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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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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선거는 1952년 8월 5일에 치러졌으며, 이승만이 자유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이 선거는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권이 참패한 후,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을 국회가 아닌 국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면서 치러지게 되었다. 선거 과정에서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압박해 발췌 개헌을 통과시켰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이 74.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부통령 선거에서는 무소속 함태영이 자유당 이범석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승만은 함태영을 지지하기 위해 이범석을 견제했고, 이는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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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선거
선거 정보
선거 이름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선거
국가대한민국
국기 연도1949년
선거 유형대통령
이전 선거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 선거
이전 선거 연도1948년
선거일1952년 8월 5일
차기 선거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선거
차기 선거 연도1956년
투표율 (대통령)88.1%
투표율 (부통령)86.4%
대통령 선거 결과
이승만
이승만
후보이승만
소속 정당자유당
득표수5,238,769
득표율74.6%
조봉암
조봉암
후보조봉암
소속 정당무소속
득표수797,504
득표율11.4%
이시영
이시영
후보이시영
소속 정당무소속
득표수764,715
득표율10.9%
부통령 선거 결과
함태영
함태영
후보함태영
소속 정당무소속
득표수2,943,813
득표율41.3%
이범석
이범석
후보이범석
소속 정당자유당
득표수1,815,692
득표율25.5%
대통령 당선자
직책대통령
선거 전 대통령이승만
선거 전 소속 정당자유당
선거 후 대통령이승만
선거 후 소속 정당자유당
부통령 당선자
직책부통령
선거 전 부통령공석
선거 후 부통령함태영
선거 후 소속 정당무소속
지도
시도별 우세지역
시도별 우세지역
이승만

2. 배경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들은 참패를 겪어, 국회 의석의 4분의 1 남짓을 얻는 데 그쳤다. 야당이 장악한 국회에서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을 국회가 아닌 국민이 선출하도록 헌법을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과 군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위협한 끝에 1952년 7월 헌법 개정을 통과시켰다.[3]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여권이 참패한 이후, 이승만의 국회 장악력은 크게 불안해졌다.[9][10] 기존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했는데, 야당 및 반이승만계 무소속 의원들이 국회의석의 절대 다수를 점하는 상황이 되자 이승만의 재선 가능성에 안개가 끼게 된 것이었다.[9][10] 그 무렵 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장면 총리나 신흥우대한국민당 최고위원 등을 지지하려는 움직임이 조성되었고, 이승만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9][10]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 이승만은 대통령 국민 직접 선거제를 도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1년 11월 30일 이승만이 발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은 야당은 물론 여당 의원들까지도 반대하는 바람에 국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1952년 4월 17일, 야당 의원들은 도리어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발의하였는데, 이때 개헌안 공동발의에 참여한 의원 수가 개헌안 통과에 필요한 의원 수와 같은 123명이어서 사실상 통과가 확실해 보였다. 이승만은 부랴부랴 지난 번에 부결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약간 수정해 5월 14일 재발의했으나, 국회의원들 사이에선 이미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대세를 타고 있어 이승만이 낸 개헌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가 전시 상황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계엄을 선포하고, 보안을 구실로 공권력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겁박했다. 결국 1952년 7월 4일, 삼우장, 신라회 등 친여계 의원들은 두 개헌안을 절충시킨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내놓았으며, 경찰들이 의사당을 포위한 상황 속에 국회의원들은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율로 이를 통과시켰다.[3] 국회의원들을 회의장에 사실상 감금한 상태에서 개정 헌법을 제대로 읽어볼 기회도 없이 불법적으로 이뤄진 발췌 개헌은 대한민국 헌정사가 수차례 불법적 또는 비민주적 개헌으로 얼룩지는 유래가 됐다.

어쨌든 대통령 국민직선제와 국회 양원제 등을 골자로 한 발췌 개헌은 7월 7일 정식으로 공포되었고, 이로써 제2대 대통령 선거는 국민들의 직접 선거로 치러지게 되었다.

