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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에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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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에브리는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영국의 해적으로, 해군 복무, 노예 무역 관여, 그리고 해적 행위를 거쳐 악명을 떨쳤다. 그는 1694년 스페인 원정 함대에서 반란을 일으켜 해적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인도양에서 무굴 제국의 선박을 약탈하여 막대한 재물을 얻었다. 이 사건은 동인도 회사에 큰 타격을 입혔고, 영국 정부는 에브리에게 현상금을 걸고 수배했다. 에브리는 도주하여 행방이 묘연해졌으며, 그의 최후에 대한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그는 해적의 전설적인 인물로 남아 다양한 문학 작품과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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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에브리
기본 정보
헨리 에브리
헨리 에브리 (목판화, 《해적의 일반 역사》(1725년))
별명롱 벤(Long Ben)
대해적(The Arch Pirate)
해적왕(The King of Pirates)
본명해당 정보 없음
출생일1659년 8월 20일
사망일1696년 6월 (36세) (추정)
배우자도로시 아서(Dorothy Arther)
경력
충성없음
복무 기간1694년–1696년
활동 근거지대서양, 해적항로, 인도양
계급선장
지휘 함선팬시 호, 이전 찰스 2세
전투해당 정보 없음
재산1695년 9월까지 최소 11척의 선박을 나포, 그 중에는 간즈-이-사와이호가 포함됨
기타
참고1693년부터 "롱 벤"이라는 별명이 사용되었으며, 그 의미는 불분명함. 일각에서는 에브리의 키가 크다는 의미로 추정하기도 함. 그는 "키가 크고 튼튼한 체격"으로 묘사된 적이 있음.

2. 초기 생애

헨리 에브리는 1659년 8월 20일 영국 데번주 플리머스에서 남동쪽으로 약 9.7km 떨어진 뉴턴 페러스 마을에서 태어났다.[10][11] 교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존 에버리와 그의 아내 앤(결혼 전 성은 미상)의 아들이었다. 당시 데번의 에브리 가문은 꽤나 명망 있는 가문이었으며, 와이크로프트 성의 에브리 가문과 친족 관계였을 가능성이 높다.[12]

1696년 8월, 에브리의 선원이었던 윌리엄 필립스의 진술에 따르면, 체포 후 "자발적 자백"에서 에브리는 "약 40세"였고, 그의 어머니는 "플리머스 근처"에 살았으며, 아내는 "래트클리프 하이웨이"에 사는 가발 판매상이었다.[13] 에브리는 1690년 9월 11일 런던 세인트 제임스 듀크 플레이스에서 도로시 아서와 결혼했다.[14] 하지만 자녀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초기 기록에는 출생지가 플리머스 캐테다운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잘못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6] 에브리의 본명이 벤자민 브리지먼이고 "헨리 에브리"가 가명이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현대 학설은 "헨리 에브리"가 본명임을 밝혀냈다.[1][17]

에브리는 젊은 시절 영국 해군 함선에서 복무한 선원이었다. 1689년 9년 전쟁 발발 직후, 64문 전열함 HMS ''루퍼트''에서 사관 후보생으로 근무하며 가족에게 정기적으로 급여를 보냈다.[2] 1689년 중반, HMS ''루퍼트''는 프랑스 호송선을 나포하는 데 기여했고, 에브리는 마스터의 부관으로 진급했다.[19] 1690년 비치 헤드 해전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이 해전은 영국에게 재앙으로 끝났다.[20][21] 그해 8월, 에브리는 영국 해군에서 면직되었다.[22][23]

장 앙투안 테오도르 드 구댕의 강철 판화로, 헨리 에브리가 영국 해군에서 복무하는 동안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는 비치 헤드 해전을 묘사하고 있다.


1691년 영국 해군에서 제대한 후, 에브리는 대서양 노예 무역에 관여했다.[24] 그는 기니 해안을 따라 노예 상인으로 활동하며, 다른 노예 상인들보다 더 교활했던 것으로 보인다.[24] 그는 우호적인 깃발을 게양하여 노예 상인들을 자신의 배로 유인한 다음, 그들과 그들의 포로들을 함께 선창에 가두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었다.[26]

2. 1. 출생 및 배경

현대 학설에 따르면 헨리 에브리는 1659년 8월 20일 영국 데번주 플리머스에서 남동쪽으로 약 9.7km 떨어진 뉴턴 페러스 마을에서 태어났다.[10][11] 교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존 에버리와 그의 아내 앤(결혼 전 성은 미상)의 아들이었다. 당시 데번의 에브리 가문은 꽤나 명망 있는 가문이었으며, 그는 와이크로프트 성의 에브리 가문의 친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2] 1696년 8월, 에브리의 선원이었던 윌리엄 필립스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체포 후 "자발적 자백"을 했는데, 에브리는 "약 40세"였고, 그의 어머니는 "플리머스 근처"에 살았으며, 그의 아내는 "래트클리프 하이웨이"에 사는 가발 판매상이었다.[13] 에브리는 결혼했으며, 기록에 따르면 1690년 9월 11일 런던 세인트 제임스 듀크 플레이스에서 도로시 아서와 결혼했다.[14] 하지만 그에게 자녀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 사람에 대한 가장 초기의 전기적 설명인 ''존 에이버리 선장의 삶과 모험'' (런던: J. 베이커, 1709)은 그가 1653년 플리머스 캐테다운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이 장소와 날짜가 현재는 잘못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전 문헌에서 자주 인용되었다. (에브리의 출생 연도로 제안된 또 다른 해는 1665년[15]이지만, 이 역시 오류이다.) 해적이 사라진 지 10년 남짓 지나 그의 이야기를 쓴 네덜란드 작가는 아드리안 반 브루크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이는 아마도 필명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반 브루크가 에브리의 선원들에게 ''팬시''호에서 짧은 기간 동안 억류되었던 이야기를 전하며, 에브리의 아버지가 로버트 블레이크 제독 휘하의 영국 해군에서 복무했던 무역 선장이었다고 주장한다. 에브리의 삶에 대한 몇몇 후기 기록들, 특히 다니엘 디포의 ''[http://www.gutenberg.org/ebooks/37992 The King of Pirates]'' (1720)는 이 이전 작품을 언급했지만, 그 진실성은 의심스러우며 ''국립 인명 사전''에서는 "사실의 기반이 거의 없는 허구"라고 묘사했다.[16]

