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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4세 (신성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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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트비히 4세는 131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1323년 브란덴부르크를 장남에게 봉토로 주었고, 1329년 파비아 조약을 통해 조카들에게 팔라티네이트를 돌려주었다. 1335년에는 케른텐을 합스부르크 가문에, 1342년에는 티롤을 아들에게, 1345년에는 에노, 홀란트, 젤란트, 프리슬란트를 아내에게 수여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교황과 대립했으며, 1346년 카를 4세가 대립 왕으로 선출되자 이에 저항했다. 루트비히 4세는 1347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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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4세 (신성 로마 황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뮌헨 프라우엔교회에 있는 무덤 석상
뮌헨 프라우엔교회에 있는 무덤 석상
이름루트비히 4세
독일어Ludwig der Bayer (루트비히 데어 바이에르)
라틴어Ludovicus Bavarus (루도비쿠스 바바루스)
통치
작위로마인의 왕
독일 왕
통치 기간1314년 10월 20일 ~ 1347년 10월 11일
공동 통치1330년까지 프리드리히 데어 쇠네와 공동 통치
선임자하인리히 7세
후임자카를 4세
대관식1314년 11월 25일 (아헨)
작위이탈리아 왕
통치 기간1327년 5월 31일 ~ 1347년 10월 11일
선임자하인리히 7세
후임자카를 4세
대관식1327년 5월 31일 (밀라노)
작위신성 로마 황제
통치 기간1328년 ~ 1347년 10월 11일
선임자하인리히 7세
후임자카를 4세
대관식1328년 1월 17일 (로마)
작위바이에른 공작
통치 기간1301년 ~ 1347년 10월 11일
공동 통치1317년까지 루돌프 1세와 공동 통치
선임자루돌프 1세
후임자루트비히 5세, 슈테판 2세, 루트비히 6세, 빌헬름 1세, 알브레히트 1세, 오토 5세
개인 정보
출생일1282년 4월 1일
출생지뮌헨
사망일1347년 10월 11일
사망지퓌르스텐펠트브룩 근처 푸흐
배우자베아트릭스 시비드니차 공녀 (1308년 결혼, 1322년 사망)
마르가레테 2세 (1324년 결혼)
자녀마틸데, 마이센 변경백 부인
루트비히 5세
슈테판 2세
루트비히 6세
빌헬름 1세
알브레히트 1세
오토 5세
가문비텔스바흐 가문
아버지루트비히 2세
어머니마틸데 폰 합스부르크

2. 초기 생애와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는 상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2세와 마틸데 사이에서 태어나 에서 교육을 받았다.[3] 1301년 형 루돌프 1세와 함께 상 바이에른의 공동 통치를 시작했으나, 이후 하 바이에른 영토와 후견 문제를 둘러싸고 합스부르크 가문 및 형 루돌프 1세와 갈등을 겪었다. 특히 1313년 감멜스도르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1세에게 거둔 승리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4][1]

2. 1. 가문과 출생

루트비히는 뮌헨에서 상 바이에른 공작이자 라인 궁정 백작인 루트비히 2세와 마틸데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틸데는 루돌프 1세의 딸이었다.[3]

루트비히는 에서 교육을 받았다. 1301년에는 어머니 마틸데와 외삼촌인 알브레히트 1세 국왕의 지원을 받아 형 루돌프 1세와 함께 상 바이에른의 공동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1307년부터는 하 바이에른 영토를 두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갈등을 겪었다. 1313년에는 영토 분할 문제로 형 루돌프와 내전이 벌어졌으나, 뮌헨에서 평화 조약을 맺으며 마무리되었다.

같은 해인 1313년 11월 9일, 루트비히는 감멜스도르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1세를 격파했다. 프리드리히는 레오폴트 1세 공작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4] 루트비히와 프리드리히는 어린 시절 함께 자란 친구 사이였으나, 하 바이에른의 어린 공작들(하인리히 14세, 오토 4세, 하인리히 15세)에 대한 후견 문제가 불거지면서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이전 하 바이에른 공작이자 헝가리의 전 국왕이었던 오토 3세는 루트비히를 후견인으로 지목했었지만, 실제로는 프리드리히에게 후견이 맡겨졌던 것이다. 감멜스도르프 전투에서의 승리로 루트비히는 프리드리히로부터 후견 자리를 되찾았고, 이 승리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그의 명성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1]

2. 2. 교육과 초기 통치

루트비히는 뮌헨에서 상 바이에른 공작이자 라인 궁정 백작인 루트비히 2세와 루돌프 1세의 딸인 마틸데 사이에서 태어났다.[3]

그는 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301년 어머니와 삼촌인 알브레히트 1세 국왕의 지원을 받아 형 루돌프 1세와 함께 상 바이에른의 공동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1307년부터 하 바이에른 영토를 두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분쟁을 벌였다. 1313년에는 영토 분할 문제로 형 루돌프와 내전이 발생했으나, 뮌헨에서 평화 조약을 맺고 종결되었다.

같은 해 11월 9일, 루트비히는 감멜스도르프 전투에서 아름다운 프리드리히를 격파했다. 프리드리히는 그의 동생인 레오폴트 1세 공작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4] 루트비히와 프리드리히는 어린 시절 함께 자란 친구 사이였으나, 하 바이에른의 어린 공작들(하인리히 14세, 오토 4세, 하인리히 15세)에 대한 후견 문제로 갈등이 생겼다. 이전 하 바이에른 공작이자 전 헝가리 국왕이었던 오토 3세는 루트비히를 후견인으로 지목했었지만, 실제로는 프리드리히에게 후견이 맡겨지면서 무력 충돌로 이어진 것이다. 감멜스도르프 전투에서의 승리로 루트비히는 프리드리히로부터 후견권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 승리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루트비히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1]

2. 3. 감멜스도르프 전투 (1313년)

루트비히는 하 바이에른의 어린 공작들(하인리히 14세, 오토 4세, 하인리히 15세)에 대한 후견 문제를 두고 아름다운 프리드리히와 갈등을 겪었다. 이전 하 바이에른 공작이었던 오토 3세는 루트비히를 후견인으로 지명했지만, 실제로는 프리드리히에게 후견이 맡겨지면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1] 루트비히와 프리드리히는 본래 함께 성장한 친구 사이였으나,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적으로 맞서게 되었다.[4]

1313년 11월 9일, 루트비히는 감멜스도르프 전투에서 레오폴트 1세 공작의 지원을 받은 프리드리히 군대를 격파했다.[4] 이 전투의 패배로 프리드리히는 하 바이에른 공작들에 대한 후견을 포기해야 했다. 감멜스도르프에서의 승리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의 명성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1]

3. 로마 왕 선출과 프리드리히와의 갈등 (1314년-1330년)

신성 로마 황제 헨리 7세가 1313년 8월 사망하자, 제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시작되었다. 헨리 7세의 아들 보헤미아 왕 요한과 전임 황제의 아들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미남왕)가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일부 선제후들은 요한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고,[5] 다른 한편으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룩셈부르크 가문 측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트비히 4세를 대안으로 지지했다.[6]

결국 1314년 10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서로 다른 선제후 그룹이 각각 프리드리히 3세와 루트비히 4세를 로마 왕으로 선출하는 이중 선거가 발생했다.[7] 이로 인해 제국은 두 명의 왕을 중심으로 분열되어 내전에 돌입했다. 루트비히는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1316년 구 스위스 연방의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의 독립을 인정하기도 했다.[1]

수년간의 치열한 전쟁 끝에, 1322년 9월 28일 뮐도르프 전투에서 루트비히 4세가 프리드리히 3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8] 프리드리히는 1,300여 명의 귀족과 함께 포로로 잡혀 트라우스니츠 성에 감금되었다.

