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뮌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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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뮌슈는 1891년 알자스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지휘자이다. 스트라스부르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32년 파리에서 지휘자로 데뷔한 후, 시옹 콘서트, 라무뢰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했다. 1949년부터 1962년까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을 역임하며 현대 프랑스 레퍼토리와 고전 작품들을 폭넓게 다루었다. 1967년 파리 관현악단을 창단했으나, 이듬해 미국 투어 중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뮌슈는 열정적인 지휘 스타일과 독일, 프랑스 음악 모두에 능숙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보스턴 심포니와의 많은 음반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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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와 경력
샤를 뮌슈는 스트라스부르 음악원과 파리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한 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 포병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종전 후에는 바이올리니스트와 악장으로 활동하다가 1932년 파리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지휘 데뷔 이후, 뮌슈는 시옹 콘서트, 라무뢰 오케스트라, 파리 심포니 오케스트라, 파리 필하모닉 협회, 콩세르바투아르 협회 오케스트라 등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명성을 쌓았다. 그는 에르베르토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옹호했으며, 아르튀르 오네게르, 알베르 루셀, 프랑시스 풀랑크 등 당대 작곡가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오네게르, 장 로제-뒤카스, 조제프 기 로파르츠, 루셀, 플로랑 슈미트 등 여러 작곡가들의 작품을 초연하기도 했다. 1938년에는 파리 필하모닉 협회장이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점령기에는 프랑스에 남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보호하고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지원했다. 이러한 공로로 1945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1952년에는 ''코망되르'' 칭호를 받았다.
전후 뮌슈는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1949-1962)을 역임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관현악단을 창단(1967)하고 초대 음악 감독을 맡는 등 프랑스 음악계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91-1932)
뮌슈는 1891년 알자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오르간 연주자이자 합창 지휘자인 에른스트 뮌슈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기관차 엔지니어가 되기를 원했지만, 스트라스부르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1912년 졸업 후, 베를린에서 카를 플레슈에게, 파리 음악원에서 뤼시앙 카페에게 배웠다.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에 징집되어 포병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솜 전투 페론에서 가스 공격을 받았고, 베르됭에서 부상을 입었다.[2] 뮌슈는 "알자스인이자 음악가로서 [자신은] 순수하고 깊이 독일인이지만, [그는] 많은 국가의 친구이며 무엇보다도 음악가이자 지휘자"라고 생각했다.[2]
1920년, 스트라스부르 음악원의 바이올린 교수가 되었고, 스트라스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 악장이 되었다. 1920년대 초에는 쾰른의 게르체니히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맡았다. 1926년부터 1933년까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브루노 발터가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지냈다.[1]
1932년 11월 1일, 41세의 나이에 파리에서 지휘 데뷔를 했다. 뮌슈의 약혼녀 제네비에브 모리(Nestlé 초콜릿 회사의 창립자 손녀)는 홀을 빌리고 발터 슈타람 콘서트 오케스트라를 고용했다.
2. 2.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 (1949-1962)
뮌슈는 1946년 12월 27일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데뷔했으며, 1949년부터 1962년까지 음악 감독을 맡았다. 1951년부터 1962년까지 버크셔 음악 축제 및 버크셔 음악 센터(탱글우드)의 감독 또한 역임했다. 그는 권위적인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후임으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만족하는 여유로운 리허설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탱글우드에서 그의 제자로는 세르주 푸르니에와 국제 오케스트라 지휘자 콩쿠르 우승자인 오자와 세이지가 있었다.[5] 뮌슈는 보스턴 칼리지, 보스턴 대학교, 브랜다이스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그는 클로드 드뷔시와 모리스 라벨을 포함한 현대 프랑스 레퍼토리에 뛰어났으며,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권위 있는 연주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뮌슈의 프로그램은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바그너 등 다양한 작곡가들의 작품도 정기적으로 다루었다. 보스턴에서 13년 동안 재임하면서 39개의 세계 초연과 58개의 미국 초연을 선보였고, 청중에게 168개의 현대 작품을 소개했다. 이 중 14개의 초연은 1956년 오케스트라 창립 75주년을 기념하여 보스턴 심포니와 쿠세비츠키 음악 재단이 위촉한 작품이었다. (15번째 위촉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다.)