에브리의 본명이 사실 벤자민 브리지먼(특히 그의 별명 "롱 벤"을 고려할 때)이고 "헨리 에브리"가 사실 가명이었다는 이론이 존재했지만,[17] 현대 학설은 이를 반박했다.[1] 역사가들은 "헨리 에브리"가 해적의 본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는 해적 경력을 시작하기 전에 영국 해군에 입대할 때 이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가명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해적 행위를 저지른 ''후에야'' "브리지먼"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에브리는 유명한 에브리 준남작의 사촌이었을 수 있지만, 이는 결정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12] 에이브리의 출생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자메이카의 부유한 선주의 집에서 태어났다는 설, 또는 플리머스의 여관 집에서 태어났다는 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133]

2. 2. 영국 해군 복무

에브리는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영국 해군 함선에서 복무한 선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중적인 설명에 따르면 에브리는 1671년 알제를 포격하는 영국 함대에서 복무했고, 카리브해에서 해적 활동을 했으며, 심지어 캄페체만에서 통나무 운반선의 선장을 맡았다고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반 브로엑의 허구적인 회고록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식 기록은 9년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689년 3월에 시작된다.[2]

당시 영국과 대동맹(바이에른 선제후국, 네덜란드 공화국, 팔라티네이트 선제후국, 작센 선제후국, 스페인)은 프랑스의 확장을 막기 위해 루이 14세와 전쟁을 벌였다. 에브리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30대 초반의 나이에 64문 전열함 HMS ''루퍼트''에서 사관 후보생으로 근무했으며, 당시 프랜시스 휠러 경이 지휘하고 있었다.[18] 에브리의 해군 기록은 그가 가정적인 사람이었고, "담배와 같은 부가적인 것에 임금을 거의 쓰지 않고 정기적으로 가족에게 월급을 보냈다"는 것을 시사한다.[20]

1689년 중반, HMS ''루퍼트''는 브레스트 근해에서 대규모 프랑스 호송선을 나포하는 데 기여했다. 이 승리로 에브리는 7월 말 마스터의 부관으로 진급했지만, HMS ''루퍼트''의 세 명의 마스터 부관 중 가장 하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9] 1690년 6월 말, 휠러 함장의 초대로 90문 HMS ''알버말''에 합류한 에브리는 2주 후 비치 헤드 해전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해전은 영국에게 재앙으로 끝났다.[20][21] 그해 8월 29일, 에브리는 영국 해군에서 면직되었다.[22][23]

2. 3. 노예 무역 관여

1691년 영국 해군에서 제대한 후, 에브리는 대서양 노예 무역에 관여했다.[24] 그는 버뮤다 총독인 아이작 리처에게 고용되어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을 수송했다. 이 기간 동안 에브리는 주로 기니 해안을 따라 노예 상인으로 활동했다. 영국 역사가 더글러스 보팅에 따르면, "에이버리는 노예 상인으로서 다른 대부분의 그 더러운 직업 종사자들보다 더 교활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24]

1693년, 기니 해안에서의 에브리의 활동은 다른 노예 상인들의 주목을 받게 했다. 로열 아프리카 회사(RAC)에 고용된 노예선인 ''한니발''의 선장이자 웨일스 출신 노예 상인 토마스 필립스는 자신의 일기에 "나는 이곳에서 흑인들이 다른 곳에서보다 더 경계하는 것을 만났는데, 이것은 그들이 롱 벤, 일명 에이버리와 같은 녀석들에 의해 속임수를 당했고 그들에게 잡혀 끌려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한다."라고 적었다.[24][25] 에브리는 또한 우호적인 깃발을 게양하여 노예 상인들을 자신의 배로 유인한 다음, 그들과 그들의 포로들을 함께 선창에 가두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었다.[26] 필립스는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에브리를 여러 번 만났고 심지어 그를 개인적으로 알았을 수도 있는데, 부적절한 행동으로 1693년에 해임된 인기 없는 왕실 총독 리처로부터 에브리가 받은 특이한 노예 무역 위임에도 주목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에브리의 삶의 이 부분은 상대적으로 문서화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17][27]

3. 해적 경력

에브리는 1689년 해군 후보생으로 군함 루퍼트 호에 승선했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134] 해적이 되기 전 에브리는 비치 헤드 해전에 참전했고[134], 캄페체 만의 로그우드 운반선이나 사략선에서 일하며 노예 무역에도 관여했다.[135]

1692년, 스페인의 라 코루냐 해상에서 사략선 찰스 2세 호의 항해사 조수로 근무하던 에브리는 임금 미지급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134] 반란 이후 에브리는 선장으로 선임되었고, 배의 이름을 'Fancy|팬시|팬시 호영어'로 변경했다.[134]



스페인을 탈출한 에브리는 서아프리카에서 활동한 후 인도양을 목표로 희망봉을 돌아 마다가스카르코모로 제도에서 선원을 보충하고 장비를 보급했다. 이후 홍해의 아덴 만에 위치한 과르다푸이 곶으로 이동하여, 무굴 제국의 배를 습격하기 위해 온 해적 토마스 튜의 함대와 합류했다.[136]

당시 이 해역은 인도에서 메카로 가는 순례선단이 지나다니는 곳으로, 해적들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에브리와 튜는 연합하여 6척의 선박과 440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해적단을 조직했고, 에브리가 선단을 이끌었다.[136]

연합 해적단은 홍해 입구를 사냥터로 정했고, 순례선단 중 『파테 무하마드』를 포획했다. 이 과정에서 튜는 전투 중 사망했지만,[137] 파테 무하마드는 5만에서 6만 파운드 상당의 재물을 싣고 있었다.

