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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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진이는 16세기 조선 시대의 기생으로, 빼어난 미모와 뛰어난 예술적 재능으로 유명했다. 1506년경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양반의 아들이었던 아버지와 기생 또는 천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서녀로 기생이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시, 서예, 음악 등 다방면에 능했으며,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녀의 삶은 수많은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소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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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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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황진이 |
한글 | 황진이 |
한자 | 黃眞伊 |
로마자 표기 | Hwang Jini |
문화관광부 2000년식 로마자 표기 | Hwang Jini |
별칭 | 명월(明月) |
한글 (별칭) | 명월 |
한자 (별칭) | 明月 |
로마자 표기 (별칭) | Myeong-wol |
분야 | 시문학, 서화, 시, 한시, 한국 무용 |
기본 정보 | |
출생 | 1506년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개성부 |
사망 | 1567년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개성부 |
국적 | 조선 |
학력 | |
수학 | 한학 |
직업 | |
직업 | 기녀, 시인, 서예가, 작가, 사상가, 화가, 무용가 |
종교 | |
종교 | 유학 성리학 |
가족 | |
부모 | 황 진사(부), 진현금(모) |
작품 | |
대표작 | 황진이 문서 참조 만월대 회고 소요월야사하사 상사몽 송도 박연 |
2. 생애
황진이는 1506년경 정치가의 아들 황진사와 기생 또는 천민 출신인 진현금 사이에서 서출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개성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맹인 상민의 딸로 태어났다고도 한다. 1945년 광복 당시에도 그녀가 살았던 장단의 우물 언덕에서 광천수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황진이는 아름다움과 당당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황진이가 나이가 들면서 많은 남자들이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그녀의 집 앞을 지나던 상여가 그녀의 시 낭송 소리에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급히 뛰쳐나가 한복의 치마를 벗어 상여를 덮자 그제야 상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여에는 신분이 높은 연인의 시체가 실려 있었으나, 그녀의 낮은 신분 때문에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없었고, 그 남자는 상사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녀는 15세에 연인을 잃은 후 기생이 되기로 결심했다.
조선 시대 여성들은 집 안에 갇혀 재산으로 여겨졌다. 마음대로 결혼할 수 없었고, 서출로 태어난 딸은 천대받았다. 황진이는 여성에게 엄격한 사회적 규범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기생의 삶을 선택하여 춤과 음악뿐 아니라 예술, 문학, 시 등 당시 여성들에게 가르쳐지지 않던 분야를 자유롭게 배울 수 있었다.
황진이의 아름다움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유명했다. 민낯에 머리를 틀어 올려도 아름다움이 빛났다고 한다. 그녀는 총명하고 재치 있고 예술적이었다. 상류층과 하류층의 많은 남자들이 그녀와 그녀의 공연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찾아왔다. 당시 다른 기생들처럼 그녀는 방문한 남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었고, 정답을 맞힌 자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수수께끼는 "점일이구 이두불출(點一二口牛頭不出)"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만큼 지적인 남자를 만나 결혼하기 위해 어려운 수수께끼를 냈고, 그 수수께끼를 푼 유일한 사람은 서경덕이라는 양반이었다. 어머니의 영재 교육을 받아 7세에 어려운 한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9세에는 스스로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한 청년이 황진이에게 반하지만 신분의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고 자살한다. 그 청년의 시체를 관에 넣어 수레로 무덤까지 운반하는 도중 황진이의 집 앞에서 멈췄다. 이 소식을 들은 황진이는 자신의 옷을 관에 덮자 움직이지 않던 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황진이는 기생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죽음을 예감하자, 자신의 같은 여성이 나오지 않도록 “내가 죽으면 시체를 관에 넣지 말고 개미와 솔개의 먹이로 삼아 여성들의 경계로 삼도록 하라”고 유언했다고 전해진다.
