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탸오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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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탸오후 사건은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 관동군이 만주 류탸오후 부근의 남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만주 사변으로 이어졌으며, 일본 군부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채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사건 초기에는 류탸오거우 사건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류탸오후 사건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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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탸오후 사건 | |
---|---|
사건 개요 | |
명칭 | 류탸오후 사건 |
다른 명칭 | 봉천 사건 봉천 사변 중국 동북 전쟁 9.18 사변 (중국) |
영어 명칭 | Liutiaogou Incident |
중국어 간체 | 柳条湖事件 |
위치 | 랴오닝성 선양시 |
날짜 | 1931년 9월 18일 |
시간 | 오후 10시 20분경 |
요약 | 관동군에 의한 남만주 철도 선로 폭파 |
원인 | 불명 (관동군 주장으로는 중국군에 의한 폭파) |
수단 | 폭파 |
전투 개요 | |
전투 명칭 | 류탸오후 사건 (봉천 사건, 봉천 사변) |
분쟁 | 만주사변 |
기간 | 1931년 9월 18일 - 9월 19일 |
장소 | 만주 |
결과 | 관동군이 만주 남부를 점령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일본군 지휘관 | [[File:War 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vg|22px|border]] 혼조 시게루 [[File:War 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vg|22px|border]] 이시하라 간지 [[File:War 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vg|22px|border]] 이타가키 세이시로 |
중국군 지휘관 | [[File:Republic of China Army Flag.svg|22px|border]] 장쉐량 [[File:Republic of China Army Flag.svg|22px|border]] 왕톄한 [[File:Republic of China Army Flag.svg|22px|border]] 펑잔하이 |
병력 규모 | |
일본군 | 30,000 ~ 66,000명 |
중국군 | 160,000명 |
피해 규모 | |
일본군 | 사망 및 부상: 24명 |
중국군 | 사망 및 부상: 340명 이상 |
사건 관련 정보 | |
가해자 | 관동군 |
동기 | 불명 (만주 점령을 위한 자작극이라는 설이 유력) |
관련 | 만주사변의 직접적인 원인 |
이미지 | |
![]() |
2. 사건의 배경
1931년 만보산 사건과 나카무라 대위 사건 등으로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만몽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면서, 만주에서의 일본과 중국 간의 대립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다.[2] 당시 일본에서는 러일 전쟁을 통해 얻은 만주에서의 권익을 '생명선'으로 여겼고, 제2차 와카츠키 내각의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의 국제 협조 외교(시데하라 외교)는 "유약 외교"라는 비판을 받으며 만몽 문제 해결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2]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이시와라 간지는 류탸오후 사건을 계획하고 입안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일석회 회원이었다.[20] 이시와라는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영국과의 전쟁에서 보인 것처럼 점령지에서 징세, 물자, 병기를 통해 군대가 자급자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21] 1929년 7월, 관동군 참모 연습 여행에서 이시와라는 "만몽 문제 해결은 일본이 동 지방을 영유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하게 달성된다"며, "대미 전쟁의 각오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2][20]
