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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러시아 전쟁 (1605년-16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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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러시아 전쟁 (1605년-1618년)은 1605년부터 1618년까지 이어진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간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루스 차르국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 폴란드가 개입하면서 시작되었으며, 가짜 드미트리 1세, 2세의 등장과 폴란드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폴란드는 스몰렌스크를 점령하고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러시아의 저항과 스웨덴의 개입으로 인해 전쟁이 장기화되었다. 1618년 데울리노 조약으로 폴란드는 영토를 획득했지만, 양국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쟁은 양국 관계에 오랜 갈등의 씨앗을 뿌렸으며, 이후 역사적, 정치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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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러시아 전쟁 (1605년-1618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쟁 정보
분쟁폴란드-러시아 전쟁 (1605-1618)
전체해당 없음
주요 전투가 벌어진 곳을 표시한 지도
주요 전투가 벌어진 곳을 표시한 지도.
날짜1605년 – 1618년
장소러시아
결과폴란드의 군사적 승리
결과 상세러시아 내 일부 영토 차지
러시아군 격파
결과 상세2러시아의 정치적 승리
결과 상세3폴란드-러시아 연방 창설 실패
러시아의 독립 유지
조약듀리노 조약
교전 세력
교전국 2루스 차르국
스웨덴 제국
지휘관
지휘관 1지그문트 3세 바사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지휘관 2보리스 고두노프
미하일 스코핀 슈이스키
드미트리 포자르스키
병력 규모
병력 1해당 없음
병력 2해당 없음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해당 없음
사상자 2해당 없음

2. 전쟁의 호칭

이 전쟁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는 루스-폴란드 전쟁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러시아는 루스 차르국이라는 국명을 사용하였다.

폴란드 역사에서 이 전란 시기는 일반적으로 ''디미트리아디''라고 불리며,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옹립한 "제1차 디미트리아다"(1605년-1606년), 가짜 드미트리 2세를 옹립한 "제2차 디미트리아다"(1607년-1609년), 폴란드가 정식으로 선전포고한 후에는 폴란드-모스크바 전쟁(1609년-1618년)으로 나뉜다.[1]

러시아 역사에서 이 전쟁은 동란 시대의 사건이다. 폴란드 군과의 전쟁은 폴란드의 침입, 폴란드의 개입 등으로 불리며, 17세기 초엽 폴란드에 의한 개입이라고 해설하는 경우도 있다.

3. 전쟁의 서막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 루스 차르국은 정치적·경제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반 4세 사후, 그의 아들 표도르 1세는 지적 장애가 있었고 후사 없이 사망했다. 이반 4세의 또 다른 아들 드미트리 이바노비치는 1591년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이후 여러 세력이 차르의 자리를 놓고 다툼을 벌였다. 1598년 표도르 1세의 죽음으로 류리크 왕조가 단절되고, 섭정이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차르가 되었다. 고두노프는 온건하고 선의의 정책을 펼쳤지만, 정통성에 대한 의심과 드미트리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그의 통치를 방해했다.

1600년 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레프 사피에하가 이끄는 외교 사절단을 모스크바에 보내 동맹을 제안했지만, 고두노프는 이를 거부하고 리보니아 전쟁의 휴전 조약(얌 자폴스키의 강화조약)을 1622년까지 연장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 지그문트 3세와 귀족들은 루스 차르국의 혼란을 틈타 이익을 얻으려 했다.

한편, 루스 차르국의 귀족들 중 일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정치 체제(황금의 자유)에 매료되어 연합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연합을 통해 외교, 군사, 경제, 종교,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고, 궁극적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루스 차르국 연방을 형성하려는 구상을 했다. 하지만, 이는 가톨릭 교회가 우세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연합이 루스 정교회의 전통을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와 러시아 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인해 큰 지지를 얻지 못했다.

4. 폴란드의 침공 (1605년-1606년)

1605년 11월 크라쿠프에서 가짜 드미트리 1세와 마리나 므니셰흐(예지 므니셰흐의 딸)의 대리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 지그문트 3세가 하객으로 초대받았다. 그러나 새 황후 마리나는 가톨릭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을 거부하여 러시아 백성들의 분노를 샀다. 1606년 5월 8일, 마리나는 4,000명의 시종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차리나(황후)로 즉위했다.

4. 1. 가짜 드미트리 1세의 등장

1601년부터 1603년까지 러시아는 역사상 최악의 흉작과 기근(Russian famine of 1601–1603|러시아 대기근영어)을 겪었다. 이로 인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농촌에서는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고, 난민이 몰려든 수도 모스크바에서도 이 기간 동안 12만 명 이상이 매장되었다. 러시아 사회는 기근으로 인해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한편, 1600년대 대부분의 시기에 지그문트 3세는 연합 내부의 반란, 폴란드와의 동군 연합 해소를 시도하는 스웨덴과의 전쟁, 몰다비아에서의 전쟁 등 연합 내부 문제에 몰두하여 러시아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1603년, 폴란드 국내에 이반 4세의 아들이자 류리크 왕조의 마지막 계승자인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자(가짜 드미트리 1세)가 나타나자, 드미트리의 1591년 죽음을 믿지 않았던 러시아 사람들에게 큰 반향이 일어났다. 곧바로 미하우 비시니오비에츠키, 레프 사피에하, 얀 피오트르 사피에하 등 유력자들과 많은 실력자들의 지원이 거짓 드미트리와 그 지지자들에게 쏟아져 보리스 고두노프 타도를 위한 자금이 모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유력자들은 참칭자 드미트리를 지원하여 러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게다가 폴란드 유력자들과 러시아 친폴란드파(시민주의파) 보야르들은 1600년에 사피에하가 제안한 바와 같이 폴란드-리투아니아-모스크바 연방 형성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지지자들은 거짓 드미트리의 출현을 가톨릭의 영향력을 동쪽으로 확대할 호기로 보고, 가톨릭 우위의 강대국 폴란드-러시아 연합이 탄생하여 남쪽의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할 것을 기대하며 예수회도 거짓 드미트리에게 자금과 교육을 제공했다. 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차원의 공식적인 지원을 거짓 드미트리에게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열렬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언제나 친가톨릭적인 계획을 지원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으며, 이번에도 거짓 드미트리에게 병사 수백 명에 해당하는 4000즈워티의 자금을 개인적으로 제공했다.[1]