루트비히 4세의 금인(金印)


프리드리히의 형제 레오폴트의 지속적인 저항과 교황 요한 22세파문(1324년) 등 정치적 압박 속에서 루트비히는 1325년 3월 13일 트라우스니츠 조약을 맺고 프리드리히를 석방했다.[9][10] 이후 프리드리히가 조약 내용을 이행하려다 실패하고 신의를 지켜 다시 포로로 돌아오자, 이에 감명받은 루트비히는 프리드리히와 제국 공동 통치에 합의했다. 그러나 교황과 선제후들의 반대로 이 합의는 실현되지 못했고, 1326년 울름 조약을 통해 통치 영역을 분할하기로 했다. 프리드리히는 독일 지역을, 루트비히는 이탈리아 지역을 맡기로 했으나, 같은 해 동생 레오폴트가 사망하자 프리드리히는 독일 통치에서 물러나 오스트리아 통치에 집중했다. 그는 1330년 1월 13일에 사망했고,[1][6] 이로써 루트비히 4세는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3. 1. 이중 선거 (1314년)

신성 로마 황제 헨리 7세가 1313년 8월에 사망하면서 후계자 선출이 필요해졌다. 헨리 7세의 아들인 보헤미아 왕 요한은 유력한 후보였으나, 일부 선제후들은 그가 너무 어리거나[5] 이미 강력한 권력을 가졌다고 우려했다. 다른 후보로는 헨리 7세의 전임자인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합스부르크 가문의 미남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이에 룩셈부르크 가문을 지지하는 선제후들은 프리드리히의 선출을 막기 위해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트비히 4세를 후보로 내세웠다.[6]

1314년 10월 19일, 쾰른 대주교 헨리 2세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남쪽 작센하우젠에서 4명의 선제후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는 루트비히 4세의 형인 라인 궁정백 루돌프 1세, 작센비텐베르크 공작 루돌프 1세, 그리고 룩셈부르크 가문에 의해 보헤미아 왕위에서 쫓겨난 캐린티아 공작 하인리히 6세가 참여했다. 이들은 프리드리히를 로마 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 가문 측은 이 선거를 인정하지 않았고, 다음 날인 10월 20일에 마인츠 대주교 페터의 주도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다른 5명의 선제후가 모여 두 번째 선거를 실시했다.[7] 이 선거에는 마인츠 대주교 페터,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인 트리어 대주교 발두인과 보헤미아 왕 요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발데마르, 그리고 작센비텐베르크 공작 루돌프 1세의 선거권에 이의를 제기한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요한 2세가 참여하여 루트비히 4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1314년 이중 선거 지지 선제후
후보자선출일주도자지지 선제후
미남 프리드리히1314년 10월 19일쾰른 대주교 헨리 2세라인 궁정백 루돌프 1세, 작센비텐베르크 공작 루돌프 1세, 캐린티아 공작 하인리히 6세
루트비히 4세1314년 10월 20일마인츠 대주교 페터[19]트리어 대주교 발두인, 보헤미아 왕 요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발데마르,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요한 2세



이처럼 두 명의 왕이 선출되면서 곧바로 두 차례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루트비히 4세는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인 아헨에서 마인츠 대주교 페터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반면, 관례상 대관식을 주관할 권한이 있는 쾰른 대주교는 에서 프리드리히의 대관식을 진행했다. 이어진 두 왕 사이의 갈등 속에서 루트비히 4세는 1316년 스위스가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인정했다.[1]

몇 년간의 치열한 전쟁 끝에 프리드리히가 그의 형제인 레오폴트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승기를 잡는 듯 보였다. 그러나 1322년 9월 28일, 암핑 근처에서 벌어진 뮐도르프 전투에서 루트비히 4세의 군대가 프리드리히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8] 이 전투에서 프리드리히와 함께 오스트리아 및 잘츠부르크 출신의 귀족 1,3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루트비히 4세는 프리드리히를 트라우스니츠 성에 3년간 감금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의 형제 레오폴트의 끈질긴 저항, 보헤미아 왕 요한의 이탈, 그리고 1324년 교황 요한 22세가 루트비히 4세를 파문하는 등의 압력으로 인해, 루트비히는 1325년 3월 13일 트라우스니츠 조약을 맺고 프리드리히를 석방했다. 이 조약에서 프리드리히는 루트비히 4세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고, 만약 자신의 형제들을 루트비히에게 복종시키지 못할 경우 다시 포로가 되겠다고 약속했다.[9][10]

프리드리히는 형 레오폴트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교황이 그의 맹세를 면제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뮌헨으로 돌아와 다시 포로가 되었다. 그의 고결함에 감명받은 루트비히 4세는 프리드리히와의 옛 우정을 회복하고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교황과 선제후들이 이 합의에 강하게 반대하자, 1326년 1월 7일 울름에서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리드리히는 로마 왕으로서 독일 지역을 다스리고, 루트비히는 이탈리아에서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식을 올리기로 했다. 하지만 1326년 레오폴트가 사망하자 프리드리히는 제국 통치에서 물러나 오스트리아 통치에만 전념했고, 1330년 1월 13일에 사망했다.[1][6] 프리드리히 3세 사후 루트비히 4세의 단독 통치가 시작되었다.

3. 2. 대관식과 갈등의 시작

신성 로마 황제 헨리 7세가 1313년 8월 사망하자 새로운 황제 선출이 필요해졌다. 헨리 7세의 아들인 보헤미아 왕 요한은 유력한 후보였으나, 일부 선제후들은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5] 이미 강력한 권력을 가졌다고 판단하여 반대했다. 다른 유력 후보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미남왕)로, 그는 전임 황제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이었다. 이에 룩셈부르크 가문을 지지하는 선제후들은 프리드리히의 선출을 막기 위해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트비히 4세를 후보로 내세웠다.[6]

결국 1314년, 두 명의 경쟁자가 각각 다른 선제후 그룹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는 이중 선거가 이루어졌다.

