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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그릴파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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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츠 그릴파르처는 오스트리아의 극작가로, 19세기 중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법학을 전공하고 재무성에서 공직 생활을 하면서 극작 활동을 병행했다. 초기에는 《선조의 여인》, 《사포》, 《황금 양모》 등의 작품을 통해 명성을 얻었으며, 역사 비극과 개인적인 고뇌를 다룬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적 요소를 결합했으며, 오스트리아의 역사와 사회를 반영했다. 만년에는 《톨레도의 유대 여인》, 《합스부르크가의 형제 싸움》, 《리부사》 등 사후에 발견된 작품들이 호평을 받았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국민적인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기념물, 문화 행사 등이 존재한다.

2. 생애와 경력

프란츠 그릴파르처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요제프 2세 시대의 요제피니즘 자유주의 전통을 지지하는 인물이었으며, 프란츠 역시 이러한 영향을 받았다.[5] 아버지의 뜻에 따라 1807년 빈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으나, 180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811년 대학 과정을 마친 그는 생계를 위해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하다가, 1813년 오스트리아 황실 국고(Hofkammer|호프캄머de)의 서기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5] 이후 재무부 등을 거쳐 1832년에는 황실 기록 보관 책임자가 되었으며, 1856년 은퇴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는 공직을 단지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여겼으며,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5]

1816년 부르크 극장의 감독 요제프 슈라이포겔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극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1817년 첫 작품 『선조의 여인 망령』이 성공을 거두면서 이름을 알렸다. 이후 공무원 생활과 작가 활동을 병행하며 여러 희곡들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시기 그는 남동생과 어머니의 연이은 자살이라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으며, 요제프주의 신념에 따른 교황 비판 시 발표로 인해 프란츠 1세 황제의 눈 밖에 나 작품이 검열 대상이 되는 등 사회적 제약에도 시달렸다.[5] 이러한 개인적 불행과 사회적 압박 속에서도 그는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1838년 그의 유일한 희극 『거짓말쟁이에게 재앙이 있으라』가 혹평을 받자 큰 실망감에 빠져 더 이상 작품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한동안 잊혔던 그는 만년에 이르러 하인리히 라우베가 부르크 극장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그의 잊혀진 작품들이 다시 무대에 올라 큰 성공을 거두면서, 그릴파르처는 괴테, 실러와 비견되는 오스트리아의 국민 시인으로 칭송받게 되었다.[4] 1872년 그는 많은 이들의 존경 속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현재 비엔나의 히칭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프란츠 그릴파르처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변호사 E. J. 그릴파르처는 나폴레옹 전쟁의 침략으로 재산을 잃었으며, 요제프 2세 시대의 요제피니즘 자유주의 전통을 지지하는 엄격하고 고집스러운 인물이었다. 반면 그의 어머니 안나 프란치스카는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고,[5] 크리스토프 존라이트너의 딸이며, 요제프와 이그나츠의 누이이자 레오폴트의 이모였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프란츠는 1807년 빈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년 뒤인 180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811년 대학 과정을 마친 그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귀족 가문의 개인 교사로 일했다. 이후 1813년에는 오스트리아 황실의 Hofkammer|호프캄머de(국고)에서 서기로 일하며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5]

2. 2. 공직 생활과 문학 활동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 문학 박물관의 관장으로 재직했음을 기념하는 현판, 비엔나 제1구 요한네스가세 6번지


1811년 빈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은 후, 프란츠 그릴파르처는 귀족 가문의 개인 교사로 일하다가 1813년[5](혹은 1814년) 오스트리아 황실 국고(Hofkammer)의 서기로 공무를 시작했다. 그는 1821년 재무부로 전출되었고, 1832년에는 황실 기록 보관 책임자(궁정 자료실장)가 되어 1856년 은퇴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그릴파르처는 공무에 큰 뜻을 두지 않았고, 자신의 직위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5]

공직 생활 중에도 그의 문학적 열정은 계속되었다. 1816년, 부르크 극장의 감독 요제프 슈라이포겔을 만나 그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희곡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작품인 『선조의 여인 망령』은 1817년 부르크 극장에서 상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그는 공직 생활과 극작가 활동을 병행하며 여러 작품을 발표했다.