왕이 거짓 드미트리를 개인적으로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드미트리의 지지자 중에는 지그문트 왕에 대한 반대자도 있었으며, 거짓 드미트리를 폴란드 왕으로 옹립하려는 활동도 진행되었다. 1604년 6월, 거짓 드미트리는 지원의 대가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스몰렌스크 영토의 절반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계획에 회의적인 사람은 많았고, 지그문트 왕의 정책 대부분에 반대했던 연합국 의회 (세임) 파 유력자 얀 자모이스키는 후에 거짓 드미트리 1세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을 "플라우투스테렌티우스에 필적하는 희극"이라고 묘사했다.[1]

『지그문트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거짓 드미트리』 니콜라이 네프레프


보리스 고두노프는 자칭 드미트리의 출현 소식을 듣고, 이 자의 정체는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라는 도망간 승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의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다. 러시아에서의 고두노프에 대한 지지는 쇠퇴했지만, 그가 거짓 드미트리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소문을 퍼뜨릴수록, 오히려 고두노프 쪽의 지지가 줄어들었다. 러시아의 보야르들 중에는 거짓 드미트리를 지지하는 것을 구실로 차르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을 중단하는 자도 있었다.[1]

드미트리는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소규모 군대를 결성했다. 드미트리의 자금으로 모은 용병과 연합 유력자들이 내놓은 사병으로 이루어진 3,500명 정도의 군대는 1604년 6월, 루스 남부에 침입했다. 고두노프의 적대 세력들, 예를 들어 2,000명 정도의 남부 코사크도 모스크바로 향하는 군대에 합류했다. 거짓 드미트리의 군대는 사기가 낮은 러시아 군대와 두 번 충돌했다. 먼저 노브호로트-시베르스키에서 승리한 거짓 드미트리 군은 체르니히우, 푸티우, 세프스크, 쿠르스크를 차례로 점령했지만, 도브리니치에서의 두 번째 전투에서는 대패하여 군대가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1605년 4월 13일에 차르 고두노프가 급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거짓 드미트리 군은 간신히 재기했다.[1]

고두노프의 급사로, 거짓 드미트리 군의 진군을 막는 큰 장애물은 사라졌다. 러시아 병사들은 드미트리 측으로 돌아섰고, 6월 1일에는 모스크바의 보야르들이 새로 차르로 즉위한 고두노프의 아들 표도르 2세와 그의 어머니를 유폐하고, 나중에 잔혹하게 살해했다. 6월 20일, 거짓 드미트리는 보야르들의 환영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거짓 드미트리는 드미트리의 어머니 마리야 나고야와 "재회"하거나 고두노프에게 추방된 사람들에게 사면을 베풀었다. 7월 21일에는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손으로 차르로 즉위했다. 새로운 총대주교로 지명된 이그나티(이그나티우스)는 키프로스 출신으로 러시아에 파견된 그리스인 성직자였으며, 랴잔 주교였을 때 정교회 성직자로서 처음으로 거짓 드미트리를 차르로 인정한 인물이었다.[1]

1605년 6월 20일 모스크바에 입성한 가짜 드미트리. Klavdiy Lebedev의 작품.

4. 2. 가짜 드미트리 1세의 몰락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최후의 순간" (Karl Wenig, 1879년). 가짜 드미트리는 창문을 통해 도망치려다 떨어져 다리를 다쳤고, 곧 총에 맞아 죽었다. 이후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폴란드를 향해 대포로 쏘아졌다.


가짜 드미트리 1세의 통치는 특별히 눈에 띄는 업적이나 큰 실정은 없었지만, 그 지위는 불안정했다. 많은 보야르(귀족)들은 자신들이 드미트리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중 일부는 차르의 자리를 노리기도 했다. 또한, 궁정 내에서 드미트리가 폴란드에서 데려온 외국인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폴란드의 문화적 영향에 대한 경계심도 높아졌다. 모든 귀족이 평등하다는 폴란드 식의 황금의 자유(귀족민주주의)는 소귀족들에게는 지지를 받았지만, 기존에 큰 권력을 누리던 보야르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드미트리가 농민들에게 부여한 여러 권리들 역시 보야르들의 반발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유력 귀족 바실리 슈이스키 공이 이끄는 보야르들은 드미트리와 친(親)폴란드 세력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드미트리는 동성애자이며, 러시아에 로마 가톨릭과 폴란드 문화를 퍼뜨리고, 러시아를 예수회와 로마 교황에게 팔아넘기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1] 드미트리는 모스크바에 주둔 중인 수백 명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비정규군(용병 및 사병)에게 의존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시내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아 모스크바 시민들의 분노를 샀고, 민중의 지지는 슈이스키에게 쏠렸다.[1]

1606년 5월 17일 아침, 황후 마리나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지 약 2주 후, 반(反) 드미트리 음모를 꾸민 자들이 크레믈린에 들이닥쳤다. 드미트리는 창문을 통해 도망치려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반란자 중 한 명이 드미트리를 총으로 쏴 죽였고, 그의 시신은 거리에 전시되었다가 나중에 화장되어 그 재는 포탄에 담겨 폴란드 방향으로 발사되었다.[1] 차르 가짜 드미트리 1세의 통치는 불과 10개월 만에 끝났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스스로 차르 자리에 올랐고, 드미트리를 따르던 병사 500명 가량은 살해되거나 투옥되거나 국외로 추방되었다.[1]

5. 제2차 폴란드의 침공 (1607년-1609년)

지그문트 3세


1609년, 폴란드 내 제브지드프스키 반란이 종결될 무렵, 러시아에서는 차르 바실리 슈이스키가 가짜 드미트리 2세에 대항하기 위해 스웨덴 국왕 칼 9세와 군사 동맹을 맺었다. 이에 따라 스웨덴에서 파견된 용병 부대와 러시아군 연합군은 가짜 드미트리 2세와 폴란드 귀족들의 군대를 공격했다(데 라 가르디에 원정). 당시 스웨덴은 폴란드와 동군 연합 상태였고, 칼 9세가 국왕이 되기 전에는 지그문트 3세가 스웨덴 왕을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그문트 3세에게 스웨덴 탈환은 숙원이었다.