2. 1. 생애 초기
1506년경 황진이는 정치가의 아들 황진사(黃進士)와 진현금(陳玄琴) 사이에서 태어났다. 진현금은 기생 또는 천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머니 진현금이 빨래를 하던 중 황진사와 만났지만 결혼할 수 없었고, 황진이는 서출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개성의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황진이는 맹인 상민의 딸로 태어났다고도 한다. 1945년 광복 당시에도 그녀가 살았던 장단의 우물 언덕에서 광천수가 나왔다고 전해진다.황진이는 아름다움과 당당한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은 한반도 전역에 알려졌다. 민낯에 머리를 틀어 올려도 아름다움이 빛났다고 한다. 총명하고 재치 있고 예술적이었던 황진이를 보기 위해 상류층과 하류층의 많은 남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찾아왔다. 당시 다른 기생들처럼 황진이는 방문한 남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냈고, 정답을 맞힌 사람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수수께끼는 "점일이구 이두불출(點一二口牛頭不出)"로 알려져 있으며, 이 수수께끼를 푼 유일한 사람은 서경덕이라는 양반이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영재 교육을 받아 7세에 어려운 한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9세에는 스스로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2. 1. 1. 출생과 유년기
1506년 전후로 추정되는 시기에 황진이는 개성에서 양반 가문의 서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황진사는 양반이었으나, 어머니는 '진현금'(陳玄琴)이라 불리는 시각 장애인으로, 기생 또는 천민 출신으로 추측된다.[13] 황진이는 조선 시대 종모법에 따라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야 했기에 천출이었다. '황진이'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황진'에 접미사 '-이'가 붙은 형태일 가능성이 제기된다.[13]어머니의 보살핌 아래 황진이는 양반집 딸처럼 학문과 예의범절을 배웠다.[13] 여덟 살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에는 이미 한문 고전을 읽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서화와 가야금에도 능했다.[13]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황진이에게 반한 한 청년이 신분 차이로 인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그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서 멈춰 섰다고 한다. 황진이가 자신의 옷을 관에 덮자 그제야 상여가 움직였다고 하며, 이 사건을 계기로 황진이는 기생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2. 1. 2. 기생이 된 이유
황진이가 기생이 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시각장애인이던 어머니가 기녀 출신이었다는 설, 짝사랑하던 남성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서녀 출신임을 비관하여 스스로 기녀가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황진이가 15살 때, 그녀를 짝사랑하던 한 동네 청년이 상사병으로 죽었다. 장례 중 죽은 남자의 상여가 황진이 집 앞을 지날 때 멈춰 섰고, 황진이의 속적삼을 상여 위에 올리자 비로소 움직였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황진이는 평범한 여자로 사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해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어머니 진현금은 기생 또는 천인 출신으로, 황진이는 서녀 출신임을 비관하여 스스로 기녀가 되었다고 한다. 황진이는 1506년경 정치가의 아들 황진사(黃進士)와 진현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머니가 빨래를 하는 중에 두 사람이 만났지만 결혼할 수 없었고, 황진이는 서출로 태어났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그녀의 집 앞을 지나던 상여가 그녀의 시 낭송 소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한복 치마를 벗어 상여를 덮었고, 그제야 상여가 다시 움직였다. 상여에는 신분이 높은 연인의 시체가 실려 있었으나, 낮은 신분 때문에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없었고, 그 남자는 상사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녀는 15세에 연인을 잃은 후 기생이 되기로 결심했다.
조선 시대 여성들은 집 안에 갇혀 재산으로 여겨졌다. 서출로 태어난 딸은 천대받았다. 황진이는 여성에게 엄격한 사회적 규범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기생의 삶을 선택하여 춤, 음악, 예술, 문학, 시 등 당시 여성들에게 가르쳐지지 않던 분야를 자유롭게 배웠다.
