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포천-의정부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동두천·포천-의정부 전투는 1950년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의 서울 점령을 위한 주요 공격 축선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의미한다. 북한군은 동두천-의정부 축선으로 남침하여 포천 전투에서 승리하고, 동두천과 의정부를 차례로 점령했다. 대한민국 육군은 제7사단 등을 투입하여 방어하려 했으나, 병력 부족과 장비 열세로 인해 실패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서울 방어선이 붕괴되고, 서울이 함락되는 등 전쟁 초반의 전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의정부시의 역사 - 대봉그린아파트 화재
2015년 의정부시에서 발생한 대봉그린아파트 화재는 오토바이 합선 추정 발화 원인과 불법 주차로 인한 진입 지연, 스프링클러 미작동, 불법 개조 논란, 소방 헬기 사용 논란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피해가 커진 사건이다. - 1950년 6월 - 6.25 전쟁
6.25 전쟁은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휴전 협정으로 종결되었으며, 한반도의 분단과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한 한국 전쟁을 의미한다. - 1950년 6월 - 1950년 FIFA 월드컵
1950년 FIFA 월드컵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브라질에서 개최되었으며, 13개국이 참가하여 조별 리그 후 최종 리그를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 우루과이가 브라질을 꺾고 우승하여 '마라카낭의 비극'을 낳았다. - 육전 - 쿨리코보 전투
쿨리코보 전투는 1380년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끄는 루스 연합군이 마마이가 이끄는 킵차크 칸국 군대에 돈 강 유역 쿨리코보 평원에서 기습적인 승리를 거두어, 모스크바 대공국의 위상을 높이고 러시아 국가 형성의 토대를 마련한 사건이다. - 육전 - 제2차 진주성 전투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중 일본군이 진주성을 함락시킨 전투로, 일본군의 압도적인 병력에 맞서 조선군이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함락되어 수많은 조선군과 민간인이 학살당한 임진왜란 최악의 참극 중 하나이다.
동두천·포천-의정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분쟁 | 동두천 전투, 포천 전투 - 의정부 전투 |
전체 | 6.25 전쟁 |
날짜 | 1950년 6월 25일 ~ 6월 26일 |
장소 | 경기도의 동두천시, 포천시, 의정부시 지역 |
결과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지휘관 1 | 유재흥(劉載興) 제7사단장 준장 함준호(咸俊鎬) 제1연대장 대령 한태원(韓泰源) 제1대대장 중령 이의명(李義明) 제2대대장 소령 김황목(金煌穆) 제3대대장 소령 윤춘근(尹春根) 제9연대장 중령 류환박(柳桓博) 제1대대장 소령 전순기(田舜基) 제2대대장 소령 이철원(李哲源) 제3대대장 소령 이규삼(李奎三) 제5포병대대장 소령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이상근(李尙根) 제3연대장 중령 임백진(任百振) 제1대대장 소령 박남표(朴楠杓) 제2대대장 소령 김봉상(金鳳翔) 제3대대장 소령 임충식(任忠植) 제18연대장 중령 장충권(張春權) 제2대대장 소령 안민일(安玟一) 제3대대장 소령 박창암(朴蒼岩) 보국대대 제2중대장 중위 이형근 제2사단장 준장 박기성 제5연대장 중령 이정도 제1대대장 소령 차갑준 제2대대장 소령 문용채 제16연대장 대령 유의준 제1대대장 중령 김헌 제2대대장 중령 김병휘 제25연대장 중령 나희필 제2대대장 대위 고동석 제3대대장 소령 김풍익 KIA 포병학교 제2교도대장 소령 이준식 육군사령학교장 준장 조암 생도대대장 중령 |
지휘관 2 | 김웅 제1군단장 중장 리영호(李英鎬) 제3사단장 소장 김창봉(金昌鳳) 제7연대장 대좌 김병종(金秉鍾) 제8연대장 중좌 김만익(金萬益) 제9연대장 대좌 안백성(安白成) 포병연대장 대좌 리권무 제4사단장 소장 최인덕 제5연대장 대좌 박승희 제16연대장 대좌 김희준 제18연대장 대좌 유경수 제105기갑여단장 소장 |
부대 | |
부대 1 | 7보병사단 2보병사단 수도방위사령부 |
부대 2 | 3사단 4사단 105탱크여단 |
사상자 | |
사상자 1 | 알려지지 않음 |
사상자 2 | 알려지지 않음 |
2. 전투 이전의 상황
6.25 전쟁 발발 직전, 38선 경계와 의정부 지역 방어는 대한민국 제7보병사단이 담당하고 있었다. 유재흥 준장의 지휘 아래 제7사단은 의정부 지역을 방어했으며, 예하에 제1, 9연대와 포병 및 공병 부대를 포함하여 총 9,698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1] 그러나 전쟁 발발 3주 전인 6월 1일,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이상근이 지휘하는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 예하로 변경되면서 3,050명이 사단을 떠나 제1, 9연대와 포병, 공병 등 6,788명이 이 지역을 방어하게 되었다.[1]
6월 13일,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김병휘가 이끄는 제2사단 제25연대가 제7사단에 편입될 예정이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7월 15일로 이동이 연기되었다. 결국 제25연대는 전투 후에 제2사단으로 복귀했다.[1]