1314년 제국 선거
선출 왕날짜장소주재자지지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1314년 10월 19일작센하우젠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남부)쾰른 대주교 헨리 2세라인 궁정백 루돌프 1세 (루트비히의 형)
작센비텐베르크 공작 루돌프 1세
캐린티아 공작 하인리히 6세 (룩셈부르크 가문에 의해 보헤미아 왕위에서 폐위됨)
쾰른 대주교 헨리 2세
루트비히 4세1314년 10월 20일프랑크푸르트마인츠 대주교 페터 폰 아스페르트[19]트리어 대주교 발두인 폰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가문)
보헤미아 왕 요한 폰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가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발데마르
작센-라우엔부르크 공작 요한 2세 (작센비텐베르크 공작 루돌프 1세의 선거권에 이의 제기)
마인츠 대주교 페터 폰 아스페르트



이 이중 선거 직후, 각각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루트비히 4세는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인 아헨에서 마인츠 대주교 페터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반면, 프리드리히 3세는 대관식 권한을 가진 쾰른 대주교에 의해 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두 명의 왕이 등장하면서 독일 내부는 극심한 혼란과 갈등에 휩싸였다. 루트비히는 이 시기 구 스위스 연방이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1316년에 인정하며 자신의 지지 기반을 넓히려 했다.[1]

수년간의 치열한 내전 끝에, 프리드리히 3세는 동생 레오폴트 1세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우위를 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322년 9월 28일, 암핑 근처에서 벌어진 뮐도르프 전투에서 루트비히 4세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8] 이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3세와 그를 따르던 오스트리아 및 잘츠부르크 귀족 1,3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루트비히 4세는 프리드리히 3세를 트라우스니츠 성에 3년간 감금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의 동생 레오폴트 1세의 완강한 저항, 보헤미아의 요한이 루트비히와의 동맹에서 이탈한 점, 그리고 1324년 교황 요한 22세가 루트비히 4세를 파문한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루트비히는 결국 프리드리히를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1325년 3월 13일 체결된 트라우스니츠 조약에서 프리드리히는 루트비히를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형제들을 설득하여 루트비히에게 복종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이를 이행하지 못하면 다시 포로로 돌아오기로 했다.[9][10]

프리드리히는 동생 레오폴트 1세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교황이 그의 맹세를 면제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뮌헨의 루트비히에게 포로로 돌아왔다. 프리드리히의 이러한 행동에 감명받은 루트비히 4세는 그와의 옛 우정을 회복하고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교황과 선제후들은 이 공동 통치 합의에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1326년 1월 7일 울름에서 울름 조약이 다시 체결되었는데, 이에 따라 프리드리히 3세는 로마 왕으로서 독일 지역을 다스리고, 루트비히 4세는 이탈리아로 가서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을 치르기로 했다. 하지만 같은 해 레오폴트 1세가 사망한 후 프리드리히는 독일 통치에서 물러나 오스트리아 통치에만 전념했고, 1330년 1월 13일에 사망했다.[1][6] 이로써 루트비히 4세의 단독 통치가 시작되었다.

3. 3. 뮐도르프 전투 (1322년)와 프리드리히의 포로 됨

1314년 이중 선거 이후,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트비히 4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 (미남왕) 사이의 왕위 계승 분쟁은 몇 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프리드리히의 형제인 레오폴트의 강력한 지원 덕분에 프리드리히 측이 우세한 듯 보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루트비히 4세는 1316년 스위스가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인정하며 세력 균형을 꾀하기도 했다.[1]

그러나 전세는 1322년 9월 28일 암핑 벌판에서 벌어진 뮐도르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뒤바뀌었다.[8] 이 전투에서 루트비히 4세의 군대는 프리드리히 3세의 군대를 격파했고, 프리드리히 3세 본인을 포함하여 오스트리아와 잘츠부르크 출신의 귀족 1,3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루트비히 4세는 포로가 된 프리드리히 3세를 트라우스니츠 성(슈반도르프 구)에 3년 동안 감금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의 형제 레오폴트의 끈질긴 저항, 한때 루트비히를 지지했던 보헤미아 왕 요한의 동맹 이탈, 그리고 1324년 교황 요한 22세가 루트비히 4세를 파문하는 등의 압박이 거세지자, 루트비히는 결국 프리드리히를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1325년 3월 13일, 두 사람은 트라우스니츠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프리드리히는 루트비히 4세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고, 만약 자신의 형제들을 설득하여 루트비히에게 복종시키지 못할 경우 다시 포로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9][10]

프리드리히는 형제 레오폴트의 완고함을 꺾는 데 실패했지만, 교황이 그의 맹세를 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뮌헨으로 돌아왔다. 루트비히 4세는 프리드리히의 이러한 고결함에 감명받아 오랜 우정을 회복했고, 두 사람은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교황과 선제후들이 이 합의에 강력하게 반대하자, 1326년 1월 7일 울름에서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리드리히는 로마 왕으로서 독일을 다스리고, 루트비히 4세는 이탈리아에서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기로 했다. 하지만 1326년 형제 레오폴트가 사망하자 프리드리히는 제국의 섭정 자리에서 물러나 오스트리아 통치에만 전념했고, 1330년 1월 13일에 사망했다.[1][6]

3. 4. 트라우스니츠 조약 (1325년)과 공동 통치

몇 년간의 치열한 전쟁 끝에, 프리드리히는 그의 형제 레오폴트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승기를 잡는 듯 보였다. 그러나 1322년 9월 28일 암핑 벌판에서 벌어진 뮐도르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의 군대는 결정적으로 패배했고,[8] 프리드리히 자신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출신 귀족 1,300명이 루트비히에게 포로로 잡혔다.

루트비히는 프리드리히를 트라우스니츠 성(슈반도르프 구)에 3년간 감금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의 형제 레오폴트의 끈질긴 저항, 보헤미아 왕 요한의 동맹 이탈, 그리고 1324년 루트비히를 파문교황 요한 22세의 압박으로 인해 루트비히는 결국 프리드리히를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1325년 3월 13일, 트라우스니츠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프리드리히는 루트비히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고, 자신의 형제들을 루트비히에게 복종시키지 못할 경우 다시 포로가 될 것을 약속했다.[9][10]

프리드리히는 형 레오폴트의 완고함을 꺾지 못하자, 교황이 그의 맹세를 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뮌헨으로 돌아왔다. 프리드리히의 이러한 신의에 감명받은 루트비히는 그와의 옛 우정을 회복하고,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교황선제후들이 이 합의에 강력하게 반대하자, 1326년 1월 7일 울름에서 울름 조약이라는 새로운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리드리히는 로마 왕으로서 독일을 다스리고, 루트비히는 이탈리아에서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기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1326년 레오폴트가 사망하자 프리드리히는 제국의 통치에서 물러나 오스트리아 통치에만 집중했고, 1330년 1월 13일에 사망했다.[1][6]

