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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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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르 벨은 프랑스의 철학자, 역사가, 비평가로, 칼뱅주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가 다시 칼뱅주의로 돌아와 종교적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로테르담에서 철학과 역사 교수로 활동하며, 1696년에는 그의 대표작인 《역사 비평 사전》을 출간했다. 이 사전은 기존의 역사 기술과 철학 체계를 비판하고, 종교적 관용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벨은 계몽주의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는 종교적 관용 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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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이 페르디낭 엘르의 피에르 바일 초상화, 1675년경
피에르 바일, 1675년경
이름피에르 바일
출생1647년 11월 18일
출생지카를라-르-콩트, 프랑스 왕국
사망1706년 12월 28일
사망지로테르담, 네덜란드 공화국
국적프랑스
학문
분야인식론
사상적 경향철학적 회의주의
주요 관심사인식론
주요 아이디어바일의 회의주의 삼단논법(Bayle's trilemma)
영향데카르트, 몽테뉴, 스피노자
영향받음버클리, 콩도르세, 디드로, 프리드리히 대왕, 라이프니츠, 기번, 흄, 데 마이조, 맨더빌, 모페르튀이, 톨랜드, 비코, 볼테르, 루소
기타

2. 생애

피에르 벨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칼뱅주의 사상가이자 학자였다. 그는 종교적 관용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했으며, 미신과 독단적인 종교 체계를 비판했다.

벨은 1647년 남프랑스 피레네 산맥 기슭의 카를라-르-콩트(현재의 카를라-벨)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퓌로랑스와 툴루즈에서 공부한 후, 1669년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이듬해 다시 칼뱅파로 돌아왔다. 그는 박해를 피해 스위스 제네바로 피신하여 데카르트 철학을 접했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1675년부터 스당의 신교 대학 철학 교수로 재직했으나, 1681년 종교 박해로 대학이 폐쇄되자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고등 교육 기관의 철학 및 종교 교수로 활동했다.

1682년 익명으로 출판한 『혜성에 관한 편지』와 증보 개정판 『혜성 잡고』를 통해 혜성에 대한 미신을 비판하고, 도덕종교로부터의 자립을 주장하며 스피노자 등의 존재를 옹호했다. 1684년부터 1687년까지 월간지 『문예 공화국 소식』을 간행하여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1685년 퐁텐블로 칙령(낭트 칙령 폐지) 직후, 『〈강제로 들어가게 하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관한 철학적 주해』를 통해 신교도 박해에 맞서 양심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호소했다. 그러나 왕권에 관용을 청원하려는 그의 온건한 입장은 피에르 쥐리외 등 강경파와 대립을 불렀고, 결국 1693년 로테르담의 교직에서 쫓겨났다.

이후 집필에 전념하여 1696년 『역사 비평 사전』을 간행했다. 이 책은 기존 역사 사전의 오류를 바로잡고, 굳어진 철학 및 종교 체계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담아냈다.

만년에는 "신과 악의 존재"를 탐구하며 선악 이원론과 인간 이성의 취약성을 확인하고, 신앙 지상주의에 도달했다. 『어떤 시골 사람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혜성 잡고 속편』, 유작 『막심과 테미스트의 대화』 등에서는 프랑스 교회 내 이신론적 신학자와의 논쟁을 다루었다.

1706년 로테르담에서 사망했으며, 종신토록 칼뱅파 신앙을 유지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피에르 벨은 1647년 프랑스 아리에주주 파미에 근처의 카를라-르-콩트(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카를라-벨로 개명됨)에서 칼뱅주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3] 퓌로랑스와 툴루즈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1669년 툴루즈예수회 대학에 입학하여 한 달 뒤에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했다가, 17개월 후 칼뱅주의로 복귀하고 스위스 제네바로 피신하여 제네바 대학교에서 르네 데카르트의 가르침을 받았다.[3]

2. 2. 교수 활동과 망명

프랑스로 돌아온 벨은 파리에서 여러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다. 1675년, 세당 아카데미의 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3] 그러나 1681년, 개신교에 대한 정부의 탄압 조치로 세당의 대학교는 폐쇄되었다.[3]

