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모리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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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시인, 에세이 작가, 평론가이며, 195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보르도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파리에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1922년 소설 『나병 환자에게 보내는 입맞춤』으로 작가적 지위를 확립했다.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 심리를 파고드는 작품들을 주로 썼으며,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스페인 내전, 알제리 전쟁 등과 관련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 소설 『테레즈 데스케르우』, 『독사의 얽힘』, 『사랑의 사막』 등이 있으며, 전후에는 샤를 드골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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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수아 모리아크 - 안 비아젬스키
프랑스 배우, 작가, 영화감독인 안나 위아젬스키는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손녀이자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배우로 활동했으며, 이후 소설가와 각본가로도 활약했다. - 보르도 대학교 동문 -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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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모리아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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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프랑수아 샤를 모리아크 |
원어 이름 | François Charles Mauriac |
출생일 | 1885년 10월 11일 |
출생지 | 보르도, 지롱드 ,프랑스 |
사망일 | 1970년 9월 1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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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Peu-raang-seu-a Sya-reu Mo-ri-a-keu |
옥시탄어 표기 | Francés Carles Mauriac |
직업 | |
직업 |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 시인 언론인 |
학력 | |
교육 | 보르도 대학교 (1905년) 에콜 데 샤르트 |
가족 관계 | |
친척 | 안 비아젬스키(손녀) |
수상 | |
수상 | 프랑스 아카데미 소설 대상 (1926년) 노벨 문학상 (1952년) |
영향 | |
영향 받은 작가 | 엔도 슈사쿠 미시마 유키오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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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프랑스 보르도 출신으로, 보르도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한 뒤 파리로 이주하여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시집 발표 이후 소설가로서 명성을 쌓았으며, 『Le désert de l'amour』(1925년)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수상하고 1933년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
초기에는 우파 성향의 액시옹 프랑세즈를 지지했으나,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프랑코를 지지하는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며 좌파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에 맞서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포레(Fores)'라는 필명으로 저항 문학을 발표하기도 했다.[5][6]
프랑스 해방 이후에는 나치 부역자 처벌 문제를 놓고 알베르 카뮈와 논쟁을 벌였으며, 국가적 화합을 강조하며 관용을 주장했다. 또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배와 알제리 전쟁에서의 고문에 반대하는 등 반식민주의적 목소리를 냈다.
1952년 "소설에서 인간 삶의 드라마를 깊이 있고 예술적으로 꿰뚫어본 깊은 영적 통찰력"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3] 1958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4] 홀로코스트 생존자 엘리 위젤에게 경험을 글로 쓰도록 격려하고 그의 책 《밤》의 서문을 써 주기도 했다.
그는 작가 클로드 모리아크의 아버지이며, 영화 감독 장뤽 고다르와 결혼했던 배우 겸 작가 안 위아젬스키의 할아버지이다. 1970년 9월 1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프랑스 보르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1905년 보르도 대학교에서 문학 학위를 취득한 후, 1906년 파리로 이주하여 프랑스 국립 고문서학교(École nationale des chartes)에 입학하여 대학원 과정을 준비했으나 곧 중퇴했다. 이후 문학에 전념하여 잡지 《현재 시대지》( Revue du Temps Présent|르뷔 뒤 탕 프레장프랑스어 )에 글을 기고했으며, 1909년에는 첫 시집 『합장』( Les mains jointes|레 맹 주앵트프랑스어 )을 발표하여 모리스 바레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2. 2. 문학 활동과 사회 참여