3. 5. 프리드리히의 죽음 (1330년)

뮐도르프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프리드리히는 루트비히 4세에 의해 3년 동안 트라우스니츠 성에 감금되었다.[8] 그러나 프리드리히의 형제 레오폴트의 끈질긴 저항, 보헤미아 왕 요한의 이탈, 그리고 1324년 교황 요한 22세가 루트비히 4세를 파문하는 등의 압력으로 인해 루트비히는 결국 1325년 3월 13일 트라우스니츠 조약을 통해 프리드리히를 석방했다. 이 조약에서 프리드리히는 루트비히를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고, 만약 자신의 형제들을 루트비히에게 복종시키지 못할 경우 스스로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9][10]

프리드리히는 형 레오폴트의 완고함을 꺾지 못하자, 교황이 그의 맹세를 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뮌헨으로 돌아와 다시 포로가 되었다. 프리드리히의 이러한 고결한 행동에 깊은 감명을 받은 루트비히는 그와의 옛 우정을 회복하고,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교황과 선제후들이 이 합의에 강하게 반대하자, 1326년 1월 7일 울름에서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리드리히는 로마 왕으로서 독일 지역을 다스리고, 루트비히는 이탈리아로 가서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기로 했다. 하지만 1326년 레오폴트가 사망한 후, 프리드리히는 제국의 섭정 자리에서 물러나 오스트리아 통치에만 집중했다. 그는 1330년 1월 13일에 사망했으며,[1][6] 이후 루트비히 4세의 단독 통치가 시작되었다.

4. 신성 로마 황제 즉위와 교황과의 대립 (1327년-1347년)

아비뇽 유수교황청아비뇽으로 이전하면서 교황과 제국 황제 간의 오랜 대립이 시작되었다. 루트비히 4세는 1327년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하고,[2] 1328년 로마에서 교황이 아닌 스키아라 콜론나에게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을 받으며 교황 교황 요한 22세와 정면으로 대립했다. 교황은 루트비히 4세와 로마 시 전체를 파문했다.[22][11]

루트비히 4세는 이에 맞서 교황을 이단으로 선언하고 니콜라오 5세를 내세웠으나,[11][22]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1330년 이탈리아에서 별다른 성과 없이 독일로 귀환했다.[22][11] 독일로 돌아온 루트비히 4세의 뮌헨 궁정인 알터 호프는 제국의 중요한 정치 중심지가 되었으며, 교황과 대립하던 프란체스코회 신학자 체세나의 미카엘, 옥컴의 윌리엄, 철학자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 등이 합류하여 황제의 입장을 지지했다.[1]

루트비히 4세는 교황과의 갈등 속에서 제국의 독립성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1333년에는 프랑스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비엔누아의 움베르 2세에게 아를 왕국 통치권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또한 1337년에는 아비뇽의 교황 교황 베네딕토 12세를 보호하던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에 대항하여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었다.[2][3]

교황청과의 화해 시도가 프랑스의 방해로 계속 실패하자, 1338년 선제후들은 렌제 선언(Kurverein von Rhensede)을 통해 선제후들이 선출한 황제는 교황의 승인 없이도 정당한 통치권을 가진다고 선언하며 제국의 독립성을 강조했다.[2][3][20][21] 같은 해 코블렌츠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는 동맹이었던 에드워드 3세가 참석하여 제국 총대리로 임명되기도 했다.[2][3] 그러나 루트비히는 1341년 재정 문제와 교황과의 재협상 시도 때문에 에드워드 3세와의 동맹을 파기했다.[2][3]

루트비히 4세의 강압적인 영토 확장 정책과 지속적인 교황과의 불화는 결국 제국 제후들의 반발을 샀다. 1346년 7월, 교황 클레멘스 6세는 루트비히 4세를 폐위시키고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를 4세를 대립왕으로 선출했다. 루트비히 4세는 이에 맞서려 했으나, 이듬해인 1347년 10월 11일 사냥 도중 사망하면서 그의 통치와 교황과의 오랜 대립은 막을 내렸다.

4. 1. 이탈리아 원정과 황제 즉위 (1327년-1328년)

1326년 합스부르크 가문과 화해한 루트비히 4세는 이탈리아로 눈을 돌렸다. 그는 1327년 밀라노로 진군하여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다. 이미 1323년에 루트비히는 교황령과 동맹을 맺은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밀라노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밀라노의 영주였던 갈레아초 1세 비스콘티는 교황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루트비히에 의해 폐위되었다.[2]

루트비히 4세의 문장(Otto Posse 1909)


1328년 1월, 루트비히는 로마에 입성하여 전통적인 교황 대관식 대신, 로마 시민의 대표를 자처한 원로원 의원 스키아라 콜론나에게 황제 대관식을 받았다. 이는 아비뇽 유수로 로마를 떠나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던 교황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다. 분노한 교황 요한 22세는 루트비히 4세와 로마 시 전체를 파문했다.[22][11]

이에 루트비히 4세는 3개월 후, 아비뇽에 머무는 교황 요한 22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폐위를 선언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더 나아가 그는 영적인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피에트로 라이날두치를 니콜라오 5세로 내세워 교황에 맞섰다. 교황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프란체스코회 신학자 체세나의 미카엘과 옥컴의 윌리엄, 철학자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 등은 루트비히를 지지하며 그의 궁정으로 합류했다.[11][1]

하지만 대립 교황 니콜라오 5세는 곧 로마를 떠나 몇 년 후 교황 요한 22세에게 굴복했다. 한편, 나폴리 왕 로베르는 루트비히와 그의 동맹인 시칠리아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항하여 함대와 군대를 파견했다. 루트비히는 1328년과 1329년 겨울을 피사에서 보냈고, 이후 북부 이탈리아에 머물렀다.[11]

이탈리아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루트비히 4세는 그의 공동 통치자였던 합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 3세가 1330년 사망하자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귀환 서약을 이행하기 위해 1330년 4월 28일 에탈 수도원을 설립했다.[22][11]

4. 2. 대립 교황 니콜라오 5세 옹립 (1328년)

아비뇽 유수아비뇽에 머물던 교황 요한 22세로마인의 왕 루트비히 4세와 대립했다.[22] 1326년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화해 이후 이탈리아로 진군한 루트비히는 1327년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다.[2]

1328년 1월, 루트비히는 로마에 입성하여 전통적인 교황 주관 대관식이 아닌,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자 "로마 시민의 대장"으로 불리던 스키아라 콜론나에게 황제 대관식을 받았다.[22][11] 이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으며, 이에 교황 요한 22세는 로마 시 전체와 황제를 파문하며 응수했다.[22] 3개월 후, 루트비히는 아비뇽에 있는 교황 요한 22세를 이단 혐의로 폐위시킨다는 칙령을 발표하고,[11] 교황에 대항하기 위해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피에트로 라이날두치를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로 내세웠다.[22][11]