뮌슈는 25년 이상 보스턴 심포니를 떠나 있었던 전 음악 감독 피에르 몽퇴를 초청하여 객원 지휘, 녹음 및 오케스트라 투어를 함께 진행했다. 뮌슈의 지휘 아래 객원 지휘자들은 보스턴과 탱글우드에서 보스턴 심포니 프로그램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뮌슈는 1953년 보스턴 심포니를 이끌고 미국 대륙 횡단 투어를 처음으로 진행했다. 그는 1952년과 1956년 유럽, 1960년 동아시아와 호주 투어를 통해 해외 투어를 이끈 최초의 지휘자였다. 1956년 투어에서 보스턴 심포니는 소련에서 공연한 최초의 미국 오케스트라였다.
뮌슈의 지휘 아래 보스턴 심포니는 1949년부터 1953년까지 RCA 빅터에서 모노럴 사운드로, 1954년부터 1962년까지는 모노럴과 스테레오 버전으로 일련의 녹음을 진행했다.
레너드 번스타인, 쿠세비츠키, 뮌슈의 지휘 아래 보스턴 심포니 리허설 일부는 1948년부터 1951년까지 NBC 라디오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적으로 방송되었다. NBC는 1954년부터 1957년까지 오케스트라 공연 일부를 방송했다. 1951년부터 BSO는 보스턴 지역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방송되었으며, 1957년부터는 뮌슈와 객원 지휘자들의 지휘 아래 보스턴 심포니 공연이 보스턴 심포니 녹음 신탁을 통해 지역, 전국 및 국제적으로 배포되었다. 뮌슈의 지휘 아래 보스턴 심포니는 텔레비전에도 출연했는데, 첫 번째 BSO 텔레비전 방송은 1949년 카네기 홀에서 번스타인의 지휘로 진행되었다.
2. 3. 파리 관현악단 창단과 말년 (1962-1968)
뮌슈는 프랑스로 돌아와 1963년 파리고등사범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는 또한 프랑스 솔리스트 예술가 길드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60년대 동안, 뮌슈는 미국, 유럽, 일본에서 객원 지휘자로 정기적으로 출연했다. 1967년,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의 요청에 따라 그는 프랑스 최초의 전임 유급 오케스트라인 파리 관현악단을 창단했으며, 1967년 11월 14일에 첫 번째 콘서트를 지휘했다.[1] 이듬해, 그는 새 오케스트라와 함께 미국을 순회 공연하던 중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 그의 유해는 프랑스로 반환되어 루브시엔 묘지에 안장되었다.[1] EMI는 라벨의 ''G장조 피아노 협주곡''을 포함하여 이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그의 마지막 세션들을 녹음했으며, 사후에 발매했다.[1]3. 지휘 스타일 및 음악적 특징
뮌슈는 긴 지휘봉을 풍차처럼 휘두르는 정열적인 지휘 솜씨, 폭발적인 열기 넘치는 음악 표현으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또한 즉흥 연주의 명수였으며, 몹시 연습을 싫어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만약 면밀한 프 로베를 하더라도, 본 공연 중에 악마 같은 미소를 지으며 연습과는 전혀 다른 지시를 내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뮌슈와 수많은 공연을 함께 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제2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악단장을 맡았던 오토 슈트라서는, 마찬가지로 즉흥 연주의 대가이며 연습을 싫어했던 한스 크나퍼츠부슈와의 공통점을 지적하고 있다.
생애의 거의 절반씩을 각각 독일인과 프랑스인으로 보낸 뮌슈는 양국의 음악을 모두 능숙하게 다뤘다. 오랜 파트너였던 보스턴 교향악단과의 연주는 RCA 레이블에, 만년의 파리 관현악단과의 녹음은 EMI 레이블에 주로 남아 있다. 특히 파리 관현악단과의 녹음에서,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과 브람스의 제1 교향곡 레코드·CD는 평가가 높다. 보스턴 교향악단과도 독일 음악에서는 베토벤, 슈베르트, 멘델스존 등, 프랑스 음악에서는 베를리오즈, 프랑크, 생상스, 쇼송, 드뷔시, 라벨 등에 명반을 남겼다.
