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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실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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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실리우스는 1270년대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태어난 중세 시대의 사상가이다. 파리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의학, 철학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저서 《평화의 옹호자》를 통해 교황 수위권과 세속 사회에 대한 교회의 개입을 비판했다. 그는 황제 루트비히 4세와 교황 요한 22세의 대립에서 황제를 지지하며, 이성과 신앙의 분리, 국민 주권, 법실증주의 등 독창적인 사상을 펼쳤다. 그의 사상은 정치 철학, 법 이론에 영향을 미쳤으며, 14세기 유럽의 중요한 정치 및 종교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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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실리우스

2. 생애

마르실리우스는 베네치아 인근의 중요한 도시인 파도바에서 1270년대에 태어났다. 파도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4], 이후 파리 대학교로 가서 '신성한 철학자'라고 칭송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5] 1312년에서 1313년까지 파리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6]

1322년부터 단독 로마 왕이 된 바이에른 공작루트비히 4세교황요한 22세 사이에는 1323년부터 논쟁이 시작되었다. 루트비히 4세가 이탈리아에 황제 대리인을 파견하여 신성 로마 황제 대관을 목표로 한 반면, 요한 22세는 이에 이의를 제기했다. 1324년에는 루트비히 4세의 파문과 독일 전역의 성무 정지가 선언되었다. 마르실리우스와 그의 오랜 친구인 장당의 요하네스[18]는 이 논쟁에서 루트비히 4세를 지지했다.[19]

마르실리우스는 1324년에 평화의 옹호자를 저술하여[7] 교황황제의 권력 투쟁에서 황제권을 옹호하고 교황권을 비판했다. 그는 황제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교회의 권위는 신자 전체에게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마르실리우스는 루트비히 4세를 따라 이탈리아로 가서 교황에 대한 공격을 설교하고, 루트비히 4세의 황제 즉위를 도왔다. 그는 루트비히 4세에 의해 로마의 교황 대리로 임명되어 요한 22세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을 박해했으며,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되었다.[14]

마르실리우스는 1343년 4월 10일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2. 1. 초기 생애

마르실리우스는 베네치아 인근의 중요한 도시인 파도바에서 1270년대에 태어났다. 마이날디니 가문 출신으로, 이 가문은 판사나 공증인을 배출하는 명문가였다. 아버지는 봉마티오(Bonmatteo)였다. 파도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했으며, 1311년경에는 이탈리아에서 의사로 활동했다.[4] 1312년파리로 이주하여 파리 대학교에서 철학과 의학을 배우고,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명성을 바탕으로 1312년 12월부터 1313년 3월까지 파리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6] 그는 총장 재임 전후로 파리 대학교에서 가르쳤을 것으로 보인다.[6] 이후 파리 대학교에서 '신성한 철학자'라고 칭송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5] 1316년에는 파도바로 돌아와 의료 활동에 복귀했다. 그 후 방랑하며 파리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1324년에는 『평화의 옹호자』("''Defensor pacis''")를 저술했다.

한편, 1322년부터 단독 로마 왕이 된 바이에른 공작루트비히 4세교황요한 22세 사이에는 1323년부터 논쟁이 시작되었다. 루트비히 4세가 이탈리아에 황제 대리인을 파견하여 신성 로마 황제 대관을 목표로 한 반면, 요한 22세가 이의를 제기했고, 1324년에는 루트비히 4세의 파문과 독일 전역의 성무 정지를 선언했다. 마르실리우스와 그의 오랜 친구인 장당의 요하네스[18]는 이 논쟁에서, 두 사람 모두 요한 22세에게 은혜를 입었음에도[19] 불구하고, 아베로에스주의적 입장에서 루트비히 4세를 지지하고 그의 보호를 구했다.

2. 2. 정치 이론과 망명

마르실리우스는 1324년에 『평화의 옹호자』를 저술했다.[7] 이 책은 교황 요한 22세바이에른의 루트비히 4세 사이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쓰여졌다. 루트비히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 인물이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반도에 중요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는데, 루트비히 4세의 정책은 교황의 영토 주권을 위협했다. 1323년 루트비히 4세는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밀라노를 보호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군대를 보냈는데, 나폴리는 프랑스와 함께 요한 22세의 강력한 동맹국이었다. 요한 22세는 루트비히 4세를 파문하고 황제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라고 요구했고, 루트비히 4세는 이에 맞서 요한 22세에게 새로운 도발로 응수했다.