한편, 이 시기 그릴파르처는 개인적인 고난을 겪기도 했다. 1817년 남동생의 자살, 1819년 어머니의 자살, 사촌 아내와의 불륜 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으나, 이러한 경험 속에서도 『사포』(1817년), 『금양모피』(1818년-1819년), 역사 비극 『오토카르 2세의 행운과 종말』(1825년 공연), 『주군에게 충실한 신하』(1828년 공연), 『바다의 사랑 파도의 사랑』(1829년) 등의 주요 작품을 집필하며 극작가로서 명성을 쌓았다.[4][5]

열렬한 요제프주의 신봉자였던 그는 1819년 정교 조약 체결에 반발하여 비오 7세를 비판하는 시 『캄포 바키노』를 발표했다가 프란츠 1세 황제의 눈 밖에 나 작품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5] 그의 역사 비극들 역시 검열 문제나 내용에 대한 논란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합스부르크 왕가의 건국을 다룬 『오토카르 2세의 행운과 종말』은 애국심을 고취시켰지만 검열로 인해 집필 후 2년이 지나서야 공연될 수 있었고,[4] 『주군에게 충실한 신하』는 충성심을 강조한 내용이 자유주의 비평가들에게 굴종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동시에 궁정의 심기를 건드려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다.[4][5] 이러한 검열과의 충돌은 그의 예민한 성격에 큰 부담을 주었다.[5]

1838년, 유일한 희극 작품인 『거짓말쟁이에게 재앙이 있으라』가 부르크 극장 초연에서 혹평을 받자, 그릴파르처는 큰 실망감을 느끼고 더 이상 자신의 작품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후 집필한 희곡들은 그의 생전에는 출판되거나 상연되지 않았다.

한동안 잊혔던 그릴파르처는 만년에 이르러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1849년 그의 추종자였던 하인리히 라우베가 빈 부르크 극장의 예술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잊혀진 작품들을 다시 무대에 올렸고, 이는 즉각적이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그릴파르처는 괴테, 실러와 비견되는 오스트리아의 국민 시인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그의 80번째 생일에는 황실부터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참여하여 성대한 축하 행사가 열렸다.[4] 그는 1856년 공직에서 은퇴한 후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2. 3. 개인적 삶과 사상



프란츠 그릴파르처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E. J. 그릴파르처는 변호사였으며, 요제프 2세의 요제피니즘 자유주의 전통을 강하게 지지하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릴파르처 역시 열렬한 요제프주의 신봉자가 되었다.[5] 그는 1819년 정교 조약 체결에 분노하여 비오 7세를 조롱하는 시 『캄포 바키노』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프란츠 1세 황제의 미움을 사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작품이 검열 대상이 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릴파르처는 평생 동안 오스트리아의 엄격한 검열 제도와 갈등했다. 그의 역사 비극 《오토카르 2세의 행운과 종말(König Ottokars Glück und Ende)》은 검열 문제로 집필 후 2년이 지난 1825년에야 공연될 수 있었고,[4] 또 다른 비극 《주군에게 충실한 신하(Ein treuer Diener seines Herrn)》는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 명법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이유와 함께, 자유주의 비평가들로부터 굴종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결국 궁정을 불쾌하게 만들어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다.[5][4] 이러한 검열과의 충돌은 그의 예민한 성격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국가 공무원이라는 그의 입장 때문에 더욱 힘든 시간을 보냈다.[5] 1826년 작센-바이마르를 방문하여 괴테를 만났을 때, 그는 바이마르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와 비엔나의 억압적인 검열 상황을 비교하며 더욱 큰 좌절감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5] 결국 1838년 희극 『거짓말쟁이에게 재앙이 있으라』가 혹평을 받은 후, 그는 작품을 공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중단했다.

