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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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동교회는 1945년 서울 장충동에서 선린형제단으로 시작된 개신교 교회이다. 김재준, 강원룡 목사 등을 거쳐 채수일 목사가 현재 담임하고 있으며, 1981년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수도원 형식의 독특한 건물 외관을 갖추고 있다. 강원룡 목사 시대에는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사회 참여적 성격을 띠었으며, 문화 선교를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 에큐메니컬 운동을 지향하며, 성공회, 독일인 교회 등과 교류하며 교파를 초월한 연합 예배를 드린다. 1969년 통기타 예배, 벙커1교회 설립, 종교 다원주의 논란 등 여러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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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교회 | |
---|---|
기본 정보 | |
![]() | |
국가 | 대한민국 |
교단 |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
노회 | 서울강남노회 |
설립일 | 1945년 12월 2일 |
주소 | 서울특별시 강남구 장충동2가 177-1 |
역사 | |
창립 | 1945년 12월 2일: 황해도 옹진군 옹진읍에서 창립 옹진군은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할에 속함 |
6.25 전쟁 | 전쟁으로 인하여 피난민들이 서울에 정착하며 서울에서 예배 시작 |
교회 건축 | 1981년: 김수근의 설계로 교회 건축 독특한 외관으로 유명 |
주요 인물 | |
담임목사 | 박성진 |
주요 관련 인물 | 강원용 김수근 이문영 |
특징 | |
건축 양식 | 독특한 외관 |
사회 참여 | 새마을운동 민주화운동 |
기타 | |
관련 웹사이트 | 경동교회 |
2. 역사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광복된 직후, 일본의 토착 종교인 천리교 사원이 한국 종교 단체들에 불하되었다. 이 가운데 교회로 전환된 곳은 영락교회(예장), 성남교회(기장), 경동교회 세 곳이었으며, 이들 교회는 1945년 12월 2일로 창립일이 같다.[2]
경동교회는 김재준 목사가 신학 교육에 뜻을 두어, 설립 당시 청년이었던 강원룡 주도로 틀을 잡아갔다.[2] 1965년 설립된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독재정권에 비협조적인 사회 참여 운동을 하였다. 1964년 이후 성탄절 라디오 방송 예배 중계가 예고 없이 당일 중단되는 등 교회와 강원룡 목사는 정치적 탄압을 경험한다.[5]
1982년 강원룡 목사는 사의를 표명하고, 김호식, 이동준, 김경재, 박종화 목사를 거쳐, 2015년 채수일 목사가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른다.
2. 1. 설립 배경 (1945년)
1945년 12월 2일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1가 26-1번지에서 30여 명의 어린이와 학생들이 '''선린형제단'''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첫 예배를 드린 것이 경동교회의 시초이다.[2] 선린형제단은 김재준, 강원용 목사 등이 세운 전도 조직이었으나, 해방 전후 시기에 중국 간도 용정 및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도중 공산당의 압박으로 인해 남한으로 월남하여 지금의 경동교회 자리에 터를 잡았다.[3] 당시 38선에 의한 분단으로 38선 이북에서 온 학생들은 학비 조달의 길이 막혀버렸고, 이런 학생들이 장충동 1가 현재 경동교회 터에 있었던 천리교 건물에 유숙하였다. 이때 선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일터를 만들기에 앞서 우선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부터 세워야 한다는 취지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일을 먼저 시작했던 것이다.[4]선린형제단의 별칭은 '''야고보전도관'''이었는데, 성경의 인물로 신앙의 실천을 강조한 야고보와 같이 '''행동으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였다. 창립 당시 이 모임은 초교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지도자 격인 김재준 목사가 장로교 목사인 이유로 인해 장로교 교단에 속하게 된다. 1947년 김재준 목사가 속해 있는 경기노회의 요구로 인해 '''경동교회'''로 이름을 개칭한다.
