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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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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나토강 전투는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를 탈환하기 위해 벌인 전투로, 고다이고 천황의 군대와 아시카가 군 사이에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아시카가 군에게 포위되어 자결했고, 닛타 요시사다는 패배하여 교토로 퇴각했다. 미나토강 전투는 겐무 신정 붕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무로마치 막부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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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강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미나토가와 전투
시기1336년 7월 4일 (음력 5월 25일)
장소셋쓰국 미나토강 (현재의 효고현 고베시 주오구 ~ 효고구 일대)
관련 전쟁엔겐의 난
교전 세력겐무 신정
아시카가씨
지휘관 (겐무 신정)닛타 요시사다
와키야 요시스케
오오다치 우지아키
에다 유키요시
키쿠치 타케시게
키쿠치 타케즈미
오야마다 타카이에
쿠스노키 마사시게
쿠스노키 마사스에
쿠스노키 마사우지
키쿠치 타케요시
이시이 스에타다
키시미키타 하루우지
지휘관 (아시카가씨)육군:
아사카가 타다요시
시바 타카츠네
쇼니 요리히사
아카마츠 노리무라
해군:
아시카가 다카우지
고노 모로나오
고노 모로야스
호소카와 요리하루
호소카와 죠젠
병력 (겐무 신정)17,500명 (추정)
병력 (아시카가씨)35,000명 (추정)
결과아시카가씨의 승리
전투 배경
관련 전쟁남북조 시대
전투 이미지
미나토가와 전투
미나토가와 전투

2. 배경

1336년 2월, 아시카가 다카우지교토에서 규슈로 쫓겨난 후, 남북조시대 황실의 장군 구스노키 마사시게고다이고 천황에게 아시카가 씨족과의 평화를 모색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은 이를 거부하고 닛타 요시사다에게 아시카가 군대를 격파할 병력을 소집하라고 명령했다.[3] 요시사다는 명령대로 작전을 시작했지만, 아카마츠 노리무라가 아시카가 편을 들면서 하리마국의 시라하타 성을 방어하는 끈질긴 포위전에 휩싸였다. 황실군이 포위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아시카가는 병력을 재정비하고, 4월에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승리하며 규슈에서 세력을 굳혔다.[3]

이후,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즉시 황실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여 육로와 해로를 통해 혼슈로 진격했다. 닛타 요시사다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진격을 통보받고 시라하타 성 포위를 끝내고 효고로 후퇴하여 아시카가 군의 침략에 대비해 더 나은 방어 위치를 찾으려 했다.[3]

2. 1. 겐무 신정의 붕괴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거병

1336년 2월, 아시카가 씨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수도 교토에서 규슈로 도망쳤다. 구스노키 마사시게고다이고 천황에게 아시카가와 평화를 모색할 것을 제안했으나, 고다이고 천황은 이를 거부하고 닛타 요시사다에게 아시카가 군대를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3]

요시사다는 명령에 따라 작전을 시작했지만, 아카마츠 노리무라가 아시카가 편을 들어 하리마국의 시라하타 성을 방어하면서 끈질긴 포위전에 휩싸였다. 그 사이, 아시카가는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승리하여 규슈에서 세력을 굳혔다.[3]

같은 해 2월, 아시카가 다카우지닛타 요시사다, 쿠스노키 마사시게 등에게 토요시마가와라 전투에서 패하여 교토에서 쫓겨나 규슈로 도망쳤다.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아시카가 측과 화해할 것을 제안했지만, 공가들의 비웃음을 샀다(『바이쇼론』). 3월,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사다를 총대장으로 하는 다카우지 추토군을 서쪽으로 파견했다.

요시사다는 하리마 국의 시라하타 성에서 웅거하는 아시카가 측의 아카마츠 노리무라를 공격하는 데 시간을 낭비했고, 그 사이에 다카우지는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규슈를 제압하고 교토 탈환을 목표로 동진을 시작했다. 다카우지는 고노 모로나오 등과 하카타를 출발, 빈고 국의 토노츠를 거쳐 시코쿠에서 호소카와 씨, 토키 씨, 코노 씨 등이 이끄는 선대와 합류하여 해로로 동진했다.