2. 1.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여권이 참패한 이후, 이승만의 국회 장악력은 크게 불안해졌다.[9][10] 기존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했는데, 야당 및 반이승만계 무소속 의원들이 국회의석의 절대 다수를 점하는 상황이 되자 이승만의 재선 가능성에 안개가 끼게 된 것이었다.[9][10] 그 무렵 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장면 총리나 신흥우대한국민당 최고위원 등을 지지하려는 움직임이 조성되었고, 이승만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9][10]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 이승만은 대통령을 대통령 국민 직접 선거제를 도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1년 11월 30일 이승만이 발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은 야당은 물론 여당 의원들까지도 반대하는 바람에 국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1952년 4월 17일, 야당 의원들은 도리어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발의하였는데, 이때 개헌안 공동발의에 참여한 의원 수가 개헌안 통과에 필요한 의원 수와 같은 123명이어서 사실상 통과가 확실해 보였다. 이승만은 부랴부랴 지난 번에 부결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약간 수정해 5월 14일 재발의했으나, 국회의원들 사이에선 이미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대세를 타고 있어 이승만이 낸 개헌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가 전시 상황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계엄을 선포하고, 보안을 구실로 공권력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겁박했다. 결국 1952년 7월 4일, 삼우장, 신라회 등 친여계 의원들은 두 개헌안을 절충시킨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내놓았으며, 경찰들이 의사당을 포위한 상황 속에 국회의원들은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율로 이를 통과시켰다.[3] 국회의원들을 회의장에 사실상 감금한 상태에서 개정 헌법을 제대로 읽어볼 기회도 없이 불법적으로 이뤄진 발췌 개헌은 대한민국 헌정사가 수차례 불법적 또는 비민주적 개헌으로 얼룩지는 유래가 됐다.

어쨌든 대통령 국민직선제와 국회 양원제 등을 골자로 한 발췌 개헌은 7월 7일 정식으로 공포되었고, 이로써 제2대 대통령 선거는 국민들의 직접 선거로 치러지게 되었다.

2. 2. 발췌 개헌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여권이 참패한 이후, 이승만의 국회 장악력은 크게 불안해졌다.[9] 기존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규정했는데, 야당 및 반이승만계 무소속 의원들이 국회의석의 절대 다수를 점하는 상황이 되자 이승만의 재선 가능성에 안개가 끼게 되었다.[9][10] 그 무렵 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장면 총리나 신흥우대한국민당 최고위원 등을 지지하려는 움직임이 조성되었고, 이승만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9][10]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 이승만은 대통령 국민 직접 선거제를 도입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51년 11월 30일 이승만이 발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은 야당은 물론 여당 의원들까지도 반대하는 바람에 국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1952년 4월 17일, 야당 의원들은 도리어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발의하였는데, 이때 개헌안 공동발의에 참여한 의원 수가 개헌안 통과에 필요한 의원 수와 같은 123명이어서 사실상 통과가 확실해 보였다. 이승만은 부랴부랴 지난 번에 부결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약간 수정해 5월 14일 재발의했으나, 국회의원들 사이에선 이미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대세를 타고 있어 이승만이 낸 개헌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가 전시 상황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계엄을 선포하고, 보안을 구실로 공권력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겁박했다.[3] 결국 1952년 7월 4일, 삼우장, 신라회 등 친여계 의원들은 두 개헌안을 절충시킨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내놓았으며, 경찰들이 의사당을 포위한 상황 속에 국회의원들은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율로 이를 통과시켰다. 국회의원들을 회의장에 사실상 감금한 상태에서 개정 헌법을 제대로 읽어볼 기회도 없이 불법적으로 이뤄진 발췌 개헌은 대한민국 헌정사가 수차례 불법적 또는 비민주적 개헌으로 얼룩지는 유래가 됐다.

어쨌든 대통령 국민직선제와 국회 양원제 등을 골자로 한 발췌 개헌은 7월 7일 정식으로 공포되었고, 이로써 제2대 대통령 선거는 국민들의 직접 선거로 치러지게 되었다.[3]

3.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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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5]후보자명정당
대통령 선거 후보자
1조봉암무소속
2이승만자유당
3이시영무소속
4신흥우무소속



부통령 후보자[6]
번호[5]후보자정당
1이윤영조선민주당
2함태영무소속
3이갑성자유당 합동파[7]
4조병옥민주국민당
5임영신자유당 합동파[7]
6백성욱자유당
7정기원자유당 합동파[7]
8전진한대한노총
9이범석자유당


3. 1. 자유당

3. 1. 1. 원외 자유당

원외 자유당(구 통일노농당)은 이승만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에, 이범석 내무부 장관을 부통령 후보에 지명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은 특정 정당의 후보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후보이며, 따라서 러닝메이트 또한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이범석 지지를 거부하였다.