2. 2. 강원룡 목사 시대 (1949-1982)
김재준 목사는 신학 교육에 집중하였고, 강원룡 목사가 경동교회 운영을 주도했다. 1949년 강원룡 목사 안수 후 경동교회는 강원룡 목사의 비전을 중심으로 발전했다.[2]강원룡 목사는 반유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으며, 1980년대 민주화 이전까지 경동교회는 '''사회 참여'''의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 강원룡 목사는 전태일의 죽음에 대한 설교 '''한 알의 밀알'''로 인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났고, 1979년에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강원룡 목사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가 3일 후에 풀려나기도 했다.[5] 강원룡 목사는 자신의 저서 '''역사의 언덕에서'''에서 "박정희 대통령과의 불화로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비굴하게 자기 의지와 신앙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강원룡 목사 시절의 경동교회는 '''틀을 허무는 문화선교'''가 두드러진 시기였다. 성탄절, 부활절, 창립 기념 주일 등 각종 절기에는 마임극, 연극 등을 상연했고, 경건주의의 벽을 허물고 대중문화와 소통했다. 1969년에는 윤형주, 조영남, 송창식 등을 초청하여 통기타 예배를 진행하기도 했다.[6] 특히 개신교의 절기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을 미국식(11월 셋째 주)으로 지내지 않고 우리 민족의 명절인 추석과 맞추어 지내기 시작하였다.
2. 3. 강원룡 목사 이후 (1982-현재)
1982년 강원룡 목사는 당회에 사의를 표명하고, 김호식, 이동준, 김경재, 박종화 목사를 거쳐, 2015년 채수일 목사가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현재에 이른다.3. 건축
1981년 김수근이 설계한 경동교회 건물은 수도원 양식으로 지어졌다. 도심에 위치하면서도 큰길에서 바로 보이지 않고, 교회 외벽을 따라 돌아 들어가야 입구가 나타난다. 교회 진입로에는 예수가 골고다 언덕으로 향했던 길을 상징하는 여러 계단이 있다.[7]
일반적인 개신교 교회와 달리 외관에 십자가는 없지만, 서로 다른 높이의 기둥들이 모여 하나의 건물을 이루는 독특한 형태이다. 이는 기도하는 손, 횃불, 첨탑 등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7]
건축 설계상 문제로 장마철 누수가 발생하고, 1층과 2층 사이 환기 문제로 음식 냄새가 예배에 방해된다는 의견이 있다. 김수근과 승효상은 현재 경동교회 본당 건물이 원래 의도와 다르게 개조되었으며, 특히 예배당 위층(3층)에 천장을 만든 것은 큰 실수라고 비판했다.[12]
3. 1. 건물 외관
현재 교회 건물은 1981년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수도원 형식'''으로 건축되었다. 도심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도시의 큰 길로부터 틀어진 곳에 건물 입구를 두고 있어, 큰길에서 예배당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교회 외벽을 빙 둘러 들어와야 한다. 교회를 향하여 들어오는 길목으로부터는 좌우 양면에 수많은 계단이 이어지는데 이는 예수가 최후의 순간 골고다로 향해 걸었던 길을 상징한다.겉으로는 과묵하고 배타적인 모습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도시를 향해서 따뜻한 공간을 배려하고 정제된 건축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7] 일반적인 개신교 교회와는 달리 교회 외관에 십자가가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서로 다른 높이의 기둥이 모여 하나의 매스로 건물 형태를 띠고 있는 구조이다. 이 외관은 보는 이들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7] 기도하는 손을 닮았다고도 하고, 횃불, 혹은 첨탑을 옆으로 본 모습을 닮았다고도 한다.