어느 날, 한 청년이 황진이에게 반해 자살한다. 청년의 시체를 관에 넣어 운반하는 도중 황진이 집 앞에서 멈췄고, 황진이가 자신의 옷을 관에 덮자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황진이는 기생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2. 2. 기녀 생활과 예술, 작품 활동
황진이는 시와 글씨, 그림, 서예에 두루 능했다.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했으며, 성리학과 고전 지식 역시 해박하였다. 당대의 명사, 한량들과 교류하며 시문 등을 주고받기도 하고 연인이 되기도 하였다. 왕족인 벽계수를 유혹하는가 하면 당대의 고관대작들을 유혹하거나 망신을 주기도 했다.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승려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다.[12] 서경덕을 유혹하는 것은 실패하였으나 그의 인품에 탄복하여 그를 사숙,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하여 그에게서 당시(唐詩)를 배웠다.황진이의 여러 시조들은 문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어 고전 한국문학의 일부로 인정되며, 교과서에도 실리는 중요한 작품이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거나 교류하였으며, 남녀간의 애정에 대한 내용을 시와 그림으로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유실되었으나 몇 수의 시가 현재 전한다.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기생(kisaeng)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활동했던 여성 예술가들로,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나이에 공식적으로 예인으로 인정받아 시, 음악, 무용 등을 교육받았다. 기생들은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보다 교육 수준이 높았지만, 조선 시대의 최하층 계급인 천민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양반 남성들을 위해 노래와 춤, 시조 시 낭송 등의 공연을 제공하는 등의 오락을 제공하였다. 기생들은 악기 연주, 시조 시 짓기, 노래 작곡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황진이는 재치와 지성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점일이구 이두불출(點 一 二 口 牛 頭 不出)"이라는 수수께끼였다. 그녀는 연인이 되고자 하는 모든 남자에게 이 수수께끼를 내었고, 한 남자가 답을 맞출 때까지 여러 해를 기다렸다. 수수께끼의 답은 제목에 있었다. "제목의 변형을 결합하면 앞부분 '점일이구(點 一 二 口)'는 말(言)을 의미하는 한자를 만들고, 뒷부분 '이두불출(牛 頭 不出)'은 낮(午)을 의미하는 한자를 만든다. 두 글자를 합치면 허락(許)을 의미하는 한자를 만든다."
오늘날 그녀의 시조와 거문고곡은 소수만 남아 있다. 황진이의 시조는 개성(개성)의 아름다움과 명소(예: 만월대 궁궐과 아호비룡산의 박연폭포)를 묘사하거나, 잃어버린 사랑의 개인적 비극, 유명한 고전 중국시와 문학에 대한 반응을 담고 있다.
그녀의 시조는 역대 최고로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다음 시에서 황진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는 연인과 겨울 추위에 얼어붙은 사람을 모두 가리킨다.
冬至 섯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잘라 내어|동지 섣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잘라 내어한국어
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한국어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한국어
다음 시 "보름달"은 황진이의 필명 명월(明月)과의 언어유희이다. 이 시는 황진이가 유혹했던 것으로 유명한 벽계수(碧溪水)에게 바친 시이다. "푸른 물"은 벽계수의 이름과의 언어유희이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쉬이 감을 자랑 마라.한국어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한국어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할 제 쉬어간들 어떠리.|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할 제 쉬어간들 어떠리.한국어
푸른 시냇물은 황진이의 삶의 여러 측면을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채운 시이다. 이 시에서 "푸른 시냇물"은 황진이의 연인인 이창근(벽계수, 이종숙으로도 알려짐)을 상징한다. 기생으로서 그녀의 삶은 천민으로서 사회 최하층의 제약 속에 있었다. 이 시를 통해 황진이는 이창근에게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자신과 함께 있으라고 말한다.
