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 베니딕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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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스 베네딕트는 미국의 문화인류학자로, 1887년 뉴욕에서 태어나 1948년 사망했다. 배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교사, 시인으로 활동하다가 34세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문화 상대주의를 다룬 『문화의 유형』(1934)과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문화를 분석한 『국화와 칼』(1946)이 있다. 그녀는 또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으며, 미국 인류학 협회는 그녀의 이름을 딴 루스 베네딕트 상을 수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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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스 베니딕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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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루스 풀턴 (Ruth Fulton) |
| 출생 | 1887년 6월 5일 |
| 출생지 | 미국 뉴욕주 뉴욕 |
| 사망 | 1948년 9월 17일 |
| 사망지 | 미국 뉴욕주 뉴욕 |
| 배우자 | 스탠리 로시터 베네딕트 (1914년 결혼, 1930년 별거) |
| 학력 | |
| 학사 | 바사 칼리지 |
| 박사 | 컬럼비아 대학교 |
| 경력 | |
| 직업 | 인류학자 |
| 연구 기관 | 컬럼비아 대학교 |
| 박사 과정 지도 교수 | 프란츠 보아스 |
| 주요 저서 | |
| 주요 작품 | 국화와 칼 |
2. 생애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이로 인해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35] 명문 사립 여자 대학인 바사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여 1909년 수석으로 졸업한 후, 교사와 시인으로 활동했다.[32] 스탠리 로시터 베네딕트와 결혼했으나 아이를 갖지 못해 힘들어하다가, 1921년 34세의 나이에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프란츠 보아스의 지도를 받으며 인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35][32] 이 결혼 생활은 후에 이혼으로 끝났다.[32]
1923년 아메리칸 인디언의 민담과 종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모교인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했다.[35] 1930년대 초까지는 앤 싱글턴(Anne Singleton)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32] 그녀의 제자였던 마거릿 미드와는 학문적 동료이자 개인적으로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32]
1934년 주저인 『문화의 유형』을 출간하여, 인간 사회의 행동 패턴 형성과 문화 상대주의를 설명하며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책의 집필 기간 동안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 정신과 의사 해리 스택 설리번, 시카고 학파 등과 교류했다.
1936년 컬럼비아 대학교 조교수로 승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전쟁 정보국에 소집되어 1942년부터 일본반 책임자로 활동하며 대일 전쟁 및 점령 정책 연구에 참여했다.[33] 이 시기 연구는 종전 후 출간된 『국화와 칼』(1946)의 바탕이 되었다.[33] 또한 전쟁 중 미국군을 위해 인종주의(racism)에 대한 학문적 해설을 제공하며 이 용어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33]
종전 후에는 유네스코(UNESCO) 설립에 관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48년 컬럼비아 대학교 정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두 달 뒤인 1948년 9월 17일 뉴욕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887년 6월 5일 뉴욕시에서 루스 풀턴(Ruth Fulto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3][4][5] 어머니 비아트리스 샤턱(Beatrice Shattuck)은 교사였고, 아버지 프레데릭 풀턴(Frederic Fulton)은 동종 요법(homeopathy) 의사이자 외과 의사였다. 아버지는 루스가 태어난 지 약 1년 후인 1888년, 수술 중 얻은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6]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족은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뉴욕주 노리치의 농장으로 이사했다.[4][6]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했고, 루스는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에 반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6]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깊은 슬픔은 어린 루스에게 큰 심리적 영향을 주었다.[4] 또한 어린 시절 홍역을 앓은 후유증으로 부분적인 청각 장애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발견되었다.[7]
루스는 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일곱 살 무렵부터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6] 진 잉글로우와 같은 작가를 좋아했으며, 글쓰기를 통해 가족에게 인정받았다. 그녀의 글은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특징을 보였는데, 고등학교 시절 쓴 "룰루의 결혼 (실화)"이라는 글에서는 어린 하녀가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해야 했던 정략결혼의 현실을 미화 없이 그려냈다.[4]
고등학교 졸업 후, 루스와 여동생은 전액 장학금을 받아 대학 예비 학교인 세인트 마가렛 여자 학교(St. Margaret's School for Girls)에 진학했다.[4] 1905년에는 명문 여자 대학인 바사 칼리지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했다. 대학 시절 스스로를 "지적 급진주의자"라 칭했으며, 작가 월터 페이터의 영향을 받아 삶의 의미를 탐구했다.[4] 1909년 여동생과 함께 영문학 전공으로 졸업했다.[4]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중, 대학 이사의 후원으로 유럽(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을 1년간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4] 귀국 후에는 자선 단체에서 사회 사업을 하거나, 로스앤젤레스의 웨스트레이크 여자 학교(Westlake School for Girls)와 파사데나의 오턴 여자 학교(Orton School for Girls)에서 교사로 일했다.[4] 캘리포니아에서 교사로 일하며 아시아 문화에 대한 관심을 키우기도 했지만, 어느 직업에도 쉽게 만족하지 못하고 우울감과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8] 이 시기 월트 휘트먼이나 리처드 제퍼리스와 같이 삶의 가치를 강조하는 작가들의 글을 읽으며 희망을 찾으려 노력했다.[8]
오턴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여름, 고향 농가에서 코넬 의과대학의 생화학자 스탠리 로시터 베네딕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했다 (두 사람은 1910년경 만난 것으로 추정).[4] 결혼 후 아이를 갖지 못해 힘들어했으며,[35] 루스 스탠호프(Ruth Stanhope), 앤 싱글턴(Anne Singleton) 등의 필명으로 시를 발표하고,[9][32]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같이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의 업적을 조명하는 전기 집필을 시작하기도 했다.[4] 그러나 1918년 무렵에는 남편 스탠리와의 관계도 점차 소원해졌다.
