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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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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득종(得宗)은 가마쿠라 시대 호조 씨의 적류 당주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2대 싯켄 호조 요시토키와 관련된 용어로, 행정 용어, 선종 계열의 추호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득종은 싯켄, 슈고, 로쿠하라 단다이 등 막부 요직을 장악하며 호조 일문의 최상위에 위치했다. 몽골의 침입 이후 도쿠소 전제 체제가 확립되어 권력이 강화되었으나, 가마쿠라 막부 멸망과 함께 멸망했다. 득종 가문의 저택은 호케이지로, 역대 득종은 호조 도키마사부터 호조 다카토키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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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조 다카토키는 가마쿠라 막부의 제14대 싯켄으로, 재임 기간 동안 여러 난과 막부 전복 시도를 겪었으며, 정치적 무능과 미흡한 대처로 가마쿠라 막부 멸망에 영향을 주었고 가마쿠라 공방전에서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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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종
개요
직책호조 씨 당주
다른 이름종가
해당 가문호조 씨
상세 정보
시대가마쿠라 시대
관위싯켄, 렌쇼 등
설명가마쿠라 막부에서 싯켄을 독점한 호조 씨 가문의 당주를 가리키는 말
권력 기반호조 씨 일문의 정치력, 경제력, 군사력
주요 역할가마쿠라 막부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
몰락가마쿠라 막부 멸망과 함께 멸망
관련 인물
주요 인물호조 도키마사
호조 요시토키
호조 야스토키
호조 도키요리
호조 도키무네
호조 사다토키
호조 다카토키

2. 명칭의 유래

도쿠소(得宗)는 2대 싯켄 호조 요시토키와 관련된 용어이다. 일본에서는 연구자에 따라 요시토키의 별칭, 계명(戒名), 추호(追号) 등 여러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덕숭(徳崇)」에 해당하는 (字)·약자로, 선종(禅宗)에 귀의했던 5대 호조 도키요리가 정토종(浄土宗) 계열의 종파를 신앙했던 요시토키에게 추증한 선종 계열의 추호일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16]

이 때문에 '''요시토키류'''('''義時流'''), '''도쿠소케'''('''得宗家''')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료에 따라서는 호조 씨의 적류(嫡流) 당주를 「도쿠소」라 지칭하는 사례도 적지 않아, 행정 용어였다고 보기도 한다.

3. 역사

가마쿠라 시대에 도쿠소케는 전속 피관(被官)인 미우치비토(御内人), 가정 기관(공문소公文所)와 소령(所領)을 보유하고 싯켄(執権)직, 여러 구니(国)의 슈고(守護)직,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 등 막부 요직을 독점하며 호조 일문의 최상위에 위치했다. 호조 도키요리 이전에는 도쿠소와 싯켄이 같은 인물인 것이 통례였다.

가마쿠라 시대 후반, 도쿠소케는 호조 일문을 포함한 다른 유력 고케닌(御家人)마저 압도하게 된다. 도키요리 이후, 싯켄직에 취임한 뒤 일족에게 물려주고 출가하여 실권을 행사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이러한 싯켄직과 도쿠소의 관계는 같은 시대 조정에서의 천황과 치텐노키미(治天の君)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다.

몽골의 일본 원정 이후, 미우치비토가 막부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도쿠소 저택에서 행해지는 호조 일문이나 미우치비토의 사적인 회합인 요리아이(寄合)가 효조슈(評定衆)에 의한 막부 공식 합의체(효조評定)를 대체하며 막부 정치의 최고 기관이 되었다. 이를 '도쿠소 전제 체제(得宗専制体制)'라고 한다.