『평화의 옹호자』에서 마르실리우스는 이성(『제1부』)과 권위(『제2부』)에 대한 논쟁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며, 로마 교황들이 부당하게 권력을 찬탈했음을 주장했다. 마르실리우스의 견해 중 일부는 1327년 요한 22세에 의해 이단으로 선언되었다.[7][8]

『평화의 옹호자』 대부분은 신학에 관한 내용이다. 마르실리우스는 성경에 크게 의존하여 예수가 어떤 현세적 권력도 주장하지 않았고, 교회가 이를 행사할 의도가 없었음을 보여주려 한다.[9] 오히려 성경은 교회가 세속적, 영적 문제 모두에서 국가에 완전히 종속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교회 내 모든 권위는 신자 전체, 즉 인민의 대표자 역할을 하는 세속 통치자와 세속 통치자가 소집한 공의회에 있다고 보았다.[10] 이러한 마르실리우스의 주장은 종교개혁 기간 동안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11]

오늘날, 마르실리우스의 『평화의 옹호자』는 신학보다는 정치 철학과 법 이론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마르실리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동의하여 정부의 목적이 인간의 "충분한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합리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12] 그러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 인민을 정치 권력의 유일한 정당한 원천으로 보는 공화주의 형태를 받아들였다. 국민 주권에 따라, 주권은 인민에게 있으며, 인민은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고, 수정하고, 필요한 경우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마르실리우스는 민주주의가 가장 현명한 법을 제정하고, 공동의 이익을 보호하며, "충분한 삶"을 증진하고, 준수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법을 만들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형태의 정부라고 주장했다.[13]

마르실리우스와 『평화의 옹호자』의 공동 저자로 여겨지기도 하는 장 드 장덩은 바이에른 공국에 있는 루트비히 4세의 알터 호프로 프랑스를 떠났다. 루트비히 4세는 마르실리우스와 장 드 장덩을 자신의 측근으로 받아들였다. 체세나의 미카엘과 초기 형태의 교회와 국가 분리의 옹호자인 철학자 오컴의 윌리엄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그의 보호를 받았다. 1326년 마르실리우스는 루트비히 4세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교황에 대한 공격을 설교하거나 글로 퍼뜨렸다. 요한 22세와 공모한 혐의를 받은 밀라노의 영주 갈레아초 1세 비스콘티는 폐위되었고, 루트비히 4세는 1327년 밀라노에서 이탈리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1328년 1월 루트비히 4세는 로마에 입성하여 원로원 의원 시리아 콜로나(로마 인민의 수장이라고 불림)에 의해 스스로 황제로 대관했다. 3개월 후 루트비히 4세는 "자크 드 카오르" 즉 교황 요한 22세를 이단을 이유로 폐위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프란체스코회의 피에트로 라이날두치를 대립 교황 니콜라 5세로 임명했다. 니콜라 5세는 루트비히 4세가 1329년 로마를 떠난 후 폐위되었다.

바이에른에서 황제 대리인으로서 마르실리우스는 요한 22세에게 충실했던 성직자들을 박해했다. 그의 공헌에 대한 보상으로 그는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되었고,[14] 장 드 장덩은 루이 4세로부터 페라라 주교직을 얻었다.

마르실리우스는 또한 Landolfo Colonna|WD=Q26251997la의 『결혼 문제에서 황제의 관할권에 관하여』와 유사한 작품을 재정리한 것으로 일부 권위자들이 여기는 『[로마] 제국 이전의 양도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썼다. 이 작품과 마르실리우스의 변형은 결혼 문제에 대한 황제의 배타적 관할권을 정당화하려 했다. 바이에른의 루이는 최근 보헤미아 왕의 아들의 결혼을 무효화했다.