개인적인 어려움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베네딕트는 1919년 뉴스쿨 포 소셜 리서치(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인류학 강의를 접하게 되었다.[32] 이를 계기로 1921년 34세의 나이에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저명한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인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35][32] 1923년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들의 민담과 종교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모교인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35] 남편 스탠리 베네딕트와는 후에 이혼했다.[32]
2. 2. 인류학과의 만남
루스 베네딕트는 직업을 모색하던 중 교육 철학자가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뉴 스쿨 포 소셜 리서치에서 여러 강의를 수강했다.[4] 이 시기 엘시 클루스 파슨스가 가르친 "민족학에서의 성" 수업과 저명한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의 제자인 알렉산더 골든와이저의 인류학 수업을 들으며 인류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4] 골든와이저를 스승으로 삼으면서 인류학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깊어졌고, 절친한 친구 마거릿 미드는 "인류학은 루스 베네딕트에게 삶에 대한 어떤 질서정연한 접근법보다 먼저 '의미'를 부여했다"고 평가했다.[10]골든와이저와 1년간 함께 공부한 후, 그는 1921년 베네딕트를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으로 보내 프란츠 보아스 밑에서 연구를 계속하도록 주선했다. 베네딕트는 보아스와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그를 "파파 프란츠"라고 부르며 아버지 같은 존재로 여겼다.[11] 보아스는 베네딕트가 뉴 스쿨에서 이수한 과목들을 대학원 학점으로 인정해주었다. 베네딕트는 "북아메리카의 수호령 개념"이라는 논문으로 1923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시기 베네딕트는 에드워드 사피어와도 우정을 쌓았다. 사피어는 그녀가 개인의 창의성과 문화적 패턴 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도록 격려했다. 두 사람은 시에 대한 공통된 관심사를 나누며 서로의 작품을 비평했고, 심리학과 개인 성격 및 문화 패턴의 관계에도 관심을 보이며 서신을 통해 서로를 정신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피어의 보수적인 성 역할 관념은 자유를 추구하던 베네딕트의 가치관과 충돌했고, 결국 두 사람의 세계관과 성격 차이로 인해 우정은 멀어졌다.[12]
베네딕트는 1922년 버나드 칼리지에서 처음으로 인류학 강좌를 가르쳤으며, 이때 마거릿 미드가 그녀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베네딕트는 미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13] 보아스는 베네딕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1931년 그녀를 인류학 조교수로 임명했다. 이는 그녀가 남편 스탠리 베네딕트와 이혼한 후에야 가능했던 일이었다. 학생 중 루스 랜디스는 베네딕트의 강의 방식과 학생들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점에 깊이 매료되었다고 편지에 적기도 했다.[14]
1937년 프란츠 보아스가 은퇴하자 많은 제자들은 베네딕트가 인류학과 학과장직을 계승할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컬럼비아 대학교 행정부는 보아스만큼 여성 학자에 대해 개방적이지 않았고, 니컬러스 머레이 버틀러 총장은 보아스 학파의 영향력을 정치적 급진주의로 간주하며 이를 억제하려 했다. 결국 보아스의 제자였지만 베네딕트의 "문화와 인성" 접근법을 강하게 비판했던 랠프 린턴이 학과장으로 임명되었다.[15] 이 결정에 베네딕트는 큰 모욕감을 느꼈고, 컬럼비아 인류학과는 린턴과 베네딕트라는 두 경쟁적 인물을 중심으로 나뉘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인류학자였지만, 서로의 연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었다.[16]
2. 3. 결혼과 이혼