1909년 첫 시집 『Les mains jointes』를 발표하여 모리스 바레스의 찬사를 받으며 문단에 등장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1922년 『La baiser au lépreux』를 발표하며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이후 『La fleuve de feu』(1923년), 『Génitrix』(1923년) 등을 연이어 발표했으며, 1925년에는 『Le désert de l'amour』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테레즈 데스케르우』(1927년), 『Le nœud de vipères』(1932년)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예수의 생애』나 라신, 블레즈 파스칼에 대한 평론, 소설론 등 다양한 저작을 남겼다. 1933년 6월 1일, 외젠 브리외의 뒤를 이어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초기에는 액시옹 프랑세즈를 지지했으나,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프랑코를 지지하는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며 좌파로 돌아섰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처음에는 필리프 페탱의 협력 정권을 잠시 지지했으나 1941년 12월 저항 운동에 합류했다.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중 유일하게 지하 출판사인 미뉘 출판사(Editions de Minuit, 심야총서)를 통해 저항 관련 글을 발표했으며, 1943년에는 '포레(Fores)'라는 필명으로 저항 기록을 담은 『Cahier noir』을 출간했다.[5][6]
프랑스 해방 직후에는 나치 부역자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알베르 카뮈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당시 저항 운동 신문 《콩바》 편집장이었던 카뮈는 모든 부역자들의 숙청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르 피가로》에 칼럼을 쓰던 모리아크는 국가적 화합을 위해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맞섰다. 그는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보았으며, 자신을 비판했던 작가 로베르 브라시야크의 사형 집행에도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전후 모리아크는 가톨릭 신자로서 보수주의 입장에서 실존주의와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한편, 바티칸을 비판한 로제 페르피트의 책 광고를 싣는 문제로 당시 몸담고 있던 신문 《렉스프레스》에 사퇴 압력을 가하는 등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2] 또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에 반대했으며, 알제리 전쟁 중 프랑스군이 자행한 고문을 강력히 규탄하는 등 반식민주의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52년 "소설에서 인간 삶의 드라마를 깊이 있고 예술적으로 꿰뚫어본 깊은 영적 통찰력"을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3] 1958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4] 그는 자신의 전집(1950-1956, 총 12권)을 출간하고, 개인 회고록과 샤를 드골의 전기를 집필했다. 또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엘리 위젤에게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쓸 것을 격려하고 그의 책 《밤》의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해방(Liberation of France) 직후, 모리아크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와 심한 논쟁을 벌였다. 당시 카뮈는 저항 운동 신문 《콩바》(Combat) 편집장으로서 새롭게 해방된 프랑스에서 모든 나치(Nazi) 협력자들을 숙청(Épuration légale)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모리아크는 《르 피가로》(Le Figaro) 칼럼을 통해 국가적 화합을 위해 그러한 논쟁은 뒤로 미뤄야 한다고 주장하며,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공정한 정의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자신을 맹렬히 비판했던 로베르 브라시야크(Robert Brasillach)의 사형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모리아크는 Les Clés de saint Pierrefra(성 베드로의 열쇠)(1953)와 같은 책에서 바티칸(Holy See)을 비판한 로제 페르피트(Roger Peyrefitte)와 공개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모리아크는 당시 기고하던 신문 《렉스프레스》(L'Express) 측에 페르피트의 책 광고를 중단하지 않으면 사퇴하겠다고 압력을 가했다. 이 갈등은 페르피트의 영화 Les Amitiés Particulièresfra(특별한 우정) 개봉으로 더욱 악화되었고, 페르피트는 모리아크를 동성애 성향을 가진 위선적인 타르튀프(Tartuffe)라고 비난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기도 했다.[2]
그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French Indochina)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에 반대했으며, 알제리 전쟁 중 프랑스군이 자행한 고문을 강력히 비난하는 등 식민주의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1952년에는 "소설에서 인간 삶의 드라마를 깊이 있고 예술적으로 꿰뚫어본 깊은 영적 통찰력"을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3] 1958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했다.[4] 그는 여러 권의 개인 회고록과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의 전기를 출판했다. 그의 전집은 1950년부터 1956년까지 12권으로 출판되었다.
모리아크는 엘리 위젤(Elie Wiesel)에게 홀로코스트(Holocaust) 동안 유대인(Jewish) 소년으로서 겪었던 경험을 글로 쓰도록 격려했으며, 엘리 위젤의 책 《밤》(Night)의 서문을 썼다.