닛타 군은 아카마츠 세력의 추격을 받아 많은 배신자와 투항자를 내며 패주했다. 요시사다는 5월 13일 효고현고베시효고구까지 병사를 물려 군대를 재정비했다.[7]

고다이고 천황은 마사시게에게 효고에서 아시카가 군과 싸울 것을 명했고, 5월 16일 마사시게는 원군으로 효고로 내려갔다.[8] 24일, 마사시게는 효고에 도착하여 요시사다의 군세와 합류했다. 마사시게는 요시사다와 회견을 갖고 조정에서의 논의 경과를 설명했다.[9] 그날 밤, 요시사다와 마사시게는 술을 주고받으며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8]

2. 2.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규슈 피신과 세력 재정비

1336년 2월, 아시카가 다카우지교토에서 벌어진 토요시마가와라 전투에서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키타바타케 아키이에 등에게 패배하여 규슈로 쫓겨났다.[3] 이때, 마사시게는 고다이고 천황에게 상황이 유리한 지금 아시카가 측과 화해할 것을 제안했지만, 공가들의 비웃음을 사며 거절당했다(『바이쇼론』).[3] 고다이고 천황은 3월에 요시사다를 총대장으로 하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추토군을 서쪽으로 파견했다.[3]

요시사다는 하리마국의 시라하타 성에서 농성하는 아시카가 측의 아카마츠 노리무라를 공격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3] 그 사이, 다카우지는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규슈를 제압하고 세력을 재정비한 후, 교토 탈환을 목표로 동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3] 다카우지는 고노 모로나오 등과 함께 하카타를 출발하여 빈고국의 토노츠를 거쳐 시코쿠에서 호소카와 씨, 토키 씨, 코노 씨 등이 이끄는 함대와 합류하여 해로로 진군했다.

닛타 군은 다카우지 군의 진격에 쫓겨 철수하기 시작했고, 아카마츠 세력이 추격해오면서 많은 배신자와 투항자가 발생하며 패주했다.[7] 요시사다는 5월 13일에 효고현고베시효고구까지 후퇴하여 군대를 재정비했다.[7]

아시카가 군이 교토로 접근하고 요시사다가 효고로 퇴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다이고 천황은 마사시게를 불렀다.[8] 마사시게는 교토에서 철수하여 아시카가 군을 교토로 유인한 후 닛타 군과 협공하는 작전을 주장했지만, 공가인 보몬 키요타다는 천황이 여러 번 행재소로 이동하는 것은 체면이 좋지 않다며 반대했다.[8] 고다이고 천황은 보몬 키요타다의 의견을 받아들여 마사시게에게 효고에서 아시카가 군과 싸울 것을 명했고, 5월 16일에 마사시게는 원군으로 효고로 향했다.[8]

24일, 마사시게는 효고에 도착하여 요시사다의 군대와 합류했다. 마사시게는 요시사다와 만나 조정에서의 논의 과정을 설명했다.[9] 그날 밤, 요시사다와 마사시게는 술을 마시며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8] 요시사다가 관군 총대장으로서의 괴로움을 토로하자, 마사시게는 요시사다가 무공으로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키고 다카우지를 규슈로 몰아낸 것을 칭찬하며, 옥쇄를 각오한 요시사다를 위로하고 타이르며 충고했다.[8][10]

2. 3. 닛타 요시사다의 효고 후퇴와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참전

1336년 2월, 아시카가 씨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교토에서 규슈로 도망쳤다. 남북조시대 황실의 장군 구스노키 마사시게고다이고 천황에게 아시카가와 평화를 모색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고다이고 천황은 이를 거부하고 닛타 요시사다에게 아시카가 군대를 격파할 병력을 소집하라고 명령했다.[3] 요시사다는 명령에 따라 작전을 시작했지만, 아카마츠 노리무라가 아시카가 편을 들면서 하리마국의 시라하타 성을 방어하는 끈질긴 포위전에 휩싸였다. 황실군이 포위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아시카가는 병력을 재정비하고, 4월에 황실 충성파를 상대로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승리하며 규슈에서 세력을 굳힐 시간을 벌었다. 타카우지는 즉시 황실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여 육로와 해로를 통해 혼슈로 진격했다. 요시사다는 타카우지의 진격을 통보받고 시라하타 성의 포위를 끝내고 효고로 후퇴하여 아시카가의 침략에 대비해 더 나은 방어 위치를 찾으려 했다.[3]

요시사다는 하리마 국의 시라하타 성에 웅거하는 아시카가 측의 아카마츠 노리무라를 공격하는 동안 시간을 낭비했고, 그 사이에 타카우지는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규슈를 제압하여 체제를 정비한 후, 교토 탈환을 목표로 동진을 시작했다. 타카우지는 고노 모로나오 등과 하카타를 출발하여 빈고 국의 토노츠를 거쳐 시코쿠에서 호소카와 씨, 토키 씨, 코노 씨 등이 이끄는 선대와 합류하여 해로로 동진했다.