지그문트 3세는 세임 (국회)에서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를 승인받아 본격적인 러시아 침공에 나섰다. 그는 이 기회를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와 세력권을 동쪽으로 확장하고, 정교회의 근거지인 러시아를 가톨릭화하며(이 때문에 로마 교황도 폴란드를 강력하게 지원했다), 최종적으로는 러시아를 스웨덴 탈환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또한 이 전쟁은 제브지드프스키 반란에 참여했던 반 국왕파 귀족들에게 외적과 싸울 명분을 제공했다. 지그문트 3세는 동방 전쟁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부와 명예가 기다리고 있다고 약속하며, 그들을 대 러시아 전쟁으로 유도했다. 이 해에 출판된 파베우 팔치프스키(Paweł Palczwski)의 저서 『Kolęda moskiewska』는 러시아를 신세계의 인디오 제국에 비유하며, 러시아에도 황금으로 가득 찬 도시가 있고 정복하기 쉽다고 묘사했다.

그리고리 볼루예프(Grigory Voluyev)가 이끄는 러시아군은 스몰렌스크 구출을 위해 서진했고, 주키에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군대는 모스크바 진군을 막기 위해 차료보-자이미셰(Tsaryovo-Zaimishche) 마을에 요새를 쌓았다. 차료보는 6월 24일부터 폴란드군에게 포위되었으나, 러시아군은 장기전을 준비할 물과 식량이 부족했다. 보르에프는 슈이스키의 동생 드리트리 슈이스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슈이스키 군은 야코브 드 라 가르디의 스웨덴군 원군을 얻어 구원에 나섰으나, 클루시노로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주키에프스키는 슈이스키의 원군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차료보에 도착하기 전에 요격하기 위해 밤중에 차료보 포위를 풀었다.

클루시노 전투에서 폴란드 후사르의 진형


1610년 7월 4일 클루시노 전투에서 헤트만 주키에프스키 휘하의 후사르 기병 5,000기는 수적으로 우세한 35,000~40,000명의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 경이적인 대패는 러시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바르샤바세임에 차르 슈이스키를 데리고 온 주키에프스키. 그 앞에는 지그문트 3세" 얀 마테이코, 캔버스에 유화.


클루시노에서의 대패 소식에 슈이스키 지지 세력은 거의 사라졌다. 주키에프스키는 차료보에 농성하던 소수의 러시아군에게 항복과 브와디스와프 왕자에 대한 충성을 설득했다. 1610년 8월, 러시아 보야르들은 지그문트 3세의 승리가 확실하며, 정교회로 개종한다면 브와디스와프가 차기 차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러시아 두마(귀족 회의)는 슈이스키를 차르 지위에서 끌어내리기로 결의했다. 슈이스키와 가족들은 체포되었고, 슈이스키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승이 되었으며, 감시를 받았다. 이후 그는 전리품처럼 바르샤바로 보내져 고스티닌에서 죽었다.

"바르샤바의 세임에서 슈이스키" 얀 마테이코, 캔버스에 유화.


슈이스키 폐위 후, 주키에프스키와 가짜 드미트리 2세는 별도의 군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는 긴장 상태였고, 친폴란드파, 반폴란드파, 스웨덴파, 국내파 등 여러 보야르들이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러시아 병사들과 서민들은 이들이 침략군인지 해방군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결국 친폴란드파가 주도권을 잡아 폴란드군이 모스크바에 입성했고, 보야르들은 주키에프스키에게 러시아를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모스크바 크레믈린에는 알렉산데르 고시에프스키(Aleksander Gosiewski)가 이끄는 폴란드군이 주둔했다.

1610년 7월 27일, 보야르들과 주키에프스키는 지그문트 3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를 새 차르로 인정하는 대신, 러시아 보야르들에게 폴란드 슐라흐타와 같은 특권을 부여하는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주키에프스키는 스몰렌스크에 있던 지그문트 3세의 속내를 알지 못했다. 주키에프스키와 가짜 드미트리 2세는 불편한 동맹 관계였고, 가짜 드미트리 2세는 폴란드 궁정에서 영향력을 잃었으며, 주키에프스키는 그를 모스크바에서 몰아내려 했다.

주키에프스키는 15세의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만들기 위해 공작을 시작했다. 이전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브와디스와프 왕자를 차르로 초청하여 차르의 전횡을 끝내려는 보야르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주키에프스키의 노력으로 친폴란드파 보야르들(표도르 므스티슬랍스키, 바실리 갈리치네(Vasily Galitzine), 표도르 셰레메테프(Fyodor Sheremetev), 다닐 메제츠키(Daniil Mezetsky), 바실리 텔레프뇨프(Vasily Telepnyov), 토미워 야고프스키)이 주도권을 잡았고, 대다수 보야르들은 브와디스와프가 정교회로 개종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점령한 러시아 도시를 반환한다면 그를 지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슐라흐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지그문트 3세는 왕자의 개종을 완강히 반대했다. 이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러시아 연방 국가 계획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분노한 보야르들은 브와디스와프 지지를 철회하고, 바실리 고리친, 미하일 1세, 가짜 드미트리 2세 등 여러 후보를 지지하며 분열했다. 주키에프스키는 지그문트 3세의 동의 없이 보야르들과 약속을 맺고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선출시켰다.