전후 모리아크는 급진 가톨릭계의 중요 인물로서, 보수주의(conservatism) 입장에서 실존주의(existentialism)와 공산주의(communism)에 맞섰다.[5][6]
그는 1970년 9월 1일 파리에서 사망하여 프랑스 발두아즈(Val d'Oise)의 Cimetière de Vemarsfra(베마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2. 4. 죽음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1970년 9월 1일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프랑스 발두아즈( Val d'Oise프랑스어 )의 베마르 공동묘지( Cimetière de Vemars프랑스어 )에 안장되었다.3. 작품 세계
모리아크는 작품의 배경과 소재를 주로 자신의 고향인 보르도 지방의 풍물과 오래된 전통 및 관습에 얽매인 지방 가정생활에서 찾았다. 그의 작품은 개인과 가정, 신앙과 육체의 갈등, 이기심과 종교 의식 사이의 투쟁을 주요 주제로 삼는다.
그는 병적일 정도로 집착과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분석하여, 신이 없는 인간의 비참함을 그려냈다. 표현 방식으로는 독자적인 내적 독백 기법을 사용했으며, 문체는 고전적이면서도 단정하고 정교하다. 또한, 이야기 구성이 매우 교묘하여 심각한 도덕 문제를 다루는 심리 소설가로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그의 작품은 일본 작가인 엔도 슈사쿠와 미시마 유키오에게 영향을 주었다.
4. 수상 및 영예
연도 | 내용 |
---|---|
1926년 | 프랑스 아카데미 소설 그랑프리 수상 |
1933년 |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됨 |
1952년 | 노벨 문학상 수상 |
1958년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Grand Cross) 수훈 |
5. 작품 목록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소설, 희곡, 시, 에세이, 회고록, 전기 등 다양한 문학 장르에 걸쳐 폭넓은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의 작품 세계는 주로 가톨릭 신앙을 배경으로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리와 죄, 구원, 사랑, 믿음과 같은 보편적인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소설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여 "소설에서 인간 삶의 드라마를 깊이 있고 예술적으로 파고든 심오한 영적 통찰력"을 인정받아 195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3] 그는 또한 활발한 에세이 기고를 통해 당대 프랑스 사회의 주요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주요 작품 및 전체 목록은 아래 세부 장르별 분류에서 확인할 수 있다.
5. 1. 소설
출판 연도 | 원제 | 한국어 번역 제목 | 비고 |
---|---|---|---|
1913년 | 'LEnfant chargé de chaînes'' | 쇠사슬에 묶인 소년 | 1961년 번역 |
1914년 | La Robe prétexte | 젊은이의 이야기 | 1960년 번역 |
1920년 | La Chair et le Sang | 피와 살 | 1954년 번역 |
1921년 | Préséances | 우선순위 문제 | 1958년 번역 |
1922년 | Le Baiser au lépreux | 나병 환자에게 한 키스 | 1923년/1950년 번역 |
1923년 | Le Fleuve de feu | 불의 강 | 1954년 번역 |
1923년 | Génitrix | 어머니 | 1950년 번역 |
1923년 | Le Mal | 적 | 1949년 번역 |
1925년 | 'Le Désert de lamour'' | 사랑의 사막 | 1949년 번역, 1926년 프랑스 아카데미 장편소설 대상 수상 |
1927년 | Thérèse Desqueyroux | 테레즈 데스케이루 | 1928년/1947년, 2005년 번역 |
1928년 | Destins | 운명 / 삶의 선 | 1929년/1957년 번역 |
1929년 | Trois Récits | 세 편의 단편 모음집: Coups de couteau(1926), Un homme de lettres(1926), Le Démon de la connaissance(1928) | |
1930년 | Ce qui était perdu | 의심 / 잃어버린 것 | 1931년/1951년 번역 |
1932년 | Le Nœud de vipères | 독사의 매듭 | 1933년/1951년 번역 |
1933년 | Le Mystère Frontenac | 프롱트낙의 미스터리 / 프롱트낙 가문 | 1951년/1961년 번역 |
1935년 | La Fin de la nuit | 밤의 끝 | 1947년 번역 |
1936년 | Les Anges noirs | 어두운 천사들 / 순수의 가면 | 1951년/1953년 번역 |