그 직전에 벨은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피신했고, 거의 즉시 로테르담의 에콜 일뤼스트르에서 철학과 역사 교수로 임명되었다.[3] 그는 수년간 가르쳤지만, 1693년, 대학 내의 길고 긴 내부 갈등에 휘말려 교수직을 박탈당했다.[3]

2. 3. 로테르담 시기와 사망

벨은 1706년 12월 28일에 로테르담에서 사망했다.[3] 그는 로테르담의 왈롱 교회에 묻혔으며, 7년 후에는 피에르 쥐리외도 그곳에 묻혔다. 1922년 이 교회가 철거된 후, 무덤은 로테르담의 크로스위크 일반 묘지로 옮겨졌다. 기념비에는 피에르 벨이 이 무덤에 있다는 것이 표시되어 있다.

크로스위크 일반 묘지에 있는 왈롱 무덤 기념비. 그중 피에르 벨.

3. 저술 활동 및 사상

피에르 벨은 다양한 저술 활동을 통해 종교적 관용, 회의주의, 신앙과 이성의 관계 등 당대 주요 쟁점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피력했다.

로테르담에서 벨은 1682년 《혜성에 대한 성찰》을 출판하고, 루이 맹부르의 칼뱅주의 역사에 대한 비판도 발표했다. 1684년에서 1687년 사이에는 문학 비평 저널인 ''Nouvelles de la république des lettres''를 출판하여 문학 대중화에 기여했다.

1686년, 벨은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는 《철학적 논평》을 출판했다. 1690년에는 《망명자들에게 중요한 조언》이라는 작품이 나왔는데, 피에르 쥐리외는 이 작품을 벨의 것으로 간주하고 그를 공격했다.

교수직을 잃은 후, 벨은 《역사적 비평 사전》 준비에 몰두했다. 이 책은 아이디어와 그 창시자들에 대한 초기 백과사전 중 하나로, 벨은 이 책에서 많은 "진실"이 실제로는 단순한 의견일 뿐이며, 잘 속아 넘어가는 성향과 완고함이 만연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역사적 비평 사전》은 출판 후 여러 세대에 걸쳐 중요한 학술 작품으로 남았다.[4] 볼테르는 벨을 "지금까지 글을 쓴 가장 위대한 변증법가"라고 칭송했다. 피에르 데 메조가 번역한 영어판은 토머스 제퍼슨에 의해 미국 의회 도서관의 첫 번째 컬렉션을 구성하는 100개의 기본 텍스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벨의 남은 생애는 《역사적 비평 사전》에 대한 비판에 대응하는 등 다양한 저술 활동에 헌신했다.

3. 1. 《혜성 잡고》와 초기 저술

1682년, 피에르 벨은 《혜성에 관한 편지》를 출판했고, 이듬해인 1683년에 증보 개정판인 《혜성 잡고》(Pensées diverses sur la comète프랑스어)를 익명으로 간행했다.[16] 이 책에서 벨은 혜성 출현에 대한 미신을 기계론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종교와 도덕의 분리를 설파했으며,[16] 무신론자의 사회도 존립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다.[11]

1684년부터 1687년까지는 문학 비평 저널인 《문예 공화국 소식》(Nouvelles de la république des lettres프랑스어)을 간행하여 서유럽 전역에 명성을 얻었다. 이 저널은 문학을 대중화하려는 최초의 철저한 시도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3. 2. 종교적 관용 옹호

1686년, 벨은 종교 문제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는 초기 작품인 《철학적 논평》의 첫 두 권을 출판했다. 이는 1687년과 1688년에 각각 세 번째와 네 번째 권으로 이어졌다.[4] 정식 제목은 《〈강제로 들어가게 하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관한 철학적 주해》이다.[11]

벨은 이 책에서 프랑스에서의 신교도 박해와 세속 군주에 의한 종교적 간섭을 비판하며,[8][12] 종교적 관용과 양심, 신교의 자유를 요구했다.[12][11] 그는 강압과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성경의 사용을 거부했다. "복음의 특징이자 본질적인 특성인 온화함과 인내심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려면 거의 신약성경 전체를 베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5]