3. 1. 2. 원내 자유당 합동파

원내 자유당 합동파는 1952년 7월 18일 중앙상무회의를 열고 이승만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에, 이갑성 의원을 부통령 후보에 지명하였다.

3. 2. 민주국민당

민주국민당은 발췌 개헌 통과 뒤 무력감에 정식으로 정·부통령 후보를 지명하지 못하였다.[11] 신익희 국회의장과 조병옥 전 내무부 장관[12]이 각각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신익희 의장은 불출마를 선언했고[13][14][15] 결국 조병옥 전 장관만이 부통령 후보로 등록하였다.[16][17][18] 따라서 민국당은 공식적인 대통령 후보가 없었으나, 무소속 대통령 후보 중 하나인 이시영 전 부통령이 사실상 민국당의 지원으로 출마한 것으로 알려졌다.[19]

3. 3. 조선민주당

조선민주당은 1952년 7월 13일 중앙상무집행위원회를 열고 이승만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에, 이윤영 무임소 장관을 부통령 후보에 지명하였다.[20]

3. 4. 대한여자국민당

대한여자국민당의 당수였던 임영신 전 상공부 장관은 여성들을 대표하겠다며 출마하였으며, 대통령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3. 5.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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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민회의의 수장이자 대표적 진보 인사였던 조봉암 민의원부의장이승만 대통령의 헌법 파괴를 막아야 한다며 무소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조봉암은 원래부터 노동자 및 농민 계층에 단단한 지지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거기에다 개헌 국면 내내 흔들리지 않는 소신 행보를 보이며 높은 지지를 얻고 있었다.[23]

외교통으로서 직선제 개헌 전 한때나마 국회 선출 대통령으로 거론되기도 했던 신흥우대한국민당 최고위원 역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국내 정치적 기반이 미약해 별 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24]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 출신 민족지도자이자 거물급 기독교 목사였던 함태영 심계원장은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다.

노동 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던 전진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위원장은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다.

백성욱내무부 장관은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다.

정기원 원내 자유당 합동파 의원은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다.

3. 5. 1. 대통령 후보

한국농민회의의 수장이자 대표적 진보 인사였던 조봉암 민의원부의장이승만 대통령의 헌법 파괴를 막아야 한다며 무소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다. 조봉암은 원래부터 노동자 및 농민 계층에 단단한 지지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거기에다 개헌 국면 내내 흔들리지 않는 소신 행보를 보이며 높은 지지를 얻고 있었다.[23]

외교통으로서 직선제 개헌 전 한때나마 국회 선출 대통령으로 거론되기도 했던 신흥우대한국민당 최고위원 역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국내 정치적 기반이 미약해 별 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24]

번호[5]후보자명정당
대통령 선거 후보자
1조봉암무소속
2이승만자유당
3이시영무소속
4신흥우무소속


3. 5. 2. 부통령 후보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 출신 민족지도자이자 거물급 기독교 목사였던 함태영 심계원장은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다.[6]

노동 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던 전진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위원장은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다.[6]

백성욱내무부 장관은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다.[6]

정기원 원내 자유당 합동파 의원은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였다.[6]

번호[5]후보자정당
1이윤영조선민주당
2함태영무소속
3이갑성자유당 합동파[7]
4조병옥민주국민당
5임영신자유당 합동파[7]
6백성욱자유당
7정기원자유당 합동파[7]
8전진한대한노총
9이범석자유당


4. 선거 과정

4. 1. 이범석 낙선 공작

이승만 대통령은 특정 정파의 후보로 나서는 게 아니며 특정 부통령 후보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성명하였다. 이는 사실상 이범석을 자신의 러닝메이트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같은 선언 이후 원외 자유당은 당내 청년 세력들이 급속도로 연쇄 이탈, 기반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25]

