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터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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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먼터무는 도독의 만주식 발음으로,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까지 활동한 여진족 인물이다. 그는 몽골의 침략을 피해 조선 회령 지역에 거주했으며, 조선 태조에게 토산물을 바치고 관직을 제수받았다. 이후 명나라에 귀부하여 건주좌위지휘사가 되었으나, 1433년 7성야인반란 과정에서 사망했다. 먼터무는 건주여진의 성장과 청나라 건국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으며, 명나라와 조선의 기록에 멍거티무르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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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터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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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휘 | 먼터무 (Mentemu) |
다른 표기 | 맹특목(Mengtemu) |
만주어 표기 | (Mentemu) |
만주어 표기 (다른 표기) | (Mengtemu) |
묘호 | 조조(肇祖) |
신분 및 직책 | |
작위 | 건주여진 오돌리 아이만 만호 |
작위2 | 건주좌위지휘사 |
생애 | |
출생 | 1370년 |
사망 | 1433년 |
재위 | |
재위 시작 | 1405년 |
재위 종료 | 1433년 |
전임자 | 시조고 |
후임자 | 충샨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시조고 |
자녀 | 충샨 |
친인척 | 동생 판차 |
기타 | |
가문 | 아이신기오로 할라 |
2. 이름
두두(ᡩᡠᡩᡠ|Dudumnc)는 도독(都督)의 만주식 독음으로 벼슬을 의미하므로 본명은 "먼터무"이다.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는 "먼터무"를 몽골식으로 읽은 "멍거터무르"를 한자로 가차한 뒤 중국식 성인 동(童)씨를 하사받아 붙인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중세 한국어 표기는 '''갸온멍거터물'''(夾溫猛哥帖木兒)이다. 훗날 청 태조에 의해 추숭되어 시호는 '''택왕'''(澤王)이었고, 순치 5년(1648년) 순치제에 의해 다시 추존되어[4] 묘호는 '''조조'''(肇祖, ᡩᠠᡵᡳᡦᡠᡥᡝ
먼터무는 시조 부쿠리용숀이 백두산 북쪽 오돌리(斡朶里)로 옮겨 살면서 만주라는 나라를 세운 뒤, 그곳의 오돌리 만호부(斡朶里 萬戶府)의 만호직을 세습하며 살았다.
ᠮᠠᡶᠠ|Deribuhe Mafamnc), 시호는 '''원황제'''(原皇帝, ᡩᠠ
ᡥᡡᠸᠠᠩᡩᡳ|Da Hūwangdimnc)이다. 황성인 아이신 교로씨와 합쳐 '''아이신 교로 먼터무'''(愛新覺羅 孟特穆)라고도 한다.
3. 생애
몽골 부족들의 잦은 침략을 피해 먼터무는 훌리가이 만호부(胡理改/兀良哈 萬戶府)의 만호 구룬 아하추와 함께 남하하였다. 아하추는 혼하 상류의 풍주(風州, 지린성 해룡현)에 거주하였고, 먼터무는 더 남하하여 조선의 회령 지방에 거주하였다. 《용비어천가》에는 이 시절 먼터무가 퉁두란과 함께 이성계의 부하 노릇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1388년 명나라는 여진족이 몽골과 결합하는 것을 우려하여 건주여진의 세 부족인 오돌리, 훌리가이, 투오원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위소(衛所)체제에 편입시켰으며, 조공과 마시(馬市)의 경제적 이익을 제공했다.
1392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 국왕으로 즉위하자 여진족을 초무하고자 하였다. 1395년 먼터무는 한양으로 와서 조선 태조에게 토산물을 바치고 머리를 조아렸다.[5] 조선은 태조가 먼터무에게 경성등처만호(鏡城等處萬戶) 직사(職事)를 제수하였으며, 태종은 상장군(上將軍) 직사(職事)를 제수하였다.[6] 그러나 먼터무는 1411년 회령을 떠나 풍주로 이동하여 훌리가이부와 합류하였고, 1412년에 명나라에 귀부하였다.
1403년 명나라 정부는 쑹화강, 아무르강 지역의 여진족을 감시하기 위해 각 부족 우두머리들에게 명나라 관직과 작위를 제수하여 이들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1412년 명나라에 귀부한 먼터무에게 명나라는 건주위에서 좌위(左衛)를 분리하여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를 제수하였으며, 중국식 성인 동(童)씨를 하사하였다.
1433년 개원천호(開原千戶)였던 후룬여진 우디거부(兀狄哈部)의 추장 양 무타우타(楊木塔兀)를 수령으로 하는 7성야인반란이 일어났다. 명나라는 요동첨사 배준을 회령으로 파견하여 진압하게 하였고, 먼터무에게도 협공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먼터무와 그의 장자 아구(阿古)는 전사하였고, 차자 충샨은 포로로 잡혀갔다.