3. 1. 싯켄 정치 확립

헤이안 시대 말기 셋쓰 겐지의 미나모토노 요리마사가 지행국으로 다스리던 이즈국의 작은 호족에 불과했던 호조 씨는 이즈로 유배되었던 가와치 겐지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거병에 따라 요리토모를 쇼군으로 하는 막부를 성립시켰다.[1] 요리토모가 죽은 후 요리토모의 부인인 호조 마사코와 호조 요시토키가 막부 정치를 주도하여 와다 씨 등 유력 고케닌을 배척했으며, 조큐의 난에서도 고케닌을 통솔하여 조정과 반 호조 세력을 억제했다.[1]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죽어 겐 씨가 단절된 후, 가마쿠라 막부는 조정에서 맞이하는 셋케 쇼군을 옹립하여 쇼군의 지위를 형식적인 것으로 만드는 한편, 정무 결재에는 실질적인 수장인 싯켄, 그를 보좌하는 렌쇼, 합의 기관인 효조슈를 두는 집단 지도 체제를 성립시켰다.[1] 이는 형식적이더라도 고케닌의 주군은 쇼군이며, 호조 씨는 고케닌의 으뜸일 뿐이라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1]

또한, 호조 야스토키는 분가를 거듭한 호조 일문을 통솔하기 위해 소료가의 가사 기관을 두고, 가사 운영을 위한 조문을 정했다.[1]

3. 2. 도쿠소케의 권력 독점

1246년, 쓰네토키가 어린 아들을 남기고 사망하자, 그의 동생 도키요리가 도쿠소케(得宗家) 가독(家督)과 싯켄(執権)직에 취임하였다. 이 취임은 요리아이(寄合)에서 결정되었다.[1] 도키요리는 전임 쇼군 후지와라노 요리쓰네를 가마쿠라에서 추방하고 그를 지지하던 유력 고케닌(御家人)들을 배제하며 싯켄으로서 확고한 권위를 쌓았다. 이를 미야 소동이라 한다.[1] 또한 호지 합전에서 유력 고케닌이었던 미우라 씨를 멸망시키고, 셋케 쇼군(摂家将軍)으로서 반(反) 도쿠소 세력의 지지를 모으고 있던 5대 쇼군 후지와라노 요리쓰구마저 폐위시켰다.[1]

1252년, 도키요리는 무네타카 친왕을 6대 쇼군으로 옹립하였다.[1] 선대 쇼군들과 달리 황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미야 쇼군(또는 황족 쇼군)이라 부른다.[1] 도키요리는 병으로 싯켄에서 물러났으나, 적자인 도키무네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고쿠라쿠지류 계통인 호조 나가토키에게 싯켄직을 넘겨주었다.[1]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도키요리가 쥐고 있었고, 나가토키는 도키무네가 성장할 때까지의 징검다리이자 꼭두각시 역할에 불과했다.[1] 여기서부터 도쿠소와 싯켄의 괴리가 시작되었다.[1]

도키요리 사후, 도키무네는 외척인 아다치 야스모리와 미우치비토(御内人)들의 보좌를 받아 두 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략에 맞섰다.[1] 분에이의 역이라 불리는 제1차 일본 원정 당시 일본군은 몽골군의 집단전법에 고전했고, 고안의 역이라 불리는 제2차 일본 원정에서는 작전 지령이 도키무네의 이름으로 나왔으며, 도쿠소 피관(被官)이 전장에 파견되어 고케닌들을 지휘했다.[1] 이로 인해 도쿠소의 발언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1] 특히 2월 소동 이후, 쇼군의 전권 사항이었던 은상(恩賞)으로 영지를 하사하는 '고은사타(御恩沙汰)'와 고케닌의 관위, 관직을 교토 조정에 추천하는 '간쇼사타(官途沙汰)'를 도쿠소가 장악한 것은 그 권력을 결정적으로 하는 것이었다.[1] 이는 고케닌의 제1인자에 지나지 않았던 호조 씨가 고케닌의 주군인 쇼군의 권력 행위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