제7사단은 서쪽의 적성면 고랑포리부터 동쪽의 일동면 사직리까지 47km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방어해야 했다. 예비대 없이 제1연대(함준호 대령)를 동두천 정면, 제9연대(윤춘근 중령)를 포천 정면에 배치하여 38선 경계와 부대 교육을 동시에 실시했다.[1] 육군본부 교육 지침에 따라, 제7사단은 38선 남쪽 전진 진지에 1/3 병력만 배치하고 주력 부대는 28km 후방인 의정부 부근에 집결시켜 대대급 이하의 기초 훈련을 실시했다. 각 연대는 1개 대대를 경계 진지에 배치하고 2개 대대를 의정부 부근에서 교육하는 방식을 3개월마다 순환 교대하여 전술을 숙달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각 연대 지휘소도 주력 부대와 함께 의정부 부근에 위치했고, 일선 대대는 20km 내외의 넓은 지역을 경비해야 했다.[1]
포천 지역을 담당한 제9연대는 윤춘근 중령의 지휘 하에 창수면 추동리부터 일동면 사직리까지 26km에 달하는 지역을 방어했다. 이 지역은 김화에서 영북면 운천리와 포천을 거쳐 의정부에 이르는 43번 국도를 중심으로, 동쪽의 광주산맥과 서쪽의 천보산맥이 뻗어 있는 지형으로, 정상적인 경우 2개 사단이 방어해야 할 넓이였다.[1]
북한군은 6.25 전쟁 발발 2주 전인 6월 10일에 평양의 민족보위성에서 비밀리에 군사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기동훈련을 가장한 전투 병력의 전선 배치를 계획하였다. 이때 이미 주력 부대의 침공 경로를 철원-연천-동두천-의정부 축선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4] 회의 직후, 북한군 제1군단(군단장 김웅 중장)은 6월 12일에 평강 부근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기동훈련을 위장하여 전투 전개를 시도하였다. 김웅은 평강에서 중서부전선의 작전을 지휘하며, 제1군단 휘하의 4개 보병사단과 1개 전투여단으로 서울 공략을 계획했다. 특히 제3사단, 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공격집단으로 편성하여 의정부 정면을 집중적으로 돌파하고자 하였다.[4]
북한군은 구체적인 시행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6월 18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명의의 정찰명령 제1호를 하달했다. 이 명령은 소대군위 이하의 병력 배치선까지 정찰하는 세밀한 계획을 포함했으며, 유개진지, 병력 배치 상황, 장애물 지대, 예상 집결지 등을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공격 목표 선정과 부대 기동 계획을 수립하도록 명시했다. 정찰을 마친 북한군은 6월 22일 14:00부로 전투명령 제1호를 하달하여 23일 12:00까지 모든 공격 준비를 완료하도록 지시했다. 이 명령에는 한국군의 경계진지와 주진지를 공격 목표로 선정하고, 포병, 공병, 반전차포, 항공 등의 지원 아래 서울까지 단숨에 공략하려는 계획이 명시되어 있었다. 제3사단(사단장 리영호 소장)은 포천군 영중면 영평천 부근에 배치되어 제7연대(대좌 김창봉)와 제9연대(대좌 김만익)를 좌우 일선에, 제8연대(중좌 김병종)를 예비로 두었으며, 제3사단의 포병연대(대좌 안백성)는 유정리 부근에서 지원 태세를 갖추었다.[5]
2. 1. 한국군의 전력 배치
유재흥 준장의 지휘 아래 제7사단은 의정부 지역을 방어했다. 제7사단은 예하에 제1, 9연대와 포병 및 공병 부대를 포함하여 총 9,698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 3주 전인 6월 1일,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이상근이 지휘하는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 예하로 변경되면서 3,050명이 사단을 떠났다. 이에 따라 제1, 9연대와 포병, 공병 등 6,788명이 이 지역을 방어하게 되었다.[1]6월 13일,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김병휘가 이끄는 제2사단 제25연대가 제7사단에 편입될 예정이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7월 15일로 이동이 연기되었다. 결국 제25연대는 전투 후에 제2사단으로 복귀했다.[1]
제7사단은 서쪽의 적성면 고랑포리부터 동쪽의 일동면 사직리까지 47km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방어해야 했다. 제7사단은 예비대 없이 제1연대(함준호 대령)를 동두천 정면, 제9연대(윤춘근 중령)를 포천 정면에 배치하여 38선 경계와 부대 교육을 동시에 실시했다.[1]
육군본부의 교육 지침에 따라, 제7사단은 38선 남쪽 전진 진지에 1/3 병력만 배치하고, 주력 부대는 28km 후방인 의정부 부근에 집결시켜 대대급 이하의 기초 훈련을 실시했다. 각 연대는 1개 대대를 경계 진지에 배치하고 2개 대대를 의정부 부근에서 교육하는 방식을 3개월마다 순환 교대하여 전술을 숙달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각 연대 지휘소도 주력 부대와 함께 의정부 부근에 위치했고, 일선 대대는 20km 내외의 넓은 지역을 경비해야 했다.[1]
포천 지역을 담당한 제9연대는 윤춘근 중령의 지휘 하에 창수면 추동리부터 일동면 사직리까지 26km에 달하는 지역을 방어했다. 이 지역은 김화에서 영북면 운천리와 포천을 거쳐 의정부에 이르는 43번 국도를 중심으로, 동쪽의 광주산맥과 서쪽의 천보산맥이 뻗어 있는 지형으로, 정상적인 경우 2개 사단이 방어해야 할 넓이였다.[1]
제9연대는 3,400명의 병력으로 이 지역을 방어하며 북한군 제109전차연대와 협동으로 침공한 제3사단과 맞서야 했다. 당시 연대는 사단의 방침에 따라 1개 대대로 일선 경비를 담당하고, 2개 대대는 38선에서 26km 떨어진 양주군 의정부읍 금오리의 연대 지휘소 부근에서 소부대 전술 교육을 받고 있었다.[1]