이후 에브리는 도주한 선단 중 무굴 제국 황제 아우랑제브 소유의 『Ganj-i-Sawai|간지=이=사와이|간즈웨이영어[138]』를 포획했다.[137] 간지=이=사와이는 80문의 대포, 200명의 선원, 400~500명의 조총 병사를 갖춘 대형 선박이었으나,[136][137] 에브리 일당에게 항복했다. 해적들은 배 위에서 약탈과 만행을 저질렀고, 32만 5천에서 60만 파운드 상당의 재물을 획득했다.[139]

에브리 일당은 파테 무하마드 호와 간즈웨이 호에서 현재 가치로 2억달러에 달하는 재물을 약탈했다.[140] 이후 레위니옹 섬에서 전리품을 분배했는데, 해적들은 1인당 당시 해군 수병의 75년 치 봉급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았다.[142]

3. 1. 스페인 원정 함대 반란

제임스 호블론 경이 주도한 런던 상인들은 1693년 봄, 침체된 영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스페인 원정 함대를 조직했다. 이 함대는 네 척의 군함으로 구성되었는데, 핑크 ''세븐스 선'', 프리깃 ''도브''(유명한 항해사 윌리엄 댐피어가 차석 항해사였다),[28] ''제임스'', 그리고 ''찰스 2세''였다. ''찰스 2세''는 때때로 ''듀크''로 잘못 언급되기도 한다.

1837년 찰스 엘름스가 그린 나무 조각으로, 헨리 에브리가 자신의 배 ''판시''에서 세 개의 보물 상자를 받는 모습을 묘사했다.


''찰스 2세''는 영국의 동맹인 스페인의 찰스 2세(배 이름의 유래)에 의해 서인도 제도의 프랑스 선박을 공격하도록 위임받았다. 스페인으로부터 무역 및 난파선 탐사 면허를 받은 이 원정대의 임무는 스페인령 서인도 제도로 항해하여 무역을 하고, 스페인에 무기를 공급하며, 난파된 갤리온에서 보물을 회수하는 동시에 이 지역의 프랑스 재산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투자자들은 선원들에게 좋은 보수를 약속했다. 계약은 배치 기간 동안 6개월마다 지급되는 보장된 월급을 규정했으며, 첫 달의 급여는 임무 시작 전에 선불로 지급되었다. 호블론은 직접 배에 올라 선원들을 만나 그들의 급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실제로 임무가 시작되기 얼마 전인 1693년 8월 1일까지의 모든 임금은 그날 지급되었다.[31]

해군에서의 이전 경험 덕분에 에브리는 스페인 원정 함대에 합류한 후 일등 항해사로 승진했다. 이 선단의 네 척의 배는 스페인 해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아일랜드 귀족인 돈 아르투로 오브르네 경이 지휘했다.[20] 그러나 이 항해는 곧 문제가 생겼다. 기함 선장인 존 스트롱은 윌리엄 핍스 경과 함께 복무한 경력 있는 선원이었으나, 배가 아직 항구에 있는 동안 사망했다. 그는 찰스 깁슨 선장으로 교체되었지만,[32] 이것이 불행의 끝은 아니었다.

1693년 8월 초, 네 척의 군함은 템스 강을 따라 스페인의 북부 도시인 코루냐로 향했다. 코루냐까지의 항해는 2주가 걸렸어야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배는 5개월이 지나서야 스페인에 도착했다. 설상가상으로 필요한 법적 서류가 마드리드에서 도착하지 않아 배들은 기다려야 했다. 몇 달이 지나도 서류가 도착하지 않자 선원들은 불쾌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집으로 돈을 보내 가족을 부양할 수도 없고, 다른 직장을 구할 수도 없어 코루냐에서 사실상 죄수가 된 것이다.[33]

항구에서 몇 달을 보낸 후, 선원들은 고용이 시작된 이후 받아야 할 급여를 선장에게 청원했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졌다면, 선원들은 더 이상 배에 묶여 있지 않아 쉽게 떠날 수 있었을 것이므로 예상대로 그들의 청원은 거부되었다. 선원들의 아내들이 호블론에게 보낸 비슷한 청원도 실패한 후, 많은 선원들은 절망에 빠져 스페인에게 노예로 팔렸다고 믿었다.[34]

1694년 5월 1일, 함대가 마침내 코루냐를 떠날 준비를 하면서, 선원들은 6개월 치의 급여를 요구하거나 파업을 위협했다. 호블론은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오브르네 제독은 상황의 심각성을 보고 잉글랜드에 자신의 선원들에게 빚진 돈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1694년 5월 6일, 몇몇 선원들이 오브르네와 말다툼을 벌였고, 아마도 이때 그들은 반란을 계획하고 다른 사람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을 것이다.[35][36] 이들 중 한 명이 에브리였다. ''도브''의 선원인 윌리엄 필립스가 나중에 증언한 바에 따르면, 에브리는 "배에서 배로 옮겨 다니며, 선원들을 설득하여 그를 따라 돈을 충분히 벌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37] 에브리는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사회적 지위도 낮았기 때문에, 선원들이 그의 진심을 믿고 반란을 지휘할 적임자로 여겼다.[38]

1694년 5월 7일 월요일, 오번은 육지에서 잠을 자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선원들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39] 오후 9시경, 에브리와 25명의 남자는 ''찰스 2세''호에 돌입하여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을 기습했다. 당시 깁슨 선장은 병석에 누워 있었고, 이로 인해 반란은 유혈 사태 없이 끝났다.[38] ''제임스''호에서 온 추가 인원들이 롱보트를 타고 배 옆으로 와서 "술 취한 보트소인이 배에 있나?"라고 암호를 외친 후 반란에 가담했다는 설명도 있다. 또한 ''제임스''호의 험프리스 선장은 에브리에게 선원들이 탈영하고 있다고 외쳤고, 이에 에브리는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침착하게 대답했다고 한다.[40] ''제임스''호는 이후 ''찰스 2세''호에 발포하여 스페인 야경대에 경고했고, 에브리는 필사적으로 바다로 도망쳐 밤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안전을 위해 충분히 항해한 후, 에브리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육지로 돌아갈 기회를 주었고, 심지어 기브슨에게 그들의 대열에 합류한다면 배를 지휘하도록 정중하게 제안했다. 찰스 엘름스에 따르면, 에브리가 기브슨에게 "만약 우리 중 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일에 전념한다면, 아마도 언젠가는 당신을 부관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기 배가 있으니 육지로 돌아가십시오."라고 말했다.[42] 선장은 이를 거절했고, 다른 여러 선원들과 함께 육지로 보내졌다.[38] 자발적으로 떠나는 것을 막은 유일한 사람은 배의 외과 의사였는데, 그의 도움이 너무 중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찰스 2세''호에 남은 모든 선원들은 만장일치로 에브리를 배의 선장으로 선출했다.[43] 일부 보고서에 따르면 에브리는 기브슨을 대할 때 훨씬 더 무례했지만, 적어도 그에게 부선장의 자리를 제안했다는 데는 동의한다.[40] 어느 경우든, 에브리는 반란을 이끄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신사다움과 관대함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그의 동기가 단순히 모험심만은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에브리는 선원들에게 해적으로서 인도양으로 항해하도록 쉽게 설득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원래 임무가 해적 행위와 매우 유사했고 에브리는 설득력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불과 1년 전에 토마스 튜가 홍해에서 엄청난 전리품을 획득한 성공 사례를 언급했을 것이다. 선원들은 곧 각자 보물의 1몫을 받고 선장은 2몫을 받기로 결정하여 지불 문제를 빠르게 해결했다. 에브리는 이후 ''찰스 2세''호를 ''팬시''호로 개명했는데, 이는 선원들의 항해에 대한 새로운 희망과 배의 품질을 모두 반영하는 이름이었고, 희망봉으로 항해 방향을 잡았다.[44]