그러는 사이 뒤로는 함태영심계원장을 당선시키기 위한 공작을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택상 총리, 김태선 내무부 장관, 윤우경 치안국장 등은 7월 28일 긴급 전국 도지사급 경찰국장 회의를 열고 이승만 대통령은 함태영을 부통령으로 원한다며 모든 경찰력, 행정력을 동원해 당선시킬 것을 하명했다.[26] 이후 경찰이 이승만과 함태영 외 이범석을 포함한 다른 후보들의 포스터는 이런 저런 명목으로 떼어가고, 공무원들과 선거 참관인들은 유권자들에게 함태영을 뽑도록 압박하고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기 전에 미리 확인까지 하는 등 갖은 부정이 벌어졌다.[27]

4. 2. 친여 후보 난립

이승만 대통령이 이범석을 러닝메이트로 거부한 이후, 여권 성향의 다른 부통령 후보들은 각자 자신이 이승만의 러닝메이트 자리를 꿰차기 위해 노력하였다. 부통령 후보자 9명 중 조병옥, 전진한, 정기원 등 셋을 제외한 전원이 이승만을 지지하고 있었다.[28]

이승만 대통령은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일원이었으며 심계원장을 맡고 있던 함태영 무소속 후보를 부통령으로 낙점한 상태였다.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었으며 원내 자유당 합동파의 리더였던 이갑성 후보는 원내 기반 및 전국적 정당 조직을 바탕으로 주요 후보로 부상할 수 있다는 관측을 받기도 하였으나, 점차 약세를 드러내었다.[29][30] 조선민주당의 이윤영 후보 역시 이승만이 그를 선택할지 모른다는 관측 속에 유력 후보군에 들기도 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지원도 얻지 못하고 이북 출신 유권자 및 기독교계의 지지 또한 기대만큼 나오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31][32]

대한여자국민당의 당수였던 임영신 후보는 국민의 절반이 여성인 만큼 그에 가까운 득표를 자신한다고 밝혔으나, 여성계로부터 특별한 호응을 얻지 못하고 군소후보화되었다.[32]

4. 3. 민주국민당의 상황

민주국민당 소속의 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이시영 대통령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출마했다고 밝혔다.[33][34] 그러나 이시영은 7월 30일 기자회견에서 자신은 민국당과 연대해 나온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민국당과 연대할 일이 없을 거라고 천명하였다.[35] 그러나 이시영은 8월 1일 조병옥과 공동 성명을 내고 선거 연대를 발표하였으며, 이후 두 후보는 선거 유세를 함께 다니며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36][37]

이시영은 조선 시대 때 청렴결백한 관직 생활과 이후 독립 운동에 헌신한 것으로 인해 유림 및 보수층·노인층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23] 조병옥은 민주국민당의 사무총장을 맡는 등 탄탄한 당내 기반을 두고 있었고, 당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선전이 기대되었다. 실제로 선거 당일까지도 조병옥 후보는 부통령 선거 개표 결과에서 양자 구도 혹은 3자 구도에는 들어갈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민주국민당은 창당 때부터 특권층, 부자들의 정당이라는 비판을 듣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확장성에 한계를 드러내었다.

4. 4. 야권 단일화 논의

조봉암은 본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계획이 없었으며, 야권 후보의 필요성에 따라 이시영에게 출마를 권유하러 갔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시영은 출마를 거절하고 오히려 조봉암에게 출마를 권유하여 조봉암이 출마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조봉암은 이시영의 갑작스러운 입후보가 이례적이며, 결국 자신을 중심으로 야권 단일화에 응할 것으로 예상했다.[38]

그러나 이시영은 조봉암에게 의례적인 인사만 했을 뿐이라며, 조봉암이 단일화를 위해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로 인해 조봉암과 이시영 사이에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38]

4. 5. 조봉암 사상 논쟁

조병옥 후보는 조봉암 후보가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고 만약 그의 선전이 예상될 시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고 말겠다고 밝혔다.