일선 경비를 맡은 제2대대는 전 정면에 병력을 배치하기 어려워 주요 통행로를 중심으로 거점 방어 태세를 취했다. 6월 23일, 제2대대는 포천에 대대본부를 두고, 제7중대를 국도 제43호선과 38선이 만나는 영중면 양문리 일대에, 제6중대를 제7중대 서쪽인 창수면 가양리·추동리 부근에 배치했다. 제5중대는 예비대로 4km 후방의 신북면 신평리(만세교 서쪽) 부근에 배치했다.[1]
결과적으로, 제2대대의 실 병력이 배치된 지역은 6km에 불과했고, 나머지 19km에 달하는 산록과 야지는 거의 방어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동쪽의 일동면 기산리 북쪽은 지방도 제387호선 주변에서 1개 분대의 수색대가 봉쇄하는 것이 전부였다.[1]
박창암 중위가 이끄는 보국대대 제2중대가 38선 북쪽의 유정리 부근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대대와 유기적인 협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
2. 2. 북한군의 침공 계획
북한은 6.25 전쟁 발발 2주 전인 6월 10일에 평양의 민족보위성에서 비밀리에 군사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기동훈련을 가장한 전투 병력의 전선 배치를 계획하였다. 이때 이미 주력 부대의 침공 경로를 철원-연천-동두천-의정부 축선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4]회의 직후, 제1군단(군단장 김웅 중장)은 6월 12일에 평강 부근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기동훈련을 위장하여 전투 전개를 시도하였다. 김웅은 평강에서 중서부전선의 작전을 지휘하며, 제1군단 휘하의 4개 보병사단과 1개 전투여단으로 서울 공략을 계획했다. 특히 제3사단, 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공격집단으로 편성하여 의정부 정면을 집중적으로 돌파하고자 하였다.[4]
조선인민군은 제3사단과 제4사단에 제105전차여단을 증강한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이에 맞서 대한민국 육군(ROK) 제7보병사단이 배치되었다.
병력 이동 상황, 노획 문서, 개전 이후 부대 기동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북한군은 주력 부대로 의정부를 지향하는 계획을 수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김웅이 지휘하는 제1군단 예하의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으로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하고, 동측의 김광협이 이끄는 제2군단과 서측의 제1, 6 양 사단의 협조 아래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자 했던 것으로 분석된다.[4]
북한군은 구체적인 시행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6월 18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명의의 정찰명령 제1호를 하달했다. 이 명령은 소대군위 이하의 병력 배치선까지 정찰하는 세밀한 계획을 포함했으며, 유개진지, 병력 배치 상황, 장애물 지대, 예상 집결지 등을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공격 목표 선정과 부대 기동 계획을 수립하도록 명시했다.
정찰을 마친 북한군은 6월 22일 14:00부로 전투명령 제1호를 하달하여 23일 12:00까지 모든 공격 준비를 완료하도록 지시했다. 이 명령에는 한국군의 경계진지와 주진지를 공격 목표로 선정하고, 포병, 공병, 반전차포, 항공 등의 지원 아래 서울까지 단숨에 공략하려는 계획이 명시되어 있었다. 제3사단(사단장 리영호 소장)은 포천군 영중면 영평천 부근에 배치되어 제7연대(대좌 김창봉)와 제9연대(대좌 김만익)를 좌우 일선에, 제8연대(중좌 김병종)를 예비로 두었으며, 제3사단의 포병연대(대좌 안백성)는 유정리 부근에서 지원 태세를 갖추었다.[5]
3. 포천 전투 (1950년 6월 25일 ~ 26일)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 제3사단(사단장 리영호 소장)은 38선을 넘어 포천 정면에 배치된 한국군 제9연대(연대장 윤춘근 중령)를 공격하며 한국 전쟁을 개시했다.[6]
경계 임무 중이던 제9연대 제2대대(대대장 전순기 소령)는 북한군의 포격에 밀려 후퇴했다. 제9연대장은 의정부읍에 대기 중이던 제1, 3대대를 신북면 만세교 부근에 투입하여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북한군 제3사단의 지속적인 공격에 밀려 결국 분산되었다. 이튿날 제9연대 병력은 의정부 등지에서 재집결했다.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연대(연대장 이상근 중령)는 포천에 급파되어 소흘읍 송우리 부근에서 방어전을 펼쳤으나, 이 역시 북한군의 기계화 부대에 밀려 소흘읍 이동교리 축석령으로 후퇴해야 했다.
북한군은 제1대대 진지(천계산 서쪽)에 120mm 박격포, 122mm 유탄포, 76mm 야포 등을 집중 포격한 후, 43번 국도를 따라 2열 종대로 진격해 왔다. 북한군 선두가 신북대교를 넘어서면서 제3대대와의 통신이 두절되었고, 제1대대는 탄약 부족과 사상자 발생으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오후 2시, 북한군은 전차의 엄호 하에 신북대교를 통과하며 연대의 주저항선을 무너뜨렸다. 제3대대와 연락이 닿지 않은 연대본부는 제1대대와 함께 철수했고, 명령을 받지 못한 제3대대는 가랑산 진지를 지키다 밤에 단독으로 철수하여 동두천 가도의 양주 덕정리 부근으로 이동했으나, 대부분의 병력이 낙오되었다.
