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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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경은 북주와 수나라 시대를 거치며 활약한 인물로, 수나라 건국과 초기 번영에 크게 기여한 유능한 장군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북주 무제 치하에서 우문헌의 참모로 활동했고, 수 문제의 섭정 시기에 양견의 측근이 되어 어치경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여 의녕공에 봉해졌다. 수나라 건국 후에는 심사부 수장과 행정부 공동 수장을 역임하며 법률 개혁에 참여하고, 진나라 정벌, 돌궐 공격, 고구려 원정 등 대외 정책과 군사 활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말년에 권력 다툼과 수 양제의 정책 비판으로 인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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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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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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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박릉현자(博陵縣子) 제국공(齊國公) |
시호 | 민(敏) |
출생 | 541년 |
사망 | 607년 |
관력 | |
시대 | 수나라 |
주요 관직 |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납언(納言) 상주국(上柱國) |
군사 경력 | 행군총관(行軍總管) 원수(元帥) |
가계 | |
아버지 | 고빈(高賓) |
아들 | 고표인(高表仁) 고지혜(高至隄) 고영(高穎) |
기타 | |
로마자 표기 | Go Gyeong |
2. 북주 시대의 활동
고경은 북주 시대에 관료로서 경력을 시작하여 점차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북주 무제 치세에는 제왕 우문헌의 참모를 시작으로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북제 정벌과 분주의 반란 진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1][2] 580년 북주 선제 사후 양견이 섭정으로 실권을 잡자, 고경은 그의 핵심 참모로 발탁되어 상부사록(相府司錄)이 되었다.[1][2] 특히 양견의 집권에 반발하여 일어난 어치경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1][2] 이 공로로 주국으로 승진하고 의녕현공(義寧縣公)에 봉해졌으며, 상국 사마(相國司馬)의 중책을 맡았다.[2] 이후 양견이 선비화 정책을 폐지하면서 본래 성씨인 고(高)를 되찾았다.[1]
2. 1. 초기 생애와 배경
고경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1][2] 그의 아버지 고빈(高宾/高賓)은 본래 동위의 관료였으나, 540년 자신에 대한 허위 고발을 두려워하여 서위로 망명했다.[1] 고빈은 선비족 출신 장군 독고신의 휘하에서 일했으며, 554년 서위의 실권자 우문태의 명령으로 성씨를 독고(獨孤)로 바꾸었다.[1] 이러한 인연으로, 557년 서위의 뒤를 이은 북주에서 독고신이 자결을 강요당한 후, 그의 딸 독고가라(훗날 수 문제의 황후)는 종종 고빈의 집을 방문했다.[1] 고빈은 이후 지방 장관을 지내다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1]고경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역사책을 널리 읽고 말솜씨가 뛰어났다.[2] 그가 17세였을 때[2] 북주의 제왕 우문헌은 고경을 자신의 기실참군(記室參軍, 참모)으로 삼았다.[1][2] 이후 아버지 고빈이 받았던 무양현백(武陽縣伯) 작위를 이어받았고,[1][2] 무제 시기에는 내사상사(內史上士)를 거쳐 하대부(下大夫)에 임명되었다.[2] 무제가 경쟁국인 북제(동위의 후계 국가)를 멸망시키는 전쟁에서 우문헌 휘하에서 활약하며 공을 세워 개부(開府)를 하사받았다.[1][2] 또한 월왕(越王) 우문성을 따라 분주(汾州)에서 일어난 이민족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다.[2]
580년, 무제의 아들 북주 선제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선제의 장인이었던 양견(독고가라의 남편)이 어린 북주 경제(선제의 후궁 주만월 소생)의 섭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1] 양견은 고경이 지혜롭고 전략에 능하다는 평판을 듣고, 자신의 측근인 양혜(楊惠)를 보내 그를 자신의 참모로 삼고자 했다.[1][2] 고경은 양견에게 큰 야망이 있음을 간파하고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공의 큰 뜻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이 일로 제 일족이 몰살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감수하겠습니다."라고 답하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부사록(相府司錄)으로 일하게 되었다.[1][2] 곧이어 양견의 집권에 반발한 총관 어치경이 업(鄴, 현재의 한단 부근, 허베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1][2] 양견은 위효관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여러 장수들의 의견이 갈려 군대가 하양(河陽)에서 진군하지 못하고 심수(沁水)를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2] 이때 고경이 자원하여 전선으로 나아가 작전을 감독했다.[1][2] 그는 심수에 다리를 놓아 도하를 준비했고, 어치경 군대가 상류에서 불붙인 뗏목을 떠내려 보내자 미리 준비한 흙으로 만든 개 형상(土狗)으로 이를 막아냈다.[2] 강을 건넌 후에는 배수진을 치기 위해 다리를 불태우고 적군을 크게 격파했다.[2] 또한 어치경의 아들 어치순(尉遲淳)을 직접 격파하는 등[1] 반란 평정에 큰 공을 세웠다.[2] 위효관이 최종적으로 어치경을 격파하고 자결하게 만든 후,[1] 고경은 이 공로로 주국(柱國)으로 승진하고 의녕현공(義寧縣公)에 봉해졌으며, 상국 사마(相國司馬)가 되었다.[2] 이후 양견이 우문태 시절부터 시행된 선비화 정책(한족 관료와 장군에게 선비족 성씨를 강요하는 정책)을 폐지하면서, 고경은 더 이상 독고(獨孤)라는 성씨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1]