조봉암은 자신에게 제기된 사상 논쟁에 대해 "농림장관, 민의원부의장, 국회 임시의장을 할 때에는 아무 말도 없다가 대통령을 하려 하니 공산당이라는 것은 자신들에게 필요하면 아무 말이라도 하는 부패 세력의 상투적 방식"이라며 의혹을 제기한 민국당 측을 강력하게 비판했다.[39]

5. 선거 결과

(%)당선이승만자유당5,238,76974.6align="center"|조봉암무소속797,50411.4align="center"|이시영무소속764,71510.9align="center"|신흥우무소속219,6963.1



부통령 선거
당락후보정당득표수득표율
(%)
당선함태영무소속2,943,81341.3
align="center"|이범석자유당1,815,69225.4
align="center"|조병옥민주국민당575,2608.1
align="center"|이갑성자유당 합동파500,9727.0
align="center"|이윤영조선민주당458,5836.4
align="center"|전진한대한노총302,4714.2
align="center"|임영신자유당 합동파190,2112.7
align="center"|백성욱자유당181,3882.5
align="center"|정기원자유당 합동파164,9072.3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초 예상대로 이승만이 당선되었지만, 부통령 선거에서는 함태영 후보가 자유당 공천의 이범석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범석 후보는 "부산 정치 파동" 당시 내무부 장관, 원외 자유당 부당수로서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위한 개헌 추진에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범석의 지지 세력인 구 조선민족청년단(족청) 계열 세력 확대를 저지할 목적으로 경찰력을 동원하여 함태영을 당선시킨 것이다. 선거 후 9월 12일, 이승만은 족청계를 반당 분자로 선언하고 자유당에서 완전히 배제했으며, 이후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세력만으로 자유당 지도부를 굳혔다.

지역이승만조봉암이시영신흥우
colspan="2" style="background:;" |colspan="2" style="background:;" |colspan="2" style="background:;" |colspan="2" style="background:;" |
득표수%득표수%득표수%득표수%
서울205,30082.225,63110.314,8836.03,9231.6
경기도657,17487.744,9676.034,7044.612,8911.7
강원도366,58392.410,5162.713,3783.46,3051.6
충청북도386,66586.725,8755.823,0065.210,4092.3
충청남도636,06182.456,5907.358,7547.620,9472.7
전라북도468,22065.9109,49015.496,27113.636,2215.1
전라남도823,58773.699,8858.9165,24514.830,6772.7
경상북도921,98875.0129,79110.6140,27111.437,1003.0
경상남도693,52355.4288,65423.0211,54416.958,5864.7
제주도79,66883.86,1056.46,6597.02,6372.8
합계5,238,76974.6797,50411.4764,71510.9219,6963.1
colspan="9" |
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4]



지역함태영이범석조병옥이갑성이윤영전진한임영신백성욱정기원
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
서울70,20627.6117,32646.216,4296.513,8155.415,4756.18,9113.54,6761.84,5081.82,7271.1
경기347,79945.6252,09033.127,7763.635,1544.642,0385.521,0762.813,1951.710,5471.412,5931.7
강원223,53455.6129,70432.35,9621.59,4272.311,5552.910,6752.74,4241.12,8110.73,6740.9
충북216,22347.8130,84328.918,9264.223,1905.124,4425.413,0982.99,0942.07,9831.88,8302.0
충남118,29115.1452,20957.647,4826.134,1724.443,8955.635,0574.521,0472.718,3542.314,2871.8
전북190,24626.3235,63732.567,7319.448,5546.763,7298.834,7504.837,0245.124,9853.521,5003.0
전남729,54164.259,3185.2125,52511.077,2316.860,6585.323,2212.020,4701.818,0311.622,7392.0
경북716,79457.497,2567.8100,4988.1115,7559.373,6845.950,8844.128,2632.332,7192.631,9802.6
경남296,76623.3306,98224.1161,78712.7139,00010.9116,2609.1100,0617.949,6753.959,0794.643,8073.4
제주34,41336.034,32735.93,1443.34,6744.96,8477.24,7385.02,3432.52,3712.52,7702.9
총계2,943,81341.31,815,69225.5575,2608.1500,9727.0458,5836.4302,4714.2190,2112.7181,3882.5164,9072.3



무소속 함태영 후보는 전라남도에서 64.2%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경상북도에서도 57.4%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강원특별자치도충청북도에서도 과반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다. 반면, 자유당 이범석 후보는 충청남도에서 57.6%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고, 서울특별시와 전라북도에서 1위를 차지했다. 민주국민당 조병옥 후보는 전라남도에서 11.0%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한 자릿수 득표율에 그쳤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이범석 후보 대신 무소속 함태영 후보를 암묵적으로 지원했고, 이는 함태영 후보의 당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범석 후보의 지지 기반이었던 족청계가 약화된 지역에서 함태영 후보가 강세를 보인 것은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5. 1. 대통령 선거