타카우지 군의 진격에 쫓겨 철수를 시작한 닛타 군에 아카마츠 세력이 추격을 가했고, 닛타 군은 대량의 배신과 아시카가 군에게 항복하는 병사들이 나오면서 패주했다. 순식간에 진영이 가늘어진 요시사다는 5월 13일에 효고(현 효고현고베시효고구)까지 병사를 물려 군대를 재정비했다.[7]

아시카가 군이 교토로 접근하고 요시사다가 효고로 퇴각했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고다이고 천황은 마사시게를 불렀다.[8] 마사시게는 교토에서 철수하여 아시카가 군을 교토로 끌어들인 후 닛타 군과 구스노키 군으로 협공하는 작전을 주장했지만, 공가의 보몬 키요타다는 여러 번의 동좌(천황의 행재소로의 이동)는 체면이 좋지 않다고 하여 이를 물리쳤다.[8] 고다이고 천황은 보몬 키요타다의 의견을 받아들여 마사시게에게 효고에서 아시카가 군과 싸울 것을 명했고, 5월 16일에 마사시게는 원군으로 효고로 내려갔다.[8]

5월 24일, 마사시게는 효고에 도착하여 요시사다의 군세와 합류했다. 마사시게는 요시사다와 합류한 후 회견을 갖고, 요시사다에게 조정에서의 논의 경과를 설명했다.[9] 그날 밤, 요시사다와 마사시게는 술을 주고받으며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8] 요시사다가 관군 총대장으로서의 괴롭고 고통스러운 속내를 밝히자, 마사시게는 요시사다가 무예로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일이나 타카우지를 규슈로 몰아낸 일 등을 칭찬하며, 옥쇄 각오를 한 요시사다를 위로하는 동시에 타이르며 충고했다.[8][10]

3. 경과

미나토강에서의 군대 배치


고다이고 천황은 쿠스노키 마사시게에게 셋쓰에서 닛타 요시사다를 지원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이는 전략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쿠스노키는 히에이 산에 머물면서 아시카가 군을 교토로 유인한 후 기습,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계책을 제안했으나, 고다이고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쿠스노키는 쿠스노키 마사츠라에게 영지로 돌아가 싸우라 명하고 닛타 요시사다와 합류했다.[4]

아시카가 타다요시군은 서쪽에서 황실군을 공격해 쿠스노키 마사시게를 묶어두고, 쇼니 요리히사는 남쪽에서, 시바 타카츠네는 북쪽에서 우회하여 배후를 쳤다. 호소카와 조젠의 동쪽 상륙으로 닛타 요시사다는 후퇴했고,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해군을 투입하면서 쿠스노키 마사시게는 포위되었다. 쿠스노키군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패배했고, 쿠스노키 마사시게와 쿠스노키 마사스에 등 일족 전원이 전사했다.[1][3][5] 닛타 요시사다는 교토로 후퇴했으나,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 고다이고 천황과 함께 히에이 산으로 피신했다.[3]

아시카가 군은 교토에 입성, 고묘 천황을 옹립했고,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로 달아나 북조 - 남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3. 1. 양측의 배치



고다이고 천황은 쿠스노키 마사시게에게 셋츠에서 닛타 요시사다를 지원하도록 군대를 이끌 것을 명했으나, 이 작전은 전략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쿠스노키는 천황과 황실 군대가 교토 인근 히에이 산에 숨어 아시카가 군이 교토에 들어오도록 한 후, 산에서 기습하여 포위하고 도시를 방어하는 동시에 보급로를 끊는 계책을 제안했다. 그러나 고다이고는 교토를 떠나지 않겠다며 이 제안을 거부했다. 쿠스노키는 자신의 계책을 관철하지 못하고 장남 쿠스노키 마사츠라에게 영지로 돌아가 싸움을 계속하라고 명한 뒤, 닛타 요시사다와 합류하기 위해 진격했다. 황실군은 포위를 막을 해군력이 없었지만, 미나토 강 근처의 방어 가능한 곳을 택하고 남쪽에서 해상 상륙을 막기 위해 군대를 동쪽으로 넓게 배치했다.[4]

아시카가 군은 황실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작전을 세웠다.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이끄는 주력 육군은 서쪽에서 황실군을 공격하여 쿠스노키 마사시게를 묶어두고, 쇼니 요리히사는 남쪽에서 측면을, 시바 타카츠네는 북쪽에서 우회하여 뒤를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호소카와 조젠이 동쪽에서 상륙하자 닛타 요시사다는 포위를 피하려 후퇴했고,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황실군 사이에 해군을 투입하면서 쿠스노키 마사시게는 순식간에 포위되었다. 황실 주력군에게 버려진 쿠스노키군은 빠르게 압도되었고, 쿠스노키 마사시게와 그의 동생 쿠스노키 마사스에, 그리고 모든 일족이 전사했다.[1][3][5] 닛타 요시사다 또한 교토로 후퇴했으나, 교토는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곧 버려졌다. 고다이고는 이전에 자신이 거부했던 히에이 산으로 피신했다.[3]

