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카낭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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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라카낭의 비극은 1950년 FIFA 월드컵 결승 리그 최종전에서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2-1로 패배한 사건을 말한다. 브라질은 이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우승할 수 있었으나, 압도적인 우승 분위기 속에서 역전패를 당하며 충격에 휩싸였다. 이 패배는 브라질 전역에 슬픔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유니폼 색상 변경, 선수들에 대한 비난, "50년의 유령"이라는 공포심 조성 등 브라질 축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독일에게 대패한 사건은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불리며, 마라카낭의 비극과 비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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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카낭의 비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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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정보 | |
![]() | |
대회 | 1950년 FIFA 월드컵 |
경기 이름 | 우루과이 대 브라질 |
다른 이름 | 마라카낭의 비극 (O Maracanaço) |
경기 결과 | |
우루과이 득점 | 2 |
브라질 득점 | 1 |
경기 세부 정보 | |
날짜 | 1950년 7월 16일 |
경기장 | 마라카낭 경기장 |
도시 | 리우데자네이루 |
심판 | 조지 리더 (잉글랜드) |
관중 수 | 173,850명 (공식 기록) |
대회 기록 | |
이전 대회 | 1938 |
다음 대회 | 1954 |
2. 배경
1950년 FIFA 월드컵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열린 FIFA 월드컵으로, 브라질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흥행을 위해 일반적인 토너먼트 방식이 아닌, 조별 리그 이후 다시 리그전 방식의 결선 리그를 치르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2] 1라운드 조별 리그를 통과한 브라질, 우루과이, 스페인, 스웨덴 네 팀이 결선 리그에 진출하여 우승을 다투었다.[2]
개최국 브라질은 결선 리그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스웨덴을 7-1, 스페인을 6-1로 연파했다. 반면 우루과이는 스페인과 2-2로 비기고 스웨덴에는 경기 막판 결승골로 3-2 신승을 거두었다.[2] 이 결과, 마지막 라운드에서 펼쳐지는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경기가 사실상 우승팀을 결정하는 최종전이 되었다. 브라질은 앞선 두 경기에서의 대승으로 승점 4점을 확보하여, 우루과이(승점 3점)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2]
대회 방식상 공식적인 결승전은 없었지만, 이 마지막 경기가 실질적으로 우승팀을 가리는 결정적인 경기였기 때문에 FIFA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 경기를 사실상의 결승전으로 간주한다.[2][3]
2. 1. 독특한 대회 방식
1950년 FIFA 월드컵은 이전 및 이후의 대회들과는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흥행을 위해 한 경기라도 더 치르게 하려는 목적으로, 토너먼트 방식 대신 모든 경기를 리그전 형식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대회는 1라운드 조별 리그와 2라운드 결선 리그로 구성되었다.[2]1라운드 조별 리그에서 각 조 1위를 차지한 팀들이 2라운드 결선 리그에 진출했다. 결선 리그 진출팀은 개최국 브라질, 우루과이, 스페인, 스웨덴이었다. 이 네 팀이 다시 리그전을 벌여 최종 순위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특히 우루과이는 매우 특이한 과정을 거쳐 결선 리그에 진출했다. 원래 우루과이가 속한 4조에는 터키와 스코틀랜드도 편성되었으나 두 팀 모두 참가를 포기했다. FIFA는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프랑스를 초청했지만 프랑스마저 참가를 철회하면서, 결국 우루과이는 볼리비아와의 단 한 경기(8–0 승리)만 치르고 조 1위로 결선 리그에 오르게 되었다.[2]
결선 리그 역시 리그전 방식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공식적인 의미의 결승전은 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마지막 라운드에서 만난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경기가 사실상 우승팀을 결정하는 경기가 되었다. 이 경기는 대회 마지막 경기였고(같은 날 스웨덴 대 스페인 경기도 있었지만 순위 결정에 영향이 없었다), 경기 결과가 우승팀을 직접 결정했기 때문에 FIFA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경기를 사실상의 결승전으로 간주한다.[2][3]
결선 리그 마지막 경기를 앞둔 시점의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브라질은 스웨덴과 스페인을 각각 7–1, 6–1로 대파하며 2승(승점 4점)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우루과이는 스페인과 2–2로 비기고 스웨덴에 3–2로 신승하여 1승 1무(승점 3점)를 기록 중이었다. 따라서 브라질은 우루과이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2. 2. 브라질의 압도적인 전력과 우승 분위기
1950년 FIFA 월드컵은 특이하게 조별 리그 이후 다시 리그전 방식의 결선 라운드를 치러 우승팀을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최종 결선 라운드에는 개최국 브라질을 포함하여 우루과이, 스페인, 스웨덴이 진출했다.[2]브라질은 결선 리그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였다. 첫 경기에서 스웨덴을 7-1로 대파했고, 두 번째 경기에서는 스페인마저 6-1로 완파하며 2연승을 거두었다. 반면 우루과이는 스페인과 2-2로 비긴 뒤, 스웨덴과의 경기에서는 경기 종료 5분 전에 터진 결승골에 힘입어 3-2로 신승을 거두었다.