포천 정면에서 북한군 제3사단과 맞선 제9연대는 병력 대부분을 잃고 분산되었으며, 제1대대만이 태릉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3. 1. 제9연대의 초기 대응
윤춘근 중령이 지휘하는 제9연대는 창수면 추동리에서 일동면 사직리 사이의 26km에 달하는 지역을 방어했다. 이 지역은 원래 2개 사단이 방어해야 할 정도로 넓었지만, 제9연대는 3,400명의 병력으로 북한군 제109전차연대와 협동하여 침공한 제3사단과 맞서야 했다.[1]당시 제9연대는 사단의 방침에 따라 1개 대대만 최전방 경계를 맡고, 2개 대대는 38선에서 26km 뒤에 있는 양주군 의정부읍 금오리의 연대 지휘소 근처에서 소부대 전술 교육을 받고 있었다. 제1선 경비를 맡은 제2대대는 전순기 소령의 지휘 아래 포천에 대대본부를 두고, 제7중대는 영중면 양문리 일대에, 제6중대는 창수면 가양리·추동리 부근에 배치되었으며, 제5중대는 예비로 4km 후방의 신북면 신평리(만세교 서쪽) 부근에 배치되었다.[1]
이처럼 병력이 배치된 지역은 6km에 불과했고, 나머지 19km는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특히 동쪽의 일동면 기산리 북쪽은 지방도 제387호선 주변에서 1개 분대의 수색대가 봉쇄할 뿐이었다.[1]
다행히 제9연대 전 장병은 영내 대기 상태였다. 연대장 윤춘근 중령은 전날 사단으로부터 "재량에 따라 주말 외출을 실시하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여 영내에서 휴무하도록 조치했다. 그는 일주일 전부터 철원에 기갑부대가 나타났다는 첩보, 북한 정규군이 38경비대와 교대했다는 소문, 6월 23일 밤 제2대대장으로부터의 영북면 운천리 차량 대열 이동 보고 및 영평천 부근 전차 출현 속보 등 평상시와 다른 징후들을 감지했다.[1]
이러한 조치로 연대 주력은 금오리에서 대기하고 제2대대는 경계를 강화했다. 그러나 6월 25일 새벽, 북한군 제3사단은 김창봉 대좌가 이끄는 제7연대를 선봉으로 제109전차연대와 함께 기습 공격을 시작했고, 포천 정면의 38도 분계선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1]
3. 2. 만세교 전투와 지연전
尹春根|윤춘근한국어 중령은 북한군의 공격을 보고받고 예하 부대에 지연전을 명령했다. 제9연대장 윤춘근 중령은 전날 사단으로부터 주말 외출을 실시하라는 통보를 받았으나, 적정이 수상하여 병사들에게 영내에서 휴무하도록 조치하였다. 제9연대의 주력은 금오리에서 대기하고 제2대대는 더욱 경계를 강화했다.이날 새벽, 북한군 제3사단은 김창봉 대좌가 이끄는 제7연대를 선봉으로 제109전차연대와 협동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제2대대는 3개월마다 상호 교대하는 방식으로 일선 경계임무를 수행했는데, 6월 23일부로 제3대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기설 진지를 점령하였다. 이때 대대장은 제6, 7 중대를 제일선에 배치하기에 앞서 “근간에 적의 동향이 심상치 아니하니 경계를 철저히 하고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진지를 더욱 보강하라”고 강조하였다.
북한군은 경계진지만을 골라 포격을 집중하였는데, 제7중대 지역에는 영중면 양문리 일대와 그 서쪽의 287고지 북쪽에 포화가 집중되었고, 제6중대 지역에는 창수면 가양리-주원리-추하리 일원을 초연으로 뒤덮었다. 제7중대 정면에는 영중교(일명 삼팔교)를 넘어선 3대의 전차가 양문교 부근까지 침습하여 제1소대의 진지를 강타하였고, 그 서쪽의 희악사 부근에서 수 미상의 적이 측후방으로 침공하여 단숨에 이 소대진지를 삼키고자 하였다. 제6중대는 성일영 소위가 지휘하는 제3소대가 추동리에서 한차례 고전을 벌인 뒤, 가양리 장자동으로 집결한 중대의 주력이 그 서남쪽 삼차로를 막아 287고지에 연한 방어진지를 급편하였다.
제7, 6 양 중대가 고전을 치르고 있을 무렵, 38선에서 12km 후방인 포천읍에 위치한 대대본부에서는 전순기 소령이 일선의 위급한 전황을 제9연대장(尹春根|윤춘근한국어 중령)에게 보고하고 병력 증원과 대전차 화기 지원을 요청한 다음, 제8중대장 박기순 중위를 대동하고 영중면 소재 만세교 초소로 올라갔다.