브와디스와프가 차르가 된 후, 가짜 드미트리 2세는 투쉬노에서 칼루가(Kaluga)로 도망쳤으나, 그의 지위는 불안정했다. 1610년 12월 11일, 가짜 드미트리 2세는 카시모프 칸국의 왕자 표트르 우르소프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아내 마리나 므니셰크는 이반 드미트리예비치를 임신한 채 도망쳤고, 1614년에 죽을 때까지 러시아 내전의 중요한 인물로 남았다.

브와디스와프는 아버지 지그문트 3세의 반대에 직면했다. 1610년 11월, 주키에프스키가 지그문트 3세와 회견하러 스몰렌스크로 간 사이, 지그문트 3세는 자신이 차르가 되려는 속셈을 드러냈다. 러시아인들은 그의 가톨릭화 정책에 반발했다. 주키에프스키는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옹립하기로 약속했기에 지그문트 3세의 즉위는 불가능함을 알았지만, 지그문트 3세는 자신이 러시아에서 인기가 있다고 확신했다. 결국 주키에프스키는 폴란드로 돌아갔고, 지그문트 3세는 아들을 차르로 세우되 자신이 섭정으로서 러시아를 지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보야르들에게 브와디스와프와 자신에게 동시에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보야르들의 반발로 폴란드 지지는 약화되었고, 브와디스와프의 실권 장악은 어려워졌으며, 폴란드-러시아 전쟁이 재개되었다. 긴장이 고조되자 지그문트와 브와디스와프는 모스크바를 떠났고, 친폴란드파 보야르들은 입장을 바꾸면서 크레믈린에 고립된 폴란드군은 적대감의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인들에게 폴란드에 저항할 것을 호소했다. 총대주교 게르모겐은 1610년 말 반 폴란드 봉기를 촉구하는 편지를 각지에 보냈고, 프로코피 랴푸노프(Prokopy Lyapunov)가 이끄는 제1차 의용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하여 얀 피오트르 사피에하 휘하의 폴란드군과 충돌했다.

한편, 브와디스와프가 차르가 된 후에도 스몰렌스크 포위전은 계속되었다. 지그문트 3세는 스몰렌스크에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했지만, 러시아군은 거부했다. 1610년 12월, 폴란드군은 대규모 터널 굴착 작전을 펼쳤지만, 외곽만 파괴하고 내곽은 손상시키지 못했다. 폴란드군의 포격으로 성벽 일부가 무너지자 브라츠와프(Braclaw) 보이보드는 돌격을 명령했지만, 러시아군은 증강된 병력으로 격퇴했다.

5. 1. 가짜 드미트리 2세의 등장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살해된 후, 또 다른 드미트리 참칭자(가짜 드미트리 2세)가 등장했다.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다시 루스 차르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가짜 드미트리 2세는 군대를 이끌고 모스크바 근처 투시노에 진영을 구축하고, 여러 도시를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1] 그는 루스 차르국의 유력 귀족 표도르 로마노프(훗날의 모스크바 총대주교 필라레트)를 포로로 잡아 투시노의 대주교로 임명하기도 했다.[1]

5. 2. 폴란드-러시아 전쟁의 시작

160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 지그문트 3세는 루스 차르국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결정했다. 그는 세임 (국회)에서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를 승인받아 본격적인 러시아 침공에 나섰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 확장과 가톨릭 세력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

지그문트 3세는 러시아를 신세계의 인디오 제국에 비유하며, 황금이 가득하고 정복하기 쉬운 곳으로 묘사했다. 또한, 러시아 보야르들은 지그문트 3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에게 차르 자리를 제안하며 참전을 약속했다.

과거 러시아 내정에 소극적이었던 지그문트 3세는 1609년에 적극적인 개입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그의 참전으로 가짜 드미트리 2세를 따르던 폴란드 병사들 중 다수가 이탈했고, 가짜 드미트리 2세는 세력을 잃고 코스트로마로 도망갔다.

6. 폴란드-러시아 전쟁 (1609년-1618년)

스몰렌스크 함락 후 1612년부터 1617년 사이, 러시아-폴란드 간의 국경은 상대적으로 조용했으나, 공식적인 휴전협정은 체결되지 않았다. 세임은 지그문트 3세가 모스크바를 지키지 못한 것을 질책했고, 군사비 부담에 대한 저항으로 지그문트 3세는 군사비를 거의 모을 수 없었다. 폴란드 정규군은 콘페데라치아(konfederacja; 연맹)를 결성해 왕에게 대항했다.

군인들의 콘페데라치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역사상 가장 크고 타락한 것으로, 1612년부터 자국 영내를 약탈하다가 1614년 5월 17일 로하틴 전투에서 패배했다. 남은 멤버들은 급료를 받기 위해 저항을 계속했고, 주도자 얀 카르바츠키는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에게 체포되어 리비우에서 처형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오스만 영토 침입에 대해 항의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을 희망을 잃었다.

러시아도 대혼란이 계속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약점을 이용할 힘이 없었다. 1613년 2월 21일, 젬스키 소보르는 미하일 로마노프를 새로운 차르로 선출했다. 그의 아버지 필라레트는 1619년 모스크바 총대주교에 취임했다. 로마노프가는 유력한 보야르였고,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는 미하일의 할머니의 자매였다.

코스트로마의 이파티예프 수도원에서 차르 즉위를 꺼리는 미하일 로마노프와 어머니에게 차르 즉위를 간청하는 사람들


새 차르 미하일에게도 반대 세력이 많았다. 마리나 므니셰크는 아들 이반을 차르로 세우려 했고, 유력한 보야르들은 권력 다툼을 벌였다. 스웨덴은 잉그리아 전쟁을 계속했고, 칼 필립 공을 차르로 세우려 했으나, 1617년 스톨보보 조약으로 잉그리아 등을 할양받고 대혼란에서 손을 뗐다.