3. 2. 예배당
예배의 장소인 '''예배당(2층)'''은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 만남'''을 상징하도록 디자인 되었으며, 설교대와 성찬대 및 세례대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다. 이는 말씀과 성례전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면 제단 위 정면에 큰 십자가가 보이고, 입구에는 여러 개의 십자가가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제단의 십자가를 향해 모여드는 교인들이 예배 후 세상을 향해 흩어질 때에는 입구 가운데 표현된 형형색색의 십자가 문을 통과하며 각자가 십자가를 걸머지고 역사의 현장으로 가아가야 함을 상징한다.[8]예배당 내부는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하였다. 콘크리트의 질감을 그대로 살린 내부는 고대 기독교 예배소인 카타콤을 연상시키어 원초적인 엄숙함과 경건함을 느끼게 해준다.[7]
경동교회는 1981년 건축때부터 예배용 악기로 '''파이프 오르간'''을 중심에 두기로 정하고, 예배당 내부를 설계할 때 파이프 오르간의 조화를 이룬 공간과 음향을 최대한 살린 건축양식을 채택했다.[8] 따라서 파이프 오르간은 경동교회 예배당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3. 3. 여해문화공간
예배당 위층(3층)은 여해문화공간으로, 300여 석 규모의 연극, 문화, 음악 공연장 설비를 갖추고 있다. 건축 당시 예배당 위층은 천장이 없는 야외 원형극장으로 설계되었는데, 이는 이 공간이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이 되기를 바랐던 김수근의 뜻이 반영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하늘로 열리다」에서 “교회건축이 가지는 상징성은 그 자체로서 신도, 비신도를 가리지 않는다”며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마음의 근원을 기억하게 해주는 형태 자체에 독자성이 부여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9] 그러나 현재 이 공간에는 천장이 덧입혀져 있다.1974년부터 경동교회가 진행해 온 신앙의 토착화 작업과 기독청년문화 활성화에 따라, 여해문화공간에서는 연극, 무용극, 음악회, 뮤지컬, 마당극 등 다양한 공연예술 활동이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저예산 영상물 및 공연 상영장으로도 활용된다.[10]
3. 4. 기타 공간
예배당 아래층(1층)은 일종의 친교실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로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 예배 후 공동 식사와 각종 모임이 이루어진다.[8] 본당 예배당이 엄숙하고 조금은 무겁고 경건한 분위기인 데 비해 친교실은 밝고 따뜻한 분위기를 띈다.[8] 이외에 부속 건물로 선교관 및 교육관이 있다.3. 5. 건축 관련 비판
경동교회는 설계상 문제로 장마철에 누수가 심하다. 벽돌 건물은 벽돌이 비를 머금었다가 한꺼번에 쏟아내기 때문에 누수 위치를 예측하기 어렵다. 장마철 누수는 특히 예배당 앞쪽 성가대 방향에서 심하며, 이 경우 양동이를 사용하여 미관상 좋지 않은 경우가 발생한다.[11] 2007년 보수 공사를 했지만, 이 과정에서 건물이 훼손되었다는 의혹이 있다.1층과 2층 사이의 환기에 문제가 있어 2부 예배 무렵에 1층에서 올라오는 음식 냄새 때문에 예배에 방해가 된다는 의견이 있다.
김수근과 예배당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승효상은, 오늘날 경동교회의 본당 건물이 김수근의 본래 의도와 다르게 개조되었으며, 특히 건축 당시 천장이 없는 열린 공간으로 설계된 예배당 위층(3층)에 천장을 만들어 하늘을 막은 것은 큰 실수라고 언급했다.[12]
4. 신학 및 예배
경동교회는 전례적 예배를 지향하며, 초교파적인 교회로서 에큐메니즘을 표방하고 있다.
박종화 목사는 위르겐 몰트만에게 직접 배운 신학 박사 중 한 명으로, 그의 설교는 교회력과 해석학을 바탕으로 한다.[20] 헬라어 원어 분석에 충실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19]
경동교회는 세계 교회 협의회(WCC)와 협력하며, 기독교대한감리회 남산교회,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주한독일인교회 등 다양한 교파와 교류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다. 특히 성공회와의 교환 예배는 예배 의식 전체를 포괄하는 예전 교류로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이다.
