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릭 셰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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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릭 셰링은 1918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5세에 피아노, 7세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카를 플레슈, 자크 티보에게 사사했으며 파리 음악원 졸업 후 1933년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데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폴란드 망명 정부에서 통역을 맡고 연합군을 위한 위문 연주회를 열었으며, 멕시코에서 멕시코 국립대학 현악과장을 역임하고 시민권을 얻었다. 1954년 연주 활동을 재개하여 피에르 푸르니에,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트리오 활동을 펼쳤으며, 그랑프리 뒤 디스크, 파리 시 은메달, 에디슨 상 등을 수상했다. 1960년 멕시코 문화대사로 위촉되었고, 1988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비롯한 다양한 레퍼토리를 녹음했으며, 1743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 "르 듀크"를 주요 악기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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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릭 셰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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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헨리크 볼레스와프 셰링 |
출생일 | 1918년 9월 22일 |
출생지 | 바르샤바, 폴란드 왕국 |
사망일 | 1988년 3월 3일 |
사망지 | 카셀, 서독 |
국적 | 폴란드, 멕시코 |
직업 | 바이올린 연주자 |
음악가 정보 | |
악기 | 바이올린 |
장르 | 클래식 음악 |
직업 |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
2. 생애
헨릭 셰링은 1918년 9월 22일 폴란드 바르샤바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1] 5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7세에 바이올린으로 전향했으며, 베를린에서 칼 플레슈, 파리 음악원에서 자크 티보 등 당대 최고의 스승들에게 사사했다. 1933년 바르샤바에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솔리스트로 데뷔했고,[2] 이후 나디아 불랑제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7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폴란드 망명 정부의 연락 장교 겸 통역으로 활동하며[2] 연합군을 위한 300회 이상의 위문 연주회를 열었다.[2][7] 1941년 폴란드 난민 정착 문제로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멕시코 정부의 호의에 감명받아 1946년 멕시코 시민권을 취득했다.[7] 이후 멕시코 국립 대학교에서 현악과 학과장을 맡아 교육에 힘썼다.[2]
1954년 멕시코 시티에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만나 그의 강력한 권유로 연주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했다.[3] 이후 루빈스타인, 첼리스트 피에르 푸르니에와 함께 트리오 활동을 펼치는 등 활발한 연주 경력을 쌓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뛰어난 기교와 깊이 있는 음악적 해석으로 그랑프리 뒤 디스크 등 다수의 음반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문화 훈장을 받는 등[3]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인정받았다.
1960년 멕시코 문화 대사로 임명되었고,[7] 1966년 이후에는 파리를 거점으로 활동하면서도 멕시코와의 관계를 꾸준히 이어갔다. 말년에는 모나코로 거주지를 옮겼다. 1988년 3월 3일, 독일 카셀에서 연주 여행 중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으며,[1] 유해는 모나코 묘지에 안장되었다.[5] 그는 7개 국어를 구사하는 국제적인 인물이자 인도주의자였으며, 뛰어난 기교와 음악적 통찰력을 겸비한 연주자로 평가받는다.[7]
2. 1. 초기 생애 ( ~ 1939년)
헨릭 셰링은 1918년 9월 22일 바르샤바, 당시 폴란드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1] 그의 성 "셰링"은 이디시어 성을 폴란드어로 음역한 것이다.5세 때 어머니에게 피아노와 화성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7세에는 바이올린으로 전향하여 모리스 프렌켈에게 지도를 받았다. 이후 베를린으로 가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칼 플레슈에게 사사했다. 그 뒤 파리로 가서 파리 음악원에서 자크 티보를 사사했고, 1937년에 최고상(premier prix)을 받으며 졸업했다.