또한, 오자와 세이지와 샤를 뒤투아를 가르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4. 주요 음반
뮌슈는 방대한 음반 목록을 남겼다. RCA 빅터에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음반과 영국 데카, EMI, 노네서치, 에라토, 오비디스-발루아 등 다양한 레이블에서 유럽의 여러 악단 및 객원 지휘 활동으로 녹음한 음반이 있다.[5]
뮌슈는 전쟁 전 파리에서 EMI와 음반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후 1940년대 후반 데카의 풀 프리퀀시 레인지 레코딩(FFRR) 시리즈로 명성을 얻었다. 뉴욕 필하모닉과 콜롬비아에서 여러 녹음을 한 후, 보스턴 음악 감독으로 부임한 직후 RCA 빅터와 녹음을 시작했는데, 베를리오즈, 오네게르, 루셀, 생상스 등의 녹음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5]
1954년 2월 보스턴 심포니 홀에서 보스턴 심포니와 함께 녹음한 최초의 스테레오 녹음은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의 겁벌'' 전곡이었다. 이 녹음은 모노럴 및 실험적인 스테레오 사운드로 동시에 제작되었지만, 상업적으로는 모노 녹음만 출시되었다. 스테레오 테이프는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으며, 모노럴 버전은 미국 국립 녹음 보존 위원회에 추가되었다. 보스턴에서의 마지막 녹음 중 하나는 세자르 프랑크의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의 1962년 공연이었다.[5]
뮌슈는 파리로 돌아온 후 라무뢰 오케스트라와 에라토 디스크를 제작했고, 파리 오케스트라와는 EMI에서 다시 녹음했다. 데카/런던을 포함한 여러 다른 회사와도 녹음했다.[5]
뮌슈의 여러 녹음은 원래 출시 이후 지속적으로 이용 가능했으며, 그중에는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과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가 있다. RCA는 뮌슈의 모든 녹음을 포함하는 멀티 디스크 세트로 ''뮌슈, 베를리오즈를 지휘하다''를 재발매했다. BMG/일본은 뮌슈의 RCA 빅터 녹음을 CD로 두 가지 다른 에디션(1998년 및 2006년)으로 출시했다. 2006년 에디션은 41개의 CD로 구성되었으며 보스턴 심포니와 함께한 뮌슈 녹음의 거의 전부를 포함했다. 2016년, 소니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포함하여 뮌슈의 모든 콜롬비아 및 RCA 빅터 녹음을 출시했다. 이 중 많은 녹음이 콤팩트 디스크로 공식적으로 출시된 적이 없었다. 2018년, 워너 클래식은 이전 EMI 그룹의 레이블 아카이브에서 가져온 뮌슈의 녹음을 포괄적으로 담은 CD 박스 세트를 발매했다. 엘로퀀스 오스트레일리아는 2020년에 뮌슈의 데카 녹음 전집 CD 박스 세트를 발매했다.[5]
별도 언급이 없는 한 보스턴 교향악단과의 스테레오 녹음이다.[5]
5. 참고 문헌
레오나드 버카트가 영어로 번역한 샤를 뮌슈의 저서 《나는 지휘자다》(I Am a Conductor)가 1955년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원래 1954년 프랑스어로 《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다》(Je suis chef d'orchestre|주 쉬 셰프 도케스트르프랑스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며, 뮌슈의 지휘와 지휘자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다.
D. Kern Holoman은 뮌슈의 첫 영문 전기 《샤를 뮌슈》(Charles Munch)를 저술하여 2011년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판하였다.
참조
[1]
서적
Münch [Munch], Charles
https://www.oxfordmu[...]
[2]
인용
Charles Munch, quoted by Bernard Gavoty in his preface for ''Je suis chef d'orchestre'', Paris: 1954.
[3]
문서
Holoman, 2011, p.47
[4]
문서
Munch, 1955, p.32
[5]
웹사이트
A Tribute to Seiji Ozawa
https://www.bso.org/[...]
2024-02-11
[6]
서적
Charles Munch
Oxford University Press, USA
201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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