아시카가 군은 방해 없이 교토에 입성하여 고묘 천황을 옹립했고, 고다이고가 요시노로 달아나면서 북조 - 남조 시대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25일 진시(오전 8시경),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이끄는 해군이 미나토 강에 도착하여 닛타 요시사다와 쿠스노키 마사시게 연합군과 대치했다.[11] 육지에서는 아시카가 타다요시를 사령관으로 하는 육상군 주력 부대가 사이고쿠 가도를 따라 접근하고 있었다. 닛타 군은 수군이 없었기 때문에, 와키야 요스케를 장수로 하는 일족 23명, 총 5천여 기를 게이시마에, 오다테 우지아키를 장수로 하는 일족 16명, 총 3천 명을 도후로도 남쪽 해변에 배치하여 육지 공격에 대비했다.[11] 닛타 요시사다는 총대장으로서 여러 장수들에게 군령을 내리기 위해 와다곶에 2만 5천 병력으로 주둔했다.[11] 쿠스노키 군은 700여 기로 미나토 강 서쪽 숙소(미나토 강 서쪽, 본진 북서쪽 아이노야마)에 배치되어 육지에서 오는 적을 방어했다.[11]

닛타 요시사다의 진영 배치는 "이상한 진영 배치"였다고 한다.[12] 닛타 요시사다는 남쪽에서 상륙하는 아시카가 군 군선에 등을 돌리고 있었고, 북쪽의 쿠스노키 마사시게와 와키야 요스케가 격파되면 동서남 삼면이 바다인 와다곶이 아시카가 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퇴로가 막히는 상황이었다. 닛타 요시사다는 일부러 배수의 진을 쳐서 부하들에게 결사적인 각오로 전투에 임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13]

바다와 육지에서 진격해 온 아시카가 군은 서로 접근하여 공격했고, 바다 군세가 태고를 울리며 구호를 외치면 육지 군세도 호응하여 구호를 외쳤다.[11] 관군도 방패 가장자리를 울리고 화살통을 두드리며 구호를 외쳤다.[11]

닛타 측 혼마 시게우지가 먼저 바다의 아시카가 측에 화살을 쏘았고, 아시카가 측도 아시카가 다카우지 명을 받은 사사키 아키노부가 화살을 쏘아 응수하는 화살 맞히기가 벌어졌다.[14] 이후, 바다에서 200여 기가 게이시마에 상륙했지만, 와키야 요스케는 500여 기로 포위하여 양쪽에서 화살을 쏘아 공격했다.[15] 호소카와 사다젠은 200여 기가 모두 전사한 것을 보고 상륙을 명하여, 700척 대선으로 구성된 시코쿠 군세가 곤부 해변에 상륙하려 했다.[15] 효고 섬 주변 세 곳에 전개된 5만여 기는 아시카가 군을 맞아 싸웠지만 역부족이었고, 주변 뱃머리 방어가 허술해진 틈을 타 중국, 큐슈 병선 60여 척이 와다곶으로 접근했다.[15]

쇼니 요리히사는 와다곶의 닛타 군을 측면에서 공격했다. 시바 타카쓰네 군대는 산길을 통해 아이노야마에 진을 친 쿠스노키 마사시게 배후로 이동했다. 호소카와 수군은 닛타 요시사다 등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수군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동쪽에서 상륙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닛타 요시사다와 와키야 요스케 등이 유인된 사이, 선단 후방 군선이 방향을 바꾸어 와다곶(고마가바야시)에서 상륙하여 닛타, 쿠스노키 양 군을 분단시켰다. 닛타 요시사다는 선두에서 동쪽으로 상륙하려는 호소카와 수군을 아시카가 다카우지 본대로 오인했던 것으로 보이지만,[16] 실제로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방향을 전환하여 와다곶으로 상륙한 마지막 군선에 타고 있었다.[17]

호소카와 사다젠이 해로를 동쪽으로 이동하여 이쿠타 숲에서 상륙하자, 닛타 요시사다는 퇴로가 끊길 위험을 느끼고 전선을 이탈하여 동쪽으로 달아났고, 쿠스노키 군은 고립되었다.[18] 이때 비어있는 와다곶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 본대가 상륙했다.