06:00에 만세교에 도착한 대대장은 예비인 제5중대로써 만세교 북측의 좌우측방의 160고지와 208고지에 연한 저지 진지를 급편하게 하여 연대의 주력이 진출할 때까지 지연전을 펴기로 하였다. 이때 북한군은 양문교를 넘어 만세교 쪽으로 지향하고 있었으니, 국도 제43호선을 따라 주력으로써 침공하리라고 판단되었다. 그러나 소총만을 들고 능선을 지키는 병사로서는 이 기계화 부대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3. 3. 제3연대의 투입과 축석령 후퇴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제3연대는 포천에 급파되었으나, 이미 북한군이 포천을 통과한 뒤였다. 이에 제3연대는 소흘읍 송우리에서 방어전을 준비했다. 송우리 송우교를 중심으로 좌우 측방에 각각 2개 중대씩 배치하고, 혼성 제11중대로 하여금 국도 제43호선을 포함한 중앙지대를 담당케 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1]1950년 6월 25일 오후 5시경, 북한군의 포격과 함께 1단의 기계화 부대가 남진을 시작했다. 제3연대는 81mm 박격포, 기관총, 60mm 박격포, 소총 등으로 맹렬히 사격했으나, 북한군 기계화 부대는 끄떡없이 전진했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워 제3연대의 관측소와 중화기 진지에 포격을 집중했고, 57mm 대전차포와 2.36인치 로켓포 공격도 효과가 없었다.[1]
결국 제3연대는 오후 6시 30분경, 북한군 보전협동부대의 공격에 방어선이 무너져 의정부 방향으로 후퇴했다. 제1대대는 국도 제43호선 동측에서, 제3대대는 서측에서 퇴로를 찾았으나, 병력 대부분이 본대와 이탈하여 의정부로 향했다. 제1대대장 임백진 소령은 이동교리 축석령에서 150명의 병력을 수습하여 의정부읍 금오리 남쪽 155고지로 철수했다.[1] 제3연대의 송우리 방어선 붕괴로 포천 지역은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의정부 동북쪽 방어가 위태로워졌다.[1]
4. 동두천 전투 (1950년 6월 26일)
리권무가 이끄는 북한군 제4사단은 포천군 청산면 초성리, 연천군 전곡읍 양원리, 파주시 적성면 적암리 일대에 맹렬한 공격준비사격을 집중한 후 전곡-동두천 간 국도 제3호선 평화로 구간에 보병과 전차가 협동하는 부대를 투입하고, 그 서쪽의 적암리-양주시 은현면 봉암리 접근로(지방도 제375호선)에 조공을 투입하여 병진공격을 개시하였다.
조선인민군은 38선 부근의 국군 진지가 거의 허술하고, 배치된 병력도 1개 초소 당 분대나 소대 규모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사단 내의 가용한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30여 분간 국도 제3호선과 그 주변을 맹렬히 포격하였는데, 이는 정보 수집 능력이 매우 낮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포격은 소련 군사고문단에 의해 공격 명령이 작성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때 의정부에 주둔하고 있던 제7사단은 혼란 속에서도 침착하게 긴박한 사태를 수습해 나갔다. 함준호가 이끄는 제1연대는 비상대기부대인 제3중대를 초성리 남쪽 176고지로 진출시켰다. 제3중대는 전차 2대를 앞세우고 남하하는 1개 대대 규모의 적을 기습하여 격퇴시키고 소요산에 위치한 제2대대장 이의명 소령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소요산에서는 치열한 육박전이 펼쳐졌으며, 제2대대는 11시가 넘도록 소요산 진지를 사수했다. 제2대대가 소요산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제1연대는 제1대대(대대장 김봉룡 대위)를 마차산에 투입하고, 김황목이 이끄는 제3대대를 봉암리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제1대대가 마차산의 방어진지를 점령했을 무렵에는 북한군이 이미 이 고지를 우회하여 전곡읍 간파리 방향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또한 제3대대가 배치된 봉암리에도 북한군이 출현하지 않아, 제1연대는 2개 대대를 유휴병력으로 대기시킨 채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한편 제1연대를 지원하던 제5야전포병대대 제2중대는 보산리 부근에서 남하하는 북한군의 1개 대대를 집중포격하여 대부분 격멸하였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을 재개하였고, 제1연대 57mm 전차포 중대장은 창말고개(동두천 북쪽 2km 지점)에서 선두 전차 2대의 측면을 사격하여 파괴하였다. 이에 당황한 북한군은 다시 초성리 쪽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 무렵 제1연대는 탄약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북한군 제4사단은 이날 15시경 제107전차연대를 선봉에 내세우고 동두천을 맹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제2대대는 10시간 동안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였으나, 결국 동두천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북한군은 한국군의 주저항선을 돌파한 여세를 몰아 일몰과 함께 동두천 시내로 진입하였고, 한국군 제1연대 제2대대는 어둠 속에서 시가전을 펼쳤으나 역부족하여 덕정리로 철수하여 집결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차산의 제1대대는 통신 두절로 철수 명령을 받지 못했다.
4. 1. 제1연대의 분투
일진광풍이 지난 뒤 한국군 제1연대의 장병들은 후속 도보부대만은 기필코 격멸하겠다는 다짐으로 현 진지를 고수하던 중, 기계화 부대가 지나간 1시간 뒤 북한군 보병의 침공을 받았다.북한군은 제1연대 주력의 배치선을 탐지한 듯, 120mm 박격포, 122mm 유탄포, 76mm 야포 등 곡사화력으로 제1대대 진지인 천계산 서쪽에 집중 포격을 가한 다음, 43번 도로를 따라 2열 종대로 밀려왔다.
북한군의 선두가 신북대교를 넘어서면서 제3대대와의 통신이 두절되었고, 제1대대도 세 차례의 대결 끝에 42명이 전사하고 80명이 부상당했으며, 휴대 탄약마저 모두 소모하여 적극적인 방어를 하지 못한 채 현 진지를 지키고 있었다.
반면 북한군은 진지 공격보다 남하에 주력하여 전차의 엄호 하에 주력으로 신북대교를 통과했다. 오후 2시, 3시간 동안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제1연대의 주저항선이 무너졌다.