양국 내란 동안 폴란드 용병 집단 리소프치키는 활발하게 활동했다. 1615년 지도자 알렉산데르 리소프스키는 러시아를 침입, 브랸스크를 포위하고 드미트리 포자르스키 군을 격파했다. 리소프스키는 벨료프, 리흐빈(현재 체칼린)을 불태우고 1616년 가을까지 러시아 국경에 머물렀다. 리소프스키는 1616년 10월 11일 병사했지만, 리소프치키는 쿠르스크를 빼앗는 등 러시아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6. 1. 폴란드의 승리 (1609년-1610년)

1609년, 폴란드의 주키에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은 러시아 서부의 스몰렌스크를 포위했다.스몰렌스크 공방전[1] 주키에프스키는 이 전투에 반대했지만, 왕명에 따라 참전했다. 스몰렌스크는 1514년 러시아가 리투아니아로부터 빼앗은 중요 도시였고, 미하일 셰인이 이끄는 1,000명 이하의 병력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 차르 보리스 고두노프가 1602년 완성한 대규모 성곽 보수공사 덕분에, 스몰렌스크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 있었다.

폴란드로부터 스몰렌스크를 방어하는 러시아군 보리스 초리코프


포위는 장기전이 되었고, 폴란드군은 포격, 터널 굴착, 토루 쌓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성벽을 공격했다. 그러나 20개월이 지나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다.

스몰렌스크의 지그문트 3세, 톰마소 돌라벨라.


한편, 헤트만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가 이끄는 부대는 급료 미지급으로 인한 병사들의 반란으로 퇴각했다. 왕자 브와디스와프가 원군과 함께 도착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610년 모스크바의 폴란드 작전


스몰렌스크를 포위한 폴란드 진영에서는 다양한 전략적, 정치적 구상이 난무했다. 제브지도프스키의 난 참가자들은 여전히 지그문트 3세와 대립하며, 그를 폐위시키려 했다. 주키에프스키는 러시아와의 평화적 연합을 추구했지만, 지그문트 3세는 무력 정복과 가톨릭화를 고집했다.

1610년 7월 27일, 주키에프스키는 러시아 보야르들과 협상하여,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인정하는 대가로 러시아 보야르들에게 광범위한 특권을 부여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1610년 10월 8일 폴란드군은 모스크바에 입성했고, 보야르들은 주키에프스키에게 러시아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지그문트 3세는 브와디스와프의 러시아 정교회 개종에 반대했고,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모스크바 연합 국가 계획을 파탄 냈다. 분노한 보야르들은 브와디스와프 지지를 철회하고, 다른 후보들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주키에프스키는 보야르들과 약속하여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선출했지만, 가짜 드미트리 2세는 칼루가로 도망쳤다가 1610년 12월 11일 살해되었다.

thumb헤르모겐(게르모겐)]]

차르가 된 브와디스와프는 아버지 지그문트 3세의 반대에 직면했다. 지그문트 3세는 자신이 차르가 되기를 원했고, 이는 러시아인들의 반발을 샀다. 주키에프스키는 지그문트 3세를 설득하지 못하고 폴란드로 돌아갔다.

지그문트 3세는 결국 아들을 차르로 인정하고, 자신이 섭정으로서 러시아를 지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보야르들은 더욱 반발했고, 폴란드에 대한 지지는 약해졌다. 브와디스와프는 실권을 잡지 못했고, 전쟁이 재발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헤르모겐(게르모겐)은 러시아인들에게 폴란드에 대한 저항을 촉구했다.[1] 1611년 러시아인들은 반 폴란드 봉기를 일으켰고, 모스크바 시외에서 폴란드군과 충돌했다.

스몰렌스크를 구원하는 폴란드 군대. 율리우시 코사크 작품.


1611년 6월 2일, 20개월에 걸친 포위 끝에 폴란드군은 스몰렌스크를 함락했다. 폴란드군은 탈주병의 안내로 하수구를 통해 성벽을 폭파했고, 러시아군은 대성당에서 자폭했다. 미하일 셰인은 포로가 되었지만, 러시아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6. 2. 폴란드의 모스크바 점령 (1610년)

1610년 10월 8일, 폴란드군이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친폴란드파 보야르들이 성문을 열고 폴란드군을 맞이하며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에게 무정부 상태에서 러시아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모스크바의 크렘린에는 알렉산데르 코르빈 고세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병사들이 주둔했다.[1] 이에 앞서 7월 27일 보야르들과 주키에프스키 사이에서 지그문트 3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를 새로운 차르로 인정하는 대가로 러시아 보야르들에게 폴란드의 슐라흐타와 같은 광범위한 특권을 부여한다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주키에프스키는 스몰렌스크에 머물고 있는 지그문트 3세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주키에프스키와 가짜 드미트리 2세는 처음에는 탐탁지 않았던 동맹 관계에서 점차 거리를 두게 되었다. 가짜 드미트리 2세는 폴란드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주키에프스키는 결국 드미트리를 모스크바에서 몰아내는 공작을 펼쳤다. 또한 주키에프스키는 15세의 브와디스와프를 다음 차르로 선출하도록 공작을 시작했다. 대혼란 초기에 자유주의적인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브와디스와프 왕자를 차르로 초청하여 당시 차르의 전횡을 끝내려 보야르들이 움직인 적이 있었다.

주키에프스키의 공작으로 친폴란드파 보야르들(크냐지 표도르 무스티슬라프스키, 바실리 갈리친, 표도르 셰레메테프, 다니일 메제츠키, 디야크 바실리 테레프뇨프, 토미워 와고프스키)이 주도권을 잡았고, 보야르 대다수는 브와디스와프가 정교회로 개종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전쟁으로 점령한 러시아 도시를 반환한다면 그를 차르로 지지했다.

