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바오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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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바오 지방은 필리핀 민다나오섬 남동부에 위치한 지방으로, 다양한 부족의 역사와 스페인, 미국, 일본의 지배를 거쳐 현재 5개의 주와 1개의 고도로 도시화된 도시인 다바오시로 구성되어 있다. 다바오시는 민다나오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필리핀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며, 농업, 무역, 관광의 중심지이다. 2020년 기준 인구는 524만 명 이상이며, 세부아노어를 주로 사용하고, 기독교가 다수를 차지한다. 다바오 지방은 농업 기반 경제를 가지고 있으며, 사사 국제항과 프란시스코 방고이 국제공항을 통해 국내외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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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바오주는 필리핀 다바오 지방 북중앙부에 위치한 주로, 1967년 다바오주에서 분할되어 형성되었고 1998년 다바오데오로주 분리 후 현재 영역을 가지며, 바나나 생산량이 가장 많은 농업 중심지이고 주도는 타굼이다. - 다바오 지방 - 남다바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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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바오 지방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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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개요 | |
명칭 | 다바오 지방 |
별칭 | 필리핀의 카카오 수도 |
지역가 | Pinanggang Yuta (사랑받는 땅) |
좌표 | 7°10′N 125°30′E |
국가 | 필리핀 |
지역 | 민다나오 |
중심지 | 다바오 시 (가장 큰 도시) |
행정 구역 | |
주 | 다바오데오로 주 다바오델노르테 주 다바오델수르 주 다바오옥시덴탈 주 다바오오리엔탈 주 |
독립시 | 다바오 시 |
구성시 | 디고스 마티 파나보 사말 타굼 |
지방 자치체 | 43개 |
바랑가이 | 1162개 |
하원 의원 구역 | 11개 |
인문 환경 | |
언어 | 세부아노어 만다야어 칼라간어 기앙간어 디바바원어 타가바와어 만사카어 상기레스어 오보어 사란가니어 타갈로그어 필리핀어 영어 |
인구 (2020년) | 5,243,536명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주민 | 다바오에뇨 |
경제 | |
GDP (2023년) | ₱1조 180억 $185억 1천만 |
성장률 | (6.7%) |
HDI | 0.697 () |
HDI 순위 | 필리핀 내 10위 (2019년) |
기타 정보 | |
시간대 | PST |
UTC 오프셋 | +8 |
ISO 코드 | PH-11 |
최대 고도 | 아포 산 (2,954m) |
시각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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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다바오 지역의 역사는 다양한 부족들이 이 지역을 점유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노보족, 만다야족, 칼라간족, 만사카족, 그리고 바고보족이 이 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나중에 민다나오가 된 작은 정착지와 공동체를 건설한 같은 부족들이다.
다바오 지역은 한때 마긴다나오 술탄국의 일부였으며, 마긴다나오인들은 이곳을 "피나구라산(Pinagurasan)"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의 초기 정착민들은 술루 술탄국의 지배하에 있던 마긴다나오인과 타우스그족이었다. 다투 바고는 다바오 만의 다투 중 한 명으로,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화에 저항했다.
다바오 만 지역은 유럽인들과 최초로 접촉한 필리핀 지역으로, 16세기 초부터 접촉이 이루어졌다. 포르투갈인들이 먼저 이 지역을 방문했지만, 스페인인들이 훨씬 후에 이 지역을 식민지화했다. 1512년 프란시스코 세라노(Francisco Serrano)는 현재 다바오오리엔탈 주에 위치한 산 아구스틴 곶(Cape of San Agustín)의 얕은 바다와 산호초에서 난파되었다. 1538년 포르투갈 선장 프란시스코 데 카스트로(Francisco de Castro)는 강한 바람에 밀려 민다나오섬 남동쪽 해안에 도착하여 이 지역의 여러 부족장들을 세례하였다.