3. 3. 도쿠소 전제와 미우치비토 대두

호조 도키무네 사후, 호조 사다토키(貞時)가 어린 나이로 싯켄과 도쿠소가 되었고, 아다치 야스모리(安達泰盛)가 실권을 장악했다. 야스모리는 고안 덕정(弘安徳政)을 실시했으나, 다이라노 요리쓰나(平頼綱)와의 대립으로 시모쓰키 소동(霜月騒動)에서 멸망했다.[17] 다이라노 요리쓰나는 호조 사다토키를 끼고 전제정치를 행하였으나, 헤이젠몬의 난(平禅門の乱)으로 사다토키에게 멸망당하였다.[17]

사다토키는 도쿠소 전제 체제를 강화했으나, 몽골 침입 이후 은상을 받지 못해 몰락하는 고케닌(御家人)들이 늘어나고, 아쿠토(悪党)의 준동이 활발해지는 등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다.[17] 막부 내부에서도 도쿠소와 호조 씨 서류 가문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가겐의 난(嘉元の乱) 이후 막부의 주도권은 요리아이슈(寄合衆)로 넘어갔다.[17]

호조 다카토키(高時) 시대에는 나가사키 엔키(長崎円喜) 등 요리아이가 막부를 운영하며 다카토키는 주도권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18] 1333년,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 등에 의해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다카토키는 자결하며 도쿠소케도 멸망했다.

4. 도쿠소 가문의 저택

고다이고 천황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후, 호조 일족의 위령을 위해 1335년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명하여 호조 도쿠소케(도쿠소 가문)의 저택이 있던 자리에 호케이지(宝戒寺)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 저택은 '고마치 정(小町亭)'이라 불렸으며, 대대로 싯켄(執権)이 살고 있었다.[17]

5. 역대 도쿠소



6. 계보



범례: 숫자는 득종가 대수, '''굵은 글씨'''는 집권 경험자, ''기울임꼴''은 연서 경험자

7. 비고

도키우지 이후 도쿠소 당주나 그 형제들은 대체로 단명한 경우가 많았다. 도키우지 이후 당주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던 인물은 호조 사다토키(41세 사망) 뿐으로, 31세로 자결한 마지막 당주 호조 다카토키도 병약한 인물이었다. 도쿠소케 당주는 같은 호조 씨나 외척인 아다치 씨로부터 부인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근친혼이 누적되면서 역대 당주의 수명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19]

역대 도쿠소 당주는 원래대로라면 쇼군의 휘하로 고케닌의 한 사람이라는 입장이었으나, 에보시 친 관계에 따라 쇼군의 이름자 한 자를 받아 자신의 이름자로 이용하며 다른 유력 고케닌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 최근의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다.[14]

참조

[1] 서적 執権 (一) 吉川弘文館 1985
[2] 논문 北条得宗家成立試論 http://www.hi.u-toky[...] 2001
[3] 백과사전 得宗
[4] 서적 鎌倉北条氏の神話と歴史―権威と権力 日本史史料研究会 2007
[5] 서적 北条氏と鎌倉幕府 講談社 2011
[6] 서적 鎌倉北条氏の神話と歴史―権威と権力 日本史史料研究会 2007
[7] 서적 鎌倉北条氏の神話と歴史―権威と権力 日本史史料研究会 2007
[8] 서적 鎌倉北条氏の神話と歴史―権威と権力 日本史史料研究会 2007
[9] 서적 鎌倉北条氏の神話と歴史―権威と権力 日本史史料研究会 2007
[10] 서적 頼朝と義時 武家政権の誕生 講談社 2021
[11] 서적 鎌倉北条氏の神話と歴史―権威と権力 日本史史料研究会 2007
[12] 서적 鎌倉幕府の滅亡 吉川弘文館 2011
[13] 서적 鎌倉幕府の滅亡 吉川弘文館 2011
[14] 서적 時頼と時宗 日本放送出版協会 2000
[15] 백과사전 得宗
[16] 서적 北条氏と鎌倉幕府
[17] 서적 鎌倉幕府の滅亡 吉川弘文館 2011
[18] 서적 鎌倉幕府の滅亡 吉川弘文館 2011
[19] 서적 時頼と時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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