오턴 여자 학교에서 첫 해를 가르친 여름, 루스는 셔턱 농가에서 코넬 의과대학의 엔지니어인 스탠리 로시터 베네딕트를 다시 만났다. 그는 1910년경 뉴욕 버팔로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이였다. 그 여름, 루스는 스탠리와 깊은 사랑에 빠져 그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였다.[4]결혼 후 루스는 가사일 외에도 글쓰기에 몰두하여, 루스 스탠호프, 에드가 스탠호프, 앤 싱글턴(Anne Singleton)과 같은 필명으로 시를 발표하고[9][32]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등 업적에 비해 덜 알려진 여성들의 전기를 쓰는 작업도 시작했다.[4]
그러나 1918년 무렵부터 부부 사이는 점차 멀어졌다. 스탠리는 부상 후 도시 생활을 선호했지만, 루스는 부부가 도시에서 떨어진 베드퍼드 힐스로 이사한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1919년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프란츠 보아스의 지도를 받기 시작한 이후에도 결혼 생활은 유지되었으나, 결국 1931년 스탠리 베네딕트와 이혼했다. 이혼은 같은 해 그녀가 컬럼비아 대학교 인류학 조교수로 임명되는 데 영향을 미쳤는데, 원본 소스에 따르면 이혼 전까지는 조교수 임명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2. 4. 마거릿 미드와의 관계
루스 베네딕트는 1922년 버나드 칼리지에서 처음으로 인류학 강좌를 가르쳤는데, 이때 학생 중 마거릿 미드가 있었다. 베네딕트는 미드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13] 미드는 베네딕트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인류학은 루스 베네딕트에게 삶에 대한 어떤 질서정연한 접근법보다 먼저 '의미'를 부여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10]두 사람은 당대 가장 영향력 있고 유명한 인류학자로서,[17] 서로의 작업에 대한 열정과 당시 흔치 않았던 성공한 여성이라는 자부심을 공유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17] 그들은 서로의 작업을 자주 비판했으며,[17] 업무를 통해 시작된 관계는 초기에는 에로틱한 성격을 띠기도 했다.[18][19][20][21] 원본 소스에는 제자였던 미드와 연인 관계 내지 자매애 관계였다는 기록도 있다.[32] 미드의 딸 역시 회고록 ''딸의 눈으로(With a Daughter's Eye)''에서 베네딕트와 미드의 관계가 부분적으로 성적인 것이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베네딕트와 미드는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노동 사회가 남성의 세상으로 여겨지던 시대에도 여성들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22]
1948년 베네딕트가 심근 경색으로 사망한 후, 미드는 베네딕트가 관리했을 프로젝트를 감독하고, 베네딕트가 평생 수집한 연구 노트를 편집 및 출판하여 베네딕트의 업적을 이어갔다.[21]
2. 5. 제2차 세계 대전과 전시 활동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 베네딕트는 브린모어 대학교에서 안나 하워드 쇼 기념 강좌를 통해 시너지라는 개념을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발발로 인해 이 연구는 중단되었고, 그녀는 다른 인류학 분야 연구에 집중하게 되었다.[23]1936년 컬럼비아 대학교의 조교수로 승진한 베네딕트는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전쟁 정보국에 소집되었다.[33] 1942년부터는 대일 전쟁 및 점령 정책에 관한 의사 결정을 지원하는 일본반의 책임자(치프)를 맡았다.[33] 1944년 6월에는 미국 국무부의 의뢰를 받아 일본 문화와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36] 이 시기에 정리된 보고서 "Japanese Behavior Patterns (일본인의 행동 패턴)"는 종전 후 출간된 그녀의 대표작 『국화와 칼』의 기초가 되었다.[33]
전쟁 중 베네딕트는 미국군을 위해 인종적 편견에 대한 학문적 해설을 제공하는 연구도 수행했다. 당시 군은 군사적 효율성과 관련된 인종적 동기에 기반한 행동에 관심을 보였는데, 베네딕트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인종주의(racism)이라는 단어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33]
1946년, 전쟁 중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대표작 『국화와 칼』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동양 문화의 예 중시 경향과 서양 문화의 원죄 개념을 인류학적으로 비교 분석하기도 했다.