1950년 FIFA 월드컵은 다른 월드컵과 달리 리그전 방식으로 우승팀을 가렸다. 1라운드 조별 리그를 통과한 4개 팀(브라질, 우루과이, 스페인, 스웨덴)이 다시 결선 리그를 치러 최종 순위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2] 당시 우승 후보로 꼽혔던 터키와 스코틀랜드가 기권하고, 초청받은 프랑스마저 기권하면서 우루과이는 볼리비아와의 단 한 경기(8-0 승리)만으로 결선 리그에 진출하는 행운을 얻었다.
''* 당시 승점은 승리 2점, 무승부 1점, 패배 0점이었다.''
마지막 경기는 사실상 결승전이었으며, 브라질은 승점 4점으로 3점의 우루과이에 앞서 있었기 때문에 비기기만 해도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브라질은 이전 두 경기에서 보여준 막강한 공격력과 더불어, 1949년 남미 선수권 대회에서 우루과이를 5-1로 이겼던 경험까지 더해져 자국에서의 우승을 거의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언론과 정치인들은 경기가 열리기도 전에 브라질의 우승을 기정사실화하며 축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2] 상파울루의 ''Gazeta Esportiva''와 리우데자네이루의 ''O Mundo'' 같은 유력 신문들은 경기 전날 이미 브라질의 우승을 선언하는 기사를 내보냈고,[2] ''O Mundo''는 결승전 당일 아침 판 1면에 "이들이 세계 챔피언이다"라는 제목과 함께 브라질 대표팀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싣기도 했다.[6] 브라질 축구 협회는 선수 개개인의 이름이 새겨진 금메달 22개를 미리 제작했고, 당시 리우 시장이었던 안젤루 멘지스 지 모라이스(Ângelo Mendes de Moraes)는 경기 당일 선수들을 "이미 승리자로 경례한다"는 내용의 연설까지 준비했다.[2] 심지어 우승 축하곡인 "Brasil Os Vencedores" ("브라질 승리자")가 작곡되어 경기 후 연주될 예정이었다.
경기 당일인 1950년 7월 16일, 리우데자네이루 거리는 마치 카니발을 방불케 하는 축제 분위기였고, "브라질은 이겨야 한다!"는 구호가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마라카낭 스타디움에는 공식 집계된 유료 관중만 173,850명이었고, 불법으로 입장한 관중까지 포함하면 최대 22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축구 역사상 단일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이다.[11][5]
하지만 이러한 들뜬 분위기 속에서 상파울루 FC의 구단 임원이자 훗날 브라질의 1958년 및 1962년 월드컵 우승을 이끈 파울루 마차두 드 카르발류는 지나친 낙관론을 경계했다. 그는 선수단 훈련장을 방문했을 때 정치인들의 격려 연설과 언론의 과도한 취재 열기 등 어수선한 분위기를 보고 플라비우 코스타 감독에게 선수들의 집중력 저하를 우려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아들에게 "우리는 질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4]
한편, 브라질의 이러한 압도적인 우승 분위기는 상대 팀인 우루과이 선수들에게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루과이의 주장 오브둘리오 바렐라는 브라질 신문 ''O Mundo''가 자국 팀의 우승을 미리 선언한 기사를 보고 분개하여, 신문들을 여러 부 사서 라커룸 바닥에 깔아놓고 동료들에게 그 위에 침을 뱉고 소변을 보게 하며 모욕감을 투지로 바꾸려 했다고 전해진다.[6] 또한 경기 직전 라커룸에서 후안 로페스 감독이 수비적인 전술을 지시하자, 바렐라는 "후안치토(후안 로페스의 애칭)는 좋은 사람이지만 오늘은 틀렸어. 우리가 수비적으로 나선다면 스페인이나 스웨덴 꼴이 날 뿐이야."라고 반박하며 오히려 공격적으로 맞서 싸울 것을 독려했다. 그는 "Muchachos, los de afuera son de palo. Que comience la función.es"(얘들아, 바깥의 사람들은 신경 쓸 것 없어. 쇼를 시작하자.)라는 유명한 말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았다.[7][8][9]