제1연대 본부는 제1대대와 함께 철수했으나, 통신 두절로 명령을 받지 못한 제3대대는 남은 병력으로 가랑산 진지를 지키다가 밤에 단독으로 철수, 왕방산 기슭을 따라 회암령을 넘어 동두천 가도 양주 덕정리 부근으로 빠졌다. 그러나 전진 중 대부분이 낙오되어 다음날 아침 옥정리에 집결한 병력은 100여 명에 불과했다.
이후 이 병력은 7사단 제1연대와 합세하여 의정부로 후퇴하다 천보산 북쪽에서 분산, 일부만이 우이동으로 집결했다.
결과적으로 제1연대는 포천 정면에서 북한군 제3사단과의 대결 끝에 중과부적으로 분산되어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고, 제1대대만이 태릉으로 집결하게 되었다.[4]
5. 의정부 전투 (1950년 6월 26일 ~ 27일)
육군본부는 의정부를 지키기 위해 제2사단 등 증원 부대를 투입하고 반격 명령을 내렸다.[9][10] 그러나 이 부대들은 건제를 고려하지 않고 축차적으로 투입되었고, 탄약 등 보급 지원과 통신망 문제로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북한군의 주 공세 목표는 개성-문산-서울, 의정부-서울, 춘천-서울의 세 방향이었다. 이 중 춘천 방면의 진격은 저지되었으나, 개성-문산 전선은 하루 만에, 의정부 전선은 쉽게 돌파되었다.
조선인민군은 이권무가 지휘하는 제3사단과 제4사단에 제105전차여단이 증강된 부대로 구성되었고, 대한민국 육군 제7보병사단이 이에 맞섰다.
채병덕 참모총장은 제7사단과 제2사단 등에 반격 명령을 내렸지만, 병력과 장비 부족, 통신 두절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한국군은 미아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3일 만에 조선인민군이 서울로 진입하게 되었다.
5. 1. 동두천 탈환 시도와 실패
채병덕 총참모장은 6월 26일 01시에 제7사단에게 동두천 방면으로, 새로 투입된 제2사단에게 포천 방면으로 진격하여 전날 북한군에게 빼앗긴 지역을 탈환하라는 작전명령을 내렸다.[6] 이 명령에 따라 제7사단은 전날 동두천에서 패퇴한 제1연대에게 동두천을 공격하게 하고, 새로 배속된 제18연대는 동두천 서쪽으로 우회하여 양주시 남면 신산리로 반격을 개시하였다(8시).당시 동두천에 주둔한 북한군 제4사단은 의정부 전면 공격을 피하고 서쪽으로 우회한 은현로 방면으로 내려오려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제1연대는 동두천 읍내와 북쪽 5km 지점인 소요산까지 진출했지만, 제18연대는 우회하던 북한군 제4사단과 마주쳤다. 북한군은 동두천 남쪽 7km 지점인 덕정의 좌우측을 협공하였고, 결국 제1연대는 퇴로가 차단되어 병력이 분산되었다.
제1연대는 반격 중 북한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퇴로가 막혀 소대나 중대 단위로 흩어져 우이동, 창동, 태릉 방면으로 철수했다. 제1대대는 마차산에서 명령을 기다리다가 어두워진 후 철수했지만, 지휘 체계가 무너지고 병력이 흩어져 창동, 태릉 등지로 분산되었다.
제18연대는 화합로변 은현초등학교 부근에서 방어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용암리 도락산 북쪽 기슭에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했다(13시). 북한군 기갑부대가 화합로를 따라 덕정으로 접근했지만, 연대는 이들을 그냥 통과시켰다. 임충식 연대장은 아군의 배치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북한군 전차와의 무모한 대결을 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군 보병 부대는 나타나지 않았고, 제7사단 본부로부터 연락도 받지 못한 임충식 연대장은 의정부가 점령되었다고 판단, 서쪽으로 철수하여 고양군 신도면 삼송리를 거쳐 28일에 행주나루터에서 한강을 건너 소사, 오류동 지역 전투에 참여했다.
5. 2. 축석령 전투와 의정부 함락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26일 01:00에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으로부터 반격명령을 받고 금오리의 지휘소로 돌아와, 제5연대의 제2대대장 차갑준 소령에게 축석령 북쪽에 있는 북한군 전차를 기습 파괴하도록 지시했다.[16] 이에 따라 26일 03:00, 제5연대 제2대대는 반격을 개시했다.당시 제2사단장의 작전구상은 2개 대대병력으로는 포천 탈환이 어려우므로, 축석령을 방어하고 있을 제3연대를 초월 공격하겠다는 것이었으나, 제3연대는 이미 분산된 상태였다.[17] 제2, 7사단장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작전을 구상하여, 제2사단의 반격은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다.[18]
최창언 중령이 이끄는 제5연대는 제2대대를 선발대로 축석령에 진출시켰으나, 제3연대는 없었다. 곧이어 북한군 기갑부대가 차갑준이 이끄는 제2대대 진전에 나타났다.[19] 제5연대 제2대대는 교전 10분도 안되어 탄약 부족과 사기 저하로 분산 철수했다. 제2대대장은 병력 일부를 수습하여 태릉으로 철수하고, 나머지는 한강 남쪽 낙오자 수집소에 집결했다.