이시와라는 장래 "서양의 대표인 미국과 동양의 선수인 일본 간의 쟁패전이 세계 최종 전쟁으로 일어난다"고 보았고, 동양 대표 국가로서 자격을 얻기 위해 국방 거점이자 불황 타개에 중요한 만몽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이 만몽을 영유하는 것은 "정의"이며, 일본은 이를 실행할 "실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만주에 중국 본부와 분리된 독립 정권을 만드는 것은 구개국 조약이나 불전조약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21][23]
이시와라는 이러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1931년 관동군에 조사반을 설치하고 사변 준비를 서둘렀다. 세계 공황의 여파는 이 계획 실행의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20] 1931년 5월 31일, 이타가키와 이시와라 등은 6월 8일 "봉천 모략에 주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20] 이들은 1931년 6월 초 류탸오후에서 모략으로 군사 행동을 개시하기 위한 계획과 준비를 본격화했으며, 9월 하순 실행을 약속했다.[20]
2. 1. 중일 관계의 긴장 고조
1928년 장쭤린 폭살 사건 이후, 그의 아들 장쉐량은 반일 노선으로 전환했다. 장쉐량 정권은 난징의 국민정부와 합류했고, 만주에서는 반일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17] 1931년 7월에는 만보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창춘 북쪽의 만보산 지역에서 농업 용수를 둘러싸고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발생한 충돌이었다. 중국인 농민은 중국 경찰, 조선인 농민은 일본 영사관의 지원을 받았으나, 중국인 농민이 수로를 파괴하면서 일본 경찰과 충돌하는 상황으로 확대되었다.[2][17]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지만, 이 사건은 한반도 내에서 중국인에 대한 보복 공격(조선 화교 학살 사건)으로 이어져 100명 이상의 중국인이 살해되었고, 이는 중일 간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2][8]
만보산 사건 한 달 전에는 나카무라 대위 사건이 발생했다. 참모 본부의 명령으로 흥안령 방면의 정보를 수집하던 나카무라 신타로 대위가 타오난과 소룬 사이에서 중국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2][8] 앙앙시에서 여관을 경영하던 일본인 이스기 엔타로도 함께 살해되었다. 관동군은 이 사실을 파악하고 외교 교섭을 시도했지만, 중국 측은 신분 위장 정찰 행위를 스파이 활동으로 간주하여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4] 일본에서는 나카무라 대위의 첩보 활동 사실이 은폐된 채 보도되어 여론이 격앙되었고, 중국 측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며 강경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2][17][18]
이 두 사건은 일본 국민들에게 "만몽의 위기"를 강하게 인식시켰고, 만주에서의 일본과 중국 간의 대립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다.[2] 당시 일본에서는 러일 전쟁을 통해 얻은 만주에서의 권익을 '생명선'으로 여기는 여론이 강했고, 제2차 와카츠키 내각의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의 국제 협조 외교(시데하라 외교)는 "유약 외교"라는 비판을 받으며, 만몽 문제 해결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2]
2. 2. 이시와라 간지의 구상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이시와라 간지는 류탸오후 사건을 계획하고 입안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일석회 회원이었다.[20]1928년 1월 19일, 육군대학교 교관이었던 이시와라는 목요회 모임에서 "우리 국방 방침"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며, "전 중국을 근거지로 하여 유감없이 이를 이용하면, 20년이든 30년이든" 전쟁을 계속할 수 있다는 구상을 밝혔다.[21]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영국과의 전쟁에서 보인 것처럼, 점령지의 징세, 물자, 병기를 통해 군대가 자급자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1]
1928년 10월, 이시와라는 관동군 참모 작전 주임으로 부임했고,[2] 이듬해 5월 이타가키가 부임하면서 구체적인 행동을 시작했다.