4. 1. 예배 형식
경동교회는 전례적 예배를 지향한다. 예배는 말씀 선포와 성만찬을 중심으로 하며, 하나님 앞으로 모여오는 모임 예식과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파송 예식으로 구성된다.[13]예배를 구성하는 시편 교독, 설교 성경 본문, 찬송은 모두 교회력을 바탕으로 선정된다. 목회자, 예배 순서 담당자, 성가대 예복 역시 한국 전통 예복을 중심으로 교회력에 따라 색상을 채택한다. 성경 본문은 교회력에 따라 1년 52주 구절이 정해져 있으며, 매 주일 구약, 복음서, 서신서에서 가져온 세 구절로 구성된다. 설교자는 지정된 본문을 바탕으로 설교한다.[8]
다음 주일 설교 성경 본문은 주보에 미리 예시되어, 예배 참석자들이 미리 읽고 묵상하도록 한다. 주일 설교, 성가대 찬양, 꽃 장식, 대표기도, 교독문 구절까지 통일성을 이루어 예배의 유기적 구성을 강조한다.[14]
예배 전체는 인터넷으로 녹화 중계된다.[15] 주일 예배는 1부(오전 9:30), 2부(오전 11:30)로 진행되며, 수요일 예배는 오후 7:30에 있다.[16]
4. 2. 설교 특징
박종화 목사는 위르겐 몰트만에게 직접 배운 여덟 명의 신학 박사 중 한 명으로, 목회자이기 이전에 신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17][18] 그럼에도 그의 설교는 신학을 접하지 않은 일반 신자들에게 더 큰 호소력을 가지는데, 이는 신학적 개념을 그대로 제시하는 대신 평신도의 입장에서 소화하여 '''쉬운 어휘'''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박종화 목사는 학자나 다른 사람의 어려운 말을 인용하지 않고, 신학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평신도들이 은혜를 이해하도록 쉽게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19]정용섭 교수는 박종화 목사의 설교가 교회력과 해석학을 두 기둥으로 삼고 있다고 평가했다.[20] 교회력을 따르는 것은 설교가 자의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고, 해석학은 고대 텍스트를 현재에 적용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박종화 목사는 해석학적 측면에서 '''원어 분석'''에 충실하지만, 참고 자료로만 활용하고 설교를 짜 맞추지 않는다. 그는 "원어의 뜻은 확대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 헬라어의 뜻에서 끝나면 당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날 상황이라면 다른 언어를 썼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19] 그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성서 텍스트 해석은 '''깊이, 행간, 문서비평, 영적 해석, 저자의 집필 의도''' 등과 연결된다. 이러한 점은 신학교에서 배우지만 목회 현장에서 잊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20]
하지만 박종화 목사의 설교는 매주 선택되는 세 본문(구약, 서신서, 신약)을 모두 다루지만, 때로는 그 결합이 느슨하고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비판도 존재한다.[20]
4. 3. 에큐메니즘 (교회 일치 운동)
경동교회는 창립 당시부터 초교파적인 교회로 시작하였으며, 설립 이후 현재까지 에큐메니즘을 표방하고 있다. 강원룡 목사는 1961년부터 세계 교회 협의회(WCC) 실행위원 및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전임 박종화 목사 역시 제10차 세계 교회 협의회 총회 한국준비위원회 총회준비대회장을 역임했다.이에 따라 경동교회는 교파나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와 체제, 교리를 초월하여 참 기독교와의 연대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즘에 앞장서고 있다.[3]
4. 3. 1. 교파 간 교류
2015년 광복절 기념으로 경동교회는 기독교대한감리회 남산교회와 교환 예배를 드렸다. 두 교회는 1945년 같은 날에 설립된 소위 '''해방둥이 교회'''로서,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우애를 다지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 행사에서 경동교회의 박종화 목사와 성가대가 남산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으며, 남산교회의 이원재 목사와 성가대원들이 경동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다.[21] 다만 예배 의식은 각 교회 고유의 것을 유지하여서, 경동교회 예전에 이원재 목사가 설교만 맡는 형식을 취했다.경동교회는 매년 한 차례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과 교환 예배'''를 드린다. 이날은 성공회 성당은 경동교회 예배 의식에 따라 예배를 드린다. 이날은 경동교회 성가대와 담임목사가 성공회에서 예배를 인도한다. 성공회 성당은 경동교회에서 성공회 신부와 성가대와 함께 내왕하여 예배 전체를 성공회 예전에 따라 예배를 드린다. 이는 초교파적 강단 교류를 넘어서서, 예배 의식 전체를 포괄하는 예전 교류로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것이다.