08:00, 제5연대 제1대대(대대장 이정도(李貞道) 소령)가 증원되었으나, "[자일동](自逸洞)에 가면 탄약차가 있을 것"이라는 통보만 받고 진출하다가 전차대와 조우했다. 제1대대는 고갯마루에 도착하기도 전에 퇴계원 방면으로 철수했다.[20]
제2사단이 북한군 저지에 어려움을 겪자, 문용채가 이끄는 제16연대를 상금오동 부근에 배치하여 북한군 진출을 막으려 했다. 약 1시간 후, 전차 20여 대를 앞세운 북한군이 공격을 재개했고, 국군은 전차 파괴 수단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김진동 대위가 지휘하는 제16연대 1대대 특공대가 2.36인치 로켓포로 선두 전차 1대를 배수로에 빠뜨려 잠시 북한군 진출을 지연시켰으나, 제16연대의 2개 대대는 북한군 보병부대와 교전 후 태릉과 호원동으로 철수했다.
12시쯤 제16연대 방어진지를 돌파한 북한군은 의정부로 남하하고, 덕정을 점령한 북한군 제4사단은 의정부를 서쪽에서 협공했다. 금오리에 포진한 육군포병학교 제2교도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105mm 곡사포 1문으로 북한군 전차 무한궤도를 파괴했지만, 후속 전차 포격으로 대대장과 제2중대장 장세풍 대위 및 6번 포분대원 모두 전사했다.
이후 북한군 전차대는 13시경 의정부 읍내로 진입했다. 의정부 읍내는 철수하는 군인, 피난민, 부상병들로 혼잡했고, 한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제7, 2사단 전술지휘소는 창동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전술지휘소를 개설했다.
5. 3. 백석천, 내촌 전투와 한국군 후퇴
6월 25일 대한민국 육군 제25연대(연대장 김병휘 소령)는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의정부 남쪽 교외 백석천에 제2, 3대대를 배치하였다. 조선인민군 제3사단은 의정부를 점령한 후 다음 작전을 위한 재편성과 재보급을 위해 약 4시간 동안 지체하였다. 북한군은 이날 17시에 공격을 재개, 전차 20대를 앞세우고 접근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 병사가 불안감을 느껴 오발하는 순간, 다른 병사들도 일제히 사격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방어 진지가 노출되었고, 휴대 탄약은 2~3분 만에 바닥났다.[16]이런 상황에서 북한군 전차대는 백석교를 통과하고 있었는데, 다리 밑에 잠복한 2.36인치 로켓 분대장이 5번 전차를 파괴하였으나 후속 전차의 포격에 전사하였다. 전차 1대를 잃은 북한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의정부 읍내로 돌아갔다.[17] 앞서 가던 전차 4대는 호원동 부근 제16연대 2대대(대대장 김헌 소령)의 저항에 부딪혔고, 후속 전차가 없어 약 2km를 후퇴하여 사격 태세를 갖추고 후속 부대를 기다렸다.[18]
전차와 격전을 치른 제16연대 2대대는 큰 피해를 입고 분산되었다. 이날 밤 백석교 우측에 배치된 제25연대 11중대장 문일수 중위는 전차 특공대를 이끌고 정지 중이던 북한군 전차 4대를 습격, 2대를 파괴하였다.[19] 6월 27일 새벽 북한군 공격 재개 시 제25연대는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탄약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태릉, 능곡, 수원 등지로 분산 철수하였다.[20]
한편 육군사관학교장 이준식 준장은 6월 25일 13시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생도대대와 배속된 전투경찰대대를 391번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내촌 부근 감제고지에 배치하였다.[7] 다음날 국군은 남하하는 북한군과 격전을 치른 후 태릉으로 철수, 제9연대(25일 포천 전투에서 패하여 분산, 제1대대는 태릉 방면 이동)와 함께 불암산~태릉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미아리~태릉 방어선 우측을 담당하게 되었다.[7]
6. 전투 결과 및 영향
의정부 전투는 한국군의 패배로 끝났으며, 이로 인해 수도 서울 방어에 심각한 위협이 초래되었다. 포천과 의정부 전선이 무너지면서 그 영향은 거의 전선에 미쳤다. 특히 백선엽이 이끄는 제1사단은 임진강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으나, 동쪽 측면이 무너지면서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1] 태릉 정면에서는 생도대대가 적 후방에 위치하게 되었고, 춘천의 제6사단과 강릉의 제8사단까지도 수도 서울의 위기로 인해 작전에 혼란을 겪었다.[1]
반면 조선인민군은 서울 공격을 최우선 목표로 하여 의정부 지역의 전투 결과를 확대하려 했고, 일부 병력을 6월 27일에 김포반도로 상륙시켜 서쪽 측면에서도 위협을 가했다.[2] 북한군의 공세 목표는 개성-문산-서울, 의정부-서울, 춘천을 통과하는 세 개의 전선으로 나뉘었는데, 이 중 춘천 방면의 진격은 저지되었지만, 개성-문산 전선은 하루 지연 후 돌파되었고, 의정부 전선은 쉽게 돌파되었다.