(%)당선이승만자유당5,238,76974.6align="center"|조봉암무소속797,50411.4align="center"|이시영무소속764,71510.9align="center"|신흥우무소속219,6963.1



부통령 선거
당락후보정당득표수득표율
(%)
당선함태영무소속2,943,81341.3
align="center"|이범석자유당1,815,69225.4
align="center"|조병옥민주국민당575,2608.1
align="center"|이갑성자유당 합동파500,9727.0
align="center"|이윤영조선민주당458,5836.4
align="center"|전진한대한노총302,4714.2
align="center"|임영신자유당 합동파190,2112.7
align="center"|백성욱자유당181,3882.5
align="center"|정기원자유당 합동파164,9072.3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초 예상대로 이승만이 당선되었지만, 부통령 선거에서는 함태영 후보가 자유당 공천의 이범석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범석 후보는 "부산 정치 파동" 당시 내무부 장관, 원외 자유당 부당수로서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위한 개헌 추진에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범석의 지지 세력인 구 조선민족청년단(족청) 계열 세력 확대를 저지할 목적으로 경찰력을 동원하여 함태영을 당선시킨 것이다. 선거 후 9월 12일, 이승만은 족청계를 반당 분자로 선언하고 자유당에서 완전히 배제했으며, 이후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세력만으로 자유당 지도부를 굳혔다.

5. 1. 1. 지역별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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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이승만조봉암이시영신흥우
colspan="2" style="background:;" |colspan="2" style="background:;" |colspan="2" style="background:;" |colspan="2" style="background:;" |
득표수%득표수%득표수%득표수%
서울205,30082.225,63110.314,8836.03,9231.6
경기도657,17487.744,9676.034,7044.612,8911.7
강원도366,58392.410,5162.713,3783.46,3051.6
충청북도386,66586.725,8755.823,0065.210,4092.3
충청남도636,06182.456,5907.358,7547.620,9472.7
전라북도468,22065.9109,49015.496,27113.636,2215.1
전라남도823,58773.699,8858.9165,24514.830,6772.7
경상북도921,98875.0129,79110.6140,27111.437,1003.0
경상남도693,52355.4288,65423.0211,54416.958,5864.7
제주도79,66883.86,1056.46,6597.02,6372.8
합계5,238,76974.6797,50411.4764,71510.9219,69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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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4]


5. 2. 부통령 선거

1952년 8월 5일 치러진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 선거의 지역별 결과는 다음과 같다.

지역함태영이범석조병옥이갑성이윤영전진한임영신박성욱정기원
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
서울70,20627.6117,32646.216,4296.513,8155.415,4756.18,9113.54,6761.84,5081.82,7271.1
경기347,79945.6252,09033.127,7763.635,1544.642,0385.521,0762.813,1951.710,5471.412,5931.7
강원223,53455.6129,70432.35,9621.59,4272.311,5552.910,6752.74,4241.12,8110.73,6740.9
충북216,22347.8130,84328.918,9264.223,1905.124,4425.413,0982.99,0942.07,9831.88,8302.0
충남118,29115.1452,20957.647,4826.134,1724.443,8955.635,0574.521,0472.718,3542.314,2871.8
전북190,24626.3235,63732.567,7319.448,5546.763,7298.834,7504.837,0245.124,9853.521,5003.0
전남729,54164.259,3185.2125,52511.077,2316.860,6585.323,2212.020,4701.818,0311.622,7392.0
경북716,79457.497,2567.8100,4988.1115,7559.373,6845.950,8844.128,2632.332,7192.631,9802.6
경남296,76623.3306,98224.1161,78712.7139,00010.9116,2609.1100,0617.949,6753.959,0794.643,8073.4
제주34,41336.034,32735.93,1443.34,6744.96,8477.24,7385.02,3432.52,3712.52,7702.9
총계2,943,81341.31,815,69225.5575,2608.1500,9727.0458,5836.4302,4714.2190,2112.7181,3882.5164,9072.3