그러나 니콜라오 5세는 곧 로마를 떠나 몇 년 후 교황 요한 22세에게 복종했다.[11] 이 과정에서 나폴리 왕 로베르는 함대와 군대를 보내 루트비히와 그의 동맹인 시칠리아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에 맞섰다.[11] 루트비히는 1328년1329년 겨울을 피사에서 보낸 뒤 북부 이탈리아에 머물렀으나, 이탈리아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22][11] 결국 공동 통치자였던 합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가 1330년 사망하자, 루트비히는 독일로 돌아왔다.[22][11] 귀환 후 루트비히는 맹세 이행을 위해 1330년 4월 28일 에탈 수도원을 설립했다.[11]

한편, 교황과 대립하던 프란체스코회 신학자 체세나의 미카엘과 옥컴의 윌리엄, 철학자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 등은 이탈리아에서 황제 루트비히와 합류하여 뮌헨의 알터 호프에 있는 그의 궁정으로 동행했다. 이곳은 신성 로마 제국 최초의 황실 거주지가 되었다.[1]

4. 3. 교황과의 지속적인 갈등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긴 교황로마인의 왕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루트비히 4세의 제국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오랜 갈등의 시작이 되었다.

1323년, 루트비히 4세는 교황령과 동맹 관계인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밀라노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이탈리아로 파견했다.[2] 1326년 합스부르크 가문과 화해한 후, 루트비히는 본격적으로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1327년 밀라노에서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다.[2]

교황과의 대립이 격화되자, 루트비히 4세는 1328년 1월 로마에 입성하여 교황이 아닌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자 "로마 시민의 대장"으로 불린 스키아라 콜론나에게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을 받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11] 이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이에 교황 요한 22세는 로마 시 전체와 황제를 파문하는 것으로 응수했다.[22] 루트비히 4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3개월 뒤, 아비뇽의 교황 요한 22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폐위한다는 칙령을 발표했으며,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인 피에트로 라이날두치를 니콜라오 5세로 내세웠다.[11][22] 그러나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는 곧 로마를 떠나 몇 년 후 교황 요한 22세에게 복종하면서 루트비히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11] 이 기간 동안 교황의 동맹인 나폴리 왕 로베르는 루트비히와 그의 동맹인 시칠리아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를 공격하기도 했다.[11] 결국 루트비히 4세는 이탈리아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330년 독일로 돌아왔다.[22]

독일로 돌아온 루트비히 4세의 뮌헨 궁정인 알터 호프에는 교황과 대립하던 프란체스코회 신학자 체세나의 미카엘, 옥컴의 윌리엄, 철학자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 등이 합류하여 황제의 입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다. 이들은 황제권이 교황권보다 우위에 있음을 주장하며 루트비히 4세의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했다.[1]

루트비히 4세는 교황과의 갈등 속에서 외교적 활로를 모색했다. 1337년에는 아비뇽의 새 교황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보호자 역할을 하던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에 대항하기 위해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황제와 교황 사이의 화해를 방해했다.[2][3]

에드워드 3세가 황제 루트비히 4세의 대리인이 되다.


교황청과의 협상이 계속 실패하자, 1338년 6명의 선제후들은 렌제 선언(Kurverein von Rhensede)을 발표했다. 이는 선제후 전원 또는 다수에 의해 선출된 로마인의 왕은 교황의 승인 없이도 왕의 칭호와 제국 통치권을 가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제국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중요한 선언이었다.[2][3][20][21] 같은 해 코블렌츠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는 에드워드 3세가 황제의 손님으로 참석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총대리로 임명되기도 했다.[2][3] 그러나 루트비히는 1341년 에드워드 3세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다시 교황과의 화해를 시도했지만, 이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2][3]

루트비히 4세의 강압적인 영토 확장 정책과 교황과의 지속적인 불화는 제국 제후들의 반감을 샀다. 결국 1346년 7월, 교황 클레멘스 6세는 루트비히 4세를 폐위시키고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를 4세를 대립왕으로 선출했다. 루트비히 4세는 이에 맞서 싸우려 했으나, 1347년 10월 사냥 중 사망하면서 교황과의 오랜 갈등은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4. 4. 렌제 선언 (1338년)

교황과의 지속적인 갈등 속에서 루트비히 4세는 새로운 교황 교황 베네딕토 12세와의 화해를 시도했지만, 아비뇽 유수 시기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의 보호자를 자처한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필리프 6세는 황제와 교황 사이의 어떤 합의도 용납하지 않았다.[2][3]

교황청과의 협상 실패는 결국 1338년 7월 16일, 라인강변의 렌제에서 6명의 선제후들이 모여 중요한 선언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선제후 전체 또는 과반수에 의해 선출된 제국의 군주는 교황의 승인이나 확인 절차 없이도 자동으로 로마 왕 칭호와 제국 통치권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이는 '렌제 선언'(Kurverein von Rhense|쿠르페라인 폰 렌제de 또는 Rhenser Kurverein|렌저 쿠르페라인de)으로 알려졌으며[20], 프랑크푸르트코블렌츠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적용되었다.[21] 이 선언은 황제 선출에 대한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고 선제후들의 권한과 제국의 독립성을 강조한 중요한 조치였다.

한편, 루트비히 4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를 견제하기 위해 1337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었다. 에드워드 3세는 1338년 코블렌츠의 카스토르키르체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 황제의 손님으로 참석했으며, 이 자리에서 신성 로마 제국총대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루트비히 4세는 잉글랜드로부터 기대했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했고, 다시 한번 교황과의 화해를 시도하려 했기 때문에 1341년 에드워드 3세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필리프 6세와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다.[2][3] 이러한 루트비히 4세의 정책은 제국 제후들의 지지를 잃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1346년 교황 클레멘스 6세에 의해 폐위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5. 영토 확장 정책

1341년 뤼베크 금 굴덴. 루트비히 4세 시기 주조된 화폐.


1322년 뮐도르프 전투에서 경쟁자 프리드리히 3세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이후, 루트비히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비텔스바흐 가문의 세력을 넓히기 위한 적극적인 영토 확장 정책을 펼쳤다. 그는 주로 상속 문제에 개입하거나 결혼 정책을 활용하여 영토를 확보하고자 했다.

루트비히 4세의 주요 영토 확장 시도는 다음과 같다.