1938년 | Plongées | 다섯 편의 단편 모음집: Thérèse chez le docteur(1933), 'Thérèse à lhôtel(1933), Le Rang, Insomnie, Conte de Noël'' | |
1939년 | Les Chemins de la mer | 알려지지 않은 바다 / 바다의 길 | 1948년 번역 |
1941년 | La Pharisienne | 바리새인 여자 | 1946년 번역 |
1951년 | Le Sagouin | 약자 / 작은 불행 | 1952년 번역, 중편소설 |
1952년 | Galigaï | 사랑받는 자와 사랑받지 못하는 자 | 1953년 번역 |
1954년 | 'LAgneau'' | 어린 양 | 1955년 번역 |
1969년 | 'Un adolescent dautrefois'' | 말타베른 | 1970년 번역 |
1972년 | Maltaverne | 'Un adolescent dautrefois''의 미완성 속편, 사후 출판 |
5. 2. 희곡
- Asmodée|아스모데fra (1938년)
- Les Mal Aimés|미움받는 자들fra (1945년)
- Passage du malin|악마의 통로fra (1948년)
- Le Feu sur terre|지상의 불fra (1951년)
- Le bâillon dénoué après quatre ans de silence|4년간의 침묵 후 풀린 재갈fra
5. 3. 시
- 1909년 – 《합장(Les Mains jointesfra)》
- 1911년 – 《청춘의 작별(L'Adieu à l'Adolescencefra)》
- 1925년 – 《폭풍(Oragesfra)》
- 1940년 – 《아티스의 피(Le Sang d'Atysfra)》
5. 4. 회고록
- 1931 – ''성목요일: 친밀한 추억'' (Holy Thursday: an Intimate Remembranceeng)
- 1960 – ''내면의 기억'' (Mémoires intérieursfra)
- 1962 – ''내가 믿는 것'' (Ce Que Je Croisfra)
- 1964 – ''너는 춤춘다'' (Soirée Tu Dansefra)
5. 5. 전기
프랑수아 샤를 모리아크(François Charles Mauriac프랑스어)는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보르도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여 1905년 졸업한 후 파리로 이주하여 에콜 데 샤르트에서 대학원 과정을 준비했다.1933년 6월 1일,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어 외젠 브리외(Eugène Brieux프랑스어)의 뒤를 이었다.[1]
과거 악시옹 프랑세즈 지지자였던 그는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좌파로 전향하여, 프랑코를 지지한 가톨릭교회를 비판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가 추축국에 함락된 후, 그는 필리프 페탱 원수가 이끄는 협력 정권을 잠시 지지했으나 1941년 12월 초 저항 운동에 합류했다. 그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중 유일하게 미뉘 출판사(Les Éditions de Minuit)를 통해 저항 운동 관련 글을 발표했다.
모리아크는 프랑스 해방 직후 알베르 카뮈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당시 카뮈는 저항 운동 신문 《콩바》(Combat)를 편집했고(이후 1947년까지 일간지로 발행됨), 모리아크는 《르 피가로》에 칼럼을 기고했다. 카뮈는 해방된 프랑스에서 모든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숙청(Épuration légale)을 주장했지만, 모리아크는 국가적 화합을 위해 논쟁을 유보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모리아크는 해방 직후의 감정적 혼란 속에서 정의가 공정하거나 냉정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으며, 자신을 맹렬히 비판했던 로베르 브라지야크의 사형 집행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모리아크는 또한 《성 베드로의 열쇠(Les Clés de saint Pierre프랑스어)》(1953) 등의 저작에서 바티칸을 비판한 로제 페르피트와 격렬한 공개 논쟁을 벌였다. 모리아크는 당시 몸담고 있던 신문 《렉스프레스》에 페르피트의 책 광고 중단을 요구하며,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사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갈등은 페르피트의 소설 《특별한 우정(Les Amitiés Particulières프랑스어)》을 원작으로 한 영화 개봉으로 더욱 악화되었고, 페르피트는 공개 편지에서 모리아크를 동성애 성향을 숨긴 위선적인 타르튀프라고 맹비난하기에 이르렀다.[2]
모리아크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에 반대했으며, 알제리 전쟁 중 프랑스군에 의한 고문 사용을 강력히 비난했다.