1546년 1월경, 예수회 사제인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는 말라카를 떠나 당시 향신료 제도로 불리던 몰루카 제도(Mollucas|Molucca Islands)로 향했다. 포르투갈인들이 정착해 있던 이곳에서 그는 1년 반 동안 암보이나(Amboyna), 테르나테(Ternate), 바라누라(Baranura) 등 여러 섬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이 탐험 중에 민다나오섬에 상륙했으며, 17세기 작가들과 1623년 발표된 시성 교황령에서 이를 확인하고 있다. 또한 그가 민다나오섬에서 복음을 전파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1847년 스페인 사업가 돈 호세 오양구렌이 이끄는 스페인 사람들이 다바오 지역에 도착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당시 현재 다바오 시가 있는 지역은 칼라간 모로 족장 다투 바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돈 오양구렌은 다투 바고가 통치하는 지역을 정복하려 했지만, 처음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결국 모로 족장은 자신의 백성을 아포산 근처로 대피시켰다. 이때 스페인인들이 누에바 베르가라라고 불렀던 다바오 마을이 1848년에 설립되었다.
돈 오양구렌은 이 지역을 개발하려고 시도했다. 스페인이 마침내 이 지역의 항구를 장악하면서 우위를 점했지만, 1890년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다바오의 인구는 매우 느리게 증가했다. 루손, 비사야 그리고 민다나오의 다른 해안 지역과는 달리, 다바오에서의 스페인 지배는 단 50년간 지속되었고, 1898년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스페인은 다바오를 버렸다. 이는 스페인이 통치한 지역 중 가장 짧은 기간에 속한다.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 이후 스페인의 지배가 끝났다. 그 후 미국인들이 이 지역에 상륙하여 통신 및 교통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기간 동안 이 지역에서는 사유 농장 소유가 증가했다. 일본인들의 이 지역 이주는 두 명의 일본 기업가인 오타 교사부로(Kyosaburo Ohta)와 후루카와 요시조(Yoshizo Furukawa)가 이 지역에 아바카와 코코넛 농장을 건설하기 위한 더 나은 농지를 찾으면서 시작되었다. 1900년 다바오 항이 개항하여 필리핀 남부에 처음으로 설립된 국제 항구가 되었다.
1903년부터 1914년까지 이 지역은 민다나오의 전 모로 주의 여러 구역 중 하나였다. 1914년 이후, 이 주는 라나오를 제외한 민다나오 섬 전체를 관할하는 민다나오-술루 주(Department of Mindanao and Sulu)라는 미국의 식민지 기관으로 대체되었다. 이 기관은 1914년부터 1920년까지 존속했다.
1942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필리핀 점령이 시작되면서 다바오 지방은 필리핀 지역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일본군의 점령을 받은 곳 중 하나였다. 다바오에 거주하던 일본 이민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침략자들을 환영하며 제5열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일본인들은 모로 무슬림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중국인들에게도 좋지 않게 여겨졌다.[4][5] 모로인들은 "일본 제5열과 침략자 모두에게 대처할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평가되었다.[6] 모로인들은 민다나오 다바오에 상륙한 일본 침략자들과 싸웠다.[7][8][9][10][11][12] 모로인들이 일본군에게 큰 공포를 안겨주었기 때문에,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밤에는 배로 돌아가서 잠을 잤다.[13][14][15][16][17][18][19] 연합군 해방 작전 중 가장 긴 전투였던 다바오 전투는 1945년에 벌어졌다. 전쟁 후, 1946년 7월 4일 필리핀 독립 선포 이전 최소 1년 가까이 다시 미국의 손에 넘어간 이 지역에 살던 일본인들은 대부분 필리핀 인구에 통합되었다.
1946년 필리핀 독립 이전에는 이 지역 전체가 다바오 주라는 단일 주였으며, 다바오가 주도였다. 당시 이 주는 필리핀에서 가장 큰 주 중 하나였다. 1920년부터 1967년 5월까지 존속하다가, 다바오 주는 다바오 델 노르테 주, 다바오 델 수르 주, 다바오 오리엔탈 주의 세 개 주로 분할되었다.[20] 분할 후 다바오는 공식적으로 지역 중심지로 명명되었다.
11지방(당시 남부 민다나오라 불림)은 원래 6개 주(콤포스텔라밸리, 다바오 델 노르테, 다바오 델 수르, 다바오 오리엔탈, 남 코타바토, 사란가니)와 다바오 시(Davao City), 디고스, 파나보, 타굼, 사말(다바오 델 노르테), 제네럴 산토스, 코로나달 등의 도시를 포함하고 있었다.[21] 수리가오 델 수르는 1995년 2월 23일 새롭게 만들어진 카라가 지방으로 이관되었다.