가톨릭 신자인 지그문트 3세는 왕자의 개종에 반대했다. 이 사건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러시아 연방 계획은 무산되기 시작했다. 지그문트 3세의 반대에 분노한 보야르들은 브와디스와프 지지에서 손을 떼고, 바실리 골리친,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로마노프(브와디스와프와 마찬가지로 15세), 혹은 가짜 드미트리 2세를 지지하는 등으로 갈라졌다. 주키에프스키는 빠르게 대응하여 지그문트 왕의 동의 없이 보야르들과 약속을 체결하여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선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선거 후 가짜 드미트리 2세는 모스크바 근교 투시노 진영에서 칼루가로 도망쳤다. 1610년 12월 11일 술에 취한 가짜 드미트리 2세는 그를 지지하는 보야르들 중 그가 이전에 채찍질한 적이 있는 카시모프 칸국의 왕자 표트르 울소프에 의해 사살되었다. 마리나 므니셰바는 도망쳤지만, 이때 그녀는 가짜 드미트리 2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후계자" 이반 드미트리에비치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녀는 1614년 사망할 때까지 러시아 내전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차르가 된 브와디스와프는 아버지 지그문트 3세의 반대에 직면했다. 주우키에프스키가 1610년 11월 스몰렌스크로 돌아왔을 때, 지그문트 3세는 자신이 차르가 되겠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다수는 지그문트 3세에게, 특히 그가 러시아의 가톨릭화를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 반발했다.

주키에프스키는 곤란한 입장에 놓였다. 그는 보야르들과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세우는 것으로 약속했으며, 러시아 전역에서 인기가 없는 지그문트 3세의 즉위에 보야르들은 반대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주키에프스키는 지그문트 3세에게 설명해야 했지만, 지그문트 3세는 러시아 서부 정복 과정에서 자신의 러시아 내 인기를 확신하고 있었다. 주키에프스키는 결국 지그문트에게 실망하여 폴란드로 돌아갔다.

지그문트 3세는 아들을 차르로 인정하고,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으로서 자신이 러시아를 지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보야르들에게 브와디스와프 왕자에게 복종하는 자는 자신에게도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보야르들은 더욱 반발했고, 폴란드에 대한 지지는 약해졌다. 브와디스와프는 러시아의 실권을 잡을 수 없었고, 폴란드와 러시아의 전쟁이 재발했다.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지그문트 3세와 브와디스와프는 안전을 위해 모스크바를 떠났고, 친 폴란드파 보야르들이 입장을 바꾸면서, 크렘린에 남은 소수의 폴란드군 부대는 고립되어 적대심의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인들에게 폴란드에 대한 저항을 촉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헤르모겐(게르모겐)은 1610년 말, 러시아 각지에 반 폴란드 봉기와 정교 수호를 호소하는 회람을 보냈다.[1] 헤르모겐에 호응하여 랴잔의 프로코피 리아푸노프 등이 결성한 반 폴란드 러시아인 군대(제1차 의용군)는 모스크바로 진격하여, 얀 표트르 사피에하 휘하의 모스크바 시외 폴란드군과 충돌했다.

6. 3. 전쟁 재개 (1611년)

1611년 모스크바에서 폴란드군 주둔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개입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606년에도 모스크바 시민들은 가짜 드미트리 1세의 부하들인 폴란드군에 맞서 싸웠지만, 폴란드군의 지배가 계속되자 다시 봉기한 것이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탄약고를 점령했지만, 폴란드 부대는 첫 번째 공격을 격퇴했다. 이 전투로 인해 불길이 치솟아 모스크바의 일부가 불탔다. 같은 해 7월,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모스크바 시내의 봉기는 폴란드군이 갇힌 크렘린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폴란드군은 모스크바 시민들의 공격에 맞서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인물이었던 모스크바 총대주교 헤르모겐(게르모겐)에게 공격 중단을 요구하는 성명에 서명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헤르모겐은 이를 거부하고 투옥되었으며, 다음 해인 1612년 굶주림으로 사망했다.[1]

한편, 1611년 6월 2일, 20개월간의 스몰렌스크 공방전 끝에 폴란드군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던 시민들과 식량 부족으로 한계에 다다른 러시아군은 결국 무너졌다. 폴란드군은 러시아군 탈주병 안드레이 데디신의 안내를 받아 성벽 바로 아래를 통과하는 하수구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성곽의 결정적인 약점을 파악했다. 6월 13일, 하수구에 설치된 폭탄이 폭발하면서 성벽이 크게 붕괴되었고, 같은 날 스몰렌스크는 함락되었다. 남은 러시아군은 성모 승천 대성당으로 피신하여 적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죽는 것을 택하고 화약을 폭발시켜 대성당과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스몰렌스크 함락은 러시아에게 큰 비극이었지만, 20개월 동안 포위를 견뎌낸 지휘관 미하일 셰인은 훗날 러시아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셰인은 포로로 잡혀 9년간 폴란드에 억류되었다.

6. 4. 국민 의용군과 모스크바 해방 (1612년)

1610년 10월 8일, 폴란드군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7월 27일 보야르들과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는 지그문트 3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를 새로운 차르로 인정하는 대가로 러시아 보야르들에게 폴란드의 슐라흐타와 같은 광범위한 특권을 부여한다는 조약을 체결했다.[1] 그러나 지그문트 3세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주키에프스키는 가짜 드미트리 2세와 거리를 두었고,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세우기 위한 공작을 펼쳤다. 보야르들 중 친폴란드파가 주도권을 잡았고, 브와디스와프가 정교회로 개종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점령한 러시아 도시를 반환한다면 그를 차르로 지지했다.[1]