3. 2. 해적 행위

카보베르데마이오에서 에브리는 바베이도스에서 온 영국 상선 세 척을 털어 식량과 물품을 강탈했고, 선원 아홉 명을 자신의 해적단에 합류시켰다.[45][43][46] 이후 기니 해안에서 현지 족장을 속여 배에 태운 뒤 재물을 빼앗고 노예로 만들었다.[47] 비오코 섬, 베냉 만에서 배를 정비하고 선체 일부를 잘라내 속도를 높여, 당시 대서양에서 가장 빠른 배 중 하나가 되었다.[46] 1694년 10월, 프린시페 섬 근처에서 덴마크 사략선 두 척을 나포하여 상아와 금을 빼앗고 덴마크 선원 17명을 해적단에 합류시켰다.[48]

1695년 초, 희망봉을 돌아 마다가스카르에서 보급품을 보충하고, 코모로 제도의 요한나 섬에서 휴식을 취하며 프랑스 해적선을 나포, 선원 40여 명을 추가하여 총 150여 명의 해적단을 거느리게 되었다.[49] 요한나에서 에브리는 인도양의 영국 선장들에게 자신이 영국 선박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거짓 편지를 보내 동인도 회사의 추격을 피하려 했다.[41]

서아프리카에서 활동 후 인도양으로 간 에브리는 홍해 아덴 만의 과르다푸이 곶에서 해적 토마스 튜의 함대와 연합했다.[136] 당시 인도에서 메카로 가는 순례선단은 해적들의 좋은 표적이었고, 두 해적단은 통합하여 에브리가 선단을 이끌었다.[136] 6척의 선박, 440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연합 해적단은 홍해 입구를 사냥터로 정했다.[136]

에브리는 순례선단을 추적하여 수라트뭄바이 사이 해역에서 『파테 무하마드』를 포획했다. 튜는 전투 중 사망했지만,[137] 파테 무하마드는 5만에서 6만 파운드 상당의 재물을 싣고 있었다.

에브리는 도주한 선단 중 무굴 제국 황제 아우랑제브 소유의 『Ganj-i-Sawai|간지=이=사와이|간즈웨이영어[138]』를 포획했다.[137] 700톤 대형 선박인 간지=이=사와이는 80문 대포, 200명 선원, 400~500명의 조총 병사가 타고 있었으나,[136][137] 에브리 일당에게 항복했다. 해적들은 배 위에서 만행을 저질렀고, 이 습격으로 325000GBP에서 600000GBP를 약탈했다.[139]

에브리 일당은 파테 무하마드 호와 간즈웨이 호에서 현재 가치로 2억달러에 달하는 재물을 약탈했다.[140]

3. 3. 간지사와이 호 나포

1695년, 에브리는 메카로 향하는 하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대 무굴 함대를 기다리기 위해 페림 섬으로 갔다. 이 함대는 아시아에서 가장 값진 전리품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나포하는 해적은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었다.[50] 에브리는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 다른 5명의 해적 선장들과 합류했다. 이들은 약 60명의 선원을 가진 슬루프(sloop-of-war) ''Amity''의 테우, ''Portsmouth Adventure''의 조지프 파로, ''Dolphin''의 리처드 원트, ''Pearl''의 윌리엄 메이스, ''Susanna''의 토머스 웨이크였다.[51] 에브리는 테우가 경험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6척의 해적 함대의 제독으로 선출되어 440명 이상의 지휘관이 되었다.[51]

무굴 제국 선단에는 1,600톤급 ''간지사와이''(Ganj-i-sawai)와 3,200톤급 ''파테 무함마드''가 포함되어 있었다. ''간지사와이''는 80문의 대포와 1,100명의 선원을, ''파테 무함마드''는 94문의 대포와 800명의 선원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수라트로 향하던 중 밤에 해적 함대를 따돌렸지만, 해적들은 추격을 시작했다. ''Fateh Muhammed''의 보물은 약 5만 파운드에서 6만 파운드에 달했지만,[52] 에브리의 선원들은 적은 몫을 받았다.[53]

무함마드 이브라힘 선장이 지휘하는 ''간지사와이''는 80문의 대포와 400명의 머스킷으로 무장한 경비병, 그리고 600명의 승객들을 갖춘 강력한 상대였다. ''Pearl''의 선원들은 처음에 공격을 두려워했지만, 에브리의 선원들과 함께 인도 배의 갑판에 합류하여 2~3시간 동안 격렬한 백병전을 벌였다.[54]

당시 수라트에 있던 인도 역사가 카피 칸은 에브리의 선원들이 배에 탑승했을 때 ''간지사와이''의 선장이 갑판 아래로 달려가 노예 소녀들을 무장시켜 해적과 싸우게 했다고 기록했다.[55][56] 카피 칸은 "기독교인들은 칼을 사용하는 데 대담하지 않았고, 왕실 선박에는 너무 많은 무기가 있어서 선장이 저항했더라면 그들은 패배했을 것이다."라고 기록하며 이브라힘 선장에게 책임을 돌렸다.[55]

카피 칸에 따르면, 승리한 해적들은 며칠 동안 포로들을 강간하고 살해했으며, 고문을 가해 보물의 위치를 알아냈다. 일부 무슬림 여성들은 침략을 피하기 위해 자살했고, 살아남은 여성들은 ''Fancy''에 태워졌다.[57]

이후 이야기에서는 에브리가 배 안에서 아우랑제브 황제의 딸이나 손녀를 찾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동인도 회사의 자료에 따르면, ''간지사와이''는 황제의 "친척"을 태우고 있었지만, 그의 딸과 수행원이었음을 시사하는 증거는 없다.[58]) 생존자들은 비어 있는 배에 남겨져 인도까지 항해를 계속하도록 풀려났다. ''간지사와이''에서 약탈한 재물은 금화와 은화 50만 개를 포함하여 총 20만 파운드에서 60만 파운드에 달했다.