벨은 종교의 다양성이 국가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불관용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는 "만약 종교의 다양성이 국가에 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서로 용납하지 않고 오히려 박해의 방법으로 서로를 파괴하려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모든 해악은 관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관용의 부족에서 비롯된다"라고 말했다.[5]

3. 3. 《역사 비평 사전》과 회의주의

1696년, 베일은 《역사 비평 사전(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을 간행하여 기존 역사 사전들의 오류를 바로잡고, 철학 및 종교 체계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담았다.[17][18] 이 책은 간결한 본문과 방대한 각주로 구성되었는데, 각주에서는 독설을 섞어가며 다양한 논의를 펼쳤으며, 그 분량은 본문의 수십 배에 달했다.[17][18] 베일은 이 《사전》에서 "진실"로 여겨지는 많은 것이 실제로는 단순한 의견일 뿐이며, 잘 속아 넘어가는 성향과 완고함이 만연해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4]

역사 비평 사전


베일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며, 참된 지식 획득의 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양심에 따른 판단을 강조했다.[6] 그는 르네 데카르트, 바뤼흐 스피노자, 니콜라 말브랑슈,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등 많은 영향력 있는 합리주의자들과 토마스 홉스, 존 로크, 아이작 뉴턴과 같은 경험론자들을 비판했다.[6] 리처드 팝킨은 베일이 '역사 비평 사전'을 통해 과거의 모든 이론과 철학을 비판한 회의론자라고 평가했다.

베일의 회의론적 관점은 다음 인용구에서 잘 드러난다.

> 그것[이성]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그리고 철학은 어떤 가루에 비유될 수 있는데, 그 가루는 부식성이 강해서 상처의 감염된 살점을 먹어 없앤 후, 살아있는 살을 삼켜 뼈를 썩게 하고 골수까지 침투한다. 철학은 처음에 오류를 반박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멈추지 않으면 진리를 공격한다. 그리고 홀로 남겨지면, 더 이상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멈출 곳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나아간다.[6][7]

《역사 비평 사전》은 출판 후 여러 세대에 걸쳐 중요한 학술 작품으로 평가받았다.[4] 볼테르는 베일을 "지금까지 글을 쓴 가장 위대한 변증법가"라고 칭송했으며,[4] 그의 《역사 비평 사전》은 "계몽 사상의 보고"라고 평가했다.[18] 피에르 데 메조가 번역한 영어 번역본은 토머스 제퍼슨에 의해 미국 의회 도서관의 첫 번째 컬렉션을 구성하는 100개의 기본적인 텍스트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역사 비평 사전》은 1696년 로테르담에서 초판이 출판된 이후, 저자의 사후에도 잇따라 판을 거듭하여 18세기 전반까지 9판까지 간행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715년 이후, 신사상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영어, 독일어 완역판도 출판되는 등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18세기 계몽 사상가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17]

3. 4. 만년의 사상과 논쟁

베일은 만년에 신과 악의 존재에 대한 깊은 탐구를 이어갔다. 그는 선과 악의 이원론을 제시하며, 인간 이성의 취약성을 지적하고, 결국 신앙에 의지하는 신앙 지상주의(Fideism)에 이르렀다.[4]

이 시기에 베일은 프랑스 교회 내 이신론적 신학자들과 여러 차례 논쟁을 벌였다. 주요 저작으로는 《어떤 시골 사람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혜성 잡고 속편》, 《막심과 테미스트의 대화》 등이 있다.[4]

4. 평가 및 영향

피에르 벨의 대표작 《역사 비평 사전》은 기존 역사 기술에 대한 엄격한 비판적 검토와 대담한 철학적, 신학적 사상을 담은 대작으로,[11] 초판 발행 이후 여러 판을 거듭하며[8] 18세기에 널리 읽혔다.