사상적으로 그는 헤겔 철학에 대해서는 용어가 난해하다는 이유로 강한 혐오감을 표현했지만, 임마누엘 칸트 철학은 깊이 연구한 흔적을 보였다.[4] 또한 예술 작품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경향이 있는 게르비누스와 같은 문학 비평가들을 비판하며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했다.[4] 그는 시를 쓰는 기술은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지만,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시인이 자신의 주제를 깊이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4]

개인적인 삶에서 그는 조용하고 사색적인 성격으로, 대중적인 사교 모임을 즐기지 않았다. 1820년경 카타리나 프뢸리히(Katharina Fröhlich)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결혼에 대한 불안감과 비관적인 인생관 때문에 결국 결혼을 포기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5] 이 시기의 고뇌는 그의 일기와 시집 《폰토스의 슬픔(Tristia ex Ponto)》(1835)에 잘 나타나 있다.[5] 그는 1817년1819년에 각각 남동생과 어머니를 자살로 잃는 등 개인적인 비극을 겪기도 했다. 1827년 베토벤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를 위한 추도 연설을 작성하기도 했다.

프란츠 그릴파르처의 묘


그릴파르처는 여행을 매우 좋아하여 1836년에는 파리런던을, 1843년에는 아테네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는 등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4][5] 이러한 여행은 그가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견문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품 구상을 위한 영감을 얻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848년 3월 혁명 당시에는 요제프 라데츠키 장군을 칭송하는 시를 써서 애국 시인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만년에는 하인리히 라우베가 부르크 극장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작품들이 재조명받기 시작했고, 과학 아카데미 회원,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많은 명예를 누렸다. 그의 80번째 생일은 국가적인 기념일로 축하받았으며, 1872년 그가 사망했을 때 오스트리아 전역에서 깊은 애도를 표했다.[5][4] 그는 현재 비엔나의 히칭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3. 주요 작품

그릴파르처는 초기 운명 비극부터 역사 비극, 심리극, 희극,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그릴파르처의 주요 작품 목록
발표 연도작품명 (원제)비고
1807년1809년블랑카 폰 카스티옌 (Blanca von Castiliendeu)초기 비극
1809년스파르타쿠스 (Spartacusdeu)단편 극
1809년알프레드 대왕 (Alfred der Grossedeu)단편 극
1817년선조의 여인 (Die Ahnfraudeu)운명 비극
1818년사포 (Sapphodeu)비극
1819년키스 (Kussdeu)
1821년황금 양모 (Das goldene Vliesdeu)3부작 비극 (손님, 아르고나우텐, 메데이아)
1823년오토카르 왕의 영광과 최후 (König Ottokars Glück und Endedeu)역사 비극, 오타카르 2세 생애 기반
1826년주인의 충실한 종 (Ein treuer Diener seines Herrndeu)역사 비극
1827년젠드미르의 수도원 (Das Kloster bei Sendomirdeu)소설
1831년바다와 사랑의 파도 (Des Meeres und der Liebe Wellendeu)비극, 헤로와 레안드로스 이야기 기반
1834년꿈, 삶 (Der Traum, ein Lebendeu)메르헨 극
1835년폰토스의 슬픔 (Tristia ex Pontodeu)시집
1838년거짓말하는 자에게 불행이 있으라 (Weh dem, der lügt!deu)희극
1847년리부사 (Libussadeu)비극 (사후 초연 1874년)
1848년빈의 악사 (Der arme Spielmanndeu)소설
1848년합스부르크 가문의 형제 갈등 (Ein Bruderzwist im Hause Habsburgdeu)역사 비극, 루돌프 2세마티아스 갈등 기반 (사후 초연 1872년)
1848년에스더 (Estherdeu)단편 극 (사후 초연 1861년)
1851년톨레도의 유대 여인 (Die Jüdin von Toledodeu)비극 (사후 초연 1872년)


3. 1. 초기 작품 (1807-1821)

프란츠 그릴파르처, 루드비히 앙거러의 사진


1807년부터 1809년까지 그릴파르처는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를 본보기 삼아 이아므스 운율로 쓰인 긴 비극 《블랑카 폰 카스틸리엔》(Blanka von Kastilien)을 집필했다. 이 시기 그는 극 형태의 짧은 글인 《스파르타쿠스》(Spartakus)와 《알프레트 데어 그로세》(Alfred der Grosse, 1809)도 남겼다.