2. 2. 1. 남성 편력
용모가 출중하고 노래, 춤, 악기, 한시 등에 두루 능했기 때문에 당시 선비들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겼다.[12] 그래서 그녀와 당대의 내로라 하는 선비들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남게 되었다.[12]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켰으며,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다가 헤어졌다. 풍류 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14]이사종과 헤어진 후 다시 개성으로 돌아왔으나 지족선사를 잊지 못해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황진이의 재방문에도 수행 중이던 지족은 요지부동이었다. 지족암에서 끄떡없이 앉아 있는 지족에게 다가가 꽃을 꽂고 수행 중이던 지족의 무릎을 베고 잠을 청하기도 하고, 말도 걸어 보았지만 지족선사는 그대로였다. "지족! 그대 같은 큰 위선 덩어린 없을 거요!" 황진이의 지적에 놀란 지족은 다시 무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다시 암자로 찾아가 황진이가 지족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한참 뒤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고 지족이 그를 깨우자, 지족이 덤덤한 웃음으로 말을 건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족선사와의 관계도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떠나게 된다.
한편 황진이는 당대의 은둔학자인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는 서경덕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한다.[12]
2. 3. 최후
황진이의 사망 일자와 정확한 사망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황진이는 죽기 전에 "나 때문에 천하의 남자들이 자애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동문 밖 개울가에 시체를 두어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삼게 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일설에는 황진이의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렀는데, 한 남자가 거두어 장사 지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1567년 무렵을 전후해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사대부의 위선에 대한 조소와 미모로 남성을 유혹하여 성 관계를 맺은 것 등이 문제시되면서, 조선시대 내내 황진이는 음란함의 상징이자 사대부에 대한 모욕적인 행실을 한 인물로 여겨져 언급이 금기시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다. 일설에는 황진이가 죽은 뒤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일부러 들판에 버려졌다는 이야기가 누군가에 의해 유포되기도 했다. 황진이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구정현 판교동(현재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판교리)[15]에 있다.
2. 4. 사후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고,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했다. 황진이 사후 음란하다는 이유로 사대부들에게 지탄을 받았고, 사대부들에 대한 조롱과 풍자, 유혹 등의 행실이 문제시되어 언급이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시 재주와 학식,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었으므로 그에 대한 일화가 구전을 통해 많이 전해졌다.그의 작품들 역시 그가 음란함의 상징으로 몰렸고, 전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사라졌으며, 남은 작품들 또한 사대부에 대한 조롱과 풍자 등이 문제시되어 제대로 보전되지 못하여 대부분 인멸, 실전되었다. 그의 시와 작품들 중 일부는 《청구영언》, 《해동가요》, 《동국시선》, 《가곡원류》, 《대동풍아(大東風雅)》 등의 문헌에 전하고 있다. 또한 《금계필담》과 《어우야담》 등에도 그에 대한 일화가 일부 전해져 내려왔다.
그가 지은 작품으로는 한시 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 영초월시(咏初月詩), 등만월대회고(登滿月臺懷古[16]) 등이 전하고 있으며, 시조 작품으로는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내언제 신의 없어, 산은 옛 산이로되, 어져 내일이여 등이 있다.
항간에 소세양이라는 인물에 대한 사랑과 황진이의 극진한 이별의 시를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극작가 양인자 씨가 황진이와는 전혀 관계없이 본인이 창작한 시라는 것을 TV에서 밝힌 바 있다.
3. 작품
황진이는 재치와 지성으로 유명했는데,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점일이구 이두불출(點 一 二 口 牛 頭 不出)"이라는 수수께끼였다. 이 수수께끼의 답은 제목에 있었다. "제목의 변형을 결합하면 앞부분 '점일이구(點 一 二 口)'는 말(言)을 의미하는 한자를 만들고, 뒷부분 '이두불출(牛 頭 不出)'은 낮(午)을 의미하는 한자를 만든다. 두 글자를 합치면 허락(許)을 의미하는 한자를 만든다."[5] 이는 그녀의 재치와 지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전해지는 황진이의 작품은 시조와 거문고곡 등 소수에 불과하지만, 뛰어난 언어 구사 능력과 음악적 구성 솜씨를 보여준다. 황진이의 시조는 개성의 아름다움과 만월대, 박연폭포와 같은 명소를 묘사하거나, 잃어버린 사랑의 개인적 비극, 유명한 고전 중국시와 문학에 대한 반응(대부분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반추)을 담고 있다.