3. 경기 전 상황
개최국 브라질은 결선 리그에서 스웨덴을 7-1, 스페인을 6-1로 연파하며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였다. 반면 우루과이는 스페인과 2-2로 비기고, 스웨덴에게는 경기 종료 5분 전에 터진 결승골로 3-2 신승을 거두며 어렵게 승점을 쌓았다.[2]
결선 리그 마지막 경기는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맞대결로 펼쳐졌는데, 이 경기가 사실상의 결승전이 되었다. 당시 승점은 승리 2점, 무승부 1점, 패배 0점이었는데, 브라질은 2승으로 승점 4점을 확보했고 우루과이는 1승 1무로 승점 3점을 기록 중이었다. 따라서 브라질은 우루과이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월드컵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반면 우루과이는 반드시 브라질을 이겨야만 우승이 가능했다.[2][3]
브라질의 압도적인 전력과 홈 이점을 바탕으로 브라질 언론과 대중, 심지어 정치인들까지 나서서 경기가 열리기도 전에 브라질의 우승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였다.[2] 상파울루의 ''Gazeta Esportiva''와 리우데자네이루의 ''O Mundo'' 같은 유력 신문들은 경기 전날 이미 브라질의 우승을 선언하는 기사를 내보냈다.[2] 브라질 선수 개개인의 이름이 새겨진 22개의 금메달이 미리 제작되었고, 리우 시장 앙겔루 멘지스 지 모라이스는 경기 당일 선수들을 향해 "이미 승리자로 경례하는 여러분!"이라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2] 우승 기념가 "Brasil Os Vencedores" ("브라질 승리자")까지 작곡되어 결승전 후 연주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이러한 지나친 낙관론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훗날 1958년과 1962년 월드컵 우승을 이끈 파울루 마차두 지 카르발류는 경기 전날 선수단 훈련장을 방문했다가 정치인들의 연설과 수많은 취재진으로 인해 선수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보고 "우리는 질 것이다"라고 예감했다고 한다.[4]
경기 당일인 1950년 7월 16일, 리우데자네이루 거리는 브라질의 우승을 축하하는 분위기로 가득 찼고, 마라카낭 스타디움에는 공식 집계 173,850명, 비공식 추산 최대 220,000명에 달하는 관중이 몰려들었다. 이는 현재까지 깨지지 않은 축구 경기 사상 최다 관중 기록이다.[11][5] 브라질 신문 ''O Mundo''는 아예 경기 당일 아침 "이들이 세계 챔피언이다"라는 제목과 함께 브라질 대표팀 사진을 1면에 실었다. 이를 본 우루과이의 주장 오브둘리오 바렐라는 격분하여 그 신문들을 사서 화장실 바닥에 깔아놓고 동료들과 함께 침을 뱉고 소변을 보며 투지를 불태웠다고 전해진다.[6]
경기를 앞두고 우루과이 라커룸에서 후안 로페스 감독은 수비적인 전략을 주문했지만, 주장이었던 바렐라는 선수들을 모아놓고 "후안치토(후안 로페스 감독의 애칭)는 좋은 사람이지만, 오늘은 틀렸어. 만약 우리가 브라질을 상대로 수비적으로 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스페인이나 스웨덴과 다르지 않을 거야."라며 감독의 지시에 반기를 들었다.[7][8] 그 후 바렐라는 Muchachos, los de afuera son de palo. Que comience la función.es("얘들아, 외부인들은 그저 나무 인형일 뿐이야. 쇼를 시작하자." 또는 "외부인은 경기를 하지 않아. 쇼를 시작하자.")[8][9]라는 유명한 말로 선수들을 독려하며 역경을 헤쳐나가자고 호소했다.