또한 경동교회는 매년 5월 '''주한독일인교회와 연합 예배'''를 드린다. 양 교회 목회자와 당회원 및 제직들이 한데 섞여 예배 순서를 분담하고 예배 후의 친교를 함께 나눈다. 예배는 독일어와 한국어 이중 언어로 진행된다.
5. 논란
경동교회는 다음과 같은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 통기타 예배 사건: 1969년 경동교회에서 열린 통기타 예배는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현대 대중음악 악기를 사용해 CCM을 부르는 보편적인 상황을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보수적인 기독교계는 이를 '사탄의 음악'이라며 비판했지만, 강원룡 목사는 CBS 라디오 토론을 제안하며 맞섰다.
- 벙커1교회 설립 계기: 2012년 총선 이후, 시사평론가 김용민은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의 설교에 실망하여 벙커1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박종화 목사는 설교에서 나꼼수와 총선 시기에만 기독교 이름을 내거는 정당을 비판했다.[23]
- '사탄의 교회' 비판: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경동교회가 종교 다원주의를 옹호하고 가톨릭과의 야합을 추구한다며 비판한다. 특히 미국의 한인 정착교회인 골든벨교회는 경동교회를 "사단의 전술의 앞잡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24]
5. 1. 통기타 예배 사건 (1969)
1969년 경동교회에서 있었던 통기타 예배 사건은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와 가톨릭에서 현대 대중음악 악기(기타, 드럼, 건반)를 사용하여 CCM을 부르는 보편적인 상황을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까지 한국 교회는 19세기 서양 음악 중심의 찬송가만을 사용하는 보수적인 분위기였다.[22]강원룡 목사는 대중음악인으로서 교회 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영남, 송창식, 최영희, 윤형주에게 용기를 주고자 1969년 11월 2일 밤 7시에 경동교회에서 '새로운 리듬의 밤' 예배를 열었다. 이들은 모두 다른 교회의 신자였지만, 강원룡 목사의 초청으로 모이게 되었다. 500여 명의 젊은이들이 참석한 이 예배에서는 팝송이자 미국 흑인 민요인 <목화밭>을 부른 후, <샤론들에 핀 백합화>, <주여 기억하소서> 등 10여 곡의 찬송가를 통기타 반주로 불렀다. 청중들은 처음에는 숨죽여 듣다가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22]
이 사건은 보수적인 기독교계로부터 '사탄의 음악으로 교회당을 나이트클럽으로 만들었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강원룡 목사가 CBS 라디오 토론을 제안했을 때 반대 측 토론자가 나오지 않아 논란은 흐지부지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과 가톨릭에서도 현대적인 악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상황을 볼 때, 강원룡 목사의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5. 2. 벙커1교회 설립 계기
2012년 총선 패배 이후 첫 주일인 4월 15일, 시사평론가 김용민은 경동교회 인터넷 예배 생중계를 보다가 박종화 목사의 설교에 실망하였다. 박종화 목사는 설교에서 나꼼수와, 총선 때만 기독교 이름을 걸고 떳다방식으로 나타나는 정당을 비판했다.[23] 이에 김용민은 기성 교회에 실망한 이들이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공동체로 벙커1교회를 설립하게 된다.[23]5. 3. '사탄의 교회' 비판
근본주의 진영은 경동교회가 종교 다원주의를 옹호하고 가톨릭과의 야합을 추구한다며 비판한다. 특히 미국의 한인 정착교회인 '''골든벨교회'''는 경동교회만을 குறிப்பிட்டு "사단의 전술의 앞잡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한다.[24] 경동교회 측에서는 별도로 반박하지 않고 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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