그릴파르처가 작품 활동을 시작할 무렵, 독일 연극계는 자카리아스 베르너, 아돌프 뮐러 등이 주도한 이른바 '운명의 비극'이라 불리는 다소 거친 분위기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1817년에 초연된 그릴파르처의 희곡 《선조의 여인》(Die Ahnfrau)은 이러한 시대적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돌프 뮐러의 《죄》(Die Schuld)를 통해 이미 알려진 트로케이 운율을 사용하여 쓰인, 섬뜩한 운명을 다룬 비극이다. 내용은 간통죄로 남편에게 살해당한 한 여인의 유령이 자신의 가문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세상을 떠도는 이야기로, 폭력과 공포가 가득한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적인 특징은 자카리아스 베르너의 희곡들과 비슷하지만, 힘과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뛰어난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단순히 연극적인 효과만을 노린 것이 아니라 드라마로서의 깊이를 보여주는데, 이는 당시 다른 운명 비극들과 구별되는 점이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그릴파르처는 유명세를 얻었지만, 동시에 아돌프 뮐러나 크리스토프 에른스트 폰 호우발트와 같은 작가들과 비슷한 부류로 평가받기도 했다.

《선조의 여인》 이후, 그릴파르처는 1818년 전혀 다른 분위기의 희곡 《사포》(Sappho)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괴테의 토르콰토 타소처럼 시인이라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인물의 비극을 다루며, 시인이 더 높은 예술적 사명을 이루기 위해 평범한 인간적인 행복을 포기해야 하는 과정을 그렸다.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사포》를 읽은 바이런 경은 그릴파르처가 후대에 길이 기억될 작가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사포》는 괴테의 작품만큼 주제 의식이 명확하게 드러나거나 언어가 다채롭고 조화롭지는 않지만, 천재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고대 그리스 고전 작품의 단순함과 우아함에 현대적인 열정과 감성을 결합하려는 시도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1821년에는 3부작 희곡 《황금 양모》(Das goldene Vlies)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1819년 어머니의 자살과 그릴파르처 자신의 이탈리아 여행으로 인해 집필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3부작은 1막짜리 서막 격인 《손님》(Der Gastfreund)으로 시작하여, 2부 《아르고나우텐》(Die Argonauten)에서는 주인공 이아손이 황금 양모를 찾아 떠나는 모험을 다룬다. 마지막 3부 《메데이아(Medea)》는 고전적인 비극의 형식을 따르며, 이전에도 여러 차례 다루어졌던 메데이아 이야기의 가장 극적인 부분을 담고 있다. 《사포》처럼, 이 3부작 역시 더 큰 규모로 마음속 깊은 갈망과 그 좌절의 비극을 그린다. 평범하고 행복한 삶과, 그것이 천재성이든 야망이든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힘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특히 메데이아와 이아손 사이의 복잡한 감정, 즉 서로에게 끌리면서도 동시에 밀어내는 미묘한 관계를 섬세하게 묘사했으며, 결국 반발심이 모든 것을 압도하게 되었을 때 메데이아가 느끼는 분노를 탁월하게 표현했다. 작품의 말미에 메데이아는 비극의 원인이 된 황금 양모를 델포이 신전으로 돌려보내고, 이아손은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덧없으며 이 세상의 행복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는다. 결말은 씁쓸한 환멸로 가득 차 있으며, 유일한 위안은 체념뿐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3부작 중 특히 《메데이아》를 그릴파르처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한다.