  • 1323년 아스카니아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분가가 단절되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을 장남 루트비히 5세에게 수여하였다.
  • 1324년 홀란트, 에노, 젤란트의 상속녀였던 마르가레테와 재혼하여, 훗날 이 지역들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 1340년 요한 1세가 사망하자 하부 바이에른을 상속받아 바이에른 공국을 재통합했다.
  • 1342년 티롤의 상속녀 마르가레테 마울타쉬와 요한 하인리히의 결혼을 무효화시키고, 자신의 아들 루트비히 5세와 결혼시켜 티롤을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다.[2]
  • 1345년 아내 마가레테에게 에노, 홀란트, 젤란트, 프리슬란트를 수여하여 이 지역들을 확보했다.[1]


그러나 이러한 루트비히 4세의 영토 확장 정책은 기존 상속 권리를 무시하거나 경쟁 가문의 이해관계를 침해하는 경우가 많아 상당한 반발을 샀다. 특히 티롤에노, 홀란트 등의 상속 문제는 룩셈부르크 가문과의 극심한 대립을 초래했으며[2], 다른 세속 제후들과의 관계도 악화시켰다.[1] 루트비히 4세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위협에 맞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정책을 추진했으나[1], 이는 결국 교황 및 제후들과의 갈등을 심화시켜 1346년 교황 클레멘스 6세에 의해 폐위되고 카를 4세가 대립왕으로 선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사후 비텔스바흐 가문이 확보했던 영토 중 상당수는 다시 분할되거나 합스부르크 가문 등 경쟁 가문에게 넘어가면서 가문의 세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

5. 1.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 획득 (1323년)

1323년, 아스카니아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분가가 단절되자, 루트비히 4세는 이를 기회로 삼아 브란덴부르크를 자신의 장남 루트비히 5세에게 봉토로 수여했다.

5. 2. 파비아 조약 (1329년)

1329년 파비아 조약을 통해 루트비히 4세는 죽은 형제 루돌프 1세의 아들들과 화해하고, 팔라티네이트를 조카 루돌프 2세와 루페르트 1세에게 돌려주었다.

5. 3. 케른텐 공국 분할 (1335년)

보헤미아의 하인리히가 사망한 후, 케른텐 공국은 1335년 5월 2일 린츠에서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공작 알베르트 2세와 오토 공작 오토에게 제국 봉토로 주어졌다. 한편, 티롤 백국은 처음에 룩셈부르크 가문의 손에 들어갔다.[14][15]

5. 4. 티롤 백국 획득 (1342년)

보헤미아의 하인리히 사후, 케른텐 공국은 1335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베르트 2세와 오토에게 제국 봉토로 넘어갔으나, 티롤은 룩셈부르크 가문의 영향 아래 있었다.[14][15] 루트비히 4세는 1340년 요한 1세 사후 하부 바이에른을 상속받아 바이에른 공국을 재통합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후 루트비히 4세는 티롤 확보에 나섰다. 1341년, 그는 케른텐 공 하인리히 6세의 딸이자 티롤의 상속녀였던 마르가레테 마울타쉬의 남편, 즉 룩셈부르크 가문의 요한 하인리히를 추방하였다. 그리고 1342년, 루트비히 4세는 마르가레테와 요한 하인리히의 결혼을 무효화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루트비히 5세와 마르가레테를 결혼시켰다. 이를 통해 비텔스바흐 가문은 티롤 백국을 획득하였으나, 경쟁 관계에 있던 룩셈부르크 가문과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2]

5. 5. 에노, 홀란트, 젤란트, 프리슬란트 획득 (1345년)

1345년, 루트비히 4세 황제는 자신의 아내인 에노의 마가레테 2세에게 에노, 홀란트, 젤란트, 프리슬란트를 수여하였다. 이 영지들은 본래 마가레테와 그녀의 여동생들이 공동으로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으나, 루트비히 4세는 잉글랜드의 여왕이었던 필리파를 포함한 다른 여동생들의 세습 권리를 무시하고 아내에게 모든 영지를 넘겨주었다. 이러한 조치는 다른 세속 제후들의 반발을 샀으며, 특히 룩셈부르크 가문과의 적대 관계 속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

6. 룩셈부르크 가문과의 갈등과 죽음

루트비히 4세의 지속적인 영토 확장 시도와 예측하기 어려운 외교 정책은 신성 로마 제국제후들 사이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 이러한 상황 속에서 1346년 여름,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를 4세가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지지를 받아 대립 왕으로 선출되었다.[1][21] 루트비히 4세는 제국 자유 도시와 기사들, 그리고 합스부르크 공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카를 4세에게 성공적으로 저항했다.[1]

그러나 1347년 10월, 루트비히 4세가 퓌르스텐펠트브루크 인근에서 사냥 중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1][21] 두 왕 사이의 본격적인 내전은 피할 수 있었다. 그의 사후 비텔스바흐 가문의 아들들은 잠시 다른 대립 왕을 내세우기도 했으나 결국 룩셈부르크 측과 타협했으며, 가문의 영지는 다시 분할되었다.[1] 그럼에도 비텔스바흐 가문과 룩셈부르크 가문의 갈등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1]

6. 1. 카를 4세의 대립왕 선출 (1346년)

루트비히 4세는 영토 확장에 힘썼는데, 1323년에는 장남 루트비히 5세에게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을 수여했고, 1324년에는 홀란트, 에노, 젤란트 백작령의 상속녀 마르가레테와 재혼했으며, 1342년에는 마르가레테 폰 티롤과 장남 루트비히 5세의 결혼을 통해 티롤 백작령 확보를 시도했다.[1] 이러한 영토 확장 정책과 아비뇽교황과의 지속적인 대립은 제국 내외에서 그의 입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는 교황 요한 22세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니콜라오 5세를 옹립하려 했으나 실패했으며[21], 1338년 선제후들이 교황의 승인 없이도 로마 왕 칭호 사용 및 제국 통치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선언한 '렌제 선제후 협약'(Kurverein von Rhense|쿠어페라인 폰 렌제de)을 지지하며 교황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20][21] 또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 (루트비히 4세의 사돈)와 1338년 동맹을 맺었다가 1340년에는 중립으로 돌아서는 등[21] 불안정한 외교 정책으로 인해 독일 제후들 사이에서도 많은 적을 만들었다.[1]

결국 1346년 7월, 교황 클레멘스 6세는 루트비히 4세를 폐위시켰고[21], 같은 해 여름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를 4세가 클레멘스 6세의 지원을 받아 대립 왕으로 선출되었다.[1] 루트비히 4세는 제국 자유 도시와 기사들, 그리고 합스부르크 공작들로부터 여전히 폭넓은 지지를 받았고[1], 오컴의 윌리엄 등이 "성직자들의 왕"(König der Pfaffen|쾨니히 데어 파펜de)이라 부르며 교황의 영향력 아래 있는 인물로 평가받던[1] 카를 4세에게 성공적으로 저항했다. 같은 해 8월 크레시 전투에서 카를 4세의 아버지인 보헤미아 왕 요한이 전사했지만, 전투에 참여했던 카를 4세 자신은 탈출했다.[1]