무소속 함태영 후보는 전라남도에서 64.2%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경상북도에서도 57.4%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강원특별자치도충청북도에서도 과반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다. 반면, 자유당 이범석 후보는 충청남도에서 57.6%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고, 서울특별시와 전라북도에서 1위를 차지했다. 민주국민당 조병옥 후보는 전라남도에서 11.0%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한 자릿수 득표율에 그쳤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이범석 후보 대신 무소속 함태영 후보를 암묵적으로 지원했고, 이는 함태영 후보의 당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범석 후보의 지지 기반이었던 족청계가 약화된 지역에서 함태영 후보가 강세를 보인 것은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5. 2. 1. 지역별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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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함태영이범석조병옥이갑성이윤영전진한임영신박성욱정기원
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득표수득표율
서울70,20627.6117,32646.216,4296.513,8155.415,4756.18,9113.54,6761.84,5081.82,7271.1
경기347,79945.6252,09033.127,7763.635,1544.642,0385.521,0762.813,1951.710,5471.412,5931.7
강원223,53455.6129,70432.35,9621.59,4272.311,5552.910,6752.74,4241.12,8110.73,6740.9
충북216,22347.8130,84328.918,9264.223,1905.124,4425.413,0982.99,0942.07,9831.88,8302.0
충남118,29115.1452,20957.647,4826.134,1724.443,8955.635,0574.521,0472.718,3542.314,2871.8
전북190,24626.3235,63732.567,7319.448,5546.763,7298.834,7504.837,0245.124,9853.521,5003.0
전남729,54164.259,3185.2125,52511.077,2316.860,6585.323,2212.020,4701.818,0311.622,7392.0
경북716,79457.497,2567.8100,4988.1115,7559.373,6845.950,8844.128,2632.332,7192.631,9802.6
경남296,76623.3306,98224.1161,78712.7139,00010.9116,2609.1100,0617.949,6753.959,0794.643,8073.4
제주34,41336.034,32735.93,1443.34,6744.96,8477.24,7385.02,3432.52,3712.52,7702.9
총계2,943,81341.31,815,69225.5575,2608.1500,9727.0458,5836.4302,4714.2190,2112.7181,3882.5164,9072.3


6. 평가 및 영향

참조

[1] 서적 Elections in Asia: A data handbook, Volume II 2001
[2] 문서
[3] 웹사이트 발췌개헌(拔萃改憲) http://encykorea.aks[...] 2019-03-29
[4] 웹사이트 개표현황 http://info.nec.go.k[...] 2021-04-14
[5] 문서 候補者登録の際に各候補に割り振られる番号。
[6] 문서 韓国中央選挙管理委員会の「歴代選挙情報システム」から資料を引用して作成。
[7] 문서 1951年12月に国会議員を中心として結成された通称「院内自由党」の議員で、院外団体を中心とした「院外自由党」との合同に賛成するグループの通称名。
[8] 서적 韓国現代政治 東京大学出版会
[9] 웹인용 각료 대폭 이동 예상, 개헌안 제기 여부 주목 https://newslibrary.[...] 2019-05-23
[10] 웹인용 신흥우 씨 대통령 후보로 출마, 개헌 지지 여부 언명 회피 https://newslibrary.[...] 2019-05-23
[11]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28
[12] 문서 각각 민국당의 최고위원(공동 당 대표)과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다.
[13]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1-07-26
[14]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1-07-26
[15]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1-07-26
[16]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1-07-26
[17]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1-07-26
[18]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1-07-26
[19]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1-07-26
[20] 웹인용 부통령 추천에 이윤영 씨 언급 수락 여부 고려 중 https://newslibrary.[...] 2019-06-03
[21]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1-07-26
[22]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1-07-26
[23]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28
[24] 웹인용 신흥우 씨 대통령 입후에 정강정책 발표 https://newslibrary.[...] 2019-05-23
[25]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5-06
[26]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5-06
[27]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5-06
[28]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28
[29]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28
[30]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6-04
[31] 웹인용 정부통령 후보자의 면모 - 이윤영 씨 (조선민주당) https://newslibrary.[...] 2019-06-03
[32]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28
[33]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1-07-26
[34]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21-07-26
[35]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28
[36]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28
[37]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28
[38]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28
[39] 웹인용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 2019-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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