바이올린 연주자로서의 데뷔는 1933년 1월 6일,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였다. 또한 1933년부터 1939년까지 파리에서 나디아 불랑제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과 멕시코 (1939년 ~ 1954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7개 국어에 능통했던 셰링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총리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의 요청으로 연락 장교와 통역을 맡게 되었다.[2] 이로 인해 학업은 중단되었지만, 바이올린 연주를 계속하여 전 세계 연합군을 위해 300회 이상의 위문 콘서트를 열었다.[2][7]1941년, 셰링은 시코르스키 총리와 함께 4,000여 명의 폴란드 난민을 위한 정착지를 찾기 위해 멕시코를 포함한 라틴 아메리카를 방문했다.[7] 멕시코 정부가 난민들을 받아들이자, 셰링은 이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멕시코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946년 멕시코 귀화 시민이 되어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7] 전쟁 중 멕시코 시티에서 위문 연주를 하던 1943년, 그는 멕시코 국립 대학교로부터 현악기 학과장직을 제안받았고, 1945년에 이를 수락하여 취임했다.[2]
전쟁 후 셰링은 교육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던 1954년, 연주가로서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멕시코 시티에서 콘서트를 연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공연 후 찾아가 만났고, 루빈스타인의 초대로 그의 호텔에서 함께 연주했다.[2] 루빈스타인은 셰링이 연주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바이올린 독주곡을 듣고 "나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음악 애호가는 감동, 즉 셰링의 연주가 선사하는 숭고한 순간을 원한다"고 극찬하며[3] 셰링에게 다시 콘서트 무대에 설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이를 위해 루빈스타인은 유명 임프레사리오인 솔 후로크를 소개해 주었다.[2] 이 만남을 계기로 셰링은 다시 활발한 연주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2. 3. 연주 활동 재개와 국제적 명성 (1954년 ~ 1988년)
1954년, 멕시코 시티를 방문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의 만남은 셰링의 연주 경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3] 셰링은 공연 후 루빈스타인을 찾아가 함께 연주했는데, 특히 바흐의 바이올린 독주곡 연주에 깊은 감명을 받은 루빈스타인은 셰링에게 연주 활동 재개를 강력히 권유했다.[3] 루빈스타인은 유명 기획자 솔 후로크를 소개해 주었으며, 이후 셰링은 루빈스타인과 정기적으로 협연하고 많은 음반을 남겼다. 또한 첼리스트 피에르 푸르니에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하여 고전 실내악 작품들을 녹음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같은 해 뉴욕 데뷔 연주회 역시 큰 성공을 거두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이를 계기로 셰링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왕성한 연주 활동을 펼쳤다. 그는 그랑프리 뒤 디스크 6회 수상, 에디슨 상 2회 수상, 파리 시 은메달 등 다수의 상을 받았다. 1963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문화 훈장 장교(Officier)로 서훈되는 등[3] 음악적 업적을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1964년부터는 피아니스트 찰스 라이너와 파트너십을 맺고 35개의 음반을 함께 제작했으며, 900회 이상의 국제 콘서트를 열었다.[4]
멕시코와의 인연도 꾸준히 이어갔다. 1960년 멕시코 문화 대사로 임명되었고,[7] 1966년 활동 거점을 파리로 옮긴 후에도 멕시코 시티 음악원의 명예 학장직을 유지했으며, 멕시코 시티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음악제가 열리기도 했다. 그는 20년간 파리에 거주하면서도 멕시코 공식 문화 대사 자격의 외교 여권을 사용했으며, 매년 두 차례씩 멕시코를 방문했다. 1970년에는 멕시코의 유네스코 특별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7] 말년에는 모나코로 거주지를 옮겨 마지막 5년을 보냈다.
1983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유럽과 미국을 순회하는 대규모 투어를 가졌다.[7] 7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 실력과 깊이 있는 음악적 통찰력을 겸비하여 동료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7]
1988년 3월 3일, 독일 카셀에서 연주 여행 중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1] 그의 유해는 모나코의 모나코 묘지에 안장되었고, 묘비에는 그가 아꼈던 바흐의 샤콘느 마지막 악절이 새겨져 있다.[5]
3. 주요 활동 및 업적
폴란드 태생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헨릭 셰링은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고 파리 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1933년 바르샤바에서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7개 국어 구사 능력을 바탕으로 폴란드 망명 정부를 위한 활동과 연합군 위문 연주를 병행했다. 전쟁 중 맺은 인연으로 멕시코에 정착하여 시민권을 취득했고, 한동안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에서 교육 활동에 전념하기도 했다.
1954년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강력한 권유를 계기로 연주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특히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 녹음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루빈스타인, 첼리스트 피에르 푸르니에와 함께 피아노 트리오를 결성하여 활발히 활동했으며, 베토벤과 브람스 등의 주요 실내악 작품 녹음을 남겼다.
고전 레퍼토리뿐만 아니라 비에냐프스키, 시마노프스키와 같은 폴란드 작곡가들의 작품과 자신에게 헌정된 마누엘 폰세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 근현대 음악 연주에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잊혀졌던 파가니니의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발굴하여 직접 카덴차를 작곡하고 세계 최초로 녹음하는 등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
활발한 연주 및 녹음 활동으로 다수의 권위 있는 음반상을 수상했으며, 멕시코 문화 대사로 임명되어 외교 무대에서도 활동했다. 1988년 독일 카셀에서 연주회를 준비하던 중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가 말년을 보낸 모나코에 안장되었다.