3. 4. 전리품 분배 및 도주

에브리의 해적들은 보물을 분배했다. 에브리가 다른 선장들을 설득하는 뛰어난 기술을 발휘하여 무굴 제국에서 약탈한 물품을 자신이 보관하게 하고, 밤에 몰래 전체 전리품을 가지고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가끔 전해지지만, 이는 신뢰할 수 없는 기록인 찰스 존슨의 ''해적의 일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자료에 따르면, ''펄''호와 ''팬시''호의 선원들 사이에 동전 깎기된 동전이 교환되었으며, 격분한 에브리의 부하들은 ''펄''의 보물을 압수했다. (''포츠머스 어드벤처''는 ''간지사와이''와의 전투를 관전만 했을 뿐 참여하지 않았기에, 파로의 선원들은 그 보물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 후 에브리의 부하들은 메이즈에게 2000pieceofeight (아마도 약탈한 보물이 다른 액면가의 인도 및 아라비아 동전이었을 것이므로 대략적인 금액일 것이다)를 공급품 구매를 위해 제공했고, 곧 헤어졌다.[61]

일당은 무굴 선박에서 약탈한 재산을 분배하기 위해 인도양의 레위니옹 섬으로 향했다. 전리품은 50만 개의 동전, 보석류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무굴 제국의 황제에게 바쳐질 예정이었다.[141] 재산 분배율은 기록에 따라 다양했는데, 다음 표와 같다.

인원1인당 분배 금액
180명1000GBP
1인970GBP
400명1000GBP



어쨌든 해적들은 1인당 당시 해군 수병의 75년 치 봉급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았다.[142] 18세 미만의 선원에게는 1인당 500GBP, 14세 미만의 일부에게는 1인당 100GBP가 분배되었다.[141]

4. 에브리의 최후와 선원들의 운명

아우랑제브 황제의 보물선 약탈은 차일드 전쟁의 결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동인도 회사(EIC)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동인도 회사의 연간 총 수입은 급감했고,[62] 에브리의 공격은 인도 내 영국 무역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다. 현지 인도 총독 이티마드 칸은 영국인들을 체포하여 감시했고,[63] 분노한 아우랑제브는 동인도 회사의 인도 내 공장 4곳을 폐쇄하고 임원들을 투옥했으며, 봄베이에 대한 무력 공격 명령을 내릴 뻔했다.[64]

아우랑제브를 달래기 위해 동인도 회사는 모든 재정적 배상을 약속했고, 영국 의회는 해적을 ''인류의 적''(hostis humani generis)이라고 선언했다. 1696년 중반, 영국 정부는 에브리의 목에 500GBP의 현상금을 걸고 제보자에게는 사면을 제공했다. 동인도 회사가 보상금을 1000GBP로 올리자, 기록상 최초의 세계적인 수배가 시작되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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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보 분배 후, 일당은 포르투갈상투메 프린시페를 거쳐 카리브해 바하마의 엘류세라 섬으로 향했다.[142] 이들은 총독에게 뇌물을 주고 입항 허가를 받았다.

바하마에서 해산한 해적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체포되어 처형된 자, 다시 해적이 된 자, 심지어 치안 판사가 된 자까지 다양한 운명을 맞이했다. 에브리는 1696년 6월, 헨리 브리지먼이라는 가명으로 아일랜드의 던파나히로 도주했다.[143][144] 그러나 영국 정부와 동인도 회사가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다.[144][141]

4. 1. 에브리의 최후에 대한 여러 설

에브리가 아우랑제브 황제의 보물선을 약탈한 사건은 차일드 전쟁의 여파로 큰 타격을 입었던 동인도 회사(EIC)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에브리의 공격으로 인해 인도 내 영국 무역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 놓였다.[62][63] 분노한 아우랑제브는 동인도 회사의 인도 내 공장 4곳을 폐쇄하고 임원들을 투옥했으며, 봄베이에 대한 무력 공격 명령을 내릴 뻔했다.[64]

이에 동인도 회사는 모든 재정적 배상을 약속했고, 영국 의회는 에브리를 ''인류의 적''(hostis humani generis)으로 선언했다. 1696년 중반, 영국 정부는 에브리의 목에 500파운드(2023년 11월 기준 약 92,294.70 파운드)의 현상금을 걸고, 제보자에게는 사면을 제공했다.[59][60] 동인도 회사가 보상금을 1,000파운드로 올리면서, 역사상 최초의 세계적인 수배가 시작되었다.[6]

더글러스 R. 버제스는 그의 저서에서 "팬시(Fancy)"호가 세인트토마스를 거쳐 엘류세라 인근의 로열 아일랜드에 정박했다고 주장한다.[65] 에브리의 부하들은 섬 총독 니콜라스 트로트에게 뇌물을 주고 입항 허가를 받았다.[67] 트로트는 9년 전쟁으로 인해 섬의 방어가 취약한 상황에서 "팬시"호의 선원들이 섬 방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에브리 선장이 아우랑제브 황제의 손녀와 그녀의 시종을 만나는 모습을 그린 20세기 초 그림


트로트는 에브리 측과 비공개 회담을 가졌고, "팬시"호를 넘겨받는 대가로 막대한 양의 보물을 받았다.[67] 그러나 트로트는 에브리의 정체를 의심하면서도, 해적 체포 포고령에도 불구하고 에브리의 선원들을 체포하지 않았다. 에브리의 선원들은 바하마 제도에서 자유롭게 지냈지만, 섬의 인구가 적어 돈을 쓸 곳이 없었다. 결국 "팬시"호는 트로트에 의해 파괴되었다.[70]

재보 분배 후, 일당은 포르투갈령 상투메 프린시페를 거쳐 카리브해 바하마의 엘류세라 섬으로 향했다.[142] 이들은 총독에게 뇌물을 주고 입항 허가를 받았다.[142]

바하마에서 해산한 해적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체포되어 처형된 자, 다시 해적이 된 자, 심지어 치안 판사가 된 자까지 다양한 운명을 맞이했다.

