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리튼 조사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리튼 조사단은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한 국제 연맹의 조사 요청에 따라 파견된 조사단이다. 영국 리튼 백작을 단장으로 5개국 대표로 구성되어 1932년 일본, 만주국, 중화민국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만주국의 자발적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의 행동을 비판했지만, 일본의 특수 권익을 고려하여 절충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만주국을 승인했으며, 리튼 보고서는 국제 연맹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결과를 낳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만주사변 - 류탸오후 사건
    류탸오후 사건은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남만주 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중국군 소행으로 날조하여 만주 침략의 빌미로 삼은 사건으로, 만주사변의 도화선이 되어 일본의 중국 침략과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국제연맹 - 난센 국제 난민 사무소
    프리초프 난센의 난민 구호 사업을 계승하여 국제 연맹에 의해 설립된 난센 국제 난민 사무소는 난민 보호와 지원, 아르메니아인 난민 정착 지원, 1933년 난민 협약 채택 등에 기여하여 193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나 곧 해산되어 국제 연맹의 새로운 난민 기구에 통합되었다.
  • 국제연맹 - 팔레 데 나시옹
    팔레 데 나시옹은 제네바에 위치한 건물로, 과거 국제 연맹 본부였으며 현재는 제네바 유엔 사무소 본부로 사용되고 있고, 세계 인권 선언 채택 등 중요한 국제적 사건들이 일어난 곳이다.
  • 1932년 일본 - 만주사변
    만주사변은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류탸오후 사건을 자작극으로 일으켜 만주를 침략하고 만주국을 수립한 사건이며, 일본 군국주의 팽창을 가속화하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 1932년 일본 - 5·15 사건
    5·15 사건은 1932년 일본 해군 청년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하고 주요 시설을 공격했으나 실패한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정당 내각 붕괴와 군부 영향력 강화로 이어져 일본이 군국주의 시대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리튼 조사단
개요
명칭릿톤 조사단
영문 명칭Lytton Commission
일본어 명칭릿톤 조사단 (リットン調査団)
배경
설립 배경만주사변의 진상 조사
파견국제 연맹
구성
단장리튼 경
단원프랑스: 장 루이 콩드루
독일: 하인리히 슈네
미국: 클라렌스 클런데닌
이탈리아: 알도로 마뇨니
고문일본: 이소이 에이타로
중국: 구웨이쥔
활동
조사 기간1932년 4월 ~ 1932년 9월
조사 지역도쿄
난징
상하이
선양
하얼빈
보고서 제출1932년 10월 1일
결과 및 영향
보고서 내용만주국은 일본의 침략으로 성립
만주국은 자결 정부로 인정 불가
만주 지역에 자치 정부 수립 권고
중국 주권 존중
일본의 경제적 이익 존중
국제 연맹의 반응보고서 채택 (1933년 2월 24일)
일본의 반응국제 연맹 탈퇴 (1933년 3월 27일)
영향중일 전쟁의 원인이 됨

2. 조사단 파견 경위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류탸오후 사건을 일으켜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중화민국9월 19일 국제 연맹에 이 사건을 보고하고, 9월 21일 정식으로 제소하여 사실 관계 조사를 요청했다.

같은 해 12월 10일 국제 연맹 이사회는 "국제 연맹 일지 분쟁 조사 위원회"(리튼 조사단) 설치를 결의했고[1], 1932년 1월 14일 위원 임명을 승인했다. 1932년 3월, 중화민국의 제소와 일본의 동의로 국제 연맹은 리튼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했다. 조사단은 3개월에 걸쳐 일본과 만주 등을 조사했다.[2]

류탸오후 부근 만철 폭파 지점을 조사중인 리튼 조사단

2. 1. 리튼 조사단 구성

조사단은 영국의 제2대 리턴 백작 빅터 불워리턴을 단장으로 하여,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미국의 대표 5명으로 구성되었다.[19][3] 각 대표의 상세는 다음과 같다.

국적이름설명
영국제2대 리턴 백작 빅터 불워리턴단장, 전 인도 제국 임시 총독(벵갈 총독)
프랑스앙리 에두아르 클로델|Henri Édouard Claudel프랑스어프랑스 육군 중장
이탈리아루이지 알드로반디 마레스코티외교관
독일하인리히 슈네전 국회의원, 전 독일령 동아프리카 총독
미국프랭크 맥코이미국 육군 소장 (군사)



분쟁 당사국인 일본과 중국은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했다.[19]

국가이름설명
일본요시다 이사부로외교관
중화민국웰링턴 쿠외교관



조사단의 경비는 일본과 중국 양측이 나누어 부담했다.[4]