3. 2. 닛타 군과 구스노키 군의 분단

고다이고 천황은 구스노키 마사시게에게 군대를 소집하여 셋쓰에서 닛타 요시사다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 계획에는 전략적인 결함이 있었다. 구스노키는 천황에게 교토 근처 히에이 산에 은신하여 아시카가 군이 도시에 진입하도록 허용한 다음, 산에서 기습하여 포위하고 도시를 방어하는 동시에 보급로를 공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를 떠나기를 거부하며 이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구스노키는 장남 구스노키 마사쓰라에게 영지로 돌아가 전쟁을 계속하도록 명령한 후 닛타 요시사다와 합류하기 위해 진격했다.[4]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이끄는 군대가 미나토강에 도착하면서, 닛타 요시사다와 구스노키 마사시게 연합군은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11] 닛타 군은 수군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와키야 요스케를 장수로 하는 5천여 기를 게이시마에, 오다테 우지아키를 장수로 하는 3천 명을 도후로도의 남쪽 해변에 배치하여 육지로부터의 적에 대비했다.[11] 닛타 요시사다는 와다곶에 2만 5천의 병력으로 포진했고,[11] 구스노키 군은 700여 기로 미나토 강 서쪽의 아이노야마에 포진하여 육지에서 오는 적을 막으려 했다.[11]

닛타 요시사다의 이러한 진영 배치는 "이상한 진영 배치"였다고 평가된다.[12] 남쪽에서 상륙하는 아시카가 군의 군선에 등을 돌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북쪽에 진을 친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와키야 요스케가 격파되면 와다곶이 완전히 포위되어 퇴로가 막히는 형세였다. 닛타 요시사다는 일부러 배수의 진을 쳐서 부하들에게 결사의 각오로 전투에 임하도록 한 것으로 추측된다.[13]

아시카가 군은 닛타 군과 구스노키 군을 분단시키고 각개격파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호소카와 사다젠이 이끄는 수군이 닛타 군을 동쪽으로 유인하는 사이,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본대가 와다곶에 상륙하여 닛타 군과 구스노키 군을 분단시켰다.[16][17] 호소카와 사다젠이 이쿠타 숲에서 상륙하자, 닛타 요시사다는 퇴로가 끊길 위험을 느껴 전선을 이탈하여 동쪽으로 후퇴했고, 구스노키 군은 고립되었다.[18]

3. 3.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분전과 자결

고다이고 천황은 구스노키에게 군대를 소집하여 셋쓰에서 닛타 요시사다를 지원하라고 명령했지만, 이 계획에는 전략적인 결함이 있었다. 구스노키는 천황과 황실 군대가 교토 근처 히에이 산에 숨어 아시카가가 도시에 진입하도록 허용한 다음 산에서 공격하여 그들을 포위하고 도시를 방어하게 만드는 동시에 보급로를 공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고다이고는 교토를 떠나기를 거부하며 이 제안을 거절했고, 이 전략을 주장하는 데 실패한 후 구스노키는 장남인 구스노키 마사츠라에게 영지로 돌아가 전쟁을 계속하도록 명령한 후 요시사다와 성공적으로 합류하기 위해 진격했다.[4]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이끄는 주력 육군은 서쪽에서 황실군을 공격하여 마사시게를 묶어두고, 쇼니 요리히사는 남쪽에서 측면 공격을 가했으며, 시바 타카츠네는 북쪽에서 우회하여 뒤에서 공격했다. 호소카와 조젠의 동쪽 상륙으로 요시사다는 포위를 피하기 위해 물러났고, 다카우지가 황실군 사이에 해군을 개입시키면서 구스노키는 빠르게 포위되었다. 황실 주력군에게 버려진 구스노키 씨족군은 빠르게 압도당했고, 구스노키 마사시게, 그의 형제 구스노키 마사스에, 그리고 모든 씨족 구성원이 살해되었다.[1] 楠木正成|구스노키 마사시게일본어닛타 요시사다와 분단된 후, 동생 구스노키 마사스에에게 "적에게 전후가 차단되었다.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라고 말하고, 전방의 적을 쓰러뜨린 후, 후방의 적을 쓰러뜨리기로 했다.[20]

마사시게는 700여 기를 이끌고 아시카가 타다요시의 군세에 돌격을 감행했다.[20] 국수의 깃발을 본 타다요시의 병사들은 포위하여 쳐 죽이려 했지만, 마사시게와 마사스에는 분전했고,[20] 마침내 타다요시의 가까이까지 이르러, 아시카가 측의 대군을 격퇴하여 스마, 우에노까지 퇴각시켰다.[20] 타다요시는 구스노키 군에게 쫓겼지만, 야쿠시지 주로지로가 분전하여,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20]