3. 1. 연주 활동
그는 1933년 1월 6일, 루마니아 지휘자 게오르게 게오르게스쿠의 지휘 아래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요하네스 브람스의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솔로 데뷔를 했다.[2] 같은 해부터 1939년까지 파리에서 나디아 불랑제에게 작곡을 배웠다.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7개 국어에 능통했던 셰링은 폴란드 망명 정부 총리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의 요청으로 연락 장교와 통역을 맡았다. 이 직책을 맡아 학업을 중단했지만, 바이올린 연주를 계속하여 전 세계 연합군을 위해 300회 이상의 위문 콘서트를 열었다. 1941년, 시코르스키 총리와 함께 4,000명의 폴란드 난민을 위한 정착지를 찾기 위해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멕시코 측의 호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후 1943년 멕시코 연주회 중 멕시코 국립 대학교의 현악기 학과장직을 제안받았고, 이를 수락하여 1945년부터 부임했으며 1946년에는 멕시코 귀화 시민이 되었다. 이후 한동안 교육 활동에 전념했다.
1954년, 연주회를 위해 멕시코 시티를 방문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만나면서 연주 활동의 전환점을 맞았다. 루빈스타인은 셰링의 연주, 특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바이올린 독주곡 연주에 깊이 감동하여 "나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진정한 음악 애호가는 감동, 즉 셰링의 연주가 선사하는 숭고한 순간을 원한다"고 말했다.[3] 루빈스타인은 셰링에게 연주 활동을 다시 시작하도록 강력히 권유하며 임프레사리오 솔 후로크를 소개해 주었다. 이후 셰링은 루빈스타인과 정기적으로 협연했으며, 첼리스트 피에르 푸르니에와 함께 트리오로 활동하며 많은 실내악 작품을 녹음했다. 또한 1964년부터는 피아니스트 찰스 라이너와 협력 관계를 맺어 35개의 음반을 제작하고 900회 이상의 국제 콘서트를 열었다.[4]
셰링은 활발한 연주 및 녹음 활동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6번의 그랑프리 뒤 디스크, 2번의 에디슨 상, 파리 시 은메달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1963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문화 훈장 기사장(Officier)을 수훈했다.
1960년에는 멕시코 문화 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1966년 이후 파리를 거점으로 활동했지만, 멕시코 시티 음악원의 명예 학장직을 유지하며 멕시코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멕시코 시티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음악제가 열리기도 했다. 파리에 20년간 거주하면서도 일 년에 두 번씩 멕시코를 방문했으며, 외교 여권을 사용하여 여행했다. 말년에는 모나코로 거주지를 옮겼다.
셰링은 1988년 3월 3일 독일 카셀에서 공연 준비 중 뇌출혈로 사망했다.[1] 그의 유해는 모나코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묘비에는 바흐의 파르티타 2번의 샤콘느 마지막 악절이 새겨져 있다.[5]
셰링은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하며 많은 녹음을 남겼다. 특히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 녹음(두 차례 녹음)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함께 녹음한 베토벤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잉그리드 하블러와 함께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나타 녹음 역시 널리 호평받았다. 또한 니콜로 파가니니의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발굴하여 세계 최초로 녹음했으며, 이를 위해 직접 카덴차를 작곡하기도 했다. 샤를 뮌슈가 지휘하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6], 필립스 레코드에서 녹음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전곡(1991년 모차르트 전집 8권으로 사용됨) 등도 중요한 녹음으로 꼽힌다.
고전 레퍼토리 외에도 비에냐프스키, 시마노프스키와 같은 폴란드 작곡가들의 작품과 자신에게 헌정된 마누엘 폰세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 근현대 작품 연주에도 적극적이었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필립 윌비 보필)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의 녹음도 남겼다.
주요 사용 악기는 1743년 제작된 과르네리 델 제수 "르 듀크(fr)"이다.