존 로크와 함께 관용 사상의 선구자로 여겨지지만,[8] 로크가 양심의 선택을 개인에게 내재된 불가침의 권리로 여긴 반면, 벨은 양심에 대한 복종을 신의 권리이자 인간의 의무로 간주하여 그 내용은 다르다.[12]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포이어바흐는 저서 "피에르 베일 - 철학사 및 인류사에 대한 기여 - 1838년 -"에서 벨의 신앙과 이성 사이의 모순을 고찰했다. 칼뱅루터가 신학자로서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교리에 대한 회의를 품은 것과 달리, 벨은 어떠한 신학적 관심이나 신학적 정신도 없이 자신의 의지로 회의를 했다고 지적했다.[13] 또한 라이프니츠 등 동시대 철학자들이 철학과 신앙의 조화·타협을 꾀한 것에 반해, 벨은 "신학은 철학을 해친다"며 양자의 타협을 거부했다고 한다.[14] 후나야마 신이치에 따르면, 포이어바흐가 근세 철학자들 중 가장 높이 평가하고, 심정적으로 가장 가깝게 여긴 인물이 벨이다.[15]

18세기 이후 벨은 전통적으로 신학·형이상학의 해체를 목표로 한 반교리적인 회의론자로 여겨져 왔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칼뱅파에 입각한 프로테스탄트 사상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다.[11][12]

4. 1. 계몽주의에 미친 영향

피에르 벨의 《역사 비평 사전》은 18세기에 널리 읽히며 계몽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11] 볼테르는 벨을 "지금까지 글을 쓴 가장 위대한 변증법가"라고 칭송했다. 《역사 비평 사전》의 영어 번역본은 토머스 제퍼슨에 의해 미국 의회 도서관의 첫 번째 컬렉션을 구성하는 100개의 기본 텍스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4. 2. 관용 사상의 선구자

존 로크와 함께 관용 사상의 선구자로 여겨진다.[8] 로크가 양심의 선택을 개인에게 내재된 불가침의 권리로 여긴 반면, 벨은 양심에 대한 복종을 신의 권리, 인간의 의무로 간주했다.[12] 벨은 그의 저서 《역사 비평 사전》과 《철학적 논평》에서 종교 관용에 대한 주장을 펼쳤다. 벨은 강압과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성경의 사용을 거부했다. 그는 "복음의 특징이자 본질적인 특성인 온화함과 인내심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려면 거의 신약성경 전체를 베껴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관용을 국가에 대한 위험으로 여기지 않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만약 종교의 다양성이 국가에 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서로 용납하지 않고 오히려 박해의 방법으로 서로를 파괴하려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모든 해악은 관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관용의 부족에서 비롯된다."[5]

4. 3. 현대의 평가와 재조명

리처드 팝킨은 피에르 벨이 '역사 비평 사전'을 통해 기존의 모든 이론과 철학을 비판한 회의론자라고 주장했다. 벨은 인간 이성의 한계 때문에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없으며, 양심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르네 데카르트, 바뤼흐 스피노자 등 합리주의자들과 토마스 홉스, 존 로크 등 경험론자들을 비판했다.[6]

벨의 『역사 비평 사전』은 철저한 비판적 검토와 대담한 철학적, 신학적 사상을 담은 대작으로, 계몽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11] 존 로크와 함께 관용 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받지만, 로크는 양심의 선택을 개인의 권리로 본 반면, 벨은 양심에 대한 복종을 신의 권리이자 인간의 의무로 보았다.[12]

루트비히 안드레아스 포이어바흐는 저서에서 벨이 신앙과 이성의 모순을 탐구했으며, 칼뱅이나 루터와 달리 신학적 관심 없이 회의를 품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벨은 라이프니츠 등과 달리 신학과 철학의 타협을 거부하고 "신학은 철학을 해친다"고 주장했다.[14]

18세기 이후 벨은 전통적으로 반교리적 회의론자로 여겨졌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칼뱅파에 입각한 프로테스탄트 사상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졌다.[11][12]