다카우지는 타다요시가 퇴각하는 것을 보고, "군을 새롭게 교체하여 타다요시를 치게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20] 그 때문에, 키라 씨, 고 씨, 우에스기 씨, 이시도 씨의 군 6천여 기가 미나토 강 동쪽으로 달려와 후방을 차단하려 했으므로, 마사시게는 마사스에와 함께 되돌아가 새로운 군세에 맞섰다.[20]

6시간의 합전 끝에, 마사시게와 마사스에는 적군에게 16번의 돌격을 감행했고, 구스노키 군은 차츰 수를 줄여, 마침내 73기가 되었다.[20] 피폐해진 그들은 미나토 강 동쪽에 있는 마을의 민가로 달려가, 마사시게와 마사스에는 서로 찔러 자결했고, 남은 측근인 와다 마사타카 등도 모두 자결했다.[20] 또한, 이때 키쿠치 타케요시가 형 키쿠치 타케즈미의 심부름으로 스마구치에서의 전투 상황을 보러 왔는데, 그는 마사시게가 자결하는 곳으로 가서, 버려둘 수 없다는 이유로 함께 자결했다.[20]

3. 4. 닛타 요시사다의 분전과 관군의 패퇴

닛타 요시사다니시노미야에서 군사를 돌려 4만여 기(騎)의 군세를 세 방향으로 나누어 이쿠타 숲을 등 뒤로 하고 아시카가 군과 격렬하게 격돌했다.[21] 먼저 닛타 측의 오다테 우지아키, 에다 유키요시 등이 이끄는 3천여 기가 호소카와 씨, 니키 씨의 6만여 기에게 덤벼들었다.[21] 서로 많은 수가 죽고 쌍방이 물러서자, 닛타 측의 나카인 사다히라, 오에다 우지쓰네, 사토미 씨, 도리야마 씨가 5천여 기로 다카우지, 우에스기 씨의 8만 기에게 덤벼들어 한 시간 정도 싸웠다.[21] 그 군세들도 피폐해져 자진하여 물러서자, 이번에는 닛타 측의 와키야 요시스케, 우쓰노미야 기미쓰나, 기쿠치 다케시게, 고노 씨, 도이 미쓰마스, 도쿠노 미쓰쓰나의 1만 기가 다다요시, 키라 씨, 이시도 씨 등 10만 기에게 덤벼들었다.[21] 그리고 요시사다 자신도 좌우에 2만 3천 기를 배치하여, 다카우지의 군세 30만 기에게 덤벼들었다.[21]

쌍방의 군세는 서로 물러서지 않았고, 이 격렬한 충돌에서 많은 병사들이 전사했다.[21] 전투는 『타헤이키』에서 "하늘을 울리고 땅을 흔들며 싸운다", "두 호랑이와 두 용의 싸움", "니타・아시카가의 나라의 싸움이 이제 마지막으로 보이도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격렬했다.[21] 전투의 규모로 보면, 닛타와 아시카가의 전투가 미나토강 전투의 본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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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시카가 측과의 병력 차이는 현저했고, 요시사다 등 조정 측이 목숨을 걸고 싸워도 전황을 뒤집을 수 없었다.[21] 닛타군은 패배했고, 남은 5천여 기의 군세는 이케다 숲의 동쪽에서 탄바 길로 도망쳤다.[21] 아시카가 측은 이를 급하게 추격했고, 요시사다는 아군을 교토로 도망시키기 위해 후방으로 물러나 대장으로서 결사대를 자처했다.[21]

결사대를 자처하는 요시사다를 아시카가 측은 격렬하게 공격했고, 요시사다는 타고 있던 말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모토즈카 위에 내려 아군으로부터 말을 갈아탈 때까지 기다리며 싸웠다.[21] 요시사다는 아시카가 측에 포위되었지만, 아시카가 측 병사들은 요시사다의 기세에 눌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화살을 쏘았다.[21] 이때 요시사다는 미나모토노 미쓰나카 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겐지 가문의 보검인 오니키리(鬼切), 오니마루(鬼丸) 두 자루의 태도를 양손에 들고 휘두르며 분전했다.[21] 『타헤이키(太平記)』에 따르면, 요시사다는 16개의 화살을 떨어뜨렸다고 하며, 그 모습을 "그 모습은, 비유하자면 사천왕이 수미산 사방에 서서 동시에 쏘는 화살을 재빠른 귀신이 돌며, 아직 그 화살이 대해에 떨어지기 전에 네 개의 화살을 잡아서 되돌리는 것과 같다고 여겨진다"라고 평했다.[21]

이윽고, 요시사다의 위급한 상황을 본 부하 오야마다 다카이에가 달려와 자신의 말을 요시사다에게 넘겨주고 걸어서 적군을 막아 요시사다의 목숨을 구했으며, 그 사이에 요시사다는 아군 군세에 합류하여 위기를 벗어났다.[21] 다카이에는 지치부 헤이씨·오야마다 씨의 계보를 잇는 무장으로 여겨지며, 겐무 3년 3월에 하리마에서 카리타 로소쿠(刈田狼藉)를 저질러 군령 위반으로 문책을 받았지만 요시사다에게 사면받았고, 그 은혜로 요시사다의 몸을 대신했다.[23][24] 다만, 이 일화는 『타헤이키』 옛 판본에는 보이지 않으며, 후세에 덧붙여진 내용일 가능성이 있다.