2. 2. 북주 무제 시기
총명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어려서부터 사서(史書)를 널리 읽었고 변설(辯舌)에 능숙했다. 17세에 북주의 제왕 우문헌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다. 아버지 고빈의 무양현백(武陽縣伯) 작위를 이어받았다. 무제 시기에는 내사상사(內史上士)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대부(下大夫)에 임명되었다. 무제가 북제를 멸망시키는 작전에서 우문헌 휘하에서 공을 세워 개부(開府)를 하사받았다. 이후 월왕(越王) 우문성을 따라 분주(汾州, 현재의 산서성 린펀시 일대)에서 일어난 이민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2. 3. 북주 선제, 정제 시기
580년, 북주 무제의 아들인 북주 선제가 사망하자, 선제의 장인인 양견(독고가라의 남편)이 선제의 아들 북주 경제(선제의 후궁 주만월 소생)의 섭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 양견은 고경이 유능하고 성실하며 계략에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그를 자신의 막하로 불러들여 상부사록(相府司錄)으로 삼았다.[2] 고경은 양견의 큰 야망을 간파하고 "그에게 이끌리겠습니다. 공작의 야망이 실현되지 못하더라도, 저는 이 일로 제 일족이 몰살당하는 것도 감수하겠습니다."라고 답하며 양견의 참모가 되기로 결정했다.[1]580년, 양견의 집권에 의심을 품은 총관 어치경(尉遲迥)이 업(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2] 양견은 위효관(尉孝寬)을 총대장으로 삼아 토벌군을 보냈으나, 여러 장수들의 의견이 갈려 군대는 하양에 이르러 잠수(沁水)를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며 나아가지 못했다.[2] 양견의 측근인 최중방, 유방, 정의 등이 모두 전선 감독을 주저하자, 고경이 자원하여 나섰다.[1][2]
고경은 군중에 도착하여 잠수에 다리를 놓도록 지시했다. 어치경 군대가 상류에서 불붙인 뗏목을 떠내려 보냈으나, 고경은 미리 준비한 토낭(土囊, 흙을 채운 가마니)으로 이를 막아냈다.[2] 강을 건넌 후에는 다리를 불태워 배수진을 쳤고, 어치경의 아들 어치순(尉遲淳)을 직접 격파하는 등[1] 군대를 독려하여 적을 크게 물리쳤다. 이후 업으로 진격하여 우문흔, 이순 등과 함께 계책을 세워 어치경 군대를 격파하고 반란을 성공적으로 평정했다.[2] 반란 진압 후, 고경은 주국으로 승진하고 의녕현공(義寧縣公)에 봉해졌으며, 상국 사마(相國司馬)가 되었다.[1][2] 양견은 곧 우문태 시절부터 시행된 선비화 정책을 폐지할 것을 선언했고, 이에 따라 고경은 더 이상 독고(獨孤)라는 성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1]
3. 수 문제 치하의 활동
581년 수 문제가 수나라를 건국하자, 고경은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겸 납언(納言)에 임명되어 사실상 공동 재상으로서 국정 운영의 핵심 역할을 맡았다.[1][2][3] 그는 발해군공(渤海郡公)에 봉해졌으며, 수나라의 기본 법률인 개황률 제정에 참여하는 등 문제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3] 문제는 종종 그를 옛 선비족 이름인 '독고씨'(獨孤氏)라고 부르며 존중을 표했고, 다른 관리들이 고경을 비방하면 오히려 그들을 파면할 정도였다.[3] 또한 자신의 손녀(태자 양용의 딸)를 고경의 아들 고표인(高表仁)과 혼인시키는 등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3] 고경은 소위(蘇威)와 같은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기도 했다.[1][3]
고경은 문제 치하에서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82년에는 수도 장안이 협소하다는 문제의 판단에 따라 새로운 수도인 대흥성(大興城) 건설을 주관했으며,[1][3] 583년에는 돌궐을 공격하는 군대를 이끌기도 했다.[3]
대외 정책, 특히 진나라 정벌에서 고경의 역할은 두드러졌다. 582년 진 선제가 사망하자 상중(喪中)인 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며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건의하여 문제가 이를 받아들였다.[1][3] 이후 587년에는 진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기만 전술과 초토화 작전을 제안하여 실행했고,[1][3] 588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진나라 정벌에서는 원수장사(元帥長史)로서 총사령관 양광을 보좌하며 실질적인 전략 수립과 작전 지휘를 책임졌다.[1][3] 589년 진나라 멸망 후, 양광이 진 숙보의 총애받던 후궁 장려화를 취하려 하자, 고경은 그녀를 상나라 멸망의 원흉인 달기에 비유하며 처형했다.[1][3] 이 일은 훗날 양광이 고경에게 깊은 원한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1][3] 진나라 평정의 공으로 고경은 상주국(上柱國) 제국공(齊國公)으로 승진했으며, 진나라 황실의 재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청렴함을 보여 문제로부터 더욱 깊은 신임을 얻었다.[1][3]
그러나 문제 치세 후반으로 가면서 고경과 황실 부부와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독고황후는 문제와 위지경 손녀와의 관계를 알게 된 후 그녀를 살해했는데, 이후 문제를 위로하는 과정에서 고경이 황후를 "한 여인"이라고 칭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3][2] 또한 부인 사후 후처를 권하는 문제의 제안을 거절했으나 이후 애첩에게서 아들을 얻은 사실이 알려지자 황후의 불쾌감을 샀다.[3] 결정적으로 황태자 양용의 폐위 문제에서 고경이 장유유서를 내세워 반대하자, 양광을 지지하던 독고황후는 고경의 실각을 꾀하기 시작했다.[3][2]