1929년 7월, 관동군은 북만 참모 연습 여행을 실시했다.[20] 이 자리에서 이시와라는 "만몽 문제 해결은 일본이 동 지방을 영유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하게 달성된다"며, "대미 전쟁의 각오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2][20]
이시와라는 장래 "서양의 대표인 미국과 동양의 선수인 일본 간의 쟁패전이 세계 최종 전쟁으로 일어난다"고 보았다.[2] 그는 동양 대표 국가로서 자격을 얻기 위해 국방 거점이자 불황 타개에 중요한 만몽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2] 또한, "만몽 문제 해결안"에서 "만몽의 합리적인 개발로 일본의 경기는 회복되고 실업자도 구제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2]
이시와라는 소련이 군사적으로 약하고 중국과 소련 관계가 최악일 때를 노려 장성선 이북 땅을 점령하고 지배하려 했다.[23] 그는 일본이 만몽을 영유하는 것은 "정의"이며, 일본은 이를 실행할 "실력"이 있다고 주장했다.[22] 만주에 중국 본부와 분리된 독립 정권을 만드는 것은 구개국 조약이나 불전조약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21][23]
이시와라는 이러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1931년 관동군에 조사반을 설치하고 사변 준비를 서둘렀다. 같은 해 5월, "만몽 문제 사견"을 작성, 모략에 의한 만주 영유 계획 실행을 결정했다.[2] 세계 공황 파급은 이 계획 실행의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20] 1931년 5월 31일, 이타가키와 이시와라 등은 6월 8일 "봉천 모략에 주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20]
이들은 1931년 6월 초 류탸오후에서 모략으로 군사 행동을 개시하기 위한 계획과 준비를 본격화했으며, 9월 하순 결행을 약속했다.[20]
3. 음모 획책
류탸오후 사건은 일본군이 만주를 장악하고 중국 본토를 침공하려는 계획 하에 꾸민 음모였다. 이 사건의 총책은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 이시와라 간지,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였다. 이들은 내각에도 비밀로 하고 만주 침략을 위한 작전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이시와라와 이타가키는 거사 장소로 류탸오후를 선정하고, 펑톈 특무기관의 하나다니 다다시 소좌, 실행부대의 이마다 신타로 대위, 펑톈헌병대장 미다니 기요시 중좌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현장에서는 폭파 전문가인 가와모토 스에모리 중위가 거사를 담당했다.
1931년 9월 18일 저녁, 도이하라 겐지를 비롯한 관동군 고급 참모들이 혼조 시게루 대장의 주도하에 긴급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이타가키, 도이하라, 이시와라 등은 "동북 점령 후 식민 통치 실행 방법"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당초 9월 하순(27일 또는 28일)에 모략을 실행할 예정이었으나, 도쿄의 외무성에 관동군의 계획이 알려지면서, 계획 중단을 우려하여 9월 18일 밤으로 실행 일시를 앞당겼다.[20] 이는 군 수뇌부의 의향을 무시한 하극상이었다.[2]
9월 18일, 다테카와 요시쓰구 소장이 만주에서 모략 사건을 막기 위해 펑톈에 들어갔지만, 이타가키는 요정에서 다테카와를 만취시켰다.[4] 도이하라 겐지는 조선을 경유하여 펑톈으로 돌아오는 중이었고, 하나타니 다다시 소좌가 특무기관장 대리 임무를 맡았다. 이타가키는 사건 당일 밤, 도이하라 부재의 펑톈 특무기관에 진을 쳤다.[4]
사건 당일 밤, 모리시마 모리토 영사가 특무기관으로 급행하여 외교적 해결을 주장했지만, 이타가키는 "이미 통수권의 발동을 보았는데, 총영사관이 통수권에 간섭하는가"라고 위협했다.[24] 하나타니 다다시 특무기관 보좌관도 발도하여 모리시마 영사를 위협했다.[24]
4. 사건 경과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경, 일본 관동군 독립수비대 제2대대 제3중대가 류탸오후 부근 남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했다.[3] 일본군은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발표하고, 중국군 병사의 복장을 한 시신을 현장에 남겨 증거를 조작했다.[9]
폭파 후, 일본군은 즉각 동북군 사령부를 공격하고, 펑톈을 점령했다. 장쉐량은 일본군의 확전 의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부하들에게 무대응 철수를 명령했다.[3] 이 때문에 동북군 북부 사령부는 1만 명이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500여 명의 일본군에게 격퇴되었다.