에브리는 1696년 6월, 헨리 브리지먼이라는 가명으로 아일랜드의 던파나히로 도주했다.[143][144] 그러나 영국 정부와 동인도 회사가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다.[144][141]

4. 2. 선원들의 운명

재보 분배를 마친 일당은 포르투갈상투메 프린시페를 경유하여 카리브해 바하마에 위치한 엘류세라 섬으로 향했다.[142]

이 지역 총독을 맡고 있던 Nicholas Trott|니컬러스 트로트영어에게, 팬시호는 단순한 노예 무역선이라고 속여 입항을 요청했다. 트로트 자신은 그 설명을 진실로 믿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에이버리로부터 입항 허가를 요청받을 때 동시에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추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42]

바하마에 입항한 해적단은 해산했고, 일당은 각자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 그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교수형을 당한 자도 있었고, 해적으로 돌아간 자, 심지어 치안 판사가 된 자까지 있다.

에이버리는 그 이후 1696년 6월에 헨리 브리지먼이라는 가명을 사용해 아일랜드의 Dunfanaghy|던파나히영어로 도주한 것까지는 알려져 있다.[143][144] 그러나 영국 정부와 동인도 회사로부터 각각 500GBP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운명에 관해서는 불분명하다.[144][141]

5. 역사적 영향

에브리의 활약은 즉시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일부는 그를 불공정한 선장과 사회에 대항하는 반란과 해적이 허용되는 노동 계급의 이상을 보여주는 일종의 훌륭한 해상 로빈 후드로 여겼다.[26] 프랜시스 드레이크헨리 모건을 포함한 다른 "고귀한 해적"의 반열에 합류함으로써, 에브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많은 다른 이들이 해적질을 하도록 영감을 주었다.[103][104] 특히, 에브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시대의 악명 높은 해적들, 검은 수염, 바솔로뮤 로버츠, 칼리코 잭, 새뮤얼 벨라미, 에드워드 로, 스테드 보넷 등이 아직 어린 시절에 자신의 업적을 달성했으며, 그들이 젊은이가 되었을 때 그의 활약은 전설이 되었다.

월터 케네디는 에브리가 *Ganj-i-Sawai*를 약탈한 해에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에브리의 이야기를 배우고 기억했다. 그는 해적질에서 은퇴한 후 런던으로 돌아와 재산을 탕진하고, 심지어 뎁트퍼드에 사창가를 열었다.[105] 그러나 케네디의 범죄는 그를 따라잡아 1721년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에브리의 모험담을 이야기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106]

또 다른 아일랜드인인 에드워드 잉글랜드는 찰스 베인의 전직 무관이었으며, 20년 전 에브리가 그랬던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인도양에서 무굴 선박을 약탈하는 데 경력의 대부분을 보냈다. 베인과 헤어진 후, 잉글랜드는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노예선을 습격했다. 1720년, 그는 말라바르 해안에서 34문의 대포를 갖춘 300톤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점령하고, 새로운 기함의 이름을 *Fancy*로 바꿨다. 불행히도, 잉글랜드는 그에게 포로 고문을 허락하지 않아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에게 마룬되어 모리셔스 섬에 버려졌다. 그는 급조한 뗏목을 만들어 해적왕 자신이 통치한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섬으로 표류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해적 유토피아는 없었고, 그는 알코올 중독자 거지로 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찰스 존슨이 그의 *일반 역사*에서 에브리에게 부여한 허구적이지만 도덕적인 운명이었다. 잉글랜드는 그 이전의 에브리처럼 "짧지만 눈부신 경력"을 가졌고,[107] "에브리 전설을 가장 가깝게 살아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08]

에이버리의 최후는 불분명하지만, 그가 영국으로부터 수배를 피해 생마리 섬에 왕국을 세웠다는 설이 당시부터 퍼져 있었다.[145] 그 왕국에서는 에이버리가 임명한 지휘관들이 요새와 32척의 무장 함대를 이끌고 있었다고 한다.[146] 당시 미국과 유럽 사람들은 에이버리를 생마리 섬을 다스리는 해적왕이나 황제로 여겼다.[145]

1708년에 출판된 『''Some Memoirs Concerning that Famous Pyrate Capt. Avery''』(저자 불명)는 에이버리를 지도자로 하는 해적 집단이 마다가스카르에 민주적인 "해적 공화국"을 건국하여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전했다.[147] 다만, "에이버리가 마다가스카르에 왕국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이 책이 출판되기 전부터 존재했다.[147]

1709년에 출판된 전기 『''The Life and Adventures of Captain John Avery''』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책은 에이버리에게 붙잡혀 원치 않게 해적으로 활동했던 네덜란드인 아드리안 판 부르크 선장의 수기가 정보원이라고 한다.[147] 이 저서에 등장하는 사건은 현재 픽션으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사실로 믿어졌다.[144]

부르크에 따르면 에이버리는 습격한 무굴 제국의 보물선에서 공주를 만나 그녀를 마다가스카르의 생마리 섬으로 데려갔다. 이 섬에서 해적들에 의한 민주적인 정부가 수립되었고, 에이버리가 그 수장이 되었다고 한다.

캡틴 찰스 존슨은 저서 『해적사』 상권에서, 에이버리가 마다가스카르에 왕국을 건국했다는 이야기를 부정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에이버리는 약탈한 다이아몬드를 현금화하려다가 사기꾼에게 속아 결국 자신의 관값을 지불할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하게 사망했다는 것이다.[148] 그러나 당시에는 존슨보다 부르크의 설이 더 널리 믿어졌다.[144]

1713년에 상연된 찰스 존슨의 『''The Successful Pyrate''』에서도 이 왕국이 소재가 되었으며, 그 극의 설정에서는 에이버리가 자신의 과거 행위를 반성하고 뉘우치고 있다. 영국의 소설가 다니엘 데포는 이 전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 『해적왕』을 출판했다.[144]

6. 전설과 문화적 묘사

에브리의 활약은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일부는 그를 불공정한 선장과 사회에 대항하는 반란, 해적이 허용되는 노동 계급의 이상을 보여주는 일종의 훌륭한 해상 로빈 후드로 여겼다.[26] 프랜시스 드레이크헨리 모건을 포함한 다른 "고귀한 해적"의 반열에 합류함으로써, 에브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많은 다른 이들이 해적질을 하도록 영감을 주었다.[103][104] 특히, 에브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시대의 악명 높은 해적들, 검은 수염, 바솔로뮤 로버츠, 칼리코 잭, 새뮤얼 벨라미, 에드워드 로, 스테드 보넷 등이 아직 어린 시절에 자신의 업적을 달성했으며, 그들이 젊은이가 되었을 때 그의 활약은 전설이 되었다.