598년 고구려 원정 실패는 고경의 입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고경은 원정에 반대했으나 문제의 명으로 참전하여 실질적인 지휘를 맡았지만, 원정은 큰 피해를 입고 실패했다.[1][2][3] 원정 중 고경에게 불만을 품었던 양량이 귀환 후 황후에게 고경을 모함했고, 독고황후 역시 원정 실패의 책임을 고경에게 돌리며 문제의 불신을 키웠다.[3][2]
결국 599년, 왕세적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와 참언이 이어지면서 고경은 모든 관직에서 면직되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2][3] 이듬해인 600년, 강력한 후원자였던 고경을 잃은 태자 양용은 폐위되고 양광이 새로운 태자가 되었다.[2][3] 이로써 문제 치세 동안 수나라의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었던 고경의 정치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3. 1. 수나라 건국과 개혁
580년, 북주의 외척으로서 실권을 장악한 수 문제(양견)는 고경의 능력과 성실함, 뛰어난 계략을 높이 사 그를 자신의 막료로 삼아 상부사록(相府司錄)으로 중용했다.[1][2] 같은 해, 위지경(尉遲迥)이 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양견은 위효관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토벌에 나섰으나, 여러 장수들의 의견 충돌로 군대는 하양(河陽)에서 심수(沁水)를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며 나아가지 못했다. 이에 고경은 자원하여 군중에 나아가 심수에 다리를 놓도록 지시했다. 적군이 상류에서 불붙인 뗏목을 떠내려 보냈으나, 고경은 미리 준비한 흙으로 만든 개 형상의 구조물로 이를 막아냈다. 강을 건넌 후 다리를 불태워 배수진을 치고 적을 크게 격파했으며, 업으로 진격하여 위지경을 격파하고 반란을 성공적으로 평정했다.[1][2] 이 공으로 고경은 주국(柱國)으로 승진하고 의녕현공(義寧縣公)에 봉해졌으며, 상국 사마(司馬)의 직책을 맡았다.[1][2]581년, 양견이 북주 정제로부터 선양받아 수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수 문제)로 즉위하자, 고경은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겸 납언(納言)에 임명되어 사실상 재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1][2][3] 그는 발해군공(渤海郡公)에 봉해졌고, 곧이어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직함이 더해졌다.[1][2] 문제는 정부 조직을 5개의 주요 부서로 개편했으며, 고경은 문하성(門下省)의 수장이자 상서성(尚書省)의 공동 수장으로서 행정을 총괄했다.[3] 그는 수나라의 기본 법률인 개황률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문제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며, 문제는 종종 그의 옛 선비족 이름인 '독고씨'(獨孤氏)라고 부르며 존중을 표했다.[3] 고경은 소위(蘇威)를 문제에게 추천했고, 문제 역시 소위를 신뢰하여 공동 재상으로 삼았다.[1][3] 다른 관리들이 고경을 비방하면 문제는 오히려 그들을 파면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태자 양용(楊勇)의 딸을 고경의 아들 고표인(高表仁)과 혼인시키기도 했다.[3]
582년, 문제는 고경에게 남쪽의 경쟁국인 진나라에 대한 군사 작전을 감독하게 했으나, 진 선제(陳 宣帝)가 사망하자 고경은 상중(喪中)인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건의했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시켰다.[1][3] 같은 해, 수도 장안이 너무 작다고 판단한 문제는 고경, 소위와 상의하여 인근에 새로운 수도인 대흥성(大興城) 건설을 결정하고, 583년에 천도했다.[1][3] 583년 가을에는 돌궐(突厥)을 공격하는 군대를 이끌기도 했다.[3]
587년, 수나라의 봉신국이었던 서량(西凉)의 후주(後主)가 수도 강릉(江陵)을 비운 사이, 그의 숙부 소암(蕭巖)과 동생 소환(蕭瓛)이 수나라 장군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백성들을 이끌고 진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문제는 서량을 폐지하고 그 영토를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했으며, 고경을 강릉으로 보내 민심을 수습하도록 했다.[3] 한편, 진나라 정복 준비에 대해 묻는 문제에게 고경은 두 가지 전략을 제안했다. 첫째는 실제 공격 없이 군사 훈련을 통해 진나라 국경 지역 농민들을 긴장하게 하여 농사를 방해하고, 반복적인 기만 작전으로 실제 공격 시 경계심을 늦추도록 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첩자를 보내 국경 지역의 농지와 양식 비축을 불태우도록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계책을 받아들였고, 이는 진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1][3]
