계관
고구려발해학회
[24]
서적
삼국사기
[25]
서적
삼국사기
[26]
서적
삼국사기
[27]
비석
울주 천전리각석 추명
http://gsm.nricp.go.[...]
[28]
비석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http://gsm.nricp.go.[...]
[29]
웹사이트
울주천전리각석 을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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