황진이의 시조 중 하나인 "동짓달 기나긴 밤을"은 사랑하는 임(어론님)을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여기서 '어론님'은 연인과 겨울 추위에 얼어붙은 사람을 모두 가리키는 중의적인 표현으로, 영어 표현 "frozen love"와 유사하다.
冬至 섯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잘라 내어|동지 섣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한국어
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한국어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한국어
또 다른 시조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는 황진이의 필명인 명월(明月)과의 언어유희를 담고 있으며, 벽계수(碧溪水)에게 바친 시이다. "푸른 물"은 벽계수의 이름과의 언어유희이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쉬이 감을 자랑 마라.한국어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한국어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할 제 쉬어간들 어떠리.|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할 제 쉬어간들 어떠리.한국어
이 시는 푸른 시냇물(벽계수, 이종숙)이 바다에 이르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황진이가 이창근에게 자신과 함께 있어 달라는 애틋한 감정을 표현한다. 또한, "달빛"은 황진이의 기생 이름인 "명월"을 의미하며, 시에서 자신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된다. 기생으로서 겪는 사회적 제약과 사랑의 복잡한 감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5]
현재까지 전해지는 황진이의 시조와 현금 단편들은 시와 음악을 편곡하는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그녀의 시조에는 송도의 산수, 만월대, 박연폭포 등이 묘사되어 있으며,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비극, 고전 한시와 문학에 대한 오마주 등이 담겨 있다.
4. 평가
그의 시들은 남녀 간의 애정을 노래하면서도, 정교하고 빈틈이 없는 점 등 완성도가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과 세련된 언어 구사를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5. 대중 문화에 미친 영향
20세기 이후,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황진이의 일생을 다룬 소설들이 많이 등장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태준, 전경린, 김탁환, 최인호 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홍석중 등이 황진이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드라마로는 2006년 KBS에서 김탁환의 《나, 황진이》를 각색한 하지원 주연의 《황진이》가 방영되었다. 영화로는 1957년 도금봉 주연의 《황진이》가 개봉되어 대한민국 내에서 흥행하고 중화민국으로 수출되기도 하였다. 홍석중 원작의 《황진이》는 송혜교 주연으로 2007년 6월 6일에 개봉하였다.[6]
20세기 후반, 황진이의 이야기는 남북한 모두의 관심을 끌며 소설, 오페라,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로 재해석되었다. 특히 2002년 북한 작가 홍석중의 소설은 남한에서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북한 소설이 되었고, 2004년 남한 작가 전경린의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6]
다음은 황진이를 소재로 하거나 황진이 역을 맡은 작품 및 배우 목록이다.
연도 | 작품 종류 | 작품 제목 | 배우 | 방송사/기타 |
---|---|---|---|---|
1982년 | 드라마 | 황진이 | 이미숙 | MBC |
1986년 | 영화 | 황진이 | 장미희 | |
2006년 | 드라마 | 황진이 | 하지원, 심은경 | KBS2[7] |
2007년 | 영화 | 황진이 | 송혜교, 김유정[8][9] | |
2020년 | 드라마 | 암행어사 | 권나라 | KBS2[10] |
2021년 | 드래그 경연 프로그램 | 더 불렛 브라더스' 드라굴라 시즌 4 | 호소 테라 토마[11] |
6. 기타
성격이 활달하여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모를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고 한다.[17] 덕이 있는 선비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했으며, 편협하지 않은 지식인이었다는 평도 있다.