588년 겨울, 문제는 진나라 정벌을 선포하고 아들인 진왕(晉王) 양광(楊廣), 진왕(秦王) 양준, 그리고 수 양소에게 각각 주요 공격로를 맡겼으며, 양광이 총지휘를 담당했다. 고경은 원수장사(元帥長史)로서 양광의 부관이 되어 작전 전반의 전략 수립을 책임졌다.[1][3] 589년 봄, 진나라 수도 건강(建康)이 함락되고 황제 진숙보(陳叔寶)가 사로잡혔다. 양광은 진숙보의 총애받던 후궁이었던 장려화(張麗華)를 살려두려 했으나, 고경은 그녀를 상나라 주왕의 악명 높은 왕비 달기(妲己)에 비유하며 "주 무왕이 은을 멸망시키고 달기를 죽였듯이, 이제 진나라를 평정했으니 장려화를 살려둘 수 없다"고 주장하며 처형했다.[1][3] 이 일로 양광은 고경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1][3] 고경은 진나라 황실 재물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아 매우 청렴하고 꼼꼼하게 처리하여 사사로이 취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3]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문제는 그를 상주국(上柱國)으로 승진시키고 제국공(齊國公)으로 작위를 높여주었다.[1][3] 문제가 그와 장군 하약필(賀若弼)의 공로를 비교하려 하자, 고경은 하약필은 직접 전장에서 싸웠고 자신은 문관으로서 보좌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사양해 문제로부터 더욱 존경받았다.[3] 그러나 이덕린(李德林)이 작전 중 자신과 상의했다는 이유로 문제가 그를 공작으로 봉하려 하자, 고경은 질투심 때문에 이를 반대해 무산시켰다.[3]
고경은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정무(政務)에 능통했으며, 소위, 양소, 하약필, 한금호(韓擒虎) 등 많은 인재를 추천해 그들이 능력을 발휘하게 도왔다.[1] 문제의 두터운 신임 아래 약 20년간 재상 자리를 지키며 수나라 초기 안정과 번영에 크게 기여했고, 그의 공정한 일 처리로 조정과 백성 모두 그를 따랐다고 평가받는다.[1] 592년, 소위가 재상직에서 물러나고 양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양소가 고경보다 재능과 선견지명은 뛰어났을지 몰라도, 공정함과 품행 면에서는 고경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3]
3. 2. 대외 정책과 군사 활동
북주 시절, 고경은 무제를 따라 북제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으며[1][2], 월왕 우문성을 따라 분주에서 일어난 이민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군사적인 경험을 쌓았다.[2]수나라 건국 과정에서도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580년, 양견(훗날 수 문제)이 북주의 실권을 장악했을 때 위지경이 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경은 토벌군의 총대장 위효관 휘하로 자원하여 참전했다.[1][2] 당시 여러 장수들의 의견이 갈려 군대가 하양에서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고경은 잠수에 다리를 놓고 적의 화공(火攻)을 막아내는 기지를 발휘하여 성공적으로 강을 건넜다. 이후 다리를 불태워 배수진을 치고 적을 격파했으며, 업성 전투에서도 계책을 내어 반란을 평정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1][2] 이 공으로 주국으로 승진하고 의녕현공에 봉해졌다.[1][2]
581년 수나라 건국 후, 고경은 상서좌복야 겸 납언 등 요직을 맡으며 국정 운영의 핵심 인물이 되었고, 동시에 돌궐의 침입에 대비하여 변방을 안정시키는 임무도 맡았다.[1][2]
진나라 정벌고경은 수나라의 진나라 정벌 계획 수립과 실행에 깊이 관여했다. 582년, 문제의 명으로 진나라 공격을 준비했으나, 진 선제가 사망하자 상중(喪中)인 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며 철군을 건의했고 문제는 이를 받아들였다.[1][2] 587년, 서량이 사실상 진나라에 투항하자 문제는 서량을 폐지하고 그 영토를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했으며, 고경을 강릉으로 보내 민심을 수습하게 했다.[1] 같은 해, 문제가 진나라 공략 방안을 묻자, 고경은 진나라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을 제안했다. 이는 실제 공격 없이 군사 훈련을 하는 척하여 진나라 농민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고, 국경 수비대의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한편, 첩자를 보내 국경 지역의 농지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계책을 채택했고, 이는 진나라의 국력을 소모시키는 데 효과를 발휘했다.[1][2]
588년 겨울, 문제가 진나라 정벌을 선포하자, 아들 양광이 총사령관을 맡고 고경은 원수장사(元帥長史)로서 그를 보좌하며 실질적인 작전 지휘와 전략 수립을 책임졌다.[1][2] 589년 봄, 수나라 군대는 진나라 수도 건강을 함락시키고 황제 후주를 사로잡았다.[1][2] 이때 양광은 후주의 총애받는 후궁이었던 장려화를 살려두려 했으나, 고경은 장려화를 상나라 멸망의 원흉인 달기에 비유하며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달기를 죽였듯이, 이제 진나라를 평정했으니 장려화를 살려둘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처형했다.[1][2] 이 일로 양광은 고경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1][2] 진나라 평정 후 고경은 상주국으로 승진하고 제국공(齊國公)으로 봉해졌으며, 진나라의 황실 창고를 관리하면서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지 않아 청렴함을 보였다.[1][2]
돌궐과의 관계고경은 돌궐과의 군사적 충돌에도 참여했다. 583년 가을, 문제의 명으로 우경칙과 함께 돌궐을 공격했다.[1] 599년, 돌궐의 돌란 칸 아사나옹유려(阿史那雍閭)에 대항하기 위해 양소, 연영과 함께 출정했다.[1] 이 과정에서 고경이 추가 병력을 요청하자 문제는 잠시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의심하기도 했으나, 고경이 곧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자 의심을 풀었다.[1]