3. 1. 브라질의 경기 기록
1950년 FIFA 월드컵은 리그전 방식으로 우승팀을 가리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예선 조별 리그 이후 4개 팀이 다시 리그전 형식의 결선 라운드를 치렀다. 개최국 브라질은 1라운드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이며 결선 라운드에 진출했다.
결선 라운드에는 브라질을 포함하여 우루과이, 스웨덴, 스페인이 진출했다. 브라질은 결선 라운드에서도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며 첫 두 경기를 큰 점수 차로 승리했다.
결선 라운드 마지막 경기는 사실상의 결승전이 되었다. 브라질은 2승으로 승점 4점을 확보하여 1승 1무로 승점 3점을 기록한 우루과이에 앞서 있었다. 따라서 브라질은 우루과이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비기기만 해도 월드컵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2] 당시 승점 계산 방식은 승리 시 2점, 무승부 시 1점, 패배 시 0점이었다.
3. 2. 우루과이의 경기 기록
우루과이는 1950년 FIFA 월드컵 1라운드 4조에서 프랑스가 기권함[39]에 따라 볼리비아와 단 한 경기만 치르고 결선 라운드에 진출했다. 결선 라운드에서는 스페인과 무승부를 기록하고 스웨덴에게 승리하여, 개최국 브라질과의 최종전을 앞두고 1승 1무를 기록했다. 최종전 이전까지 우루과이의 경기 결과는 다음과 같다.
4. 경기
1950년 7월 16일,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1950년 FIFA 월드컵의 사실상 결승전인 우루과이와 브라질의 경기가 열렸다. 공식 집계 173,850명, 비공식 집계로는 최대 20만 명에 달하는 관중이 운집했다.[11]
경기 전 브라질 내에서는 자국팀의 우승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브라질 신문 ''O Mundo''는 경기 당일 아침, "이들이 세계 챔피언이다"라는 제목과 함께 브라질 대표팀 사진을 싣기도 했다. 이를 본 우루과이 주장 옵둘리오 바렐라는 선수들과 함께 신문을 짓밟으며 투지를 다졌다고 전해진다.[6]
우루과이 감독 후안 로페스는 수비적인 전술을 지시했으나, 주장 바렐라는 라커룸에서 선수들에게 "후안치토는 좋은 사람이지만, 오늘은 틀렸어. 우리가 수비적으로 한다면 스페인이나 스웨덴처럼 대패할 것이다."라며 공격적인 플레이를 주문했다. 그는 또한 "외부인은 경기를 하지 않아. 쇼를 시작하자."(Muchachos, los de afuera son de palo. Que comience la función.es)는 유명한 말로 선수들을 독려했다.[7][8][9]
경기는 후반 초반 브라질의 프리아사가 선제골을 넣으며 브라질의 우세로 흘러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주장 바렐라의 리더십 아래 우루과이는 포기하지 않았고, 후반 21분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의 동점골과 후반 34분 알시데스 기지아의 역전골에 힘입어 최종 스코어 2-1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결과는 우루과이에게 통산 두 번째 월드컵 우승컵을 안겼고, 브라질 축구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패배인 '마라카낭의 비극'으로 기록되었다.
날짜 | 1950년 7월 16일 15:00 (UTC-03) | |
---|---|---|
경기장 |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 | |
관중 수 | 199,854명 (공식 173,850명[11]) | |
심판 | 조지 리더 (잉글랜드) | |
우루과이 | 2 – 1 | 브라질 |
득점자 (우루과이) |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 (66), 알시데스 기지아 (79) | |
득점자 (브라질) | 프리아사 (47') |
4. 1. 경기 진행
리우데자네이루의 마라카낭 경기장에는 공식적으로 173,850명[11](비공식 집계 199,854명 또는 20만 명 이상)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경기가 시작되었다. 우루과이의 감독 후안 로페스는 브라질의 막강한 공격력과 홈 관중의 압도적인 분위기를 고려하여 수비적인 전술을 지시했다. 그러나 우루과이의 주장 옵둘리오 바렐라는 "후안은 좋은 감독이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잘못된 판단을 했다. 우리가 수비적으로 나온다면 스페인이나 스웨덴처럼 대패를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동료들에게 오히려 공격적인 플레이를 주문했다. 우루과이가 수비적으로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브라질 선수들은 당황했다.경기 초반, 예상대로 브라질은 아데미르, 지지뉴, 프리아사 등 공격수들을 앞세워 우루과이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브라질의 쉴 새 없는 공격에도 우루과이 골키퍼 로케 마스폴리는 여러 차례 선방을 펼치며 골문을 지켰고, 전반전은 양 팀 득점 없이 0-0으로 종료되었다.