3. 1. 초기 활동과 남하
부쿠리용숀의 첫 정착지는 삼성(三姓, 하얼빈 동북쪽 쑹화강 언덕)이었다. 원나라는 이곳에 만호부를 설치하고 여진인에게 관직을 주어 다스렸다. 부쿠리용숀은 백두산 북쪽 오돌리(斡朶里)로 옮겨 살았고, 국호를 만주라 하였다. 누르하치의 선조는 원나라가 설치한 만호부 중 오돌리 만호부(斡朶里 萬戶府)의 만호직을 세습하였다.
먼터무는 몽골 제부족의 잦은 침략을 피해 훌리가이 만호부(胡理改/兀良哈 萬戶府)의 만호인 구룬 아하추와 함께 남하하였다. 아하추는 혼하 상류의 풍주(風州, 지린성 해룡현)에 거주하였고, 먼터무는 더 남하하여 조선의 회령 지방에 거주하였다. 《용비어천가》는 이 시절 먼터무가 퉁두란과 함께 이성계의 부하 노릇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의 부하였던 여진 부족장들 중 먼터무가 필두로 올라와 있고, 퉁두란은 다섯 번째로 올라와 있어 당시 먼터무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5]
1395년 먼터무는 한양으로 와서 조선 태조에게 토산물을 바치고 머리를 조아렸다.[5] 조선 태조는 먼터무에게 경성등처만호(鏡城等處萬戶) 직사(職事)를 제수하였으며, 태종은 상장군(上將軍) 직사(職事)를 제수하였다.[6] 그러나 먼터무는 1411년 회령을 떠나 풍주로 이동하여 훌리가이부와 합류하였고, 1412년에 명나라에 귀부하였다.
3. 2. 명나라와의 관계
1388년 명나라는 여진족이 몽골과 결합하는 것을 우려하여 건주여진의 세 종족인 오돌리, 훌리가이, 투오원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위소(衛所)체제에 편입시켰으며, 조공과 마시(馬市, 여진과의 교역을 위해서 국경에 열던 무역장소)의 경제적 이익을 제공했다.[5]
1403년 명나라 정부는 쑹화강, 아무르강 지역의 여진족을 감시하기 위해 각 여진부족의 우두머리들에게 명나라 관직과 작위를 제수하여 이들을 다스리고자 하였다.[5] 같은 해 풍주(風州:지린성 해룡현)에 거주하던 훌리가이부의 아하추는 명나라에 귀부하여 건주위지휘사(建州衛指揮使)라는 관직을 제수받고 이 지역을 통치 하였다. 이로부터 명나라는 아하추와 먼터무의 세력을 합쳐 건주여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5]
1412년 먼터무는 명나라에 귀부 하였다. 명나라는 건주위에서 좌위(左衛)를 분리하여 그에게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를 제수 하였으며, 중국식 성인 동(童)씨를 하사하였다.[5] 이후 여진족은 영락제로부터 건주위, 건주좌위, 건주우위 세 위(衛)의 지휘관 칭호를 받았다.[2] 위(衛)는 5개의 소(所)로 구성된 군사 조직이었으며, 각 소에는 1100명의 병사가 배치되었다. 위(衛)의 지휘관으로서, 매년 베이징으로 가서 황제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2] 오돌리의 맹케 테무르는 건주좌위의 지도자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성씨 통(童)을 받아들였다.[2]
1433년 개원천호(開原千戶)였던 후룬여진의 우디거부(Udige, 兀狄哈部)의 추장인 양 무타우타(Yang Mutawuta, 楊木塔兀)를 수령으로 하는 7성야인반란이 일어나, 명나라에서는 요동첨사 배준을 회령으로 파견하여 이를 진압케 하였고, 먼터무에게도 협공 지원토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먼터무와 그의 장자인 아구(Agu, 阿古, 權豆)는 전사하였고, 차자인 충샨은 포로로 잡혀갔다.[5]
3. 3. 조선과의 관계
1392년 7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 국왕으로 즉위하자 여진족을 초무하고자 하였다.[5] 조선 태조는 태종 이방원을 경흥(慶興)으로 보내 고조부 목조와 그 부인을 모신 덕안릉(德安陵)을 수축했다. 조선 왕조를 세운 시조의 뿌리가 함경도에도 머물렀음을 알려, 그를 바탕으로 주변의 여진족들을 확실히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1395년, 먼터무는 한양으로 와서 조선 태조에게 토산물을 바치고 머리를 조아렸다.[5] 조선은 태조가 먼터무에게 경성등처만호(鏡城等處萬戶)의 직사(職事)를 제수하였으며,[6] 1404년에는 명예 군사 직위를 주었다. 태종은 상장군(上將軍)의 직사(職事)를 제수하였다.[6]
이 시기 동안, 명나라는 지방 족장들에게 사신을 자주 보내어 명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설득했지만, 먼터무는 응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 조정에 기쁨을 안겨주었고, 1405년에는 조선 국왕의 십만호로 임명되었다. 1405년 4월, 여진 출신의 명나라 사신 왕교화태가 먼터무와 함께 조선 국왕을 설득하여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도록 파견되었다.