고구려 원정598년, 고구려가 수나라의 영주(營州, 현재의 조양시)를 공격하자 분노한 문제는 대규모 원정을 결정했다.[1][2] 고경은 원정에 반대했지만, 문제는 이를 강행하며 고경에게 한왕(漢王) 양량의 원수장사(부관) 자격으로 참전할 것을 명했다.[1][2] 양량이 어렸기 때문에 실질적인 지휘는 고경이 맡았으나,[1][2] 원정은 극심한 가뭄과 식량 부족, 그리고 폭풍으로 인한 함대 손실 등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실패로 끝났다.[1][2] 이 과정에서 양량은 고경이 자신의 의견을 무시하고 권한을 제대로 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품었고, 원정 실패 후 황후 독고갈라에게 "고경에게 죽을 뻔했다"고 호소하면서 고경에 대한 문제 부부의 불신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1][2]
3. 3. 진나라 정벌
582년, 수 문제는 고경에게 진나라 공격 작전을 감독하게 했으나, 진 선제가 사망하자 고경은 국상(國喪) 중인 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예(禮)에 어긋난다고 건의했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철수시켰다.[1][2]587년, 수나라의 봉신국이었던 서량에서 경제의 숙부 소암과 형 소환이 수도 강릉의 백성을 이끌고 진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문제는 서량을 폐지하고 그 영토를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했으며, 고경을 강릉으로 보내 민심을 수습하도록 했다. 한편, 문제가 진나라 정복을 위한 구체적인 전술을 묻자, 고경은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첫째는 진나라 국경 지역에서 실제 공격 없이 군사 훈련을 반복하여 농민들이 농사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경계심을 갖게 만들며, 동시에 실제 공격 시에는 오히려 방심하게 만드는 교란 작전이었다. 둘째는 첩자를 보내 국경 지역의 농지와 양곡 창고를 불태워 보급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계책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전술은 진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1][2]
588년 겨울, 문제는 마침내 진나라 정벌을 위한 대규모 원정을 선포했다. 자신의 아들들인 진왕 양광, 진왕 양준, 그리고 수 양소에게 각각 주요 공격로를 맡기고, 양광에게 총지휘를 맡겼다. 고경은 원수장사(元帥長史)로서 양광을 보좌하며 전체 작전 계획과 전략 수립을 책임졌다.[1][2]
589년 봄, 수나라 군대는 성공적으로 장강을 도하하여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함락시키고 황제 진 후주를 사로잡았다. 이때 양광은 진 후주의 총희(寵姬)인 장려화의 미모에 반해 자신의 첩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고경은 장려화를 상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달기에 비유하며, "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달기를 죽였듯이, 이제 진나라를 평정했으니 장려화를 살려둘 수 없습니다"라고 강력히 주장하며 그녀를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이 일로 양광은 고경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으며, 훗날 "사람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모든 선행에 보답해야 한다고 들었다. 나는 나중에 고공(고경)에게 반드시 보답할 것이다"라고 비꼬며 불만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1][2]
정벌 후 고경은 진나라의 황실 창고를 접수하고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매우 공정하고 꼼꼼하게 처리하여 사사로이 재물을 취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상주국(上柱國)으로 승진시키고, 제국공(齊國公)이라는 더 높은 작위를 내렸으며 많은 비단을 하사했다. 문제가 고경과 또 다른 주요 장수인 하약필의 공로를 비교하려 하자, 고경은 "하약필 장군은 직접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고, 저는 단지 후방에서 계획을 세우는 문관의 역할을 했을 뿐이니 감히 비교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겸양을 보였다. 문제는 이러한 고경의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더욱 신임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제가 진나라 정벌 작전 중 고경이 이덕린과 논의하며 도움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덕린에게 공작의 작위를 내리려 했을 때, 고경은 이덕린에 대한 질투심으로 문제를 설득하여 이를 막기도 했다.[1]
3. 4. 권력 갈등과 몰락
589년 진나라 정복 후, 수 양광은 진나라 황제 진 숙보의 총애받던 후궁 장려화를 자신의 첩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고경은 장려화를 달기에 비유하며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달기를 죽였습니다. 이제 진나라를 평정했으니 장려화를 살려둘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하며 병사들에게 참수를 명했다.[2][3] 이 일로 양광은 고경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사람은 자신에게 행해진 모든 선행에 보답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나중에 고공에게 보답하겠다"고 비꼬았다.[2]고경은 문무를 겸비하고 정무에 능통했으며, 소위, 양소, 하약필, 한금호 등 유능한 인재들을 추천하여 수 문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문제는 고경을 성 대신 옛 선비족 이름인 "독고"라 부르며 존중할 정도였고,[2] 고경은 20년 가까이 재상의 자리를 지키며 수나라 초기 안정과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3]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고경과 황실 부부와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독고황후는 질투심이 강했는데, 문제가 위지경의 손녀를 총애하자 그녀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는 크게 분노하여 궁을 나갔고, 고경과 양소가 뒤쫓아가 문제를 설득했다. 이 과정에서 고경이 독고황후를 "한 여인"이라고 칭한 것이 황후의 귀에 들어가 원망을 사게 되었다.[3][2] 또한, 고경의 부인이 사망한 후 문제가 후처를 권했으나 고경은 노령을 이유로 사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애첩이 아들을 낳자 독고황후는 고경이 자신을 속였다고 여겨 불쾌감을 드러냈다.[3]