후반전이 시작되고 2분(경기 시작 47분), 브라질은 계속된 공격 끝에 프리아사가 마스폴리 골키퍼를 뚫고 낮은 슛으로 선제골을 기록했다. 경기장은 브라질 관중들의 열광적인 함성으로 가득 찼고, 많은 이들이 브라질의 우승을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실점 직후, 주장 옵둘리오 바렐라는 공을 들고 조지 리더 주심에게 프리아사의 오프사이드 여부를 따지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는 통역까지 요구하며 시간을 끌었고, 그사이 흥분했던 관중들은 다소 진정되었다.[10] 항의를 마친 바렐라는 공을 들고 경기장 중앙으로 가 동료들에게 "자, 이제 이길 시간이다!"(¡Ahora es el momento de ganar!|아오라 에스 엘 모멘토 데 가나르!spa)라고 외치며 사기를 북돋았다.
바렐라의 독려에 힘입어 우루과이 선수들은 더욱 공격적으로 나섰다. 후반 21분(66분), 기지아의 패스를 받은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가 강력한 슈팅으로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경기 분위기는 급격히 바뀌었고, 브라질 수비진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반 34분(79분), 알시데스 기지아가 오른쪽 측면을 빠르게 돌파한 후, 크로스를 예상하고 각도를 좁히려던 브라질 골키퍼 모아시르 바르보자의 예측을 깨고 가까운 포스트를 향해 강한 땅볼 슛을 성공시키며 역전골을 터뜨렸다.

경기 종료까지 약 11분이 남은 상황에서 브라질은 총공세를 펼쳤지만, 우루과이의 수비를 뚫지 못했다. 마침내 조지 리더 주심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고, 최종 스코어 2-1로 우루과이가 1950년 FIFA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두 번째 우루과이 골 이후 거의 침묵에 잠겼던 경기장은 우루과이의 승리로 끝났다.
4. 2. 경기 라인업
아서 에드워드 엘리스 (잉글랜드)
조지 미첼 (스코틀랜드)
5. 경기 후
쥘 리메 FIFA 회장은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포르투갈어로 브라질의 우승 축하 연설문을 준비하고 있었고, 브라질 축구 연맹은 선수들의 이름이 새겨진 22개의 우승 금메달을 자체적으로 제작해 두었다. 당시 FIFA는 우승국을 위한 메달을 따로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루과이가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자, 준비된 연설문은 쓸모없어졌고 금메달은 모두 폐기되었다. 브라질의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 '승리자 브라질'(Brasil os vencedores|브라질 오스 벤세도르스pt) 역시 발표되지 못하고 잊혔다. 브라질 전역에서 계획되었던 모든 우승 기념 행사는 순식간에 취소되었다.
브라질 국민들은 무승부만 거두어도 우승할 수 있었던 경기에서 역전패를 당하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에서는 관중 중 절반인 약 10만 명이 밤새도록 스탠드에 앉아 통곡하였으며, 브라질 전역에는 조기가 게양되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권총 등으로 자살하는 사람들까지 속출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졌다.[40] 경기 직후 경기장은 "불안하고 정신적인 절대적인 침묵"에 휩싸였고,[12][13] 유명 라디오 기자 아리 바로소는 충격으로 잠시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일부 흥분한 브라질 팬들은 호텔 로비에서 우루과이 팬들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14]
패배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한 일부 브라질 국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곳곳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이러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우루과이 대표팀은 쥘 리메 컵 시상식을 서둘러 마치고 경기장을 빠져나가 곧바로 귀국길에 올랐다.
