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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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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담혜는 554년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승려 9명 중 한 명으로,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담혜를 비롯한 승려의 일본 도래 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기록의 누락, 당시 일본에 백제 승려가 없었다는 정황, 백제의 정치적 목적 등을 근거로, 실제로는 빈다쓰 천황 시대 이전까지 일본에 승려가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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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曇慧 (담혜)
출생지중국

2. 생애

554년, 도심 등 9명의 승려와 함께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는 백제 승려로서는 최초의 일본 방문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담혜 일행을 위해 절을 지어주는 등의 도움을 주었다.

3. 《일본서기》 기록 및 논란

일본서기긴메이 천황 15년(554년)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승려 담혜 등 9명을 파견하여 이전에 일본에 와 있던 승려 도심 등 7명과 교대시켰다고 한다.[3] 이 기록은 담혜가 역박사 왕도량, 오경박사 왕류귀, 역박사 왕보손, 의박사 왕유타, 채약사 반량풍, 고덕 정유타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여러 의문과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담혜 이전에 파견되었다는 승려들에 대한 기록이 명확하지 않으며, 이후 빈다쓰 천황 시대의 기록과 모순되는 점 등이 지적된다.[3] 이러한 논란은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지식인들이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3], 당시 백제의 불교 전래 목적[3][4] 등 복합적인 배경 속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3. 1. 기록의 신빙성 문제

담혜의 내조(來朝)를 전하는 기록은 『일본서기』 권 제19에 나타난다. 해당 기록에 따르면, 긴메이 천황 15년(554년 추정) 2월, 백제는 하부 간솔 장군 삼귀, 상부 나솔 물부 오 등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며, 덕솔 동성자 막고를 이전의 나솔 동성자 언 대신 보내고, 오경박사 왕유귀를 고덕 마정안 대신, 승려 담혜 등 9명을 승려 도심 등 7명 대신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록의 신빙성에는 여러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담혜 등 9명의 승려가 이전에 일본에 왔다는 기록이 없어, 교체 파견의 전제가 성립하기 어렵다. 둘째, 불상경전 전래와 같은 불교 관련 기사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한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중요한 승려 파견 사실 자체를 누락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여겨진다.

결정적으로, 이후 빈다쓰 천황 13년(584년)의 기록은 당시 일본에 백제 승려가 없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3]일본서기』 권 제20에 따르면, 소아 마자 숙녜는 불법을 펼 스승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사람을 보냈고, 하리마국에서 환속(還俗)한 고구려 출신 승려 혜편을 찾아내 스승으로 삼았다. 만약 긴메이 천황 시대에 백제에서 온 승려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면, 가장 적극적으로 불교를 후원했던 소가씨소가노 우마코가 굳이 환속한 고구려 승려를 찾아 스승으로 삼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3] 이는 빈다쓰 천황 13년까지 일본 내에 백제에서 공식적으로 파견된 승려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긴메이 천황 15년의 승려 교체 기록은 후대에 첨가되었거나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지식인들이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과 연결지어 해석되기도 한다. 이들은 신라에 의해 멸망한 모국 백제의 성왕의 업적을 기리고, 불교 전파에 있어서 백제가 다른 나라보다 앞섰음을 강조하기 위해 승려 파견 기록을 추가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3] 실제로 『일본서기』에는 백제계 사료로 추정되는 '백제기(百済記)', '백제신찬(百済新撰)', '백제본기(百済本記)' 등이 인용되고 있다.[3]

한편, 『일본서기』에 기록된 공식적인 불교 전래(538년 또는 552년) 기사에서도 백제일본에 전한 것은 불상경전뿐이었고, 승려는 동반되지 않았다.[4] 당시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의 군사적 긴장 속에서 일본의 군사적 지원 확보를 우선시했기에, 문화 전파 그 자체보다는 상징적인 물품 전달에 집중했을 가능성이 있다.[3] 불교는 흔히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가 갖추어져야 성립한다고 보는데, 불법을 전하고 가르칠 승려의 동반 없이 불상과 경전만 전해진 것을 완전한 의미의 '불교 전래'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3]