결정적으로 황태자 수 양용의 폐위 문제가 불거지면서 고경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양용은 사치와 많은 첩 때문에 문제와 독고황후의 미움을 사고 있었고, 독고황후는 차남 양광을 새로운 황태자로 세우려 했다. 문제는 고경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양용과 인척 관계였던 고경은 장유유서를 내세우며 폐위에 반대했다.[3] 이로 인해 독고황후는 고경의 실각을 꾀하기 시작했다.[3][2]
598년, 고구려가 수나라의 영주(營州)를 공격하자 문제는 고구려 원정을 결정했다. 고경은 원정에 반대했지만, 문제의 명령으로 수 양량의 부관(원수장사)으로 참전해야 했다.[2][3] 양량이 어렸기 때문에 실질적인 지휘는 고경이 맡았으나, 폭우와 역병, 보급 문제 등으로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2][3] 원정 내내 고경에게 의견이 묵살당했던 양량은 귀환 후 독고황후에게 "고경에게 죽을 뻔했다"고 호소했고, 독고황후는 이를 문제에게 전하며 고경이 처음부터 원정을 성공시킬 의지가 없었다고 참언했다.[3][2]
599년, 돌궐 원정 중 고경이 추가 병력을 요청하자 문제는 그가 반란을 꾀한다고 의심하기도 했다.[2] 같은 해, 장군 왕세적이 모반 혐의로 처형되면서 고경이 왕세적에게 궁중 기밀을 누설하고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가 제기되었다.[2][3] 하약필 등 여러 관리가 고경을 변호하려 했으나 문제의 분노를 샀고, 결국 고경은 모든 관직에서 면직되고 제국공 작위만 유지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사마의에 비유했다는 참언까지 더해져 결국 서민으로 강등되었다.[2][3] 600년, 고경이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잃은 황태자 수 양용은 폐위되고 양광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2][3]
604년, 수 양제가 즉위하자 고경은 태상으로 복권되었다.[3] 그러나 양제의 사치스러운 정책과 만리장성 축조, 돌궐 계민가한에 대한 과도한 우대, 해이해진 조정 기강 등을 비판하다가[3] 607년, 하약필 등과 함께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3] 그의 죽음을 천하 사람들이 억울해하고 애석해했다고 전해진다.[3]
4. 수 양제 치하의 죽음
604년, 문제가 사망하고 양광이 수 양제로 즉위하였다. 대부분의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지만 양광이 부황 살해를 지시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수 양제는 즉위 후 고경을 예부상서로 임명했다.
606년, 수 양제가 문제 시절 해산되었던 이전 북제와 북주의 궁정 음악가들을 다시 모으려 하자, 고경은 이를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07년에는 수 양제가 복종적인 돌궐의 계민가한 아사나 랑간에게 큰 상을 내리려 하자 고경은 다시 반대했으나 소용없었다.
고경은 수 양제의 정책에 대해 여러 차례 비판적인 발언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비서 이의에게 "주나라 천원제는 춤, 음악, 공예를 좋아하다가 그의 왕조를 멸망시켰다. 그의 엎질러진 수레의 예는 바로 얼마 전에 있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반복되고 있는가?"라고 말하며 양제의 행태를 우려했다. 또한 궁정 창고를 담당하던 하주에게 계민가한에 대해 "이 야만인(돌궐)이 중국의 힘과 지리적 특징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나는 그가 나중에 위험이 될까 두렵다"고 말했으며, 양제의 사촌인 관왕 양웅에게는 "최근 정부의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고경의 발언들은 우문필, 하약필의 비슷한 비판들과 함께 수 양제에게 보고되었다. 결국 607년 여름, 수 양제는 고경, 우문필, 하약필을 모두 참수하였고, 고경의 아들들은 변방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천하의 사람들은 고경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겼고,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일부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고경의 죽음이 과거 그가 문제의 총애를 받던 장귀인을 죽인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
5. 평가
수서는 고경을 문무(文武)에 모두 재능이 있고 관찰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다. 수 문제의 깊은 신임을 바탕으로 충성을 다하며 소위, 양소, 하약필, 한금호 등 유능한 인재를 적극 추천하여 등용시켰고, 약 20년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수나라 초기 부강에 크게 기여하여 관리와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수 문제 말년, 황후 독고갈라가 문제의 총애를 받던 여인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 간언하고 황태자 양용 폐위에 반대하면서 황후와 갈등을 빚어 정치적 입지가 흔들렸다. 수 양제 즉위 후에는 과거 진나라 평정 시 양제가 원했던 장려화를 참수한 일과 더불어, 양제의 사치스러운 정책과 돌궐 계민가한 우대 등을 비판하면서 양제의 미움을 샀다.