5. 대한민국에서의 수용과 의의

대한민국에서는 1970년대 후반부터 법정대학 출판부를 통해 벨의 저작들이 번역, 소개되었다(노자와 쿄 번역).[5] 그의 사상은 종교의 자유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가치와 부합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5] 종교 갈등과 사회적 불관용 문제가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 벨의 회의주의적 관점과 종교적 관용에 대한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5][6] 특히, 그의 사상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종교와 양심의 자유, 그리고 이성적 토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현대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닌다.[6][7]

6. 주요 저작


  • Lettre sur les comètes프랑스어 (혜성에 관한 편지) (1682)
  • Pensées diverses sur la comète프랑스어 (혜성 잡고) (1683): "혜성 출현에 관한 미신을 기계론적 입장에서 비판한다"는 형식을 취하면서, 미신 타파와 함께 종교와 도덕의 분리를 설파하고[16], 무신론자의 사회도 존립 가능하다고 주장했다[11]
  • Commentaire philosophique sur ces les paroles de Jésus-Christ : 《Contrains-les d'entrer...》프랑스어 (《억지로라도 들어가게 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관한 철학적 주해) (1686-1688): 프랑스에서의 신교도 박해와 세속 군주에 의한 종교적 간섭을 비판하며[8][12], 종교적 관용과 양심・신교의 자유를 요구했다[12][11]
  •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프랑스어 (역사 비평 사전) (1696): 베일의 대표작. 항목은 주로 인명으로, 간결한 본문과 본문에 대한 방대한 각주로 구성된다. 각주에서는 독설을 섞어가며 다양한 논의를 펼치며, 그 양은 종종 본문의 수십 배, 수백 배에 달하며, 이 책의 근간을 이룬다. 1696년에 로테르담에서 2권 4책의 초판이 출판된 이후, 저자의 사후에도 잇따라 판을 거듭했다. 18세기 전반까지 9판까지 간행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715년 이후, 신사상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영어, 독일어 완역판도 출판되는 등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18세기 계몽 사상가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17]볼테르는 이 책을 "계몽 사상의 보고"라고 평했다[18]
  • Réponse aux questions d'un provincial프랑스어 (어떤 시골 사람의 질문에 대한 답변) (1703-1707)
  • Continuation des Pensées diverses sur la comète프랑스어 (혜성 잡고 속편) (1704)
  • Entretiens de Maxime et de Thémiste프랑스어 (막심과 테미스트의 대화)
  • Nouvelles de la république des lettres프랑스어 (문예 공화국 소식) (1684-1687, 월간지): 문학 비평 저널이다.

7. 한국어 번역 저작집

피에르 벨 저작집 (노자와 쿄 역, 호세이 대학 출판국)
권수제목출판일
제1권혜성잡고1978년 11월
제2권관용론집1979년 12월
제3권역사 비평 사전 1(A-D)1982년 3월
제4권역사 비평 사전 2(E-O)1984년 11월
제5권역사 비평 사전 3(P-Z)1987년 3월
제6권혜성잡고 속1989년 3월
제7권후기 논문집 11992년 10월
제8권후기 논문집 21997년 3월
보권종교 개혁사론2004년 6월


참조

[1] 서적 David Hume's Critique of Infinity https://books.google[...] Brill
[2] 웹사이트 Bayle's trilemma https://philosophy.e[...] 2020-07-14
[3] 간행물 Bayle, Pierre EB1911
[4] 서적 A History of the Modern World McGraw-Hill
[5] 웹사이트 The Golden Rule of Toleration http://www.christian[...] Christianity Today 2017-01-21
[6] 서적 The History of Skepticism Oxford University Press
[7] 서적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 Desoer 1820
[8] 서적 世界宗教大事典 平凡社
[9] 서적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10] 서적 日本大百科全書 小学館
[11] 서적 岩波 哲学・思想事典 岩波
[12] 서적 世界文学大事典 集英社
[13] 서적 フォイエルバッハ全集 8
[14] 서적 フォイエルバッハ全集 8
[15] 서적 フォイエルバッハ全集 8
[16] 서적 新潮世界文学辞典 新潮社
[17] 서적 岩波 哲学・思想事典 岩波
[18] 서적 日本大百科全書 小学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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