3. 2. 백제 중심 사관의 영향

`일본서기` 권19에는 긴메이 천황 15년(554년 추정) 2월, 백제가 담혜 등 승려 9명을 보내 기존에 파견했던 승려 도심 등 7명과 교체했다는 기록이 있다.[3] 이 기록에 따르면 담혜 등 9명의 승려가 이 시점 이전에 이미 일본에 와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기록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불상경전 전래는 상세히 기록한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중요한 승려 파견 사실을 누락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 이후 비다쓰 천황 시대의 기록을 보면 당시 일본에 백제 승려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3]

`일본서기` 권20에 따르면, 비다쓰 천황 13년(584년 추정), 불교를 숭상하던 소가노 우마코는 불법의 스승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 결과 하리마국에서 환속했던 고구려 출신 승려 혜편을 찾아내 스승으로 삼았다. 만약 긴메이 천황 15년의 기록대로 백제 승려들이 일본에 있었다면, 당시 유력 가문인 소가씨와 가까웠던 그들이 스승이 되었어야 자연스럽다. 굳이 환속했던 고구려 승려를 찾아 스승으로 삼았다는 것은 당시 일본 내에 백제에서 온 승려가 없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긴메이 천황 15년의 승려 교체 기록이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3]

이러한 기록이 나타난 배경에는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백제계 망명 지식인들의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신라에 의해 멸망하고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 지식인들은 자국의 역사를 기록한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등의 사료를 일본에 전했고, 이것이 `일본서기` 편찬에 활용되었다.[3] 이 과정에서 백제의 성왕을 위대한 군주로 그리고자, 불교 전래에 있어서도 불상과 경전뿐 아니라 승려 파견 역시 백제가 다른 나라보다 앞섰다고 기록하려 했을 수 있다.[3]

또한, `일본서기`에 기록된 백제의 공식적인 불교 전래(538년 또는 552년) 당시에는 불상경전만 전해졌고 승려는 동반되지 않았다.[4] 이는 당시 백제가 신라고구려에 맞서 일본의 군사적 협력을 얻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 있다. 문화 교류보다는 군사적, 외교적 목적 달성을 위해 불교를 활용했고, 따라서 물건(불상, 경전)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3] 불교는 '불(佛, 불상)', '법(法, 경전)', '승(僧, 승려)'의 삼보(三寶)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성립한다고 볼 때, 승려의 파견 없이 이루어진 불상과 경전 전달만을 온전한 의미의 '불교 전래'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종교의 수용과 전파에는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3]

3. 3. 불교 성립 요건

불교는 "불(佛)·법(法)·승(僧)" 즉, 불상, 경전, 승려(비구)의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성립된다고 본다. 이 세 가지 요소 중에서도 특히 승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국 시대 일본에 들어온 기독교의 예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십자가성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해설하고 가르쳐 줄 선교사가 없다면 종교가 제대로 수용되기 어렵기 때문이다[3]

일본서기』의 유명한 불교 공전 기사에 따르면,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불상경전뿐이었고, 승려는 동반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4]。 당시 백제는 신라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적 협력을 얻고자 하는 구체적인 목적이 있었으므로, 불교 전래 역시 순수한 문화적 교류라기보다는 군사적·외교적 의도가 담긴 행위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불상과 경전 같은 상징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3]

백제로부터 불상과 경전이 전해진 것은 사실로 인정되더라도, 승려가 동반되지 않았다면 이를 역사적으로 완전한 의미의 '불교 공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불교의 핵심 교리를 전하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 승려의 역할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3]

한편, 『일본서기』에는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와 같은 백제 측 사료가 인용되어 있다. 이 사료들은 백제가 신라에 의해 멸망하고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한 후, 백제의 지식인들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백제 성왕의 업적을 기리고자, 실제보다 이른 시기에 승려를 파견한 것처럼 기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3]。 이는 『일본서기』 킨메이 천황 15년(554년) 조에 기록된 담혜 등 백제 승려의 교체 기사가 후대의 기록과 모순되는 점을 통해 뒷받침된다[3]

참조

[1] 서적 日本文化通史 北京大学出版社 2009-07
[2] 서적 日本医学史研究余話 https://books.google[...] 科学書院 1981-10-01
[3] 간행물 『日本書紀』編纂と亡命百済知識人 新人物往来社 2006-02
[4] 인용 日本書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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