결국 607년, 고경은 하약필, 우문필(宇文弼) 등과 함께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참수되었고, 그의 아들들은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당시 많은 이들이 억울해하고 애석해했다고 전해진다.
5. 1. 긍정적 평가
수서는 고경에 대해 문무(文武)에 모두 재능이 있었고, 관찰력이 뛰어났다고 평가했다.[1] 황제의 신임을 얻었기에 충성을 다하고 진심으로 공헌했으며,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고 세상을 구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다.[1] 소위, 양소, 하약필, 한금호 등 수많은 인재가 고경의 추천으로 등용되었고, 그의 추천으로 공헌한 관리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1] 고경은 거의 20년 동안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관리와 백성 모두의 존경을 받았으며, 수나라가 부강해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가 처형되었을 때 모든 사람이 그를 애도했다고 전해진다.[1]고경은 총명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어려서부터 사서를 널리 읽고 변론에 능숙했다.[2] 17세에 북주의 제왕 우문헌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된 것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2] 무제 시기에는 아버지 고빈의 작위를 이어받고 내사상사(內史上士)가 되었으며, 이후 하대부(下大夫)에 임명되었다.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킬 때 공을 세워 개부(開府)를 하사받았고, 월왕 우문성을 따라 분주에서 일어난 이민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도 참여했다.[2]
수나라 건국 이전, 양견(훗날 수 문제)은 고경의 능력과 성실함, 뛰어난 계략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자신의 막료로 삼아 상부사록(相府司錄)으로 중용했다.[2] 580년, 위지경이 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군의 여러 장수들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잠수를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며 진군하지 못했다. 이때 고경은 자원하여 군중에 나아가, 잠수에 다리를 놓고 상류에서 흘려보낸 불붙은 뗏목 공격을 미리 준비한 토낭(土囊)으로 막아내는 등 뛰어난 지략과 결단력을 보여주었다.[2] 강을 건넌 뒤에는 다리를 불태워 배수진을 치고 적군을 크게 격파하여 반란을 성공적으로 평정했다. 이 공으로 주국(柱國)으로 승진하고 의녕현공(義寧縣公)에 봉해졌으며, 상국 사마(司馬)가 되었다.[2]
581년 수나라가 건국되자, 고경은 상서좌복야 겸 납언이라는 최고위직에 임명되었고 발해군공(渤海郡公)으로 봉해졌다.[2] 그는 자주 침입하는 돌궐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수도 대흥성 건설을 주관하여 도시 계획의 많은 부분을 직접 설계했다.[2] 남조 진나라 정벌과 관련해서는, 강남의 수확기에 맞춰 공격하는 시늉을 반복하여 적을 지치게 만들고 방심하게 유도하는 한편, 비밀리에 공작원을 보내 식량 비축을 불태우는 계책을 문제에게 건의했다. 이 계책이 실행되면서 진나라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2] 588년 진나라 정벌군이 편성되었을 때, 그는 총사령관인 진왕 양광(훗날 양제)을 보좌하는 원수장사(元帥長史)로서 전군의 작전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2] 이듬해 589년, 진나라의 수도 건강을 함락시키고 황제 후주를 사로잡아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상주국(上柱國)으로 진급하고 제국공(齊國公)으로 작위가 올랐다.[2]
5. 2. 부정적 평가
수 문제의 황후인 독고갈라는 질투심이 강하여 문제가 다른 여성을 가까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느 날 문제가 인수궁에서 위지형(尉遲逈)의 손녀를 총애하는 것을 알게 되자, 독고황후는 이 여인을 몰래 살해했다. 이에 분노한 문제는 궁을 뛰쳐나가 산골짜기로 들어갔는데, 고경은 양소와 함께 문제를 쫓아가 "폐하께서는 한 여인 때문에 천하를 가볍게 여기십니까"라고 간언했다. 이 말을 들은 문제는 마음을 풀고 궁으로 돌아왔으나, 독고황후는 고경이 자신을 "한 여인"이라 칭한 것에 원망을 품게 되었다. 이전까지 독고황후는 고경의 아버지 고빈(高賓)이 자신의 아버지 독고신의 가신이었던 인연으로 고경을 예우했었다.이후 황태자 양용이 사치와 여색으로 부모의 미움을 사자, 독고황후는 양용을 폐하고 차남 양광을 태자로 세우려 했다. 문헌제가 이를 고경에게 상의하자, 고경은 황태자와 인척 관계였고 장유유서를 이유로 폐위에 반대했다. 이로 인해 독고황후는 고경의 실각을 꾀하게 되었다. 마침 고경의 부인이 사망하자, 독고황후는 문제에게 고경에게 후처를 권하도록 했으나 고경은 노령을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나 얼마 후 고경의 애첩이 아들을 낳자, 독고황후는 이를 빌미로 문제에게 "폐하께서 후처를 돌보려 하셨는데, 고경은 애첩을 마음에 두고 폐하를 속였습니다. 이래도 아직 고경을 믿으려 하십니까?"라고 참언했고, 이로 인해 문제는 고경을 멀리하게 되었다.