2. 3. 루트비히 4세의 옹호와 말년

마르실리우스는 1324년에 『평화의 옹호자』를 저술했다.[7] 이 책은 교황 요한 22세바이에른의 루트비히 4세 사이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쓰여졌다. 루트비히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후보였는데, 이탈리아 반도에서 그의 정책은 교황의 영토 주권을 위협했다. 1323년 루트비히 4세는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밀라노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이탈리아로 보냈고, 요한 22세는 루트비히 4세를 파문하고 황제 지위를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평화의 옹호자』에서 마르실리우스는 이성권위에 대한 논쟁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교황청으로부터의 독립과 로마 교황들이 찬탈했다고 주장한 특권의 무의미함을 증명하려 했다. 그의 견해 중 일부는 1327년 요한 22세에 의해 이단으로 선언되었다.[7][8]

마르실리우스는 장 드 장덩과 함께 바이에른 공국에 있는 루트비히 4세의 궁정으로 갔다. 루트비히 4세는 마르실리우스와 장을 자신의 측근으로 받아들였다. 체세나의 미카엘과 오컴의 윌리엄도 그의 보호를 받았다. 1326년 마르실리우스는 루트비히 4세와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교황에 대한 공격을 설교하거나 글로 퍼뜨렸다. 1328년 1월 루트비히 4세는 로마에 입성하여 스스로 황제로 대관했다. 3개월 후 그는 교황 요한 22세를 이단으로 몰아 폐위시키고, 프란체스코회의 피에트로 라이날두치를 대립 교황 니콜라 5세로 임명했다.

바이에른에서 황제 대리인으로서 마르실리우스는 요한 22세에게 충실했던 성직자들을 박해했다. 그는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되었고,[14] 장 드 장덩은 페라라 주교직을 얻었다.

마르실리우스는 De translatione Imperii Romanila라는 논문을 통해 결혼 문제에 대한 황제의 배타적 관할권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는 1342년경 뮌헨에서 사망했다.

1326년에 루트비히 4세는 『평화의 옹호자』를 헌상받고 그 정치 이론의 대담함에 놀라 이단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곧 두 사람을 궁정으로 초청하여 호의를 갖게 되었다. 마르실리우스는 1327년 4월 3일 요한 22세에 의해 파문되었지만, 제국을 옹호하는 중요한 논자가 되어 루트비히 4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수행했다. 1328년 1월 17일에는 인민의 집회를 조직하여 루트비히 4세를 황제로 선언했고, 4월 18일에는 요한 22세의 추방을 선언하고 니콜라우스 5세를 옹립했다.[20][21]

마르실리우스는 루트비히 4세에 의해 로마의 교황 대리로 임명되어 요한 22세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을 박해했다. 그는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또한 『제권 위임론』(De translatione Imperii Romanila)[22]에서 신성 로마 황제의 독점적인 지배권을 정당화하고, 마르가레테 마울타쉬와 요한 하인리히의 이혼을 옹호했다.

마르실리우스는 1343년 4월 10일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3. 사상

마르실리우스는 1324년에 교황 요한 22세루트비히 4세 간의 권력 투쟁 상황에서 『평화의 옹호자』를 저술했다.[7] 이 책에서 마르실리우스는 신성 로마 제국교황청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며, 교황이 주장하는 특권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성권위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쳤으며, 그의 견해 중 일부는 1327년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이단으로 선언되었다.[7][8]

『평화의 옹호자』에서 마르실리우스는 성경을 근거로 예수가 현세적 권력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교회 역시 그러한 권력을 행사할 의도가 없었다고 주장했다.[9] 그는 오히려 성경은 교회가 세속적, 영적 문제 모두에서 국가에 완전히 종속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교회 내 모든 권위는 신자 전체와 인민의 대표자인 세속 통치자, 그리고 세속 통치자가 소집한 공의회에 있다고 주장했다.[10]

오늘날 마르실리우스의 『평화의 옹호자』는 정치 철학과 법 이론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마르실리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정부의 목적이 인간의 "충분한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합리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12] 그러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 인민을 정치 권력의 유일한 정당한 원천으로 보는 공화주의를 받아들였다. 국민 주권에 따라 주권은 인민에게 있으며, 인민은 정치 지도자를 선출, 수정, 축출할 권한을 가진다고 주장했다.[11] 마르실리우스는 민주주의가 가장 현명한 법을 제정하고, 공동의 이익을 보호하며, "충분한 삶"을 증진하고, 준수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법을 만들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형태의 정부라고 주장했다.[13]

마르실리우스는 교황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지 않으며, 성경이 교황보다 위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성경이 교회를 능가하며, 교황청은 신성한 것이 아닌 인간의 합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16] 그의 이론은 인민 주권 이론과 절대주의적인 국민 국가 이론의 선구로 평가받는다.