이 경기는 브라질 축구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브라질 축구 연맹은 큰 변화를 단행했다. 패배의 상징이 된 흰색 상하의 유니폼은 '비애국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17] 모두 소각 처리되었다. 1953년, 브라질 스포츠 연맹의 지원 아래 신문사 ''Correio da Manhã''는 새로운 국가대표 유니폼 디자인 공모전을 열었다.[19] 공모전의 조건은 브라질 국기의 색깔(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흰색)을 반드시 포함하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신문 삽화가였던 알디르 슐리의 디자인이 채택되었는데,[20] 이는 초록색 트림이 있는 노란색 상의, 흰색 트림이 있는 파란색 반바지, 흰색 양말로 구성된 디자인이었다.[19] 이 새로운 유니폼은 1954년 3월 칠레와의 경기에서 처음 선보였으며,[21] 이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상징적인 유니폼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9살이었던 펠레는 라디오 중계를 듣고 슬픔에 잠긴 아버지에게 "슬퍼하지 마세요. 언젠가 제가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하게 해 드릴게요"라고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펠레는 8년 후인 1958년 FIFA 월드컵에서 17세의 나이로 브라질 대표팀에 발탁되어 6골을 기록하며 브라질의 사상 첫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5. 1. 브라질 선수들에 대한 비난과 차별
브라질이 우승을 놓치자 많은 비난이 선수들에게 쏟아졌다. 특히 이 경기에서 브라질 대표팀의 골키퍼를 담당했던 모아시르 바르보자 나시멘투는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은퇴 후에도 50년 동안이나 비난과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다.[41] 그는 2000년 4월 7일 세상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42]브라질에서는 아무리 중대한 범죄를 저질러도 징역 30년형 이상에 처하지 않는데, 나는 (1950년에 있었던) 우루과이와의 경기 이후 50년 동안 죄인으로 살아왔다.
5. 2. 2014년 미네이랑의 비극
마라카낭의 비극이 일어난 지 64년이 지난 후인 2014년 FIFA 월드컵에서 브라질은 이 비극보다 훨씬 더 치욕적인 패배를 겪게 된다. 미네이랑 경기장에서 치러진 독일과의 4강전 경기에서 브라질은 전반 29분 동안 독일에게 5골을 허용한 끝에 1 - 7로 대패하며 마라카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오게 된 미네이랑의 비극은 마라카낭의 비극에 이어 브라질 축구 역사상 최악의 경기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그로부터 2년 후, 2016년 하계 올림픽 남자 축구 결승전에서 같은 상대인 독일을 이기고 미네이랑의 비극을 되갚으며 역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6. 유산과 영향
경기가 끝나자 경기장은 "불안하고 정신적인 절대적인 침묵"으로 가득 찼고,[12][13] 유명 라디오 기자 아리 바로소는 잠시 은퇴를 선언하기도 했다. 브라질 팬들은 호텔 로비에서 우루과이 팬들과 충돌했으며,[14] 우루과이에서는 승리를 축하하는 과정에서 8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수들과 대부분의 브라질 팬들은 패배를 받아들이는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우루과이 신문 ''엘 디아''는 브라질을 "또 다른 승자"라고 칭하며 "경기 전에는 브라질의 스포츠 파워를 존경했지만, 경기 후에는 우리의 존경심이 더욱 커졌고, 브라질인들이 역경 속에서 보여준 훌륭한 정신에 더욱 깊이 감탄했다"고 보도했다.[16]
브라질은 이 패배를 딛고 일어나 1958년 FIFA 월드컵과 1962년 FIFA 월드컵에서 연속으로 우승하며 세계 축구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6. 1. "50년의 유령"
"50년의 유령"이라는 용어는 이 패배 이후 브라질 대표팀이 우루과이 대표팀에 대해 느끼는 일종의 공포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브라질과 우루과이가 마라카낭에서 맞붙을 때마다 이 트라우마가 회자되곤 한다.[22][23][24]1993년, 1994년 FIFA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서 브라질은 에콰도르와 우루과이를 상대로 두 번의 무승부를 기록하고, 볼리비아에게 패배하는 등 부진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에 어려움을 겪었다. 예선 마지막 경기는 우루과이와의 맞대결이었는데, 브라질은 반드시 승리해야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기는 긴장감 속에서 진행되었고, 후반 막판 호마리우가 두 골을 터뜨리며 브라질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이 승리로 브라질은 극적으로 월드컵 본선행 티켓을 거머쥐었고, 우루과이는 탈락했다. 당시 호마리우는 대표팀에서 외면받고 있었으나, 위기의 순간에 긴급히 호출되어 팀을 구했다.[25]