3. 2. 역사 비극과 좌절 (1823-1835)

그릴파르처의 역사 비극인 《오토카르 2세의 행운과 종말(König Ottokars Glück und Ende)》은 1823년에 집필되었으나, 검열 문제로 인해 1825년 2월 19일에야 비로소 공연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와 독일의 루돌프 1세 사이의 갈등을 다루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건국이라는 오스트리아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묘사하여 빈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다.[4] 그릴파르처는 중세 시대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면서도 극적인 요소를 놓치지 않았으며[5], 화려하지만 불안정하고 부도덕한 오토카르와 침착하고 정직하며 결국 승리하는 루돌프를 대비시켜 극적 효과를 높였다.[4] 그러나 오토카르의 패배를 두고 일부 비평가들은 이 작품 역시 노력의 헛됨과 세상의 허무함을 이야기하는 그릴파르처의 또 다른 예시라고 해석하기도 했다.[5]

1826년에 집필되어 1828년에 공연된 두 번째 역사 비극 《주군에게 충실한 신하(Ein treuer Diener seines Herrn)》는 주군인 오토 폰 메란 공작에 대한 뱅크바누스의 초인적인 충성심과 자기 희생을 그렸다. 하지만 이는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 명법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한 것처럼 보여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5] 자유주의 성향의 비평가들은 그릴파르처가 맹목적인 복종을 미화한다고 비판했고, 동시에 보수적인 궁정에서도 불쾌감을 드러내 결국 공연이 중단되었다. 이 작품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릴파르처의 후기 희곡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4]

이러한 역사 비극들은 그릴파르처를 오스트리아 검열 당국과 충돌하게 만들었고, 이는 그의 예민한 감수성을 괴롭혔다. 특히 국가 공무원이라는 그의 신분은 이러한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826년, 그는 작센-바이마르를 방문하여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만났는데, 이 경험은 그에게 바이마르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와 빈의 억압적인 검열 현실을 비교하게 만들며 좌절감을 더했다.[5]

공적인 어려움에 더해 개인적인 고뇌도 깊어졌다. 1820년에서 1821년 겨울, 그릴파르처는 카타리나 프뢸리히(Katharina Fröhlich, 1801–1879)를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서로 맞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인지, 혹은 자신의 삶이 행복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비관적인 생각 때문인지 결혼을 주저했다. 이로 인해 그는 깊은 비참함과 절망감에 시달렸으며, 당시의 고통스러운 심경은 그의 일기와 1835년에 출간된 시집 《폰토스의 슬픔(Tristia ex Ponto)》에 잘 나타나 있다.[5]

3. 3. 성숙기와 좌절 (1831-1838)

이 시기에 그릴파르처는 그의 가장 뛰어난 희곡 두 편인 《바다와 사랑의 파도》(Des Meeres und der Liebe Wellendeu, 1831)와 《꿈, 삶》(Der Traum ein Lebendeu, 1834)을 완성했다. 《바다와 사랑의 파도》는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입센의 심리극보다 앞서 인물의 동기를 깊이 있게 파고든 시적인 비극으로 평가받는다.[5] 이 작품 역시 고전적인 틀을 따르지만, 현대적인 감정을 담아내기에는 그릴파르처가 신중하게 사용한 운율이 다소 제약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일부 구절은 매우 뛰어나지만, 극적인 면보다는 서정적인 면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4] 로페 데 베가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같은 스페인 작가들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그릴파르처의 기술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꿈, 삶》은 형식적으로 스페인 드라마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으며, 괴테가 언급한 '고백'과 유사한 성격을 띤다. 야심만만한 젊은 농부 루스탄의 이야기는 영웅적인 꿈을 통해 전개되는데, 이는 극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꿈에서 깨어난 루스탄은 지상의 모든 야망과 욕망이 덧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는 그릴파르처 자신의 비관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 진정한 행복은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고 내면의 평화를 찾는 데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릴파르처의 희곡 중 처음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피한 작품이기도 하다.[5] 또한 그릴파르처는 슈베르트의 '미리암의 승리의 노래'(Mirjams Siegesgesangdeu), 작품번호 136/D. 942의 가사를 쓰기도 했다.