그러나 루트비히 4세와 카를 4세 사이의 본격적인 내전은 루트비히 4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발발하지 않았다.[1] 1347년 10월 11일, 루트비히 4세는 퓌르스텐펠트브루크 인근 Puch|푸흐de에서 곰 사냥 중 뇌졸중으로 사망했다.[1][21] 향년 65세였다.[21] 그는 뮌헨의 프라우엔키르헤에 안장되었다.[1]

루트비히 4세의 묘, 뮌헨 프라우엔키르헤


루트비히 4세 사후, 그의 아들들은 슈바르츠부르크의 귄터를 새로운 대립 왕으로 지지했으나, 귄터가 1349년 일찍 사망하면서 결국 룩셈부르크 측과 타협하고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지를 다시 분할했다.[1] 그럼에도 비텔스바흐 가문과 룩셈부르크 가문의 갈등은 계속되었고, 1400년 루트비히 4세의 형 루돌프 1세의 증손자인 루프레히트가 왕위에 오르며 비텔스바흐 가문은 다시 신성 로마 제국에서 권력을 잡게 된다.[1][21]

6. 2. 루트비히 4세의 저항과 죽음 (1347년)



루트비히 4세의 영토 획득 정책과 불안정한 외교는 독일 제후들 사이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다. 결국 1346년 여름, 룩셈부르크의 카를 4세가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지원을 받아 대립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루트비히 4세는 제국 자유 도시와 기사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며 카를 4세에게 성공적으로 저항했다. 당시 카를 4세는 교황의 꼭두각시라는 인식이 강했으며, 오컴의 윌리엄은 그를 "성직자들의 왕"(rex clericorum|렉스 클레리코룸la)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한 합스부르크 공작들도 루트비히 4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크레시 전투가 벌어져 카를 4세의 아버지인 룩셈부르크의 요한이 전사하는 일도 있었다. 카를 4세 자신도 이 전투에 참여했으나 탈출했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루트비히 4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더 긴 내전으로 번지는 것을 피하게 되었다. 루트비히 4세는 1347년 10월, 퓌르스텐펠트브루크 근처 푸흐(Puch)에서 곰 사냥을 하던 중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뮌헨의 프라우엔키르헤에 안장되었다.

루트비히 4세 사후, 그의 아들들은 슈바르츠부르크의 귄터를 내세워 카를 4세에 대항하려 했으나, 귄터가 1349년 일찍 사망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루트비히 4세의 아들들은 룩셈부르크 측과 타협했으며,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지는 다시 분할되었다.[1] 비텔스바흐 가문과 룩셈부르크 가문의 갈등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1]

7. 유산과 영향

루트비히 4세의 통치는 신성 로마 제국 역사에서 황제권, 제후권, 교황권 사이의 관계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비뇽교황과 극심한 대립을 벌이며 황제권 강화를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1328년 로마에서 교황이 아닌 로마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황제 대관식을 치르기도 했다. 그의 재위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정치적 유산 중 하나는 1338년 선제후들이 체결한 '렌제 협정'(Kurvein von Rhense)[20]이다. 이 협정은 로마 왕 선출에 대한 교황의 승인권을 부정하고 선제후들의 권한을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1] 또한 1337년에는 튜턴 기사단의 동방 확장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강압적인 영토 확장 정책과 교황과의 지속적인 갈등은 결국 제후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고, 1346년 클레멘스 6세에 의해 폐위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루트비히 4세 사후 그의 유산은 분할 상속되어 비텔스바흐 가문의 세력 약화를 초래했다. 바이에른은 분열되었고, 어렵게 확보했던 티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어갔으며, 1373년에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마저 카를 4세에게 매각되었다.

7. 1. 비텔스바흐 가문의 분열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한 후, 그의 유산은 전처와 후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분배되었다. 이로 인해 바이에른은 여러 영지로 분열되었고, 루트비히 4세가 확보했던 티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또한 1373년에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마저 카를 4세에게 매각되면서 비텔스바흐 가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참고로, 1400년 로마 왕으로 선출된 루프레히트는 루트비히 4세의 형인 루돌프 1세의 증손자이다. 또한, 프랑스의 샤를 6세 왕비인 이자보 드 바이에른은 루트비히 4세의 차남 슈테판 2세의 손녀 (루트비히 4세의 증손녀)에 해당한다.

7. 2. 황제권과 제후권의 관계 변화

1314년 헨리 7세 사망 후 치러진 이중 선거는 제후들 간의 분열을 보여주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와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트비히 4세가 각각 다른 제후들의 지지를 받아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황제 선출 과정에서 제후들의 영향력이 결정적임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루트비히 4세는 1322년 뮐도르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3세를 포획하고 1325년 타협을 통해 공동 통치를 하다가 1330년 프리드리히 3세 사망 후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루트비히 4세는 황제권 강화를 위해 교황권에 도전하는 행보를 보였다. 1328년 로마로 가서 교황이 아닌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손으로 황제 대관식을 치렀는데, 이는 황제 즉위에 대한 교황의 전통적인 승인권을 부정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아비뇽에 머물던 요한 22세와 극심한 갈등을 빚으며 그를 이단으로 선언하고 폐위시킨 뒤, 대립 교황 니콜라 5세를 옹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1329년 루트비히 4세가 로마를 떠나자마자 니콜라 5세가 폐위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교황과의 지속적인 갈등 속에서 황제권과 제후권의 관계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1338년 7월 16일, 선제후들은 '렌제 협정'(Kurvein von Rhense)[20]을 맺어, 선제후들에 의해 선출된 로마 왕은 교황의 동의나 승인 없이도 제국 내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 결정은 프랑크푸르트코블렌츠의 제국 회의에서 확인되었으며[21], 황제 선출에 대한 교황의 개입을 공식적으로 배제하고 선제후들의 권한을 크게 강화하는 조치였다. 이는 황제가 교황보다는 제후들의 지지에 더욱 의존하게 되는 구조적 변화를 의미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4세의 독단적인 정책과 교황과의 계속된 마찰은 결국 제후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 1346년 7월, 클레멘스 6세는 루트비히 4세를 폐위시키고,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를 4세를 새로운 대립왕으로 내세웠다. 이는 황제의 권력이 여전히 교황 및 제후들과의 관계 속에서 불안정하며, 이들의 지지가 필수적임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루트비히 4세는 이에 맞서려 했으나 1347년 사망하면서 카를 4세가 단독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7. 3. 튜튼 기사단 지원

루트비히 4세는 튜튼 기사단의 보호자였다. 1337년 그는 튜튼 기사단에 리투아니아와 러시아를 정복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는데, 이는 기사단이 단지 세 개의 작은 영토에 대한 청원만 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12] 이후 그는 기사단이 외국 통치자와의 영토 분쟁에서 외국의 법정에 출두하는 것을 금지했다.[13]

8. 가족 관계

루트비히 4세는 두 번 결혼했다. 1308년 야보르 공 볼코 1세 스로비의 딸인 실레시아의 베아트리체와 첫 번째 결혼을 하여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베아트리체가 사망한 후, 1324년에는 에노, 홀란트, 제엘란트 백작 기욤 1세의 딸인 에노 백작 마르가레테 2세와 재혼하여 열 명의 자녀를 낳았다.