'''주요 녹음 목록'''
작품 | 협연 / 지휘 | 녹음 연도 |
---|---|---|
요하네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op. 77 |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피에르 몽퇴 지휘 | 1959 |
표트르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op. 35 |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샤를 뮌슈 지휘 | 1959 |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op. 47 및 F장조 op. 24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피아노) | 1958 |
에두아르 라로, 스페인 교향곡 D단조 op. 21 |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월터 헨들 지휘 | 1961 |
요하네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2번 A장조 op. 100 및 3번 D단조 op. 108 |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피아노) | 1962 |
프리츠 크라이슬러, "셰링이 연주하는 크라이슬러, 그리고 바이올린을 위한 또 다른 보물들" | 찰스 라이너 (피아노) | 1963 |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 1968 | |
카미유 생상스, 바이올린 협주곡 3번, 하바네즈 op.83,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op.28; 모리스 라벨, 치간느 | 몽테카를로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 에두아르 반 레모르텔 지휘 | 1969 |
마누엘 폰세, 바이올린 협주곡; 로돌포 할프터, 바이올린 협주곡 op. 11 |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엔리케 바티스 지휘 | 1985 |
알반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 장 마르티농, 바이올린 협주곡 2번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라파엘 쿠벨릭 지휘 | 1971 |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 64; 슈만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WoO 23 |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안탈 도라티 지휘 | 1965 |
3. 2. 교육 활동
셰링은 5세 때 어머니에게서 피아노와 화성을 배웠다. 7세에는 모리스 프렌켈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후 베를린으로 가 1929년부터 1932년까지 칼 플레시에게 바이올린을 사사받았다. 그 후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자크 티보를 스승으로 모셨고, 1937년 바이올린 부문 수석으로 졸업했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는 파리에서 나디아 불랑제에게 작곡 수업을 받았다.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망명 정부 활동으로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멕시코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1943년부터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에서 현악과장을 맡으며 교육 활동에 전념했다. 1966년 이후에는 프랑스 파리를 거점으로 활동하면서도 멕시코 시티 음악원의 명예학장을 맡는 등 교육 분야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3. 3. 외교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7개 국어에 능통했던 셰링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총리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의 요청으로 연락 장교 겸 통역관으로 활동했다.[7][2] 그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으며, 전쟁 기간 동안 전 세계 연합군 병사들을 위해 300회가 넘는 위문 연주회를 열었다.[2][7]1941년, 셰링은 시코르스키 총리와 함께 약 4,000명의 폴란드 난민이 정착할 곳을 찾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를 방문했다.[7][2] 당시 멕시코 정부가 난민들을 수용해주자 이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2] 감사의 의미로 1946년 멕시코 귀화 시민이 되어 그곳에 정착했다.[7][2] 전쟁 이후에는 멕시코 국립 대학교의 현악기 학과장직을 맡기도 했다.[2]
셰링의 외교적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1960년에는 멕시코 정부로부터 문화 대사로 임명되어 활동했다.[4] 1966년 거주지를 파리로 옮긴 이후에도 멕시코시티 음악원의 명예 원장직을 유지했으며, 멕시코의 공식 문화 대사 자격으로 외교 여권을 소지하고 국제 활동을 펼쳤다.[4] 1970년에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유네스코 특별 고문으로 파리에 파견되기도 했다.[7] 이처럼 그는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국제적 인물이자 인도주의자로서도 활발히 기여했다.[7]
4. 사용 악기
헨릭 셰링은 여러 명기를 소유하고 연주했다. 그가 소유했던 주요 악기는 다음과 같다.
제작 연도 | 제작자 | 별칭/종류 | 비고 |
---|---|---|---|
1744년 | 과르네리 델 제수 | "르 뒤크" (Le Duc) | 셰링이 주로 연주하고 녹음했던 악기이다. |
1683년 | 안드레아 과르네리 | "산타 테레사" (Santa Teresa) | 1974년 멕시코에 기증했으며, 뛰어난 젊은 멕시코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대여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
1734년 | 스트라디바리우스 | "헤라클레스" (Hercules) | 1972년 12월, 이스라엘 건국 25주년을 기념하여 예루살렘시에 기증했다. 뛰어난 젊은 이스라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대여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
1860년 | 장 바티스트 뷔욤 | 메시아 스트라디바리우스 복제품 | 모나코 공 레니에 3세에게 기증했다. |
5. 수상 경력
참조
[1]
웹사이트
Legendary Violinists. Henryk Szeryng
https://web.archive.[...]
2011-04-23
[2]
웹사이트
Henryk Szeryng Discography Part 2: Orchestral Works
http://www.tanomura.[...]
2024-09-22
[3]
웹사이트
H. Szeryng, 69; Violinist and Fan of Mexico
https://www.latimes.[...]
1988-03-04
[4]
서적
Growing with Canada: The Emigré Tradition in Canadian Music
https://books.google[...]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5]
웹사이트
Centennials, Part Two
https://theamericans[...]
2018-08-09
[6]
웹사이트
Tchaikovsky, Szeryng, Munch, Boston Symphony – Violin Concerto (1960, Vinyl)
https://www.discogs.[...]
1960
[7]
서적
Baker's Biographical Dictionary of Musicians, Centennial Edition
Schi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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