종전 후에도 베네딕트는 유네스코(UNESCO) 설립에 관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47년에는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26] 1948년에는 컬럼비아 대학교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교수 승진 불과 두 달 뒤인 1948년 9월 17일, 뉴욕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24]
2. 6. 죽음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베네딕트는 브린모어 대학교에서 시너지 개념을 중심으로 한 안나 하워드 쇼 기념 강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인류학의 다른 분야에 집중하게 되면서 이 강좌는 전체 내용이 발표되지 못했다.[23] 해당 강좌의 초고는 사후에도 발견되지 않았다.[25]전쟁 이후, 그녀는 전쟁 중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대표작인 ''국화와 칼'' 집필에 집중하여 1946년 출판했다.[24] 1947년에는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6] 종전 후에도 국제 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UNESCO) 설립에 관여하고 강의를 계속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1948년 콜롬비아 대학교 정교수로 승진했으나, 임명된 지 불과 두 달 후인 1948년9월 17일 뉴욕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3. 주요 연구 및 업적
루스 베네딕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문화의 유형》 Patterns of Cultureeng (1934)
- 《민족-과학과 정치성》 Race: Science and Politicseng (1940)
-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eng (1946)
3. 1. 문화의 유형 (1934)
베네딕트의 대표 저서인 《문화의 유형》(Patterns of Culture, 1934)은 14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여러 판으로 출판되어, 오랫동안 미국 대학의 인류학 강좌에서 표준 읽기 자료로 사용되었다.마가렛 미드가 쓴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의 핵심 아이디어는 "인간 문화가 '확대된 성격'이라는 베네딕트의 견해"이다. 베네딕트는 책에서 "문화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다소 일관된 사고와 행동의 유형"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각 문화가 인간이 지닌 다양한 잠재력 중 일부 특성만을 선택하며, 이것이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된 성격 특성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특성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 문화만의 고유한 미학과 가치 체계, 즉 게슈탈트(Gestalt, 전체적인 형태나 구조)를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베네딕트는 미국 남서부의 푸에블로족 문화가 절제를 강조하는 반면, 그레이트 플레인스의 미국 원주민 문화는 방종을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니체가 제시한 "아폴론적"과 "디오니소스적"이라는 대립 개념을 활용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폴론 숭배자들이 축제에서 질서와 평정을 중시했던 것처럼 푸에블로 문화는 아폴론적 특성을 보이며, 반대로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 숭배자들이 야생성과 방종을 추구했던 것처럼 평원 인디언 문화는 디오니소스적 특성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베네딕트는 다양한 문화의 의례, 신념, 개인적 선호 등을 비교하며 각 문화가 특정 '성격'을 장려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문화와 성격 학파의 다른 인류학자들도 이러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특히 마가렛 미드는 베네딕트의 스승인 프란츠 보아스 밑에서 함께 공부하며 서로의 연구에 큰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그의 저서 《사모아의 청소년기》(1928)와 《세 원시 사회의 성과 기질》(1935) 등에서 유사한 관점을 발전시켰다. 에이브람 카디너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특정 문화 구성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성격 특성들의 집합을 의미하는 '양식적 성격' 개념을 발전시켰다.
베네딕트는 《문화의 유형》에서 문화 상대주의에 대한 신념을 명확히 드러냈다. 그녀는 각 문화가 그 자체의 고유한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해당 문화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때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자신의 문화적 잣대로 다른 문화의 관습이나 가치를 평가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잘못이며, 모든 문화는 그 구성원들에게 의미가 있으므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덕성은 개인이 속한 문화의 가치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다.
그녀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태평양 북서부의 콰키우틀족(프란츠 보아스의 연구 기반), 뉴멕시코의 푸에블로족(직접 연구), 그레이트 플레인스 부족, 그리고 뉴기니의 도부 섬 문화(마가렛 미드와 레오 포춘의 연구 기반) 등 다양한 사례를 제시했다. 이 문화들의 가치가 외부인의 시각에서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각자의 문화 체계 안에서는 일관성을 가지며 존중받아야 함을 역설했다. 이는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문화를 분석한 《국화와 칼》에서도 중요한 관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베네딕트의 '문화와 성격' 접근법은 지나친 추상화와 일반화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녀가 제시한 문화 유형이 해당 문화 전체가 아닌 특정 집단이나 상황에만 해당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프렌드 아벌레는 푸에블로족이 특정 상황에서는 차분하고 의례를 중시하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의심 많고 호전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고 반박했다.