폭파 자체는 소규모였으며, 레일의 한쪽만 약 80센티미터 파손, 침목의 파손도 2곳에 그쳤다.[3][10] 폭파 직후, 선양 오후 10시 30분 출발, 창춘 발 다롄 행 급행 열차가 현장을 아무 일 없이 통과했다.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베이다잉의 중국군은 기습을 당해 약간 반격했지만, 장쉐량의 지시에 따라 저항하지 않고 철수했다.[3] 일본군은 9월 19일 오전 6시 30분에 베이다잉을 완전히 제압했다.[10]
봉천성 공격에는 제2사단 제29연대가 투입되었고, 일본에서 은밀하게 운반된 24센티 포병(유탄포) 2문도 사용되었지만, 중국군은 반격하지 않고 성 밖으로 퇴거했다.[3] 일본군은 오전 4시 30분까지 봉천성 서쪽 및 북쪽을 점령했다.[10]
9월 21일, 하야시 센주로 조선군 사령관은 독단으로 혼성 제39여단에 월경을 명령, 같은 날 오후 1시 20분, 부대는 압록강을 넘어 관동군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사건 당시, 중국 측은 봉천 일본 총영사관에 "무저항주의"를 취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외교적 해결을 요청했지만,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공격을 강행했다.[24]
5. 일본 정부와 군부의 대응
사건 발생 당일인 9월 18일 오후 11시 15분, 봉천 일본 총영사관에 중국 측 교섭처 일본과 과장으로부터 일본군이 북대영을 포위하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중국 측은 장쉐량의 지시에 따라 "무저항주의"를 취하며, 일본군이 공격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24]
하야시 규지로 봉천 총영사는 이타가키 세이시로 고급 참모에게 외교적 해결을 권고했지만, 이타가키는 중국 측의 공격을 주장하며 철저하게 쳐부숴야 한다는 군의 방침을 내세웠다. 하야시는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에게 긴급 극비 전보를 보내 관동군의 행동이 자위적 반격을 넘어선 것으로 보이며, 정부가 조속히 관동군을 제지해야 한다고 진언했다.[24]
육군 중앙에는 9월 19일 오전 1시 7분에 사건 발생 첫 보고가 전달되었다.[25] 오전 7시부터 육군성과 참모본부 수뇌들이 모여 대책을 협의했는데, 코이소 구니아키 군무국장은 "관동군의 이번 행동은 전부 타당하다"고 발언했고, 다른 참석자들도 이에 동조했다.[25]
제2차 와카츠키 내각은 9월 19일 오전 10시에 긴급 각의를 소집했다. 와카츠키 레이지로 수상은 미나미 지로 육군 대신에게 관동군의 행동이 자위를 위한 것인지 확인했고, 미나미는 "물론 그렇다"고 답했다.[25][26] 각의에서는 '사변 불확대' 방침을 결정했다.[25][26]
9월 19일 오후, 와카츠키 수상은 쇼와 천황에게 내각의 불확대 방침을 주상했다.[27] 육군 육군 삼장관 회의에서는 각의 결정이 전달되었고, 카나야 노리조 참모총장은 혼조 시게루 관동군 사령관에게 사변 불확대에 유의하도록 훈전했다.[27] 그러나 이마무라 히토시 제2과장은 구태 복귀에 반대하며 현상 유지를 주장했고, 참모본부 수뇌 회의에서도 같은 방침이 확인되었다.[25][28]
9월 20일, 육군 수뇌 회담에서 니노미야 하루시게 참모 차장, 스기야마 겐 육군 차관, 아라키 사다오 본부장은 류탸오후 사건을 만몽 문제 해결의 실마리로 삼겠다는 강경 방침을 확인했다.[16][25]
9월 21일 각의에서는 관동군의 군정 실시 금지 등에 합의했지만, 향후 태세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29] 같은 날, 관동군의 지린 파병이 문제가 되었고, 각료 전원이 반대했지만, 미나미 육상이 파병의 필요성을 호소하여 결국 승인되었다.[29]
같은 날 오후, 조선군이 임센주로 사령관의 독단 명령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로 진격했다. 이는 육군형법상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군령 위반이었다.[28] 와카츠키 수상과 이노우에 준노스케 장관은 크게 분개했지만, 결국 내각은 조선군의 출동을 사후 승인했다.[16] 9월 22일, 와카츠키는 "자신의 힘으로 군부를 억누를 수 없다"고 말했다.[16][31]
5. 1. 일본 정부의 혼란과 무력함
사건 발생 직후, 일본 정부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9월 18일 오후 11시 15분, 봉천 일본 총영사관에 중국 측으로부터 일본군이 북대영을 포위하고 있다는 전화가 걸려왔지만, 중국 측은 "무저항주의"를 취하고 있었다.[24] 이는 장쉐량이 일본군에 대해 절대 무저항주의를 지시했기 때문이었다.[24]하야시 규지로 봉천 총영사는 이타가키 세이시로 고급 참모에게 외교적 해결을 권고했지만, 이타가키는 "통수권에 입을 대는가"라며 군도를 뽑아 협박했다고 한다.[24] 하야시 총영사는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에게 긴급 극비 전보를 보내 관동군의 행동이 심상치 않음을 알리고, 정부가 조속히 관동군을 제지해야 한다고 진언했다.[24]