598년, 고구려 원정이 결정되자 고경은 반대했지만 원수장사(元帥長史)로 종군했다. 원정이 폭우와 역병으로 실패하자, 독고황후는 고경에게 처음부터 원정을 성공시킬 마음이 없었다고 문제에게 참언했다. 또한 원정 당시 문제는 양량이 어리다는 이유로 고경에게 군의 모든 것을 위임했는데, 양량의 의견이 고경에게 자주 거부되자 양량은 이에 앙심을 품고 귀환 후 황후에게 "저는 고경에게 죽을 뻔했습니다"라고 호소했다. 거듭된 참언으로 문제는 고경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고, 599년 왕세적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면관시킨 뒤 서민으로 강등했다. 고경이라는 후원자를 잃은 양용은 이듬해인 600년 폐위되었고, 양광이 새로운 황태자가 되었다.
604년, 수 양제가 즉위하자 고경은 예부상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경은 양제의 사치스러운 정책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606년 양제가 북주와 북제의 궁정 음악가들을 다시 모으려 하자 상소를 올려 반대했고, 607년에는 양제가 복종적인 돌궐의 계민가한에게 큰 상을 내리는 것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경은 양제의 정책에 대해 공공연히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 비서 이의(李懿)에게는 "북주 선제가 춤, 음악, 공예를 좋아하다 왕조를 멸망시켰는데, 그 엎질러진 수레의 예가 얼마 전인데 어찌 반복되는가?"라고 말했으며, 궁정 창고를 담당하던 하주(何稠)에게는 계민가한에 대해 "이 야만인이 중국의 힘과 지리를 잘 알게 되었으니, 나중에 화근이 될까 두렵다"고 우려했다. 또한 관왕(關王) 양웅에게는 "최근 정부의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발언들은 하약필, 우문필(宇文弼) 등의 비슷한 발언들과 함께 양제에게 보고되었다. 결국 607년 여름, 양제는 고경, 하약필, 우문필을 조정 비방죄로 모두 참수했고, 고경의 아들들은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천하 사람들은 고경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기고 애석해했다고 전해진다. 일부 역사가들은 고경의 죽음을 과거 그가 문제의 명으로 진의 후주(後主)의 총희였던 장려화를 처형한 일과 연관 짓기도 한다.
5. 3. 종합적 평가
수서는 고경을 문무(文武)에 모두 재능이 있고 관찰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다.[1] 수 문제의 깊은 신임을 바탕으로 충성을 다하고 국가에 헌신했으며, 유능한 인재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소위, 양소, 하약필, 한금호 등 수많은 인물이 그의 추천으로 등용되어 활약했다. 세상을 구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으며, 약 20년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관리와 백성 모두로부터 칭송과 존경을 받았다. 수나라가 부강해진 데에는 고경의 공이 컸다고 평가된다.[1]고경은 총명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어려서부터 사서를 널리 읽고 변설에도 능했다.[1] 북주 시절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수 문제가 실권을 잡자 핵심 참모로 발탁되었다.[1] 580년 위지경의 난을 평정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1] 581년 수나라 건국 후에는 상서좌복야 겸 납언에 임명되어 국정 운영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1] 진나라 평정 작전에서는 수 양제의 원수장사로서 군사 전략을 총괄했으며, 강남을 지치게 만드는 전략을 제안하고 실행하여 589년 진나라 멸망에 크게 기여했다.[1]
그러나 수 양제가 즉위한 후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고경은 양제의 사치스러운 정책(궁정 음악가 재소집 등)과 돌궐 계민가한에 대한 과도한 우대 등을 비판했으며,[1] 이는 양제의 미움을 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진나라 평정 당시 양제가 원했던 장려화를 참수한 일로 인해 이미 양제와의 관계는 틀어져 있었다.[1] 또한 수 문제 재위 시 독고황후와의 갈등도 그의 정치 역정에 영향을 미쳤다. 황태자 양용 폐위 문제에 반대하고, 황후를 "한 여인"이라 칭한 일 등으로 인해 황후의 원망을 사 실각하기도 했다.[1]
604년 양제가 즉위하면서 잠시 예부상서로 복권되었으나,[1] 여전히 양제의 정책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는 만리장성 축조와 돌궐 계민가한에 대한 우대, 해이해진 조정 기강 등을 하약필 등과 함께 비판했다.[1] 결국 607년, 조정 비방죄로 하약필, 우문필 등과 함께 처형당했다.[1] 그의 죽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해하고 애석해했다고 전해진다.[1]
6. 기타
일부 전통 역사가들은 수 문제의 아들인 양제가 황태자 시절, 진숙보의 후궁이었던 장려화를 자신이 차지하려 했으나 고경이 명령을 어기고 그녀를 처형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훗날 고경을 제거할 구실을 찾았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참조
[1]
서적
Book of Sui
607-08-27
[2]
서적
Cities of Aristocrats and Bureaucrats
https://books.google[...]
1999
[3]
서적
Cities of Aristocrats and Bureaucrats
https://books.google[...]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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