2. 2. 조사단의 활동

조사단은 1932년 2월 29일 일본을 방문해 아라키 사다오 등 군부 인사들을 만났다. 그러나 일본은 단 다쿠마가 3월 5일에, 이누카이 쓰요시가 5월 15일에 암살당하는 등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와 테러가 만연하여 국제 정세가 제대로 국민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20]

이후 조사단은 중국 상하이, 난징, 베이징(당시 명칭 베이핑)을 방문하여 장제스, 왕징웨이, 장쉐량 등 주요 인사들을 만났다. 4월 20일에는 만주로 들어가 푸이를 만났다.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하던 마잔산을 만나려 했으나 일본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0]

푸이


조사는 1932년 6월에 완료되었으며, 베이징에서 보고서 집필을 시작해 10월 2일에 공개되었다.

3. 리튼 보고서의 내용

1932년 10월 2일, 리튼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공식 명칭은 《중일 분쟁 조사단 보고서》(Report of the Commission of Enquiry into the Sino-Japanese)이다. 보고서는 서론과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서론: 조사단 설치 과정을 설명한다.
  • 1장\~8장: 만주사변 이전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배경과 사건의 전개 과정, 그리고 만주국의 성립과 실태를 다룬다.
  • 9장: 만주 문제의 특수성을 지적하며, 단순한 무력 침략으로 규정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또한, 사건 이전 상태로의 복귀(중국의 주장)나 만주국 유지(일본의 주장) 모두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 10장: 분쟁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제안을 제시한다. 중일 양국이 자문 회의를 소집하여 협정을 체결하고, 만주에 자치 정부를 수립하되 외국인 고문을 두며, 그 대부분은 일본인으로 할 것을 제안한다.


9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리튼 보고서 9장의 주요 내용
내용설명
중일 양국의 이익양국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소비에트 연방의 이익 존중당시 만주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소련의 이익도 고려해야 한다.
기존 조약과의 조화기존의 여러 국제 조약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만주에 대한 일본의 권리 인정일본이 만주에 가지고 있던 특수한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새로운 조약 관계 설정중일 양국 간 새로운 조약 관계를 맺어야 한다.
미래 분쟁 해결 시설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효과적인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
만주 자치 시행중국의 주권과 행정력을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만주에 자치를 허용해야 한다.
내부 질서 및 외부 침략 대비내부 질서는 효율적인 지방 헌병대가 맡고, 외부 침략은 군대 철수와 불가침 조약으로 대비한다.
경제 제휴 촉진중일 간 경제 협력을 증진해야 한다.
국제적 협력중국의 발전을 위해 국제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3. 1. 보고서의 주요 내용

보고서는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장: 청나라 멸망 이후 중화민국 성립, 군벌 간 내전, 국민당과 공산당의 등장 등 중국 근대사를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 2장: 만주국 성립 과정과 장쭤린, 장쉐량 정권의 동향, 중일 간 분쟁 등을 다룬다.
  • 3장: 만주에 대한 일본의 특수 권익을 설명하고, 만보산 사건과 조선인 배척 사건[21] 등 중일 간 갈등 요인을 분석한다.
  • 4장: 류탸오후 사건 당일과 이후 상황을 설명하며, 일본군의 행동은 정당방위로 인정하기 어려우나, 일본군 장교들은 자위를 위한 행동으로 오인했을 수 있다고 서술했다(오상 방위).
  • 5장: 상하이 사변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한다.
  • 6장: 만주국이 일본의 조직적인 개입으로 건설되었으며, 현지 중국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 7장: 일본의 경제적 이익과 중국의 보이콧에 대해 서술한다.
  • 8장: 만주의 경제적 이익을 다루며, 중일 양국의 관계 개선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 9장: 만주 문제의 특수성을 지적하며, 원상회복이나 만주국 유지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해결 원칙 및 조건은 다음과 같다.
  • 중일 양국에 이익이 되어야 함.
  • 소비에트 연방의 이익 존중.
  • 현재의 여러 조약을 벗어나지 않는 조화로운 해결.
  • 만주에 대한 일본의 권리 승인.
  • 중일 간의 새로운 조약 관계 설정.
  • 미래의 분쟁 해결에 도움이 될 효과적인 시설 마련.
  • 중국의 주권, 행정력과 조화로운 범위의 만주 자치 시행.
  • 내부 질서 유지는 능률적인 지방 헌병대가 맡고, 외부 침략 대비는 모든 군대의 철수와 불침략 조약으로 대응.
  • 중일간 경제 제휴 촉진.
  • 중국의 개조를 위해 국제적 협력.
  • 10장: 중일 양국이 자문회의를 통해 협정을 체결하고, 만주 자치정부에 외국인 고문을 두되 대부분 일본인으로 구성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3. 2. 보고서의 결론