다정다감하면서도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名技)였으며, 시조를 통해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18] 주로 사랑에 관한 내용을 담은 그녀의 작품들은 사대부 시조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표현을 갖춤으로써 관습화되어 가던 시조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고 평가된다.[18]
서민 출신이나 교방(敎坊)에서 크게 성공하여, 시, 서예, 음률(詩書音律)이 당대에 독보적이었고 많은 문인과 교유했다. 그의 작품은 기교적이면서 자유롭게 애정을 노래하고 있으며, 국문학사상 전통적인 민족의 리듬으로 교방 여성들의 정한을 시조로 나타낸 데 그 의미가 있다.[19]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체념을 '청산은 내 뜻'이라고 역설적인 자기 과시로 표현하거나, 왕족인 벽계수를 유혹할 수 있는 등의 재치는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었다.[18] 황진이의 시조에 이르러서야 기녀 시조가 본격화되는 동시에 시조 문학이 높은 수준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18]
7. 황진이가 등장한 작품
20세기 후반, 황진이의 이야기는 남북한 모두에게 주목받아 소설, 오페라,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로 재탄생했다. 특히 2002년 북한 작가 홍석중의 소설은 남한에서 만해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북한 소설이 되었고, 2004년 남한 작가 전경린의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6] 1982년 MBC TV 드라마 《황진이》에서는 이미숙이 황진이 역을 맡았다. 2006년 KBS2 드라마 《황진이》에서는 하지원과 심은경이 황진이 역을 맡았다.[7] 2007년 영화 《황진이》에서는 송혜교와 김유정이 황진이 역을 맡았다.[8][9] 2020년 KBS2 드라마 《암행어사 (드라마)》에서는 권나라가 황진이 역을 맡았다.[10] 2021년 미국 드래그 경연 프로그램 《더 불렛 브라더스' 드라굴라》 시즌 4에서는 한국계 미국인 드래그 퀸 호소 테라 토마가 황진이 역을 맡았다.[11]
7. 1. 영화
- 도금봉한국어 - 《황진이》 (1956년)
- 강숙희한국어 - 《황진이의 일생》 (1961년)
- 김지미한국어 - 《황진이의 첫사랑》 (1969년)
- 장미희한국어 - 《황진이》 (1986년)
- 주민희한국어 - 《나의 사랑 황진이》 (1993년)
- 예지원한국어 - 《마당놀이 황진이》 (1996년)
- 송혜교한국어 - 《황진이》 (2006년)
- 신유주한국어 - 《황진이》 (2015년)
- 1986년 영화 《황진이》에서 장미희한국어가 황진이 역을 맡았다.
- 2007년 영화 《황진이》에서 송혜교한국어와 김유정한국어이 황진이 역을 맡았다.[8][9]
- 2007년 6월 6일에 송혜교한국어 주연의 영화 《황진이》(원작 홍석중한국어)가 개봉되었다.
7. 2. 텔레비전 드라마
- 이미숙 - 《여인열전 시리즈 - 황진이》 (MBC, 1982년)
- 윤해영 - 《압구정동 황진이》 (MBC, 1995년)
- 최주현 - 《임꺽정》 (SBS, 1996년)
- 하지원, 심은경 - 《황진이》 (KBS2, 2006년)[7]
- 권나라 - 《암행어사》 (KBS2, 2020년)[10]
- 호소 테라 토마 - 《더 불렛 브라더스' 드라굴라》 시즌 4 (미국, 2021년)[11]
7. 3.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7. 4. 트로트
박상철의 노래 황진이이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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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vang Dzsini sidzso versei (eredeti szövegek, nyers- és műfordítás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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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wha Womans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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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Female Poet in Korean Literature, Hwang J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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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netary Names: Crater, craters: Hwangcini on Ve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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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jo Poetry of Korean Kisa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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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 회고시(滿月臺懷古詩)라고도 한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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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재미있게 읽는 에세이 조선왕조 오백년 야사
꿈과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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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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