지그문트 3세는 왕자의 개종에 반대했고, 이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모스크바 연합 국가 계획은 파탄났다. 보야르들은 분열되었고, 주키에프스키는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선출하는 데 성공했다. 가짜 드미트리 2세는 칼루가로 도망쳤으나, 1610년 12월 11일 살해되었다. 브와디스와프는 아버지 지그문트 3세의 반대에 직면했다. 지그문트 3세는 자신이 차르가 되려 했고, 이는 러시아인들의 반발을 샀다. 주키에프스키는 지그문트 3세를 설득하지 못하고 폴란드로 돌아갔다.[1]

지그문트 3세는 타협하여 아들을 차르로 인정하고, 자신이 섭정으로서 러시아를 지배하기로 했다. 보야르들은 더욱 반발했고, 폴란드에 대한 지지는 약해졌다. 브와디스와프는 실권을 잡을 수 없었고, 전쟁이 재발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헤르모겐(게르모겐)은 반 폴란드 봉기를 호소했고, 프로코피 리아푸노프 등이 제1차 의용군을 결성하여 모스크바로 진격했다.[1]

1611년 모스크바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폴란드 군은 크렘린에 포위되었다. 헤르모겐은 폴란드 군의 요구를 거부하고 투옥되어 1612년 굶어 죽었다.[1] 1611년 6월 2일, 스몰렌스크는 폴란드 군에 함락되었다.

1611년 가을, 쿠지마 미닌은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제2차 의용군을 제창했다. 드미트리 포자르스키 공작이 군을 이끌었고, 1612년 1월 폴란드 군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철수했다. 제2차 의용군은 모스크바에 도달했고, 9월 1일 얀 카롤 호드키에비치가 이끄는 폴란드 군과 충돌했다. 폴란드 군은 패배했고, 크렘린 내 폴란드 군은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1612년 11월 1일, 폴란드 군은 항복했고, 11월 7일 모스크바에서 철수했다.

6. 5. 새로운 휴전 (1612년-1617년)

스몰렌스크 함락 후 1612년부터 1617년 사이, 러시아-폴란드 간의 국경은 잠시 조용해졌지만, 공식적인 휴전 협정은 아직 체결되지 않았다. 세임(의회)은 지그문트 3세가 모스크바를 지켜내지 못한 것을 책망했다. 그들은 군사비 부담이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것에 왕에게 세금을 내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고, 저항은 더욱 강해져 지그문트 3세는 얼마 안 되는 군사비밖에 모을 수 없게 되었다. 폴란드 정규군은 이에 반란을 일으키거나, 귀족 등에게 인정된 저항권을 행사하여, 콘페데라치아(konfederacja; 연맹)를 소집하여 단결해 왕에게 대항했다.

이때 군인들이 결성한 "konfederacja rohaczewska"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역사상 가장 크고 타락한 콩페데라치아였으며, 1612년부터 자국 영내를 약탈하며 다니다가, 1614년 5월 17일 로하틴 전투에서 가장 저항적인 일파가 패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콩페데라치아의 나머지 멤버들은 국가로부터 급료를 받고 저항을 멈추었으며, 주도자였던 얀 카르바츠키(Jan Karwacki)는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에게 붙잡혀 족쇄에 묶여 코니에츠폴스키의 스승이었던 주우키에프스키에게 보내져, 리비우에서 처형되었다. 게다가, 지그문트 3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도 폴란드령 우크라이나의 우크라이나 코사크가 오스만 영토를 침입했다는 이유로 항의를 받았다. 이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대러시아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을 희망도 잃게 되었다.

러시아 역시, 대혼란이 가라앉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가 지속되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약한 틈을 타 공격할 힘이 없었다. 1613년 2월 21일, 귀족, 성직자, 서민으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 젬스키 소보르는 17세가 된 미하일 로마노프를 새로운 차르로 선출했다. 그의 아버지이자, 한때 유력한 보야르였으며 대혼란 중에도 권력 다툼에 참여했던 표도르 (당시에는 필라레트)는 1619년, 게르모겐 사후 공석이 된 모스크바 총대주교에 취임했다. 로마노프가는 유력한 보야르였으며, 이반 4세의 아내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는 미하일의 할머니의 자매였다.

이러한 강력한 배경이 있었지만, 새로운 차르 미하일에게 반대 세력도 많았다. 마리나 므니셰크는 여전히 아들 이반을 차르의 자리에 앉히려고 움직였고, 동남부 코사크의 지지를 얻기 위해 움직였다 (1614년에 거점인 아스트라한에서 쫓겨났고, 나중에 붙잡혀 옥사했다). 유력한 보야르들은 권력 다툼에 분주했고, 미하일을 차르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획책했다. 북서부 노브고로드를 점령한 스웨덴도 무력 개입 (잉그리아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고, 노브고로드에서 차르로 선출된 칼 필립 공을 명목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차르로 만들려고 했지만, 폴란드 왕자 브와디스와프만큼의 지지도 얻지 못하고, 1617년 스톨보보 조약을 맺어, 노브고로드를 포기하는 대신 잉그리아 등을 할양받고 대혼란에서 손을 뗐다.

양국 모두 내란이 계속되는 동안, 작은 무장 세력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폴란드 용병 집단 리소프치키는 1612년 시점에서는 스몰렌스크를 지켰으며, 정규군이 연맹을 맺어 반란을 일으키는 동안에는 러시아의 침입으로부터 폴란드를 지켰다. 그러나 1615년, 지도자 알렉산데르 리소프스키는 불량배들을 모아 여섯 개의 부대를 편성하여 러시아를 침입했다. 그는 브랸스크를 포위했고, 유리 샤호프스코이 공이 이끄는 구원군을 칼라체프 부근에서 격파했다. 그는 드미트리 포자르스키가 이끄는 대군의 선봉을 여러 번 격파했지만, 포자르스키는 공격 대신 방어에 들어가 진지를 굳혔다.