제2차 와카츠키 내각은 9월 19일 긴급 각의를 소집하여 '사변 불확대' 방침을 결정했지만,[25][26] 군부의 독단적인 행동을 막을 힘이 없었다. 쇼와 천황에게 주상하여 내각의 불확대 방침을 알렸지만, 군의 독단적인 행동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27]

9월 21일, 관동군은 지린 파병을 시작했고, 각의에서는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 각료 전원이 파병에 반대했지만, 미나미 지로 육군 대신은 현지 상황을 설명하며 파병의 필요성을 호소했고, 결국 지린 이외에는 파병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승인되었다.[29]
같은 날 오후, 조선 주둔 일본군이 임센주로 사령관의 독단적인 명령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로 진격했다.[29] 이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군령 위반이었지만,[28] 와카츠키 내각은 이를 사후 승인하며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16] 쇼와 천황은 정부의 불확대 방침을 지지했지만, 와카츠키는 "자신의 힘으로 군부를 억누를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16][31]
5. 2. 일본 군부의 독주
관동군은 일본 정부의 불확대 방침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군사 행동을 확대했다. 9월 18일 사건 발생 직후, 하야시 규지로 봉천 총영사는 이타가키 세이시로 고급 참모에게 중국 측의 무저항 의사를 전달하고 외교적 해결을 권고했지만, 이타가키는 이를 거부하고 군사 행동을 강행했다.[24] 심지어 이타가키는 간언하는 총영사관 직원을 "통수권에 입을 대는가"라며 군도로 협박하기까지 했다.[24]육군 중앙은 관동군의 행동을 묵인했다. 9월 19일 육군성 회의에서 코이소 구니아키 군무국장은 "관동군의 이번 행동은 전부 타당하다"고 발언했고, 다른 참석자들도 이에 동조했다.[25] 오히려 병력 증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마무라 히토시 제2과장이 증원 계획을 입안했다.[25]
하야시 센주로 조선군 사령관은 독단으로 군대를 월경시켜 관동군에 합류시켰다. 9월 21일 조선군은 천황의 재가 없이 국경을 넘어 만주로 진격했다. 이는 육군형법상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군령 위반이었지만,[28] 제2차 와카츠키 내각은 이를 사후 승인했다.[16] 와카츠키 레이지로 수상은 "이런 정세가 되니 자신의 힘으로 군부를 억누를 수 없다"고 토로했다.[16][31]
6. 사건의 영향
류탸오후 사건은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군국주의가 강화되었다. 일본 언론은 9월 19일자 호외와 라디오 '임시 뉴스'를 통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중국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켰다.[32] 일반 국민들은 관동군의 행동을 열광적으로 지지했고,[24] 시데하라 외교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응징'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은 일본의 군사 행동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이시바시 탄잔의 『동양경제신보』는 중국의 민족주의와 통일 국가 건설 요구를 무시할 수 없으며, 무력으로 이를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34]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장제스의 주도 하에 "안으로 다스리고 밖으로 물리친다"는 방침에 따라 일본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9월 21일 만주 문제를 국제 연맹에 제소했다.[16] 그러나 국제 연맹은 초기에는 일본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고, 소비에트 연방도 불간섭 방침을 취했다.[2]
만주에서의 사변 확대는 중국 민중의 항일 감정을 크게 자극했다. 상하이와 베이핑 등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항일 시위와 파업이 일어났고, 일본 상품 보이콧 운동이 확산되었다.[38][39]
1932년 3월, 일본은 아이신 교로 푸이를 내세워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건국했다.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은 만주국 승인에 소극적이었으나, 5·15 사건으로 총리가 암살된 후 사이토 마코토 내각은 만주국을 승인했다.