우루과이가 2014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자 브라질 언론은 다시 "50년의 유령"을 언급했다.[26] 우루과이 역시 이 주제를 활용하여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했다.[27] 아이러니하게도, 우루과이는 2014년 월드컵 16강전에서 콜롬비아에게 2-0으로 패배하며 탈락했는데, 이 경기가 열린 곳이 바로 마라카낭 경기장이었다.[28]
한편, 2014년 월드컵을 개최한 브라질은 벨루오리존치의 미네이랑 경기장에서 열린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1-7이라는 충격적인 대패를 당했다. 이 경기는 1950년 마라카낭에서의 패배와 같은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어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불리게 되었다.[29][30] 오랫동안 마라카낭 비극의 희생양으로 지목되었던 골키퍼 모아시르 바르보사의 양딸 테레자 보르바는 2014년의 패배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브라질 언론 역시 2014년 준결승전 패배를 마라카낭의 패배에 버금가는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평가했다.[31][32] 하지만 1950년 결승골의 주인공인 알시데스 기지아는 두 경기 모두 충격적이지만, 월드컵 우승컵이 걸려있던 1950년 경기의 무게감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33]
기지아는 마라카낭 비극 당시 선수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는 자신이 결승골을 넣은 지 정확히 65년이 되던 2015년 7월 16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34] 당시 우루과이 대표팀의 일원이었던 아니발 슐레는 2018년 11월 17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5][36]
6. 2. 브라질 축구에 미친 영향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마라카낭의 비극 이후 큰 변화를 겪었다. 가장 상징적인 변화는 유니폼 색상이었다. 결승전 당시 브라질 대표팀은 흰색 상의와 하의, 파란색 목둘레 칼라가 있는 유니폼을 착용했지만, 패배 이후 이 흰색 유니폼은 '비애국적'이라는 비판[17]을 받으며 결국 폐기되었다. 브라질 축구 연맹은 기존 유니폼을 모두 소각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모색했다.1953년, 브라질 스포츠 연맹의 지원[18] 아래 신문사 ''Correio da Manhã''는 브라질 국기의 네 가지 색상(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흰색)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는 규칙[19] 하에 새 유니폼 디자인 공모전을 개최했다. 이 공모전에서 당시 19세의 신문 삽화가였던 알디르 가르시아 슐리[20]가 디자인한 안이 최종 선정되었다. 그의 디자인은 초록색 테두리가 있는 노란색 상의, 파란색 반바지, 흰색 양말[19]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현재까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상징적인 유니폼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새로운 유니폼은 1954년 3월 칠레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21]
선수 개인에게도 마라카낭의 비극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특히 골키퍼였던 모아시르 바르보자는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오랜 기간 비난에 시달렸다. 그는 은퇴 후에도 50년 동안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등 고통을 겪었으며,[41] 2000년 4월 7일 세상을 떠나기 전 "브라질에서는 어떤 중범죄를 저질러도 징역 30년형 이상을 받지 않는데, 나는 (1950년 우루과이와의) 경기 때문에 50년 동안 죄인으로 살아왔다"는 유언[42]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당시 브라질 대표팀 주장이었던 아우구스투를 비롯해 후베나우, 비고데, 치코 등 4명의 선수는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브라질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그러나 브라질 축구는 이 충격적인 패배를 딛고 일어섰다. 이후 1958년 FIFA 월드컵과 1962년 FIFA 월드컵에서 연달아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축구의 강호로 자리매김했다. 1950년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던 닐톤 산토스와 카를루스 카스틸류는 이후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 멤버가 되기도 했다. 산토스는 두 번의 결승전에 모두 출전했고, 카스틸류는 1954년 월드컵에 출전했으며 1958년과 1962년 월드컵에서는 질마르의 백업 골키퍼로 우승 메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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