2001년 9월, 남부 민다나오로 알려진 11지방은 행정명령 제36호에 따라 민다나오 지방의 재편성이 이루어졌다. 11지방은 '다바오 지방'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남 코타바토와 사란가니 주, 그리고 제네럴 산토스와 코로나달 시는 12지방으로 이관되었다.[21][22]
2022년 10월 12일, 지역 평화 및 질서위원회는 수십 년 동안 공산주의 반란의 거점이었던 이 지역 전체를 소수의 산발적인 신인민군 구성원을 제외하고는 "반란이 없는 지역"으로 선포했다.[23]
2. 1. 어원
많은 역사학자들은 다바오(Davao)라는 이름이 이 지역 최초의 정착민이었던 세 부족이 다바오 강(Davao River)을 부르던 세 가지 이름이 혼합된 것이라고 믿는다. 원주민 부족인 마노보족(Manobo)은 다바오 강을 '다보호호(Davohoho)'라고 불렀다. 또 다른 부족인 바고보족(Bagobo)은 강을 '다보하하(Davohaha)'라고 불렀는데, 이는 "불"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다른 부족인 귀앙간족(Guiangan)은 강을 '두우(Duhwow)'라고 불렀다.2. 2. 초기 역사
다바오 지역의 역사는 다양한 부족들이 이 지역을 점유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노보족(Manobo), 만다야족(Mandaya), 칼라간족(Kalagan), 만사카족(Mansaka), 그리고 바고보족이 이 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나중에 민다나오가 된 작은 정착지와 공동체를 건설한 같은 부족들이다.2. 3. 마긴다나오 시대
다바오 지역은 한때 마긴다나오 술탄국의 일부였으며, 마긴다나오인들은 이곳을 "피나구라산(Pinagurasan)"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의 초기 정착민들은 술루 술탄국의 지배하에 있던 마긴다나오인과 타우스그족이었다. 다투 바고는 다바오 만의 다투 중 한 명으로,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화에 저항했다.2. 4. 유럽인과의 첫 접촉
다바오 만 지역은 유럽인들과 최초로 접촉한 필리핀 지역으로, 16세기 초부터 접촉이 이루어졌다. 포르투갈인들이 먼저 이 지역을 방문했지만, 스페인인들이 훨씬 후에 이 지역을 식민지화했다. 1512년 프란시스코 세라노(Francisco Serrano)는 현재 다바오오리엔탈 주에 위치한 산 아구스틴 곶(Cape of San Agustín)의 얕은 바다와 산호초에서 난파되었다. 1538년 포르투갈 선장 프란시스코 데 카스트로(Francisco de Castro)는 강한 바람에 밀려 민다나오섬 남동쪽 해안에 도착하여 이 지역의 여러 부족장들을 세례하였다.1546년 1월경, 예수회 사제인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는 말라카를 떠나 당시 향신료 제도로 불리던 몰루카 제도(Mollucas|Molucca Islands)로 향했다. 포르투갈인들이 정착해 있던 이곳에서 그는 1년 반 동안 암보이나(Amboyna), 테르나테(Ternate), 바라누라(Baranura) 등 여러 섬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이 탐험 중에 민다나오섬에 상륙했으며, 17세기 작가들과 1623년 발표된 시성 교황령에서 이를 확인하고 있다. 또한 그가 민다나오섬에서 복음을 전파한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다.
2. 5. 스페인 통치 시대
1847년 스페인 사업가 돈 호세 오양구렌이 이끄는 스페인 사람들이 다바오 지역에 도착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당시 현재 다바오 시가 있는 지역은 칼라간 모로 족장 다투 바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돈 오양구렌은 다투 바고가 통치하는 지역을 정복하려 했지만, 처음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결국 모로 족장은 자신의 백성을 아포산 근처로 대피시켰다. 이때 스페인인들이 누에바 베르가라라고 불렀던 다바오 마을이 1848년에 설립되었다.돈 오양구렌은 이 지역을 개발하려고 시도했다. 스페인이 마침내 이 지역의 항구를 장악하면서 우위를 점했지만, 1890년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다바오의 인구는 매우 느리게 증가했다. 루손, 비사야 그리고 민다나오의 다른 해안 지역과는 달리, 다바오에서의 스페인 지배는 단 50년간 지속되었고, 1898년 필리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스페인은 다바오를 버렸다. 이는 스페인이 통치한 지역 중 가장 짧은 기간에 속한다.