3. 2. 국화와 칼 (1946)
1944년 6월, 미국 국무부의 의뢰를 받아 일본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36] 이 연구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책으로 출판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베네딕트는 초기 저서인 ''문화의 유형''(1934)뿐만 아니라, 1946년에 출판한 일본 사회와 문화를 연구한 후기 저서인 ''국화와 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에는 그녀가 전쟁 중에 수행한 연구 결과가 담겨 있다.''국화와 칼''은 '원격 인류학'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연합국을 지원하기 위해 인류학자들은 나치 독일이나 히로히토 치하의 일본을 직접 방문할 수 없었다. 따라서 베네딕트는 문학, 신문 스크랩, 영화, 녹음 등 접근 가능한 문화 자료를 통해 원격으로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의 목표는 일본의 공격성을 유발하는 문화적 패턴을 이해하고, 연합국이 활용할 수 있는 일본의 약점이나 설득 수단을 찾는 것이었다.
베네딕트의 전시 연구는 1944년에 대부분 완료되었으며, 미국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일본 문화의 여러 측면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은 자국의 전쟁 포로들이 가족에게 생존 사실을 알리거나 군사 정보 요구에 침묵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일본 전쟁 포로들은 비교적 쉽게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가족에게 연락하려 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을 서구 식민주의로부터의 해방자로 여기지 않고, 일본 중심의 위계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탐구했다.
베네딕트는 연구를 통해 일본 대중문화에서 일본 천황이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파악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종결을 위한 항복 조건을 논의할 때 천황의 통치를 유지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전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저서 ''국화와 칼''에서 베네딕트는 동양 문화에서 예를 중시하는 경향과 서양 문화에서 원죄 개념을 중요하게 다루는 점을 인류학적으로 비교하며 일본 문화를 분석했다. 그녀는 일본 문화를 "수치심" 문화로 규정했는데, 이는 개인의 내적 양심을 중시하는 서구 기독교 사회의 "죄의식" 문화와 달리, 타인의 시선과 평가를 통해 개인의 도덕적 행위가 결정되는 특징을 가진다고 보았다.
마가렛 미드에 따르면, 이 책을 읽은 다른 일본인들은 대체로 내용이 정확하다고 평가하면서도 다소 "도덕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일본의 정신과 의사인 도이 다케오는 자신의 저서 ''의존의 해부''에서 베네딕트의 '수치심 문화' 개념을 강하게 비판했다. 도이는 베네딕트의 분석이 일본의 수치심 문화가 서구의 죄의식 문화보다 열등하다는 가치 판단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3. 3. 인종차별 반대 운동
베네딕트는 컬럼비아 대학교 인류학과 동료인 진 웰트피쉬와 함께 "The Races of Mankind"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공동 저술했다. 이 팸플릿은 비교적 덜 알려진 저작으로, 미국 군인들을 대상으로 제작되었다. 주요 목적은 인종차별적 신념이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음을 쉬운 언어와 만화 삽화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었다.팸플릿은 "세계는 좁아지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며,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상황을 언급한다. "34개 국가가 이제 추축국의 침략과 파시즘의 군사적 파괴에 맞서 승리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연합했다"(p. 1)고 설명하며, 이 연합 국가들이 "가장 다양한 신체 유형의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저자들은 여러 장에 걸쳐 인간 평등에 대한 과학적 증거들을 제시하며, 모든 유형의 사람들이 차별 없이 전쟁에 참여하고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지구상의 모든 민족"이 "단일 가족이며 공통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치아, 뼈, 근육 등 기본적인 신체 구조가 동일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를 통해 피부색, 머리 모양, 머리카락 질감과 같은 외형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류는 하나의 조상으로부터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팸플릿은 "인류의 인종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형제이다. 그들의 몸에는 형제애의 기록이 있다"고 결론지었다.[28]
4. 학문적 영향 및 유산