3. 1. 아베로에스주의와 이성-신앙 분리

중세 시대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에 있어 토마스주의와 아베로에스주의라는 두 가지 입장이 있었다. 13세기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가로서 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가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특히 기독교 신앙과 대립하는 아베로에스의 해석에 대해 신학자들 사이에서 위기 의식이 생겨났다. 당시 아베로에스의 해석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한 사람들을 아베로에스주의자라고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베로에스주의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왜곡된 이해라고 배척하고, 신앙은 이성을 초월하며 이성의 근거라고 주장하며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불렀다.

마르실리우스는 그의 친구 장댕의 요하네스와 함께 아베로에스주의의 사상적 계보에 속하며, 이성과 신앙의 분리를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경험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확실성과 단순히 믿는 것 사이에는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앙을 철학 등의 지적 이해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토마스주의적인 생각에 부정적이었다. 신앙이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양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사상에 있어서도,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의 섭리에 근거한 자연법을 중시하고, 모든 실정법은 자연법에 근거해야 한다고 논하는 데 반해, 마르실리우스는 모든 법은 실정법 질서 안에서 인정되는 한에서 법이라고 주장하며, 법실증주의적인 견해를 논했다.

3. 2. 정치 사상: 국가의 자율성과 인민 주권

마르실리우스는 1324년에 《평화의 옹호자》를 저술하여, 교황 요한 22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후보였던 루트비히 4세 사이의 권력 투쟁에서 황제권을 옹호했다.[7] 그는 이성과 권위에 대한 논쟁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교황청으로부터의 독립과 교황의 특권이 무의미함을 증명하려 했다.[7][8]

마르실리우스는 성경에 크게 의존하여 예수가 현세적 권력을 주장하지 않았고, 교회는 이를 행사할 의도가 없었음을 보였다.[9] 그는 교회는 세속적, 영적 문제 모두에서 국가에 종속되어야 하며, 교회 내 모든 권위는 신자 전체, 인민의 대표자인 세속 통치자, 그리고 세속 통치자가 소집한 공의회에 있다고 주장했다.[10]

오늘날 마르실리우스의 《평화의 옹호자》는 정치 철학과 법 이론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정부의 목적이 인간의 "충분한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합리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12] 그는 인민을 정치 권력의 유일한 정당한 원천으로 보는 공화주의를 받아들였다. 국민 주권에 따라, 주권은 인민에게 있으며, 인민은 정치 지도자를 선출하고, 수정하고, 필요하다면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1] 그는 민주주의가 가장 현명한 법을 제정하고, 공동의 이익을 보호하며, "충분한 삶"을 증진하고, 준수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법을 만들기 때문에 가장 훌륭한 형태의 정부라고 주장했다.[13]

마르실리우스는 사회의 자율성을 논하며, 국가가 완전한 공동체이며, 기독교나 교황의 정치 개입은 불화와 다툼의 근원이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 내 일원적 지배의 실현을 이상으로 보았고, 그 권력을 뒷받침하는 수단이 법이라고 보았다. 이를 통해 마르실리우스가 절대주의적인 국가 주권 이론을 주창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3. 3. 법 사상: 실정법의 중요성

마르실리우스는 강제력을 가진 실정법이야말로 진정한 법이라고 주장했다. 자연법이나 신법 등은 실정법 질서에 의해 강제력이 부여되지 않는 한 엄밀한 의미에서 법이 아니라고 보았다. 다만 『평화의 옹호자 소론』(''Defensor minor'')에서는 실정법이 자연법이나 신법에 위반되는 경우에는 후자가 우선된다고 언급했다.[25]

실정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번호내용
1법의 대상은 외적인 행위에 대한 것이며, 신앙 등의 내면에 관여하지 않는다.
2신의 법은 궁극적인 원인이지만, 세속의 법에는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3국가에서의 정의 및 이익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4지배자의 안전, 통치의 지속에 기여한다.