1838년, 그릴파르처는 그의 유일한 희극인 《거짓말하는 자에게 불행이 있으라》(Weh dem, der lügt!deu, 1838)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상황이 주는 웃음, 재치 있는 대사, 그리고 주변 모두가 거짓말을 예상하는 상황에서도 주인공이 오직 진실만을 말하며 승리한다는 독창적인 설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관객들에게는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고, 1838년 3월 6일의 초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실패는 그릴파르처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이후로 독일 연극계를 떠나게 되었다.[5]

3. 4. 사후 발견된 작품과 만년



1836년 파리런던, 1843년 아테네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는 등 만년에도 여행을 이어갔다. 이후 오스트리아에서는 1848년 혁명이 일어나 그릴파르처와 동시대인들이 겪었던 지적 억압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나, 그에게는 다소 늦은 해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많은 명예를 얻어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하인리히 라우베가 부르크 극장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희곡들이 다시 극장 레퍼토리에 포함되었다. 1861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 의회의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의 80번째 생일은 국경일로 기념되기도 했다. 1872년 1월 21일 빈에서 사망했을 때, 오스트리아 국민 전체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5]

그릴파르처는 ''거짓말하는 자에게 화가 있으라''가 실패한 이후, 아름다운 단편인 ''에스더''(Estherde, 1861)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극시를 출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후 유품에서 완성된 세 편의 비극이 발견되었다. 스페인 이야기를 각색한 뛰어난 작품인 ''톨레도의 유대 여인''(Die Jüdin von Toledode, 1851년 작)은 독일 고전극 목록에 영구히 자리 잡았다. 또한 강력한 역사 비극인 ''합스부르크가의 형제 싸움''(Ein Bruderzwist im Hause Habsburgde)과 그의 모든 드라마 중 가장 성숙하고 깊이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 ''리부사''(Libussade)가 있었다. 후자의 두 작품은 극작가가 극장과 멀어지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5]

3. 5. 산문 작품


  • 《젠도미르 근처의 수도원》(Das Kloster bei Sendomir|deu) (1827): 소설이다.
  • 《빈의 악사》(Der arme Spielmann|deu) (1848): 소설로, 예술가의 고독과 헌신을 다룬다.

4. 평가와 유산



오스트리아 빈 폴크스가르텐의 기념비


그릴파르처는 1840년대 극장의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그의 가장 위대한 희곡 작품들이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그는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헤벨과 함께 19세기 중반 가장 영향력 있는 극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낭만주의 시대에 쓰였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단순히 낭만주의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그의 언어와 등장인물 묘사는 《사포》나, 메데아가 그리스로 돌아가는 제이슨 신화를 다룬 《황금 양털》 같은 작품에서 신고전주의적 감수성을 반영하며 고전적인 주제와 내용을 다루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에서는 미적 아름다움과 덕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의 역사극 《오토카르 왕의 행복과 종말》에서는 인류가 스스로 질서를 바로잡고 평화와 조화의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낙관론을 표현하는데,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 사상의 흔한 주제였으며,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 희곡에서 13세기 보헤미아의 왕 오토카르가 이웃 나라를 정복하려 하는 모습은 당시 패배한 나폴레옹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작품은 긍정적인 결말로 마무리된다.

그릴파르처는 본질적으로 극작가였지만, 그의 서정시는 개인적인 감정의 강렬함에서 레나우에 뒤지지 않았으며, 말년의 씁쓸함은 동시대 거장들을 향한 날카롭고 예리한 경구로 표출되기도 했다. 산문 작가로서는 뛰어난 단편 소설 《가난한 악사》(1848)와 스페인 연극에 대한 비평 연구서를 남겼는데, 이는 그가 스페인적 관점에 깊이 공감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우울하고 불안정한 기질, 의지력 부족, 비관주의적 체념, 그리고 스스로 자초한 순교자적 태도에서 비롯된 씁쓸함은, 나폴레옹 전쟁1848년 혁명 사이 지적 예속의 시대였던 오스트리아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그를 특히 적합한 인물로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다.