8. 1. 첫 번째 부인: 실레시아의 베아트리체

1308년 루트비히는 첫 번째 부인인 실레시아의 베아트리체 (1290년–1322년)와 결혼했다. 그녀는 야보르 공 볼코 1세 스로비의 딸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생몰년비고
마틸다1313년 6월 21일 이후 – 1346년 7월 2일1329년 뉘른베르크에서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2세와 결혼
1314년 9월 말 – 직후 사망
루트비히 5세1315년 7월 – 1361년 9월 17/18일상바이에른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티롤 백작
안나1317년 7월경[16] – 1319년 1월 29일카스틀에서 사망
아그네스1318년경 – 직후 사망
슈테판 2세1319년 가을 – 1375년 5월 19일하바이에른 공작


8. 2. 두 번째 부인: 에노 백작 마르가레테 2세

1324년, 루트비히는 두 번째 부인인 에노 백작 마르가레테 2세(홀란트제엘란트 백작 겸임, 1308–1356)와 결혼했다. 그녀는 에노, 홀란트, 제엘란트 백작 기욤 1세의 딸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10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생몰년비고
마르가레테1325–13741351년 오펜에서 카로이 1세의 아들 슬라보니아의 슈테판(1354년 사망)과 결혼, 1357/58년 게를라흐 폰 호엔로에와 재혼.
안나1326년경 – 1361년 6월 3일퐁텐엘르에서 사망. 하바이에른 공작 요한 1세(1340년 사망)와 결혼.
루트비히 6세, 로마인1328년 5월 7일 – 1365년 5월 17일상바이에른 공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엘리자베트1329 – 1402년 8월 2일슈투트가르트에서 사망. 1350년 베로나에서 베로나 군주 칸그란데 2세 델라 스칼라(1359년 사망)와 결혼, 1362년 뷔르템베르크 백작 울리히(1388년 사망)와 재혼.
빌헬름 1세1330년 5월 12일 – 1389년 4월 15일빌헬름 1세로서 하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3세로서 에노 백작, 빌헬름 5세로서 홀란트제엘란트 백작 겸임.
알베르트 1세1336년 7월 25일 – 1404년 12월 13일하바이에른 공작, 에노, 홀란트제엘란트 백작 겸임.
아그네스1335년 뮌헨 – 1352년 11월 11일 뮌헨수녀가 됨.
오토 5세1340/42 – 1379년 11월 15/16일상바이에른 공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베아트릭스1344년 – 1359년 12월 25일스웨덴 국왕 에리크 12세와 결혼.
루트비히1347년 10월 – 1348년


참조

[1] 서적 Ludwig IV. der Bayer: Herzog, König, Kaiser https://books.google[...] Verlag Friedrich Pustet
[2] 웹사이트 Ludwig der Bayer (1314–1347) Reich und Herrschaft im Wandel http://www.geschicht[...] Heinrich-Heine-Universität Düsseldorf 2020-03-01
[3] 서적 Ludwig IV. (1282–1347) und das 'Licet iuris' https://books.google[...] GRIN Verlag
[4] 서적 The Oxford Encyclopedia of Medieval Warfare and Military Technolog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5] 웹사이트 John, King of Bohemia https://www.britanni[...] 2018-08-30
[6] 서적 Ludwig IV. der Baier und Friedrich von Oesterreich von dem vertrage zu Trausnitz bis zur zusammenkunft in Innsbruck https://archive.org/[...] Druck von Pontt & v. Döhren
[7] 서적 Magill's Guide to Military History: Cor–Jan https://books.google[...] Salem Press
[8] 서적 Lithuania Ascending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9] 서적 The Age of the Renaissance https://books.google[...] Charles River Editors 2018
[10] 서적 Die Auseinandersetzung zwischen Ludwig IV. dem Bayer und Friedrich dem Schönen von Oesterreich im Jahre 1325 https://books.google[...] Keyssner
[11] 웹사이트 Wir sind Kaiser{{snd}}Ludwig IV. zwischen Gott und den Fürsten https://archiv.ub.un[...] Uni Heidelberg 2020-03-01
[12] 서적 The Teutonic Knights: A Military History Greenhill Books
[13] 간행물 Kaiser Ludwig IV. Imperiale Herrschaft und reichsfürstlicher Konsens
[14] 서적 Die Wittelsbacher: Staat und Dynastie in acht Jahrhunderten https://books.google[...] Kohlhammer Verlag 2005
[15] 웹사이트 König Ludwig IV. belehnt seinen Sohn Ludwig mit der Mark Brandenburgund befiehlt, ihm zu huldigen https://www.hiko-ber[...] Historische Kommission zu Berlin 2020-03-01
[16] 뉴스 Mumie Anna{{snd}}Die Rettung einer Prinzessin http://www.br.de/pre[...] 2016-03-22
[17] 문서 ローマ王は帝位の前提となった東フランク王位から改称された王号。現代から見れば実質ドイツ王だが、当時国家・地域・民族としてのドイツは成立途上である。また[[イタリア王国 (中世)|イタリア]]と[[アルル王国|ブルグント]]への宗主権を備える。
[18] 문서 4世は皇帝・イタリア王として数えた数字で、ドイツ君主としては5人目。皇帝としては敬虔王→ロドヴィコ2世イタリア王→ルイ3世プロヴァンス王→当人。ドイツ君主としては敬虔王→ドイツ人王→若王→幼童王→当人
[19] 문서 ドイツの天才的吟遊詩人[[フラウエンロープ]]は国王選挙をめぐる諸侯の対立の中でマインツ大司教ペーター・フォン・アスペルト選帝侯の動向に影響を与える歌を歌ったとされる。- Lexikon des Mittelalters. Bd. IV. München/Zürich: Artemis 1989 (ISBN 3-7608-8904-2), Sp. 2098-2099.
[20] 문서 Heinrich Mitteis: Die deutsche Königswahl. Wien: Rohrer, 2. Aufl. 1944. Nachdruck 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69, S. 216.
[21] 문서 Lexikon des Mittelalters. Bd. VII. München: LexMA 1995 (ISBN 3-7608-8907-7), Sp. 785 (A. Schmid zu >Rhense, Kurverein v. <).
[22] 서적 Introduction to medieval Europe, 300-1550 https://www.worldcat[...]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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