2. 6. 미국 통치 시대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 이후 스페인의 지배가 끝났다. 그 후 미국인들이 이 지역에 상륙하여 통신 및 교통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기간 동안 이 지역에서는 사유 농장 소유가 증가했다. 일본인들의 이 지역 이주는 두 명의 일본 기업가인 오타 교사부로(Kyosaburo Ohta)와 후루카와 요시조(Yoshizo Furukawa)가 이 지역에 아바카와 코코넛 농장을 건설하기 위한 더 나은 농지를 찾으면서 시작되었다. 1900년 다바오 항이 개항하여 필리핀 남부에 처음으로 설립된 국제 항구가 되었다.1903년부터 1914년까지 이 지역은 민다나오의 전 모로 주의 여러 구역 중 하나였다. 1914년 이후, 이 주는 라나오를 제외한 민다나오 섬 전체를 관할하는 민다나오-술루 주(Department of Mindanao and Sulu)라는 미국의 식민지 기관으로 대체되었다. 이 기관은 1914년부터 1920년까지 존속했다.
2. 6. 1. 일본군 점령 시대
1942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필리핀 점령이 시작되면서 다바오 지방은 필리핀 지역 중에서도 가장 먼저 일본군의 점령을 받은 곳 중 하나였다. 다바오에 거주하던 일본 이민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침략자들을 환영하며 제5열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일본인들은 모로 무슬림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중국인들에게도 좋지 않게 여겨졌다.[4][5] 모로인들은 "일본 제5열과 침략자 모두에게 대처할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평가되었다.[6] 모로인들은 민다나오 다바오에 상륙한 일본 침략자들과 싸웠다.[7][8][9][10][11][12] 모로인들이 일본군에게 큰 공포를 안겨주었기 때문에,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밤에는 배로 돌아가서 잠을 잤다.[13][14][15][16][17][18][19] 연합군 해방 작전 중 가장 긴 전투였던 다바오 전투는 1945년에 벌어졌다. 전쟁 후, 1946년 7월 4일 필리핀 독립 선포 이전 최소 1년 가까이 다시 미국의 손에 넘어간 이 지역에 살던 일본인들은 대부분 필리핀 인구에 통합되었다.2. 7. 필리핀 독립 이후
1946년 필리핀 독립 이전에는 이 지역 전체가 다바오 주라는 단일 주였으며, 다바오가 주도였다. 당시 이 주는 필리핀에서 가장 큰 주 중 하나였다. 1920년부터 1967년 5월까지 존속하다가, 다바오 주는 다바오 델 노르테 주, 다바오 델 수르 주, 다바오 오리엔탈 주의 세 개 주로 분할되었다.[20] 분할 후 다바오는 공식적으로 지역 중심지로 명명되었다.11지방(당시 남부 민다나오라 불림)은 원래 6개 주(콤포스텔라밸리, 다바오 델 노르테, 다바오 델 수르, 다바오 오리엔탈, 남 코타바토, 사란가니)와 다바오 시(Davao City), 디고스, 파나보, 타굼, 사말(다바오 델 노르테), 제네럴 산토스, 코로나달 등의 도시를 포함하고 있었다.[21] 수리가오 델 수르는 1995년 2월 23일 새롭게 만들어진 카라가 지방으로 이관되었다.
2001년 9월, 남부 민다나오로 알려진 11지방은 행정명령 제36호에 따라 민다나오 지방의 재편성이 이루어졌다. 11지방은 '다바오 지방'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남 코타바토와 사란가니 주, 그리고 제네럴 산토스와 코로나달 시는 12지방으로 이관되었다.[21][22]
2022년 10월 12일, 지역 평화 및 질서위원회는 수십 년 동안 공산주의 반란의 거점이었던 이 지역 전체를 소수의 산발적인 신인민군 구성원을 제외하고는 "반란이 없는 지역"으로 선포했다.[23]
3. 행정 구역
(2020년 기준)
(km2)
(명/km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