보고서는 류탸오후 사건 이후 관동군의 활동을 자위 행위로 보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만주국은 현지 주민의 자발적 의지로 독립한 것이 아니라, 관동군에 의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동시에 만주에 대한 일본의 조약상 권익, 거주권, 상권은 존중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국제 사회와 일본이 중국 정부의 근대화에 공헌할 수 있고 거류민의 안전을 위한 치외법권은 그 성과에 따라 재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쪽이 무력을, 다른 쪽이 불매 운동이라는 경제적 무력이나 도발을 행사하는 한 평화는 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1]

3. 3. 분쟁 해결을 위한 제언


  • 류탸오후 사건 이전으로 복귀(중국 측 주장)와 만주국 승인(일본 측 주장)은 모두 문제 해결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 만주에 중국 주권 하의 자치 정부를 수립하고, 국제연맹이 파견하는 외국인 고문의 지도를 받도록 제안했다.
  • 만주를 비무장지대로 하고, 국제연맹의 조언을 받는 특별경찰기구가 치안 유지를 담당하도록 했다.
  • 중일 양국 간 불가침조약, 통상조약 체결을 제안하고, 소련의 참여를 고려한 별도 조약 체결도 제안했다.

4. 각국의 반응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국제연맹 회원국들은 리튼 보고서에 대해 '화해의 기초를 구축했다'며 큰 기대를 가졌다.[23] 그러나 일본은 리튼 보고서가 일본의 특수 권익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서 제출 전에 만주국을 승인하는 등 반발했다. 일본 외무성의 고문이었던 영국인 토마스 바티는 이 보고서에 대한 일본 측 반론을 작성했다.

1933년 2월 24일 국제연맹 총회에서는 리튼 보고서를 기초로 한 '중일 분쟁에 관한 총회 보고서' 채택이 논의되었다. 일본 전권대사 마쓰오카 요스케와 중국 전권대사 웰링턴 쿠는 스위스에서 격렬하게 토론했다.[23] 총회 보고서는 만주 주권이 중국에 있음을 명확히 선언하고, 일본의 군사 행동은 자위권 행사가 아니며, 만주국의 분리 독립은 승인될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관동군은 철도 지구까지 후퇴해야 한다고 명시했다.[24] 일본의 특수권익은 인정되었지만, 9개국 조약 유지를 권고했다.

총회는 찬성 42표, 반대 1표(일본), 기권 1표(시암(현재의 태국)), 불참 1표(칠레)로 의결되었다.[24] 마쓰오카 요스케 전권대사가 이끄는 일본은 이에 불복하여 퇴장했고, 일본 정부는 3월 8일에 국제연맹 탈퇴를 결정, 3월 27일에 국제연맹에 통고했다. 일본 국내 여론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다. '42대 1'은 유행어가 되었고, '저쪽은 죽고 싶고(42対, しにたい) 이쪽은 1등이라네(向こうは死に体でこっちは1番なんだ)'라는 말장난까지 나올 정도였다.

시암(태국)의 기권은 당시 시암 주재 일본 대사였던 야타베 야스키(矢田部保吉)가 시암 외무부 장관에게 압력을 가한 결과였다.[25] 시암은 1932년에 일어난 입헌 혁명 이후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정권이었고, 화교 세력과의 민족 마찰 문제도 안고 있어 중국에 동조하기 어려웠다.[26]

5. 리튼 보고서의 의의와 한계

1933년 2월 24일 국제 연맹 총회에서는 중화민국이 심의, 동의된 '특별 총회 보고서'에 의거해 연맹 규약 16조(경제 제재)를 일본에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군의 열하 공략을 의제로 올려 16조 적용을 함께 요구했으나, 다른 대표들의 침묵과 토의 중단 선언으로 묵살되었다.[27][28] 미국은 스팀슨 선언을 통해 무력으로 획득한 영토는 인정될 수 없다고 밝혔다.

국제 연맹은 특별 총회 보고서를 '공정하고 적절하다'(규약 15조 4)고 평가했지만, 보고서가 일본군의 자위 행위와 만주국 건국의 자발성을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이후 국제 연맹에 가입하고 주변국들과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독일(1938년), 이탈리아(1937년)를 비롯하여 추축국과 그 우호국, 태국 등 일본의 동맹국, 덴마크, 스페인 등의 중립국 20개국이 만주국을 승인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세계 독립국이 60개국이 채 안되던 시점임을 고려하면 이는 상당한 수치였다.