조선은 먼터무에게 명나라의 접근을 거부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먼터무가 명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에 실패했다.[2] 조선 국왕은 먼터무에게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처음에는 이 명령을 따르다가 항복하여 1405년 9월 난징을 방문하여 지방 장관으로 임명받고 떠났다.
그러나 먼터무는 1411년 회령을 떠나 풍주로 이동하여 훌리가이부와 합류 하였고, 이듬해인 1412년에 명나라에 귀부 하였다.
3. 4. 건주좌위 지휘사 시기
1411년 먼터무는 회령을 떠나 지린성 풍주로 이동하여 훌리가이부와 합류하였고,[5] 이듬해인 1412년에 명나라에 귀부하였다. 명나라는 건주위에서 좌위(左衛)를 분리하여 그에게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를 제수하였으며, 중국식 성인 동(童)씨를 하사하였다.[6]
당시 명나라는 지방 족장들에게 사신을 보내 명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설득했지만, 먼터무는 응하지 않았다. 이는 조선 조정을 기쁘게 했고, 1405년에는 조선 국왕의 십만호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 여진 출신의 명나라 사신 왕교화태가 먼터무와 함께 조선 국왕을 설득하여 명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도록 파견되었다.
조선은 먼터무에게 명나라의 접근을 거부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먼터무가 명나라에 복종했기 때문에 실패했다.[2] 조선 국왕은 먼터무에게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처음에는 이 명령을 따르다가 1405년 9월 난징을 방문하여 지방 장관으로 임명받고 떠났다.
쑹화강의 지류인 호이파강 계곡의 풍주에 정착한 명 정부는 먼터무를 새로운 위(衛)의 지역 지휘관으로 하여 기존의 건주위에서 건주좌위를 설립하였다.
3. 5. 7성야인반란과 죽음
1433년 개원천호(開原千戶)였던 후룬여진의 우디거부(Udige, 兀狄哈部)의 추장 양 무타우타(Yang Mutawuta, 楊木塔兀)를 수령으로 하는 7성야인반란이 일어났다.[5] 명나라는 요동첨사 배준을 회령으로 파견하여 이를 진압하려 했고, 먼터무에게도 협공을 지원하도록 했다.[5] 이 싸움에서 먼터무와 그의 장자 아구(Agu, 阿古, 權豆)는 전사하였고, 차자 충샨은 포로로 잡혀갔다.[5]
4. 가족
- 판차(Fanca) - 동생[3]
- 아구(Agu) - 장남
- 충샨(Cungšan) - 차남. 1419년~1467년. 청나라 전승에는 도독 멍터무(dudu mengtemu)로 기록되었으며, 난을 피해 오도리 헤첸(ᠣᡩᠣᠯᡳ
ᡥᡝᠴᡝᠨ|odoli hecen|오도리성mnc)에서 망명한 판차의 자손이라고 한다. 지략이 뛰어나 조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옛 적의 자손 40여 명을 오도리(odoli) 서쪽 1500리 떨어진 헤투알라로 유인하여 절반을 죽이고 절반은 인질로 삼았다. 동족의 석방을 요구하고 부족을 이끌어 옛 영토를 회복, 헤투알라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3]
5. 평가와 영향
먼터무는 건주여진의 성장과 청나라 건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여진족 부족들을 통합하고,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며 세력을 확장했다.[2]
15세기 초, 먼터무는 영락제로부터 건주좌위의 지휘관 칭호를 받았으며, 매년 베이징에 조공을 바쳤다.[2] 그는 조선에도 사신을 보내 명예 군사 직위를 받는 등 양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명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아 조선 조정의 기쁨을 샀고, 1405년에는 조선 국왕의 십만호로 임명되기도 했다.[2]
조선은 먼터무에게 명나라의 접근을 거부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그는 결국 명나라에 복종하여 1405년 난징을 방문하고 지방 장관으로 임명되었다.[2] 이후 먼터무는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정책을 펼쳤다. 1426년에는 베이징을 방문하여 부지휘관으로 승진했고, 1432년에는 다시 베이징을 방문하여 지휘관으로 승진했다.[2]