관군 총대장인 요시사다는 남은 병력을 모아 6천 기로 교토로 귀환했고, 교토 사람들은 쳐들어오는 아시카가 측 군세에 당황했다.[25] 고다이고 천황삼종의 신기와 함께 교토를 떠났으며,[25] 요시사다와 와키야 요시스케 등 닛타 일족도 그 호위로서 고다이고 천황의 임행에 동행했다.[25]

4. 결과 및 영향

미나토강 전투와 관련된 사건들은 태평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닛타 요시사다가 패배한 주된 원인은 병력 부족이었다.[19]태평기』에 따르면, 마사시게와 요시사다는 "적은 강한 군대를 이끌고 있지만, 우리 군대는 지치고 병력도 적다"고 말했다.[27][8] 또한, 두 사람 사이에 전술적 협력이 부족했던 것도 패배의 한 원인이었다.[18]

당시 전투 지역인 고베시 근처는 해수면이 높아 평지가 좁아 대규모 병력이 활동하기 어려웠다. 남조가 수군을 보유하지 않았던 점도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야마모토 다카시는 『후카보리 문서』를 바탕으로, 패주하던 닛타 측 30여 명을 사로잡은 "아쿠타가와 강변 마을 사람들"에 주목한다.[27] 이들은 무사가 아닌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었지만, 닛타 측에 맞서 싸워 수십 명을 생포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으며, 이는 센고쿠 시대뿐만 아니라 남북조 시대에도 해당한다고 야마모토는 주장한다.[27]

4. 1.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충절과 후세의 평가

에도 시대구스노키 마사시게는 황실 군대의 일부만을 지휘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상황에서 황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을 선택한 충성의 상징이 되었다.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비문을 썼고, 그의 명성을 굳히기 위해 미나토가와 신사가 1872년 5월 24일에 봉헌되었다.[28]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교훈적인 이야기로 가르쳐졌다. 해군 대위 노나카 고로는 721 해군 항공대가 오카를 사용하는 것을 이 전투에 비유하여 무익함의 징조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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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가와 전투나, 마사시게가 출진 전에 적자 구스노키 마사쓰라를 본거지인 가와치국으로 돌려보낸 "사쿠라이의 이별" 등은, 승산이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천황을 위해 충성을 다해 죽었다는 점이 강담 등에서 인기를 끌었고, 전전(戰前) 황국사관 교육이나 창가 등에서도 널리 다루어졌다.

현재 효고현 고베시 주오구에는 마사시게・마사스케 형제의 최후의 땅으로서 구스노키 일족을 제신으로 모신 미나토가와 신사가 있으며, 도쿠가와 미쓰쿠니 친필의 "아아 충신 구스노키의 묘"의 석비 등이 존재한다.