6. 1. 한국군의 피해와 한계
한국군은 병력과 장비 부족, 특히 대전차 화기 부족으로 인해 북한군의 기동력을 저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50년 6월, 제7사단은 사단으로 승격되었으나, 예하 제3연대가 수도경비사 산하로 예속 변경되면서 병력이 9,698명에서 6,788명으로 감소했다. 이후 제2사단 제25연대가 제7사단에 편입될 예정이었으나, 주둔지 문제 등으로 이동이 지연되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전투 후에 제2사단으로 복귀했다.제7사단은 적성면 고랑포리에서 일동면 사직리 간 47km에 달하는 넓은 지역을 방어해야 했다.[1] 사단은 예비대 없이 제1연대와 제9연대를 일선에 배치했는데, 이들은 38도 분계선 방어와 부대 교육을 병행해야 했다.[1] 육군본부의 교육 지침에 따라 주력 부대는 후방에서 교육 훈련을 받고, 1/3 병력만 전진진지에 배치되어 전투력이 분산되었다.[1]
포천 지역을 담당한 제9연대는 3,400명의 병력으로 26km에 달하는 지역을 방어해야 했다.[3] 이는 2개 사단이 담당해야 할 넓이였다.[3] 연대는 1개 대대만 일선 경비를 담당하고, 2개 대대는 후방에서 교육을 받고 있어, 실제 배치된 병력은 6km 지역에 불과했고 나머지 지역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5]
6. 2. 북한군의 전술과 전략
북한은 6·25 전쟁 발발 2주 전인 6월 10일, 평양의 민족보위성에서 비밀리에 군사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기동훈련을 가장한 전투 병력 배치를 계획했다. 이때 이미 주력 침공 경로를 철원-연천-동두천-의정부 축선으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4]북한군 제1군단(군단장 김웅 중장)은 6월 12일 평강 부근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예하 4개 보병사단과 1개 전투여단으로 서울 공략을 계획했다. 특히 제3, 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공격 집단으로 묶어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하려 했다.[4] 김웅이 이끄는 제1군단 예하의 2개 사단과 1개 기갑여단은 의정부 정면을 집중 공격하고, 동측의 김광협이 이끄는 제2군단과 서측의 제1, 6사단과 협력하여 수도 서울을 점령하려 했다.
6월 18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정찰명령 제1호를 하달하여 한국군의 병력 배치와 장애물 지대 등을 정찰하도록 했다. 6월 22일에는 전투명령 제1호를 하달하여 23일까지 공격 준비를 완료하도록 지시했다.
조선인민군은 제3사단과 제4사단에 제105전차여단을 증강한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포천과 동두천을 잇는 방어선을 쉽게 돌파하고 의정부로 진격했다. 미아리 전투에서 패배한 후, 3일간의 저항 끝에 조선인민군은 서울로 진입했다.
6. 3. 전쟁 초기 상황에 미친 영향
포천과 의정부 전선이 무너진 뒤 그 여파는 거의 전 전선에 미쳤다. 특히 좌측에 인접한 백선엽이 이끄는 제1사단은 임진강 방어선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동쪽 측면이 무너지면서 철수를 강요당하는 상황에 놓였다.[1] 태릉 정면에서는 생도대대가 적의 후방에 위치하게 되었고, 춘천의 제6사단과 강릉의 제8사단까지도 수도 서울의 위기에 따른 전술적, 심리적 충격으로 작전에 혼란을 겪었다.[1]반면 조선인민군은 서울 공격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의정부 지역의 전과 확대를 꾀하는 한편, 일부 병력을 6월 27일에 이미 김포반도로 상륙시켜 서쪽 측면에서 위협을 가했다.[2]
7. 역사적 평가 및 의의
동두천·포천-의정부 전투는 한국 전쟁 초기 전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여러 측면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 전투는 대한민국 국군에게 뼈아픈 교훈을 주었고, 이후 국방력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의정부는 서울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전투는 전쟁 발발 직후 매우 중요한 격전지가 되었다.
7. 1.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
의정부 전투, 미아리 전투 패배 및 서울 함락은 한국 전쟁 초기 전황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이로 인해 수많은 피난민이 발생했으며, 전쟁 장기화의 원인이 되었다. 이 전투는 대한민국 국군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겼고, 이후 국방력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1]7. 2. 의정부 지역의 역사적 의미
의정부는 서울로 향하는 관문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격전지로 떠올랐다. 조선인민군은 세 개의 전선으로 공격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의정부와 서울을 통과하는 경로였다.[1]조선인민군은 제3사단과 제4사단에 제105전차여단을 증강한 부대로 공격해왔다. 이에 맞서 대한민국 육군 제7사단이 배치되어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결국 의정부로 후퇴해야 했다.[1]
대한민국 국방부 참모총장 채병덕은 제2사단 등을 투입하여 저항했지만, 조선인민군은 다음 날 의정부로 진격했다. 한국군은 강북구에서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패배했고, 3일간의 저항 끝에 조선인민군은 서울로 진입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Invasion of North Korea
https://www.mpva.go.[...]
[2]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3]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4]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5]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6]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7]
뉴스
軍 어제와 오늘<30> 「북극성會」(6) “正規출신은 온실의 화초같은 애송이 “短期출신, 후배명예욕 질타”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3-07-29
[8]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9]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10]
뉴스
6ㆍ25를 회고한다-이형근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75-06-25
[11]
문서
제2대대는 전날 [[동두천 전투]]를 치르고 덕정리로 후퇴하였었고, 제3대대는 봉암리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북한군과 조우하지 않았었다. [[마차산]]의 제1대대는 유·무선 통신의 두절로 철수명령이 전달되지 않았었다.
[12]
문서
제1대대 및 제3대대는 [[포천 전투]] 이후 크게 흩어져 버렸다.
[13]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14]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15]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16]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17]
문서
제3연대(연대장 [[이상근 (군인)|이상근]] 중령. 그는 [[이형근]] 준장의 친동생이다.)는 25일 포천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패전하여 흩어져 버린 것이다.
[18]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19]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20]
서적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http://www.imhc.mil.[...]
대한민국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
197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