먼터무는 쑹화강 지류인 호이파강 계곡의 펑저우에 정착하여 건주좌위를 설립하고, 1422년에는 명나라의 몽골족 원정에 참여하기도 했다.[2] 그러나 몽골족의 보복 위협과 이만주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1423년 우무호로 돌아가야 했다.[2]
이러한 먼터무의 행보는 건주여진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주변국들과의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특히 1433년, 먼터무는 다른 부족 출신의 여진 보병대 지휘관 양무타우타가 일으킨 폭동으로 아들 아구와 함께 사망했다.[2]
청나라의 전승에 따르면, 먼터무는 지략이 뛰어나 조상의 원수를 갚고 부족을 이끌어 옛 영토를 회복한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조선의 기록은 청나라의 기록과 모순되는 부분이 있으며, 예를 들어 먼터무의 조상이어야 할 판차는 실제 동생이며, 먼터무가 적에게 살해당했을 때 간신히 도망쳤다고 전한다.[3]
6. 기타
청나라 전승에 따르면 먼터무는 난을 피해 오도리 헤첸(ᠣᡩᠣᠯᡳ
ᡥᡝᠴᡝᠨ|odoli hecen|오도리성mnc)에서 망명한 판차(ᡶᠠᠨᠴᠠ|fanca|판차mnc)의 자손이라고 한다. 지략이 뛰어나 조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옛 적의 자손 40여 명을 헤투알라(봉천성흥경 노성)에 유인하여 절반을 죽이고 절반은 인질로 삼았다. 또한 붙잡혀 있던 동족의 석방을 요구하고 부족을 이끌고 옛 영토를 회복하여 헤투알라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명나라와 조선 기록에 보이는 여진족 멍거테무르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측된다. 멍거테무르는 일란 투멘(ilan tumen)의 일부인 오도리(ᠣᡩᠣᠯᡳ|odoli|오도리mnc)의 성주였으며, 홍무 24년(1391년) 경에 앗목하(현재의 회령시)에 들어가 영락 4년(1406년) 경에 건주좌위 지휘사로 임명되었다. 조선과 청나라 기록 모두 그 일족을 "동씨"라고 칭한다.
6. 1. 사료 논란
청나라의 전승에 따르면 도독 멍터무(dudu mengtemu)라고 칭하며, 난을 피해 오도리 헤첸(ᠣᡩᠣᠯᡳᡥᡝᠴᡝᠨ|odoli hecen|오도리성mnc)에서 망명한 판차(ᡶᠠᠨᠴᠠ|fanca|판차mnc, 凡察)의 자손이라고 한다. 지략이 뛰어나 조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옛 적의 자손 40여 명을 오도리(odoli, 鄂多里) 서쪽 1500리 떨어진 헤투알라(hetu ala, 赫図阿拉, 봉천성흥경 노성)에 유인하여, 절반을 죽이고 절반은 인질로 삼았다. 게다가 붙잡혀 있던 동족의 석방을 요구하고, 부족을 이끌고 옛 영토를 회복하여 헤투알라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의 바탕이 된 것은 명나라와 조선의 기록에 보이는 여진족 멍거티무르로 추측된다. 일란 투멘(ilan tumen, 移蘭豆漫)의 일부인 오도리(ᠣᡩᠣᠯᡳ|odoli|오도리mnc, 斡朶里)의 성주였으며, 홍무 24년(1391년) 경에 앗목하(현재의 회령시)에 들어가 영락 4년(1406년) 경에 건주좌위 지휘사로 임명되었다. 조선의 기록에서는 그 일족을 "동씨"로 알고 있으며, 청나라의 기록에서는 "동씨"이다.
조선의 기록은 『만주실록』(ᠮᠠᠨᠵᡠ ᡳ
ᠶᠠᡵᡤᡳᠶᠠᠨ
ᡴᠣᠣᠯᡳ|manju i yargiyan kooli|만주실록mnc) 등의 기재와 모순되며, 예를 들어 멍터무의 조상이어야 할 판차는 실제 동생이며, 멍터무가 적에게 살해당했을 때 간신히 도망쳤다고 전한다. 한학자 나카지마 다카시는 오도리의 여진인은 조선에 당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그러한 기록이 없는 만주인의 전승보다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3]。
참조
[1]
문서
遼寧省檔案館 『滿州實錄 上函』
[2]
서적
Dictionary of Ming Biography, 1368-1644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6-01
[3]
서적
清朝史談
善隣書院
[4]
간행물
다산시문집
http://minchu.or.kr/[...]
한국고전변역원
2008-12-13
[5]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2008-12-13
[6]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2008-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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