월터 케네디는 에브리가 *Ganj-i-Sawai*를 약탈한 해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에브리의 이야기를 배우고 기억했다. 그는 해적질에서 은퇴한 후 런던으로 돌아와 재산을 탕진하고, 심지어 뎁트퍼드에 사창가를 열었다.[105] 그러나 케네디의 범죄는 그를 따라잡아 1721년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에브리의 모험담을 이야기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106]

또 다른 아일랜드인인 에드워드 잉글랜드는 찰스 베인의 전직 무관이었으며, 20년 전 에브리가 그랬던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인도양에서 무굴 선박을 약탈하는 데 경력의 대부분을 보냈다. 베인과 헤어진 후, 잉글랜드는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노예선을 습격했다. 1720년, 그는 말라바르 해안에서 34문의 대포를 갖춘 300톤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점령하고, 새로운 기함의 이름을 *Fancy*로 바꿨다. 불행히도, 잉글랜드는 그에게 포로 고문을 허락하지 않아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에게 마룬되어 모리셔스 섬에 버려졌다. 그는 급조한 뗏목을 만들어 해적왕 자신이 통치한다고 여겨지는 바로 그 섬으로 표류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해적 유토피아는 없었고, 그는 알코올 중독자 거지로 죽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찰스 존슨이 그의 *일반 역사*에서 에브리에게 부여한 허구적이지만 도덕적인 운명이었다. 잉글랜드는 그 이전의 에브리처럼 "짧지만 눈부신 경력"을 가졌고,[107] "에브리 전설을 가장 가깝게 살아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08]

헨리 에브리에 대한 몇몇 허구적이고 반(半) 전기적인 이야기가 그가 사라진 수십 년 동안 출판되었다. 1709년, 최초의 이야기는 16페이지 분량의 팸플릿인 ''캡틴 존 에이버리의 삶과 모험; 유명한 영국 해적, 현재 마다가스카르에 거주 중'' (런던: J. 베이커, 1709)으로 나타났다. 익명의 작가가 "아드리안 반 브루크"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썼는데, 그는 에브리의 선원들에게 포로로 잡힌 네덜란드인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야기에서 에브리는 배신적인 해적이자 낭만적인 연인으로 묘사된다. 무굴 선박을 약탈한 후 그는 황제의 딸과 도망쳐 결혼한다.[109] 그 후 부부는 무굴 군대를 피해 생트마리 섬으로 도망가고, 에브리는 가상의 해적 국가인 리베르탈리아와 유사한 해적 유토피아를 건설한다.[110] 에브리는 심지어 공주와 여러 자녀를 두고 새로운 군주국을 설립한다. 마다가스카르의 왕은 곧 15,000명의 해적과 40척의 전함을 지휘하며, 영국과 무굴의 적들의 손이 닿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환상적인 사치를 누리고 있다고 전해진다. 더욱이 에브리는 자신의 화폐를 주조하는데, 그의 왕족의 초상이 새겨진 금화였다.

에브리의 운명에 대한 황당한 소문이 수년 동안 떠돌았지만, 아드리안 반 브루크의 소설화된 전기는 이후 출판물들이 차용하게 될 에브리에 대한 대중적인 전설을 제공했다.[111]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영국 대중은 이 회고록의 선정적인 주장을 믿게 되었다. 유럽 정부는 곧 생트마리 섬에서 온 에브리의 대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접수했고, 전설이 커지면서 국가 원수들조차 놀라운 이야기를 믿기 시작했다. 한때 "최고위층의 영국 및 스코틀랜드 관리들은 이 '해적 외교관'들의 제안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였고", 표트르 대제는 "마다가스카르에 러시아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생트마리 섬의 해적들을 고용하려고 시도했다."[112] 생트마리 섬에 해적의 안식처가 있다는 생각은 흔한 아이디어가 되었다.

그의 악명 때문에 에브리는 검은 수염과 함께 그의 삶이 무대에서 극화된 몇 안 되는 해적 중 한 명이었다.[2] 1712년, 극작가 찰스 존슨은 매우 낭만화된 비극 코미디 ''성공한 해적''을 출판했다. 그것은 논란과 성공을 동시에 거두었고, 드루어리 레인의 로열 극장에서 청중을 즐겁게 했으며, 이듬해 런던에서 인쇄되었다. 그러나 이 연극에는 비판자도 있었다. 극작가이자 평론가인 존 데니스는 유흥 책임자에게 그 연극의 허가를 비판하는 편지를 썼는데, 그는 이를 "무대의 매춘, 악행 조장, 극장의 수치"라고 비난했다.[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은 여러 판으로 상연되었다.

1720년 에브리는 대니얼 디포의 ''해적 왕''의 주요 인물로 등장했고, 그의 소설 ''캡틴 싱글턴''의 부수적인 인물로 등장했다. 두 이야기 모두 에브리의 해적 공화국에 대한 널리 믿어지는 이야기를 인정했다. 찰스 존슨의 영향력 있는 ''해적의 일반 역사'' (1724)가 에브리에 대한 경쟁적인 이야기를 확립했다.[114] 아드리안 반 브루크의 회고록보다 10년 이상 늦게 나온 존슨의 "역사적" 이야기는 에브리가 부당하게 얻은 재화를 팔려다가 재산을 잃고 결국 "관을 살 만큼의 가치도 없게" 되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이야기는 ''플리머스의 악명 높은 해적 캡틴 존 에이버리의 유명한 모험'' (런던: T. 존스턴, 1809)에서 등장했지만, 이것은 이전 출판물의 재해석일 가능성이 높다.[115]