1952년 "소설에서 인간 삶의 드라마를 깊이 있고 예술적으로 파고든 심오한 영적 통찰력"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3] 1958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훈 받았다.[4] 그는 여러 권의 개인 회고록과 샤를 드골에 대한 전기를 출판했다. 모리아크의 전집은 1950년부터 1956년까지 총 12권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엘리 위젤이 홀로코스트 동안 유대인 십대 소년으로서 겪은 경험에 대해 글을 쓰도록 격려했고, 엘리 위젤의 책 《밤(Night영어)》의 서문을 썼다.
그는 작가 클로드 모리아크의 아버지이며, 프랑스 여배우이자 작가인 안 위아젬스키(장뤽 고다르와 결혼)의 할아버지였다.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1970년 9월 1일 파리에서 사망하여 프랑스 발두아즈주 베마르(Vemars)의 묘지(Cimetière de Vemars)에 안장되었다.
5. 6. 에세이 및 평론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소설가로서뿐만 아니라 활발한 에세이스트이자 평론가로서도 활동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해방 과정에서 알베르 카뮈와 나치 협력자 처리 문제를 두고 《르 피가로》 지면을 통해 논쟁을 벌였다. 카뮈가 부역자들에 대한 엄정한 숙청을 주장한 반면, 모리아크는 국가적 화합을 우선시하며 관용을 주장했다.[1] 그는 또한 작가 로베르 브라시야크의 사형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모리아크는 가톨릭교회 내부의 문제나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냈다. 그는 로제 페르피트가 바티칸을 비판한 책 《성 베드로의 열쇠》(1953)를 출간하자, 자신이 기고하던 신문 《렉스프레스》에 해당 책의 광고를 중단하지 않으면 사퇴하겠다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이 갈등은 페르피트가 모리아크를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공개편지를 보내면서 격화되었다.[2]
그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에 반대했으며, 알제리 전쟁 중 프랑스군이 자행한 고문을 강력히 비판했다. 또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엘리 위젤에게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쓸 것을 격려하고 그의 대표작 《밤》의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모리아크의 주요 에세이 및 평론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제목 | 원제 및 비고 |
---|---|---|
1919 | 작은 종교 심리학 에세이: 불안한 몇몇 마음들 | Petits Essais de Psychologie Religieuse: De quelques coeurs inquietsfra |
1936 | 하느님과 맘몬 | God and Mammoneng. 크리스토퍼 도슨과 버나드 월 편집, 『질서에 관한 에세이: 신 시리즈, 1번』(Essays in Order: New Series, No. 1eng) 수록. |
1961 | 두 번째 생각들: 문학과 삶에 대한 성찰 | Second Thoughts: Reflections on literature and on Lifeeng. 애드리엔 폴크 번역. |
2016 |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인종, 전쟁, 정치, 종교에 대한 논고: 1차 세계 대전부터 1960년대까지 | François Mauriac on Race, War, Politics, and Religion: The Great War Through the 1960seng. 내선 브래처 편집 및 번역. |
참조
[1]
웹사이트
Les immortels: François Mauriac (1885–1970)
http://www.academie-[...]
2008-09-20
[2]
뉴스
Peyrefitte, Roger
http://www.glbtq.com[...]
2008-02-03
[3]
웹사이트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1952: François Mauriac
http://nobelprize.or[...]
[4]
웹사이트
Les immortels: François Mauriac (1885–1970)
http://www.academie-[...]
2008-09-20
[5]
웹사이트
Historique. I - La Résistance
http://www.leseditio[...]
Les Éditions de Minuit
2019-08-21
[6]
서적
祖国は日夜つくられる (La patrie se fait tous les jours)
月曜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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