루스 베네딕트는 직업을 탐색하며 교육 철학자가 될 가능성을 모색하던 중 뉴 스쿨 포 소셜 리서치에서 몇몇 강의를 수강하기로 결정했다.[4]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녀는 엘시 클루스 파슨스가 가르치는 "민족학에서의 성"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그녀는 그 수업을 즐겼고, 저명한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의 제자인 알렉산더 골든와이저와 함께 또 다른 인류학 수업을 들었다. 골든와이저를 스승으로 둔 루스의 인류학에 대한 사랑은 꾸준히 커져갔다.[4] 절친한 친구 마거릿 미드는 "인류학은 루스 베네딕트에게 삶에 대한 어떤 질서정연한 접근법보다 먼저 '의미'를 부여했다."라고 설명했다.[10] 골든와이저와 1년 동안 함께 일한 후, 그는 1921년 그녀를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프란츠 보아스와 함께 대학원생으로 일하도록 보냈다. 그녀는 보아스와 친밀한 우정을 쌓았고, 보아스는 그녀의 삶에서 일종의 아버지 같은 역할을 했다. 베네딕트는 그를 "파파 프란츠"라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불렀다.[11]
보아스는 뉴 스쿨 포 소셜 리서치에서 그녀가 수료한 과목들에 대해 대학원 학점을 인정해주었다. 베네딕트는 논문 "북아메리카의 수호령 개념"을 작성했고, 1923년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베네딕트는 또한 에드워드 사피어와 우정을 시작했는데, 사피어는 개인의 창의성과 문화적 패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도록 격려했다. 사피어와 베네딕트는 시에 대한 공통 관심사를 공유하며 서로의 작품을 읽고 비평했는데, 둘 다 같은 출판사에 투고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둘 다 심리학과 개인의 성격과 문화적 패턴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있었으며, 그들의 서신에서 그들은 종종 서로를 정신분석했다. 그러나 사피어는 베네딕트의 사적인 생각과 감정에 대해 거의 이해를 보이지 못했다. 특히 그의 보수적인 젠더 이데올로기는 베네딕트의 해방을 위한 투쟁과 충돌했다. 그들은 한동안 매우 가까운 친구였지만, 세계관과 성격의 차이로 인해 결국 우정에 금이 갔다.[12]
베네딕트는 1922년 버나드 칼리지에서 처음으로 인류학 강좌를 가르쳤고, 학생 중에는 마거릿 미드가 있었다. 베네딕트는 미드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13]
보아스는 베네딕트를 인류학과의 자산으로 여겼고, 1931년 그녀를 인류학 조교수로 임명했는데, 이는 그 해 스탠리 베네딕트와의 이혼 전까지는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루스 베네딕트를 특히 좋아했던 학생 중 한 명은 루스 랜디스였다.[14] 랜디스가 베네딕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녀가 베네딕트가 수업을 가르치는 방식과 그녀가 학생들에게 틀에 얽매이지 않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방식에 매료되었다고 적혀있다.[14]
1937년 보아스가 은퇴했을 때, 대부분의 제자들은 루스 베네딕트가 인류학과 학과장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컬럼비아 행정부는 보아스만큼 여성 전문가에 대한 태도가 진보적이지 않았고, 니컬러스 머레이 버틀러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은 그가 정치적 급진주의라고 생각하는 보아스 학파의 영향력을 억제하려 했다. 대신, 보아스의 전 제자이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였으며 베네딕트의 "문화와 인성" 접근법을 강력하게 비판했던 랠프 린턴이 학과장으로 임명되었다.[15] 베네딕트는 린턴의 임명에 당연히 모욕감을 느꼈고, 컬럼비아 학과는 린턴과 베네딕트, 두 라이벌 인물로 나뉘었고, 두 사람 모두 영향력 있는 출판물을 낸 유능한 인류학자였지만 서로의 작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16]
미국 인류학 협회는 베네딕트의 이름을 딴 연례 상을 수여한다. 루스 베네딕트 상은 단독 저술 모노그래프 부문과 편집된 저서 부문,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 이 상은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또는 트랜스젠더 관련 주제에 관해 인류학적 관점에서 쓰인 학술 서적의 우수성"을 인정한다.[29][30]
그녀를 기리는 46센트짜리 위대한 미국인 시리즈 우표가 1995년 10월 20일에 발행되었다.
스토니브룩 대학교의 베네딕트 칼리지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2005년, 베네딕트는 국립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1]
5. 저서
- 코치티 인디언의 이야기 (Tales of the Cochiti Indianseng, 1931년)
- 문화의 유형 (Patterns of Cultureeng, 1934년)
- 《주니 신화》 (Zuni Mythologyeng, 1935년)
- 《인종: 과학과 정치》 (Race: Science and Politicseng, 1940년)
- 《인종과 인종차별주의》 (Race and Racismeng, 1942년)
- 《인류의 종》 (The Races of Mankindeng, 1943년, 진 웰트피쉬 공저)
- 국화와 칼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Patterns of Japanese Cultureeng, 1946년)
- 《현장에서 일하는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저술》 (An Anthropologist at Work: Writings of Ruth Benedicteng, 1959년, 마거릿 미드 편집, 사후 출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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