리소프스키는 벨료프, 리흐빈(현재의 체칼린)을 불태우고, 페레미실을 함락시키고, 북쪽으로 전진하여 르제프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더 북쪽의 카신으로 진격하여 토르조크를 불태우고,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지 않은 채 다량의 약탈품을 가지고 폴란드로 돌아갔다. 리소프스키와 그의 군대는 1616년 가을까지 러시아 국경에 머물렀다. 리소프스키는 그 해 10월 11일에 갑작스럽게 병사했지만, 그의 군대 리소프치키는 여전히 러시아에게 위협이었다. 1616년에는 쿠르스크를 빼앗았고, 러시아군을 볼호프에서 격파했다.

6. 6. 마지막 단계 (1617년-1618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세임은 대규모 군사 작전을 위한 자금 조달에 찬성표를 던졌다. 지그문트 3세와 브와디스와프는 러시아 차르 자리를 얻기 위해 1617년 4월 6일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브와디스와프는 명목상의 지휘관이었으며, 전군 지휘는 헤트만 호드키에비치가 맡았다. 10월, 도로고부시와 뱌지마는 함락되었고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인정했다. 그러나 뱌지마에서 모자이스크 사이에서 공세를 펼치는 러시아군에게 대패하여 반격하여 승리하고 모스크바로 진격하려던 호드키에비치의 계획은 실패했다.

브와디스와프는 모스크바로 진격할 충분한 군대가 없었고, 러시아인을 지지하던 폴란드인의 지원도 완전히 사라졌다. 브와디스와프의 침입에 대해 스몰렌스크 시민은 도시를 점령하고 있던 폴란드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폴란드군은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싸웠다. 러시아군은 스몰렌스크 탈환을 위해 포위를 감행했지만, 용병 집단 리소프치치가 이 지역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했고, 폴란드군은 구원받았다. 1618년, 브와디스와프는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페트로 코나셰비치 사하다치니 군대의 도움을 받았다. 사하다치니 군은 푸티블, 르이리스크, 쿠르스크, 리브니, 옐레츠 등을 함락시키고 1618년 9월 20일 모스크바 부근에서 브와디스와프의 군대와 합류하여 9월 말 모스크바를 포위했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의 용병군이 급료 지불을 요구하며 공격에 반대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대한 총공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모스크바 포위전은 실패했다. 이후 휴전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어, 1618년 데울리노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7. 전쟁의 영향

Смутное времяru로 불리는 러시아의 대혼란 시기에 벌어진 이 전쟁은 양국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618년 데울리노 조약을 통해 스몰렌스크를 포함한 일부 영토를 획득했지만,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이는 폴란드의 황금기 절정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과도한 팽창으로 인한 부작용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반면, 루스 차르국은 이 전쟁을 통해 로마노프 왕조를 세우고 국가적 통합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지만, 오랜 전쟁으로 인해 사회,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1] 특히, 쿠지마 미닌과 드미트리 포자르스키가 이끄는 국민군이 1612년 모스크바를 해방시킨 사건은 러시아 민족 의식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5년 러시아에서 "폴란드 침략군으로부터 모스크바 해방 기념일"(11월 4일)을 "국민 통합의 날"로 부활시킨 것은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전쟁은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간의 오랜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후 1632년 스몰렌스크 전쟁이 발발하고, 1667년에는 러시아가 스몰렌스크를 회복하는 등 양국 간의 분쟁은 계속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이 전쟁은 강대국 간의 세력 다툼과 팽창주의가 주변 국가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폴란드의 팽창 정책은 러시아의 혼란을 야기했고, 이는 결국 양국 모두에게 큰 피해를 가져왔다. 또한, 외세의 개입과 내정 간섭이 어떻게 국가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8. 현대적 유산

러시아와 폴란드 전쟁 및 가짜 드미트리들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폴란드와 러시아의 장래 통치자들 및 정치가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이 전쟁을 취합하여 정리한 역사 이야기는 러시아와 폴란드 양쪽에서 모두 인기를 얻었다.

폴란드에서는 이 전쟁을 폴란드 황금시대의 절정기로 기억하며, 나폴레옹과 아돌프 히틀러조차 굴복시키지 못한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통치했던 때를 그 정점으로 간주한다.

러시아의 새로운 왕조가 된 로마노프 왕가는 승자가 쓴 역사가 정치의 강력한 도구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어, 러시아인이 가짜 드미트리들을 만들어 낼 때의 역할, 폴란드 및 스웨덴과 보신을 위해 맺은 협력 관계, 실패한 3개국 연방 즉 폴란드-리투아니아-러시아 연방(이 3개국 연방 구상 자체는 1654년 재발된 전쟁에서 다시 부상하게 되었다. 이 상황은 로마노프 가문이 3개국의 정점에서 군림한다는 것)에 저항하는 것 등은 신중하게 감추었다.

후세 러시아 역사가는 러시아 정교 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야만적인 침략을 벌인 폴란드와 예수회의 동맹에 대해 이 시대 러시아인들이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영웅적으로 일어났다고 극찬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와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오페라보리스 고두노프” 등은 이 역사관에 연유한 것이다. 러시아 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에서도 이 전쟁은 프로파간다로써 사용되었고, 특히 폴란드가 혁명에 간섭했던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때에는 대대적으로 사용되었다. 전쟁 기간 폴란드에서 강권적인 지배를 지속한 정치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도 이 전쟁을 신생 폴란드를 위한 프로파간다로 사용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2005년 가을 유일한 축일이었던 러시아 혁명기념일(11월 7일)을 폐지하고, 러시아 혁명 후에 폐지되었던 “폴란드 침략군으로부터 모스크바를 해방한 기념일”(11월 4일)을 “국민 통합의 날”이란 명칭으로 부활시켰다. 이것은 모스크바 해방과 대동란의 종결, 침략군의 격퇴에 이르게 한 국민의 봉기를 기념하는 것이었고, 차르 혹은 총주교도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를 통합해 수호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2007년 러시아에서 역사 픽션 대작 영화 1612년이 공개되어, 러시아인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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