3. 4. 교회론과 공의회주의

마르실리우스는 성경에 크게 의존하여 예수가 어떠한 현세적 권력도 주장하지 않았고, 교회가 이를 행사할 의도가 없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9] 성경은 교회는 세속적, 영적 문제 모두에서 국가에 완전히 종속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보았다. 그는 교회 내 모든 권위는 신자 전체와 인민의 대표자 역할을 하는 세속 통치자, 그리고 세속 통치자가 소집한 공의회에 있다고 주장했다.[10]

마르실리우스는 교황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지 않으며, 성경이 교황보다 위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성경이 교회를 능가한다고 보았고, 교황청은 신성한 것이 아닌 인간의 합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16]

마르실리우스는 신앙은 내면의 문제이며, 신앙의 조직인 교회는 기독교 신자 전체의 공동체이고, 교황권은 기독교 자체에 근거를 두지 않는 편의상 역사적으로 설정된 인위적인 제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본래 모든 성직자는 평등해야 하며, 공의회에 의해 교회법이 입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공의회주의의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4. 유산

일부 권위자들은 《평화의 옹호자》를 14세기 유럽의 가장 중요한 정치 및 종교 작품 중 하나로 여긴다.[1] 《소 평화의 옹호자》에서 마르실리우스는 《평화의 옹호자》에서 제시된 교리의 여러 사항들을 완성하고 자세히 설명했다.[1] 그는 여기서 교회 관할권, 참회, 면죄부, 십자군, 순례, 서약, 파문, 일반 교회 회의, 결혼과 이혼, 그리스 정교회와의 통일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었다.[1] 이 작품에서 그는 교황청에 대한 제국의 우위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했다.[1]

참조

[1] 논문 Theorizing the multitude before Machiavelli. Marsilius of Padua between Aristotle and Ibn Rushd http://journals.sage[...] 2023
[2] 서적 Politicizing the Bible: The Roots of Historical Criticism and the Secularization of Scripture 1300-1700 Herder & Herder
[3] 웹사이트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ume VI: The Middle Ages. A.D. 1294-1517 -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 2021-12-23
[4] 문서 Marsilius of Padua Macmillan
[5] 서적 The Defender of Peace Harper & Row
[6] 논문 Marsiglio of Padua and William of Ockam I https://www.jstor.or[...] 1897
[7] 서적 Political Representation in the Later Middle Ages: Marsilius in Context Lang
[8] 논문 Marsiglio of Padua and William of Ockam II https://www.jstor.or[...] 1897
[9] 문서 Defensor Pacis
[10] 문서 Defender of Peace
[11] 문서 Marsilius of Padua
[12] 문서 Defensor Pacis
[13] 문서 The Defender of Peace
[14] 웹사이트 Marsilius of Padua
[15] 서적 Political Representation in the Later Middle Ages: Marsilius in Context Lang
[16] 웹사이트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olume VI: The Middle Ages. A.D. 1294-1517 -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https://ccel.org/cce[...] 2021-12-23
[17] 문서 生年については論争があり、定かではない。
[18] 문서 Jean de Jandun
[19] 문서 マルシリウスはヨハネス22世によって1316年にパドヴァの教区の聖堂参事会員に任命されており、さらに1318年にはパドヴァの教区で最初に空席になった聖職禄を授けられている。ヨハネスもパリ近郊サンリス司教座の聖堂参事会員であった。
[20] 문서 これによりフランチェスコ会は皇帝支持に回った。
[21] 문서 このルートヴィヒ4世とヨハネス22世の対立については、金印勅書を参照。
[22] 문서 これはランドルフォ・コロンナの『帝権委譲論』(“De translatione Imperii Romani”)を継承し、再構成した著作。
[23] 문서 ただしアリストテレスに反して社会を人間にとって自然なものであるとする考えは斥けている。
[24] 서적 異端者たちの中世ヨーロッパ 日本放送出版協会
[25] 문서 中世思想原典集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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