국제 연맹은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여[40] 일본의 군사 행동을 자위로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지만,[41]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는 길을 선택했다.
6. 1. 만주사변 발발
1931년 9월 18일 밤, 류탸오후 사건은 일본의 전면적인 만주 침략, 즉 만주사변으로 이어졌다.[3] 관동군은 독단적으로 작전을 실행하여 만주 각지를 점령해 나갔다.[3] 당시 장제스는 일본과의 대립을 피하고자 장쉐량에게 부저항 철수를 명령하여, 동북군은 만주를 일본군에게 내주게 되었다.[3]일본군은 1931년 11월부터 이듬해인 1932년 2월까지 치치하얼, 진저우, 하얼빈 등 만주 각지를 점령했다. 1932년 3월, 일본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아이신 교로 푸이를 집정으로 내세워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했다.[40]

장제스는 일본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이 문제를 국제 연맹에 제소했지만, 당시 제국주의 열강은 중국의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하여 일본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2] 소비에트 연방 또한 이 사건에 대해 불간섭 방침을 취했다.[2] 결국 국제사회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6. 2. 국제적 고립과 한국에 대한 영향
국제 연맹은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여[40] 일본의 군사 행동을 자위로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41] 이는 일본의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만주사변은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만주 지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들이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고, 일부는 중국 본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38] 그러나 만주사변은 동시에 한국인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6. 2. 1.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의 확대
류탸오후 사건은 일본이 만주 침략을 본격화한 사건으로,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1년 9월 18일 밤, 관동군은 선양시 북쪽 류탸오후 부근 남만주철도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3] 이는 거짓 깃발 작전으로, 실제로는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와 이시와라 간지 중좌 등이 주도한 모략이었다.[3]
폭파 자체는 소규모였지만,[3] 관동군은 이를 빌미로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장쉐량은 충돌을 피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3] 중국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베이다잉과 봉천성에서 철수했다.[3]
혼조 시게루 관동군 사령관은 당초 소극적이었으나, 이시하라 등 강경파에 밀려 본격적인 군사 행동을 결의했다.[15] 9월 19일, 관동군은 만주 남부 주요 도시 대부분을 점령했고,[15] 9월 21일에는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의 독단으로 압록강을 넘어온 부대가 관동군 지휘하에 들어갔다.
이후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1932년 2월까지 만주 각지를 점령했고, 1932년 3월에는 아이신 교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건국했다.