리튼 보고서는 국제 연맹의 결정이 현실 정치에서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리튼 조사단이 활동하는 동안 일본은 오히려 만주 지배력을 강화했으며, 조사단의 활동이 일본의 국제 연맹 탈퇴를 유도했다는 논란도 제기된다.

5. 1. 리튼 보고서의 의의

리튼 보고서는 1932년 10월 1일 국제 연맹에 제출되었고, 제네바 시간으로 오후 1시에 세계에 공표되었다. 공식 언어인 영어와 프랑스어로 작성되었고, 일본 외무성은 9월 30일 오후 7시부터 번역을 시작했다. 일본어 번역은 태평양문제조사회의 일본지부가 진행했으며 10월 3일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23]

만주국은 독립국가라는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조사단이 움직이는 곳마다 대중을 조직해서 설명회나 운동회 등을 벌였지만, 이러한 선전 의도에도 불구하고 리튼 보고서에서는 만주국이 자발적으로 성립된 국가가 아님을 명시하였다.[22]

1932년 리튼이 누나에게 보낸 편지는 누나의 남편이었던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에게 전해졌는데, 여기에는 리튼이 만주국을 기만이라고 단정적으로 밝혀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튼은 보고서를 통해 일본이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도록 최대한 일본을 배려하는 형태의 해석을 가미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일본 내 여론은 리튼이 일본보다는 중국을 편들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 측에 불리한 내용이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이익을 심대하게 침해한다고 간주했다. 결국 일본은 국제 연맹 탈퇴라는 강수를 두게 된다.[23]

5. 2. 리튼 보고서의 한계

리튼 보고서는 만주국이 자발적으로 성립된 국가가 아님을 명시하였다.[22] 리튼은 1932년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주국을 기만이라고 단정적으로 밝혔지만, 보고서에서는 일본이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도록 최대한 일본을 배려하는 해석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일본 내 여론은 리튼이 일본보다는 중국을 편들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중국 측에 불리한 내용이 많았음에도 일본의 이익을 심대하게 침해한다고 간주했다. 결국 일본은 국제 연맹 탈퇴라는 강수를 두게 된다.[23]

참조

[1] 서적 2002
[2] 서적 日本外交年表竝主要文書 外務省編
[3] 서적 2009
[4] 서적 2007
[5] 뉴스 調査団が初会合、委員長にリットン卿 東京朝日新聞 1932-01-23
[6] 서적 2016
[7] 서적 2006
[8] 서적 2011
[9] 문서 紛爭解決ニ至ラサルトキハ聯盟理事會ハ全會一致又ハ過半數ノ表決ニ基キ當該紛爭ノ事實ヲ述へ公正且適當ト認ムル勸告ヲ載セタル報告書ヲ作成シ之ヲ公表スヘシ
[10] 문서 聯盟理事會ノ報告書カ【紛爭當事國ノ代表者ヲ除キ】他ノ聯盟理事會員全部ノ同意ヲ得タルモノナルトキハ聯盟國ハ該報告書ノ勸告ニ應スル紛爭當事國ニ對シ戰爭ニ訴ヘサルヘキコトヲ約ス(報告書が当事国を除く理事会全部の同意を得たときは連盟国はその勧告に応じた紛争当事国に対しては戦争に訴えない)
[11] 서적 1982
[12] 간행물 矢田部公使ノ対暹工作 https://www.jacar.ar[...] 外務省外交史料館 1942-06-15
[13] 서적 2008
[14] 문서 連盟に参加していない米国はリットン調査団が組織される以前の1931年11月11日の段階で駐米英国大使により対日制裁に反対の立場であることが確認されていた。
[15] 서적 2011
[16] 서적 2004
[17] 서적 2004
[18] 서적 2007
[19] 웹사이트 Five Wise Westerners http://www.time.com/[...] Time Magazine 1932-10-10
[20] 문서 이것은 이후 리튼 보고서가 일본에서 부정당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21] 웹사이트 リットン報告書 http://dl.ndl.go.jp/[...] 国際聯盟支那調査委員会
[22] 논문 리튼조사단의 來滿과 만주국의 대외선전 2014
[23] 서적 왜 전쟁까지 사계절
[24] 서적 2011
[25] 논문 タイ国ピブーン政権と太平洋戦争 http://ci.nii.ac.jp/[...] 1982-03
[26] 논문 アジア・太平洋戦争開戦に至る日タイ関係 http://ci.nii.ac.jp/[...] 2008-03-31
[27] 문서 連盟に参加していない米国はリットン調査団が組織される以前の1931年11月11日の段階で駐米英国大使により対日制裁に反対の立場であることが確認されていた。
[28] 서적 20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