막말기, 조슈 번은 파약 양이를 목표로 했다. 조슈 번사 가네시게 죠조의 술회에 따르면, 분큐 2년 (1862) 7월 6일, 교토 가와라마치에서의 군전 회의에서 번론을 결정함에 있어, 가쓰라 고고로, 스후 마사노스케는 번사에게 "이백 명이라도 삼백 명이라도, 교토에 나가 있는 인원 중에서, 서로 미나토가와를 할 전망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불만이 없다. 즉 백 명이라도 이백 명이라도, 갖추어 미나토가와를 하겠다고 결심한다"라고 말하며 설득했다.[28]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6월 15일 아호 작전 때, 521공이 "은하" 8기로 편성된 공격대 "호부대"로 마리아나 해역의 미국 해군 기동 부대에 대한 공격에 출격했지만, 적 함대의 요격으로 전멸했다. 이 부대의 비행대장이었던 해군 소좌 에구사 다카시게는 마리아나 진출 전에 가족에게 "'''이번에는 미나토가와야'''"라고 말했다.[29] 1945년 3월 21일 규슈 해역 항공전 때에는, 가미카제 특별공격대 제1신뢰 벚꽃대, 제1신뢰 공격대 (벚꽃과 그 모기인 일식 육상 공격기로 편성된 공격대)는, 규슈 남방 해역에 다가온 미국 해군 고속 항공모함 기동 부대에 대한 공격에 출격했지만, 적의 함상 전투기 부대의 요격으로 전멸했다. 이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해군 소좌 노나카 고로는 가노야 기지를 출격할 때, "'''이것은 미나토가와야'''(=미나토가와 전투와 같은 승산 없는 싸움이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30][31] 종전 시의 8월 15일에는, 상술한 규슈 해역 항공전을 지휘하고 제1신뢰 공격대에 의한 공격을 지시한 제5항공함대 사령장관 해군 중장 우가키 마토메가 오키나와 방면으로 특공을 감행해 전사했지만, 그 당시의 일기 『전조록』에 "'''나 또한 구스노키 공의 정신으로 영구히 헌신할 곳이 있기를 기약한다. 1600명의 막료 집합, 작별 술잔을 나누었다. 이것으로 이 전조록의 페이지를 닫는다'''"라고 마무리하며, 미나토가와에 비유했음을 알 수 있다.[32] 전후, 도쿄 수교사에서 열린 해병 45기 급우회에서도, 도이 신지가 읊은 "우가키 마토메 중장과 17용사 국화수탑"에 대한 헌영 중에 "'''정충불후 미나토가와와 같네'''"라는 구절이 있어, 부하들에게서도 그렇게 여겨졌음을 엿볼 수 있다.

4. 2. 태평양 전쟁에서의 비유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은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와 같은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는 미나토강 전투에 비유되기도 했다. 1945년 3월 21일 규슈 해역 항공전에서 제1신뢰 벚꽃대와 제1신뢰 공격대가 미 해군 기동부대를 공격했으나 전멸했는데, 지휘관 노나카 고로 해군 소좌는 출격 전 "이것은 미나토가와야(=미나토가와 전투와 같은 승산 없는 싸움이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30][31]

1944년 6월 15일 아호 작전 때 521공의 "호부대" 역시 미 해군 기동부대 공격에 나섰으나 전멸했고, 비행대장 에구사 다카시게 해군 소좌는 출격 전 가족에게 "이번에는 미나토가와야"라고 말했다고 한다.[29]

종전 당일, 제5항공함대 사령장관 우가키 마토메 해군 중장은 오키나와 방면으로 특공을 감행하여 전사했는데, 당시 일기 『전조록』에 "나 또한 구스노키 공의 정신으로 영구히 헌신할 곳이 있기를 기약한다"라고 적어 미나토강 전투에 비유했음을 알 수 있다.[32]

참조

[1] 서적 The Nobility of Failure https://archive.org/[...] Holt, Rinehart and Winston
[2]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3]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MacMillan Publishing Co., Inc.
[5] 서적 Legends of the Samurai Overlook Duckworth
[6] 서적 The Nobility of Failure Holt, Rinehart and Winston
[7] 문서 『太平記』巻十六「新田殿被引兵庫事」
[8] 문서 『太平記』巻十六「正成下向兵庫事」
[9] 문서 峰岸・109 頁
[10] 문서 峰岸・109-110頁
[11] 문서 『太平記』巻十六「兵庫海陸寄手事」
[12] 문서 奥富・191頁
[13] 문서 奥富・102頁
[14] 문서 『太平記』巻十六「本間孫四郎遠矢事」
[15] 문서 『太平記』巻十六「経嶋合戦事」
[16] 문서 峰岸・218頁
[17] 문서 奥富・193頁
[18] 문서 山本・218頁
[19] 문서 山本・219頁
[20] 문서 『太平記』巻十六「正成兄弟討死事」
[21] 문서 『太平記』巻十六「新田殿湊河合戦事」
[22] 문서 土屋光逸作品集 Meiji to shin-hanga,watercolours to woodblocks 近江ギャラリー出版
[23] 문서 奥富・194頁
[24] 문서 『太平記』巻十六「小山田太郎高家刈青麦事」
[25] 문서 『太平記』巻十六「聖主又臨幸山門事」
[26] 문서 『梅松論』による。『太平記』の19日は明らかな誤り。
[27] 문서 山本・217頁
[28] 서적 楠木正成と吉田松陰~正成になりたかった松陰~ 湊川神社
[29] 서적 二つの時代―夫は"艦爆の神様"と言われて― 光人社
[30] 서적 海軍神雷部隊
[31] 서적 神雷部隊始末記
[32] 서적 日本海軍の驕り症候群 上 中央公論社
[33] 서적 The Nobility of Failure https://archive.org/[...] Holt, Rinehart and Win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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