아름다운 단편 《에스더》(1861)를 제외하면, 그릴파르처는 《거짓말하는 자에게 화가 있으라》의 실패 이후 더 이상 극시를 출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후 유품 속에서 세 편의 완성된 비극이 발견되었다. 이 중 스페인을 배경으로 각색된 뛰어난 작품 《톨레도의 유대 여인》(''Die Jüdin von Toledo'', 1851년 집필)은 독일 고전 레퍼토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합스부르크가의 형제 싸움》은 강력한 역사 비극이며, 《리부사》는 그의 모든 희곡 중 가장 성숙하고 깊이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후자의 두 작품은 그가 극장과 결별하면서 문학적으로 얼마나 큰 손실을 입었는지를 보여준다.[5]

그릴파르처는 오스트리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기려지고 있다.

  • 그의 이름을 딴 과자 '그릴파르처 토르테'가 있다.
  • 현대 미국 독자들에게는 존 어빙의 소설 《가프 세상에 따르면》에 등장하는 '펜션 그릴파르처'라는 이름의 작중작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어빙의 다른 소설 《서커스의 아들》에서도 빈에서 공부한 주인공을 통해 그릴파르처가 언급된다.
  • W. G. 제발트의 소설 《현기증》에서도 언급된다.
  • 에드가 라이츠의 독일 영화 시리즈 《두 번째 고향》의 열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등장인물들이 그의 시를 읽으며 반달을 불완전하고 모호한 삶에 비유한다.
  • 시내에는 1873년 그의 이름을 딴 '그릴파르처슈트라세(Grillparzerstraße)'가 생겼으며, 그라츠, 린츠, 잘츠부르크, 인스브루크 등 오스트리아 주요 도시와 베를린, 뮌헨 등 독일 도시에도 같은 이름의 거리가 있다.
  • 그의 사후 빈의 폴크스가르텐과 바덴에 레오폴트 슈뢰들이 제작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 그의 초상은 1954년 오스트리아 100실링 지폐에 사용되었고, 오스트리아 조폐국은 1964년 25실링 기념 주화와 1991년 20실링 통용 주화를 발행했다.
  • 오스트리아 우체국은 그의 초상이 담긴 특별 우표를 네 차례(1931년, 1947년, 1972년, 1991년) 발행했다.
  • 그릴파르처 상과 그릴파르처 링이 그의 이름을 따서 제정되었다.
  • 소행성 30933은 그의 이름을 따서 '그릴파르처'로 명명되었다.
  • 린츠와 장크트푈텐에는 그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가 있다.

4. 1. 한국에서의 수용

프란츠 그릴파르처에 대한 번역과 연구는 한국에서 주로 독일 문학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1] 대중적인 인지도는 높지 않은 편이지만, 그의 희곡과 문학 작품들은 단순한 외국 고전으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작품 속에는 오스트리아 제국 시기의 사회상이 담겨 있으면서도, 자유, 정의,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들이 깊이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2] 이러한 주제들은 시대를 넘어 현대 한국 사회가 마주한 여러 현실과도 연결될 수 있는 지점들을 가지고 있어, 그의 작품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연구와 소개가 이루어질 필요성이 제기된다.[3]

참조

[1] 웹사이트 Franz Grillparzer A Century of Criticism https://boydellandbr[...] 2020-07-23
[2] 서적 Beethoven: impressions by his contemporaries. https://archive.org/[...] Dover Publications
[3] 웹사이트 Franz Grillparzer - one of the most contradictory poet personalities in Austria https://www.timetrav[...] 2021-03-24
[4] 백과사전
[5]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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