헨리 에브리에 관해 쓰여진 연극과 책 외에도, 그의 경력 동안 성공적인 발라드가 영국에서 인쇄되었다. "자신의 운명을 찾기 위해 바다로 떠난 캡틴 헨리 에브리가 작곡한 운문 한 편"이라는 제목으로, 1694년 5월에서 7월 사이에 런던 인쇄업자 테오필루스 루이스에 의해 브로드사이드로 처음 출판되었고, 에브리 자신이 썼다고 전해진다.[116] 1686년 발라드 "런던에 새로 도착한 두 명의 영국 여행자의 성공"의 곡조에 맞춰진 13개의 연으로 구성되었으며, 이후 새뮤얼 페피스에 의해 수집되어 페피스 도서관에 추가되었다. 루이스에 의해 출판된 원본과 다양한 유사성을 가진 발라드의 최소 9가지 다른 재판이 1694년과 1907년 사이에 인쇄되었다.[116] 최근에는 이 발라드가 로이 팔머의 ''옥스퍼드 해양 노래집'' (뉴욕: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1986)에 실렸다.

"운문 한 편"에는 에브리가 플리머스 근처의 땅의 "공동 소유자"였다는 선언과 같은 몇 가지 진술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에브리가 한때 정보를 공유했던 체포된 선원인 윌리엄 필립스에 의해 나중에 입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브리가 그 시를 썼을 가능성은 낮다. 더 유력한 시나리오는 반란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약 15~20명의 충성스러운 선원 중 한 명이 영국으로 돌아와 에브리에 대한 지식을 공유했고, 이는 빠르게 발라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약간 수정된 사본이 1694년 8월 10일 영국 추밀원에 제임스 호블론 경에 의해 전달되었고, 반란에 대한 조사 중에 증거로 사용되었다. 반란이 수행되기 전에도 에브리가 해적이 될 의향이 있었다고 발표함으로써, 이 발라드는 반란 선원들이 처음부터 해적 의도를 품고 있었다는 추밀원의 확신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따라서 그 발라드는 에브리를 유죄로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쓰여지고 배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17] 어쨌든 이 발라드의 강력함은 그가 당시 가장 악명 높은 해적으로 알려지기 거의 2년 전에 정부가 에브리를 불법화하는 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118]

에브리의 경력 동안 정부는 여론을 해적 행위에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그를 악명 높은 범죄자로 묘사하는 언론을 이용했지만, 그 결과는 "거의 완전한 실패"로 묘사되었다.[119] 많은 대중은 계속해서 해적의 대의에 동정심을 보였다.

에브리의 해적기에 대한 신뢰할 만한 동시대 기록은 없으며, 이후에 만들어진 묘사들은 모순적이고 출처가 의심스럽다. 1724년의 책 『해적의 일반 역사』는 에브리가 X자를 이루는 두 개의 엇갈린 뼈가 새겨진 검은 깃발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발라드 "A Copy of Verses"에 따르면, 에브리의 "방패"는 금색 쉐브론 네 개가 붉은색 바탕에 녹색 테두리로 둘러싸여 있었다.[121] 이것은 그의 깃발을 묘사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붉은색은 당시 해적 깃발에 흔히 사용되는 색이었지만, 네 개의 쉐브론의 의미는 불분명하다; 이것은 에브리를 에브리 가문의 서부 지방 젠트리 가문과 연결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타당한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 가문의 문장은 비슷한 쉐브론을 보여주었다.[122] 나중에 에브리의 것으로 여겨진 또 다른 깃발은 검은색 또는 붉은색 바탕에 두 개의 엇갈린 뼈가 있는 솔트레어 위에 두건과 귀걸이를 착용한 옆모습의 흰색 해골을 묘사한다. 이 주장은 한스 라이프의 1959년 책 『Bordbuch des Satans』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123] 에브리가 실제로 그와 관련된 깃발 중 어떤 것을 사용했는지에 대한 신뢰할 만한 증거는 없다.


  • 1966년 ''닥터 후''의 연재물 ''밀수업자''에는 "에이버리"라는 이름의 해적 선장이 반복적으로 언급되며, 플롯은 에이버리의 보물 탐색을 중심으로 진행된다.[124]
  • 조지 맥도날드 프레이저의 1983년 소설 ''해적들''은 헨리 에이버리를 느슨하게 기반으로 한 벤자민 에이버리 선장의 모험을 다룬다. 1986년 BBC는 마커스 길버트를 롱 벤 에이버리 역으로 하여 소설을 영화화하여 개봉했다.[125]
  • 만화 및 애니메이션 시리즈 ''원피스''에서 캐릭터 골 D. 로저는 "해적왕"으로 불린다. 에브리처럼 그는 또한 해적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물( "원피스"라고 불림)을 획득했다.
  • 2011년 ''닥터 후'' 에피소드 "검은 반점의 저주"에도 휴 보네빌이 연기한 헨리 에이버리라는 해적 선장이 등장한다.[126] 허구의 에이버리는 해적이 되기 전에 영국 해군에서 경력을 시작했으며, 아내와 아이들에게 헌신했으며, 인도의 무굴 제국으로부터 거대한 보물을 획득한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그의 실종에 대한 허구의 원인을 제공한다.[127] 에피소드 이전에 BBC가 공개한 "프리퀄"에서 허구의 에이버리는 자신의 배를 "좋은 배 ''팬시''"라고 명명한다.[128] 4개의 에피소드 후, "선한 남자는 전쟁을 한다"에서 닥터는 에이버리와 아들을 우주 해적으로서 악마의 런 전투에서 그를 돕도록 모집한다.
  • 헨리 에브리는 TV 시리즈 ''블랙 세일즈''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데, 이 시리즈는 ''보물섬''의 프리퀄이다. 그는 블랙 스팟을 발명하고 보물섬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헨리 에이버리는 비디오 게임 ''언차티드 4: 해적왕과 최후의 보물''의 초점이며, 주인공 네이선 드레이크와 그의 형제 사무엘은 그의 보물을 찾는다. 게임에서 에이버리와 토마스 테우는 해적 유토피아 리버탈리아를 설립한 후 그 보물을 두고 서로를 죽였고, 그들의 시체는 리버탈리아가 건설된 마다가스카르 해안의 섬에 있는 에이버리의 배에 놓여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1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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