국제 연맹은 리튼 조사단을 파견하여[40] 일본의 군사 행동을 자위로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41]
6. 2. 2. 한국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만주사변은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만주 지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들이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고, 일부는 중국 본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했다.[38] 그러나 만주사변은 동시에 한국인들의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만주에서의 사변 확대는 중국 민중의 격렬한 항일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곳곳에서 "항일 구국"을 외쳤다.[38] 상하이에서는 9월 24일 10만 명의 학생과 3만 5,000명의 항만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고, 26일에는 20만 명의 시민이 참가한 항일 구국 대회가 열려 대일 경제 단행이 결의되었다.[39] 베이핑에서도 9월 28일 2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항일 구국 대회를 열고 정부에 대일 참전을 요구했으며, 시민들에 의한 항일 의용군 편성이 결의되었다.[39] 일본 상품 보이콧 운동도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일본의 대중국 수출이 크게 감소했다.[38][39]
7. 사건 명칭 논란
사건 발생 초기에는 '류탸오거우'(柳條溝)로 알려졌다.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봉천 총영사관의 모리시마 영사 및 여러 언론에 사건 발생지를 '류탸오거우'라고 전했기 때문이다.[4] 야마다 가쓰요시(도호쿠 대학 명예 교수)는 이타가키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전한 것으로 추정한다.[4] 만철의 기록에서도 9월 19일부터 '류탸오후'가 '류탸오거우'로 정정되었다.[4] 9월 24일에는 제2대대장 시마모토 중좌가 국내외 언론에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타가키의 발표와 어긋나지 않도록 자신의 수비 범위 지명을 '류탸오거우'라는 허위 형태로 제시해야 했다.[4]
하지만, 본래 지명은 '류탸오후'(柳條湖)였고 파견대의 존재도 있었기 때문에, 관동군 내나 육군부 내에서는 바로 '류탸오후'로 정정되었다.[4] 1932년 만주국 건국 후에는 '오족'에게도 친근감이 있는 '류탸오후'로 서서히 고쳐졌고, 1935년 참모본부 편찬 『만주사변사』에서도 '류탸오후'로 표기되었다.[4] 그러나, 그 후에도 군부에서는 '류탸오거우' 표기가 꽤 보였다. 만주국에서는 1936년 이후 신문에서도 '류탸오후'로 수정했지만, 일본 국내 언론의 '류탸오후'로의 수정은 1940년 이후가 되었다.[4] 결국 패전으로 인해 이러한 수정 사실 자체가 잊혀졌고,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등에서는 발생 단계의 '류탸오거우 사건'이 사용되거나, '봉천 사건', '봉천 사변'이라는 명칭도 정식 명칭처럼 사용되는 등, '류탸오후'라는 지명은 종종 잊혀졌다.[4]
무사시 대학 교수 시마다 도시히코는 1967년 기본 사료 발굴에 따라 발생지의 본래 지명이 '류탸오후'임을 재발견, 1970년 다시 그 사실을 지적하며, '''류탸오후 사건'''(柳条湖事件)이라는 명칭을 제창했다.
하지만, 야마다 가쓰요시는 전후 오랫동안 유물사관에 입각한 학자들의 힘이 강했고, 시마다 등의 연구는 비판받는 흐름에 있어 채택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4] 그 후, 1981년 중국에서 공표된 쉬젠둥·왕웨이위안 논문에 '류탸오후 사건'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 연구를 계기로 '류탸오거우'의 오류가 정정되어 '류탸오후'가 되었다는 견해가 유포되었다.[4] 야마다 가쓰요시는 쉬젠둥·왕웨이위안을 비롯한 중국인 연구자들도 시마다의 연구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흔적이 있음을 지적하며 문제시하고 있다.[42] 쉬젠둥·왕웨이위안 등은, 아사히 신문 봉천 통신국장 다케우치 분빈이 정보 제공자로부터 듣고 즉시 친 전보에 '류탸오거우'라고 적혀 있고, '거우'와 '후'의 발음 유사성에서 잘못된 것이며, 이것이 널리 퍼진 것으로 보고 있다.[4]
야마다는 시마다의 연구가 선행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사건 직후의 경위를 고려하면 '류탸오거우 사건'도 결코 단순한 '오류'는 아니었다(당초 사건명은 역시 '류탸오거우 사건'이었다)고 하여, '''류탸오후(거우) 사건'''(柳条湖(溝)事件)의 표기를 제창하고 있다.[4]
오늘날에는 본래의 발생 지명을 딴 '류탸오후 사건'이 정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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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츠키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 군대"라는 제목으로 고후안 회고록에 그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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